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마처럼 비웃는 것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35
미쓰다 신조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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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조 겐야 시리즈첫 편인 염매처럼 신들리는 것을 읽은 뒤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아 읽어서 그런지 여러 가지 면에서 독자로서 누릴 수 있는 재미가 반감된 느낌입니다. 신간 미즈치처럼 가라앉는 것을 읽기 전에 순서대로 시리즈를 마스터하기 위해 연이어 읽은 것인데 예상치 못한 부작용(?)과 맞닥뜨리고 말았습니다.

주인공 도조 겐야의 풍부한 지적 유희와 기발한 추리 과정이라든가 초현실적인 현상들이 난무하는 가운데 벌어지는 참혹한 연쇄살인의 충격, 그리고 마지막 수십 페이지를 남겨놓고 벌어지는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진범 찾기 등 오랜만에 읽어야만 느낄 수 있는 미쓰다 신조 표 역사-호러-미스터리의 진가가 연이은 책읽기 때문에 상당 부분 희석된 것 같아 아쉬움이 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코 페이지가 넘어가는 속도가 줄어들지는 않았습니다.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고립된 마을과 대립하는 가문들이 배경으로 설정됐고, 마을을 둘러싼 산과 강에 깃든 숭배와 공포의 대상이 등장했고, 오랜 구원(舊怨)과 인간의 탐욕이 시한폭탄처럼 마을 곳곳에 만연해 있으며 우연이든 필연이든 도조 겐야가 그 마을에 나타나면서부터 천벌 또는 지벌로 여겨지는 참혹한 시신들이 발견됩니다.

모든 등장인물의 알리바이는 입증 자체가 불가능하거나 아니면 반대로 너무 선명하고, 희생자들은 납득할 수 없는 밀실 상황에서 발견되거나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참혹한 상태로 훼손되어 있으며 험한 꼴을 당할 만한 이유가 전혀 없는 의외의 인물이 포함되기도 합니다.

특히 산마처럼~’에서는 요코미조 세이시의 악마의 공놀이 노래를 연상시키는 동요 살인이 등장하는데, 이는 범인의 범행 동기를 더욱 모호하게 만듦으로써 독자들의 호기심과 긴장감을 증폭시킵니다.

 

유일하게 아쉬웠던 부분은 조금은 억지스러워 보였던 마지막 해결장면입니다. , 마지막 희생자가 발견되는 순간까지 극도의 긴장감을 유지해오던 이야기가 도조 겐야의 최종 결과 발표에 이르러 급격히 그 힘을 잃어버렸다는 느낌입니다. 우선, 시종일관 독자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던 초자연적 현상들에 대한 설명이 누구나 쉽게 갖다 붙일 수 있는 해석수준에 머무른 점 때문이었고, 두 번째로 진범 확증 과정에서 일어난 몇 단계의 반전 중 적잖은 부분이 반전을 위한 반전처럼 작위적으로 설정된 느낌을 줬다는 점 때문입니다.

 

물론 미쓰다 신조에게 제대로 뒤통수를 맞은 대목들도 곳곳에 산재해있습니다. 별 생각 없이 읽었던 한두 줄의 문장 속에 숨어있던 힌트들, 도조 겐야의 기이한 뇌구조만이 추론해낼 수 있는 기상천외한 독특한 해석들, 그리고 마지막에 이르러 독자들의 예측을 한 방에 무너뜨리는 비장의 카드 등 적잖은 분량의 내용 곳곳에 공포, 재미, 호기심, 긴장감, 반전 등 다양한 종류의 지뢰를 잘 묻어 놓았습니다.

