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꽃 - 개정판
마타요시 나오키 지음, 양윤옥 옮김 / ㈜소미미디어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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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제153회 아쿠타가와 상 수상작인 불꽃은 작가가 개그맨 - 유명한 콤비 개그 피스의 멤버인 마타요시 나오키 - 이란 점 때문에 당시 장안에 화제를 몰고 왔다고 합니다. 오랜 무명 시절을 견디는 동안 책에 파묻혔던 그의 독특한 이력도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는데, 그래선지 그의 분신과도 같은 주인공이 20대의 10년을 지난하게 살아낸 이야기를 그린 불꽃은 여느 성장 스토리보다 사실적이고 절절하게 읽혔습니다. (본문에는 코미디언과 개그맨이 혼용되고 있는데, 서평에서는 개그맨으로 통일하겠습니다.)

 

20살의 무명 개그맨 도쿠나가는 한 불꽃축제장에서 만난 네 살 위의 선배 개그맨 가미야에게 사제지간이 되어 달라고 부탁합니다. 각자 콤비 개그 파트너가 있긴 하지만 두 사람은 가끔씩 만나 개그에 대해, 인생에 대해, 미래에 대해 수많은 이야기를 나눕니다. 도쿠나가는 가미야에게서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경외심을 느끼기도 하지만 동시에 서로 다른 미래를 그리고 있는 듯한 이질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지독한 생활고를 겪으면서도 개그에 대한 열정 하나로 모든 어려움을 견뎌내지만 10년이란 시간은 결국 두 사람에게 크고 작은 변화를 피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콤비 개그란 우리 식으로 표현하면 만담’, 즉 스탠드마이크 앞에 선 두 개그맨이 각각 바보 역할과 똑똑이 역할을 맡아 속사포 같은 개그로 관객들을 웃게 만드는 장르입니다. 웃음에 대한 센스는 물론 엄청난 순발력과 임기응변이 필요하며 타고난 재능이 없으면 좀처럼 관객에게 호응을 얻기 쉽지 않습니다.

청소년기부터 이미 개그맨이 되기로 결심했지만 도쿠나가는 재능 자체가 여러 모로 부족한 인물입니다. 그런 그가 한 불꽃축제장에서 자신과는 차원이 달라 보이는 개그맨 가미야에게 한눈에 반한 나머지 사제지간을 부탁한 건 그만큼 정열적이라는 뜻이기도, 또한 절박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가미야는 도쿠나가와는 너무나도 다른 사람입니다. 타인의 평가 따윈 신경 쓰지 않으며 자신만의 개그에 대한 신념에 투철한 가미야는 쉽게 말하면 주류 개그를 거부하는 4차원 천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중적으로 성공한 개그맨이라는 평범하고도 상식적인 목표를 가진 도쿠나가와는 전혀 상반된 가치관을 지닌 셈입니다. 마치 물과 기름과도 같은, 섞이기 어려운 차이라고 할까요?

도쿠나가가 가미야와 함께 보낸 10년은 바로 그 차이 때문에 고민하고, 그 차이를 따라잡으려 애쓰다가 결국 그 차이를 받아들이게 되면서 개그맨으로서, 한 인간으로서 훌쩍 성장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온통 리스크뿐인 무대에 서서 상식을 뒤엎는 것에 전력을 다해 도전하는 자만이 코미디언이 될 수 있다. 긴 세월을 들인 이 무모한 도전으로 나는 내 인생을 얻었다고 생각한다.” (p204)

 

