맥주별장의 모험 닷쿠 & 다카치
니시자와 야스히코 지음, 이연승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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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닷쿠와 다카치, 보안 선배와 우사코 등 4총사는 R고원으로 떠난 여행길에서 기이한 별장과 마주합니다. 먼지 하나 없을 정도로 깔끔한 내부에는 세간은 물론 사람의 흔적도 남아있지 않았고, 그저 싱글침대와 냉장고 속의 96개의 맥주캔이 전부였습니다. 4총사는 무단침입의 죄도 잊은 채 냉장고 속의 맥주를 마시며 별장의 정체와 용도에 대해 밤샘 논쟁을 벌입니다.

다음날 저녁, 집으로 돌아온 4총사는 맥주와 수면부족으로 파김치가 된 몸을 이끌고 다시 보안 선배의 집에 모여 끝장 토론에 들어갑니다. 아무도 반박 못할 정도로 명쾌한 다카치의 추론 덕분에 4총사의 논쟁은 마무리 될 뻔 했지만, 마지막에 이르러 닷쿠는 모두의 가설을 무너뜨리고 전혀 새로운 결론에 도달합니다.

 

맥주별장의 모험에 앞서 니시자와 야스히코의 국내 출간작 3편을 모두 읽었고, 매 작품마다 기발한 설정과 이야기를 만날 수 있어서 작가의 뇌구조에 흥미를 느껴왔지만, “독자 여러분께서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때 어떤 표정을 지으실지 정말이지 궁금합니다.”라는 출판사의 소개글이 괜한 엄살(?)이나 과장이 아니라는 것을 절실히 공감할 정도로 맥주별장의 모험은 흔히 보기 어려운 실험적이고 파격적인 작품이었습니다.

 

줄거리에서도 엿볼 수 있듯 맥주별장의 모험은 전형적인 안락의자 탐정물입니다. 사건 현장엔 가보지도 않고 관계자의 진술도 듣지 않은 채 단지 추론만으로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는 장르를 뜻하는데, 이 작품에서 4총사에게 주어진 단서는 그저 맥주와 침대만 덩그러니 놓여있는 기괴한 별장이라는 공간뿐이고, 그러다 보니 논쟁은 사건의 진상과는 전혀 무관하게 100% 상상에 의해서만 전개됩니다.

불륜 남녀의 밀회 장소라는 주장부터 포르노 도촬을 위한 세팅, 아이를 유괴하거나 벌주기 위한 준비, 친구를 놀라게 할 깜짝쇼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상상 가능한 모든 스토리가 만취한 안락의자 탐정들에 의해 제기됩니다. “진상 따위 아무래도 좋아.”, “실제로 어떻게 됐는지 같은 건 별로 알고 싶지도 않아.”라는, 독자들을 당황하게 만드는 멘트들과 함께 말입니다.
말하자면, 무슨 사건인지, 사건이 맞긴 맞는지 여부와 관계없이 4총사가 벌이는 일종의 극단적인 논리 대결이 메인스토리입니다. 안락의자 탐정물을 그리 선호하지 않는 취향 때문에 쉽게 몰입하긴 어려웠지만, 4총사가 돌아가며 내놓는 가설과 논리의 맹점을 찾아내기 위해 머리에 쥐가 나도록 한 글자 한 글자 유의해가며 읽는 것은 색다른 재미이긴 했습니다.

 

읽으면서, 또 다 읽고 난 후에도 도대체 작가는 왜 이런 작품을 쓸 생각을 했을까, 라는 의문을 품었는데, 후반부의 작가의 말에 그 대답이 나와 있습니다. 니시자와 야스히코는 안락의자 탐정소설은 현재 진행 중인 범죄사건을 다루는 것은 기술적으로 무리다.”라는 명제에 도전하고 싶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즉 스스로 무모할지도 모른다고 여기면서도 논리의 극한까지 달려보기 위해 새로운 도전을 시도했던 것입니다. 이런 실험성과 파격성은 독자들의 호불호를 극단적으로 갈라놓을 수밖에 없는데, ‘맥주별장의 모험은 그 간극이 여느 작품보다 무척 클 것으로 보입니다. 끊임없이 가설을 제시하고 무너뜨리고 쌓아가는 과정을 즐기는 작품이라는 번역자의 설명에 눈길이 끌리는 독자에게는 희귀한 수작이 되겠지만, 보편적인 진범 찾기 미스터리를 즐기는 독자에게는 조금은 곤혹스런 책읽기가 될 것입니다.