미쓰다 신조의 도조 겐야 시리즈만의 중독성은 아마 이런 매력들에 기인하는 것 같습니다. 물론 어느 일본 미스터리보다 호불호의 경계선에 위태위태하게 놓여있는 시리즈이긴 하지만, 아무리 초현실적 역사-호러-미스터리와 담을 쌓고 사는 독자라고 하더라도 한번만 제대로 맛보면 미쓰다 신조처럼 중독되는 것의 진가를 느낄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연속으로 미쓰다 신조 읽기가 여러 가지 부작용을 전해준다는 것을 깨달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미즈치처럼 가라앉는 것의 첫 페이지를 열어버렸습니다. 미쓰다 신조의 신간을 곁에 둔 채 다른 작품을 집어 든다는 게 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미즈치~’를 완독하고 나면 도조 겐야 시리즈가운데 제일 먼저 읽었던 잘린 머리처럼 불길한 것을 다시 한 번 읽어볼 생각입니다. 예상되는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한 번에 시리즈를 완주하는 재미도 남다른 일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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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한가운데 밀리언셀러 클럽 134
로렌스 블록 지음, 박산호 옮김 / 황금가지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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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인 체포 중 일어난 사고 때문에 직장(경찰)과 가족 모두에게 결별을 고한 매튜 스커더는 호텔 방에 기거하며 일상의 절반쯤은 버번에 취한 채 살아가는 무면허 탐정입니다. 한편 그 자신이 부패경찰임에도 불구하고 경찰의 부패를 특별검사에게 일러바친브로드필드는 고급 콜걸 살해 혐의로 체포된 후 스커더에게 자신의 결백을 증명해달라고 요청합니다. 스커더는 브로드필드 주변 인물들에 대한 집요한 탐문을 통해 사건의 진실을 밝혀냅니다. 그 과정에서 내부 고발자를 곱게 보지 않는 예전 동료들과 부딪히기도 하고, 의뢰인의 아내와 넘어선 안 될 선을 넘기도 하거니와 소위 고위층이라 불리는 자들의 추악한 인격을 파헤치기도 합니다. 사건은 진범 체포와 함께 마무리 되고 그의 로맨스 역시 해피하게 이뤄지는 듯 보였지만, 정작 마지막에 이르러 매튜 스커더 앞에 던져진 엔딩은 고독하고 불행한 그의 운명처럼 씁쓸하게 마무리되고 맙니다.

 

로렌스 블록과 처음 만난 것은 10여 년 전의 일입니다. 아직까지 제 책장에 당당히 꽂혀있는 백정들의 미사라는 작품을 통해서였는데 지금은 줄거리조차 전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당시 눈에 확 끌리는 제목 때문에 찾아 읽은 것 같다고 추정될 뿐입니다. 고백하자면 백정들의 미사외에도 아버지들의 죄’, ‘800만 가지 죽는 방법’, ‘무덤으로 향하다등 로렌스 블록의 매튜 스커더 시리즈가 세 권이나 꽂혀있지만, 어찌하다 보니 도서관에서 빌린 시리즈 2죽음의 한 가운데를 먼저 읽게 됐습니다.

 

요즘 발표되는 미스터리나 스릴러에 비하면 비교적 잔잔한작품입니다. 사건은 소소하고, 반전 역시 딱히 충격의 강도나 규모 면에서 강렬하지 않습니다. 1976년에 발표된 작품임을 감안하더라도 그런 점들은 아쉬움으로 남지만, 이 작품의 매력은 매튜 스커더라는 무면허 탐정이자 고독한 뉴요커에 있습니다.

 

만만치 않은 트라우마를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불행한 기억들을 마음속에 담아둔 채 그저 오늘 하루를 충실히 살아가는 매튜 스커더는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늘 한결같은 모습입니다. 용의자를 대할 때는 웬만한 상황에서도 절대 흥분하지 않으며, 간결한 언어와 확실한 액션으로 상대방을 제압하는 전형적인 하드보일드 캐릭터입니다. 로맨스의 상대를 대할 때 역시 침묵도 대화만큼이나 그 나름의 방식으로 수많은 의미가 오고 간다라는 묘사처럼 화려한 수사(修辭)보다는 애정 어린 눈빛과 묵직한 진정성을 앞세웁니다. 그런 그의 끓어오르는 속을 달래주는 유일한 친구는 독한 버번 위스키 뿐입니다.

