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이케 전설 살인사건 명탐정 아사미 미쓰히코 시리즈
우치다 야스오 지음, 김현희 옮김 / 검은숲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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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작 고토바 전설 살인사건을 읽진 못했지만 일본 추리소설의 살아있는 거장이라는 우치다 야스오와의 첫 만남이라 큰 기대를 갖고 있었습니다. 미야베 월드 2이나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 ‘도조 겐야 시리즈등 역사적 배경을 가진 미스터리를 좋아하는 취향 때문에 전설 살인사건이라는 타이틀이 무척 흥미로워보였습니다.

 

도야마, 노리요시, 모에코는 모두 성공을 위해 고향을 등졌습니다. 가난하고 미래가 없는 척박한 고향을 버리고 막연한 기대를 품은 채 도시에서의 안락한 삶을 꿈꾸지만, 현실은 그들에게 늘 가혹했고 출구는 어디에서도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결국 그들이 택한 건 보험사기. 어느 정도는 그들의 의도대로 흘러가는 듯 했지만, 수많은 불행의 원천인 탐욕으로 인해 점차 그들 사이에 균열이 발생하기 시작하고, 끝내는 파국의 길을 걷게 됩니다.

우연히 사건에 개입하게 된 탐정 아사미 미쓰히코는 집요한 탐문과 빛나는 추리를 통해 세 인물의 과거와 현재를 파헤칩니다. 12세기 헤이안 시대의 내란의 상처가 여전히 남아있는 숨겨진 마을오추도의 실상과 수천 명의 목숨을 앗아간 1959년의 태풍이 남긴 참혹한 피해가 현재 벌어진 범죄와 어떻게 연관돼있는지도 알아냅니다.

 

언뜻 보면 평범한 보험사기 미스터리에 지나지 않는 이야기지만, 우치다 야스오는 등장인물들에게 역사적 배경을 부여함으로써 단순한 범인 찾기를 넘어 이야기의 스케일을 크게 확장시켰습니다. 특히 도시화의 폐단과 일확천금 신드롬 등 사회적인 문제를 자연스럽게 미스터리와 접목시킨 부분에서는 작가의 연륜이 괜한 것이 아님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다만, 취향에 따라 다르겠지만 작가의 명성 때문에 기대를 가졌던 독자에겐 조금은 아쉬움이 들 수밖에 없는 작품입니다. 세련되고 복잡하게 직조된 요즘의 미스터리에 비하면 아날로그의 느낌이 많이 들기 때문입니다. 또 사건은 소박하고 탐정 아사미의 활약은 고전 속의 올드한 탐정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사라진 시신이나 밀실 트릭도 요즘 독자들의 눈높이에 비하면 왜소해 보일 따름입니다.

 

하지만, 마지막 장을 덮은 후에 느끼게 되는 무게감은 그런 아쉬움을 충분히 커버하고도 남을 만큼 묵직했습니다. 보험사기에 얽힌 세 인물의 탐욕은 사회파 미스터리처럼 잘 포장됐고, 탐정 아사미의 쉼 없는 발품은 인터넷과 첨단 장비에 의존하는 현대의 수사에 비해 훨씬 인간적이었으며, 오래된 과거가 남겨놓은 현재의 상처들도 사실감 있게 잘 활용됐기 때문입니다.

 

