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다발은 독
오리가미 교야 지음, 이현주 옮김 / 리드비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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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대생인 기세 요시키는 중학생 시절 과외교사였던 마카베 겐이치와 오랜만에 재회합니다. 의대생이었던 마카베가 인테리어 가게에서 일하는 이유가 궁금했던 기세는 그가 결혼을 앞두고 양심이 있으면 결혼하지 마라.”라는 협박 편지를 받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마카베는 경찰에 알리기를 꺼려했고, 기세는 탐정을 통해서라도 협박범의 정체를 알아내기로 결심합니다. 그런데 기세가 만난 탐정은 중학교 1년 선배이자 그 무렵부터 탐정 견습생으로 전교에 소문이 자자했던 기타미 리카입니다. 기세의 의뢰를 받아들인 기타미는 마카베가 협박당할 만한 과거가 있었는지부터 조사하는데, 하나둘씩 모이기 시작한 정보는 기타미와 기세를 큰 충격에 빠뜨립니다.

 

(앤솔로지를 제외하고) 한국에 일곱 편의 작품이 출간된 오리가미 교야지만 이 작품 전까지 읽은 건 특이한 영능력자 탐정이 주인공인 단지, 무음에 한하여한 편뿐입니다. 대표작인 기억술사시리즈는 취향과 거리가 먼 것 같아 읽지 않았는데, ‘꽃다발은 독을 읽고 나니 시리즈의 첫 편 정도는 꼭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꽃다발은 독은 막판 반전이나 엔딩 외에도 크고 작은 스포일러가 많아서 서평 속에 인물과 줄거리를 언급하기가 무척 곤란한 작품입니다. 탐정인 기타미와 법대생인 기세가 마카베를 협박하는 범인을 찾는 것이 주된 줄거리인데, 마카베가 협박당하게 된 계기, 4년 전 마카베가 일으킨 사건이 100페이지 전후쯤 공개되면서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되지만 이 사건 자체가 꽤 충격적이어서 나름 스포일러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말하자면 그 뒤의 줄거리는 두루뭉술하게 언급할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이 작품의 매력과 미덕을 서평에 담는 일은 줄거리 소개 없이도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고백하자면, 중반부를 조금 넘는 지점까지만 해도 느슨하고 평범한 협박범 찾기로 읽혀서 살짝 아쉬움이 느껴진 게 사실입니다. (0.5개를 뺀 유일한 이유입니다) 기타미와 기세의 조사는 마카베 주변 인물들에 대한 일상적인 탐문에 그쳤고, 4년 전 마카베가 일으킨 사건이 충격적이긴 해도 독자의 시선을 계속 잡아둘 만큼 지속적인 긴장감을 일으키진 못합니다.

