덴카와 전설 살인사건 명탐정 아사미 미쓰히코 시리즈
우치다 야스오 지음, 김현희 옮김 / 검은숲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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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주쿠 고층빌딩 앞에서 40대 남성이 독극물로 인해 급사합니다. 그가 지니고 있던 독특한 방울이 나라 현에 위치한 덴카와 신사의 물건이라는 것을 알게 된 딸 치하루는 아버지의 죽음의 비밀을 밝히기 위해 덴카와 신사로 향합니다.

한편 노가쿠(能樂)의 명문인 미즈카미 가문의 공연 도중 후계자 가즈타카가 변사합니다. 독살로 의심되지만 종가 가즈노리는 사실을 은폐한 채 실종됩니다. 가즈노리의 손녀이자 가즈타카의 이복남매인 히데미는 할아버지 가즈노리의 행방을 찾아 덴카와 신사로 향합니다.

마침 노가쿠의 역사와 노래를 취재하기 위해 덴카와 신사에 머물고 있던 아사미는 히데미와 치하루를 만난 것을 계기로 기이한 사건에 휘말립니다.

 

2013년에 읽은 헤이케 전설 살인사건이후 탐정 아사미 미쓰히코와의 두 번째 만남입니다. 1년 전의 첫 만남 때 뭔가 아쉬움이 남았던 기억이 나서 당시 써놓은 서평을 꺼내 읽어보니, “고전의 느낌이 많이 들고.. 사건은 소소해 보이고.. 사건이나 트릭은 요즘 독자들의 눈높이에 비하면 왜소해 보이고..”라는 비판과 함께 과거의 역사와 현재의 사건을 무게감 있게 직조해낸 작가의 필력은 놀라웠고, 인간적인 탐정과 아날로그적인 장치들 덕분에 사실감이 살아있었다.”라는 호평을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결과부터 말하면 덴카와 전설 살인사건은 전작에서 느꼈던 몇 가지 아쉬움을 말끔히 씻어준 것은 물론, 과거와 현재의 경계를 허물어버린 듯한 이 시리즈만의 매력을 훨씬 더 진하게 만끽하게 해줬습니다.

 

이 작품의 가장 큰 매력은 미스터리 자체보다는 노() 또는 노가쿠라 불리는 일본의 전통 가면악극을 둘러싼 다양한 에피소드와 신비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덴카와 신사의 전설을 만나보는 일입니다. 연이어 벌어진 살인사건의 중심에는 노가쿠의 명문 미즈카미 가문이 놓여있고, 아사미를 비롯한 주요 등장인물들이 모여드는 덴카와 신사에는 중세 남북조 시대를 살다 간 뛰어난 노가쿠 가문의 비극이 전설처럼 내려오고 있습니다.

 

노가쿠에 대한 설명과 덴카와 신사의 전설은 적잖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지루하지도 않고 낯설어 보이지도 않습니다. 무엇보다 현재의 연쇄살인의 동기이자 주요 무대로 설정돼있으며 그 역사를 알면 알수록 비극의 깊이와 농도가 더욱 강렬하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 덕분에 마치 과거의 비극이 현재에 이르러 되풀이되는 듯한 인상까지 받게 됩니다. 인간의 헛된 욕망과 옹졸함이 수십 년의 세월이 지난 뒤 예기치 않은 결과를 낳으며 아까운 목숨들이 너무나도 헛되이 사라지는 비극을 잉태했다고 할까요? 탐정 아사미 미쓰히코의 활약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할아버지를 찾아온 히데미, 아버지의 죽음의 비밀을 캐러 온 치하루 모두 노가쿠 가문 이면의 비밀과 덴카와 신사의 신비한 분위기 속에서 안타까운 진실들을 접하게 됩니다.

 

비록 아사미 미쓰히코가 하필덴카와 신사에 머물고 있었던 점이라든지 사건에 휘말리기 직전 아버지의 친구 덕분에 미즈카미 가문과 인연이 있었다는 우연, 그리고 그의 행보를 편하게 해주기 위해 작가가 설정한 부자연스런 구성 등 작위적으로 보인 부분도 일부 있었지만(별 한 개를 뺀 결정적인 이유입니다), ‘덴카와 전설 살인사건은 작가 스스로 하나의 도달점에 이르렀다.”라고 자평할 만큼 스케일과 디테일을 모두 갖춘 훌륭한 작품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일본 미스터리를 탐독하면서 본의 아니게 일본의 역사와 문화를 자주 접한 덕분에 노가쿠와 덴카와 신사, 중세 남북조 시대에 관한 내용들을 부담 없이 읽어나갈 수 있었지만, 이런 내용을 처음 접하는 독자에게는 쉽지 않은 책읽기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이 현재의 사건을 밝히는 열쇠들이 그 안에 숨겨져 있는 만큼 지루하거나 난해하게만 읽히지는 않을 것입니다.