국민탐정이라는 호칭을 함께 얻고 있는 긴다이치 코스케에 비해 매력은 좀 덜한 편이지만, 탐정 아사미의 캐릭터가 드라마나 영화, 게임에서도 활약했다는 사실 덕분에 그가 등장하는 다른 작품들에게도 나름 기대를 갖게 됩니다. 우선 전작인 고토바 전설 살인사건부터 찾아 읽어봐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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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제 나를 죽였다
박하와 우주 지음 / 예담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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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하와 우주라는 특이한 필명, 검찰청 근무 경력이 있는 부부의 공동 집필, 감염자를 살인자로 만드는 치명적인 조디악 바이러스라는 소재, 그리고 폐쇄된 공간에서 벌어지는 연쇄살인 등 여러 가지 호기심을 자극하는 요소들로 가득 찬 한국 장르물입니다. 늘 일본 미스터리와 영미권 스릴러에 파묻혀 지내다가 이렇게 완성도 높은 한국 장르물을 만나면 그 반가움은 몇 배가 됩니다. 이번엔 우연히 이벤트를 통해 읽게 됐지만, 앞으로는 특이한 이력의 부부 작가 박하와 우주의 행보에 주목해야 될 것 같습니다.

 

장준호 박사가 운영하는 범죄피해자 지원센터에 10명의 범죄피해자 또는 유족이 참여합니다. 30일 간의 프로그램을 통해 트라우마를 치유하고 일상에 적응하는 훈련을 할 계획이던 그들은 누군가 악의적으로 퍼뜨린 조디악 바이러스에 감염되고 맙니다. 감염자를 살인자로 만드는 치명적인 바이러스지만 더 큰 문제는 감염 여부를 파악하는데 한 달이란 시간이 걸린다는 점입니다. 결국 검사 결과가 나올 때가지 지원센터는 폐쇄되고 참가자는 물론 센터 직원들까지 출입이 통제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첫 희생자가 나타나고 조디악 바이러스에 감염된 누군가의 소행으로 추정되면서 지원센터는 패닉에 빠집니다. 남기호 검사를 비롯하여 수많은 경찰이 투입되지만 희생자는 하나둘씩 늘어가고, 범인은 계속 오리무중인 상태로 결말로 치닫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펼쳐지는 두 번의 반전은 가히 충격적인 엔딩을 보여줍니다.

 

검찰청에서 근무했던 작가들의 풍부한 경험 덕분이겠지만 작품 속의 캐릭터나 사건들은 뛰어난 사실감을 지니고 있습니다. 연쇄살인범에게 아내를 빼앗긴 전직 기자 유도아를 비롯 등장인물들이 겪는 말할 수 없는 트라우마라든가 피해자들만이 공유할 수 있는 특별한 연대감 - 범인에 대한 끓어오르는 증오 은 독자 스스로 그 일원이 된 듯 느낄 정도로 생생하고 선명하게 그려집니다. 인물과 사건 모두 한없이 무겁고 암울한 설정들이지만 굳이 어려운 어휘들을 동원하지 않고도 박하와 우주는 감정과 팩트 두 가지를 잘 버무려 내놓았습니다.

 

마지막 두 번의 반전은 최근 읽은 그 어떤 미스터리보다도 강렬하고 충격적으로 전개됩니다. 미스터리를 좋아하면서도 정작 눈썰미는 너무나도 허약한(?) 편이라 소소한 반전조차 잘 예측 못하는 편이지만, 혹시라도 마지막 반전까지 눈치 챈 독자가 있다면 아마 이 독자가 대단하다라는 상을 받고도 남을 만큼 뛰어난 지혜의 소유자일 것입니다. 독자에 따라 이 반전을 놓고 다양한 해석이 나올 수도 있지만, 저로서는 반전만 놓고 보면 별 다섯 개도 무난하다는 생각입니다.

