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집 우케쓰 이상한 시리즈
우케쓰 지음, 김은모 옮김 / 리드비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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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컬트 전문 필자인 우케쓰는 도쿄에 집을 마련하려다 고민에 빠진 지인이 보여준 평면도 때문에 호기심에 사로잡힙니다. 1층 한 곳에 용도를 알 수 없는 수수께끼의 공간이 있는데, 지인은 그 공간이 찜찜한 나머지 구매를 주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케쓰는 미스터리 마니아인 건축설계사 구리하라와 함께 평면도를 분석하던 중 수수께끼의 공간 외에도 상식적이지 않은 곳들이 많다는 걸 깨닫습니다. 무엇보다 그 공간들에 대한 구리하라의 추리를 듣곤 큰 충격에 빠집니다. 그저 구리하라의 지나친 망상이라고 치부하려 했지만, 지은 지 1년 만에 그 집을 매물로 내놓은 주인의 과거를 조사하던 우케쓰는 평면도 속 수수께끼의 공간이 어쩌면 실제로 참혹한 살인이 벌어진 사건현장일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을 품기 시작합니다.

 


2022년에 출간됐을 당시 인터넷서점의 소개글을 보곤 왠지 과도한 특수설정 미스터리라는 선입견이 들어서 관심목록에서 제외시켰던 작품인데, 3년 만에 후속작(‘이상한 집 2’)이 출간됐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갑자기 궁금증이 발동해서 뒤늦게나마 찾아 읽게 됐습니다.

 

평면도 속 수수께끼 공간에 대한 막연한 추리로 시작된 이야기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식으로 확장되다가 끝내 잔인하고 끔찍한 비극의 정체를 폭로하는 호러 서사로 발전되는 구도를 지니고 있습니다. 초반에 우케쓰와 구리하라가 2층 주택의 평면도를 보며 막연한 추리를 주고받는 장면을 읽을 때만 해도 평면도에 관한 해프닝에 가까운 단편 호러물이라고 짐작했는데, 집을 내놓은 주인의 과거, 또 다른 기이한 평면도의 존재, 3의 인물이 들려주는 평면도에 얽힌 일가족에 관한 이야기 등 예상치 못한 설정들이 연이어 등장하면서 과연 서사의 두께와 깊이가 어디까지 늘어날지 사뭇 궁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창문이 없는 아이의 방, 설치 목적을 알 수 없는 이중문, 비합리적으로 증축된 방, 비밀통로처럼 보이는 공간 등 우케쓰와 구리하라가 들여다보는 평면도 속엔 일상과는 거리가 먼 기이함과 위화감이 가득합니다. 하지만 평면도 자체만으로 그곳에서 벌어진 실제 상황을 유추하는 건 실은 과대망상에 가까운 일입니다. 특히 수수께끼의 공간이 은밀한 살인과 시신 유기에 쓰였을 거라는 구리하라의 추리는 이 작품에 대한 사전정보가 전혀 없는 독자에겐 코믹하고 황당한 호러 미스터리로 읽힐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작가는 이 과대망상에 가까운 추리를 현실 속 참극과 교묘하게 연결시킴으로써 평면도 호러 미스터리라는, 어디에도 없던 특별한 이야기를 자아냈습니다.

 

우케쓰와 구리하라의 막연한 추리 내용도 그렇고, 이들의 추리를 현실과 결부시켜주는 제3의 인물의 신상도 그렇고 거의 모든 게 스포일러라 스토리에 관한 한 서평에서 소개할 수 있는 부분이 별로 없습니다. 특히 기이한 평면도에 얽힌 일가족의 비극적인 사연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매력적인 미스터리지만 워낙 복잡하게 짜인데다 짧은 소개만으로도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서 역시 이 자리에서 언급하기가 곤란합니다.