 

- 사족

인터넷서점의 소개글을 보니 이 작품의 엔딩에 등장하는 너무나도 중요한 사실이 고스란히 소개되어 있습니다. 꼼꼼한 독자라면 이 정보 때문에 늦어도 1/3, 빠르면 첫 사건과 동시에 살인사건 이면의 진실을 눈치 챌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가능하면 소개글이나 줄거리는 건너뛰고 본편부터 읽을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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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이웃의 살인자 니나보르 케이스 (NINA BORG Case) 2
레네 코베르뵐.아그네테 프리스 지음, 이원열 옮김 / 문학수첩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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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마크의 대테러대책국 경감 쇠렌은 헝가리 정보국으로부터 상당히 위험한 물질이 덴마크에 반입된 흔적을 발견했다는 연락을 받지만 반입 경로는 물론 용의자 추정조차 하지 못한 채 초조한 시간을 보냅니다.

헝가리이지만 집시라는 이유만으로 차별받아온 터마스는 구 소련군의 주둔지에서 돈이 될 법한 물건들을 뒤지던 중 고가에 팔릴 수 있지만 동시에 절대 손대서는 안 될 물건을 입수합니다. 한편 심각한 위험에 빠진 난민 청년이 있다는 연락을 받은 니나 보르는 그의 은거지를 찾지만 그를 만나지도 못한 채 다른 난민들의 위협만 받습니다. 문제는 그 청년이 앓고 있다던 증상과 유사한 정체불명의 병에 걸리고 만 점입니다.

터마스의 형 샨도르는 동생을 찾기 위해 덴마크에 왔다가 뜻하지 않은 위험에 처하지만 니나 보르 덕분에 겨우 위기에서 벗어납니다. 하지만 샨도르와 니나 보르의 만남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최악의 사태를 초래합니다.

 

북유럽 여성 듀오 작가의 니나 보르 시리즈두 번째 작품이 생각보다 빨리 출간됐습니다. 두 자녀를 둔 평범한 주부이자 난민들을 위해 봉사하는 캠프 직원인 니나 보르가 시리즈 첫 편인 슈트케이스 속의 소년에서 보여준 매력적이고 열정적인 모습 덕분에 두 번째 작품인 보이지 않는 이웃의 살인자역시 많은 기대를 하고 있었습니다.

레네 코베르뵐과 아그네테 프리스의 문장은 군더더기 없이 잘 읽히고, ‘슈트케이스 속의 소년에 이어 시리즈를 번역한 이원열의 문장도 깔끔합니다. 덕분에 500여 페이지에 이르는 두툼한 분량은 술술 잘 넘어가고, 각 인물들이 처한 상황과 위기는 현실감 있게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아무래도 전문 탐정이나 형사가 아니다 보니 이번엔 또 어떻게 사건에 휘말리려나, 이런저런 예상을 했었는데, 조금은 아쉽지만 이번엔 사건을 해결하는 원톱 주인공이라기보다는 위기에 빠진 주요 인물정도로만 그려지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누군가 대신 원톱의 자리를 대신한 것은 아니고, 헝가리언 집시 형제, 덴마크의 중년 경감과 노년 부부 등 다양한 캐릭터가 니나 보르와 함께 조금씩 주인공의 자리를 분담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멀티 주인공을 포진한 것은 결과적으로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는 생각입니다. 즉 중요한 인물들이 다수 등장하다보니 이들의 배경을 설명하기 위해 초반부의 적잖은 분량이 할애되는데, 그로 인해 모든 인물들이 사건의 중심에 모여들기까지 너무 많은 시간이 걸렸다는 뜻입니다.

샨도르 형제의 처지를 설명하기 위해 헝가리안 집시들의 고달픈 삶이 장황하게 묘사됐고, 대테러대책국의 쇠렌 역시 초반부에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건의 중심에는 너무 늦게 도착했습니다. 주인공인 니나 보르는 딸 이다와의 트러블 묘사에 집중한 나머지 거의 1/3이 지난 지점에서야 사건에 간접적으로 연루되기 시작합니다. 아무래도 평범한 주부 간호사라는 캐릭터의 특징 상 형사나 탐정처럼 늘 목숨을 걸 정도의 긴박한 사건에 연루되긴 힘들지만, 이번 작품에서 그녀가 취한 스탠스 방관자 또는 어쩔 수 없이 휘말려든 는 주인공에 걸맞은 수준은 아니었습니다.