다만, 일부 작위적인 설정과 중반부쯤 느낄 수 있는 약간의 지루함 탓에 전체적인 평에서는 별 네 개에서 그치고 말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속작에 대한 기대감을 충분히 안겨준 작품이었고, ‘박하와 우주라는 뛰어난 신인들의 묵직한 저력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최근 궁극의 아이를 읽었고, 조만간 정유정 작가의 신작 ‘28’을 읽을 예정인데, 이렇듯 뛰어난 한국 장르물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은 정말 반갑고 또 반가운 일입니다. ‘박하와 우주역시 머지않은 시간에 새로운 작품으로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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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송사냥꾼
존 그리샴 지음, 안종설 옮김 / 문학수첩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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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딩을 언급한 서평입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1990년대의 외국 장르물은 대부분 존 그리샴, 로빈 쿡, 마이클 크라이튼의 작품들입니다. 특히 존 그리샴의 펠리컨 브리프’, ‘의뢰인등 법정 스릴러와 로빈 쿡의 코마’, ‘열병’(Fever), ‘세뇌’(Mindbend) 등 메디컬 스릴러는 호평과 함께 베스트셀러 대열에 올랐는데, 저 역시 그들에게 빠져 스릴러의 세계에서 한참이나 헤매고 다녔었습니다.

하지만, 순문학에 올인하면서 그들의 이후 작품은 거의 접하지 못했고, 한참이 지나 다시 미스터리와 스릴러로 귀환했을 때도 올드보이들의 작품보다는 새로운 작가를 찾는 일에 더 분주했습니다. 자연스레 오래된 작품들에 대해 무관심해질 수밖에 없었고, 여전히 활동 중인 올드보이들의 신작들 역시 왠지 손길이 잘 가지 않았습니다. 물론 당대를 휩쓴 거장들이니만큼 결코 허접한 작품을 세상에 낼 것이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2012년에 발간된 존 그리샴의 소송사냥꾼을 읽게 되기까지 고민의 시간이 필요했던 건 이런 이유들 때문이었습니다.

 

똑똑하고 정의롭지만 힘없고 배경 없는 변호사가 지난한 노력과 멋진 변론을 통해 골리앗 같은 로펌이나 대기업들을 통렬히 망가뜨리는 할리우드식 법정스릴러와 달리 소송사냥꾼은 정반대의 길을 걷습니다. 똑똑하긴 해도 딱히 정의감 같은 건 엿볼 수 없는 주인공이 변호사의 탈을 쓴 사기꾼같은 동료가 일확천금을 위해 시작한 집단소송에 휘말렸다가 모두 함께 쫄딱 망하는 게 메인 스토리입니다.

물론 존 그리샴은 주인공이 거대 제약사를 상대로 영웅적 변론을 벌여 그들을 살짝 물 먹이는 정도의 통쾌함은 전해줍니다. 또한 힘없는 자들에게 관심을 갖고 나름 능력을 발휘하여 그들이 적절한 보상을 받을 수 있게 해주는 에피소드도 많은 분량은 아니지만 기분 좋은 간식처럼 배치되어 있습니다. 막판에는 집단소송으로 인한 엄청난 손해를 어느 정도 커버할 만큼의 소소한 승리도 있습니다.

 

굳이 이렇게 비꼬는 투로 줄거리를 정리한 이유는, 우선, 서론이 80%이고 본론과 결론은 20%에 불과한 전체적인 구성 때문입니다. , 이야기의 핵심인 집단소송에 참여한 주인공의 어정쩡한 스탠스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앞부분 80% 내내 무모한 집단소송에 참여하기까지의 지루한 서론이 펼쳐지다가 막판에 가서야 적들과 본격적으로 맞붙는 재판 시퀀스가 등장합니다. 더구나 주인공은 탐욕스러운 두 동료의 뒤만 졸졸 따라다닐 뿐 집단소송에 대해 제대로 된 판단이나 예측 한번 하지 못한 채 그들이 친 사고 뒤치다꺼리만 하는 게 전부입니다. 당연히 이야기는 늘어지고 페이지를 아무리 넘겨도 비슷한 이야기만 반복되는데, 더욱 짜증이 났던 건 어느 순간 아군 쪽에서 구린 냄새가 나기 시작하면서 왠지 주인공이 이겨선 안 될 것 같다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들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이야기는 그 말도 안 되는방향으로 하염없이 흘러갑니다.