다만 평면도 속의 아주 작은 수수께끼의 공간에 대한 추리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점차 몸집을 불려가며 미쓰다 신조 스타일의 호러 미스터리로 발전하는 독특한 서사는 새롭고 신선한 장르물을 찾는 독자에겐 뜻밖의 재미를 선사할 것이 분명하다는 점, 그리고 이 작품에 등장하는 기이하고 위화감 넘치는 평면도 말고도 얼마든지 새로운 소재가 가능하다는 점, 그래서 후속편에 대한 기대가 저절로 생길 수밖에 없다는 점은 확실하다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후속작인 이상한 집 2’에는 모두 11채의 이상한 집이 등장한다고 합니다. 소개글을 일부러 안 봐서 장편인지 11개의 단편이 수록된 작품집인지 알 수는 없지만, 독자 입장에서 스스로 추리를 해볼 수 있는 단서가 그만큼 많다는 뜻이니 모두 3채의 이상한 집이 등장한 첫 편보다 좀더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페이지를 넘길수록 점점 깊고 어두운 심연에 빨려드는 듯한 느낌을 줬던 이상한 집을 넘어서는, 좀더 오싹하고 소름 돋는 이야기들이 펼쳐지길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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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의 구제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 4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난주 옮김 / 재인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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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기업 사장 요시다카가 자택에서 사체로 발견됩니다. 사인은 맹독성 독극물이 들어간 커피. 수사가 시작되자 경시청 수사1과 구사나기는 요시다카와 불륜관계이던 히로미를 의심하지만, 신참 형사 가오루는 사건 당일 친정인 삿포로에 가있던 아내 아야네를 용의선상에 올립니다. 문제는 구사나기가 아야네에게 각별한 관심과 감정을 품은 탓에 그녀를 의심하는 가오루와 사사건건 충돌한 점. 결국 가오루는 딱 한 번 안면을 텄던 천재 물리학자 유가와를 찾아가 도움을 청합니다. ‘용의자 X의 헌신이후 더는 경찰에 협조하지 않겠다고 단언했던 유가와는 가오루로부터 사건 정황을 듣곤 조건부 협조를 약속합니다. 하지만 유가와는 범인이 이론적으로는 가능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있을 수 없는 트릭을 사용한 것 같다며 곤혹스러워합니다.

 


난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해. 그런데 지금 당신이 한 말은 내 마음을 죽였어. 그러니까 당신도 죽어줘야겠어.” (p12)

 

갈릴레오 시리즈의 네 번째 작품인 성녀의 구제는 전작인 용의자 X의 헌신과 마찬가지로 시작과 동시에 범인의 정체와 동기를 밝힌 뒤 트릭의 정체를 파헤치는 구도를 취합니다. 독자와 달리 아무 정보도 없는 상태에서 수사를 시작한 구사나기와 가오루는 각기 다른 인물을 용의자로 지목하며 각을 세우지만, 두 사람 모두 어떻게를 입증하지 못해 곤란한 지경에 빠집니다. 더는 경찰에 협조하지 않겠다던 유가와의 관심을 이끌어낼 정도로 범인의 트릭은 허수해(虛數解), 즉 이론적으로는 가능하지만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사건의 그늘에 슬픔과 아름다움이 교차하는 인간 드라마를 전개라는 출판사 소개글대로 성녀의 구제는 끔찍한 살인사건 이면에 숨어있는 치정, 시기, 질투, 자기혐오 등 사랑에 관련된 여러 가지 감정을 다룹니다. 결은 전혀 달라도 용의자 X의 헌신에서 맛봤던 여운이 떠오르기도 했는데, 그래선지 유가와마저 허수해라며 두 손을 든 사건이 부디 완전범죄로 마무리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들기도 했습니다.

 