 

유럽이 안고 있는 여러 가지 사회적 문제와 이슈들을 테마로 내세운 점이나 평범한 인물들을 통해 그 이슈들의 디테일한 부분까지 사실감 있게 묘사한 점은 보이지 않는 이웃의 살인자의 가장 큰 미덕입니다. 구 소련의 잔재, 집시에 대한 핍박, 동유럽 난민의 현실, 인종과 종교의 문제 등 한없이 무겁고 다루기 힘든 주제들임에도 불구하고 두 여성 작가의 필력 덕분에 픽션 속에 잘 녹아들어 있습니다. 초반부의 장황한 묘사들이 낳은 지루함만 극복했더라면, 또 조금 과장됐다는 평을 듣더라도 니나 보르가 사건의 중심에 서서 이야기를 끌고나갔다면 좀더 긴장감과 몰입감을 높일 수 있지 않았을까, 라는 아쉬움이 남는 작품이었습니다. 니나 보르의 세 번째 사건에서는 그녀가 좀더 사건과 이야기의 중심에 놓이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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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메시스 - 복수의 여신 형사 해리 홀레 시리즈 4
요 네스뵈 지음, 노진선 옮김 / 비채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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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게 세 가지의 이야기가 진행됩니다. 오슬로에서 연이어 발생하는 은행 강도사건과 그 와중에 발생한 여직원 스티네 피살 사건, 해리와 만난 밤에 권총으로 자살한 옛 여친 안나 베트센 사건, 그리고 레드브레스트에서 미결 상태로 끝난 해리의 동료 엘렌 살해사건 등입니다.

스티네 사건의 경우 은행 강도 중 우발적으로 일어난 사건처럼 보였고, 안나 베트센의 경우 누가 봐도 명백한 자살이어서 금세 수사가 종결되어버립니다. 하지만 해리는 그의 새 파트너 베아테 뢴의 도움을 받아 두 사건 모두 우발적이지도, 명백한 자살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특히 안나의 죽음과 관련된 정체불명의 협박성 이메일이 날아들면서 해리는 불길한 예감을 받습니다. 해리와 베아테의 집요한 수사가 시작되지만 사건은 엉뚱한 희생자를 낳으면서 미궁에 빠지게 되고, 도리어 해리를 위험한 지경으로 몰고 갈 따름입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해리는 자신이 누군가가 파놓은 덫에 제대로 걸렸음을 깨닫게 됩니다.

 

우연히 얻은 프리뷰 기회 덕분에 시리즈 첫 편 박쥐와 거의 동시에 읽게 됐는데 박쥐보다 200여 페이지가 더 긴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훨씬 더 빨리 읽힐 정도로 긴장감과 몰입감이 대단했습니다. “진짜 스릴러를 쓰고 싶었다는 요 네스뵈의 희망과 각오가 그대로 담긴 네메시스스노우맨에 버금가는 시리즈 대표작으로 꼽아도 손색없는 작품이었습니다.

 

이야기 골격을 갖추는 데만 1년의 시간을 보냈다는 요 네스뵈의 고백처럼 네메시스속의 세 가지 이야기는 서로 교묘하게 하나의 이야기로 얽혀있는데, 복잡하게 짜여있으면서도 전혀 복잡하게 읽히지 않는, 쉽지만 정교한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복수의 여신 네메시스를 타이틀로 삼은 데서 알 수 있듯 세 가지 이야기는 모두 복수를 기반으로 삼고 있습니다. 때로는 닮은꼴의 복수심이 등장하기도 하고, 때로는 상식적으로는 이해 안 되는 복수심이 등장하기도 하고, 때로는 까마득한 시간이 흐른 구원(舊怨)이 동기가 된 복수심이 등장하기도 합니다.