 

앞서 언급한대로 주인공은 마지막 반대심문을 통해 거대 제약사를 약간의 곤경에 빠뜨리긴 하지만, 적어도 독자들이 기대한 존 그리샴의 주인공이라면 바로 그 지점에서부터 한판 전쟁을 시작해야 하고 지난한 법정 공방 끝에 속 시원한 승리를 얻어내야만 합니다. 그것이 존 그리샴다운 엔터테인먼트 법조물의 진면목일 텐데 정말 맥이 빠지는 엔딩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애초 사악하고 비열한 주인공을 앞세워 그의 몰락을 그릴 계획이었다면 나름 의미 있는 작품이 될 수도 있었지만 시작과 끝이 제대로 어긋난 탓에 이도저도 아닌 어정쩡한 작품이 되고 말았다는 생각입니다.

 

과거의 존 그리샴의 작품들을 비교 대상으로 삼는 것 자체가 난센스지만 읽는 내내 한순간도 긴장감을 놓을 수 없었던 펠리컨 브리프의뢰인을 생각하면 소송사냥꾼은 여러 가지로 아쉬움이 많이 남는 작품이었습니다. 기존의 슈퍼히어로 변호사라는 진부한 틀을 깬 기획은 신선했지만 그것이 서론 정도의 역할만 했다면 모를까, ‘무모한 도전과 상처뿐인 영광만 남은 이야기로 끝까지 밀어붙인 것은 요즘의 독자들에게는 크게 어필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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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양장)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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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가에 가까운 나미야 잡화점에 숨어든 빈집털이 3인조는 그곳에서 발견한 40년 전의 주간지를 통해 잡화점 주인 나미야 할아버지가 고민 상담으로 유명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하룻밤을 보내려던 그들은 황당한 일을 겪습니다. 분명 1980년 전후를 살았던 사람들의 고민 상담 편지를 받게 된 것입니다. 우편함으로 편지가 들어올 때마다 나가보지만 사람의 흔적은 전혀 없습니다. 잠시의 실랑이 끝에 3인조는 답장을 보내기로 합니다. 나미야 할아버지처럼 따뜻하고 재치가 담긴 답장이 아니라 대체로 지독하리만치 신랄한 독설을 담아서 말입니다. 문제는, 답장을 보내자마자 그에 대한 답장이 또다시 날아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3인조의 답장을 받은 고민 상담자들의 사연이 담긴 5편의 에피소드가 진행됩니다. 5편의 에피소드에는 편지를 보낸 사람들, 답장을 해줬던 나미야 할아버지, 그리고 그들 주변의 인물들이 꽤 많이 등장합니다. 동시에, 복잡하기 그지없는 인연과 악연의 끈들이 그들 사이에 촘촘하게 얽혀있습니다. 그 끈들은 오랜 시간동안 때로는 애틋하게, 때로는 충격적으로 이어져옵니다. 그리고, 마라톤을 완주하듯 달려온 이야기는 다시 출발선으로 돌아와 마지막 반전과 함께 가슴 따뜻한 결말을 맞이합니다.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때, 그저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사람, 진짜 천재네...”

 

최근 연이어 히가시노 게이고에게 실망을 느꼈던 터라 작년(2012) 연말, 신작이 나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그저 시큰둥한 느낌이었습니다. 다른 독자들의 서평을 통해 대략적인 정보를 얻어 보고 읽을지 말지를 결정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연초에 접한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에 대한 평은 예상 외(?)였습니다. 스포일러를 접할까봐 상세히 읽진 않았지만 모처럼 히가시노의 진가를 만날 수 있었다는 평이 대세였습니다. 그런 정보를 접하고도 얼른 찾아 읽진 못한 건 그만큼 최근 히가시노 게이고에게 얻은 실망감이 컸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리고, 거의 반년이 지나서야 나미야 잡화점에서 일어난 기적 같은 이야기를 읽게 됐습니다. 타임 트립을 소재로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왔던 작품들을 지켜보며 이제 더 이상 타임 트립에 관한 새로운 이야기란 없겠군, 이라고 자신 있게 떠벌린 적이 있습니다.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은 그런 건방진 독자의 뒤통수를 가차 없이 후려친, 참으로 대단한 작품이었습니다.