 

대중적인 면에서 전작들만큼의 호응은 얻지 못할 수 있지만, ‘맥주별장의 모험은 니시자와 야스히코가 왜 () 본격의 귀재라 불리는지 그 이유를 제대로 보여준 작품임에 틀림없습니다. (헨 본격=독특하거나 특이함을 뜻하는 헨()과 본격미스터리의 합성어입니다)

옮긴이의 말에 따르면 니시자와 야스히코의 차기작 어린 양들의 성야4총사의 첫 만남과 당시 벌어진 충격적 사건을 다루고 있다고 합니다. 그들의 비기닝에는 어떤 비밀과 충격이 실려 있을지, , 어떤 새로움과 독특함으로 그 무렵이 묘사됐을지 벌써부터 궁금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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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계곡 모중석 스릴러 클럽 35
안드레아스 빙켈만 지음, 전은경 옮김 / 비채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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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천후로 뒤덮인 알프스의 지옥계곡 철제 다리에서 라우라 바이더가 추락사합니다. 추락 직전 아슬아슬하게 그녀의 손을 잡아챘던 산악구조대원 로만 예거의 뇌리엔 라우라의 공포에 질린 표정이 악몽처럼 새겨져있습니다. 라우라의 절친이었던 마라 란다우를 통해 그녀의 죽음이 단순한 자살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로만 예거는 라이텐바허 경감의 도움을 받아 사건의 진상에 다가갑니다.

라우라, 마라와 함께 등반을 즐기던 절친 그룹의 리키, 베른트, 아르민은 라우라의 죽음이 지난 여름 무리한 등반 도중 일어났던 모종의 사건과 연관 있음을 눈치 채지만 그녀를 짝사랑했던 베른트를 제외하곤 애써 자신들의 죄책감을 부정하려고 할 뿐입니다. 하지만 라우라를 죽음으로 몰고 간 실체는 그룹 모두를 위기로 몰고 갑니다. 그리고 적잖은 희생자가 등장한 후에야 라우라의 죽음의 진실이 세상에 드러납니다.

 

사라진 소녀들이후 두 번째로 만난 안드레아스 빙켈만의 작품입니다. 냉정하게 말하면 사라진 소녀들은 그리 매력적인 작품은 아니었습니다. 설정은 호기심을 일으켰지만, 캐릭터와 이야기 전개 모두 약간은 무리수를 둔 듯 보였기 때문인데, 그런 아쉬움들이 지옥계곡에서는 (전부는 아니지만) 꽤 많이 해소됐습니다.

 

마치 할리우드의 재난 블록버스터와 스릴러를 합쳐놓은 듯 이야기는 긴장감을 놓치지 않은 채 엄청난 속도로 달려갑니다. 악천후로 둘러싸인 지옥계곡을 오르내리는 장면과 후반부의 목숨을 건 추격 장면은 영상화를 염두에 두고 서술한 것처럼 뛰어난 비주얼을 자랑하는데 마치 눈앞에서 직접 목격하듯 리얼하게 묘사되어 저절로 손에 땀을 쥐게 했습니다.

이기심과 집착, 그리고 욕망으로 가득 찬 캐릭터들에 대한 표현 역시 매력적이었습니다. 특히 주요 인물들과 그 가족들 하나하나에게 부여된 불행한 과거사와 피치 못할 사연들은 그들이 겪고 있거나 곧 겪게 될 비극적 운명의 예고편처럼 독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합니다. 아마 이런 디테일한 심리 묘사가 이 작품의 가장 큰 미덕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그 외에도, 연이어 발생하는 참혹한 살인은 비교적 노골적이고 상세하게 그려지는데,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반응만을 노린 꼼수가 아니라 가해자의 증오심과 희생자의 공포심을 극대화하기 위해 적절하게 구사된 묘사들이었습니다.

