킹을 찾아라 노리즈키 린타로 탐정 시리즈
노리즈키 린타로 지음, 최고은 옮김 / 엘릭시르 / 2013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동안 본격 미스터리에 소원했던 탓인지 최근 연이어 읽은 본격 미스터리 작품들에게 잘 적응을 못하고 있습니다. 사건 풀이에만 너무 집중하다 보니 현실감이나 몰입도도 떨어지고, 울컥하게 만들거나 분노를 자아내게 만드는 캐릭터들의 감정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고 할까요? 애초 본격 미스터리에서 그런 걸 기대해선 안 되지만 새삼 아쉽게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킹을 찾아라는 데뷔 이래 본격 미스터리의 길을 걸어왔다는 노리즈키 린타로의 최신작입니다. 4중 교환살인이라는 희대의 사건을 탐정이자 추리 작가인 노리즈키 린타로와 그의 아버지인 사다오 총경이 함께 풀어가는 이야기입니다.

 

우울증에 걸린 아내, 구두쇠 삼촌, 히키코모리 형 등을 교환 살해하기 위해 모인 네 사람은 트럼프 카드를 통해 대상자와 살해 순서를 정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뽑은 두 장의 카드를 일종의 계약서처럼 소지합니다. 교환살인 계획은 첫 희생자의 등장으로 무난히 진행되는 것처럼 보였지만, 단 한 번의 불운으로 인해 명탐정 린타로의 레이더에 걸려듭니다. 물론 린타로의 행보 역시 순탄하게 진행되진 않습니다. 엉뚱한 인물 탓에 정보가 언론에 유출됐고, 그로 인해 교환 살해범들의 행적은 예상과 다른 방향으로 전개됐기 때문입니다.

 

한순간도 놓칠 수 없는 긴장감 덕분에 페이지는 잘 넘어갑니다. 사건 현장이라고 해봐야 딱 한 번 방문한 것이 전부인 린타로의 추리는 감탄을 자아내고, 트럼프 카드에 감춰진 비밀은 밀실에 버금가는 트릭을 담고 있습니다. 또한 킹을 찾아라는 독자들의 예상을 깔끔하게 배반할 만큼 역설적인 제목입니다.

이 모든 장점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때의 느낌은 그저 덤덤한 정도였습니다. “, 이렇게 사건이 해결됐구나.”라는 느낌 뿐 그 이상의 감흥은 없었습니다. 말하자면, 교환살인에 참가한 범인들에 대한 증오심이나 동정심도 없었고, 살해된 피해자들 역시 통쾌하다든가, 안타깝다든가 하는 느낌을 주지 못했습니다. 소설이라기보다 팩트 체크를 본 느낌이랄까요?

물론 주요 인물들의 캐릭터와 감정에 대한 묘사는 결코 부족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회파 미스터리나 사연 있는 이야기를 좋아하는 취향 때문인지 대체로 기계적인 느낌을 많이 받았고, ‘안방 탐정린타로의 뛰어난 추리에 의존하는 스토리 역시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재미있게 읽은 건 맞는데, 어쩐지 남는 것이 없는 허전함만 기억하게 될 것 같습니다. 노리즈키 린타로와는 처음 만난 작품인데, 책장에 오래 소장 중이라 다음에 만나게 될 게 분명한 잘린 머리에게 물어봐에서는 킹을 찾아라보다는 조금은 더 남는 것을 만끽할 수 있기를 기대해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민음사 / 2013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하루키의 신작에 대한 폭발적인 사전 예약을 놓고 우리는 하루키를 읽는 것인가? ‘하루키 읽기를 읽는 것인가?”라는 다분히 독설 담긴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하루키의 경우 개인적으로 작품에 따라 호볼호가 좀 극명해서인지 무척 공감되는 내용이었습니다. 오래 전 조금은 등 떠밀리듯 하루키를 읽기 시작한 게 맞고, ‘1973년의 핀볼처럼 젊은 날들을 돌아보게 해준 수작도 있었지만, ‘1Q84’처럼 어떻게든 버티다가 결국 포기했던 작품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색채가 없는~’의 경우 “‘상실의 시대의 속편이라는 부제가 더 어울릴...”이라는 한 기자의 100자 평 때문에 광풍 같은 사전 예약에 관한 독설에 공감하면서도 읽고 싶어진 작품입니다.