 

대표적인 미스터리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타율 면에서 볼 때 그의 미스터리 작품은 미스터리 못잖게 좋은 결과를 내곤 했습니다. 미래에서 온 아들을 만난 아버지의 성장기 도키오와 교통사고로 죽은 아내의 영혼이 깃든 딸과 함께 시간을 보내야했던 남편의 이야기 비밀은 어지간한 안구건조증 환자라도 몇 번씩 울컥하게 만드는 작품들이었습니다.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의 경우 대놓고 감정에 호소하는 작품은 아니지만, 단순히 고민 상담자들과 나미야 할아버지 간의 편지를 통한 소통을 넘어 고민 상담자들 간의 인연과 악연, 나미야 할아버지로부터 증손자에 이르는 동안의 무뚝뚝해 보이지만 따뜻한 연대기, 그리고 덜 떨어져 보이는 빈집털이 3인조가 자신들의 삶을 돌아보게 되는 계기 등 히가시노 게이고 또는 일본문학 특유의 무심함 속의 애틋함이 잘 녹아 있습니다.

 

책 읽는 것을 좋아할 뿐 쓰는 데는 전혀 재주가 없는 사람이지만, 이런 작품을 써내는 히가시노 게이고를 보면 글 잘 쓰는 사람이 한없이 부러워질 따름입니다. 최근 몇몇 작품에서 보여준 실망감이 아직 다 상쇄됐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역시 히가시노 게이고!”라는 명불허전의 입증은 충분했다고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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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스 87분서 시리즈
에드 맥베인 지음, 이동윤 옮김 / 검은숲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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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여자 무용수, 히스패닉 조무래기 마약판매자, 상류층 보석상 등 전혀 교집합을 찾아볼 수 없는 사람들이 같은 총에 의해 같은 방식으로 살해됩니다. 발렌타인 데이를 전후로 폭설이 쏟아지는 가운데, 87분서의 열혈 형사들은 피살자들의 연관성을 찾는데 주력하지만 좀처럼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맙니다. 그 와중에, 가짜 신부 앤터니와 면도날 팻 레이디에마는 죽은 히스패닉 마약상의 고객과 공급책을 확보하여 자신들이 사업을 차릴 궁리를 합니다. 오랜 추적 끝에 피살자들의 교집합을 알게 된 형사들은 죽은 여자 무용수가 남긴 단서들을 통해 범인을 특정하고 그의 집으로 달려가지만, 그곳에는 형사들보다 먼저 도착한 또 다른 인물이 범인과 대치하고 있습니다.

 

에드 맥베인의 ‘87분서 시리즈가운데 처음 접하는 작품입니다. 경찰 소설의 텍스트라고 불릴 만큼 널리 알려져 있지만 하드보일드의 후예라는 평을 언뜻 본 적이 있어서 쉽게 손에 잡히지 않았습니다. 레이먼드 챈들러나 대실 해밋이 창조한 하드보일드의 명탐정들로부터 그리 좋은 인상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었는데, 다행히도 87분서의 형사들은 사실감 넘치는 캐릭터를 지녔고 이야기 역시 단독 영웅 스토리의 틀을 벗어나 성과든 실수든 적당히 나눠가진 식으로 그려져서 실재하는 경찰서 강력반 풍경을 들여다보는 듯한 사실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물론 아무리 분업이 잘 이뤄져있다고 해도 주인공은 있기 마련이고, 그 역할은 스티브 카렐라 형사가 맡고 있습니다. 전형적인 캡틴의 인상을 주지만, 수사방식은 돌직구 보다는 합리적인 판단과 이성적인 추리에 따라 진행하는 스타일이고, 청각장애인 아내 테디에게 있어 자상한 남편으로 설정된 캐릭터 덕분에 피도 눈물도 없는(혹은 멋쟁이 한량이나 마초인) 하드보일드 주인공들과는 전혀 다른 인상을 주는 인물입니다.