 

이야기 자체는 심플하고 장르물로서의 매력은 조금은 부족한 작품이지만, 매튜 스커더라는 캐릭터 덕분에 책꽂이에 꽂혀있는 그의 시리즈들을 머지않은 시간 안에 탐독하게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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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매처럼 신들리는 것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44
미쓰다 신조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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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전후 일본. 가가치와 가미구시가 양분하고 있는 가가구시촌은 허수아비님으로 일컬어지는 산신을 숭배하는 뿌리 깊은 민간신앙촌입니다. 자료 조사 차 가가구시촌을 찾은 도조 겐야는 도착과 동시에 연이은 괴사 사건에 휘말립니다. 특이한 모습으로 발견된 시신들 때문에 마을에서는 허수아비님 또는 염매의 징벌이라는 소문이 파다해집니다. 도조 겐야 역시 사건의 진상을 알아내기 위해 동분서주하지만, 자살인지 타살인지조차 제대로 구별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심지어 그 자신이 가가구시촌의 미신에 공포를 느끼는 상황에 처하기도 합니다.

마지막 살인사건이 일어난 후 도조 겐야는 자신만의 논리로 범인을 지목하지만, 그 자리에서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 상황이 발생하고, 사건에 연루됐던 모든 이들은 도조 겐야의 최종 진술에 경악을 금치 못하게 됩니다.

 

요코미조 세이시의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를 읽으면서 역사적 사실과 문화적 특징이 가미된 일본 미스터리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는데, 우연히 눈에 확 띄는 표지를 발견한 덕분에 시리즈 두 번째 작품인 잘린 머리처럼 불길한 것'을 먼저 읽게 됐고, (사실 호러가 제 취향과는 거리가 먼 장르지만) 이런저런 좋은 기억 때문에 도조 겐야 시리즈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중 새 작품 미즈치처럼 가라앉는 것의 출간 소식을 들었는데, 크게 지장은 없겠지만 아무래도 전작들을 먼저 읽어야겠다는 생각에 몇 달 전에 구해놓고 계속 책장 신세를 못 벗어나고 있던 시리즈 첫 작품 염매처럼 신들리는 것을 꺼내 들었습니다.

 

하지만 잘린 머리~’에 비해 염매처럼~’은 초반부터 페이지를 넘기기가 조금은 버거웠는데, 가장 큰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이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이자 장점인 방대한 민속학 자료때문이었습니다. 전후 일본이라는 무대, 외진 마을을 지배하는 가문의 독특한 내력, 조상의 지벌 등 주요 설정들은 잘린 머리~’와 비슷하지만, 그에 관한 상세한 설명이 과잉이라는 느낌을 받을 정도로 방대했고, 특히 일본 전역에 걸친 마귀에 얽힌 묘사는 백과사전을 읽는 느낌이었으며, 메인 줄거리를 이해하기 위한 배경 설명이라고 치더라도 그 도가 지나쳐 지적 자랑 또는 현학적인 과시로 여겨지는 부분이 적잖이 있었습니다.

 

또 한 가지 이유는 공간에 대한 설명이 불친절하거나 난해했던 점입니다. 물론 이는 작가가 의도한 바도 있지만 가끔은 짜증을 유발하기도 했습니다. 주요 무대인 가가구시촌의 경우 맨 앞에 첨부된 지도를 몇 번씩 들춰보게 만들었고, 건물의 내부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도 (중간중간 평면도를 첨부했음에도 불구하고) 전후좌우 등 방향과 위치 묘사가 지나치게 상세하게 이루어져, 정작 사건과 본 내용의 이해를 방해한다는 느낌을 자주 받곤 했습니다.

 

아쉬운 점을 먼저 언급하게 돼서 유감이지만, 궁극적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는 도조 겐야 시리즈첫 편으로서의 염매처럼~’의 매력은 이 아쉬움들을 충분히 상쇄하고도 남는다는 점입니다.

