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드맨 데드맨 시리즈
가와이 간지 지음, 권일영 옮김 / 작가정신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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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프로야구 두산의 시스템을 화수분 야구라고들 칭하는데, 일본 미스터리 역시 화수분이라는 표현이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종종 하곤 합니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새로운 소재와 캐릭터, 기발한 발상으로 무장한 신인들의 작품이 매년 풍성하게 쏟아지는 일본 미스터리 문단을 지켜보고 있으면 그저 부러울 따름입니다. 한국도 최근 들어 수준 높은 신작과 신인들이 독자들을 찾고 있지만, 장르물 자체를 가볍게 여기는 풍토 때문인지 일본만큼의 화수분을 기대하긴 아직은 이르다는 생각입니다.

 

아무튼... 가와이 간지라는 걸출한 신인이 자아낸 독특한 데뷔작 데드맨32회 요코미조 세이시 미스터리 대상을 수상하기에 조금도 모자라지 않은 수작입니다. 신체의 일부가 훼손된 채 발견된 여섯 구의 연쇄살인 피해자들, 시마다 소지의 점성술 살인사건속 아조트를 연상시키는 엽기적 살해수법, 그리고 자신을 피살자들의 조각난 신체부위로 접합된 데드맨이라 여기는 정체불명의 남자 등 어디로 튈지 모르는 상상력의 산물들이 작품 곳곳에 포진하고 있어서 읽으면서 내내 긴장감 속에 다음 상황을 기대하게 만들 뿐 아니라, 장르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게 만드는 묘한 매력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또한 차분하면서도 엉뚱한 발상을 지닌 중년의 가부라기를 비롯, 괴짜 영건 히메노, 불만분자 마사키, 프로파일러이면서도 프로파일링을 불신하는 사와다 등 개성 강한 캐릭터로 뭉친 4인조 경시청 형사들의 활약 역시 너무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게 적절한 굴곡을 지닌 채 이야기를 이끌고 있습니다.

 

하지만 신인의 데뷔작을 비범하게 만드는 것은 역시 예측불허의 이야기 전개입니다. 조금씩 드러나는 데드맨과 그를 간호하는 여의사의 정체, 몇 달이 지나도록 오리무중인 상태에서 가부라기에게 날아든 의문의 이메일, 그를 기반으로 가부라기 4인조가 밝혀내는 오래된 구원(舊怨)의 히스토리, 그리고 진범 확증과 함께 폭로된, 그릇된 탐욕이 야기한 참혹한 연쇄살인의 진실 등 새로운 스토리텔러의 진가를 목격할 수 있는 다양한 에피소드들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진행되고 있어서 반나절도 채 안 돼 마지막 페이지까지 달릴 수 있었습니다.

 

번역자의 후기를 보면 작가의 변을 짧게나마 접할 수 있는데, 가장 인상적이었던 대목은 미스터리를 쓸 거라면 점성술 살인사건을 쓰던 즈음의 시마다 선생이 지녔던 기개에 지고 싶지 않았습니다.”였습니다. ‘점성술 살인사건에 대한 오마주에 가까운 작품을 쓰면서 이만큼 자신감 있는 변을 내놓은 걸 보면 후속작에 대한 기대를 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올해 7, 일본에서 가부라기 4인조가 활약하는 드래곤플라이가 출간됐다고 하는데, 내년쯤엔 한국에서도 만나볼 수 있으리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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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날은 스스로를 상처입힌다 밀리언셀러 클럽 110
마커스 세이키 지음, 장성주 옮김 / 황금가지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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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서점이나 카페를 통해 대단한 데뷔작이라는 평을 여러 번 접해서 꽤 오랫동안 기대감을 가져왔던 작품입니다. 물론 2의 데니스 루헤인이라는 평을 봤을 땐 조금은 과장이 아닐까 여겼던 게 사실인데 결과적으론 그 평을 120%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범죄의 세계에서 벗어나 연인인 캐런과 함께 새 삶을 살고 있는 대니 앞에 7년 전 함께 전당포를 털다가 홀로 체포됐던 에번이 나타납니다. 당시 에번은 대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과욕을 부렸고 끝내 총격으로 사상자를 냈습니다. 대니는 도망쳤지만 에번은 12년 형을 선고받았다가 가석방으로 풀려난 것입니다. 에번이 나타난 후로 대니에게 지옥과도 같은 날들이 시작됩니다. 에번은 대니를 협박하며 제대로 된 한 탕을 벌일 것을 요구합니다. 피도 눈물도 없는 폭력기계로 변한 에번의 요구를 거절했을 경우 어떤 보복이 돌아올지 잘 알게 된 대니는 겨우 얻은 소중한 행복을 지키기 위해 결국 한 탕에 발을 들이게 됩니다. 하지만 대니는 에번의 계획 중 자신이 들은 건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습니다. 예기치 못한 사태들이 벌어지고 무고한 희생자가 발생합니다. 대니는 패닉 상태에 빠지지만 이미 물은 엎질러진 후였습니다. 2주에 걸친 대니의 진정한 지옥은 그때부터 시작됐던 것입니다.

