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릭터
나가사키 타카시 지음, 김은모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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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스펜스 만화가를 꿈꾸며 유명 만화가의 보조로만 5년을 보낸 야마시로 케이고는 그림 실력은 뛰어나지만 천성이 착한 나머지 악한 캐릭터를 창조해내지 못해 만화가 데뷔에 번번이 실패하고 맙니다. 그런 그가 한 저택을 스케치하러 갔다가 일가족 네 명이 살해당한 현장을 목격합니다. 범인과 마주쳤음에도 충격 때문에 그 얼굴을 기억해내지 못한 야마시로는 용의자로 몰리기도 하지만 알리바이 덕분에 겨우 풀려납니다. 얼마 후 단골 펍에서 만난 분홍머리 남자가 살해현장에서 마주쳤던 범인과 똑같은 목소리를 내자 야마시로는 그대로 얼어붙습니다. 하지만 그가 떠난 뒤 그의 얼굴을 스케치해본 야마시로는 드디어 찾아낸 악의 캐릭터에 환호합니다. 그리고 그 캐릭터를 등장시킨 만화로 야마시로는 데뷔와 함께 대박을 터뜨립니다. 문제는 그 만화를 그대로 본 딴 듯한 4인 가족 살인사건이 연이어 벌어진다는 점입니다.

 

읽은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작가의 작품이지만 눈길이 끌린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띠지에 적힌 소설-만화 동시 발행이라는 문구였고, 또 하나는 인터넷서점에서 나가사키 타카시라는 이름으로 30편의 작품이 검색되는데 그중 28편이 만화라는 점입니다. 소설을 모방한 살인사건이라는 소재는 익숙하지만 만화를 모방한 살인사건은 들어본 적이 없어서 무척 궁금해졌습니다.

 

주인공 야마시로 케이고의 딜레마는 서스펜스 만화가를 꿈꾸면서도 너무도 선한 성격 탓에 인기를 끌만한 악한 캐릭터를 만들어내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그런 그가 참혹한 살인사건 현장을 목격하고 그 범인과 마주친 뒤로 그토록 그려내지 못했던 악한 캐릭터를 창조해낼 수 있었다는 건 역설적이면서도 운명적인 설정입니다. 재미있는 건 악한 캐릭터를 창조한 바로 그 순간 야마시로 자신의 캐릭터도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일그러지고 비틀어졌다는 점입니다.

 

‘34’라는 제목의 야마시로의 데뷔작에 등장한 악한 캐릭터는 대거라는 이름의 무차별 살인귀입니다. 그리고 행복해 보이는 4인 가족만을 골라 참혹하게 살해하는 역대급 사이코패스입니다. 독자는 대거에게 열광했고 야마시로는 데뷔작부터 초대박을 터뜨립니다. 문제는 연재가 시작된 지 얼마 안 돼 그의 만화를 그대로 모방한 4인 가족 살인사건이 일어난 점입니다. 그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대거의 실제 모델인 분홍머리 남자가 눈앞에 나타나자 야마시로는 선택의 기로에 놓입니다. 만화를 포기할 것인지 연쇄살인의 공범이 돼서라도 어렵게 이룬 만화가의 꿈을 이어갈 것인지를 결정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캐릭터라는 제목에 걸맞게 이 작품은 선한 캐릭터의 만화가 지망생이 세상에 유래가 없는 4인 가족 연쇄살인마 캐릭터를 창조함으로써 만화가의 꿈을 이루지만 그로 인해 자기 자신의 캐릭터까지 망가지고 마는 비극을 다루고 있습니다. 또한 만화 속 살인마 대거의 실제 모델인 분홍머리 남자, 만화 오타쿠이자 연쇄살인을 수사하는 카나가와 현경 수사1과의 세이다 슌스케, 망가진 야마시로 때문에 절망하는 연인 나츠미 등 등장인물 모두의 캐릭터를 미스터리 못잖게 디테일하게 그려냅니다. 그래선지 소설보다는 만화에 적합한 서사로 보이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현실적이고도 정교한 미스터리를 설계한 뒤 그 안에 악과 마주하는 여러 인물들의 다양한 캐릭터와 감정을 함께 불어넣음으로써 한 번에 마지막 장까지 읽게 만드는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만들어냈습니다.