하지만 기타미와 기세가 조사 과정에서 수시로 위화감에 사로잡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독자 역시 이렇게 무난하고 쉽게 풀릴 리가 없다라는 의구심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마카베는 왜 협박을 당하면서도 고발을 꺼리는가? 강경한 어조와 정중한 문체를 번갈아 사용하는 협박범의 의도는 무엇인가? 4년 전 사건은 실제로 마카베가 일으킨 것인가, 아니면 원죄(冤罪) 사건인가? 숱한 의문이 위화감을 불러일으키는 가운데 대략 100페이지쯤 남은 지점부터 이 작품의 진가가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겹겹이 설치된 함정이라는 출판사 소개글대로 작가는 독자들을 깊이도 크기도 다른 함정들 속에 연이어 빠뜨립니다. 이것이 진상인가 싶으면 어느새 작가는 다른 곳을 가리키기 시작하고, 그쪽으로 따라가다 보면 또 금세 엉뚱한 곳을 가리키기 시작합니다. 평범한 반전을 통해 평범하게 마무리될 것 같던 이야기가 예상을 완전히 벗어난 경로를 통해 전속력으로 달리는 후반부는 그야말로 정신을 차리기 힘들 정도입니다. 그렇게 도착한 곳에서 발견한 진실은 너무나도 뜻밖이라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운데, 주인공인 기타미와 기세는 자신들이 찾아낸 진실에 크게 놀라면서도 그보다는 그 진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라 큰 곤란에 빠지고 맙니다. “진실이 밝혀져도 아무도 행복해지지 않는다.”라는 본문 속 한 줄처럼 주인공과 독자 모두를 극단적인 딜레마에 밀어 넣은 작가는 정답 없는 질문을 던집니다. “당신이라면 눈앞의 이 폭탄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숙부가 운영하는 탐정사무소의 조사원 신분이지만 명탐정의 자질을 갖춘 20대 초반의 기타미 리카는 무척 매력적인 캐릭터입니다. 시리즈 주인공으로서도 손색없어 보였는데 아쉽게도 2021년에 이 작품이 출간된 뒤로 후속작이 나왔다는 소식은 없습니다. 하지만 언제라도 그녀가 주인공인 미스터리가 출간된다면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찾아 읽을 생각입니다. 물론 그 전에 이 작품을 통해 새삼 그 진가를 알게 된 오리가미 교야의 다른 작품들부터 찬찬히 검색해보려고 합니다.

 

끝으로, ‘아주 약간번역에 관한 아쉬움이 느껴졌습니다. 오역이나 비문은 없지만 가끔 자연스럽지 못한 문장들이 눈에 띄곤 했습니다. 그냥 넘어가도 될 정도로 미미한 문제지만 옥의 티처럼 느껴져서 사족으로 달아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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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처 : 벨몬트 아카데미의 연쇄 살인
서맨사 다우닝 지음, 신선해 옮김 / 황금시간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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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디 크러처는 명문 사립고교 벨몬트 아카데미의 영문학 교사입니다. ‘올해의 교사에 선정될 정도로 능력도 있고, 학생들을 대하는 태도와 신념 역시 확고한 인물입니다. 하지만 그에 못잖게 오만과 독선과 자기애가 강한 테디는 극성 학부모, 건방진 학생, 못마땅한 동료 교사에 대한 혐오와 짜증으로 치를 떨기도 합니다. 그럴 때마다 그는 경고와 교훈을 주기 위해 일종의 취미활동인 실험을 통해 상대에게 치명적인 고통을 안기곤 했는데, 어느 날 그 실험이 예상치 못한 착오와 우연으로 인해 사망자를 유발하고 맙니다. 엉뚱한 사람이 살인범으로 몰리고 사태가 확산되자 테디는 잘못된 것을 바로잡기 위해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합니다. 그리고 그날 이후 벨몬트 아카데미는 살인라는 별명을 얻게 됩니다.

 

티처는 심리극의 묘미가 깃든 연쇄살인 스릴러이자 잔혹하면서도 씁쓸한 웃음을 자아내는 잘 짜인 한 편의 블랙 코미디입니다. 명문 사립고의 학부모와 교사를 비롯한 여러 사람이 동일범에 의해 살해되는 끔찍한 연쇄살인을 다루고 있지만, 조금의 죄의식도 없이 오로지 자신의 신념을 위해 태연히 살인을 저지르는 범인의 행태라든가 이야기 저변에 흐르는 신랄하면서도 냉소적인 분위기 때문에 잔혹한 블랙 코미디의 풍미를 진하게 맛볼 수 있습니다.

또한 극성 학부모와 건방진 학생과 속물적인 교사들로 이뤄진 명문 사립고가 갑자기 살인라는 별명을 얻고 추락하면서 우왕좌왕하는 벌이는 꼴사나운 모습은 B급 군상극의 재미도 선사합니다. 초반에 범인과 수법이 모두 공개됨에도 불구하고 500페이지에 가까운 분량 안에 다양한 장르가 혼재돼서 순식간에 마지막 장까지 달릴 수 있는 흥미로운 작품이란 뜻입니다.