 

다자키 쓰쿠루가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이었던 16년 전의 이야기와 이제는 36살이 된 그가 오래된 상처와 정면으로 마주치는 이야기로 구성돼있습니다. 완벽한 오각형처럼 틈새 하나 없는 우정을 나누던 다섯 명의 친구들. 그중 네 명의 이름엔 색깔을 의미하는 한자가 들어있지만, 다자키 쓰쿠루의 이름만은 아무 색채도 들어있지 않습니다. 모두 고향인 나고야에서 대학에 진학했지만, 철도역을 만드는 엔지니어를 꿈꾸던 쓰쿠루는 홀로 도쿄로 향합니다. 그리고 2년 후, 고향 친구들로부터 갑작스런 절교를 선고받습니다. 영문 모를 일방적 절교는 쓰쿠루를 죽음의 문턱까지 밀어붙였고, 이후로도 그의 삶의 방향을 뒤흔드는 큰 사건으로 남습니다.

36살이 된 쓰쿠루는 두 살 연상의 연인 사라로부터 이제는 그들에게 16년 전의 일을 물어볼 때가 된 것 같다는 말을 듣곤 판도라의 상자를 향해 순례를 떠나는 기분으로 친구들을 만나기로 결심합니다. 하지만 쓰쿠루를 기다리고 있는 건 누군가의 죽음, 누군가의 충격적인 설명, 그리고 마지막 진실을 품고 있는 멀고 먼 핀란드로의 고통스런 여정이었습니다.

 

이 작품이 가장 어필할 계층은 쓰쿠루의 또래인 30대 중반입니다. 10대와 20대로부터 너무 멀지도, 너무 가깝지도 않은 나이. 추억할 친구들과 사건들이 너무 선명하지도, 너무 많이 잊히지도 않은 나이. 또 젊다고도 할 수 없고, 중년이라고 불리기엔 좀 억울한, 그런 나이.

하루키가 쓰쿠루의 나이를 서른여섯으로 설정한 것도 그런 맥락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 나이라면 서른도 겪었고, 그 덕분에 조금은 성숙한 관점으로 세상과 자신을 돌아볼 수 있기도 하고, 평생 기억에 남을 인물이나 사건을 한두 번쯤 겪기에 적당한 나이입니다.

 

인물, 소재, 사건 못잖게 이 작품에서 중요하고 의미 있는 장치는 프란츠 리스트의 순례의 해라는 피아노 소곡집입니다. 그 가운데 ‘Le Mal du Pays’라는 5분이 조금 넘는 피아노곡은 쓰쿠루의 친구 중 하나였던 시로가 가장 즐겨 쳤던 곡이자 쓰쿠루에게는 편안한 안식을 건네줬던 곡입니다. 직역하면 향수(鄕愁) 정도인데, 본문의 설명에 따르면 전원 풍경이 사람의 마음에 불러일으키는 영문 모를 슬픔이라고 합니다.

아카(), 아오(), 시로(), 구로() 등 이름에 들어간 색깔만큼 개성이 강했던 친구들 속에서 쓰쿠루는 스스로를 색채도 없고, 개성도 없는 텅 빈 인간이라고 여겨왔습니다. 그들로부터 버려진 후엔 그 어떤 인간관계도 일정 거리 이상으로 좁혀본 적이 없습니다. 여자들 역시 적당한선에서 만나고 헤어짐을 반복할 따름이었습니다. 그랬던 쓰쿠루가 마치 순례를 떠나듯 자신의 과거와 조우하려 할 때 그를 지배한 것은 과거에 대한 궁금함보다는 알 수 없는 긴장과 두려움입니다. 그 복잡한 감정들을 대변해주는 것이 바로 쓸쓸함이 진하게 배어있는 피아노곡 ‘Le Mal du Pays’입니다. 이 곡은 작품 곳곳에 수시로 등장하여 쓰쿠루의 심리와 감정을 설명하는데 꽤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책을 읽다가 더는 안 되겠다 싶어, 음원 서비스에서 이 곡을 찾아내선 내내 들으면서 남은 분량을 읽었습니다. 막연한 느낌이긴 하지만 쓰쿠루의 긴장과 두려움이 조금은 구체적으로 느껴졌다고 할까요?

