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아이스 ㅣ 87분서 시리즈
에드 맥베인 지음, 이동윤 옮김 / 검은숲 / 2013년 2월
평점 :
절판
뮤지컬 여자 무용수, 히스패닉 조무래기 마약판매자, 상류층 보석상 등 전혀 교집합을 찾아볼 수 없는 사람들이 같은 총에 의해 같은 방식으로 살해됩니다. 발렌타인 데이를 전후로 폭설이 쏟아지는 가운데, 87분서의 열혈 형사들은 피살자들의 연관성을 찾는데 주력하지만 좀처럼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맙니다. 그 와중에, 가짜 신부 앤터니와 면도날 ‘팻 레이디’ 에마는 죽은 히스패닉 마약상의 고객과 공급책을 확보하여 자신들이 사업을 차릴 궁리를 합니다. 오랜 추적 끝에 피살자들의 교집합을 알게 된 형사들은 죽은 여자 무용수가 남긴 단서들을 통해 범인을 특정하고 그의 집으로 달려가지만, 그곳에는 형사들보다 먼저 도착한 또 다른 인물이 범인과 대치하고 있습니다.
에드 맥베인의 ‘87분서 시리즈’ 가운데 처음 접하는 작품입니다. 경찰 소설의 텍스트라고 불릴 만큼 널리 알려져 있지만 하드보일드의 후예라는 평을 언뜻 본 적이 있어서 쉽게 손에 잡히지 않았습니다. 레이먼드 챈들러나 대실 해밋이 창조한 하드보일드의 명탐정들로부터 그리 좋은 인상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었는데, 다행히도 87분서의 형사들은 사실감 넘치는 캐릭터를 지녔고 이야기 역시 단독 영웅 스토리의 틀을 벗어나 성과든 실수든 적당히 나눠가진 식으로 그려져서 실재하는 경찰서 강력반 풍경을 들여다보는 듯한 사실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물론 아무리 분업이 잘 이뤄져있다고 해도 주인공은 있기 마련이고, 그 역할은 스티브 카렐라 형사가 맡고 있습니다. 전형적인 캡틴의 인상을 주지만, 수사방식은 돌직구 보다는 합리적인 판단과 이성적인 추리에 따라 진행하는 스타일이고, 청각장애인 아내 테디에게 있어 자상한 남편으로 설정된 캐릭터 덕분에 피도 눈물도 없는(혹은 멋쟁이 한량이나 마초인) 하드보일드 주인공들과는 전혀 다른 인상을 주는 인물입니다.
카렐라의 파트너인 마이어는 참모 기질이 엿보이는 민완형사이고, 아서 브라운은 덩치 큰 흑인 형사의 비애(?)를 잘 대변하는 묵직한 캐릭터입니다. 버트 클링은 여자와 관련된 트라우마 때문에 대인기피증까지 의심되는 냉랭한 젊은 형사이며, 홍일점 아일린 버크는 성범죄자 체포를 위한 미끼 역할을 하는 독특한 캐릭터입니다.
그 외에도, 늘 깐족대는 밉상 형사들, 썰렁한 농담을 던지는 검시부장, 버럭질이 특기인 다혈질 반장, 맛없는 커피만 내놓는 서무과 직원, 융통성이라고는 전혀 없는 ‘무조건 체포주의’ 형사 등 다양한 캐릭터들이 쉴 새 없이 등장하여 재미와 리얼리티를 배가시킵니다. 왜 에드 맥베인의 ‘87분서 시리즈’를 경찰 소설의 텍스트라고 부르는지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다만, 에드 맥베인과 처음 만난 터라 그의 문체에 덜 익숙해서 그런 것이겠지만, ‘사족’이라고 부를만한 문장들이 너무 자주, 장황하게 눈에 띄곤 해서 읽는 내내 피곤했던 게 사실입니다. 새 인물이 등장하면 그의 ‘인구사회학적’ 특징은 물론 소소한 그의 과거를 소개하기 위해 3-4페이지가 할애되기도 합니다. 심지어 날씨와 동네에 관한 상세한 설명이라든가 TV 프로그램과 그 진행자에 대한 묘사에 이르기까지, 말하자면 ‘주어+목적어+동사’만 있으면 한 페이지 안에 끝날 에피소드가 어마어마한 수식어가 붙으면서 몇 배의 분량으로 늘어나곤 합니다. 그 역시 작품의 일부분이란 점을 모르진 않지만, 결국 중반쯤부터는 수식어는 건너뛰고 핵심만 따라간 대목도 꽤 됩니다. 535페이지면 요즘의 이른바 ‘벽돌 책’에 비해 100페이지 이상 얇은 편이지만, 최소 10% 정도는 축소하거나 생략해도 될 내용으로 보였습니다.
끈질긴 탐문과 1차적 단서에 의존하는 추리 등 다소 올드한 ‘수사반장’의 냄새가 나긴 하지만, 이 작품이 1983년에 발간된 점을 감안하면 충분히 양해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어쨌든 재미있게 읽었고, 캐릭터들도 매력적인데다 ‘아이스’가 50여편이 넘는 ‘87분서 시리즈’ 중 36번째로 중간쯤에 해당한다고 하니, 국내에 소개된 또 다른 시리즈 ‘살의의 쐐기’를 곧 찾아볼 계획입니다. 출판됐다가 절판된 작품이 더 있는지 모르겠지만, 중고서점도 뒤져볼 생각입니다. 다만, 수식어에 지쳐 피곤한 책읽기가 되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사족 1. 별 3.5개밖에 못 받을 작품은 절대 아니지만, 어쩔 수 없는 올드함과 과도한 수식어 때문에 별을 일부 뺐습니다. 이야기 자체만 보면 별 네 개 이상도 충분한 작품입니다.
사족 2. ‘아이스’라는 제목을 보자마자 마이클 코넬리의 ‘블랙 아이스’가 생각났습니다. 주인공 해리 보슈가 추적하던 신종 마약의 이름이기도 한데, 그래서 에드 맥베인의 ‘아이스’ 역시 같은 종류의 마약을 지칭하는 건가, 궁금했습니다. 결론은... 직접 읽고 확인해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