 

막판의 흥미로운 반전과 클라이맥스에서는 다분히 만화적인 설정이 등장하긴 하지만 앞서 탄탄하게 쌓아온 서사 덕분에 아주 약간의 위화감 외에는 무난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물론 이 약간의 위화감 때문에 별 0.5개를 뺀 건 무척 아쉽게 느껴지긴 했습니다.

스토리와 캐릭터의 힘 모두 정통 미스터리보다는 만화 계열의 미스터리에서 성장한 작가의 이력이 제대로 발휘된 덕분이란 생각인데, 혹시라도 이 작품이 만화나 애니로 만들어진다면 꼭 찾아보려고 합니다. 소설 속에선 야마시로가 그린 만화 장면이 대사로만 설명되는데, 만화나 애니라면 소설과는 달리 매력적이면서도 충격적인 비주얼을 만끽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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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시 45분 열차에서의 고백
리사 엉거 지음, 최필원 옮김 / 황금시간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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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뢰하던 보모 제네바가 남편 그레이엄과 불륜 관계임을 알게 된 셀레나는 절망에 사로잡힙니다. 너무나도 큰 충격에 빠진 나머지 통근열차에서 만난 낯선 여자 마사가 직장상사와 불륜 중이라는 고백을 해오자 자기도 모르게 남편과 보모의 불륜을 털어놓았던 셀레나는 얼마 후 제네바가 실종되는 사건이 벌어지자 열차에서 들은 마사의 마지막 말을 떠올리며 한기를 느낍니다. “그 여자가 그냥 사라져줄 수도 있지 않겠어요?” 우연의 일치인지 혹은 실제로 마사라는 여자가 제네바의 실종과 관련 있는 건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셀레나의 불안감은 날로 커져갑니다. 한편 그레이엄의 불륜 사실을 알아낸 경찰은 제네바 실종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로 그레이엄과 셀레나를 주목합니다. 하지만 셀레나는 마사에 관해선 일체 감추기로 결심합니다.

 

출간 당시 이 작품을 읽을 목록에 올리지 않았던 건 단 한 가지 이유, 도메스틱 스릴러였기 때문입니다. 한때 홍수처럼 쏟아져 피로도가 높아진 탓에 어지간히 눈에 띄는 줄거리가 아니라면 일단 보류해왔는데, 네이버 카페 러니의 스릴러 월드에서 202310대 스릴러로 뽑힌 걸 보곤 한번쯤 도전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셀레나의 삶이 순식간에 뒤흔들린 건 그녀가 남편 그레이엄과 불륜 중이었다는 점과 열차에서 만난 미지의 여자 마사에게 그 사실을 털어놓은 점 때문입니다. 오로지 가정을 지켜야 된다는 압박감에 이미 여러 차례 성추문을 일으킨 그레이엄을 용서해왔던 셀레나는 더는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지만, 하필 불륜 상대가 실종된 탓에 경찰이 개입하는 지경에 이르자 또 다시 그레이엄의 추태를 감추기로 결심합니다. 문제는 자신 외에 그레이엄의 불륜을 아는 사람이 또 한 명 있다는 점. 열차에서 우연히 만난 마사에게 자신의 불행을 들려준 일이 몹시도 신경 쓰이던 셀레나는 어느 날 마사로부터 만나자는 문자를 받자 깜짝 놀랍니다.