 

간결하면서도 여러 가지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원제(‘Blade Itself’)에 못잖게 번역 제목 역시 작품의 내용과 작가의 의도를 잘 반영하고 있습니다. 대니와 에번 모두 스스로를 상처 입히는 예리한 칼날이면서, 동시에 주변 인물들까지 다치게 만드는 예측할 수 없는 흉기란 뜻입니다.

 

마커스 세이키는 데뷔작답지 않은 필력과 촘촘한 구성으로 2주에 걸쳐 벌어지는 숨 막히는 이야기를 한순간도 긴장감을 놓치지 않고 이끌어갑니다. 사건 자체만 놓고 보면 블록버스터급도 아니고 화려한 액션이 난무하지도 않는 소품이지만, 여러 인물들이 겪는 심리적 갈등을 잘 그려냈고 유연한 이야기 전개와 적절한 반전까지 잘 버무린 덕분에 스릴러라기보다는 인간의 본성을 테마로 한 한 편의 고전을 읽은 느낌이었습니다. 특히 대니가 겪는 갈등은 독자들로 하여금 내가 대니라면?”이란 생각이 저절로 들게 할 정도로 치밀하고 사실감 있게 묘사됩니다. 대니가 맞닥뜨리는 여러 차례의 선택의 기로마다 마치 내가 그 상황에 놓여있는 듯한느낌을 받게 되는 것은 마커스 세이키가 그만큼 대니와 그의 감정에 대해 오래, 깊이 고민한 덕분일 것입니다.

 

반전으로 유명한 스릴러나 미스터리에 비하면 이 작품의 반전은 그리 대단하거나 충격적인 편은 아니지만, 적어도 무게감에 있어선 압도적인 면모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 역시 마커스 세이키가 사건보다는 인물, 특히 갈등과 번민에 휩싸인 개인대니에 더 천착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란 생각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출판사의 홍보 글에 대작’, ‘화려하고 웅장한 스케일등의 표현이 들어갔거나 CIA, MI6, 마약카르텔 등 기관의 힘을 빌린 작품을 좋아하지 않는 편인데, 그 이유는 그런 작품일수록 정작 중요한 개인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기관의 힘개인이 조화를 잘 이룬 명작들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작품들을 더러 만나본 경험이 있다 보니 스케일은 상대적으로 작아 보여도 평범한 개인들이 외줄타기에 다름없는 우여곡절을 겪어내는 이야기가 더 매력적으로 느껴진다는 뜻입니다. 그런 점에서 칼날은 스스로를 상처입힌다는 스케일의 맛은 떨어질지 모르지만, 읽는 동안의 긴장감은 물론이고 읽고 난 후의 기억과 여운을 오랫동안 또렷이 남길 명품으로 보입니다.