온갖 흉흉한 전설을 간직하고 있어 누구도 접근하기를 꺼려하는 기괴한 형체의 구구, 마을을 감싼 채 괴기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며 흐르고 있는 두 개의 강(히센천과 오주천), 가가치의 무신당을 비롯하여 허수아비님의 마성이 느껴지는 건축물 등 존재 자체가 호러라고 할 만한 가가구시촌은 말 그대로 매력이 철철 넘치는 미스터리의 무대입니다.

또한, 대대로 가가치쌍둥이 자매들이 그랬듯이 무녀와 혼령받이의 운명을 받아들여야만 했던 사기리 자매, 어릴 적 출입이 금기시 됐던 구구에 올랐다가 평생 잊지 못할 공포와 상처를 겪은 렌자부로를 비롯하여 오랜 구원(舊怨)과 비극적인 인연으로 묶인 가가구시촌의 구성원 하나하나를 집요할 정도로 세밀하게 그려냄으로써 공포와 공감을 동시에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 외에도 혼령을 맞이하고 보내는 기이한 의례, 빙의를 쫓기 위한 주술 의식, 신령납치로 여겨지는 아이들의 실종, 뱀을 비롯한 온갖 동물들과 연관된 마귀에 대한 전설 등 역사-호러-미스터리를 위한 디테일한 장치들이 곳곳에 배치되어 550여 페이지의 분량 어디에서도 긴장감을 놓치지 않게 해주고 있습니다.

물론 이런 설정과 특징들 때문에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릴 수도 있지만, 일본의 역사를 배경으로 한 호러 미스터리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한번쯤 도전해볼만한 작품임엔 틀림없습니다.

 

미즈치처럼 가라앉는 것을 읽기 전에 앞선 도조 겐야 시리즈를 모두 읽을 생각이었지만, ‘염매처럼~’을 읽는 도중 문득 그러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잠시 들기도 했습니다. 정신건강(?)을 위해서라도 한 달에 한 권씩만 보든가, 다른 작가의 작품을 읽으며 휴식을 취해야겠다는 것이 그 이유였는데, 막상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나니 어느새 다시 생각이 바뀌게 됐습니다. 이어서 시리즈 세 번째 작품인 산마처럼 비웃는 것을 읽을 계획인데, 미쓰다 신조만의 마귀 같은 매력덕분에 계절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호러물과 함께 연말을 보내게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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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인간 한스 올라브 랄룸 범죄 스릴러 시리즈 1
한스 올라브 랄룸 지음, 손화수 옮김 / 책에이름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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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노르웨이 오슬로의 크렙스 가 25번지 아파트에서 2차 대전 당시 저항군으로 활약했으며 이후 정부의 고위관료로 재직하기도 했던 하랄 올레센이 시신으로 발견됩니다. 콜비외른 크리스티안센 경감이 수사에 나서지만 현장은 밀실이나 다름없었고 단서와 탐문 역시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합니다. 우연히(?) 사건에 개입하게 된 18살의 장애 천재소녀 파트리시아 덕분에 크리스티안센 경감의 수사는 급물살을 타게 되고, 입주민들에 대한 탐문과 하랄 올레센의 일기장을 조사한 결과 2차 대전이 한창이던 1940년대 초중반의 노르웨이 저항군의 역사가 사건 자체에 적잖은 영향을 미쳤음을 깨닫게 됩니다.

 

북유럽의 뉴 페이스를 만날 때마다 독특한 개성과 문체를 만끽했던 경험 때문인지 어딘가 문학적인 제목과 낯선 작가의 이름에도 불구하고 적잖은 기대감과 호기심으로 만나본 파리인간입니다. 최근 들어 2차 대전의 상처를 미스터리와 스릴러 속에 녹인 작품들이 심심찮게 출간됐고, 그 가운데 넬레 노이하우스의 깊은 상처나 요 네스뵈의 레드브레스트처럼 매력적인 작품들이 준 좋은 느낌들 덕분에 비슷한 시공간적 배경을 지닌 파리인간이 더 끌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2차 대전의 상흔을 소재로 삼은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파리인간역시 본인의 의지와 관계없이 역사의 소용돌이 속으로 떠밀렸던 힘없고, 나약하고, 불행했던 개인들의 이야기에 초점을 맞춥니다. 모든 등장인물은 시대가 던져준 아픔을 고스란히 맨몸으로 받아들여야했고,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도 그 상처 때문에 잠 못 이루거나, 여전히 아파하고 있습니다.