 

남편의 불륜과 보모의 실종으로 인한 경찰의 압박, 그리고 미지의 여자에 대한 의문과 두려움 등 셀레나의 이야기가 긴박하게 전개되는 가운데, 전혀 관련 없어 보이는 15살 소녀 펄에 관한 이야기가 나란히 병행됩니다. 수시로 남자를 갈아치우는 엄마에 대한 원망, 그런 엄마의 새남자로 보이는 서점직원 찰리에 대한 의심, 그리고 누군지 알 수 없는 친아빠에 대한 그리움과 증오 등 펄이 겪는 롤러코스터 같은 삶이 불온한 분위기와 함께 긴장감을 끌어올립니다. 셀레나의 이야기와 펄의 이야기는 중반부 이후 예기치 못한 반전과 함께 접점을 이룹니다. 셀레나의 공포와 분노를 극에 달하게 만드는 대목이자 제네바 실종사건이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는 단계이기도 한데 이 무렵부터 이야기는 엄청난 속도로 달리기 시작합니다.

 

사실 스포일러가 될 여지가 너무 많아서 초중반 이후의 내용이나 설정에 관해선 언급하기가 무척 곤란한 작품입니다. 열차에서 만난 마사라는 여자의 정체, 의문투성이인 제네바의 실종, 가정과 삶의 붕괴에 고통스러워하는 셀레나의 비밀과 거짓말, 그리고 15살 소녀 펄이 이후 어떤 사건들을 겪으며 어른으로 성장하는가 등 초반부터 독자에게 던져진 궁금증들이 아주 천천히 양파 껍질처럼 하나씩 벗겨지며 공개되기 때문입니다. 이 작품의 서평들 가운데 뜻하지 않게 대형 스포일러가 담긴 경우가 있을 수도 있으니 아직 읽지 않은 독자라면 인터넷 서점의 출판사 소개글 정도만 참고할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도메스틱 스릴러의 외형을 지녔지만 서스펜스+심리스릴러의 미덕까지 갖춘 작품이라 기대 이상으로 흥미로운 책읽기가 됐습니다. 특히 5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을 사건보다 캐릭터의 힘으로 끌고 간 작가의 필력은 대단해 보였습니다. 리사 엉거는 스무 편 이상의 작품을 펴낸 베테랑 작가라고 하는데, 이전까지 한국에는 2008년에 출간된 아름다운 거짓말한 편이 전부라서 무척 의외였습니다. 그녀의 전공이 도메스틱 스릴러라면 살짝 아쉬울 것 같기도 하지만 그렇다 해도 신간 소식이 들리면 관심을 갖고 지켜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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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앙의 책
오다 마사쿠니 지음, 최고은 옮김 / 검은숲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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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2015년에 출간된 책에도 수컷과 암컷이 있습니다는 읽어보진 못했지만 그 제목도 너무 특이하고 책에도 암수가 있어서 아무렇게나 붙여 놓으면 새로운 내용을 가진 책을 잉태해버린다.”라는 기발한 소재를 다루고 있어서 언젠가 기회가 되면 읽어볼 생각을 갖고 있던 작품입니다. 그러다가 ()-재앙의 책을 통해 오다 마사쿠니를 처음 만나게 됐는데,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기괴한 설정과 그로테스크한 스토리에 진심으로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모두 일곱 편의 단편이 실려 있는데, 하나 같이 비현실 혹은 이세계에서나 가능할 법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그 이야기들의 시작은 지극히 평범한 인물의 일상에서 출발하고 있어서 아주 묘한 사실감을 지니고 있습니다.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왠지 그런 일이 벌어질 수도 있겠다는 식의 리얼리티라고 할까요? 또 대부분의 주인공들이 화() 혹은 재앙에 휘말리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두 참혹하거나 비극적인 엔딩을 맞이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독자에 따라 그만하면 주인공 입장에선 해피엔딩 아닌가?”라는 느낌을 받는 작품도 일부 있습니다. 인상 깊었던 몇몇 작품만 간단하게 소개하면...

 

식서(食書)

신작을 쓰지 못해 괴로워하던 소설가가 화장실에 숨어 책을 찢어 먹는 여자를 목격하곤 크게 놀랍니다. 하지만 자기도 모르게 그 여자처럼 책을 찢어 먹은 소설가는 소설 속 세계로 전이되는 충격적인 경험을 하게 됩니다.