 

이 작품 외에 유일하게 한국에 출간된 대니얼 헤이스 두 번 죽다를 곧 읽을 계획인데, 마커스 세이키의 다른 작품들도 국내에 좀더 많이 출간되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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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긴 잠이여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50
하라 료 지음, 권일영 옮김 / 비채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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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일 만에 탐정에 복귀한 사와자키를 찾아온 건 전직 야구선수인 30대 남성입니다. 그는 11년 전 아파트 6층에서 자살한 의붓 누이의 죽음의 진상을 알고 싶어 합니다. 자살, 그것도 11년 전의 일이라 다소 난감한 태도를 보였던 사와자키는 의뢰인이 괴한에게 피습 당하자 정식으로 사건에 뛰어듭니다. 누이의 자살을 직접 목격했다는 목격자들은 하나같이 애매한 진술만 늘어놓았고, 주변 인물들 역시 과거의 불행한 일을 들춰내는 일에 비협조적인데다 의뢰인을 비롯하여 사와자키 본인까지 괴한의 습격을 받는 등 험난한 곡절을 겪지만 사와자키는 기어이 11년 전의 진실에 다가섭니다. 하지만 거기엔 추악한 탐욕과 비열한 은폐 시도만이 남아있을 뿐, 결국 어느 누구도 행복해질 수 없는 결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니시신주쿠의 해가 들지 않는 2층 사무실, 필터 없는 피스담배, 아직도 굴러가는 것이 신기한 낡은 애차 블루버드, 10년 넘게 악연으로 이어진 조연(사라진 옛 파트너 와타나베, 신주쿠 형사 니시고리, 폭력단 세이와카이의 중간간부 하시즈메) 등 시리즈 첫 편에서부터 꾸준히 사와자키의 캐릭터를 뒷받침해온 공간, 소품, 인물들은 이제 익숙함을 넘어 친숙함까지 느끼게 만듭니다.

반면, ‘안녕 긴 잠이여의 시간적 배경은 시리즈 첫 편으로부터 8년의 시간이 흐른 것으로 설정돼있는데, 사와자키의 노화가 너무나도 아쉽게 느껴지는 대목입니다. 일본에서는 네 번째 작품(‘어리석은 자는 죽는다’)까지 출간된 것으로 아는데, 또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러 사와자키가 몇 살을 더 먹은 상태일지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저 과작(寡作)으로 유명한 하라 료를 원망하는 수밖에 없는 일이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사와자키의 매력은 여전했고, 그의 집요하면서도 시크한 탐문 역시 언제나처럼 쾌감과 함께 카리스마를 만끽하게 해줍니다. 하라 료가 얼마나 많은 고민을 하며 집필했을지 쉽게 눈치 챌 수 있을 만큼 이야기와 캐릭터는 복잡한 거미줄처럼 얽혀있습니다. 때론 머릿속을 어지럽게 만들거나 모호함에 빠지게 만들기도 하지만 그것들을 하나씩 풀어가면서 사와자키의 특별한 재능을 만끽하는 것이야말로 이 시리즈에서 맛볼 수 있는 가장 큰 기쁨이라는 생각입니다. 또 사건을 해결하고도 마냥 좋아라 할 수 없는 사와자키의 씁쓸함 역시 이 시리즈의 고유한 매력이기도 합니다.

 

다만, 아쉬운 점을 몇 가지 꼽아보면... 우선, 전작들을 읽지 않은 독자에겐 사와자키의 공간과 소품과 조연들이 다소 생소하거나 뜬금없게 보일 수밖에 없다는 점입니다. 공간과 소품이야 논외로 칠 수 있지만 1~2편에 비해 역할이 훌쩍 커진 니시고리 형사나 폭력배 하시즈메의 경우 전작들의 정보 없이는 따라가기 쉽지 않아 보였습니다.

두 번째는 중반부에 느닷없이 전혀 새로운 이야기로 급선회한 점입니다. 비유하자면, 어찌어찌 어렵게 수사를 하다가 막다른 골목에 부딪혔는데, 그 돌파구라는 것이 전혀 새로운 등장인물을 통해, 그것도 우연히 얻어진 것은 물론 그때까지의 사와자키의 노력을 허무하게 만들며 전혀 새로운 방향으로 이야기를 틀어버린 것 같다는 뜻입니다.