 

이런 학생들을 더 나은 인간이 되도록 가르치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사람들은 모른다. 그가 이토록 애쓰고 애쓰고 또 애쓰는데도 때로는 소용이 없다. 그렇다고 포기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는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다 그들을 위한 일이다.” (p254)

 

벨몬트 아카데미에서 벌어진 끔찍한 연쇄살인의 출발점은 아이러니하게도 주인공 테디가 교사로서 가진 확고한 신념과 태도입니다. 그는 스스로를 학생을 위해 진심으로 헌신하는 교사라고 여기고 행동하지만, 동시에 자신의 헌신을 거부하거나 못 알아먹는 학생에겐 무자비한 응징을 가하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범인으로 몰린 학생을 구하기 위해 살인도 불사하는 정의로운(?) 교사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자신에게 반기를 든 학생의 삶을 완전히 망가뜨리는 무자비한 사이코패스이기도 하다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다 너희를 위한 일이야.”라는 의미의 원제 ‘For Your Own Good’은 바로 테디의 대의이자 삶의 좌표이기도 한 것입니다.

 

사람을 죽이는 건 죄다. 하지만 제자들을 일생일대의 위기에서 구출해내기 위해서였다면 그건 넓은 의미로 가 아닌지도 모른다.” (p390)

 

테디의 광폭 행보가 이야기의 한 축이라면, 나머지 한 축은 그를 의심하고 뒤를 캐는 몇몇 인물들의 스릴감 넘치는 추적기입니다. 심증은 충분하지만 애매하게 조각난 단서들밖에 손에 넣지 못한 그들이 테디의 주변을 맴도는 장면들은 나름 쫄깃한 긴장감을 선사하는데, 독자 입장에선 그들이 과연 테디의 행각을 밝혀낼 수 있을지, 저러다가 테디에게 당하는 건 아닌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한 과연 테디는 어떤 결말을 맞이하게 될지, 그가 체포되기는 하는 건지, 그에게 목숨을 잃을 사람이 얼마나 더 나올지, 진실이 제대로 밝혀지기는 할지 가늠할 수 없어서 마지막 장까지 쉬지 않고 달릴 수밖에 없습니다.

 

서맨사 다우닝은 2020마이 러블리 와이프로 한국에 처음 소개됐는데, 심리스릴러 혹은 도메스틱 스릴러에 한참 질려 있을 때라 제목만 보곤 바로 외면했던 작품입니다. 하지만 티처를 읽고 나니 궁금증과 호기심이 저절로 발동해서 기회가 되면 일단 초반 100페이지 정도만이라도 도전해보고 싶어졌습니다. 이 작품의 주인공 테디 크러처 못잖은 흥미로운 캐릭터가 등장한다면 어쩌면 그 자리에서 마지막 장까지 한 번에 달릴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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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지는 뇌를 끌어안고
치넨 미키토 지음, 민경욱 옮김 / ㈜소미미디어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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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급 요양병원 하야마곶 병원에 의사 실습을 나온 수련의 우스이 소마는 최악의 뇌종양을 앓고 있는 유가리 타마키(일명 유카리)에게서 말로 설명하기 힘든 복잡한 인상을 받습니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뇌 속의 폭탄을 끌어안은 처지지만 유카리는 특유의 에너지로 우스이를 수시로 곤혹스럽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특히 가족을 버린 아버지에 대한 혐오와 돈에 대한 집착에 사로잡힌 탓에 삶 자체가 피폐해져있던 우스이는 어느 새 유카리에게 과거를 털어놓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깜짝 놀랍니다. 유카리 덕분에 망집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 우스이는 어느 새 그녀에게 깊은 감정을 품게 되지만 갑작스레 찾아온 그녀의 죽음 때문에 슬픔과 절망에 사로잡히고 맙니다. 그런 우스이가 유카리의 죽음에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음을 깨닫습니다. 무엇 하나 자연스럽지 않은 유카리의 죽음의 이면에 과연 어떤 진실이 숨어있는 걸까요?