 

미미모구리(もぐり)

타인의 귀에 손가락을 대는 순간 그 속으로 몸이 사라지는 것은 물론 귀 주인의 몸과 마음을 지배하는 능력을 지닌 미미모구리. 주인공은 미미모구리에게 능력을 전수받은 뒤 40여 년에 걸쳐 수많은 사람들의 몸과 마음을 드나듭니다.

 

부드러운 곳으로 돌아가다(らかなところへ)

바짝 마른 몸의 아내를 둔 남자는 어느 날 버스에서 만난 풍만한 체구의 여자에게 스스로도 놀랄 만큼 강한 욕망을 느낍니다. 일상이 무너질 정도로 풍만한 여자에게 집착하기 시작한 남자 앞에 버스에서 만난 여자와 비슷한 외모의 여자가 연이어 나타납니다.

 

농장(農場)

20대에 노숙자가 된 이노우에는 한 노인의 제안으로 농장에서 일하게 됩니다. 그곳에서 수확하는 희귀 작물의 이름은 하나바에. 하지만 그것은 잘라낸 코를 밭에 심은 뒤 6개월 후에 수확한 재생산된 인간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 외에도 꿈속에서 만나곤 했던 소녀가 자신의 안구에서 피어오른 연기 속에서 나타나는 이야기(‘상색기’), 머리카락 신을 모시는 사교집단에 도우미로 참석했다가 끔찍한 참극에 휘말리는 여자(‘머리카락 재앙’), 신체접촉만으로 감염되는 노출증 때문에 패닉에 빠지는 세계(‘나부와 나부’)등 상상을 뛰어넘는 설정과 파격적인 이야기를 담은 작품들이 수록돼있습니다.

줄거리에서 짐작할 수 있듯 인간의 어두운 감정들이 밑바닥에 진하게 깔린 이야기들인데 그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것은 혐오와 불안입니다. 어찌 보면 공포보다 훨씬 더 독자의 오감을 자극하는 감정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래선지 그 어떤 호러물보다 더 독한 여운을 남깁니다.

재미있는 건 일곱 편 모두 공통적으로 인체기관을 소재로 사용한 점입니다. , , , , , 머리카락, 나체가 그것인데, 읽는 내내 느낀 신경을 긁어대는 듯한 불쾌감의 근원은 아마 이 인체기관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혐오와 불안이라는 감정이 인체기관과 조합되면서 이야기를 더욱 농밀하게 만들었다고 할까요?

 

읽는 동안 아야세 마루의 치자나무’, 쓰하라 야스미의 일레븐이 떠오르곤 했는데, 두 작품 모두 괴담 이상의 괴담이라는 느낌을 받을 정도로 강한 인상을 남긴데다 캐릭터나 설정 역시 단순히 비현실적이라는 말로는 부족한 기괴함과 파격성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물론 치자나무의 경우 사랑이라는 주제가 엽기적인 설정과 조합된 독특한 작품이고, ‘일레븐은 모든 장르가 망라된 종합선물세트 같은 작품이라 ()-재앙의 책과는 톤 자체가 다르긴 하지만 평범한 상상력으론 도달할 수 없는 서사를 구사했다는 점에서 비슷한 작품으로 여겨진 것 같습니다.

 

