킹의 몸값 87분서 시리즈
에드 맥베인 지음, 홍지로 옮김 / 피니스아프리카에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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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의 밑바닥에서 출발하여 그레인저 제화의 회장 자리를 목전에 둔 더글러스 킹은 어느 날 자신의 아들 바비를 납치했다는 유괴범의 전화를 받습니다. 하지만 실제 유괴된 것은 운전기사의 아들 제프였고, 유괴범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킹에게 거액의 몸값을 요구합니다. 회사 주식 확보를 위해 거금을 준비해야 했던 킹은 몸값 지불을 거부하고, 스티브 카렐라를 비롯한 87분서 형사들은 유괴범의 흔적을 찾기 위해 동분서주합니다. 납치범 중 한 명인 에디는 아내 캐시의 만류에 잠시 흔들리기도 하지만 주범인 바너드의 포악한 성정을 이겨내지 못하기도 했고, 더 이상 구질구질하지 않은 삶을 살고 싶다는 욕망에 떠밀려 끔찍한 범행을 강행하기로 합니다.

 

원제가 ‘King's Ransom’인 이 작품의 출간년도는 1959년으로, (에드 맥베인 홈페이지에 따르면) ‘87분서 시리즈가운데 10번째 작품입니다. 시리즈 36번째 작품이자 1983년에 출간된 아이스이후 두 번째 읽은 작품인데, 무려 24년의 시간차에도 불구하고 이질감을 전혀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주연들의 캐릭터나 87분서의 분위기는 한결같았습니다. 오히려 불필요한 사족과 설명이 조금 많았다고 느꼈던 아이스와는 달리 선명하고 깔끔한 문장, 적절한 비유와 풍자를 만끽할 수 있는 작품이었습니다.

 

시리즈의 초창기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스티브 카렐라 등 87분서 형사들의 활약보다는 본인의 자식이 아닌 아이의 몸값을 지불하는 문제를 놓고 벌이는 킹과 여러 캐릭터들 사이의 가치관의 대결이 메인 스토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스티브 카렐라의 끈질긴 탐문과 단서를 이용한 묵직한 추리를 기대한 독자들에게는 조금은 실망스러운 내용이 될 수도 있습니다.

저 역시 그런 느낌을 지울 수 없었고, 2014년의 시각으로 보면 약간 싱겁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사건 해결 과정이 간결해서 아쉬움이 남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흥미진진하게 마지막 페이지까지 달릴 수 있었던 것은 아이의 몸값을 둘러싼 킹과 주변인들의 갈등이 현실감 있게 그려진 덕분이었습니다.

 

사업과 아이의 목숨 사이에서 갈등하는 더글러스 킹, 아이의 몸값을 지불하라며 킹과 충돌하는 아내 다이앤, 몸값을 지불하게 함으로써 주식 확보 대결에서 킹을 무너뜨리려는 회사의 라이벌들, 몸값을 받아내 지금껏 한 번도 누린 적 없는 행복한 삶을 꿈꾸는 에디, 은행털이는 용인해도 유괴는 안 된다는 에디의 아내 캐시 등 등장하는 캐릭터들 모두 윤리적 갈등을 빚으며 격렬하게 대치합니다. 심지어 87분서의 형사 스티브 카렐라까지 이 갈등에 가세하는데, 이들의 충돌 장면 하나하나가 작가의 맛깔난 문장을 통해 현실감과 공감을 획득한 덕분에 수사물로서의 미덕은 조금 흐릿해졌음에도 불구하고 긴장감과 속도감은 오히려 배가됐습니다.

 