 

이런 디테일한 묘사들 덕분에 빙켈만의 전작에서 느꼈던 아쉬움이 적잖이 해소되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비슷한 종류의 아쉬움이 남은 것도 사실입니다. 가장 큰 점은 범인의 캐릭터와 범행 동기입니다. 라우라를 죽음으로 몰고 간 실체는 초반부터 독자에게 노출됩니다. 현재 이야기와 교차로 편집된 챕터 속에 미지의 인물이 등장하는데, 그가 어떻게 라우라의 삶에 끼어들게 됐고, 왜 살인마가 됐는지 조금씩 드러나게 되지만, 그 부분에서 설득력과 개연성을 완벽하게 구현하지 못한 느낌이었습니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구체적으로는 언급하기 어렵지만, 마치 그 안에 있던 사람 중 한 명이 범인임이 분명한 밀실살인사건으로 설정해놓곤 나중에 가서 실은 범인은 밖에 있었다라는 고백을 들은 느낌이랄까요? 또는, 나름 범인과 범행동기에 대해 열심히 단서를 모아가며 쫓아갔더니 애초 그런 노력이 필요 없었을 만큼 뜬금없는 범인과 범행동기를 발견한 느낌이랄까요? 물론 작가가 누가 범인이냐?’보다는 ?’ 쪽에 더 주력했다는 점은 읽는 내내 이해됐지만, 그러기엔 잘 깔아놓은 설정들이 무척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런 느낌은 사라진 소녀들에서도 비슷하게 받았었기에 아쉬움이 더 컸습니다.

 

훌륭한 설정과 뛰어난 심리 묘사, 재미와 긴장을 극대화시킨 이야기 등 페이지 터너로서의 장점이 많은 작품인 것은 분명하지만, 동시에 그런 장점을 가려버린 결정적인 아쉬움이 더 크게 느껴진 작품입니다. 뛰어난 필력을 자랑하는 작가인 만큼 그의 신간이라면 안 읽고는 못 지나갈 것 같고, 이왕이면 다음 작품에서는 독자들의 뒤통수를 칠만한 범인과 범행동기, 누가 범인이냐?’?’를 함께 만끽할 수 있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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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살자들 블루문클럽 Blue Moon Club
유시 아들레르 올센 지음, 김성훈 옮김 / 살림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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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결사건 전담반 칼 뫼르크와 아사드는 20년도 훌쩍 넘은, 그것도 이미 범인이 자수한 사건을 배당받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오누이가 참혹하게 살해당한 이 사건에 주목합니다. 과거 홀로 자수했던 범인 외에 공범이 있었을 가능성은 물론 현재 덴마크 최상류층인 인물들이 이 사건에 깊이 연관됐음을 간파했기 때문입니다.

과거 기숙학교 시절, ‘51녀 패거리로 불리며 온갖 범죄를 일삼았던 일당에 주목한 칼과 아사드는 그중 홍일점인 키미의 행방을 쫓는데, 그 과정에서 결정적인 물증을 찾아냄으로써 키미와 기숙학교 패거리가 오누이 살해사건 외에 다수의 폭행, 실종, 살인에 연루됐음을 확신합니다. 또한 최근 나머지 패거리가 자취를 감춘 키미를 찾는 데 혈안이 돼있다는 사실도 알게 됩니다. 한편으론 키미의 행방을 쫓고, 다른 한편으론 기숙학교 패거리의 범행을 입증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던 칼과 아사드는 전혀 생각지 못한 곳에서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집니다.

 

자비를 구하지 않는 여자에 이은 특별수사반 Q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으로, 경찰청 지하의 미결사건 전담반 사무실에 쳐박힌 채 쾌락살인과 폭행을 즐기는 도살자들의 과거 만행을 밝혀내기 위해 분투하는 칼 뫼르크와 아사드 콤비의 끈질긴 탐문과 수사가 600페이지 가까이 펼쳐집니다. 이야기 시작과 동시에 칼과 아사드가 쫓아야 할 악당들이 공개되고, 악당들 사이의 심상치 않은 기류까지 죄다 언급돼서 문득 남은 몇 백 페이지를 무슨 이야기로 채우려고?”라는 의문이 들기도 했는데, 총평하자면 중반 정도까지는 약간의 지루함과 함께 곳곳에서 불필요한 사족들이 눈에 띄었지만, 이후부터는 오히려 속절없이 넘어가는 페이지가 아까울 만큼 이야기가 빠르고 팽팽하게 전개됐습니다.