 

치넨 미키토의 작품은 대체로 현직 의사만이 그려낼 수 있는 리얼한 메디컬 서사와, 정교한 설계에 예상을 뛰어넘는 반전까지 깃든 미스터리가 잘 조합된 경우가 많은데, ‘무너지는 뇌를 끌어안고는 절절하기 이를 데 없는 로맨스의 향기까지 품고 있어서 무척 인상 깊게 읽었습니다.

 

수련의 우스이는 평범한 예비 의사가 아닙니다. 가족에게 빚만 잔뜩 남기고 다른 여자와 사라져버린 아버지에 대한 혐오와 오직 돈을 많이 벌기 위해 미국에서 뇌외과 의사로 성공하려는 야망으로 똘똘 뭉친 인물입니다. 유카리 역시 독특한 인물인데, 조부모에게서 천문학적인 유산을 물려받았지만 폭탄과도 같은 뇌종양을 끌어안은 채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허망함에 사로잡혀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밝은 에너지를 발산하는 인물로 어찌 보면 우스이와는 정반대의 캐릭터를 지닌 셈입니다. 제목에서부터 처연함이 느껴지는 무너지는 뇌를 끌어안고는 그런 두 인물이 삶과 죽음을 함께 고민하고 미스터리를 함께 풀어가면서 상대에게 특별한 감정을 품게 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전반부는 내일조차 기약할 수 없는 두 사람의 애틋한 로맨스를 그립니다. 두 사람이 서로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는 가운데 우스이는 유카리의 세심한 추리 덕분에 오랜 혐오와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고, 유카리는 우스이의 진심 어린 도움 덕분에 병원 밖으로의 외출을 감행하며 삶의 희열을 느낍니다.

반면 후반부는 갑작스런 유카리의 죽음에 절망하던 우스이가 그 이면의 진실을 알아내기 위해 분투하는 이야기로 채워집니다. 하야마곶 병원 사람들의 이상한 태도, 유카리의 변호사라는 자가 내보인 뜻밖의 유언장, 유카리의 거액의 유산을 탐내던 먼 친척의 수상쩍은 행동, 자신이 채 알지 못했던 유카리의 비밀스런 외출 기록 등 좀처럼 이해하기 힘든 상황과 정보들이 한꺼번에 쏟아지자 우스이는 크게 당황하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고 유카리의 죽음 뒤에 숨은 진실을 찾아내기로 결심합니다.

 

삶과 죽음이라는 진중한 주제에 절절한 로맨스까지 곁들여진 메디컬 미스터리지만 마지막 장을 덮은 후의 여운은 결코 무겁지만은 않았습니다. 섬뜩함과 처연함이 동시에 느껴지는 작품 제목과 그에 어울리지 않는 라노벨 분위기의 표지의 독특한 조합처럼 슬픔, 안쓰러움, 연민, 응원 등이 뒤섞인 무척이나 복잡한 심경을 맛볼 수 있습니다.

예비 의사라지만 그저 평범한 일반인에 불과할 뿐인 우스이가 미스터리를 풀어가는 방식은 형사나 탐정의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단순하지만 그가 이끌어낸 추리와 반전은 충분히 재미있고 매력적입니다. 가끔 뜻하지 않은 도움과 비약적 사고가 끼어들긴 하지만 큰 위화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입니다.