사건만큼이나 흥미로운 건 수사1과 베테랑 구사나기와 신참 가오루의 대충돌입니다. 객관적인 단서와 논리에 근거해 수사를 전개하는 정통파 구사나기와 달리 가오루는 여성적인 직감과 눈썰미가 대단하고 남들이 놓친 단서를 포착하는 능력까지 지녔지만 상상과 고집이 지나친 나머지 물증을 확보하기도 전에 무리한 추리를 펼치는 인물입니다. 전혀 다른 수사 방식을 고집하던 두 사람은 결국 서로 다른 인물을 용의자로 지목하며 감정싸움에 가까운 충돌까지 벌입니다. 특히 가오루가 유력한 용의자로 생각하는 아야네에게 구사나기가 티가 날 정도로 각별한 감정을 품은 탓에 독자는 과연 누가 위너가 될지 무척 궁금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용의자 X의 헌신직후에 나온 작품이라 여러 면에서 비교가 돼서 그런지 인터넷서점의 서평은 대체로 야박하거나 혹평에 가까운 경우가 많았습니다. 생각해 보면 성녀의 구제를 처음 읽었던 2010년 무렵엔 저 역시 작품마다 워낙 편차가 큰 공장장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들에 회의적인 눈길을 보냈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래도 갈릴레오 시리즈는 최소한 그의 명성에 어울리는 수준은 유지해왔다는 생각입니다. 다만 너무 큰 기대를 품고 다시 읽은 탓에 다소 실망했던 용의자 X의 헌신과 달리 성녀의 구제는 눈높이를 낮춘 상태에서 읽었기에 이런 무난한 평점을 준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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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프트 - 고통을 옮기는 자, 개정판
조예은 지음 / 북다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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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입니다.

 

해변의 폐건물에서 기이한 살인사건이 벌어집니다. 한 남자가 피 웅덩이에 잠긴 채 살해됐고, 어린 소년이 납치됐던 흔적까지 발견됐는데, 문제는 흉기와 바닥을 물들인 피가 피살자의 것이 아니라는 점, 또 남자의 몸에서 갑자기 발병한 듯한 말기 피부암 증상이 발견된 점입니다. 불치병에 걸린 조카 채린을 돌보기 위해 일부러 지방경찰서로 내려온 이창은 살해된 남자를 조사하던 중 어쩌면 자신이 오랫동안 찾아 헤맨 사람이 이 사건에 연루됐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전율합니다.

 


시프트2017년에 출간된 조예은의 첫 장편소설입니다. 최근 꽤 많은 작품이 출간됐음에도 불구하고 작년(2024)적산가옥의 유령을 통해 처음 만난 작가인데, 기대 이상의 재미와 만족을 느낀 덕분에 그녀의 첫 장편소설 개정판을 반가운 마음으로 읽게 됐습니다.

 

“(고통과 질병을) 옮기기만 할 뿐 없앨 수는 없어요. 누군가를 살리려면 누군가가 죽어야만 해요. 그래서 저는 제 능력이 저주스러워요.” (p95)

 

굳이 장르를 분류한다면 판타지 스릴러라고 할 수 있는데, 주인공인 란에게 고통을 옮기는 기이한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란이 고통과 병에 시달리는 환자와 그것을 옮겨 받을 그릇이 될 사람의 손을 양손에 쥐고 있으면 그를 매개로 하여 환자의 고통과 병이 그릇에게 옮겨가는 것입니다. 누군가의 고통과 병을 제거해준다는 점에서 기적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문제는 누군가 그 고통과 병을 받아내야 한다는 점, 즉 대신 죽어야만 한다는 사실입니다.

 

어린 시절 형 찬과 함께 인신매매범이자 사이비교주에게 납치됐던 란은 찬이 그 기이한 능력 때문에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는 걸 눈앞에서 목격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죽어가던 찬이 그 능력을 자신에게 물려준 걸 깨달았습니다. 저주받은 능력이지만 란은 찬의 복수를 위해 오랜 시간을 기다려왔는데, 누구에게도 밝히지 않았던 자신의 능력을 꿰뚫어 본 자가 나타나면서 그에게 위험천만한 위기가 닥칩니다.

사고로 숨진 누나 부부가 남긴 조카 채린이 불치병에 걸리자 이창은 어린 시절 직접 목격했던 기적을 떠올리곤 그 능력자를 찾기 위해 전력을 다합니다. 그리고 선술집 직원인 란을 주목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란에게서 알아낸 기적의 진상은 너무나도 참혹해서 이창으로 하여금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알 수 없는 딜레마에 빠지게 만듭니다.