 

파리인간이라는 제목은 그런 맥락에서 지어진 제목입니다. 작가는 파트리시아의 입을 빌어 파리인간의 정의를 내립니다. “삶의 한 가운데에서 무언가 특히 힘들고 고통스러운 경험을 했던 사람들은 세월이 지나도 그 기억을 떨쳐버리지 못해요. (중략) , 파리인간은 시간이 지나도 과거의 경험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그 비슷한 상황에 자신도 모르게 뛰어들게 되거나 스스로 그런 상황을 무의식적으로 재현하는 사람을 말하는 거죠. 쓰레기 더미에 모여드는 파리 떼를 떠올리면 감이 잡힐지도 모르겠군요.”

크리스티안센 경감과 파트리시아의 수사를 통해 새로운 진실들이 드러날 때마다 파리인간의 정의가 문득문득 떠오르기도 하지만, 작가가 굳이 이런 쉽지 않은 제목을 정한 이유는 사건의 실체와 진범이 밝혀지는 마지막에 순간에 이르러서야 제대로 납득할 수 있게 됩니다.

 

비슷한 시공간적 배경을 지닌 다른 작품들에 비해 역사가 남긴 상처에 좀더 노골적이고 직접적으로 접근한 덕분에 파리인간은 그것만의 차별성과 개성을 갖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지니게 되는 아쉬운 점도 곳곳에서 발견됩니다.

가장 큰 아쉬움은 건조함입니다. 소설보다는 논픽션을 통독한 느낌이랄까요? 크리스티안센 경감과 파트리시아는 인간미가 엿보이는 주인공이라기보다 중립적인 해설자 또는 수사 경과를 설명하는 내레이터 역할에 충실한 캐릭터들입니다. 본문 역시 장문의 수사일지라는 느낌이 강합니다. 전쟁역사학자라는 작가의 이력 때문일 수도 있지만, 딱딱하고 고전적인 사건 중심의 내러티브를 추구하다 보니 주인공에 대한 응원이나 연민의 감정을 자아내기 쉽지 않습니다.

 

두 번째는 크리스티안센 경감과 파트리시아의 캐릭터입니다. 나름 저명인사의 피살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수사는 온전히 크리스티안센 경감 홀로 진행합니다. 팀원은 없고, 보고받는 상사는 이름도 없이 짧게만 등장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리스티안센 경감은 자신만의 독창적인 수사나 추리보다는 장애 천재소녀 파트리시아의 지시대로 움직이는 수동적인 캐릭터에 가깝습니다. 많은 미스터리와 스릴러에서 볼 수 있는 콤비 플레이와는 사뭇 다른 느낌입니다.

 

우연치고는 좀 과하다는 느낌을 주는 등장인물들의 인연이라든가 마지막에 드러나는 진범과 사건의 진실 역시 조금은 아쉬운 면이 없지 않지만, 파리인간에 대한 다양한 시선 연민, 동정, 애정 등 을 묘사하려 했던 작가의 노력을 감안한다면, 충분히 상쇄될 수 있는 정도의 아쉬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책 표지에 보면 한스 올라브 랄룸 범죄 스릴러 시리즈 1’이라는 부제가 붙어있는데, 두 번째 시리즈가 언제쯤 출간될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크리스티안센 경감이 조금은 더 능동적이고 창의적인 수사를 펼치는, 멋진 주인공 캐릭터로 컴백하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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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종증후군 증후군 시리즈 1
누쿠이 도쿠로 지음, 노재명 옮김 / 다산책방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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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곡’, ‘우행록’(개정판 어리석은 자의 기록’), ‘후회와 진실의 빛등을 통해 사회적 문제를 미스터리 속에 묵직하게 녹여냈던 누쿠이 도쿠로의 증후군 시리즈의 첫 작품입니다. 2009년에 발간됐지만 시리즈를 한꺼번에 읽겠다는 생각에 계속 미뤄오다가 이제야 그 첫 권을 읽게 됐습니다.