 

진짜 스릴러를 쓰고 싶다고 했던 요 네스뵈의 희망과 각오는 어쩌면 대부분의 시리즈들 속에서 좀 과하다 싶게 서술됐던 철학적이거나 역사적이거나 순문학적인 주제의식을 배제하고 오로지 강력한 페이지터너를 만들어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네메시스에서도 요 네스뵈의 주제의식은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복수를 하는 유일한 생명체는 인간이며, ‘국가에 의한 공적 복수가 입헌국가의 초석이라는 아이러니를 강조하면서 요 네스뵈는 상처받거나 모욕받거나 버림받은 자들의 복수를 사실감 있게 묘사합니다. 단지 엔터테인먼트 스릴러의 소재로서의 1차원적인 복수를 묘사한 것이 아니라 인간을 살아있게 만들 수도 있고, 철저히 파괴시킬 수도 있는 근원적인 동기로서의 복수에 천착함으로써, 재미와 공감을 함께 이끌어냅니다.

누군가와 복수를 매개로 관계 맺어진다는 것은 정말 끔찍한 일입니다. 복수를 마음먹는 사람이 되든 복수의 목표가 되든 마찬가지입니다. 너무나 상투적인 창작물의 소재로 전락한 복수라는 코드가 새삼 이렇게 피부에 와 닿게 느껴진 것은 물론 전적으로 요 네스뵈의 필력 덕분입니다.

 

다른 작품들도 마찬가지였지만, 특히 네메시스에서의 요 네스뵈의 캐릭터 플레이는 압권이었습니다. 해리 홀레는 여느 작품보다 해리 홀레다웠고, 그의 새 파트너이자 한 번 본 얼굴은 절대 잊지 않는 특이한 능력의 소유자 베아테 뢴의 캐릭터도 매력적이었습니다. 사건에 연루된 조연 캐릭터들이나 오슬로 경찰청 내의 해리의 적과 동료는 말할 것도 없고 단 한마디의 진술로 그 존재감을 드러내는 평범한 이웃들에 이르기까지 리얼한 캐릭터 묘사를 위해 요 네스뵈가 들인 공의 흔적을 작품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레드브레스트와 마찬가지로 요 네스뵈는 미결된 사건을 남긴 채 대단원의 막을 내립니다. 언제가 될지는 알 수 없지만, 또다시 후속작에 대한 긴 기다림이 시작됐습니다. 조만간 한국을 찾을 예정인 요 네스뵈의 입을 통해 작은 힌트라도 얻기를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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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쥐 형사 해리 홀레 시리즈 1
요 네스뵈 지음, 문희경 옮김 / 비채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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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시드니에서 발생한 노르웨이 여인 잉게르 홀테르 살인사건을 수사하기 위해 지구 반대편까지 날아온 해리 홀레는 원주민 출신 경찰인 앤드류와 한 팀이 됩니다. 해리는 호주 수사팀의 도움으로 잉게르 홀테르 외에 다수의 금발의 백인 여인들이 연쇄 강간살인 피해자였다는 결론을 내리고 수사에 박차를 가합니다. 피살된 잉게르 홀테르의 방에서 발견한 한 장의 사진과 한 통의 편지를 토대로 해리와 앤드류는 점차 수사망을 좁혀가면서 용의자를 특정하기에 이릅니다. 하지만 유력한 용의자들이 참혹하게 피살되거나 또는 완벽하게 알리바이를 입증하면서 수사는 벽에 부딪힙니다. 그러던 중 앤드류가 불의의 사고를 당하고, 해리가 호주에서 만나 사랑하게 된 비르기타 역시 큰 위기에 빠집니다.

 

해리 홀레 시리즈를 읽은 순서대로 나열하면 스노우맨’(7), ‘레오파드’(8), ‘레드브레스트’(3) 순입니다. 좀 뒤죽박죽이지만 한국에 출간된 순서가 이렇다 보니 요 네스뵈의 많은 팬들도 이 순서대로 읽었을 것이고, 당연히 시리즈 첫 편에 대한 궁금증이 일었을 것입니다. 32살의 노르웨이 형사 해리 홀레의 첫 등장을 알리는 무대가 호주라는 점이 의아하긴 하지만, ‘박쥐는 해리 홀레의 과거사는 물론 영원히 변치 않을 그의 다분히 반골적인 기질과 앞으로 짊어지고 갈 무거운 짐을 동시에 보여줍니다.

 

이미 익숙해진 캐릭터의 첫 등장을 뒤늦게 읽는 것은 색다른 재미를 전해줍니다. 마치 연인의 어린 시절 사진을 처음 볼 때의 느낌과 비슷합니다. 32살 해리가 앓고 있는 지독한 알코올중독은 연민을 자아내고, 점차 본색을 드러내는 반골 기질과 아직은 옅게 남아있는 순진함이 동시에 목격됩니다. 해리가 고분고분하거나 남의 말에 귀 기울이며 살아간 적이 있었군!, 하고 말입니다.