 

이 작품의 비주얼 역시 무척 인상 깊었는데, 리스트의 피아노 소곡집이 청각적 즐거움을 선사했다면, 쓰쿠루의 취미인 수영, 쓰쿠루가 사랑하는 철도역, 쓰쿠루가 사먹거나 직접 만든 몇 가지 와인과 요리, 쓰쿠루-구로-시로가 뒤엉킨 꿈속의 쓰리섬 섹스, 구로가 살고 있는 핀란드 도심과 호숫가의 풍광 등은 직접 해보고 싶고, 먹어보고 싶고, 가보고 싶게 만들 정도로 생생하게 그려져서 마치 눈앞에서 지켜보는 듯한 시각적 즐거움을 제공했습니다.

 

쓰쿠루의 젊은 날의 비밀과 상처는 누구나 경험할 만한 보편적인 것들은 아니지만, 그 무렵 지독한 통과의례를 겪으면서 자신의 절망과 자기연민을 타인들에게 들키지 않으려 전전긍긍했던 많은 쓰쿠루들이 경험했을 법한 일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서른여섯이 된 쓰쿠루들이라면 색채가 없는~’의 마지막 장을 덮은 후 아직은 완전히 풍화되지 않은 그 시절을 떠올리며 조금은 부끄럽기도, 조금은 그립기도, 조금은 회한에 잠기기도 할 것 같습니다.

 

하루키와 매번 궁합이 잘 맞는 편은 아니지만, ‘색채가 없는~’은 비교적 좋은 기억으로 남을 것 같습니다. 평범한 청춘물 혹은 성장소설에 머물 수도 있는 소재였지만, 쓰쿠루의 20여 년의 삶을 바느질하듯 꼼꼼히 그려냈고, 그의 인생의 결정적인 한 챕터가 열리고 닫히는 순간들을 하루키 특유의 건조하면서도 세밀한 문장들로 잘 포착해냈기 때문입니다. 느리고 정적인 듯 보이지만 실은 무척이나 격하게 요동치는 이야기를 담아낸 색채가 없는~’은 언젠가 더 나이를 먹은 후 다시 읽는다면 또 다른 의미와 감흥을 전해줄 것만 같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날개 달린 어둠 - 메르카토르 아유 최후의 사건
마야 유타카 지음, 박춘상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3년 5월
평점 :
절판


이마카가미 가문의 본거지인 창아성의 이토로부터 사건 의뢰와 협박장을 동시에 받은 탐정 기사라즈와 조수격인 추리소설가 는 창아성 도착과 동시에 목이 잘린 두 구의 시신과 마주칩니다. 그리고 그 이후로 창아성에 거주하던 사람들이 차례로 살해당합니다. 하나같이 목이 잘린 채 발견되지만, 매번 서로 다른 상징들이 사체 곁에서 발견됩니다. 얼마 후 진범을 밝히겠다며 관계자들을 한 자리에 모았다가 엉뚱한 사태를 맞이한 기사라즈는 그 직후 모습을 감추고, 그와 동시에 기이한 외모의 탐정 메르카토르 아유가 창아성에 등장합니다. 하지만 살인은 쉴 새 없이 계속 일어나고, 이제 창아성의 생존자는 얼마 남지 않게 됩니다.