 

지금껏 읽은 그 어떤 판타지나 호러에서도 본 적 없는 특별한 능력을 소재로 삼았지만 그 작동원리가 너무나도 단순명쾌해서 조금의 위화감이나 거부감 없이 읽을 수 있었습니다. 저주받은 능력을 품은 채 복수에 나선 란과 그 능력이 너무나도 간절하지만 조카를 살리려면 누군가가 그릇이 돼야 한다는 사실에 절망하는 이창의 이야기는 적절한 비율로 배합된 판타지와 미스터리와 복수 스릴러 서사 속에서 마지막 장까지 긴장감을 유지하며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두 주인공의 첫 만남이 너무 쉽고 안이하게 설정된 건 아쉬웠지만, 그 점만 빼면 란과 이창의 이야기는 충분히 재미있었습니다)

 

찬과 란의 능력을 악용하는 악당들의 캐릭터와 역할도 잘 설정돼서 끝까지 두 주인공과 엎치락뒤치락하며 롤러코스터 같은 흥미진진함을 유발합니다. 징악(懲惡)의 짜릿함을 만끽하려면 그만큼 악당이 탄탄하게 설정돼야 하는데, ‘시프트에 등장하는 여러 악당은 뚜렷한 동기와 무자비한 잔혹함에다 개연성 있는 캐릭터까지 품고 있어서 주인공들의 분투를 더욱 매력적으로 만들어줍니다.

 

적산가옥의 유령이후 두 번째로 만난 시프트역시 만족스러운 책읽기를 선사했습니다. 이제 그동안 관심만 갖고 있던 조예은의 다른 작품들을 찾아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독자들의 서평을 훑어보며 어떤 작품을 가장 먼저 장바구니에 담을지 고민해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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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병매 살인사건
야마다 후타로 지음, 권일영 옮김 / 스토리텔러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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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에 눈길이 끌린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읽어보진 못했지만 중국 4대 기서 중 하나로 꼽히는 금병매를 원전으로 한 미스터리라는 점 때문이고, 또 하나는 닌자를 소재로 한 관능적인 액션소설 인법첩 시리즈의 작가 야마다 후타로의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그 내용이 너무 음란한 탓에 청나라 시절에 금서가 된 뒤 1985년에야 연구자들을 위한 출판이 허락됐다는 금병매는 위키피디아나 나무위키로 검색만 해봐도 금서가 된 이유를 쉽게 납득할 수 있을 만큼 성() 묘사의 수위가 무척 세고 독한 작품입니다. 그런 금병매가 원전인 살인사건 미스터리라고 하니 읽어보고 싶은 욕심이 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한 한국에 소개된 인법첩 시리즈다섯 편 가운데 딱 한 편밖에 읽지 못했지만 닌자와 관능과 사랑이라는, 고풍스러우면서도 잔인하고 애절하면서도 에로틱한 서사들의 조합이 무척 흥미로웠기에 과연 야마다 후타로가 어떤 식으로 금병매를 재창조했을지 무척 궁금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야마다 후타로는 1922년에 태어나 2001년에 타계했으며, 이 작품은 일본에서 1959년에 발표됐습니다)

 


송나라 시절 청하현의 최고 부자인 서문경은 정실부인 외에도 늘 예닐곱 명의 첩을 둔 호색한입니다. 처첩 외에도 유부녀든 처녀든 마음에 들기만 하면 가리지 않고 손아귀에 넣고 마는 그의 기질은 가히 엽기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처첩 가운데 서문경이 가장 아낀 건 다섯 번째 부인인 반금련입니다. 저자거리 호떡장사의 아내였다가 서문경의 첩이 된 그녀는 말 그대로 재색을 겸비한 당대의 미녀지만 지독한 질투심과 혐오감을 타고났으며 살인이든 상해든 거리낌 없이 저지르는 인물로, 요즘 눈으로 보면 피도 눈물도 없는 사이코패스나 다름없습니다.

이 작품에서 탐정 역할을 맡은 건 서문경의 친구인 응백작입니다. 주색잡기에 빠져 가산을 날리고 빈털터리가 된 뒤 서문경에게 빌붙어 사는 남자지만, 애증과 시기와 질투의 기운이 지배하는 서문경의 저택에서 벌어지는 갖가지 사건의 진범을 밝혀내는 명탐정으로 활약합니다.