 

치넨 미키토의 작품 가운데 한국에 출간된 건 라노벨과 판타지를 비롯해서 13편뿐이지만, 일본에선 상당한 편수의 작품이 출간된 걸로 알고 있습니다. 라노벨과 판타지는 제 취향이 아니지만 메디컬과 본격까지 아우르는 치넨 미키토의 작품이 좀더 많이, 좀더 자주 한국에 소개되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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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집
리브 앤더슨 지음, 최유솔 옮김 / 그늘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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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항적이고 독립적인 코니와 순종적이고 연약한 리사는 아기 때 양모(養母) 이브에게 입양된 쌍둥이입니다. 가학적인데다 모든 걸 통제하길 원했던 이브는 쌍둥이에게 잔혹한 차별대우와 함께 정신적인 고문을 일삼았는데, 특히 코니에겐 이른바 생존게임, 즉 몇 푼의 돈만 쥐어준 채 낯선 도시에서 살아갈 것을 강요하곤 했습니다. 쌍둥이가 26살이 된 해, 이브가 뜻밖의 사고로 사망하자 코니는 해방감을 만끽하지만, 그녀가 남긴 잔인한 유언장 때문에 새로운 생존게임을 시작할 처지에 놓입니다. 리사에게 거의 모든 재산을 물려준 이브는 코니에겐 뉴멕시코주 닐라의 황량한 사막에 있는 작은 빨간 집만을 물려줍니다. 문제는 그 빨간 집이 위치한 닐라는 오래 전부터 무수한 여자들이 실종되거나 살해된 끔찍한 장소라는 점입니다.

 

일그러지고 비틀린 소시오패스들이 난무하는 독특한 스릴러입니다. 15살 나이에 출산과 동시에 자기보다 27살 많은 남자와 결혼한 뒤 오랫동안 끔찍한 학대를 당하다가 남편이 사망하자 엄청난 유산을 물려받은 이브, 죽은 아버지를 꼭 닮아 잔혹하고 반항적인 10대가 된 이브의 딸 켈시, 그리고 이브에게 입양된 뒤 감금과 학대와 가스라이팅을 당하며 성장한 쌍둥이 코니와 리사 등 이 작품 속의 주요 인물들은 평범함과는 한참이나 거리가 먼 캐릭터들입니다.

또한 20여 년 전부터 최근까지 닐라에서 벌어진 무수한 납치살인사건 역시 소시오패스 연쇄살인마의 소행으로밖에 볼 수 없고, 닐라를 지배하고 있는 음울하고 불온한 분위기라든가 납치살인사건을 은폐하거나 왜곡하려는 주민들의 비밀스런 행태는 그 자체로 무형의 소시오패스처럼 느껴집니다.

 

이야기는 크게 두 축으로 전개됩니다. 하나는 닐라의 빨간 집에 살게 된 코니의 이야기로, 죽어서까지 자신에게 가혹한 생존게임을 강요하는 이브의 태도에 의문과 분노를 품던 코니가 닐라에서 벌어진 연쇄 납치살인사건의 진상을 알아내기 위해 위험천만한 탐문을 전개하는 내용입니다. 또 하나는 20여 년 전, 실종된 10대 딸 켈시를 찾기 위해 닐라에 온 이브가 온갖 위협과 압박에도 불구하고 혼자만의 힘으로 분투하는 이야기인데, 재미있는 건 이브의 분투가 결코 상식적인 모성애에 근거한 것이 아니고, 일종의 게임, 즉 반드시 켈시를 찾아내 굴복시키겠다는 일념에서 비롯됐다는 점입니다.

 

코니와 이브의 여정은 언제든 끔찍한 결말을 맞이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위험하기 짝이 없습니다. 속내를 알 수 없는 상대들이 연이어 나타나고, 크고 작은 사건들이 쉴 틈 없이 벌어집니다. 또한 20여 년의 간극에도 불구하고 코니와 이브는 마치 하나의 진실을 찾기 위해 달려가는 듯한 인상을 줍니다. 같은 장소, 같은 사람들, 같은 사건들이 두 사람의 행보에 얽혀있기 때문입니다. 코니와 이브는 닐라에 만연한 비밀과 거짓말을 걷어내고 작은 단서라도 찾기 위해 애쓰지만 뉴멕시코의 황량한 사막을 배경으로 서있는 섬뜩한 빨간 집은 두 사람에게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을 남깁니다.

