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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병매 살인사건
야마다 후타로 지음, 권일영 옮김 / 스토리텔러 / 2025년 2월
평점 :
이 작품에 눈길이 끌린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읽어보진 못했지만 중국 4대 기서 중 하나로 꼽히는 ‘금병매’를 원전으로 한 미스터리라는 점 때문이고, 또 하나는 닌자를 소재로 한 관능적인 액션소설 ‘인법첩 시리즈’의 작가 야마다 후타로의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그 내용이 너무 음란한 탓에 청나라 시절에 금서가 된 뒤 1985년에야 연구자들을 위한 출판이 허락됐다는 ‘금병매’는 위키피디아나 나무위키로 검색만 해봐도 금서가 된 이유를 쉽게 납득할 수 있을 만큼 성(性) 묘사의 수위가 무척 세고 독한 작품입니다. 그런 ‘금병매’가 원전인 살인사건 미스터리라고 하니 읽어보고 싶은 욕심이 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한 한국에 소개된 ‘인법첩 시리즈’ 다섯 편 가운데 딱 한 편밖에 읽지 못했지만 닌자와 관능과 사랑이라는, 고풍스러우면서도 잔인하고 애절하면서도 에로틱한 서사들의 조합이 무척 흥미로웠기에 과연 야마다 후타로가 어떤 식으로 ‘금병매’를 재창조했을지 무척 궁금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야마다 후타로는 1922년에 태어나 2001년에 타계했으며, 이 작품은 일본에서 1959년에 발표됐습니다)

송나라 시절 청하현의 최고 부자인 서문경은 정실부인 외에도 늘 예닐곱 명의 첩을 둔 호색한입니다. 처첩 외에도 유부녀든 처녀든 마음에 들기만 하면 가리지 않고 손아귀에 넣고 마는 그의 기질은 가히 엽기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처첩 가운데 서문경이 가장 아낀 건 다섯 번째 부인인 반금련입니다. 저자거리 호떡장사의 아내였다가 서문경의 첩이 된 그녀는 말 그대로 재색을 겸비한 당대의 미녀지만 지독한 질투심과 혐오감을 타고났으며 살인이든 상해든 거리낌 없이 저지르는 인물로, 요즘 눈으로 보면 피도 눈물도 없는 사이코패스나 다름없습니다.
이 작품에서 탐정 역할을 맡은 건 서문경의 친구인 응백작입니다. 주색잡기에 빠져 가산을 날리고 빈털터리가 된 뒤 서문경에게 빌붙어 사는 남자지만, 애증과 시기와 질투의 기운이 지배하는 서문경의 저택에서 벌어지는 갖가지 사건의 진범을 밝혀내는 명탐정으로 활약합니다.
모두 16편의 연작 단편이 실려 있는데, 하나같이 기괴하고 노골적인 성 묘사와 함께 잔혹한 살인사건을 다룹니다. 토막살인이 애교로 보일 정도로 범행수법은 잔인무도하지만 그 범행을 촉발시킨 동기는 거의 예외 없이 시기와 질투입니다. 나보다 예뻐서, 나보다 사랑받아서, 나보다 피부나 치아가 하얘서... 얼핏 단순해 보이는 이 시기와 질투가 살의를 자극할 정도로 증폭되다가 완전범죄에 가까운 수법을 통해 실현되는 과정은 그야말로 기가 막힐 따름입니다. 또 탐정 역할을 맡은 응백작이 사소한 단서에 주목하며 추리를 통해 진범을 포착하는 장면에선 소소한 쾌감과 함께 반전의 짜릿함도 맛볼 수 있습니다. 다소 억지스럽거나 무리한 추리가 벌어지는 수록작도 일부 있긴 하지만, 사건 자체가 워낙 엽기적이고 그로테스크하다 보니 큰 거부감 없이 읽어낼 수 있습니다.
독자에 따라 ‘금병매’와 ‘야마다 후타로’의 조합이란 이유만으로 이 작품을 그저 야하고 선정적인 B급 성인물로 치부할 수도 있는데, 그렇게 생각할 여지가 많은 건 사실이지만 ‘금병매 살인사건’은 미스터리로서의 매력도 뛰어나고 대하급 서사로서도 손색없는 작품이란 게 저의 솔직한 평가입니다. 특히 “대단원의 막은 처절하고 웅장합니다. 거대한 파멸입니다. 애욕의 파국, 탐욕의 파탄입니다. (‘얼어붙은 환희불’부터) 피날레를 향해 달리는 네 편은 거장의 힘과 숨결이 느껴지는 압도적 문장입니다.”라는 번역가 권일영의 후기처럼 모든 욕망과 애증이 불꽃놀이처럼 폭주하는 막판의 긴장감 넘치는 전개는 앞서 B급 성인물 코드로 쌓아올린 토대들이 실은 야하고 선정적인 것 이상의 묵직하고 폭발력 강한 연료였음을 깨닫게 만듭니다. 자극적이고 엽기적인 성애 묘사에다 여성을 성적 도구로만 그리는 데 질려서 지레 책장을 덮어버리는 독자도 있겠지만, 마지막 수록작까지 어떻게든 잘 견뎌낸다면 이 작품의 진짜 미덕과 재미를 한껏 맛볼 수 있습니다.
희대의 호색한 서문경과 질투의 화신 반금련, 그리고 찌질한 명탐정 응백작이 펼쳐 보이는 요사스럽고도 괴이한 살인사건 미스터리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위키피디아나 나무위키를 통해 ‘금병매’에 대한 정보를 조금이라도 접한 뒤에 이 작품을 읽을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또 일러두기에 나온 대로 역자 후기를 먼저 읽고 본문을 읽는다면 전반적인 설정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