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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계량스푼
츠지무라 미즈키 지음, 정경진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4년 3월
평점 :
절판
(약간 상세한 줄거리와 캐릭터 설명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의 계량스푼’은 미스터리라기보다는 판타지에 가까운 독특한 작품입니다. 동시에 죄와 벌, 복수와 악의 등 인간의 본성에 관한 논쟁을 다루고 있습니다. 같은 작가의 ‘츠나구’가 죽은 자와 산 자를 이어주는 특별한 능력을 소재로 삼았다면, ‘나의 계량스푼’에는 말을 통해 상대를 속박할 수 있는, 즉 내 뜻대로 상대의 행동을 좌우할 수 있는 판타지 캐릭터가 등장합니다.
초등학교 4학년인 주인공 ‘나’는 2년 전 우연히 자신의 능력을 발견하는데, 쉽게 설명하자면, “나를 사랑해줘. 그렇지 않으면 넌 내일 죽게 돼.” 식입니다. 물론 그 주문은 상대방을 속박하여 조건을 따르든(나를 사랑하든), 그러지 않을 경우 반드시 벌을 받게 되는(내일 죽게 되는) 상황을 야기합니다. ‘나’의 특별한 능력은 가문의 내력이기도 한데, 현존하는 유일한 능력자는 외숙부 아키야마 교수입니다.
‘나’의 특별한 능력은 절친인 후미와 관련이 깊습니다. 2년 전, 후미로 인해 자신에게 그런 능력이 있음을 알게 됐고, 지금은 후미를 돕기 위해 자신의 능력을 이용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두꺼운 안경, 입 안의 교정기, 평범함에 조금 못 미치는 미모를 가진 후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재능과 친화력으로 친구들과 잘 어울리는 편이지만, 언제나 결정적인 순간이면 모두로부터 따돌려지는 캐릭터입니다.
그런 후미를 늘 곁에서 지켜주던 ‘나’는 어느 날 찾아온 비극 - 후미가 아끼던 토끼들이 참혹하게 죽어간 사건 - 으로 인해 마음의 문을 닫고 자폐적으로 살아가게 된 후미를 정상으로 되돌려놓기 위해 ‘토끼살해범’에게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기로 마음먹습니다. 학생들을 대표하여 ‘토끼살해범’에게 사과를 받기로 한 ‘나’는 어떤 조건과 벌, 즉 ‘~하지 않으면, ~하게 될 것이다’를 부과함으로써 ‘토끼살해범’에게 응징 또는 복수할 것인지를 고민하게 됩니다.
상대를 속박할 수 있는 능력이 무섭고 저주받은 것이라 믿는 엄마는 ‘나’에게 같은 능력을 가진 외숙부 아키야마 교수를 찾아가 도움을 받을 것을 권합니다. 하지만 엄마의 목적은 아키야마를 통해 ‘나’의 능력발휘를 저지하는 것이었습니다. ‘토끼살해범’과의 만남을 앞두고 ‘나’와 아키야마 교수가 만나서 나누는 7일 간의 대화록이 이 작품의 중심 내용이고, 그들의 대화는 앞서 언급한대로 죄와 벌, 복수와 악의 등 인간의 본성에 관한 논쟁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죄란 무엇인가? 그에 합당하는 벌은 무엇인가? 복수는 무슨 의미를 갖는가? 인간의 악의는 벌과 복수로 제거될 수 있는 것인가? ‘나’와 아키야마의 논쟁은 한없이 깊고 무거운 주제를 다룹니다. 독자들은 ‘나’의 마지막 선택 – 토끼살해범에게 어떤 조건과 벌을 부과할 것인가? - 에 관심을 집중한 채 이들의 논쟁을 지켜보게 됩니다.
그러다보니 이야기는 ‘진범 찾기’라는 일반적인 미스터리와 달리 독자로 하여금 죄와 벌, 복수와 악의에 관한 여러 인물의 가치관적 판단 가운데 자신이 공감하는 부분을 찾게 만드는 구조를 띄게 됩니다.
- 남의 불행을 우스갯소리로 조롱하고 희롱하는 인간의 악의는 구원받을 수 있는가?