 

카렐라의 파트너인 마이어는 참모 기질이 엿보이는 민완형사이고, 아서 브라운은 덩치 큰 흑인 형사의 비애(?)를 잘 대변하는 묵직한 캐릭터입니다. 버트 클링은 여자와 관련된 트라우마 때문에 대인기피증까지 의심되는 냉랭한 젊은 형사이며, 홍일점 아일린 버크는 성범죄자 체포를 위한 미끼 역할을 하는 독특한 캐릭터입니다.

그 외에도, 늘 깐족대는 밉상 형사들, 썰렁한 농담을 던지는 검시부장, 버럭질이 특기인 다혈질 반장, 맛없는 커피만 내놓는 서무과 직원, 융통성이라고는 전혀 없는 무조건 체포주의형사 등 다양한 캐릭터들이 쉴 새 없이 등장하여 재미와 리얼리티를 배가시킵니다. 왜 에드 맥베인의 ‘87분서 시리즈를 경찰 소설의 텍스트라고 부르는지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다만, 에드 맥베인과 처음 만난 터라 그의 문체에 덜 익숙해서 그런 것이겠지만, ‘사족이라고 부를만한 문장들이 너무 자주, 장황하게 눈에 띄곤 해서 읽는 내내 피곤했던 게 사실입니다. 새 인물이 등장하면 그의 인구사회학적특징은 물론 소소한 그의 과거를 소개하기 위해 3-4페이지가 할애되기도 합니다. 심지어 날씨와 동네에 관한 상세한 설명이라든가 TV 프로그램과 그 진행자에 대한 묘사에 이르기까지, 말하자면 주어+목적어+동사만 있으면 한 페이지 안에 끝날 에피소드가 어마어마한 수식어가 붙으면서 몇 배의 분량으로 늘어나곤 합니다. 그 역시 작품의 일부분이란 점을 모르진 않지만, 결국 중반쯤부터는 수식어는 건너뛰고 핵심만 따라간 대목도 꽤 됩니다. 535페이지면 요즘의 이른바 벽돌 책에 비해 100페이지 이상 얇은 편이지만, 최소 10% 정도는 축소하거나 생략해도 될 내용으로 보였습니다.

 

끈질긴 탐문과 1차적 단서에 의존하는 추리 등 다소 올드한 수사반장의 냄새가 나긴 하지만, 이 작품이 1983년에 발간된 점을 감안하면 충분히 양해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어쨌든 재미있게 읽었고, 캐릭터들도 매력적인데다 아이스50여편이 넘는 ‘87분서 시리즈36번째로 중간쯤에 해당한다고 하니, 국내에 소개된 또 다른 시리즈 살의의 쐐기를 곧 찾아볼 계획입니다. 출판됐다가 절판된 작품이 더 있는지 모르겠지만, 중고서점도 뒤져볼 생각입니다. 다만, 수식어에 지쳐 피곤한 책읽기가 되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사족 1. 3.5개밖에 못 받을 작품은 절대 아니지만, 어쩔 수 없는 올드함과 과도한 수식어 때문에 별을 일부 뺐습니다. 이야기 자체만 보면 별 네 개 이상도 충분한 작품입니다.

 

사족 2. ‘아이스라는 제목을 보자마자 마이클 코넬리의 블랙 아이스가 생각났습니다. 주인공 해리 보슈가 추적하던 신종 마약의 이름이기도 한데, 그래서 에드 맥베인의 아이스역시 같은 종류의 마약을 지칭하는 건가, 궁금했습니다. 결론은... 직접 읽고 확인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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