첫 두 수록작(‘식서’, ‘미미모구리’)을 읽을 때까지만 해도 별 5개도 부족하다며 감탄했지만 이후 수록작들이 살짝 기대에 못 미쳐서 별 4개에 그치고 말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에 먼저 출간된 오다 마사쿠니의 책에도 수컷과 암컷이 있습니다를 읽어보고 싶은 욕심이 생겼고, 아직 출간 안 된 그의 작품들도 궁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독자에 따라 호불호가 꽤 크게 갈릴 작품으로 보이는데, 불편함이나 불쾌함으로 감수하고라도 특별한 괴담을 맛보고 싶은 독자라면 한번쯤 도전해볼 것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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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인 1역
렌조 미키히코 지음, 양윤옥 옮김 / 모모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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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도적인 카리스마와 미모를 갖췄지만 갖가지 스캔들을 일으켜 유명해진 톱 모델 미오리 레이코가 독살당한 시체로 발견됩니다. 경찰은 그녀의 파혼남인 전직 의사 사사하라 노부오를 체포하지만 그는 범행을 절대 부인합니다. 그러던 중 한 기업의 대표가 자신이 레이코를 살해했다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합니다. 그런데 이 소식을 듣고 패닉에 빠진 여섯 명의 남녀가 있습니다. 이들은 레이코를 살해한 게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자들입니다. 무엇보다 자살한 기업 대표의 유서에 담긴 살해 상황과 방법이 자신이 레이코를 살해했을 때와 완벽하게 동일하다는 사실 때문에 이들의 공포심은 극대화됩니다. 한편 무죄로 풀려난 사사하라는 후배 의사 하마노에게 여섯 남녀에 대한 조사를 부탁합니다. 분명 그들 중에 진범이 있기 때문입니다.

 

백광회귀천 정사를 읽고 팬이 되어 저녁싸리 정사’, ‘조화의 꿀’, ‘열린 어둠등 한국에 출간된 렌조 미키히코의 작품들을 사들였지만, 아끼며 천천히 읽고 싶은 마음에 본의 아니게 책장에 방치하고 있던 중 2023년에 출간된 ‘71을 먼저 읽게 됐습니다.

원제가 という變奏曲’(나라는 이름의 변주곡)인 이 작품은 1984년 출간된 이후 현재까지 여러 대형 출판사에 의해 다섯 차례나 복간되어 불사조 미스터리라는 별칭을 얻었다고 합니다. 그만큼 매력적이고 완성도 높은 작품이란 뜻일 텐데 그래선지 이렇게 뒤늦게 한국에 소개된 게 다소 의외이기도 합니다.

 

일곱 번의 살인, 일곱 명의 범인, 하지만 시체는 하나라는 독특한 설정 속에 누가 진범인지를 캐는 과정이 미스터리의 핵심입니다. 한쪽에선 용의자로 체포됐다가 풀려난 전직 의사 사사하라 노부오가 후배 의사 하마노의 도움을 받아 레이코를 죽이고 싶어 한 일곱 명가운데 진범을 찾아내려는 분투를 다루고 있고, 다른 한쪽에선 자신이 레이코를 죽인 게 분명하다고 여기는 남녀들이 의문과 공포에 휩싸인 채 지난 5년 동안 레이코와 맺었던 관계를 돌이켜 보는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하지만 미스터리 자체보다 더 눈길을 끄는 건 사악하고 이기적인 인간의 탐욕, 몸과 마음과 목소리까지 모조리 빼앗긴 자의 절망, 자신의 파멸을 무릅쓰면서까지 사랑을 완성하려는 자의 광기, 그리고 자신 외에 범인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여기는 여섯 남녀의 바닥 모를 공포 등 살해당한 레이코와 그 주변 인물들에 대한 지독하고도 섬세한 심리 서사입니다. 360여 페이지에 불과한 분량이지만 다 읽고 나면 마치 600페이지 급 피로감이 느껴지는 건 농밀하다 못해 숨이 막힐 정도로 빈틈없이 채워진 이 심리 서사 때문입니다.

모두가 죽이고 싶었던 여자이면서 동시에 모두를 죽이고 싶었던 여자인 레이코의 경우 참혹하고 안타까운 유년기와 5년 전의 끔찍한 사고, 그리고 그 직후 톱 모델에 이르기까지의, 화려했지만 동시에 그녀의 모든 것을 빼앗아간 연옥 같은 시간들이 상세하게 그려집니다. 그 과정에서 진짜라곤 아무 것도 남지 않은 그녀가 일곱 명의 범인에게 일곱 번 살해당할 수밖에 없었던 미스터리가 한꺼풀씩 천천히 독자에게 공개됩니다.

