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과 고전부 시리즈
요네자와 호노부 지음, 권영주 옮김 / 엘릭시르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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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해도 되는 일은 안 한다.”는 좌우명답게 애늙은이 같은 무심한 캐릭터인 오레키 호타로, 명가의 딸이며 우수한 성적을 자랑하지만 어딘가 신비함을 지닌 소녀 지탄다 에루, 호타로의 친구이자 어디로 튈지 모르는 특이한 박학다식 정보창고 후쿠베 사토시, 후쿠베를 좋아하는 조금은 다혈질인 도서위원 여학생 이바라 마야카 등 이런저런 사연으로 폐부(閉部) 직전의 고전부에 모인 된 4명의 가미야마 고교 1년생들.

빙과33년 전인 1967, 가미야마 고교에서 일어났던 사건을 추적하는 고전부 4인방의 활약이 주된 내용입니다. 이런저런 일에 끼어드는 것을 싫어하면서도 본능에 가까운 뛰어난 추리력을 지닌 오레키는 당시 사건의 중심에 있던 외삼촌의 행적을 알고 싶어 하는 지탄다에게 부탁을 받곤 나머지 고전부 멤버들과 함께 진실 찾기에 나섭니다.

 

학원 청춘 미스터리는 가볍거나 치기 어린 애들 이야기라는 편견은 버린 지 오래지만, 매번 새로운 학원 청춘 미스터리 작품을 집어들 때마다 여전히 주저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빙과역시 서너 번을 들었다 놓았다를 반복했던 작품인데, 구로타케 요의 그리고 숙청의 문을처럼 피비린내라도 진동하거나 니시자와 야스히코의 그녀가 죽은 밤처럼 맥주를 즐기는 대학생이라도 등장한다면 모를까, 왠지 달달하긴 해도 미성숙해 보이는 고1들의 고전부 시리즈는 정말 쉽게 손이 가지 않았습니다. 책꽂이에 꽂힌 빙과를 보며 늘 숙제처럼 부담감을 갖고 있었는데, 긴 연휴 덕분에 작심하고 밀린 숙제 하듯 빙과를 꺼내 읽었습니다.

 

고백하자면, 기대감이 크지 않았던 탓인지 의외로 재미있고 유쾌한 책읽기가 됐습니다. 오레키의 시니컬한 태도는 기분 나쁘지 않은 매력을 지니고 있고, (해설을 보고 동감한 부분이지만) 어딘가 배배 꼬인 듯한 셜록 홈즈의 천재성까지 엿보여 고전부 멤버들뿐 아니라 독자들에게도 어필할 수 있는 폼 나는 주인공입니다. 그런 오레키에게 의지하는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지탄다의 청초함도, 투닥거리면서도 이야기의 균형을 잡아주는 후쿠베와 이바라의 통통 튀는 건강함도 모두 고전부 이야기가 시리즈로 이어지게끔 만들어준 매력적인 캐릭터들입니다.

 

4인방이 고전부에 합류하는 계기가 된 초반 에피소드들은 평범한 일상 미스터리에 불과하고, 메인 사건이라는 것도 피 한 방울 등장하지 않는 1’다운 이야기지만, 이상하게 웃음과 호기심, 적절한 긴장감을 끌어내는 힘이 있었습니다. 이런 평범함과 1’다운 메인 사건 때문에 실망감을 느낀 서평들을 많이 접할 수 있었는데, 제 경우는 오히려 그 또래에 걸맞는 리얼한 에피소드들이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미야베 미유키의 솔로몬의 위증이 굉장히 깊은 인상을 남겨줬음에도 불구하고 마지막까지 이 또래 아이들의 이야기가 맞나?”라는 의문을 갖게 했던 것에 비하면 빙과는 캐릭터와 에피소드 모두 현실감 있게 설정됐다는 뜻입니다.

 

빙과는 그 또래에 어울리는 미스터리뿐 아니라 파릇파릇한 성장기를 들여다볼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안 해도 되는 일은 안 한다는 좌우명 때문에 후쿠베에게 회색이라 불리던 오레키는 고전부에서 만난 의외의 친구들 덕분에 이런저런 일에 참견하기 시작하면서 자신이 정해놓은 규범에서 벗어나 장밋빛으로 삶의 색을 변화시키며 성장합니다. 다른 멤버들 역시 고전부 활동을 통해 조금씩 변화를 도모하곤 하는데, 앞으로 이어질 시리즈에서 어떤 성장과 변화를 겪을지 무척 궁금해지기도 했습니다.