개그맨이 쓴, 개그맨에 관한 소설이라고 해서 다소 가벼운 서사에 가슴을 뭉클하게 만드는 힐링 코드가 담긴 이야기가 아닐까, 지레 편견 섞인 짐작을 했던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건 마치 개그맨은 삶 자체도 개그 같을 것이라는, 지독한 폄하와 다를 바 없는 부끄러운 짐작이었습니다. ‘불꽃은 남들을 웃게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고민과 연습과 좌절이 필요한지, 가난이라는 현실과 손에 닿지 않는 이상 사이에서 얼마나 깊은 절망을 숱하게 겪어야 하는지, 그리고 관객들의 덧없는 반응 하나하나에 일희일비하는 것이 얼마나 두렵고도 허무한 일인지를 진지하게 그려낸 작품입니다. 부족한 재능에도 불구하고 열정을 놓치지 않는 도쿠나가와 주류 개그에 어울리지 않는 고독한 천재 가미야는 이 모든 어려움 속에서도 꿋꿋이 자신의 길을 걷습니다. 그리고 각자에게 어울리는 엔딩을 맞이하게 됩니다.

 

개그와 세상과 인간에 대한 가미야의 난해한 궤변(?)과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 다소 어려운 문장들 때문에 간혹 같은 페이지를 여러 번 되읽을 때도 있지만 불꽃은 한나절이면 충분히 완독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하지만 스토리가 아니라 사람을 읽어야 하는 작품이라 그저 한 번의 독서로는 그 맛을 제대로 음미하기 어렵다는 생각입니다. 또한 두 사람의 10년이 워낙 지난하고 굴곡이 많은 탓에 어쩌면 읽을 때마다 그 맛이 조금씩 달라질 것 같기도 합니다. 언젠가 두 사람의 개그가 생각날 때면 한나절 정도 그들의 10년을 다시 한 번 맛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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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 체조 닥터 이라부
오쿠다 히데오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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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 더 풀’, ‘공중그네’, ‘면장선거에 이은 닥터 이라부 시리즈의 네 번째 작품입니다. 일본 출간 기준으로 면장선거이후 17년 만인 2023년에 출간됐는데, 세월이 적잖이 흘렀지만 정신과 의사 이라부 이치로와 간호사 마유미 콤비는 여전히 17년 전 그 나이를 살아가는 중입니다. 물론 괴짜와 마녀라는 캐릭터도 여전합니다. “괜찮아, 괜찮아.”를 남발하며 환자를 당황하게 만드는 이라부는 누구에게든 뒤룩뒤룩 살찐, 다리 짧은 중년 아저씨라는 첫인상을 남기고, 표정 없는 얼굴에 미니 원피스 간호복을 입고 특대형 비타민 주사를 들이미는 마유미 역시 예전의 그 카리스마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라부의 17년 만의 복귀 이유에 대해 오쿠다 히데오는 코로나를 언급합니다. 팬데믹의 공포 속에 그 어느 때보다 정신이 황폐해진 현대인들을 지켜보며 정신과 의사 이라부라면 어떻게 반응할까?”라는 궁금증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코로나가 창궐하던 시절 외출 자제, 재택근무, 원격수업 등 사람들로 하여금 고립된 상황에서 불안과 혼란을 느끼게 만든 시스템들이 만들어졌고, 그 결과는 언론과 인터넷을 통해 지겹도록 들은 바 있습니다. 우울증을 비롯하여 많은 정신적 질병들이 급증했고, 사람들은 낯설고 불편하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들을 감내해야 했습니다.

 

라디오 체조속 다섯 편의 수록작에 등장하는 환자들이 모두 팬데믹의 희생자들로 설정된 건 아니지만 요즘 세상에선 더는 낯설지 않은 정신적 상처들을 지니고 있어서 다만 일부 인물이라도 나도 조금은 그런 것 같은데...”라는 공감을 불러일으키곤 합니다. 시청률에 목을 맨 나머지 의존증과 주의력 결핍에 걸린 뉴스쇼 PD, 부당한 일에 화가 나지만 제대로 화를 낼 줄 몰라 공황장애와 과호흡을 겪는 세일즈맨, 데이트레이더가 된 후 100억이란 큰돈을 벌었지만 히키코모리처럼 삶이 황폐해진 남자, 어느 날 갑자기 광장공포증에 빠져 대혼란을 겪게 된 전도유망한 피아니스트, 그리고 자의식이 강한 나머지 팬데믹이 끝난 후에도 동기들과 어울리지 못하게 된 대학생 등 누구나 조금씩은 갖고 있지만 유독 그 증세가 심각하게 나타난 인물들이 이라부의 진료실을 찾습니다.