킹의 몸값의 재미를 더해준 것은 홍지로의 번역입니다. 후기에 실린 역자의 말을 읽어보면 평범한 단어 하나하나에까지 신경을 쓴 번역가의 고뇌를 짐작할 수 있는데, 그 외에도 애매하게 비꼬는 표현이라든가, 웃음을 자아내는 익살스런 문장들, 캐릭터의 특징을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드러내주는 문장들 속에서 꼼꼼하고 적절한 번역의 맛을 여러 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스티브 카렐라를 비롯하여 맛없는 커피로 유명한 서무과의 미스콜로, 아버지의 장난에 가까운 작명 덕분에 평생 수난을 겪어온 마이어 마이어 등 아이스에서 만났던 친숙한 캐릭터들을 만난 일도 즐거운 일이었습니다. 87분서 시리즈는 1956경찰혐오자로 시작하여 2005‘Fiddlers’까지 거의 50년에 걸쳐 55편이 출간됐는데, 절판된 책을 제외하고 현재 국내에는 여섯 편만 만날 수 있는 상태입니다. 경찰소설의 텍스트라고 불릴 정도로 훌륭한 작품들이기도 하지만, 카리스마 넘치는 스티브 카렐라와 진짜 형사같은 87분서 멤버들의 활약 때문에라도 이 시리즈의 나머지 작품들이 국내에 좀더 많이 소개되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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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빛 미스터리, 더 Mystery The 5
이누이 루카 지음, 추지나 옮김 / 레드박스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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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만한 특별한 단편집을 만났습니다. ‘여름 빛에 실린 여섯 편의 단편들은 형식적으로는 호러물로 분류되지만, 마지막에 이르러 섬뜩한 느낌을 남기는 극단적인 호러물에서부터 눈가를 뜨끈하게 만드는 애틋하고 따뜻한 호러물에 이르기까지 제각기 독특한 색깔과 느낌을 지니고 있어 정통 호러물에 비호감인 독자들에게도 충분히 소구할만한 매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단편집임에도 불구하고 1부와 2부로 나뉘어있는데, 1부에 실린 세 편은 각각 1945, 1922, 1928년을 배경으로 하고 있고, 2부의 세 편은 현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또한 작가 이누이 루카가 훗카이도 삿포로 출신 때문인지 대부분의 작품들이 그 지역들을 무대로 삼고 있습니다.

 

곧 죽을 사람을 알아보는 능력을 지닌 다카시(여름 빛), 죽은 자의 영혼과 만나게 되는 이시쿠로(쏙독새의 아침), 열등감에 휩싸여 동생을 향한 저주의 의식을 치르는 기미(백 개의 불꽃), 마술 뿐 아니라 공중부양의 능력을 지닌 소년 다쿠(Out of this world), 타인의 감정이 풍기는 냄새를 맡을 줄 아는 아야코(바람, 레몬, 겨울의 끝) 등 현실을 뛰어넘는 캐릭터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지만 이야기 자체가 공감할 수 있는 사연들을 지니고 있어서 그런지 비현실적이라거나 허황된 느낌은 거의 받지 못 했습니다.

 

인물 뿐 아니라 독특한 설정들도 눈에 띄는데, 저주를 불러온다는 돌고래를 닮은 물고기인 상괭이, 불길한 기운을 한가득 담아뒀다가 동트기 전에 울음소리와 함께 온갖 곳에 뱉는다는 쏙독새, 동족인 금붕어는 물론 자신보다 큰 생물까지 뭐든지 먹어치우는 괴물 금붕어 등 호러물로서의 매력을 배가시키는 유무형의 설정들이 곳곳에 산재해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표제작인 여름 빛바람, 레몬, 겨울의 끝이 마음에 들었고, 2부 첫 작품인 는 정통 호러물의 서늘함을 제대로 느낄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호러 여왕의 강림이라는 홍보 문구가 표지에 인쇄되어 있는데, 아주 조금 과장된 느낌도 없지 않지만 그녀의 호러 단편집이 새로 출간된다면 주저 없이 집어 들게 될 것 같습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간간이 눈에 띈 오타였습니다. 목차의 소제목 중 백 개의 불꽃이 내용에서는 백 개의 꽃으로 되어 있고, ‘다니카와다키자와(p46), ‘마코토마쿠토(p206) 등 인물 이름도 잘못 인쇄됐고, 그 외 부분적인 오타들이 후반부로 갈수록 늘어난 점, 특히 마지막 작품 바람, 레몬, 겨울의 끝에서는 여러 차례 발견된 점이었습니다. 끝까지 잘 마무리 됐다면 좋았을 텐데 옥의 티처럼 아쉬움을 남긴 대목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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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게 되어 영광입니다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31
미나가와 히로코 지음, 김선영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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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말 런던을 배경으로 한 일본 작가의 미스터리라는 독특한 이력 뿐 아니라 팔순을 넘은 나이에 제12회 본격미스터리 대상을 받은 작가에 대한 호기심, 또 셜록 홈즈보다 100년을 앞선, 아직 과학이 맹아기를 거치고 있던 시기를 무대로 해부학을 전면에 내세운 이야기라는 점 때문에 출간 전부터 관심을 가졌습니다.