 

애꾸눈 소녀는 아직 읽지 못했지만 좋은 평을 받았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어서, 그 작가의 데뷔작이라는 날개 달린 어둠을 나름 기대를 갖고 읽게 됐습니다. 오랜만에 읽는 본격 미스터리라 그런지 창아성이라는 서양식 저택이 등장하는 순간 반갑기도 하고, 반대로 약간 맥이 빠지기도 했습니다. 서양식 저택이 주 무대인 미스터리에서 그다지 재미를 보지 못한 것이 가장 큰 이유였고, 이 작품이 쓰인 시기가 1991년이라는 점 때문에 왠지 올드한 전개나 결말을 만나게 되지 않을까, 라는 우려가 두 번째 이유였습니다.

 

결론부터 얘기하면, 읽는 내내 불편함과 불만을 떨쳐내기 힘들었고, 1991년에 출간된 데뷔작이란 점을 감안하더라도 좋은 평을 하기는 어려워 보였습니다. 하지만 줄거리를 정리하느라 한 발 떨어져서 이라는 작품 전체를 바라보자 읽는 동안 느낀 불편과 불만이 대체로 나무에서 기인했다는 점을 알게 됐습니다. 말하자면, 얼개 자체는 본격 미스터리로서 적절히 짜였지만 디테일에서 아쉽고 부족한 부분이 많았다는 뜻입니다. 서평을 쓰기 전만 해도 별 두 개를 염두에 뒀지만 나중에 한 개를 추가한 건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가장 아쉬웠던 점을 두 가지만 얘기하면, 우선, 지나치게 작위적인 캐릭터와 억지스러운 전개입니다. 창아성의 이마카가미 가문 사람들은 캐릭터 자체도 작위적이지만, 이야기에 걸맞게 살해당하는 게 아니라 작가의 목적 혹은 정해진 엔딩을 위해 억지스럽게 죽어나갑니다. 전개 면에서도 막판 반전은 뒤통수를 치는 느낌이 아니라 말 그대로 반전을 위한 반전일 뿐입니다. 특히 마지막 반전은 앞서 습득한 정보들을 모조리 무용지물로 전락시킬 정도입니다.

두 번째는 작가의 지적 유희의 과잉또는 허세에 가까운 현학입니다. 그리스-로마 신화에서부터 기독교와 러시아정교를 거쳐 서유럽의 음악과 미술까지 망라하는 천재적인 기사라즈의 말장난은 심하게 말하면 무식한독자를 희롱하는 느낌까지 들게 만듭니다.

 

서랍장 겉면에는 칼레발라의 한 장면을 묘사한 듯한 조각이 새겨져 있다.”

천진난만한 웃음이다. 큐폴라스의 동신(童神)을 연상케 하는 순진무구한 몸짓이다.”

그 모습은 딸을 하데스에게 빼앗긴 데메테르 같았다.”

 

이외에도 수없는 인용과 비유, 부속설명들이 곳곳에서 발견되는데, 어느 시점부터는 짜증을 넘어 이 무절제한 현학적 태도에 화가 나기 시작합니다. 굳이 지적 허영 없이도 충분히 묘사할 수 있는 내용들을 과대 포장한 셈인데, 결과적으론 이야기에의 몰입을 방해한 훼방꾼이 되고 말았습니다. 자해 행위나 다름없는 작가의 자충수라고 할까요?

 

얼마든지 훌륭한 본격 미스터리의 대열에 들어갈 수 있는 얼개를 갖췄음에도 불구하고 날개 달린 어둠은 위에서 언급한 점들 때문에 나중에라도 다시 읽을 생각은 전혀 들지 않을 것 같습니다. 다만, 호평을 들었다는 애꾸눈 소녀를 통해 마야 유타카의 진면목을 만나볼 수 있기를 기대할 따름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소문의 여자
오쿠다 히데오 지음, 양윤옥 옮김 / 오후세시 / 2013년 6월
평점 :
절판


응원해주고 싶은 팜므 파탈이 떴다

 

책의 띠지에 적힌 카피입니다. 오쿠다 히데오의 광팬임에도 불구하고 다 읽고 난 후 뭔가 허전함을 지울 수가 없었는데, 뒤늦게 띠지의 카피를 보고 나서야 이 책을 읽은 보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미리 카피를 봤더라면 좀더 흥미진진하게 읽었을 텐데, 라는 생각이 들만큼 소문의 여자를 함축적으로 표현한 잘 만들어진 카피입니다.