 

키미를 포함한 기숙학교 패거리는 말하자면 쾌락을 추구하는 묻지마 폭력단입니다. 타인의 고통에서 쾌감을 느끼고, 아무 거리낌 없이 생명을 앗아간 뒤 술과 마약에 찌든 환락의 자축 파티를 여는 인물들입니다. 거기에다 부모까지 잘 만난 덕에 덴마크의 최상류층으로 살아가고 있으니 그들에게 죄의식이나 양심이란 개념은 개나 줘버릴 정도로 하찮은 것에 불과했습니다. 이들의 행각을 묘사하는데 있어 작가는 전혀 주저하지도, 돌려 표현하지도 않습니다. 때론 과하게 느껴지는 장면도 있지만 억지스럽거나 작위적으로 보이진 않습니다.

유일한 여자 멤버였던 키미는 현재 경찰과 패거리 양쪽 모두에게 쫓기는 인물이라 실질적으로 이야기의 중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를 공포 속에 몰아넣고 쾌감을 느끼고, 더 강한 폭력을 휘두르며 욕정을 느끼곤 했던 젊은 날의 키미는 이제껏 만나본 어떤 악당보다도 매력적인(?) 캐릭터입니다. 마지막까지 양파껍질처럼 하나둘씩 드러나는 그녀의 비밀스런 과거는 혐오의 대상이 되기도, 연민의 대상이 되기도 하면서 독자들의 주목을 독차지합니다.

 

그러다 보니 도살자들에서 몰입감을 최고조로 이끄는 부분은 칼과 아사드 콤비의 활약이 아니라 키미와 패거리의 과거사가 드러나는 대목입니다. 20년 전 이들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키미가 패거리와 결별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지, 현재 패거리가 혈안이 되어 키미를 찾는 목적은 무엇인지 등 중반 이후에 속속 밝혀지는 그들의 추악하거나 불행했던 과거사는 숨 돌릴 틈 없기 가쁘게 전개됩니다. 상대적으로 주인공인 칼과 아사드 콤비의 비중은 조연 정도로 많이 축소됐습니다. 물론 진실을 파헤치기 위한 두 사람의 노력에 적잖은 분량이 할애되긴 했지만, 엔딩에 이르기까지 이들의 활약이 수동적으로만 느껴진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비중도 비중이지만 메인 주인공인 칼 뫼르크에게 집중할 수 없었던 이유는 1편인 자비를 구하지 않는 여자에 등장했던 칼과 2편인 도살자들의 칼이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1편의 칼이 조금은 진지하고 이런저런 내상을 가진 묵직한 캐릭터였다면, ‘도살자들의 칼은 180도 다른, 어딘가 가볍고 수다스러운 캐릭터였습니다. 같은 출판사에서 출간한 시리즈물임에도 번역자가 달라 빚어진 결과일 수도 있겠지만, 이름만 같을 뿐 전혀 다른 인물로 보이는 칼 때문에 읽는 내내 혼란스럽기도 하고 짜증이 나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 눈에 거슬린 건 도살자들의 칼이 구사하는 천박한 말투와 경박한 행동입니다. 지랄, 개뿔, 미친놈, 빌어먹을, 싸가지 등 1편의 칼이라면 절대 쓰지 않았을 단어들이 수없이 등장하고, 독백의 경우는 더 심해서, ‘이 인간이 내가 무슨 치매라도 걸린 줄 아나?’, ‘저 주둥이를 저대로 두었다간 내가 제명에 못 죽지.’, ‘이러고도 형사라고, 쪽팔린 줄 알아야지.’ 등 캐릭터를 한없이 저급하게 만드는 문장들을 곳곳에서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어느 칼이 원작에 가까운지는 알 방법이 없지만, 적어도 1편에서 총격전 끝에 동료가 죽거나 반신불수가 된 모습을 지켜본 인물이라면, 또 좌천당하듯 경찰청 지하실로 내쫓긴 반골 캐릭터라면 이런 건달 수준의 칼은 아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여러 번 해봤습니다.