 

33년 전의 진실 찾기 미스터리는 뭐랄까... 좀 부풀려 이야기하자면 억지스럽지 않은 경쾌한 서술트릭? 또는 해설에 언급된 것처럼, 문헌에 얽힌 비밀을 푸는 비블리오 미스터리? 아무튼, 사소해 보이는 단서들을 통해 가설을 세우고 추론을 거듭하면서 적잖은 즐거움과 의외성, 때론 독자들에게 같이 한번 풀어보시지?”라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기대가 크지 않았기에 만족감을 느낀 작품이었고, 당연히 이후의 고전부 시리즈에도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게 됐습니다. ‘빙과를 포함하여 다섯 편이 일본에서 출간됐고 그중 세 편이 국내에 소개됐는데, 작가의 말대로라면 오레키가 졸업하기 전까지는 시리즈가 계속 이어질 예정이라니 앞으로 이어질 고전부의 유쾌한 이야기들을 계속 기대해볼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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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 흩날리는 밤 가나리야 마스터 시리즈
기타모리 고 지음, 김미림 옮김 / 피니스아프리카에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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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2013) 3월에 기타모리 고의 꽃 아래 봄에 죽기를을 읽으면서 좀처럼 맛보기 힘든 묘한 고요함과 아스라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수록된 여섯 개의 단편이 다소 호불호가 갈리긴 했어도 표제작인 꽃 아래 봄에 죽기를과 마지막 수록작 물고기의 교제는 제목만큼이나 애틋하고 마음을 따뜻하게 만드는 수작이었습니다.

더불어 가나리야라는 아담한 맥주 바와 그곳의 주인장 구도 데쓰야의 캐릭터 덕분에 , 나에게도 그런 아늑한 아지트 같은 곳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상대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며 아쉬워하기도 했습니다.

 

그 좋은 기억이 아직도 잔잔히 남아있는데, 1년 만에 벚꽃 흩날리는 밤이라는 제목으로 후속작이 출간됐다는 소식에 그때의 묘한 고요함과 아스라함을 다시 한 번 만끽할 수 있다는 기대감이 몰려왔고, 괜히 마음이 들뜨고 기분 좋을 만큼의 미열까지 느낄 수 있었습니다. ‘꽃 아래 봄에 죽기를의 표지를 좌우로 반전시킨 듯한 디자인과 수록된 다섯 편의 소제목을 보면서 마치 너무나 먹고 싶지만 그 예쁜 모양을 무너뜨리기 싫은 케이크를 눈앞에 둔 듯 설렌 마음으로 페이지를 넘겨 첫 작품부터 읽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기대가 너무 컸던 걸까요? 1년 만에 다시 만난 맥주 바 가나리야와 주인장 구도 데쓰야는 외양은 그대로였지만 왠지 조금은 속세에 물든 느낌이랄까? 아니면 은밀하게 숨겨놓고 혼자 즐기고 싶었던 단골집이 사람들의 입을 탄 덕분에 고유의 향을 잃고 북적거리는 맛집으로 전락한 느낌이랄까? 딱히 정리하긴 힘들지만, 분명 예전의 묘한 고요함과 아스라함은 찾아보기 쉽지 않았습니다.

모든 수록작마다 낯선(?) 손님들로 가득했고, 그들의 대화는 왠지 수다스럽게 들렸으며, 그들의 입으로 전해지는 에피소드들은 어딘가 작위적인 냄새가 강하게 풍겼습니다. 사람의 인연을 억지로 맺어주는 듯한 ‘15주년’, 지나친 비약 때문에 작가가 의도했던 애틋한 정서가 제대로 살지 못한 벚꽃 흩날리는 밤’, 풍자인지 판타지인지 구분할 수 없던 개의 통보등 앞의 세 편은 구도 데쓰야의 맥주 맛과 요리 솜씨 외에는 대체로 아쉬움과 실망만 남겨줬습니다.

 

그나마 뒤의 두 편인 나그네의 진실약속이 다소 기타모리 고의 정서를 대변한 듯한 작품들이었는데, ‘꽃 아래 봄에 죽기를에 실린 작품들이 미스터리가 전개되는 와중에 불쑥 눈가를 붉게 만드는 이야기였다면, 이 두 작품은 정통 미스터리에 가까운, 말하자면 건조한 느낌이 훨씬 더 강했습니다. 물론 독특한 전개와 예상치 못한 반전 덕분에 흥미롭게 읽히긴 했지만, 적어도 어딘가 한 곳쯤에서 진한 애틋함이 솟아나 눈가를 붉게 만들어주기를 기대했던 바람은 끝내 충족되지 못했습니다.