문득 레오파드초반에 홍콩의 뒷골목에서 폐인처럼 살아가던 해리의 모습이 떠올랐는데, 마치 남의 미래, 그것도 그리 밝지 못한 미래를 엿본 후에 갖게 된 안쓰러움이랄까, 그런 동정심이 32살의 해리 홀레에게 이입되는 느낌이었습니다. “앞으로 당신이 겪어야 할 참혹한 일들이 얼마나 많은 줄 알아, 해리?” 하고 말입니다.

 

오래 전 과거를 통해 조금은 치기 어리고, 조금은 덜 성숙된 해리의 단면을 볼 수 있다는 점은 매력적이었지만, 그에 비해 상대적으로 미미해 보이는 그의 활약은 아쉬움을 남겼습니다. 노르웨이가 아닌 호주에서 그쪽 형사들의 지원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고 당연히 해리가 자신만의 색깔과 방법으로 수사를 진행할 수는 없었겠지만. 작품을 모두 읽은 후에 기억에 더 남은 것은 진범을 찾는 해리의 활약보다는 비르기타와의 불꽃같은 사랑이나 앤드류와 나눈 호주의 역사 이야기였습니다. 대체로 700~800페이지 내외인 다른 시리즈들에 비해 박쥐450페이지 정도의 소박한 분량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 네스뵈는 호주의 신화, 전설, 원주민에 대한 설명을 위해 적잖은 분량을 할애합니다.

 

요 네스뵈의 작품들이 기억에 오래 남는 것은 캐릭터나 사건의 무게감만이 아니라 매 작품마다 집요할 정도로 깊이 파고드는 묵직한 주제의식에 더 기인합니다. ‘레오파드에서 중환자실에 입원해있는 그의 아버지 이야기가 그랬고, ‘레드브레스트에서 1940년대 암울한 전쟁 이야기가 그랬고, ‘네메시스에서 인간의 복수심에 관한 이야기가 그랬습니다. 그를 통해 요 네스뵈의 시리즈들은 단순한 엔터테인먼트 스릴러에서 벗어나 좀더 문학적이거나 철학적인 작품의 범주에 들어갈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박쥐에서 요 네스뵈가 호주의 역사에 대한 설명에 천착한 것 역시 같은 맥락입니다. 세 개로 나뉜 챕터의 제목조차 신화의 주인공들 이름에서 따와 왈라(Walla), 무라(Moora), 버버(Bubbur)라고 명명하고 있습니다. 특히 불행한 역사를 갖고 있는 호주 원주민 애버리진에 관한 서술이 두드러지는데 이는 해리와 함께 팀을 이룬 동료 앤드류가 애버리진이어서 그렇기도 하지만, 이야기의 중요한 골격에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어이없는 이유로 침입자나 다름없는 백인들에게 삶의 기반을 빼앗겼던 애버리진, 그리고 그들의 선조들로부터 전해져 내려온 수많은 신화와 전설 등이 박쥐의 큰 배경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단순히 진범 찾기 외에 박쥐를 읽는 또 하나의 재미가 될 수도 있지만 굳이 흠을 잡자면 역시 조금은 과한 분량입니다. 상대적으로 해리가 수사하는 사건은 비교적 심플한 구조를 갖고 있고, 서술 역시 다른 시리즈들에 비해 덜 복잡하고 꼬인 정도가 약한 편입니다. 그러다 보니 호주 이야기가 조금은 지루하고 장황하게 읽힐 수 있다는 뜻입니다.

 

아무튼... ‘박쥐는 시리즈의 첫 편답게 날것 같은 미덕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해리 홀레 마니아들에게는 각자의 취향에 따라 매력으로 느껴질 수도, 아쉬움으로 다가올 수도 있습니다. 저의 경우는 대략 4:6 정도 됐던 것 같고, 특히 해리 홀레와 처음 만나는 독자들에게는 들었던 소문에 비해...’라는 평을 받을 가능성이 높아 보여서 아쉽지만 별 네 개에서 그치게 됐습니다. (‘박쥐네메시스의 출간으로 해리 홀레에 처음 관심을 갖게 된 독자라면 시리즈 순서보다는 국내 출간 순으로 읽어보실 것을 권합니다.)