 

칼 뫼르크에 대한 아쉬움만 제외하면 도살자들은 별 다섯 개도 너끈한 작품입니다. 스스로 자초하긴 했지만 참혹 그 자체에 가까운 삶을 살아온 키미의 캐릭터 하나만으로도 도살자들600여 페이지를 단숨에 달리게 만드는 힘을 갖고 있습니다. 간혹 이해 안 되는 상황들도 눈에 띄지만 대세에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중반까지의 약간의 지루함만 견뎌낸다면 그 뒤를 지배하는 팽팽한 긴장감을 만끽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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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죄나무 1
존 그리샴 지음, 안종설 옮김 / 문학수첩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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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시시피 주 포드 카운티의 자산가 세스 후버드가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그는 일면식도 없던 변호사 제이크 브리건스에게 자필 유언장을 남겼는데, 문제는 1년 전 작성했던 유언장을 완전히 뒤집는 내용인데다 유족에겐 단 한 푼도 남기지 않은 반면, 가난한 흑인 가정부 레티에게 대부분의 유산을 물려주겠다고 밝힌 점이었습니다.

개망나니 같은 세스의 아들과 딸은 물론 주정뱅이에 사고뭉치인 레티의 남편까지 하이에나를 닮은 변호사들을 앞세워 이전투구 같은 유산 상속전에 뛰어들지만 정작 큰 유산을 받게 된 레티는 왜 세스가 그런 유언장을 남겼는지 전혀 알지 못합니다.

제이크는 과거 상관이었던 루시엔, 이혼전문 변호사 해리 렉스, 그리고 레티의 딸이자 변호사 지망생인 포티아와 함께 세스의 유언을 지키기 위해 전력을 다합니다. 합의를 종용하는 상대 변호사들의 제안을 뿌리치고 배심재판에 이른 제이크는 뜻밖의 증인들 때문에 패소 위기에 몰리는 한편, 세스의 새 유언장을 낳게 한 오래된 과거사를 알게 되면서 큰 충격에 빠집니다.

 

오래 전 일이지만, 초창기 작품인 그래서 그들은 바다로 갔다’, ‘의뢰인’, ‘펠리컨 브리프등이 연이어 대성공을 거두면서 법정물에 관한 한 존 그리샴을 능가할 작가는 없을 것이라고 단언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잘 만들어진 할리우드 블록버스터가 그러하듯 존 그리샴은 뛰어난 필력을 통해 독자를 짜릿한 롤러코스터에 탄 듯 흥분시킨 것은 물론 분노와 쾌감의 게이지를 극단적으로 지휘하며 마지막까지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게 만들곤 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최근에 읽은 작품들은 과거의 명성에 못 미친 경우가 많아서 안타까웠는데, 그래선지 속죄나무에 기대가 남달랐던 게 사실입니다.

 

속죄나무의 전편에 해당하는 타임 투 킬은 책으로도 영화로도 만나보지 못했지만, 주인공 제이크 브리건스의 당시 활약을 쉽게 짐작할 수 있도록 이 작품 곳곳에 상세히 소개하고 있습니다. ‘타임 투 킬에서 딸을 강간한 백인남성들을 살해한 흑인을 변호했던 제이크는 세스 후버드의 유언장을 둘러싼 사건을 맡게 되면서 다시 한 번 흑백 인종의 전쟁터나 다름없는 미시시피를 무대로 법의 전쟁을 치릅니다.