 

혹시나 일본인 캐릭터가 등장할까 했는데, 100% 영국산 캐릭터로만 이뤄진 작품입니다. 형의 재정적 도움을 받아 개인해부교실을 열어 연구에 몰두해온 대니얼 버턴을 비롯, 에드워드, 나이절 등 그의 제자들이 겪는 의문의 살인사건이 이야기의 핵심입니다. 또한, 작가로 성공하겠다는 열망으로 시골에서 올라온 17살 청년 네이선이 런던에서 겪는 기구한 고난들이 서브스토리로 진행되다가 대니얼의 제자인 에드워드와 나이절을 만나게 되면서 본 이야기에 합류하게 됩니다.

 

열게 되어~’에서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는 탐정 역할은 강직한 심성의 맹인 치안판사 존 필딩과 그의 여조수 앤이 맡습니다. 대니얼의 해부교실에서 발견된 참혹한 2구의 시신뿐 아니라 연이어 벌어지는 연쇄살인사건에 대니얼의 주변 사람들은 물론 제자들까지 깊이 연루되어 있다는 점을 파악하지만 엉킨 실타래처럼 복잡한 정황들 때문에 진범 찾기는 혼란에 혼란을 거듭하게 됩니다.

 

스토리도 스토리지만, ‘열게 되어~’는 독특한 캐릭터 묘사가 장점인 작품입니다. 소심한 외과의사지만 해부학 이야기만 나오면 할 말, 못 할 말 구분 못하는 소심남 대니얼, 뛰어난 외모와 언변을 갖춘 대니얼의 수제자이자 어딘가 냉소적인 면을 가진 에드워드, 시력을 잃은 대신 청각과 후각이 발달하여 호흡과 말투만으로 진위를 가려내는 치안판사 존, 그의 조카이자 조수면서 당시에는 찾아보기 힘들었던 열혈 여성 사법관 앤 등 다양하고 특이한 캐릭터들이 사방에 포진하고 있어 그들의 언행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재미를 느낄 수 있습니다.

 

열게 되어~’가 갖고 있는 미스터리로서의 매력은 기대보다는 조금 못 미쳤는데, ‘해부학을 이용하여 사건의 진상과 진범을 찾아내는 스토리가 아닐까, 라는 기대와 달리 대니얼의 해부교실이 사건의 주요 공간으로만 등장한 것이 가장 큰 이유입니다. 물론 임신 6개월의 상태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은 한 귀족 미혼녀의 사체를 해부한다든가 연구를 위해 도굴꾼이나 유족들로부터 돈을 주고 시신을 거래하는 웃지 못 할 에피소드 등 해부학과 관련된 풍부한 묘사들이 책 읽는 재미를 배가시켜주고 있지만, 치안판사의 등장 이후 대니얼과 제자들이 조연으로 밀려난 느낌은 지울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페이지까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전개와 함께 18세기 말 런던의 다양한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한 맛깔난 문장들 덕분에 400여 페이지의 분량을 편안하고 빠르게 읽어나갈 수 있었습니다.

 

산업혁명이 몰고 온 피폐화된 런던의 뒷골목 풍경이나 지금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불공정하기 짝이 없는 사법 체계, 부를 축적하기 위해 저질러지는 주가 조작 등 현실에 대한 묘사는 세밀하게 이뤄졌고, 간간히 등장하는 영국식 코미디를 연상시키는 유쾌한 소동극 장면은 참혹한 살인사건의 와중에 잠깐 잠깐씩 쉬어갈 수 있는 여유를 제공했습니다.

 

본격미스터리 대상작에 대한 기대감 치곤 몇 가지 아쉬움이 남은 것이 사실이지만, 앞서 언급한대로 작품 자체가 지닌 독특함 때문에 충분히 보상받을 수 있었습니다. 특히 셜록 홈즈가 활약하던 런던의 풍경을 사랑하는 독자라면 그보다 100년을 앞서 살았던 해부교실 멤버들과 치안판사의 활약, 그리고 조금은 더 날것 같은 느낌을 주는 런던의 모습에 만족할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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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린 1 - 사도세자 이선, 교룡으로 지다
최성현 지음 / 황금가지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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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와 정조, 그리고 사도세자는 역사 속 인물 가운데 드라마와 영화를 통해 가장 많이 조명된 인물들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죽이고, 손자가 (할아버지 손에 죽은) 아버지의 뜻을 잇는, 어찌 보면 비극이면서도 막장에 가까운 이야기이고, 동시에 극성(劇性) 강한 소재이다 보니 여러 장르를 통해 오늘날까지 복원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일 수밖에 없습니다.