 

초중반까지만 해도 줄거리와 캐릭터 모두 꽤 흥미진진한 서사를 기대하게 만들었지만, 뒤로 갈수록 이야기 자체가 산만해진 게 가장 아쉬웠습니다. 두세 번만 비틀어도 괜찮았을 텐데 지나치게 비틀고 또 비튼 나머지 오히려 집중력을 흐트러뜨렸습니다. 사건뿐 아니라 인물들의 감정과 내면도 마찬가지였는데, 그래선지 주요 인물들의 경우 다 읽고도 이 사람은 이런이런 사람이었다.’라고 딱 부러지게 정리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깔끔하게 정리되지 않은 결말부도 다소 불만스러웠는데, 연쇄 납치살인의 진실도, 실종된 딸 켈시의 행방도 딱히 반전이나 해결의 매력을 느낄 수 없었습니다. 일부는 충분히 예측가능하기도 했고 일부는 작위적으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누가?’는 알게 됐지만 ?’는 모호할 뿐이었습니다. 물론 닐라에서 벌어진 모든 일이 소시오패스의 광란의 결과이니 ?’를 따지는 게 무의미할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개운치 못한 마음으로 마지막 장을 덮게 돼서 무척 아쉬웠습니다.

 

마지막으로, 무수하다고까지 할 수는 없지만 적잖은 오타들이 눈에 많이 거슬렸습니다. 조사(助詞) 오타가 특히 많았고, 주요 지명 중 하나가 샌타페이-산타페이-산타페로 계속 바뀌기기도 했습니다. 한 권의 책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자세히는 모르지만, 다른 건 몰라도 오타만큼은 어떻게 해도 이해되지 않는 부분입니다. 한두 개라면 모르겠지만, 그 이상이라면 실수라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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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비키초의 복수
나가이 사야코 지음, 김은모 옮김 / 은행나무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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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전, 에도의 변두리 마을 고비키초의 극장 뒤편에서 복수가 이뤄졌다. 기쿠노스케라는 소년이 아버지의 원수 사쿠베에를 죽이고 잘린 목을 든 채로 사라진다. 항간에서 고비키초의 복수라 불리는 이 사건 이후 2, 한 남자가 사건의 진상을 알고 싶다며 극장을 찾아온다. 남자는 당시 사건을 목격한 사람들을 차례로 만나 그날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거듭 묻는다. 동시에 사건과는 무관한, 목격자들이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를 꼬치꼬치 캐묻는다. 과연 2년 전에 벌어진 복수의 실체는 무엇일까? 극장을 찾아온 남자가 알아내려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 목격자들의 진술 끝에 드러나는 진실은 무엇일까? (출판사 소개글을 일부 수정 후 인용했습니다.)

 

고비키초의 복수2023년 나오키상과 야마모토 슈고로상을 동시에 수상한 작품입니다. 나가이 사야코는 한국에는 처음 소개되는 작가인데, 휴머니즘이 진하게 담긴 시대소설로 독자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고 합니다. 에도 시대를 배경으로 한 미스터리는 제가 워낙 좋아하는 장르인데다 복수가 이뤄지고 2년 후, 그 상황을 목격한 자들의 진술을 통해 드러나는 진실이라는 설정도 매력적이어서 읽기 전부터 무척 기대가 됐습니다.

 

모두 다섯 명의 목격자가 등장하는데, ‘극장을 찾아온 남자’, 즉 청자(聽者)의 정체가 드러나지 않은 가운데 목격자들은 2년 전 사건에 대해, 그리고 자신들이 살아온 과거에 대해 마주 앉은 청자와 대화하듯 찬찬히, 자세하게 들려줍니다. 이런 독특한 형식은 마쓰이 게사코의 유곽 안내서에서도 활용됐는데, 에도 시대의 정보를 쉽게 설명해줄 뿐만 아니라 화자의 이야기를 직접 듣는 듯한 생생함을 만끽할 수 있어서 이 작품에 딱 맞는 형식이었습니다.