 

단편집의 특성 상 모든 수록작에게 호평을 줄 수는 없지만, 전작 꽃 아래 봄에 죽기를이 그랬던 것처럼 적어도 한두 편이라도 마음을 움직였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듭니다. 그랬다면, 이제 봄은 다 가버렸고 벚꽃 역시 흔적도 없이 모두 사라졌지만, 짧지만 화려하고, 화려하지만 애틋하게 느껴졌던 그 순간을 잠시나마 조용히 음미할 수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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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성인간 한스 올라브 랄룸 범죄 스릴러 시리즈 2
한스 올라브 랄룸 지음, 손화수 옮김 / 책에이름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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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511, 자택에서 열린 정례 식사모임 중 급사한 막달론 셸데룹은 2차 대전 당시 저항군으로 활약했고, 종전 후 기업을 일으켜 억만 장자의 반열에 올랐으며, 세 번의 결혼을 통해 세 명의 자식을 낳았고, 그 과정에서 많은 이들에게 상처를 줘왔습니다. 그는 평생을 거만한 행성처럼 살아오면서 수많은 위성인간들에게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에는 막달론 셸데룹의 떡고물을 바라고 스스로 위성이 된 경우도 있었지만, 그의 폭압적인 권위와 독재 때문에 무력하고 속박된 삶을 강요당한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막달론 셸데룹이 급사한 현장에는 10명의 위성인간들이 함께 있었는데, 유산 문제에 예민한 두 명의 부인과 세 명의 자식, 저항군 시절의 인연으로 식사모임에 참석했던 벤델뵈 부부와 한스 헤를로프센, 그리고 여동생 막달레나 셸데룹과 젊은 여비서 쉬노베 옌센 등이 그들이고, 이들은 모두 유력한 용의자이자 증인 자격으로 크리스티안센 경감의 심문을 받게 됩니다.

 

파리인간의 뒤를 잇는 한스 올라브 랄룸의 크리스티안센-파트리시아 시리즈’ 2편입니다. 노르웨이 오슬로 경찰서의 콜비외른 크리스티안센 경감과 천재적인 장애소녀 파트리시아의 콤비 플레이가 유감없이 발휘된 작품으로, 전편과 마찬가지로 2차 대전이 남긴 씻을 수 없는 상흔과 그로부터 비롯된 굴절된 인간관계에 초점을 맞춘 연쇄살인 심리 스릴러입니다. 전작의 제목인 파리인간이 과거의 끔찍한 경험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고통스러운 삶을 이어가는 사람들을 지칭했다면, ‘위성인간은 어떤 이유로 한 사람의 주변을 평생 맴도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표지에 그려진 막달론 셸데룹의 초상은 기이한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한 손에 권총을 든 채 고도비만인 아랫배를 불쑥 내민 그는 거만하고 탐욕스러운 표정으로 세상을 하찮게 여기듯 내려다봅니다. 왜 하필 이 인물의 기분 나쁜 초상화를 표지로 삼았을까, 궁금했는데, 작품의 엔딩에 이르러 그 이유를 명확하게 알게 됐습니다.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나서 다시 한 번 표지를 바라보니 이만큼 적절한 표지도 없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막달론 셸데룹은 적어도 자신이 관여하는 세상에서는 이기를 자처했습니다. 그는 돈과 권력, 배려심 없는 횡포를 무기삼아 수많은 사람에게 상처를 줬으며, 언제나 자신을 드라마틱한 존재로 빛나게 만들기 위해 주변사람들을 다치게 했고, 종국엔 그런 타인들의 상처들을 발판삼아 부와 명예의 정점에 이르렀습니다.

막달론 셸데룹이 죽던 날, 함께 식사 자리에 있던 10명 대부분 오래 전부터 그에게 살의를 느껴왔지만, 그것을 실천에 옮기기는커녕 그로부터 도망치지도 않았습니다. 그를 중심으로 돌아야 하는 궤도에서 이탈하고 싶으면서도 이탈한 이후에 맞닥뜨려야 할 불안감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극단적이고 모순에 가까운 인물들의 심리를 작가는 탁월하게 묘사해냅니다. 무한한 이기심, 빗나간 애정, 들끓는 물욕, 제어되지 않는 복수심 등 최소한 한 가지 이상의 살인 동기를 지닌 다수의 용의자를 디테일하게 묘사함으로써 단순한 사건 해결 스토리를 넘어 긴장감 넘치는 심리 스릴러의 면모를 갖춘 것입니다. 그리고 몇 차례의 반전을 거쳐 도달한 엔딩 장면은 파트리시아가 예상한대로 인간이 어디까지 악독해질 수 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작가의 의도대로 독자들은 크리스티안센 경감과 파트리시아가 진범을 밝혀내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인간의 악의와 욕망이 자아낸 추악함의 바닥까지 들여다보게 되는 것입니다.