 

망했다. 이 의사는 완전 미쳤다. 이라부는 원래부터 사고 회로가 이상한 것이다.” (p343)

 

창고 같은 진료실에 괴짜 같은 외모도 놀랍지만 이라부의 기이한 처방은 환자들을 더욱 당혹스럽게 만듭니다. 피하고 싶은 상황과 직접 대면하게 만들기도 하고, 도저히 치료라고 볼 수 없는 황당하고 비상식적인 지시를 내리기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죽고 사는 문제가 아닌 한 적당히 힘을 빼라고, 너무 힘주고 살지 말라고, 그러니 괜찮다고 말하며 부지불식간에 환자의 마음을 풀어주곤 합니다. 반신반의하던 환자들은 어느 샌가 이라부의 황당한 처방이 자신의 마음을 안정시키고 편하게 만들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실은 이라부의 처방은 의사가 환자에게 가하는 치료라기보다는 환자 스스로 자신의 문제를 깨닫고 스스로의 힘으로 딛고 일어설 수 있게 거드는 일종의 위약(플라시보)이나 다름없습니다. 지시하는대로 따라오라는 권위적인 의사가 아니라 환자에게 거울을 내밀고 스스로를 지켜봐라.”라고 권하는 마음씨 좋은 이웃 같다고나 할까요? 그래선지 이라부의 캐릭터도, 그가 내리는 처방도 모두 현실에선 절대 만나볼 수 없는 판타지라는 걸 잘 알면서도 독자는 어딘가 그런 의사가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의 기행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게 됩니다.

 

괴짜 콤비 이라부와 마유미를 통해 웃음과 온기를 전파하는 오쿠다 히데오 특유의 유머와 힐링 메시지는 오래 전에 읽은 시리즈의 전작들을 떠올리게 만듭니다. 서평을 쓰지 않던 시절에 읽어서 기억은 가물가물하지만, 기회가 된다면 전작들을 순서대로 한 편씩 다시 읽어보려고 합니다. 세상이 답답하고 마음이 팍팍해질 때, 황당한 처방을 남발하는 이라부만큼이나 잘 어울리는 명의는 없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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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바야가의 밤 - 각성하는 시스터후드 첩혈쌍녀
오타니 아키라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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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몸이 흉기라고 할 만큼 순수한 폭력의 화신인 22살의 신도 요리코. 어느 날 자신을 성추행한 양아치 일당을 무자비하게 때려눕히던 중 야쿠자 회장의 저택으로 끌려간 그녀는 회장의 딸인 18살 쇼코의 운전기사이자 보디가드가 되라는 어이없는 협박성 제안을 받습니다. 개죽음만은 피하고 싶었던 요리코는 이후 저택에 머물며 마치 인형처럼 감정도, 표정도 없어 보이는 쇼코의 시중을 들게 됩니다. 어색하고 냉랭하기만 했던 둘의 관계는 사소한 일탈을 계기로 조금씩 녹기 시작했고 가슴에 담아뒀던 이야기까지 꺼내는 단계에 이릅니다. 하지만 야쿠자 저택에서 벌어진 끔찍한 사태로 인해 두 사람의 운명은 예기치 못한 변곡점을 맞이합니다.

 

윈저 노트, 여왕의 비밀 수사 일지’(소피아 베넷), ‘세상 끝의 살인’(아라키 아카네)과 함께 북스피어의 첩혈쌍녀 시리즈로 출간된 작품입니다. 다른 작품들에 비해 시리즈 명칭에 진심으로 걸맞은 작품으로, 순수한 폭력을 갈구하는 싸움의 신신도 유리코와 야쿠자 회장의 금지옥엽나이키 쇼코가 벌이는 그야말로 롤러코스터와도 같은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편집자인 삼송 김사장 님의 평을 조합해서 정리하면 이 작품의 장르는 심장 떨리는 하드보일드 바이올런스 액션 스릴러라고 할 수 있습니다.