 

10장의 챕터로 구성된 소문의 여자는 주인공 이토이 미유키의 기이한 삶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서술하고 있습니다. 모든 챕터에서 미유키는 말 그대로 소문의 여자로만 등장할 뿐 스스로 주체가 되는 경우는 한 번도 없습니다. 8장까지만 보면 매 챕터마다 4명의 인물이 등장하여 그들만의 화제를 늘어놓는데 항상 그 중심에는 미유키가 있습니다.

중고차 판매점, 마작장, 요리교실, 파친코 가게, 건설업자들의 모임 등 챕터마다 제각각의 무대가 펼쳐지는데, 그때마다 미유키는 달라지거나 진화된 모습으로 무대 위에 등장합니다. 중고차 판매점의 초라한 사무원이었다가, 마작장에서는 손님들을 끌어들이는 묘한 분위기의 여인으로 변신하고, 요리교실에서는 예비 신부로서 부조리에 항거하는 리더가 됐다가, 어느 순간 유흥가 최고의 클럽의 마담으로 급성장하기도 합니다.

 

등장인물들이 이러쿵저러쿵 떠들어대는 미유키에 관한 소문을 통해 독자들은 그녀가 어떻게 팜므 파탈로 성장해 가는지 짐작하게 됩니다. ‘미유키의 성장은 마지막 두 챕터에서 경찰이 개입하면서부터 위기를 맞이하게 되지만, 보통의 미스터리와는 전혀 다른 조금은 황당하기까지 한 엔딩으로 달려갑니다. 결국 마지막 한 장밖에 남지 않았을 때 무척 당황스러웠습니다. “어떻게 끝내려고 이러는 걸까?”라는 혼잣말이 저절로 나올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대로 책을 덮은 후 뒤늦게 띠지의 홍보문구를 보곤 그제야 오쿠다 히데오의 의도를 깨닫게 됐습니다.

 

저의 경우엔 비교적 관대한(?) 평가 쪽으로 기울었지만, 독자에 따라서는 뭐야 이게?” 소리가 나오는 경우도 적지 않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띠지의 홍보문구대로 응원해주고 싶게 할 거면 제대로 된 미유키의 엔딩을 보여주든가 아니면 보통의 미스터리처럼 미유키의 행적들에 대해 정당한 판결을 내리든가, 그것도 아니라면 뒤통수를 칠 만한 반전이라도 내놓든가!!! 이런 불만들이 쏟아져 나올 여지가 많다는 뜻입니다.

 

오쿠다 히데오만의 무겁지 않은 문체와 사실감 있는 캐릭터들이 함께 잘 버무려져서 소소한 명품을 만들어낸 것은 사실이지만, 어딘가 허전함과 아쉬움이 느껴지는 가장 큰 이유는 해학성의 부족이 아닐까 싶습니다. 좀더 역설적인 웃음을 곳곳에 포진시켰더라면, 또 미유키의 행위들 하나하나에 그녀만의 유쾌한 동기라도 설정되어 있었더라면, 그래서 그것이 불법이나 범법이라기보다는 풍자로 느낄 수 있었더라면 좀더 재미있는 책읽기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물론 엔딩에서 느끼게 되는 당혹스러움도 조금은 줄어들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해학, 풍자, 반전이야말로 오쿠다 히데오의 최고의 무기이기에 허전함과 아쉬움이 조금은 더 크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8 - 정유정 장편소설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3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마지막 장을 덮자마자 냉장고로 달려가 언제 산 것인지도 모르는 초콜릿 한 조각을 입에 넣었습니다. 간혹 몸의 피로가 감당하기 힘들어졌을 때 초콜릿을 찾은 적은 있지만, 이렇듯 머릿속을 제멋대로 짓누르는 피로감에도 당분이란 해독제가 필요하다는 것은 처음 알게 된 사실입니다. ‘7년의 밤에서 얻은 고도의 스트레스는 정유정의 차기작에 대한 기대감과 거부감을 동시에 전해줬습니다. ‘빨리 읽고 싶다절대 보지 말자’. 하지만 ‘28’이 출간됐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거부감은 어디론가 사라졌고, 첫 장을 넘기는 순간 긴장감 가득한 기대감만 남아있었습니다.