 

1~2권 합쳐 800여 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에 걸맞게 수많은 인물과 사건이 등장합니다. 특히 제이크를 포함하여 10여 명의 다양한 변호사가 등장하는데, 말 그대로 변호사라는 직업의 대표 캐릭터를 총망라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성격과 스타일 모두 극단적인 대비를 보여줍니다. 또한 유언장과 연관 있는 인물들 역시 탐욕, 증오, 연민, 용서, 화해 등 다양한 감정들을 품고 있어서 변호사들 못잖게 팽팽한 긴장감을 유발합니다. 이런 인물들을 앞세운 존 그리샴은 못된 백인 vs 착한 흑인또는 탐욕스런 흑인 vs 정의를 수호하는 백인등 다양한 갈등 관계를 포진시켜 독자들의 감정 이입을 자연스럽게 이끌어냅니다.

 

이야기의 뿌리는 미국 남부의 오랜 흑백 갈등이지만, 존 그리샴은 이 갈등 자체를 전면에 내세우진 않습니다. 오히려 보일 듯 말 듯 깔아놓은 뒤 잊을 만하면 한 번씩 툭툭 던지곤 합니다. , ‘인간의 탐욕이라는 핵심 주제를 위해 달려가면서 간간이 극성 강화용 양념으로 흑백 갈등을 활용하곤 하는데, 말하자면, 탐욕에 관한 이야기가 살짝 지루해질 무렵 독자의 입맛을 당기는 양념(흑백 갈등을 환기시키는 사건들)을 뿌려댐으로써 재미와 긴장감을 되살아나게 하고 페이지를 넘기는 힘을 재가동시킨다는 뜻입니다.

물론 엔딩에서 밝혀지는 세스의 유언장의 진실은 오랜 시간에 걸쳐 쌓여온 흑백 갈등과 탐욕이라는 두 코드를 모두 포함하고 있지만 존 그리샴은 800여 페이지의 분량 내내 어느 한쪽으로도 치우치지 않으며 두 코드의 균형을 잘 유지했고, 덕분에 도식적이고 예측 가능한 스토리를 넘어 인간의 본성을 파헤치는 대서사에 가까운 법정물을 만들어냈습니다.

 

이런 여러 가지 미덕과 장점에도 불구하고 만점을 줄 수 없었던 아쉬움도 꽤 컸는데, 우선은 스토리 대비 분량의 문제입니다. 사족에 가까운 캐릭터와 그들의 이야기가 적지 않았고, 그 부분들은 예외 없이 지루함을 선사하곤 했습니다. 알맹이만으로 꽉 차게 압축해서 5~600 페이지 분량의 한 권으로 압축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래부터는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는 모든 진실이 드러나는 엔딩의 허망함(?)입니다. 배심원 최종 심의 가운데 불쑥 이런 대사가 나옵니다. “갑자기 수십 년 전의 역사 이야기가 나와서 조금 당혹스럽기는 하지만...”

그리고 이어지는 진술은 제이크가 800여 페이지에 걸쳐 들였던 모든 수고를 한순간에 허망하게 만듭니다. 즉 느닷없이 튀어나온 과거의 사건 하나 때문에 이야기가 급물살을 타면서 종결된다는 뜻입니다. 존 그리샴이 초반부터 떡밥처럼 몇 차례 언급하긴 했지만, 설마 그것이 마지막 반전으로 활용되진 않겠지, 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에 엔딩에서 튀어나온 수십 년 전의 역사 이야기는 아쉽고 또 아쉬운 부분이었습니다.

 

가장 최근에 읽은 존 그리샴의 작품이 소송사냥꾼이었는데, 그때 쓴 서평을 찾아 읽어보니 꽤나 혹평에 가까운 내용이었습니다. 전성기의 존 그리샴에 대한 그리움과 갈증도 서평 안에 포함되어 있었는데, ‘속죄나무가 일정 부분 그 그리움과 갈증을 해소시켜주긴 했지만 위에서 언급한 두 가지 아쉬움 때문에 전성기의 존 그리샴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했다는 생각입니다.