 

역린의 실질적 주인공은 이산 정조대왕이겠지만, 1권에서는 사도세자의 비극적인 죽음까지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전의 동 시대를 다룬 무수한 소설, 연극, 영화, 드라마와의 차별화를 위해 작가는 몇몇 픽션의 인물을 탄생시켰는데, 아무래도 낯익은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낯선 인물들에게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도세자 이선의 위기를 지켜내는 강직한 무관 황율과 그의 여인 개울, 난폭한 살인기계 광백과 그가 길러내는 살수들, 광백의 살수 가운데 가장 뛰어난 자질을 지닌 갑수 등이 그들입니다. 일부는 1권에서 운명을 다하기도 하고, 일부는 이후의 이야기에서 큰 역할을 맡을 것으로 묘사되는데, 그들을 이야기 주변부에서 중심부로 자연스럽게 끌고 오는 작가의 필력이 돋보입니다.

 

흥미로운 인물 묘사 외에도 역린은 쉽고 빠르게 읽히는 문장이라는 매력이 있는데, 때론 현학적인 어휘를 사용하여 상황을 묘사하기도 하고, 때론 중의적이거나 화두를 닮은 언변으로 정치인들의 내밀한 대화를 표현하지만 결코 난해하거나 지나치게 느껴지진 않습니다. 오히려 당대의 어지러운 정치판과 그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투쟁하는 노회한 정객들의 진면목을 설명하는데 있어 더없이 적절한 문장들입니다.

 

300여 페이지의 분량이지만 한나절도 안 돼 마지막 페이지까지 달릴 수 있었던 것은 그 시대 자체의 매력 뿐 아니라 역사적 사실과 픽션의 적절한 조합 덕분이었습니다. ‘역린이 몇 권까지 출간될지는 모르겠지만, 사실과 픽션의 조합을 통해 이전의 작품들과 차별화된 영정조 시대를 다룬다면 오랜만에 의미 있고 재미있는 대하소설을 기대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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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그림자 1 잊힌 책들의 묘지 4부작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 지음, 정동섭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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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살이 된 1945, 책방을 운영하는 아버지 손에 이끌려 잊힌 책들의 묘지라는 신비하고 거대한 책들의 보고를 방문한 다니엘은 운명처럼 바람의 그림자라는 책을 만납니다. 책의 매력에 빠진 다니엘은 작가 훌리안 카락스의 모든 것에 호기심이 일었지만, 서점이나 도서관 어디에서도 그의 다른 작품들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정체불명의 남자가 훌리안의 작품들을 찾아 불태워버린다는 소문을 듣습니다. 더구나 그 남자가 자신에게까지 접근하여 협박하자 다니엘은 책을 잊힌 책들의 묘지에 다시 숨긴 채 베일에 싸인 작가 훌리안의 과거를 캐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얼마 후, 모든 비극의 출발점이 됐던 훌리안의 유년기인 1919년에 대해 알게 됩니다. 죽음조차 갈라놓을 수 없는 사랑이 시작됐고, 향후 수십 년에 걸쳐 진화할 증오와 원한이 싹텄던 그 해의 진실을 접한 다니엘은 더욱 더 훌리안의 삶 속으로 깊이 빠져들고, 아직까지 살아남은 그의 지인들을 만나기 위해 애를 쓰지만 그것이 자신에게 돌이킬 수 없는 위기를 자초하는 일이라는 점은 미처 깨닫지 못합니다.

 

1930년대 스페인 내전을 전후로 한 30여년의 시간과, 지금은 축구와 올림픽의 도시로 화려한 외양을 자랑하지만 한때 살육의 피비린내로 진동했던 바르셀로나를 무대로 펼쳐지는 대서사로,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의 고딕 바르셀로나 콰르텟 시리즈의 첫 편입니다.

역사와 멜로는 물론 미스터리와 복수까지 뒤얽힌 방대한 서사 덕분에 2권의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10권짜리 대하소설을 읽은 느낌입니다. 스페인을 혼란 속에 빠뜨렸던 잔혹한 내전의 상흔, 서로의 등만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운명적인 사랑의 주인공들, 유년의 우정과 상처가 증오와 복수로 진화하는 안타까운 사연들, 그리고 한 권의 책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연이은 죽음과 미스터리한 사건 등 이야기는 출판사의 소개글대로 마치 양파껍질처럼, 내부에 여러 개의 미니어처를 품고 있는 러시아 인형처럼펼쳐집니다.