 

서울과 인접한 경기도 화양시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빨간 눈 괴질이 퍼지기 시작하고, 속수무책으로 희생자가 쏟아지기 시작합니다. 화양시는 봉쇄되고, 최초 희생자가 개에게 물린 흔적이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시내의 모든 개들이 살육 당합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시민은 물론 의료진과 군인들마저 빨갛게 변한 눈과 함께 여기저기서 비참한 죽음을 맞이합니다.

119 구조대원 한기준, 동물보호소 운영자 서재형, 기자 김윤주, 간호사 노수진 등 인연 혹은 악연으로 얽힌 주요 인물들은 지옥로 돌변한 화양시에서 때로는 단단한 증오심을, 때로는 연민과 사랑을 주고받습니다. 기적 같은 생환이 불가능해진 상태에서 이들은 영웅이 될 생각도, 도망칠 생각도 하지 못합니다. 그저 산더미처럼 쌓여가는 시체들 속에서 언제 닥칠지 모르는 죽음을 하염없이 기다릴 뿐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임계점을 넘어선 군중의 분노와 공포가 타인에 대한 폭력으로 치환되기 시작했고, 그 순간부터 화양시의 최대의 두려움은 빨간 눈 괴질이 아니라 인간이 돼버리고 맙니다.

 

화양시가 겪은 악몽 같은 28일의 기록은 할리우드의 재난 스토리가 지어낸 거짓말 같은 희망과 구원의 이야기를 한낱 치기어린 픽션으로 강등시킵니다. 살인, 방화, 약탈, 강간만 난무할 뿐 어디에도 희망이나 구원 따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치명적 질병보다 내 주변의 인간이 더 두려워지기 시작한 시점부터 지옥의 문이 제대로 열린다는 설정은 그 이후에 벌어질 참상을 상상하는 것조차 힘들게 만듭니다. 하지만 정유정은 공포와 죽음의 압박으로 막장까지 내몰린 인간이 얼마나 잔인하고 사악해질 수 있는지를 일말의 자비도 없이 써내려갑니다. 영상물이라면 몰라도 책을 읽다가 욕지기를 느낀 건 ‘28’이 처음이었습니다.

 

사실, ‘7년의 밤에서 이미 경험한 적 있기에 ‘28’ 역시 클라이맥스부터 엔딩에 이르는 지점에서 꽤 심한 스트레스를 겪게 될 거란 건 대략 짐작하고 있었지만, 정작 그 지점이 다가오자 ‘7년의 밤과는 또 다른 종류의 스트레스가 몸과 마음을 잠식하고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본문 가운데 이런 문구가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배신을 잘 하는 것은 희망이다.”

 

상처는 컸어도 조금이나마 희망을 건네주며 마무리됐던 ‘7년의 밤과 달리, ‘28’은 모든 희망을 송두리째 짓밟아놓은 채 종말에 이른 세상의 민낯을 있는 그대로 독자에게 보여줍니다. 몇 번이고 책을 덮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희망과 구원의 기대감은 차례차례 무너지고, 스트레스는 무한대로 증폭됩니다. 결국 후반부의 몇 페이지는 도저히 읽어낼 자신이 없어 속독하듯 스킵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잔혹한 리얼리티는 작가에 대한 증오심까지 촉발시키곤 했는데, 이 증오심이 오히려 페이지 터너 역할을 했다는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7년의 밤이후 가졌던 정유정의 차기작에 대한 기대감과 거부감이라는 양립 불가능한 감정이 다시 한 번 머릿속에 떠오릅니다. 신간 소식이 들려오면 아마 ‘28’을 대할 때처럼 여지없이 그녀의 작품을 허겁지겁 읽게 되겠지만, 한동안은 화양시와 그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쳤던 사람들로 인해 쉽게 털어내기 힘든 무거운 후유증을 앓게 될 것 같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