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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테의 신곡 살인
아르노 들랄랑드 지음, 권수연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7년 4월
평점 :
품절
바람둥이, 건달, 사기꾼, 칼잡이 등 화려한 이력을 지닌데다 남미의 꽃을 단춧구멍에 꼽고 다녀 흑란이라는 별명을 지닌 피에트로는 베네치아를 강타한 잔혹한 살인사건 수사를 위해 특별사면을 받고 감옥을 나옵니다. 그리고 수사 시작 직후 그동안 벌어진 연쇄살인이 단테의 ‘신곡’ 중 지옥편을 본떠 자행됐다는 사실을 눈치 챕니다. 배교, 육욕, 식탐, 낭비, 분노, 이단, 폭력, 분열, 배반 등 9옥(獄)의 테마에 따라 희생자들이 속출하는데, 고급 창녀에서부터 베네치아의 핵심 정치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계층에 걸쳐있습니다.
자신을 감옥에서 꺼내준 유력 정치인들의 도움을 받아 수사를 벌이던 피에트로는 일련의 사건들이 단순한 형사 사건도, 신의 계시를 받은 광신도 집단의 소행도 아닌 베네치아를 혼란에 빠뜨리고 궁극적으로는 정권을 무너뜨리려는 반역의 일환임을 파악합니다. 하지만 일 디아볼로 또는 키마이라로 지칭되는 적의 수장을 쫓던 중 피에트로는 죽음의 문턱까지 내몰리기도 하고, 심지어 연쇄살인범으로 오인받기도 합니다.
단테의 ‘신곡’을 소재로 삼거나 단테 본인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미스터리는 은근히 독자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힘이 있습니다. 단테 혹은 단테의 ‘신곡’이 가진 힘일 수도 있고,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인물이나 유산을 픽션으로 풀어내는 기법 자체의 힘일 수도 있습니다.
‘단테의 신곡 살인’은 분량 자체가 600페이지에 육박하는 데다 일단 손에 쥐자마자 적잖은 부담감이 느껴지는 두툼한 하드커버 제본이고, (1756년 베네치아를 무대로 설정했고, 단테의 ‘신곡’을 소재로 삼은 것이 주된 이유겠지만) 어휘나 문장이 무척 예스럽고 고전적이어서 완독하는데 여러 날이 걸렸습니다. 이야기 구조는 의외로 심플한데, 한 줄로 요약하자면 ‘베네치아 공화국을 전복시키려는 세력들과 그에 맞선 주인공 피에트로의 대결’입니다.
쉽고 가벼운 현대의 문장들에 익숙해진 탓인지 고전적인 문장이 주는 생경함이 처음엔 어색하고 낯설게 느껴졌지만, 단어 하나하나를 곱씹어 읽다 보니 어느 새 그 나름의 독특한 맛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예를 들자면...
“그녀는 쾌락의 수식을 빌려 희극을 연출함으로써 자신의 번민을 안전한 곳으로 감춘 뒤, 그 번민에 권태와 도피의 옷을 입히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두 세 번은 되읽어야 대략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는 문장들이 많은데, 가끔은 피곤하게 느껴질 때도 있었지만, 고전의 맛이라고 생각하면서 읽다 보니 금세 적응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단테의 ‘신곡’을 모방하여 벌어진 끔찍한 사건 현장의 묘사, 1756년 베네치아의 화려한 풍광과 곤돌라를 비롯한 수로와 뒷골목의 풍경 묘사, 그리고 자유분방하고 외설스럽기까지 한 당시의 풍습이나 주인공 피에트로를 비롯한 다양한 계층의 남녀 캐릭터들의 묘사는 현대물에서는 보기 힘든 현란한 어휘들과 리듬감으로 가득 차 있어서 이야기 전개와 관계없이 흥미로운 책읽기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단테의 신곡 살인’은 방대한 서사와 분량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 면에서 아쉬움을 남겼는데, 우선은 ‘나무는 많은데, 정작 숲이 허술하다’는 점이었습니다. 단테의 ‘신곡’, 연쇄살인, 애절한 멜로, 비밀과 거짓말, 피아가 구분 안 되는 은밀한 캐릭터 등 개별적인 요소들은 매력적으로 포진되어 있는데, 정작 가장 중요한 뼈대 – 악당들의 목표, 주인공과의 대결 과정 등은 읽는 도중 몇 번씩 맥을 빠지게 할 만큼 허술하게 진행됩니다.
이 부분을 상세하게 언급하면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조심스럽지만, 굳이 비유하자면, ‘단테의 신곡’으로 시작해서 ‘헐리우드 액션영화’로 마무리된 느낌이랄까요? 결국 선과 악의 대결이 이런 식으로 전개될 거라면 ‘단테의 신곡’이 반드시 필요했을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초반부에 긴장감 넘치게 묘사된 ‘단테의 신곡을 모방한 연쇄살인’은 존재감을 잃었습니다.
더불어, 피에트로의 수사는 몇 번의 결정적 계기를 통해 악의 실체를 파악해 나가는데, 그 과정이 안이하고 쉽게 처리된 점도 아쉬운 대목이었습니다. 목격자와 증인은 필요에 따라 적재적시에 나타나주고, 악당들의 일거수일투족에 대한 상세한 정보 역시 ‘친절하게’ 피에트로의 손에 전달됩니다. 고전의 맛을 느끼게 해준 훌륭한 번역 덕분에 낯설면서도 흥미로운 책읽기를 경험했지만, 미스터리의 완성도 면에서는 이런저런 아쉬움이 많이 남는 작품이었습니다.
이런 훌륭한 필력을 지닌 작가가 헐리우드 액션영화의 공식이나 스케일 대신 차라리 18세기 베네치아의 소시오패스 이야기를 다뤘다면 어땠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문득, 얼음장 같은 연쇄살인범이 등장한 영화 ‘세븐’이 떠올랐기 때문인데, 그 작품에도 단테의 신곡과 쵸서의 캔터베리 서사시가 연쇄살인의 모티브로 등장했습니다. 매력적인 주인공 피에트로가 단테의 ‘신곡’을 모방하며 연쇄살인을 저지르는 베네치아의 소시오패스 일 디아볼로 또는 키마이라를 쫓는 이야기였다면 좀더 흥미와 완성도를 갖춘 작품이 나오지 않았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