세 번째는 전작과 비슷한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이야기 구조가 상대적으로 심플하다는 점, 그래서 전개가 다소 느슨할 수밖에 없었는데 거기에다 동어반복적인 묘사가 자주 등장하는 바람에 지루하게 읽히는 대목이 적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실제로 이 작품으로 사와자키를 처음 만난 한 독자는 지루해서 중도에 포기했다라는 서평을 남겼는데, 그래서인지 사와자키와의 첫 만남으로 안녕, 긴 잠이여를 택하는 것은 만류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외에, 비교적 사소한 것들이지만, (, 일본 전통 가면악극)에 대한 설명이 필요 이상 장황해 보인 점,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초중반에는 그리 자주 눈에 띄지 않던 오타가 후반부로 갈수록 늘어난 점, 일부 조연들의 역할이나 그들이 안고 있는 비밀 또는 혐의점들이 마지막까지 깔끔하게 마무리되지 못한 점 등이 아쉬움으로 남았습니다.

 

하지만 이런저런 아쉬운 점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페이지를 덮었을 때, “이제 또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나?”라는 생각이 앞선 것은 비단 저만의 경험은 아닐 것입니다. 애정하는 작가와 주인공은 언제나 미스터리 독자에게 다음 이야기에 대한 갈증만 남겨놓곤 하는데, 그저 후속작인 어리석은 자는 죽는다의 출간 소식이 하루라도 빨리 들려오기를 기대할 뿐입니다.

 

사족 1.

시리즈 세 작품 모두 좋아하지만 굳이 호감도를 따진다면 내가 죽인 소녀’ > ‘그리고 밤은 되살아난다’ > ‘안녕, 긴 잠이여순이 될 것 같습니다.

 

사족 2.

안녕, 긴 잠이여라는 제목을 보자마자 하라 료가 헌사를 바친 레이먼드 챈들러의 필립 말로 시리즈제목들 - ‘안녕, 내 사랑(Farewell, My Lovely)’빅 슬립(Big Sleep)‘ - 에서 따온 게 아닐까 추측했는데, 해설을 보니 역시나 헛짚은 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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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죽인 소녀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16
하라 료 지음, 권일영 옮김 / 비채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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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와자키 시리즈’ 3안녕, 긴 잠이여를 읽기 전에 전작인 1편과 2편을 다시 읽었습니다. 얼마 전 서평을 올린 1그리고 밤은 되살아난다와 마찬가지로 2편인 내가 죽인 소녀역시 서평을 쓰지 않던 시절에 읽은 작품이라 다시 한 번 꼼꼼히 읽으면서 3편을 위한 준비운동을 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사건의 진상과 범인을 아는 상태에서의 두 번째 읽기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미와 긴장감은 여전했습니다. 오히려 처음 읽었을 때 소홀히 넘겼던 문장들이나 상황들을 천천히 되새김질하듯 즐기다 보니 속도전으로 페이지를 넘겼던 첫 번째 읽기때 얼마나 많은 부분을 놓쳤는지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보통은 사건을 의뢰받거나 자발적으로 사건을 맡은 탐정이 진실 혹은 범인을 찾겠다는 명확한 스탠스를 취하기 마련이지만, ‘내가 죽인 소녀의 경우엔 휘말렸다.”라는 표현이 어울릴 만큼 사와자키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 11세 소녀의 유괴-살해 사건에 쓸려 들어가게 됩니다.

사와자키는 낯선 괴전화를 받고 마카베의 집을 찾지만 오해받기 딱 좋은 상황에서 마카베의 11살 딸 사야카의 유괴 공범으로 체포됩니다. 혐의는 곧 풀렸지만 다시금 괴전화를 받은 사와자키는 본의 아니게 유괴범의 지시를 받게 된 것은 물론 사야카의 몸값을 배달하는 역할까지 맡게 됩니다. 뒤늦게 오해를 완전히 풀어낸 사와자키에게 사야카를 찾고 유괴범을 잡아 달라.”는 관계자의 정식 의뢰가 들어옵니다. 관할서인 메지로 경찰서 수사팀과 사사건건 부딪히면서도 의심스러운 인물들을 조사하며 열정적으로 조사를 이어나갔지만 (작품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결국 사와자키에게 들려온 건 사야카가 시신으로 발견됐다는 소식이었습니다. 분노보다 사와자키를 더 사로잡은 건 내가 소녀를 죽였다.”라는 죄책감이었습니다.