- 토끼살해범에게 복수한다고 해서 상처받은 후미가 예전의 후미로 돌아올 수 있을까?
- 누군가의 죽음 앞에서 우는 것은 그를 애도해서가 아니라 그 사람을 잃은 자기 자신이 불쌍해서 우는 것 아닌가?
- 그런 맥락에서, 실은 후미를 위해서가 아니라, 후미가 마음을 닫은 것이 ‘나’ 때문이기에 그것을 견딜 수 없어서 ‘토끼살해범’에게 능력을 발휘하려는 것 아닌가?
다소 어렵고 골치 아픈 책읽기가 될 수밖에 없는데, 하지만 이런 주제를 다룬 철학서나 인문학 저서가 현학적인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는 반면 ‘나의 계량스푼’은 픽션을 통해 좀더 피부에 와 닿는 주제의식을 던져줍니다. 내가 ‘나’라면 토끼살해범에게 어떤 조건과 벌을 내걸 것인가? 평생 자신이 토막 낸 토끼들의 고통과 똑같은 고통을 겪게 만들까? 후회와 반성을 이끌어냄으로써 그에게 제2의 삶을 살 기회를 줘볼까?
이런 복잡한 고민 끝에 도착한 엔딩에는 대단한 반전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의 선택은 50세의 교수 아키야마조차 전혀 예상 못한 것이었고, 이미 오래 전부터 다시는 능력을 발휘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아키야마로 하여금 또다시 능력을 발휘하게 만드는 일대 사건을 불러일으킵니다.
무겁고 칙칙한 고전적 소재를 픽션 속에서 딱딱하지 않게 풀어낸 필력, 흥미와 재미를 외면한 채 작정하고 써내려간 듯한 비상업적 구성, 독자들에게 많은 것을 물어보고, 생각하게 만드는 에피소드 등 ‘나의 계량스푼’은 독특한 존재감을 지닌 미덕을 지니고 있습니다.
다만, 대중적인 독자 입장에서 볼 때 아쉬운 점을 몇 가지 들자면, 우선 초등학교 4학년으로 설정된 ‘나’의 캐릭터입니다. 미야베 미유키의 ‘솔로몬의 위증’이 중학생들의 모의재판이라는 설정으로 인해 비현실적이라는 서평을 적잖이 들었던 것처럼, ‘나의 계량스푼’ 역시 10살이라는 나이가 자꾸만 책읽기를 방해하는 요소가 됩니다. 아키야마 교수가 “무슨 말인지 이해하죠?”라고 했을 때, 독자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두세 번은 되읽어야 하는 상황을 10살의 ‘나’는 이해는 물론 응용까지 해내고 있습니다. 딱히 문제 삼을만한 것이 아닐 수도 있지만, 그럴 때마다 ‘음, 이건 소설이지’라는 생각이 끼어들어 몰입도를 무너뜨렸습니다.
또 한 가지, ‘비상업적 구성’이라고 언급한 부분인데, 이 점은 이 작품의 장점이자 단점일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즉, ‘나’와 아키야마 교수 사이의 논쟁은 단순히 소설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는데, 이 부분이 작품의 중심 내용이다 보니, 그것도 동어반복의 느낌이 들거나 지나치게 설명적인 형태를 띠고 있다 보니 지루함과 동시에 ‘강요받고 있다’는 느낌을 읽는 내내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나’와 아키야마 교수의 3일 째 만남을 읽던 즈음에는 다 건너뛰고 엔딩만 읽을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물론 실제로 그렇게 했다면 이 작품의 소중한 부분을 놓쳤겠지만 말입니다.
생각보다 긴 서평이 됐는데 다루고 있는 이야기가 그저 평탄한 ‘진범 찾기’가 아닌 탓에 이런저런 사감을 많이 적다 보니 그렇게 된 것 같습니다. 츠지무라 미즈키의 작품은 아직 많이 만나보진 못 했지만, 독특하면서도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작가가 아니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얼마 전 그녀의 대표작 ‘차가운 학교의 시간은 멈춘다’가 출간됐는데, 과연 어떤 모양의 책읽기가 될지 기대반 우려반으로 도전해볼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