 

몸을 파는 유녀의 아들로 태어나 우여곡절 끝에 극장 호객꾼이 된 잇파치, 하급 무사 출신으로 역시 기구한 사연을 거쳐 무술 연기 배우가 된 요사부로, 천애고아가 되어 화장터에서 키워진 뒤 말단 배우들의 의상을 담당하게 된 호타루, 뛰어난 직인이었지만 소중한 아들을 잃은 뒤 연극 소도구를 맡게 된 규조, 그리고 상급 무사 출신이지만 미래가 보장된 무사로서의 안락한 삶을 집어던지고 각본가가 된 긴지 등 2년 전 기쿠노스케의 복수를 지켜본 목격자들은 하나 같이 내밀하고 고통스러운 사연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 사연들을 품은 채 여기저기 치이다가 당도한 곳은 악처(아쿠쇼, 惡所), 즉 막부가 필요악으로 인정해 규제하고 관리하던 극장 마을이었고, 그들은 각자의 과거와 상처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새로운 삶을 살아가기 위해 애쓰던 중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에도에 왔다는 15세 소년 기쿠노스케는 이질적이면서도 묘하게 끌리는 매력을 지닌 인물입니다. 복수의 사연이 너무나도 안타깝고 절절하긴 하지만, 극장 사람들은 한편으론 기쿠노스케의 복수 준비를 도우면서도 동시에 그가 복수에서 손을 놓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무엇보다 복수의 대상이 자신에게 각별한 사람인 탓에 괴로움에 빠지고 만 기쿠노스케의 모습이 안쓰러웠기 때문인데, 말하자면 이 복수는 성공해도 전혀 기쁘지 않은 일이고, 실패할 경우엔 평생을 회한에 사로잡혀야 하는 일이란 뜻입니다. 극장 사람들의 이런 심경은 독자에게도 고스란히 전달돼서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기쿠노스케에게 어떤 운명이 기다리고 있을지 조마조마해지지 않을 수 없게 만듭니다. 신분과 나이를 떠나 서로의 마음을 이해하고 진심으로 도우려는 사람들 사이의 교류가 피의 복수를 전제로 이뤄진다는 이 아이러니는 이 작품의 핵심이자 가장 큰 미덕이라는 생각입니다.

 

고비키초의 복수는 복수 미스터리의 외양을 띠긴 했어도 천민으로 취급받던 에도 시대 극장 사람들의 애환을 그린 따뜻하고 감동적인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또한 오로지 무사의 길만 알고 살아온 소년 기쿠노스케가 극장 사람들 덕분에 또 다른 삶의 방식, 또 다른 가치관, 또 다른 꿈과 미래가 있음을 알게 되는 애틋한 성장 스토리이기도 합니다. 읽으면서 수시로 눈가가 뜨끈해지는 건 바로 이런 휴먼 드라마의 요소들 때문입니다.

미스터리가 해소되고 진실이 드러나는 막판 반전은 조금 일찍 눈치 챌 수 있어서 살짝 맥이 풀리긴 했지만 그래도 기쿠노스케와 극장 사람들의 엔딩이 너무나도 궁금해서 허겁지겁 전력 질주하듯 페이지를 넘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피비린내 진동하는 복수극이 이렇듯 의외의 뭉클함과 애틋함을 남길 거라곤 예상 못했는데, 휴머니즘이 진하게 담긴 시대소설로 독자들에게 사랑받았다는 나가이 사야코의 필력을 직접 확인할 수 있어서 무척 기억에 남을 책읽기가 된 것 같습니다. 미야베 미유키의 괴담을 비롯하여 에도 시대를 배경으로 한 작품은 장르를 불문하고 다 좋아하는데, 부디 고비키초의 복수가 호응을 얻어 나가이 사야코의 다른 작품들도 머잖아 한국에 소개되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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