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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쥐 ㅣ 형사 해리 홀레 시리즈 1
요 네스뵈 지음, 문희경 옮김 / 비채 / 2014년 2월
평점 :
호주 시드니에서 발생한 노르웨이 여인 잉게르 홀테르 살인사건을 수사하기 위해 지구 반대편까지 날아온 해리 홀레는 원주민 출신 경찰인 앤드류와 한 팀이 됩니다. 해리는 호주 수사팀의 도움으로 잉게르 홀테르 외에 다수의 금발의 백인 여인들이 연쇄 강간살인 피해자였다는 결론을 내리고 수사에 박차를 가합니다. 피살된 잉게르 홀테르의 방에서 발견한 한 장의 사진과 한 통의 편지를 토대로 해리와 앤드류는 점차 수사망을 좁혀가면서 용의자를 특정하기에 이릅니다. 하지만 유력한 용의자들이 참혹하게 피살되거나 또는 완벽하게 알리바이를 입증하면서 수사는 벽에 부딪힙니다. 그러던 중 앤드류가 불의의 사고를 당하고, 해리가 호주에서 만나 사랑하게 된 비르기타 역시 큰 위기에 빠집니다.
‘해리 홀레 시리즈’를 읽은 순서대로 나열하면 ‘스노우맨’(7편), ‘레오파드’(8편), ‘레드브레스트’(3편) 순입니다. 좀 뒤죽박죽이지만 한국에 출간된 순서가 이렇다 보니 요 네스뵈의 많은 팬들도 이 순서대로 읽었을 것이고, 당연히 시리즈 첫 편에 대한 궁금증이 일었을 것입니다. 32살의 노르웨이 형사 해리 홀레의 첫 등장을 알리는 무대가 호주라는 점이 의아하긴 하지만, ‘박쥐’는 해리 홀레의 과거사는 물론 영원히 변치 않을 그의 다분히 반골적인 기질과 앞으로 짊어지고 갈 무거운 짐을 동시에 보여줍니다.
이미 익숙해진 캐릭터의 첫 등장을 뒤늦게 읽는 것은 색다른 재미를 전해줍니다. 마치 연인의 어린 시절 사진을 처음 볼 때의 느낌과 비슷합니다. 32살 해리가 앓고 있는 지독한 알코올중독은 연민을 자아내고, 점차 본색을 드러내는 반골 기질과 아직은 옅게 남아있는 순진함이 동시에 목격됩니다. 해리가 고분고분하거나 남의 말에 귀 기울이며 살아간 적이 있었군!, 하고 말입니다.
문득 ‘레오파드’ 초반에 홍콩의 뒷골목에서 폐인처럼 살아가던 해리의 모습이 떠올랐는데, 마치 남의 미래, 그것도 그리 밝지 못한 미래를 엿본 후에 갖게 된 안쓰러움이랄까, 그런 동정심이 32살의 해리 홀레에게 이입되는 느낌이었습니다. “앞으로 당신이 겪어야 할 참혹한 일들이 얼마나 많은 줄 알아, 해리?” 하고 말입니다.
오래 전 과거를 통해 조금은 치기 어리고, 조금은 덜 성숙된 해리의 단면을 볼 수 있다는 점은 매력적이었지만, 그에 비해 상대적으로 미미해 보이는 그의 활약은 아쉬움을 남겼습니다. 노르웨이가 아닌 호주에서 그쪽 형사들의 지원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고 당연히 해리가 자신만의 색깔과 방법으로 수사를 진행할 수는 없었겠지만. 작품을 모두 읽은 후에 기억에 더 남은 것은 진범을 찾는 해리의 활약보다는 비르기타와의 불꽃같은 사랑이나 앤드류와 나눈 호주의 역사 이야기였습니다. 대체로 700~800페이지 내외인 다른 시리즈들에 비해 ‘박쥐’는 450페이지 정도의 소박한 분량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 네스뵈는 호주의 신화, 전설, 원주민에 대한 설명을 위해 적잖은 분량을 할애합니다.
요 네스뵈의 작품들이 기억에 오래 남는 것은 캐릭터나 사건의 무게감만이 아니라 매 작품마다 집요할 정도로 깊이 파고드는 묵직한 주제의식에 더 기인합니다. ‘레오파드’에서 중환자실에 입원해있는 그의 아버지 이야기가 그랬고, ‘레드브레스트’에서 1940년대 암울한 전쟁 이야기가 그랬고, ‘네메시스’에서 인간의 복수심에 관한 이야기가 그랬습니다. 그를 통해 요 네스뵈의 시리즈들은 단순한 엔터테인먼트 스릴러에서 벗어나 좀더 문학적이거나 철학적인 ‘작품’의 범주에 들어갈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박쥐’에서 요 네스뵈가 호주의 역사에 대한 설명에 천착한 것 역시 같은 맥락입니다. 세 개로 나뉜 챕터의 제목조차 신화의 주인공들 이름에서 따와 왈라(Walla), 무라(Moora), 버버(Bubbur)라고 명명하고 있습니다. 특히 불행한 역사를 갖고 있는 호주 원주민 애버리진에 관한 서술이 두드러지는데 이는 해리와 함께 팀을 이룬 동료 앤드류가 애버리진이어서 그렇기도 하지만, 이야기의 중요한 골격에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어이없는 이유로 침입자나 다름없는 백인들에게 삶의 기반을 빼앗겼던 애버리진, 그리고 그들의 선조들로부터 전해져 내려온 수많은 신화와 전설 등이 ‘박쥐’의 큰 배경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단순히 진범 찾기 외에 ‘박쥐’를 읽는 또 하나의 재미가 될 수도 있지만 굳이 흠을 잡자면 역시 조금은 과한 분량입니다. 상대적으로 해리가 수사하는 사건은 비교적 심플한 구조를 갖고 있고, 서술 역시 다른 시리즈들에 비해 덜 복잡하고 꼬인 정도가 약한 편입니다. 그러다 보니 ‘호주 이야기’가 조금은 지루하고 장황하게 읽힐 수 있다는 뜻입니다.
아무튼... ‘박쥐’는 시리즈의 첫 편답게 날것 같은 미덕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해리 홀레 마니아들에게는 각자의 취향에 따라 매력으로 느껴질 수도, 아쉬움으로 다가올 수도 있습니다. 저의 경우는 대략 4:6 정도 됐던 것 같고, 특히 해리 홀레와 처음 만나는 독자들에게는 ‘들었던 소문에 비해...’라는 평을 받을 가능성이 높아 보여서 아쉽지만 별 네 개에서 그치게 됐습니다. (‘박쥐’와 ‘네메시스’의 출간으로 해리 홀레에 처음 관심을 갖게 된 독자라면 시리즈 순서보다는 국내 출간 순으로 읽어보실 것을 권합니다.)
‘박쥐’와 ‘네메시스’를 동시에 읽어서 이제 해리 홀레 시리즈를 절반 넘게 완독한 셈이 됐습니다. 남은 작품들도 빠른 시간 안에 해리 홀레 팬들과 만날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