 

사건은 해결 기미는커녕 시간이 흐를수록 원점으로 돌아갈 뿐이고, 수많은 등장인물들이 독자들의 예상을 여지없이 배신하면서 동분서주합니다. 막판 반전과 엔딩에선 어느 정도 예상 가능했던 장면을 마주하고도 뒤통수를 제대로 맞은 기분이 듭니다. 그리고 그제서야 작가가 내가 죽인 소녀라는 다소 난감한 제목을 붙인 이유를 눈치 챌 수 있습니다. 작품 내용을 복기하며 제목에 내재된 의미를 곰곰이 생각해보면 내가 죽인 소녀라는 제목이 교묘하면서도 고도로 위장된, 그래서 이 작품에 딱 맞는 제목이란 점을 깨달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야기 자체도 재미있지만 역시 이 시리즈의 가장 큰 매력은 사와자키의 캐릭터라는 생각입니다. 사건 관계자를 탐문하거나 용의자를 몰아붙일 때면 얼음장 같은 시크한 태도와 촌철살인 식의 짧고 굵은 한마디로 정신을 번쩍 나게 합니다. 탐정의 개입을 못 마땅히 여기고 그저 권위로 자신들의 체면을 세우려던 메지로 경찰서의 형사들은 사와자키의 쿨하고 빈틈없는 태도에 늘 찌그러지기 바쁩니다. 독자들에게 쾌감을 선사하는 최고의 대목입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결정적인 대목에서 독자들이 기대했던 친절한 설명이 다소 안이하게 처리된 점입니다. 사건의 진실을 밝히는 과정, 즉 사와자키가 누구도 눈치 채지 못한 사소한 단서에서 출발하여 예상 밖의 결과를 얻어내는 일련의 과정이 전부 사와자키의 뇌 속에서 진행된 은밀한 추리의 결과로 처리되다 보니 팩트 폭격의 시원한 맛을 기대했던 독자에겐 좀 생뚱맞은 비약처럼 느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사와자키의 설명을 듣다보면 , 그랬던 거네.”라며 심정적으로 동조할 수는 있지만, 개인적으론 2% 이상 부족하게 느껴진 아쉬움이 남고 말았습니다.

 

1, 2편의 복습을 끝내고 이제 따끈따끈한 신간인 안녕, 긴 잠이여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출판사 소개글을 안 봤기 때문에 개인적인 망상일 가능성이 높지만, ‘안녕, 긴 잠이여라는 제목이 혹시 레이먼드 챈들러의 필립 말로 시리즈에서 차용된 건 아닌지 궁금해집니다. ‘그리고 밤은 되살아난다의 말미에 작가 후기 대신 말로라는 사나이라는 초단편소설을 실을 정도로 하라 료가 레이먼드 챈들러에게 헌사를 바친 점을 감안하면, ‘필립 말로 시리즈가운데 안녕, 내 사랑(Farewell, My Lovely)’빅 슬립(Big Sleep)‘을 조합해서 제목을 지은 게 아닐까, 하는, 억지스러운 예측을 해보게 됩니다. 실제로 그런 오마주에 가까운 이야기가 전개된다면 읽는 재미가 배가될 수 있겠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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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밤은 되살아난다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9
하라 료 지음, 권일영 옮김 / 비채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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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와자키 시리즈세 번째 작품인 안녕, 긴 잠이여서평단에 뽑혀 책을 배송 받았지만, 그 전에 오래 전에 읽고도 서평을 남겨놓지 못한 시리즈 1편과 2편을 다시 한 번 읽어보기로 했습니다. 이야기 자체도 잘 기억나지 않을뿐더러 아무래도 주인공의 성장과정을 제대로 맛보려면 순서대로 읽어야 할 것 같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배신한 옛 동료의 이름을 딴 와타나베 탐정사무소라는 간판을 단 채 신주쿠 외곽에서 시크한 탐정으로 살아가고 있는 중년의 사와자키는 재벌가 도신그룹의 딸 나오코로부터 이혼을 앞두고 갑자기 사라진 남편 사에키를 찾아달라는 의뢰를 받습니다. 평범한 의뢰처럼 보였지만 사와자키가 조사를 시작하자마자 예상치 못한 일들이 연이어 벌어집니다. 사에키의 주거지에서 피살된 시신이 발견되는가 하면, 굴곡 많은 가족사를 지닌 도신그룹의 일족들과 충돌하기도 하고, 심지어 선거유세 중 피격을 당한 현직 도쿄 도지사는 물론 구린 냄새를 풍기는 그의 형제 및 참모들과도 맞닥뜨리게 됩니다. 과거 사에키가 르포라이터로서 조사하고 있던 사안에 주목한 사와자키는 이 사건이 단순 실종 이상의 의미를 지녔음을 확신합니다.