 

치밀한 심리 스릴러로서 여러 가지 장점을 지녔지만 동시에 몇 가지 아쉬움을 남기기도 했는데, 우선 구성 면에서 파리인간에 비해 입체감이 떨어지는 편입니다. 아무래도 크리스티안센 경감의 적극적인 행동이나 추리보다는 10명의 용의자를 상대로 한 반복되는 심문 내용이 많은 분량을 차지하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파리인간보다 위성인간을 먼저 읽게 된 독자에게는 의아함이 남을 소지가 많습니다. 본문 속에서 파리인간의 내용을 자주 언급했음에도 불구하고 크리스티안센 경감의 캐릭터라든가 천재소녀 파트리시아와의 관계 등은 파리인간의 사전 지식 없이는 납득하기 어려워 보였습니다.

파리인간에서 아쉽게 느꼈던 크리스티안센 경감과 파트리시아의 관계는 위성인간에서도 여전했는데, 크리스티안센 경감의 독자적인 탐문이나 추리는 전작에 비해 후퇴한 느낌이었고, 오히려 파트리시아에 대한 의존도가 더 높아진 느낌이었습니다. 특히 면박에 가까울 정도로 독설을 날리는 파트리시아를 보면서 크리스티안센 경감이 왜소하고 무능한 캐릭터처럼 그려진 점은 무척 아쉬웠습니다.

 

간결하고 쉬운 문장들 덕분에 페이지는 잘 넘어가지만, 초중반의 반복되는 심문이 조금은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다만 10명의 용의자와 과거-현재에 걸쳐있는 복잡한 살의를 감안하면 이 정도의 사전 포석은 독자 입장에선 감내할만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이 지루함을 견뎌내면 긴장감과 속도감이 급상승하는 중후반부를 만날 수 있습니다.

 

크리스티안센 경감과 파트리시아의 콤비 플레이가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지 모르겠지만, ‘파리인간의 서평 마지막에서도 언급했듯이 크리스티안센 경감이 조금은 더 능동적이고 창의적인 수사를 펼치는 멋진 주인공 캐릭터로 컴백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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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치 유어 데스 스토리콜렉터 22
루이즈 보스.마크 에드워즈 지음, 김창규 옮김 / 북로드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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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년 전, 불의의 사고로 연인을 잃고 단기간의 기억마저 상실했던 케이트. 이후 미국으로 떠나 바이러스 학자로서, 잭의 엄마로서 살아가던 그녀는 남편과의 불화로 인해 16년 만에 고국인 영국으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어느 날 어느 날 거리에서 16년 전 죽은 연인의 쌍둥이 형 폴을 만납니다. 그를 통해 의문의 편지 한 통을 받아든 케이트는 16년 전의 사고 뒤에 뭔가 감춰진 진실이 있다고 확신합니다. 또한 잃어버린 당시의 몇 달 간의 기억을 되찾고자 백방으로 노력합니다. 폴 역시 동생의 죽음과 관련된 문제였기에 케이트를 도와 위험한 여정에 뛰어듭니다. 하지만 그 시간, 치명적인 바이러스 개발에 몰두하고 있던 건트 박사는 수하인 존 샘슨에게 케이트와 폴의 제거를 지시합니다.

 

세상의 위기와 주인공들의 로맨스와 무자비한 킬러와 기억상실증이 잘 조합된 결과

 

역자 후기에 실린 문구인데, 이 작품을 한 줄로 깔끔하게 잘 요약한 표현입니다. 골치 아픈 트릭 대신 쉴 새 없는 긴장과 흥분을 선호하는 독자들이 좋아할만한, 즉 전형적인 헐리우드 엔터테인먼트 캐릭터와 설정들로 가득 찬 스피디한 스릴러이며, 단숨에 500여 페이지를 완주할 수 있는 쉽고 재미있는 이야기입니다. 가족의 안전, 인류를 위협하는 최첨단 무기, 살인을 통해 희열을 느끼는 킬러, 끊임없는 재난 속에서도 피어나는 아슬아슬한 로맨스 등 예측불허의 롤러코스터 같은 설정들로 꽉 차있기 때문입니다.