 

크게 보면 훌리안의 삶을 추적하는 현재의 다니엘의 이야기와 비극적인 사랑으로 인해 삶과 죽음의 경계를 몇 번씩 넘나들어야 했던 훌리안의 과거 이야기로 구성돼있습니다. 하지만 데칼코마니를 연상시킬 정도로 닮은꼴인 다니엘과 훌리안의 삶 때문에 이야기는 과거와 현재로 분리되거나 단절되지 않고 한줄기의 형태로 자연스럽게 읽힙니다. 그 덕분에 1919년부터 1955년에 이르는 짧지 않은 시간적 배경과 무수히 많은 사건들, 그리고 두 사람을 에워싸고 있는 적잖은 조연들에도 불구하고 800여 페이지의 분량을 힘들이지 않고 읽을 수 있습니다.

 

등장인물에 대한 코멘트만으로도 서평을 가득 채울 수 있지만 워낙 특이한 히스토리와 뚜렷한 개성, 굴곡으로 가득 찬 운명들을 지니고 있어서 자칫하면 가볍게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스포일러가 될 수 있기에 자제하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독자마다 몰입도가 가장 높았던 캐릭터가 조금씩 다를 것이라는 점인데, 주인공은 주인공대로, 악인은 악인대로, 비련의 캐릭터나 한 많은 캐릭터는 또 그들 나름대로 독자들이 공감할 수밖에 없는 사연들을 잔뜩 등에 업고 있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악역(처음부터 공개되는 점이니 스포는 아닙니다)을 맡은 푸메로가 그랬는데, 용서할 수 없는 캐릭터이긴 해도 그의 유년기의 상처가 절실하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여러 가지 장점에도 불구하고 평점이 별 네 개에서 그친 이유는 1권 중반까지 읽는 동안 느꼈던 몇 번의 고비(?) 때문입니다. (무지에 의한 오판일 수도 있지만) 그것은 스페인 문학만의 특징 때문일 수도 있고,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만의 독특한 문체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조금은 시끌시끌하고, 조금은 현학적이고, 조금은 과장이 심한 문장들이 자주 등장하는데, 더 곤혹스러웠던 것은 여러 가지 비유법이 혼재한 것은 물론 길이까지 길었다는 점입니다. 그러다보니 한 문장을 두세 번씩 되읽어야 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고, 어떤 때는 뉘앙스만 파악한 것으로 만족하고 넘어간 경우도 있었습니다. (물론 다니엘의 파트너인 페르민의 해학 넘치는 달변은 예외입니다. 그의 독특한 비유와 재치 넘치는 수다는 돈키호테를 연상시킬 정도로 유쾌한 스페인 식 풍자의 맛을 실컷 느낄 수 있는 매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런 복잡한 장문의 난해함이 번역 때문에 생긴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근래 읽은 번역서 가운데 손에 꼽을 정도로 오류를 찾아보기 힘든 작품인데다 원작의 느낌을 살리기 위해 번역자가 노력한 흔적이 책 전체에서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1권 중반까지만 작가가 짜놓은 판을 잘 쫓아간다면 그 뒤로는 2권 마지막까지 한 번에 달리고도 남을 만큼 속도감과 긴장감이 배가됩니다.

 

바람의 그림자는 내용만큼이나 시각적인 매력을 지니고 있는데, , 안개, 암울함, 서늘함 등을 주조 삼아 묘사된 바르셀로나의 풍경, 신비한 도서관 잊힌 책들의 묘지’, 악몽을 간직한 폐 저택 안개의 천사등 독특한 공간들은 읽는 것만으로도 눈앞에서 목격하듯 생생하고 사실감 있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 외에도 새벽과 저녁의 미묘한 정경, 세밀화를 보는 듯한 캐릭터의 외양은 물론 만년필, 모자, 시계, 타자기 등 세세한 소품들까지 공들인 묘사가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조만간 천사의 게임천국의 수인을 읽을 예정인데, 시간과 공을 들여 읽어야 할 묵직한 부담감은 있지만,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의 고딕 바르셀로나 콰르텟 시리즈는 그에 상응하는 만족감과 쉽게 잊히지 않을 여운을 남겨줄 것으로 기대합니다. 쉽고 심플한 이야기를 즐기는 독자들에게는 고통스러운 책읽기가 될 수도 있지만, 한번쯤 도전해볼만 한 작품이라고 추천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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