물론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문장들과 사실감 넘치는 캐릭터 등 존 그리샴의 내공은 여러 번 감탄할 정도로 뛰어났고, 방대한 분량임에도 거의 오타가 없었던 완벽한 번역 덕분에 즐거운 책읽기의 시간이 됐습니다. 다만 아무래도 남은 아쉬움들은 존 그리샴의 초창기 작품들을 다시 한 번 읽으면서 달래봐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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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블 - 두 개의 시체, 두 명의 살인자
정해연 지음 / 사막여우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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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나절 만에 완독할 수 있을 정도로 속도감이 무척 빠른 작품입니다. ‘두 개의 시체, 두 명의 살인자라는 부제가 달려있는데, 한 명의 살인자는 초반에 공개되고, 나머지 한 명 역시 달리 눈 돌릴 필요 없이 금세 알아챌 수 있을 정도로 심플한 구조지만, 이 작품은 누가 살인자?’라는 것보다는 ?’ 또는 어떻게?’에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에 일반적인 진범 찾기 미스터리와는 차별화된 재미를 전해줍니다.

 

더블의 외양은 형사 대 범인이라는 진범 찾기의 형식을 띄고 있지만, 메인 스토리는 두 명의 살인자 간의 두뇌게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특히 두 살인자는 스타일은 달라도 그 뿌리는 비슷한 사이코패스로 설정됐는데, A는 자신이 저지른 살인을 B에게 뒤집어씌우기 위해 주도면밀한 계획을 세우고, BA의 계획을 깨달은 뒤 진실(?)을 밝히기 위해 목숨을 건 싸움을 벌이게 됩니다.

 

개인적으로 영화 추격자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사이코패스의 살인 행각 지켜보기이상의 어떤 느낌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소재도, 엔딩도 단순히 보여주기를 넘어서지 못했고, 결국 크레딧이 올라갈 무렵에는 불쾌한 느낌마저 받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하지만 더블의 경우, 사이코패스의 잔혹한 연쇄살인 이야기에 그치지 않고 사이코패스의 본질에 관해 깊이 고민한 흔적이 곳곳에서 엿보였고, ‘진실은 무엇이고, 누가 범인인가?’라는 도식적인 결론 대신 잔혹하면서도 독특한 엔딩을 선택함으로써 비슷한 스타일의 작품들과는 전혀 다른 여운을 남깁니다.

 

다만, 문장이나 구성, 캐릭터 설정 등에서 아직은 내공이 부족해 보이는 아마추어적 인상을 자주 받았는데, 그 가운데 아쉬운 점을 두어 가지만 꼽아보면, 우선 안이한 구성 때문에 곳곳에서 긴장감을 떨어뜨린 점입니다. 후반에 반전의 맛을 살릴 수 있는 결정적인 설정이 한 가지 있는데, 웬만한 독자라면 이 설정을 진작 눈치 챌 수 있게끔 이야기가 구성돼있습니다. 말하자면 셀프 스포일러라고 할까요?

캐릭터 설정도 쉽고 편하게 간 듯 보였는데, 가령 강남에 살면서 세련된 헤어와 의상은 물론 클래식을 즐겨듣는 사이코패스의 설정은 클리셰를 넘어 오히려 웃음을 자아냈습니다. 또 아직 사이코패스로서 대단한 이력을 쌓은 것도 아닌 인물이 낯선 곳에서 발견한 시신을 보고 놀람이나 충격보다 살인범에 대한 존경심을 먼저 떠올리는 것은 미드 덱스터의 주인공이 아닌 다음에야 솔직히 오버로밖에 안 보였습니다. (실제 덱스터에 이런 장면이 있습니다)

한 가지만 덧붙이면, 꽤 똑똑하고 철저한 사이코패스로 설정됐음에도 불구하고 일반인조차 저지르지 않을 것 같은 실수를 저지르기도 하고, 반대로 아무 근거도 없이 그저 상황만으로 상대방을 용의자로 몰아가는 장면도 있는데, 좀더 꼼꼼한 구성과 디테일한 설정으로 무장했다면 훨씬 더 고급스런 질감의 이야기가 나올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다른 독자의 서평을 보니 정해연의 전공이 로맨스였다고 하는데 더블의 주인공들을 등장시킨 후속작(몇 년 후의 이야기든 프리퀄이나 비기닝이든)도 좋고 전혀 다른 소재의 이야기라도 괜찮으니 장르물 쪽에서 제대로 필력을 발휘한다면 아마 많은 독자들의 기대를 모을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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