 

사진작가, 베테랑 여성 디자이너, 신인 남성 디자이너, 기업 대표이자 광고주, 톱의 자리를 다투던 동료 모델, 음반 디렉터, 젊은 의사 등 지난 5년 간 레이코의 삶을 뒤흔들었던 자들은 자신 외에 레이코를 죽인 또 다른 범인이 있다는 사실에 충격과 공포에 빠진 채 어떻게든 사건의 진상을 알아내려 노력합니다. 실은 그들은 아무 죄책감 없이 레이코의 몸을 조각내고 살을 샅샅이 먹어치운 자들이자 그녀의 모든 것을 모조리 빼앗아 돈으로 바꾸어버린 자들입니다. 그리고 모두들 레이코를 죽이고 싶어 할 정도로 궁지에 몰려있던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정작 레이코가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평온을 되찾기는커녕 살아서는 벗어날 수 없는 진정한 지옥을 맛보게 되는 동정할 수 없는 악인의 처지로 추락합니다.

 

출판사 소개글대로 우수가 짙게 깔린 분위기”, “휘몰아치는 마지막 대반전”, “철저히 계산된 서술등 다양한 코드와 서사가 잘 섞여 있어서 일반적인 미스터리와는 전혀 다른 여운을 남기는 작품입니다. 거듭되는 반전 끝에 드러나는 레이코의 죽음의 진상은 정교한 미스터리에 대한 감탄과 함께 애잔함과 안타까움을 불러일으킵니다. ‘백광회귀천 정사에서 맛봤던, 섬세하면서도 그래서 더 긴장감과 위기감을 고조시키는 문장들 역시 여전해서 그의 팬이라면 충분히 열광하고도 남을 작품이라는 생각입니다.

 

2013년에 타계했지만 렌조 미키히코는 장편과 단편집을 포함하여 70여 편을 남겼습니다. 그 가운데 한국에 소개된 건 10편도 채 안 되는데, 그래도 최근 들어 그의 작품이 종종 출간되는 건 무척 반가운 일입니다. 가능하다면 좀더 많은 작품을 만나보고 싶은 욕심인데, 그 전에 아껴뒀던 책장 속 작품들부터 한 편씩 꺼내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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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까마귀 살인사건
다니엘 콜 지음, 서은경 옮김 / 북플라자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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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유명한 인플루언서의 SNS에 두 장의 끔찍한 사진이 업로드 된다. 하나는 그녀가 목이 졸려 죽어있는 사진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녀의 목이 잘려나간 사진이었다. 벌써 세 번째 사건이었다. 모두 머리만 남긴 채 몸통은 감쪽같이 사라졌다. 얼굴에는 할퀸 것 같은 다섯 줄의 상처가 남아있었다. 언론에서는 이 살인범을 갈까마귀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사건을 맡은 스칼릿 형사는 단서 하나 찾지 못하던 중 범죄현장에서 불법적으로 조사를 벌이고 있던 자칭 사립탐정 헨리와 만난다. 수상하기 짝이 없는 헨리가 첫 번째 살인의 트릭을 밝혀내면서 두 사람의 위험한 공조 수사가 시작된다. (출판사 소개글을 일부 수정 후 인용했습니다.)

 

봉제인형 살인사건 시리즈의 다니엘 콜이 새로운 주인공 스칼릿 딜레이니를 내세워 런칭한 새 시리즈의 첫 작품입니다. 사실 4년 전쯤 봉제인형 살인사건에게 별 3개라는 낮은 평점을 준 탓에 이후 출간된 작품은 한 편도 읽지 않았는데, 새로운 주인공이 등장한다는 출판사 소개글 때문에 혹시나, 하는 기대감으로 오랜만에 그의 작품을 읽게 됐습니다.