 

사와자키는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지나치게완벽한 인물입니다. 모든 것을 초월한 듯한 냉정함, 아무도 보지 못하는 디테일을 포착해내는 천리안, 본능적인 욕망조차 쿨하게 걷어차는 발군의 이성 등 남자라면 한번쯤은 로망처럼 꿈꿔봤을 이상적인 캐릭터입니다. 당연한 얘기지만, 장르물 독자에겐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매력적인 탐정이 아닐 수 없습니다.

 

본편 뒤에 작가 후기를 대신 한 초단편소설 말로라는 사나이가 실려 있습니다. 제목에서 감지할 수 있듯 레이먼드 챈들러와 그가 창조한 하드보일드 캐릭터 필립 말로에 대한 하라 료의 헌정사에 다름 아니지만, 개인적으론 (같은 문화권이라서 그런지) 여러 면에서 사와자키에게 더 호감이 느껴진 게 사실입니다. 폐차나 다름없는 블루버드를 몰며 필터 없는 담배를 피울 때마다 그의 고민이 피부에 와 닿았고, 거들먹거리는 상대방을 간결한 말 한마디로 찌그러뜨릴때마다 쾌감을 느낄 수 있었고, 사소한 단서에서 아무도 감지하지 못한 사실들을 포착해낼 때마다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사람 맞아?”라는 의문이 들 정도의 냉정하고 시크한 면모 때문에 얄미워 보일 때도 있었지만, 사와자키의 행보는 독자들로 하여금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싶게 만들만큼 매력적입니다.

 

서평이라기보다 사와자키 예찬론에 가까운 글이 돼버렸지만, 이 작품의 진가는 사건 자체나 해법보다도 주인공 사와자키의 매력에 기인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에 당연하고도 어쩔 수 없는 결과라는 생각입니다.

물론 아쉬운 부분도 분명 있습니다. 사건을 복잡하게 보이려는 의도였겠지만, 두세 번씩 읽어야 겨우 이해가 되는 난해한 상황 설명들이 곳곳에서 발견됐고, 몇몇 인물들의 행동은 다분히 억지스럽고 작위적으로 보이곤 했습니다. 평범한 개인의 실종에 정치권력과 재벌이 끼어들다 보니 인물간의 관계 자체가 거미줄처럼 복잡해질 수밖에 없었겠지만, 그것을 독자들이 편안하게 볼 수 있도록 풀어내는 과정에서는 분명 아쉬운 점이 있었습니다.

편집에 관해 한 가지만 지적하자면, 중반까지만 해도 눈에 띄지 않던 오타가 후반부로 갈수록 급증한 점입니다. 심지어 사와자키와 사에키의 이름이 혼동된 부분도 눈에 띄었는데, 단순히 옥의 티라고 하기엔 꽤 큰 실책이었다는 생각입니다.

 

따끈따끈한 신간 안녕, 긴 잠이여가 눈앞에서 어른거리지만, ‘그리고 밤은 되살아난다를 읽고 보니 역시 시리즈 두 번째 작품인 내가 죽인 소녀도 제대로 복습해야만 할 것 같습니다. 새 이야기에 대한 궁금증도 참을 수 없지만 그보다는 사와자키의 인생행로를 순서대로 따라 가면서 그가 어떻게 성장하는지를 지켜보는 게 더 흥미로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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