 

훗카이도의 외진 마을에서 어릴 적부터 할아버지에 의해 고문에 가까운 훈련을 받은 요리코는 몸과 마음 모두 폭력이 주는 희열에 빠진 채 성장했습니다. 18살이 되어 도쿄에 온 요리코는 싸움꾼이 되진 않았지만 누군가 시비를 걸어오면 반드시 두 배로 갚아주며 폭력의 쾌감을 만끽하곤 했습니다. 그리고 그 엄청난 폭력 재능에 반한 야쿠자가 숱한 희생을 치러가면서 그녀를 회장 딸 쇼코의 보디가드로 삼기 위해 끌고 간 것입니다.

피지컬도 멘탈도 강한 여성, 게다가 싸우기 위한 동기가 내면에서 솟아나는 여성을 그리고 싶었다.”는 작가 오타니 아키라는 영웅적인 여주인공에게 반드시 필요한 싸워야 할 이유’, 즉 가족이나 연인이나 친구를 위한 복수심 같은 것 없이도 순수하게 폭력을 갈망하고 희열을 느끼는 요리코를 창조하고 싶었다고 말합니다. 사실 멋있으면서도 폭력적인 남성 영웅 중에는 굳이 아무 이유 없이도 매력적으로 그려진 경우가 적지 않으니 오타니 아키라의 일성은 충분히 공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무튼... ‘보디가드요리코와 아가씨쇼코의 관계가 조금씩 풀어지며 서로의 속내를 드러내는 지점까지만 해도 오락성이 풍부한 재미 만점의 해피엔딩 액션 스릴러라고 단정하고 있다가 중반부쯤의 예기치 못한 전개에 꽤 세게 뒤통수를 맞은 순간엔 말 그대로 !”소리가 저절로 튀어나오고 말았습니다. 무자비한 야쿠자의 세계에서 요리코와 쇼코가 말랑말랑한 해피엔딩을 맞이할 거라고 예상하진 않았지만, 극적인 반전과 함께 이야기의 톤 자체가 처절함과 처연함으로 급변하는 대목에선 단순한 놀람 이상의 충격을 받고 말았습니다. 다 읽은 뒤 인터넷서점 출판사 소개글에서 발견한 이 지옥 같은 세계에서 등을 맡기고 싸우는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라는 일본 아나운서 우가키 미사토의 한 줄 평은 그 반전을 읽은 순간의 제 심정을 100% 대변하고 있었습니다. (삼송 김사장 님은 아주 깜찍한 반전이라고 표현하셨지만 저는 망치로 얻어맞은 듯한 묵직한 반전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바바야가의 밤2021년 제74회 일본추리작가협회상 장편부문에서 최종 후보에 올랐다고 하지만, 개인적으론 신초샤(新潮社)가 주관하는 여자에 의한, 여자를 위한 R-18 문학상에 어울리는 작품으로 보입니다. ‘심장 떨리는 하드보일드 바이올런스 액션 스릴러지만 동시에 여자에 의한, 여자를 위한 치열하고 리얼한 서사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요리코와 쇼코는 연인도, 친구도 아니지만 그 이상의 연대로 묶인 시스터후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슬라브 신화에 등장하는 마귀할멈 바바야가처럼 엄청 강하고, 마을사람들이 무서워하지만 착하고 친절한 여자애가 간절히 부탁하면 어려운 일을 도와주기도 하는사람이 되고 싶다는 두 여자가 야만적이고 파괴적인 남성 야쿠자의 세계를 벗어나 파란만장하고 기구한 삶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과정은 무척이나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사족 1. 요리코가 순수한 폭력의 화신이며 이야기의 주 무대가 야쿠자의 저택인 만큼 꽤 높은 수위의 폭력적인 묘사가 자주 등장합니다.