 

경시청 인사과의 다마키는 형사부장으로부터 비밀임무를 직접 지시받는 특이한 존재입니다. 주위에서 볼 때는 한직으로 밀려난 무기력한 중년으로 보일 뿐이지만, 그는 전직 형사 하라다, 탁발승 무토, 노동자 구라모치 등으로 구성된 비밀수사팀의 수장이며, 겉모습만으로는 생각이나 감정을 종잡을 수 없는 인물입니다. 다마키의 팀이 맡게 된 사건은 최근 몇 년간 도쿄에서 벌어진 20대 남녀의 실종입니다. 딱히 사건이라 할 만한 정황은 없지만, 다마키는 팀원들에게 집요한 탐문을 지시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실종자들 사이에 독특한 관계가 있음을 포착합니다. 하지만 수사가 진행되던 중 실종자 가운데 한 명이 피살된 채 발견됩니다. 수사팀은 용의자를 뒤쫓는 한편, 살인사건에 연루된 것으로 보이는 폭력적인 인디밴드와 그들이 거래한 것으로 추정되는 마약류의 거래루트를 파헤칩니다.

 

그동안 읽었던 누쿠이 도쿠로의 작품에 대한 만족도가 꽤 높았기 때문에 증후군 시리즈에 대한 기대감 역시 그만큼 높았지만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적어도 실종증후군은 조금은 의외다 싶을 정도로 실망감을 느낀 작품이었습니다.

 

제목부터 실종에 관한 이야기임을 표방하고 있지만, 정작 실종자체는 도입부 역할만 할뿐 메인 스토리는 그와는 관련 없어 보이는 평범한 폭력과 살인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물론 특이한 형태의 실종이라는 사회적 현상을 소재로 삼은 점이나, 다마키를 비롯한 수사팀의 캐릭터들에 대한 묘사는 사실감과 치밀함 덕분에 매력적이었지만, 굳이 실종을 끌어들이지 않았더라도 나머지 이야기의 진행에 무리가 없었을 정도로 마치 앞과 뒤가 다른 이야기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러다 보니 엔딩으로 갈수록 의문점만 쌓일 뿐이었습니다. “왜 이 책의 제목을 실종증후군이라고 지었는가?”, “다마키와 그의 팀원들은 은밀하면서도 터프하고, 각자만의 탁월한 능력을 지니고 있음에도 왜 이런 식의 수사를 진행할 수밖에 없는가?”, “이렇게 우수한 팀원들이 몇날며칠을 고생해가면서 수사한 사건의 실체는 무엇인가?” 등등...

정리하자면, ‘실종으로 시작됐지만 살인사건의 발생을 기점으로 이야기는 실종과는 먼 방향으로 급전환됐고, 결국 뛰어난 수사팀들의 평범한 범인잡기에 그쳤다고 해야 할까요? 누쿠이 도쿠로가 곳곳에서 반복적으로 언급한 이 작품의 메시지 가족에게서,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게서 벗어난다고 해도 '스스로'에게서는 벗어날 수 없다 가 왠지 공허하게만 들리는 것은 정작 이 메시지를 담고 있어야 할 내용 자체가 너무 빈약했기 때문입니다.

 

기대가 컸기 때문에 실망감이 크게 느껴졌을 수도 있지만, 곧이어 읽을 살인증후군이나 유괴증후군에서는 증후군 시리즈에 대한 호평을 공감할 수 있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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