 

모두 16편의 연작 단편이 실려 있는데, 하나같이 기괴하고 노골적인 성 묘사와 함께 잔혹한 살인사건을 다룹니다. 토막살인이 애교로 보일 정도로 범행수법은 잔인무도하지만 그 범행을 촉발시킨 동기는 거의 예외 없이 시기와 질투입니다. 나보다 예뻐서, 나보다 사랑받아서, 나보다 피부나 치아가 하얘서... 얼핏 단순해 보이는 이 시기와 질투가 살의를 자극할 정도로 증폭되다가 완전범죄에 가까운 수법을 통해 실현되는 과정은 그야말로 기가 막힐 따름입니다. 또 탐정 역할을 맡은 응백작이 사소한 단서에 주목하며 추리를 통해 진범을 포착하는 장면에선 소소한 쾌감과 함께 반전의 짜릿함도 맛볼 수 있습니다. 다소 억지스럽거나 무리한 추리가 벌어지는 수록작도 일부 있긴 하지만, 사건 자체가 워낙 엽기적이고 그로테스크하다 보니 큰 거부감 없이 읽어낼 수 있습니다.

 

독자에 따라 금병매야마다 후타로의 조합이란 이유만으로 이 작품을 그저 야하고 선정적인 B급 성인물로 치부할 수도 있는데, 그렇게 생각할 여지가 많은 건 사실이지만 금병매 살인사건은 미스터리로서의 매력도 뛰어나고 대하급 서사로서도 손색없는 작품이란 게 저의 솔직한 평가입니다. 특히 대단원의 막은 처절하고 웅장합니다. 거대한 파멸입니다. 애욕의 파국, 탐욕의 파탄입니다. (‘얼어붙은 환희불부터) 피날레를 향해 달리는 네 편은 거장의 힘과 숨결이 느껴지는 압도적 문장입니다.”라는 번역가 권일영의 후기처럼 모든 욕망과 애증이 불꽃놀이처럼 폭주하는 막판의 긴장감 넘치는 전개는 앞서 B급 성인물 코드로 쌓아올린 토대들이 실은 야하고 선정적인 것 이상의 묵직하고 폭발력 강한 연료였음을 깨닫게 만듭니다. 자극적이고 엽기적인 성애 묘사에다 여성을 성적 도구로만 그리는 데 질려서 지레 책장을 덮어버리는 독자도 있겠지만, 마지막 수록작까지 어떻게든 잘 견뎌낸다면 이 작품의 진짜 미덕과 재미를 한껏 맛볼 수 있습니다.

 

희대의 호색한 서문경과 질투의 화신 반금련, 그리고 찌질한 명탐정 응백작이 펼쳐 보이는 요사스럽고도 괴이한 살인사건 미스터리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위키피디아나 나무위키를 통해 금병매에 대한 정보를 조금이라도 접한 뒤에 이 작품을 읽을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또 일러두기에 나온 대로 역자 후기를 먼저 읽고 본문을 읽는다면 전반적인 설정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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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핀 댄서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2-2 링컨 라임 시리즈 2
제프리 디버 지음, 유소영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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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컬렉터사건 이후 뉴욕 시경과 FBI의 수사 자문을 맡아온 링컨 라임은 거물급 무기상의 재판에 증인으로 나설 예정이던 비행기 조종사가 살해당한 사건에 촉각을 곤두세웁니다. 최악의 살인청부업자이자 5년 전 자신의 부하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일명 코핀 댄서가 범인으로 추정됐기 때문입니다. ‘여자와 춤추는 사신의 문신이 새겨진 30대 백인이란 것 외엔 알려진 바가 없는 그는 라임에겐 개인적인 복수의 대상이기도 합니다. 재판에 나서기로 했던 증인은 모두 세 명. 살해된 조종사와 그의 아내 퍼시, 동료 헤일이 그들인데, 라임은 상상을 초월하는 기만술로 경찰을 농락하는 코핀 댄서를 추적하면서 동시에 남은 두 증인을 보호해야 하는 쉽지 않은 의뢰를 기꺼이 받아들입니다.