 

사족 2. 오타니 아키라의 또 다른 한국 출간작 우리를 뭐라고 불러야 할까가 무척 궁금해졌습니다. 진심으로 여자에 의한, 여자를 위한 소설 같은데 기회가 되면 꼭 읽어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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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살주식회사
잭 런던 지음, 한원희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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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년 뉴욕, 죽어 마땅한 악인을 법의 테두리 밖에서 처단하는 일을 하는 암살국. 어느 날 암살국의 수장인 이반 드라고밀로프는 그 자신을 처단해달라는 의뢰를 받는다. 의뢰자는 암살국의 정당성을 부정하는 백만장자 사회주의자청년 윈터 홀. 드라고밀로프와 홀은 불꽃 튀는 논쟁을 펼치고, 결국 도덕광 드라고밀로프는 암살국 해체뿐만 아니라 그 수장인 자기 자신 또한 제거되어야 옳다는 결론에 이른다. 드라고밀로프는 조직원들에게 보스인 자신을 제거하라는 명령을 하달한 뒤 유유히 모습을 감추고, 이상주의자이자 원칙주의자이며 지성과 체력을 겸비한 조직원들이 그의 뒤를 쫓기 시작하는데... 과연 최후의 승자는 누가 될 것인가? (출판사 소개글을 일부 수정 후 인용했습니다.)

 

난 처형자지 살인자가 아닙니다. 지금까지 조직에서 정당한 이유 없이 제거한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전부 사회를 좀먹는 극악무도한 범죄자들이었어요.” (p107)

 

출판사의 소개글과 위의 인용문만 보면 그렉 허위츠의 살인 위원회와 비슷하게 특정집단에 의한 사적 제재를 다룬 전형적인 액션 스릴러로 보이지만, ‘암살주식회사는 암살자들의 캐릭터도, 그들이 품은 신념도, 또 그들이 속한 조직의 정체성도 워낙 특이해서 그 모든 예상을 뛰어넘는 독특한 서사를 선보입니다.

 

러시아 출신의 무정부주의자이자 기업가인 이반 드라고밀로프가 11년 전인 1900년에 설립한 암살국은 미국 곳곳에 지부를 둔 채 그동안 사회를 좀먹는 극악무도한 범죄자들을 처단해왔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가치는 돈이나 정의감이 아니라 광신에 가까운 윤리의식과 도덕감입니다. 모든 살인 청부를 수용하는 게 아니라 그 처형은 과연 정당한가?’에 대해 엄격한 심사를 통과한 경우에 한해 행동에 나섭니다. 그리고 한 번 움직이기 시작한 의뢰는 그 어떤 경우에도 결코 철회되지 않습니다.

지성을 겸비한 S급 킬러라는 홍보 카피처럼 암살국 소속 암살자들은 그저 무기를 잘 다루고 완력만 강한 일반적인 암살자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인물들입니다. 교수, 학자, 편집자 등 말 그대로 지성을 갖춘 그들은 드라고밀로프와 마찬가지로 엄청난 도덕광들이자 행동하는 무정부주의자이며 미친 철학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신념과 맹약은 그 누구도 균열 하나 낼 수 없을 정도로 견고하고 탄탄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연이은 의문사에 의심을 품은 백만장자 사회주의자윈터 홀이 암살국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분투하던 중 우연한 계기를 통해 드라고밀로프와 마주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의 면전에서 당신을 암살해달라.”라는 충격적인 의뢰를 합니다. 암살국의 정당성에 관한 긴 논쟁은 홀의 승리로 끝나고, 드라고밀로프는 조직 전체에게 자기 자신을 암살하라는 지령을 내린 뒤 사라집니다. 그리고 그날 이후로 암살국 전체와 드라고밀로프의 피의 추격전이 시작됩니다. 애초 암살국의 해체가 목적이었던 홀은 예상치 못한 이 추격전에 당황합니다. 더구나 드라고밀로프는 암살국의 관리와 자금을 모두 홀에게 맡기고 떠난 터라 어이없게도 홀은 자신이 해체시키려던 암살국의 임시 사무장이 되고 맙니다.