 

설정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이야기를 끌어가는 두 작가의 필력 역시 기성 작가 못잖은 힘을 갖고 있어서 신간에 대한 기대감을 갖게 해줍니다. 16년 전 과거의 사건과 현재의 위기를 교차하며 잘 직조해낸 점도 뛰어났고, 현란한 표현 없이도 긴장감과 속도감을 놓치지 않은 점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이렇듯 페이지 터너로서 빠짐없는 미덕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캐치 유어 데스는 몇 가지 아쉬운 점들을 안고 있는데, 무엇보다 가장 큰 점은 주인공 케이트와 폴이 평범한 민간인이다 보니 결국 사건의 물리적 해결에 명백한 한계가 있다는 구조적인 문제입니다. 물론 16년 전의 진실을 찾아가는 모든 수고는 주인공들의 몫이었고, 목숨을 건 물리적 충돌까지도 기꺼이 감수하며 위기를 극복해내긴 했지만, 역시 이 명백한 한계를 벗어날 수는 없었습니다.

 

두 번째는 케이트를 위협하는 악당들의 캐릭터에 대한 것인데, 우선 건트 박사의 동기나 궁극적 목표가 조금은 현실감이 떨어져 보인 점입니다. 바이러스의 개발 이유에 대해 건트 박사가 나름 장황한 연설을 늘어놓는 대목이 있긴 하지만, 좀 엉뚱해 보이기도, 추상적으로 보이기도, 의지에 비해 논거가 부족해 보이기도 해서 악당의 자세치고는 좀 어수룩해 보였습니다. 좀더 설득력 있는 동기나 목표가 제시됐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컸습니다. 또 한 가지는 케이트를 사랑하고, 증오하고, 원했고, 그래서 죽이고 싶어 하는킬러 존 샘슨의 캐릭터가 일관성이 없다는 점입니다. 자세한 건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언급할 수 없지만 악당의 캐릭터가 흔들리다 보니 살짝 맥이 빠졌던 게 사실입니다.

 

댄 브라운과 스티그 라르손, 마이클 크라이튼의 합작품이라는 출판사의 소개 글이 약간 과장된 면이 있긴 하지만, 근거 없는 홍보용 멘트만은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묵직한 주제의식을 선호하는 독자들에게는 조금은 가벼워 보일 수도 있지만, 그 이상의 미덕을 여럿 지닌 만큼 다양한 독자층에게 충분히 어필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두 작가의 합작이 비교적 최근인 2011년에 시작됐으니 후속작 소식도 곧 들려올 것 같고, 무엇보다 첫 합작품인 킬링 큐피드의 출간도 기대해볼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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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테의 신곡 살인
아르노 들랄랑드 지음, 권수연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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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둥이, 건달, 사기꾼, 칼잡이 등 화려한 이력을 지닌데다 남미의 꽃을 단춧구멍에 꼽고 다녀 흑란이라는 별명을 지닌 피에트로는 베네치아를 강타한 잔혹한 살인사건 수사를 위해 특별사면을 받고 감옥을 나옵니다. 그리고 수사 시작 직후 그동안 벌어진 연쇄살인이 단테의 신곡중 지옥편을 본떠 자행됐다는 사실을 눈치 챕니다. 배교, 육욕, 식탐, 낭비, 분노, 이단, 폭력, 분열, 배반 등 9()의 테마에 따라 희생자들이 속출하는데, 고급 창녀에서부터 베네치아의 핵심 정치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계층에 걸쳐있습니다.

자신을 감옥에서 꺼내준 유력 정치인들의 도움을 받아 수사를 벌이던 피에트로는 일련의 사건들이 단순한 형사 사건도, 신의 계시를 받은 광신도 집단의 소행도 아닌 베네치아를 혼란에 빠뜨리고 궁극적으로는 정권을 무너뜨리려는 반역의 일환임을 파악합니다. 하지만 일 디아볼로 또는 키마이라로 지칭되는 적의 수장을 쫓던 중 피에트로는 죽음의 문턱까지 내몰리기도 하고, 심지어 연쇄살인범으로 오인받기도 합니다.

 

단테의 신곡을 소재로 삼거나 단테 본인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미스터리는 은근히 독자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힘이 있습니다. 단테 혹은 단테의 신곡이 가진 힘일 수도 있고,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인물이나 유산을 픽션으로 풀어내는 기법 자체의 힘일 수도 있습니다.