 


코핀 댄서는 희생자의 뼈에 집착하는 역대급 사이코패스가 등장했던 시리즈 첫 편 본 컬렉터에 이은 링컨 라임 시리즈두 번째 작품입니다. 시기적으로는 본 컬렉터이후 1년이 경과한 시점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전신마비의 고통과 자괴감에 안락사를 기도했던 라임은 전편의 엔딩에서 공식적으로 뉴욕 시경과 FBI의 수사 자문을 맡기로 결심했고, 이제 자신의 파트너이자 친구인 아멜리아 색스와 함께 본격적인 2라운드를 맞이하게 됩니다.

 

라임과 색스의 두 번째 상대는 전무후무한 살인청부업자 코핀 댄서입니다. 특히 5년 전, 범행현장에 폭발물을 숨겨놓아 자신의 부하인 감식반원 두 명을 죽게 만든 댄서는 라임에겐 체포가 아니라 목을 따버리고 싶은 원수이기도 합니다. 다분히 사감이 깃든 수사를 펼칠 수밖에 없습니다.

한편 색스는 1년 동안 라임의 파트너로 일하면서 그에게 각별한 감정을 품은 상태로 등장합니다. 그래선지 보호해야 할 증인 가운데 한 명인 퍼시가 라임과 수상쩍은(?) 눈빛을 주고받는 걸 지켜보며 끓어오르는 질투심을 느끼곤 합니다. 라임을 향한 색스의 각별한 감정은 스릴러 서사 못잖게 독자의 흥미를 자극합니다.

또한 색스는 초반에 댄서를 체포하거나 사살할 수 있는 기회에서 무력하게 몸을 숨겼던 자신을 자책하며 수사 과정 내내 무리수를 두곤 합니다. 그때 제대로 처신했더라면 무고한 희생을 막을 수도 있었다는 자책감은 라임과 퍼시를 향한 질투심과 함께 색스의 행보를 더욱 위험하게 만듭니다.

 

라임과 댄서의 대결은 출판사 소개글대로 고수들의 체스를 보는 듯한 지적 쾌감을 만끽할 수 있을 정도로 흥미진진하게 전개됩니다. 상대방의 패를 들여다보기라도 한 듯 몇 수를 내다보며 전략을 바꾸고 작전을 수정하는 라임과 댄서의 공격과 수비는 단순한 반전 이상의 짜릿함을 선사하는데, 특히 막판에 댄서의 정체가 밝혀지는 대목에선 그야말로 월드클래스의 맞대결이란 이런 것!”이라는 감탄을 저절로 자아내게 만듭니다.

 


미량 증거물은 라임이 가장 선호하는 증거물이었다. 아무리 영리한 범인이라도 변형시키거나 일부러 심어놓을 수 없는 것이 미량 증거물이고, 아무리 꼼꼼한 범인이라도 완전히 제거할 수 없는 것이 미량 증거물이다.” (p159)

 

링컨 라임 시리즈가 여타 범죄 스릴러와 가장 차별화되는 대목은 바로 이 미량 증거물입니다. 간혹 독자의 머리를 어지럽게 만들 정도로 디테일한 분석 장면이 나오곤 하는데, ‘코핀 댄서에는 그야말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미량 증거물이 총출동한 듯 보여서 제프리 디버의 박학다식함과 철저한 자료조사에 여러 번 놀라게 됩니다. 또한 자신이 분석해낸 미량 증거물의 의미를 바탕으로 뛰어난 추리까지 펼쳐 보이는 라임은 법과학 탐정이라는 독특한 캐릭터의 진수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이 작품이 미국에서 1998년에 출간된 점을 감안하면 라임과 색스가 이끄는 법과학 스릴러가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 새삼 깨닫게 됩니다.

 

어중간한 사족으로... 제가 기억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빨리 라임과 색스의 멜로 라인이 급진전돼서 조금 놀란 게 사실입니다. 시리즈 세 번째 작품인 곤충소년은 큰 얼개만 생각날 뿐 스토리 자체는 거의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데, 그보다도 라임과 색스가 다음 이야기에서 어디까지 진도가 나갈지 궁금해서라도 곤충소년을 얼른 읽어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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