 

스스로를 암살하라는 지령을 내린 보스와 그 보스를 살해하려는 암살국 전체의 피의 추격전이란 설정만 보면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스타일의 흥미진진한 서사가 이어지지 않을까, 기대할 수밖에 없는데, 실은 엄청난 도덕광들이자 행동하는 무정부주의자이며 미친 철학자들이 벌이는 추격전은 한 손에는 철학, 한 손에는 권총이라는 홍보 카피대로 전쟁과 논쟁을 반복하는 특이한 양상으로 흐르기 시작합니다. 피와 살이 튀는 가운데 도덕과 공의에 관한 철학적 논쟁이 벌어지고, 서로를 죽여야 하는 처지임에도 드라고밀로프와 암살자들은 때로 함께 저녁을 나누며 자신들의 공통된 신념을 찬양하고 호쾌한 웃음을 주고받기도 합니다. 그야말로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독특한 스릴러라고 할까요?

 

하지만 이 독특함은 독자에 따라 꽤 크게 호불호가 갈릴 것으로 보입니다. 피의 추격전은 무척이나 리얼하지만 그 와중에 벌어지는 철학적인 논쟁은 다소 난해하고 추상적이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론 스릴러의 외피를 쓴 도덕과 공의에 관한 철학서처럼 읽혔는데, 워낙 그 방면으로 취약하다 보니 암살자들의 논쟁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던 게 사실입니다. 과연 이 독특함이 다른 독자들에겐 어떻게 읽혔을지 무척 궁금한데, 인터넷서점이나 블로그에 이 작품에 관한 서평이 올라오면 꼼꼼히 찾아 읽어볼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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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장 (출간 40주년 기념 특별판)
윤흥길 지음 / 현대문학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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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이리(현재 전북 익산시 일부) 외곽의 이곡리. 벼락졸부인 최사장은 저수지 사용권을 따낸 뒤 그 관리를 동네건달 임종술에게 맡깁니다. 애초 일이란 걸 할 마음이 없던 임종술이었지만 완장을 차게 해준다는 말에 솔깃해선 그 제안을 받아들입니다. 스스로 감독이라고 적힌 완장을 만들어 찬 임종술은 그날 이후 저수지 관리는 말할 것도 없고 동네 안팎에서 완장의 위용을 거들먹거리며 유세를 부리기 시작합니다. 어느 새 완장의 권력에 푹 빠져든 임종술은 저수지가 자신의 것이라도 된 양 넘어선 안 될 선을 넘기 시작하고, 가뭄으로 인해 저수지의 물을 빼기로 한 마을의 결정조차 거부하는 지경에 이릅니다. 완장의 위용은 균열을 일으키며 파국을 향하고 있었지만 임종술의 욕망은 조금도 수그러들지 않습니다.

 

책에 관심 없는 사람이라도 그 제목만은 한두 번쯤 들어본 적 있는 윤흥길의 완장1983년 첫 출간된 이후 5판인 출간 40주년 기념 특별판으로 다시금 독자를 찾았습니다. 오래 전부터 언젠가는 꼭 한 번 읽어야지, 생각만 하고 있던 작품인데, 뒤늦게나마 40주년 특별판으로 읽게 돼서 마치 오랫동안 밀린 숙제를 마친 듯한 개운함을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단 두 글자의 제목이지만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지 쉽게 짐작할 수 있을 정도로 완장은 그 자체로 강렬한 이미지를 품은 단어입니다. 공포와 굴복을 강요하는 가공할 폭력성을 상징하기도 하고 완장이라도 찼냐?”라는 흔한 비아냥처럼 한줌도 안 되는 권력에 대한 냉소를 은유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기회가 된다면 한번쯤 차보고 싶은 욕망을 누구에게나 불러일으키는 요망한 물건이기도 합니다.