 

새 주인공 스칼릿 딜레이니는 꽤 독특한 캐릭터입니다. 20여 년 전 경찰에게 사살된 연쇄살인마의 딸이자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지금은 동료들로부터 돌아버린 딜레이니혹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은 정신병자라고 뒷담화를 듣는 다혈질 형사입니다. 자신에게 노골적으로 비아냥을 퍼붓는 동료들에게 제대로 보복할 수 있는 방법은 단 한 가지, 그들의 입을 다물어버리게 할 만큼 눈에 띄는 공적을 세우는 것임을 잘 아는 스칼릿은 잔인한 연쇄살인마 갈까마귀에게 모든 신경을 집중합니다. 분명 정의감이 느껴지는 인물이긴 하지만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스칼릿의 폭주 캐릭터는 초반부터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사건 현장에서 불법적인 조사를 벌이다가 스칼릿에게 덜미가 잡힌 자칭 사립탐정이자 해결사 헨리 데블린은 첫 사건의 트릭을 밝혀냄으로써 스칼릿에게 첫 공적을 안겨주는 어딘가 수상쩍은 인물입니다. 그는 어딜 가도 눈에 띄는 외모와 그 이상의 젠틀함까지 갖추고 있지만 동시에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 같은 면모까지 갖추고 있어서 마치 나쁜 주인공같은 냄새를 폴폴 풍기기도 합니다. 독자 입장에선 헨리가 평범한 인물이 아님을 직감하고도 사건 해결 욕심에 그와의 공조 수사를 받아들인 스칼릿을 아슬아슬한 시선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습니다. 과연 새로운 커플 주인공의 탄생으로 이어질지 아무도 예상치 못한 파국으로 이어질지 전혀 가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주인공이라 부를 만한 인물은 스칼릿의 파트너이자 멘토인 노장 프랭크 애쉬 형사입니다. 인연이 닿았다면 스칼릿의 양부가 될 수도 있었던 프랭크는 그녀가 경찰이 된 이후 늘 수호천사처럼 그녀 곁을 지켜온 인물입니다. 그런 프랭크가 스칼릿의 위험한 수사를 가장 먼저 감지한 것도, 또 자칫 스칼릿의 경찰로서의 경력을 망칠 수도 있는 수상한 인물 헨리를 가장 경계한 것도 당연한 일입니다. 프랭크는 스칼릿을 위해서라도 하루 빨리 갈까마귀를 잡아야 한다는 책임감을 안고 분투하지만 상황은 그의 뜻대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몸통은 사라진 채 잘린 머리만 발견되는 연쇄살인 설정은 흥미로웠지만 몇 가지 이유 때문에 이번에도 역시 박한 평점을 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장 큰 건 포장은 그럴 듯했지만 내실은 빈약했던 캐릭터입니다. 주인공 스칼릿은 언행, 성격, 과거 등 극적인 면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깊이가 거의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인연과 악연이 겹친 프랭크와의 오랜 관계도 마음을 움직일 만큼 설득력 있게 묘사되지 않았습니다. 다른 인물들에게서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는데, 그만큼 인물을 묘사하는 문장과 서사가 모두 얕아 보였다는 뜻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미스터리 자체가 재미없는 건 아니지만 어느 시점인가부터 평범하고 밋밋하게 전개된 점입니다. 인상적인 변곡점이나 반전이라고 할 수 있는 건 두어 군데밖에 없고 그 외에는 딱히 긴장감을 느낄 만한 대목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심지어 갈까마귀의 정체가 밝혀지는 지점에서도 이후의 이야기가 그다지 궁금해지지 않은 걸 보면 이 미스터리 자체가 저를 흥분시키지 못한 건 분명해 보입니다. 물론 이 부분은 다니엘 콜과는 잘 맞지 않는 저만의 지극히 주관적인 평가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오늘 기준으로 인터넷서점의 평점을 보니 알라딘은 76.9%, 예스2480%의 독자가 별 5개를 줬습니다. 아무래도 제 취향과 맞지 않을 뿐 다른 독자들에겐 충분히 어필한 작품으로 보이는데 아직 읽지 않은 독자라면 다른 분들의 서평도 꼭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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