단테의 신곡 살인은 분량 자체가 600페이지에 육박하는 데다 일단 손에 쥐자마자 적잖은 부담감이 느껴지는 두툼한 하드커버 제본이고, (1756년 베네치아를 무대로 설정했고, 단테의 신곡을 소재로 삼은 것이 주된 이유겠지만) 어휘나 문장이 무척 예스럽고 고전적이어서 완독하는데 여러 날이 걸렸습니다. 이야기 구조는 의외로 심플한데, 한 줄로 요약하자면 베네치아 공화국을 전복시키려는 세력들과 그에 맞선 주인공 피에트로의 대결입니다.

 

쉽고 가벼운 현대의 문장들에 익숙해진 탓인지 고전적인 문장이 주는 생경함이 처음엔 어색하고 낯설게 느껴졌지만, 단어 하나하나를 곱씹어 읽다 보니 어느 새 그 나름의 독특한 맛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예를 들자면...

 

그녀는 쾌락의 수식을 빌려 희극을 연출함으로써 자신의 번민을 안전한 곳으로 감춘 뒤, 그 번민에 권태와 도피의 옷을 입히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두 세 번은 되읽어야 대략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는 문장들이 많은데, 가끔은 피곤하게 느껴질 때도 있었지만, 고전의 맛이라고 생각하면서 읽다 보니 금세 적응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단테의 신곡을 모방하여 벌어진 끔찍한 사건 현장의 묘사, 1756년 베네치아의 화려한 풍광과 곤돌라를 비롯한 수로와 뒷골목의 풍경 묘사, 그리고 자유분방하고 외설스럽기까지 한 당시의 풍습이나 주인공 피에트로를 비롯한 다양한 계층의 남녀 캐릭터들의 묘사는 현대물에서는 보기 힘든 현란한 어휘들과 리듬감으로 가득 차 있어서 이야기 전개와 관계없이 흥미로운 책읽기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단테의 신곡 살인은 방대한 서사와 분량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 면에서 아쉬움을 남겼는데, 우선은 나무는 많은데, 정작 숲이 허술하다는 점이었습니다. 단테의 신곡’, 연쇄살인, 애절한 멜로, 비밀과 거짓말, 피아가 구분 안 되는 은밀한 캐릭터 등 개별적인 요소들은 매력적으로 포진되어 있는데, 정작 가장 중요한 뼈대 악당들의 목표, 주인공과의 대결 과정 등은 읽는 도중 몇 번씩 맥을 빠지게 할 만큼 허술하게 진행됩니다.

이 부분을 상세하게 언급하면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조심스럽지만, 굳이 비유하자면, ‘단테의 신곡으로 시작해서 헐리우드 액션영화로 마무리된 느낌이랄까요? 결국 선과 악의 대결이 이런 식으로 전개될 거라면 단테의 신곡이 반드시 필요했을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초반부에 긴장감 넘치게 묘사된 단테의 신곡을 모방한 연쇄살인은 존재감을 잃었습니다.

 

더불어, 피에트로의 수사는 몇 번의 결정적 계기를 통해 악의 실체를 파악해 나가는데, 그 과정이 안이하고 쉽게 처리된 점도 아쉬운 대목이었습니다. 목격자와 증인은 필요에 따라 적재적시에 나타나주고, 악당들의 일거수일투족에 대한 상세한 정보 역시 친절하게피에트로의 손에 전달됩니다. 고전의 맛을 느끼게 해준 훌륭한 번역 덕분에 낯설면서도 흥미로운 책읽기를 경험했지만, 미스터리의 완성도 면에서는 이런저런 아쉬움이 많이 남는 작품이었습니다.

 

이런 훌륭한 필력을 지닌 작가가 헐리우드 액션영화의 공식이나 스케일 대신 차라리 18세기 베네치아의 소시오패스 이야기를 다뤘다면 어땠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문득, 얼음장 같은 연쇄살인범이 등장한 영화 세븐이 떠올랐기 때문인데, 그 작품에도 단테의 신곡과 쵸서의 캔터베리 서사시가 연쇄살인의 모티브로 등장했습니다. 매력적인 주인공 피에트로가 단테의 신곡을 모방하며 연쇄살인을 저지르는 베네치아의 소시오패스 일 디아볼로 또는 키마이라를 쫓는 이야기였다면 좀더 흥미와 완성도를 갖춘 작품이 나오지 않았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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