건달에 한량인 임종술은 잠시지만 서울에서 험난한 생활을 하는 동안 그 완장의 힘에 수차례 짓눌린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쥐꼬리만한 월급의 저수지 관리인이라는 제안에 격분하다가도 완장이란 말을 듣는 순간 앞으로 자신이 거머쥐게 될 권력을 본능적으로 감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실제로 자비를 들여 만든 완장을 찬 그 순간부터 임종술의 세상은 그 전으로는 절대 돌아갈 수 없는 신세계로 급변했고, 하루하루 커져가는 권력을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며 도취하는 것은 물론 광대한 저수지가 마치 자기 소유의 땅이라도 되는 양 열광하게 된 것입니다.

 

완장의 진짜 이야기는 임종술의 권력이 조금씩 균열을 일으키는 지점에서 시작됩니다. 본분을 망각한 탐욕, 스스로 초래한 위기, 빼앗기지 않으려는 발버둥,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선택한 위험천만한 정면 돌파, 그리고 예정된 파국에 이르기까지 임종술의 짧은 연대기는 허망한 권력을 탐하다가 몰락해간 유명한 인물들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완장의 진짜 미덕은 임종술의 비극이라는 줄거리 자체보다 그 과정을 그려낸 풍자와 해학의 서사에 있습니다. “권력을 희화화하고, 희화화된 권력을 취하기 위해 악전고투하는 주인공을 내세워 권력을 더욱 풍자하는 격이라는 출판사 소개글대로 완장은 정색하고 주제를 강요하는 고발물이 아니라 과거 종이신문의 4단 만화처럼 독자로 하여금 폭소와 냉소를 번갈아 만끽하게 하는 풍자극이자 해학극입니다. 그리고 역설적이지만 이 풍자와 해학은 훨씬 더 예리하고 날카로운 비판의 칼을 지니고 있어서 작가가 임종술을 통해 드러내고 싶었던 주제를 좀더 생생하게 맛볼 수 있게 해줍니다.

 

백성들 위에 군림하는 권력을 희화화의 대상으로 삼아 마구 꼬집고 할퀴고 옆구리와 발바닥을 간질임으로써 우스꽝스런 꼬락서니로 짓뭉개놓았노라고 생각했을 때의 그 쾌감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3판 작가의 말’)

 

주인공 임종술은 악당이 아닙니다. 물론 평범한 인물도 아니긴 하지만 완장과 권력을 향한 그의 욕망은 누구라도 품을 수 있는 보편적인 것이고 손에 넣은 것들을 지키려는 발버둥 역시 자연스러운 대응일 뿐입니다. 누구도 그의 욕망과 발버둥을 비난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누군가 자신에게 완장을 채워주겠다고 했을 때 거부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바꿔 말하면 누구라도 임종술이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어쩌면 작가가 완장을 통해 하고 싶었던 말 역시 임종술에게 손가락질을 하는 당신도 언제든 완장을 찰 기회가 온다면 임종술이 될 수 있다.”가 아닐까요?

 

얼마 후면 국회의원 선거가 있습니다. 코미디에 가깝지만 정치인들이 상대방을 비난할 때 자주 사용하는 단어 중 하나가 완장입니다. 완장 같은 거엔 관심도 욕심도 없다는 뻔한 거짓말을 하면서도 정작 눈에 보이지 않는 완장을 찬 채 권력을 누리고 탐하는 게 자신들이라는 걸 망각한 듯 말입니다. 문득 그들이 윤흥길의 완장을 읽는다면 어떤 독후감이나 서평을 내놓을지 궁금해집니다. 대부분 나는 임종술이 아니다.”라고 주장하겠지만, 적어도 활자로 인쇄된, 그래서 안 보려야 안 볼 수 없는 당연한 교훈만큼은 조금이라도 얻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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