 

박쥐네메시스를 동시에 읽어서 이제 해리 홀레 시리즈를 절반 넘게 완독한 셈이 됐습니다. 남은 작품들도 빠른 시간 안에 해리 홀레 팬들과 만날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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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자미상, 미스터리 작가가 읽는 책 - 상 미쓰다 신조 작가 시리즈 2
미쓰다 신조 지음, 김은모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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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미궁초자라는 희귀한 동인지를 헌 책방에서 구한 와 아스카 신이치로는 수록된 일곱 편의 단편 괴담들을 읽는 동안 이야기에 등장하는 비현실적 현상들이 자신들의 주위에서 실제로 벌어지는 거짓말 같은 상황을 겪습니다. ‘안개 저택을 읽고 난 후에는 무섭도록 짙은 안개가 자신들을 빨아들일 듯 다가왔고, ‘자식귀 유래를 읽고 난 후에는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아기의 울음소리 때문에 목숨을 위협받는 듯한 패닉상태에 빠지기도 합니다.

앞서 미궁초자를 읽은 사람들이 감쪽같이 행방불명됐다는 이야기가 헛된 소문만은 아니라는 걸 인정한 두 사람은 괴현상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괴담 속의 수수께끼를 푸는 것임을 깨닫습니다. 실제로 설전과 논쟁 끝에 추리를 완성하는 순간 두 사람을 위협하던 괴현상들은 순식간에 사라집니다. 하지만 마지막 편인 목 저택을 읽던 중 미궁초자라는 동인지 자체가 완성되기까지의 과정을 알게 되면서 두 사람은 앞선 여섯 편과는 격이 다른 최악의 상황과 맞닥뜨리고 맙니다.

 

도조 겐야 시리즈덕분에 미쓰다 신조의 광팬이 되긴 했지만, ‘작가 시리즈첫 작품인 기관, 호러작가가 사는 집에서는 그다지 재미를 보지 못했던 터라 기대 반 우려 반으로 시리즈 두 번째 작품인 작자미상의 첫 페이지를 열었습니다.

역시 미쓰다 신조의 작품답게 독특하고 기괴한 캐릭터와 사건들이 설정되어 있고, 괴담을 읽은 주인공들이 겪는 초자연적 현상은 독자를 슬금슬금 그 안으로 끌고 들어가는 묘한 매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수록된 일곱 편의 괴담 모두 지어낸 이야기라기보다는 직접 체험한 것을 묘사한 느낌이 강했고, 그러다 보니 주인공들이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애쓰는 모습 역시 허황된 괴담놀이가 아니라 살아남기 위한 치열한 분투처럼 읽힙니다.

 

일곱 편의 괴담이 제각각의 특징을 갖고 있고, 그 해법 또한 매번 기발하게 제시되고 있어서 기관, 호러작가가 사는 집과는 사뭇 다른 재미를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동시에 이만큼 힌트를 줬으니 한번 맞춰보시지?” 식으로 매번 독자에게 승부를 걸어오는 듯한 전개 덕분에 문장 한 줄, 단어 하나까지 허투루 넘어가지 못하게 하는 마력을 발휘합니다. 정통 추리는 물론 서술트릭, 애너그램까지 총동원 된 기법들을 읽다 보면 그의 뇌구조가 궁금해질 정도로 미쓰다 신조의 필력에 혀를 내두르게 됩니다.

 

다만, 이런 식의 전개가 모든 독자에게, 심지어 도조 겐야 시리즈의 광팬들에게조차 보편적인 호감을 불러일으키긴 쉽지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어떤 지점에서는 미쓰다 신조가 정교한 설계에 따라 이야기를 구성했다기보다 영감이라도 받은 것처럼 쉬지 않고 단 한 번에 써내려간 게 아닐까, 생각될 정도로 조금은 무리수를 둔 흔적들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느낌은 기관, 호러작가가 사는 집에서도 받은 적 있고, 그 당시에도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면서 머릿속 어딘가 남아있는 찜찜함 때문에 몇 번이고 중요한 대목들을 다시 들춰 읽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작자미상은 그 때와는 조금은 다른 종류의 찜찜함을 남겼는데, 아마 엔딩에 대한 아쉬움이 가장 큰 이유인 것 같습니다.

 

더 자세한 이야기를 하면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이쯤까지만 언급하겠지만, 2013년에 출간된 일본 미스터리 가운데 상당한 호응을 얻은 걸 보면,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면서 느꼈던 찜찜함은 아마 깔끔한 마무리를 좋아하는 제 취향 때문이 아닐까, 라는 생각도 듭니다. 괴담을 다루지만 언제나 명쾌하게 사건이 종결되는 도조 겐야 시리즈는 제겐 신작을 기다리게 만드는 최고의 시리즈 중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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