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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이 서린 말 ㅣ 사계절 1318 문고 82
마이테 카란사 지음, 권미선 옮김 / 사계절 / 2013년 3월
평점 :
절판
인터넷서점의 소개글이나 홍보 카피를 보면 이렇게 끔찍한 소재를 다뤘음에도 ‘청소년 소설’로 분류됐다는 점이 무척 의아했는데, 혹시 소재만 그렇지 이야기는 청소년 수준으로 서술됐나 싶었지만 300여 페이지에 달하는 내용은 결코 그런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아무리 에둘러 표현해도 아동 성폭력이란 소재는 그 자체로 불편하고 부담스러울 뿐 아니라, 범인을 응징해도 통쾌함보다는 먹먹함만 남기 때문에 개인적인 취향에 안 맞는 작품이지만, 접하기 쉽지 않은 낯선 스페인 작가를 만날 수 있다는 점, 그리고 각종 문학상을 통해 검증받은 작품이란 점 때문에 나름 작심하고 도전하게 됐습니다.

15살이던 4년 전 실종된 바르바라, 4년간 바르바라 사건에 전념했으나 결국 미해결 상태에서 정년퇴임을 맞게 된 로사노 형사, 바르바라의 절친이었으나 남자문제로 갈라섰던 에바, 그리고 독재적인 남편 페페와 딸 바르바라 사이에서 존재감 없이 살아온 주부 누리아 등 네 사람의 서술이 번갈아 한 챕터씩 등장하면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먼저, 휴대폰도 터지지 않는 곳에 갇힌 바르바라의 비참한 상황이 1인칭 서술로 설명됩니다, 그녀의 삶을 박살낸 14살 때의 성폭행 사건과 납치된 후 짐승처럼 사육돼온 4년의 이야기는 픽션임에도 불구하고 생생한 묘사 때문에 내내 불편하게 읽어야만 했던 대목들입니다.
절친이었던 에바는 바르바라에 관한 객관적 상황들을 설명하는 역할을 맡았는데, 바르바라와의 즐거웠던 시절부터 남자 문제 때문에 갈라서게 된 과정, 또 실종 직전의 바르바라의 모습에 대해 담담하게 진술합니다.
평범한 주부 누리아의 진술은 거의 대부분이 후회와 탄식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엄격한 남편 페페가 두려운 나머지 사춘기를 맞은 바르바라의 탈선을 방기한 일, 피임약과 자해의 흔적을 발견하고도 일부러 캐묻지도, 궁금해 하지도 않았던 일 등 자신의 무책임한 선택들이 결국엔 바르바라를 불행하게 만들었다고 자책합니다.
한편, 로사노 형사는 바르바라의 절친이었던 에바로부터 “죽은 줄 알았던 바르바라로부터 전화가 왔다.”는 놀랄만한 소식을 듣습니다. 퇴임을 하루 앞둔 상태였지만 로사노 형사는 몸을 사리지 않고 고군분투했고, 결국 4년 동안 꽁꽁 감춰져있던 진실을 만 하루 반 만에 극적으로 해결해냅니다.
기본 틀은 ‘범인 찾기’라는 미스터리 형식이지만 작가는 ‘누가 범인인가?’보다 각 인물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내밀한 심리묘사에 치중합니다. 덕분에 페이지 넘기는 속도가 느려질 수밖에 없지만 성폭력 피해자와 그 주변 인물들이 겪는 심리적 붕괴 과정을 지켜보다 보면 ‘느리게 읽어야만 제대로 볼 수 있는’ 이 책의 미덕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다만, 사건 해결 과정은 다소 나이브하고 쉬워 보여서 강렬한 미스터리를 기대한 독자라면 조금은 실망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사실,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도 이 작품의 제목을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출판사의 소개글과 다른 독자들의 서평을 읽은 후에야 작가의 의도를 얼핏 알게 됐는데, 요지는 “소통과 대화의 부재가 바르바라의 불행을 초래했다. 누군가의 독이 서린 말이 모든 것을 망가뜨리고 할퀴고 깊은 상처를 남기며 그 사람을 죽어가게 할 수 있다.”인데, (지극히 주관적인 생각이지만) 내용과 잘 매치되지 않아서인지 그다지 공감되진 않았습니다.
아무튼, 예상했던대로 읽은 뒤의 느낌이 불편하고, 무겁고, 먹먹해진 것은 사실이지만, 쉽게 접할 수 없었던 스페인 소설과의 만남은 나름 흥미로운 경험이었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이 작가의 작품을 한번쯤은 더 만나보고 싶은 바람이 있지만 미스터리라면 살짝 고민이 되는 것도 사실이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