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에게 보내는 도전장
아쓰카와 다쓰미.샤센도 유키 지음, 김은모 외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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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미스터리를 부러워하는 이유가 여러 가지 있지만 아무래도 가장 큰 건 화수분마냥 개성 강한 작가들을 끊임없이 탄생시키는 탄탄한 문화적 기반입니다. 그 기반 가운데 하나는 다양한 하위 장르를 발전시키고 새로운 기획을 발굴하는 노력일 텐데 그런 점에서 당신에게 보내는 도전장은 일본 미스터리의 또 다른 매력을 맛볼 수 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쓰카와 다쓰미와 샤센도 유키는 각각 94년생, 93년생으로 현재 일본에서 각광받는 신인작가라고 합니다. 아직 작품을 읽은 적이 없어서 두 사람의 장점이나 매력을 잘 알지 못하지만 경작(출판사의 표현인데 아마 겨루기혹은 경쟁의 의미를 담은 競作이 아닐까 싶습니다)이라 부를 만한 독특한 기획에 초대받은 걸 보면 주목받는 신예임엔 분명한 것 같습니다.

두 작가가 쓴 두 편의 중편이 실려 있는데 동일한 주제로 이야기를 자아내는 앤솔로지와 달리 두 중편은 제목 그대로 서로에게 보낸 도전장에 답한 소설입니다. 즉 미스터리의 일부만 담긴 도전장을 받은 작가는 그 일부를 모티브 삼아 온전한 한 편의 소설을 완성해야 되는 것입니다. 언뜻 재미있어 보이는 기획이지만 비슷한 경력의 동 시대 작가 두 사람이 도전장에 걸맞은 완성도 높은 작품을 집필한다는 건 실은 무척 부담스러운 미션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선지 독자 입장에서도 일반적인 책읽기와 달리 꽤나 긴장된 상태로 페이지를 넘길 수밖에 없습니다.

 

수조성의 살인은 샤센도 유키가 보낸 도전장에 아쓰카와 다쓰미가 답한 본격 미스터리입니다. 특이하게 생긴 게스트하우스 수조성에서 벌어진 불가해한 밀실살인을 다룹니다. 이웃에 사는 두 부부는 여름휴가를 보내기 위해 수조성을 찾았지만 원인 모를 화재 이후 칼에 찔린 시신이 발견된 사건 때문에 충격에 빠집니다. 시신이 발견된 곳은 방화셔터와 초대형 수조 사이의 밀실로 어떻게 해도 피해자를 죽인 범인이 빠져나올 수 없는 상황입니다. 만담 커플을 떠올리게 하는 두 명의 형사가 추리에 추리를 거듭한 끝에 누구도 예상하기 힘든 진실을 찾아냅니다.

 

흔한 잠은 아쓰카와 다쓰미가 보낸 도전장에 샤센도 유키가 답한 작품입니다. 뛰어난 미술 재능과 외모는 물론 모두에게 사랑받는 존재인 여동생 지유리로 인해 가즈히사의 학창시절은 꽤나 고통스러웠습니다. 성인이 되어 독립한 가즈히사는 의식적으로 지유리를 멀리 해왔는데, 어느 날 미대 입시를 치르기 위해 도쿄에 온 지유리가 며칠 묵겠다며 집으로 쳐들어오자 당황합니다. 그리고 하필 그날 밤 가즈히사가 근무하는 호텔에서 살인사건이 벌어집니다. 특이한 건 범인이 자신이 살해한 희생자 옆 침대에서 하룻밤을 자고 갔다는 사실입니다. 가즈히사는 살해된 자의 정체를 알고 큰 충격에 빠짐과 동시에 직접 미스터리를 풀기로 결심합니다.

 

수조성의 살인이 밀실 트릭에 충실한 본격 미스터리라면 흔한 잠은 애틋하고 안쓰러운 여운을 남기는 감성적인 미스터리입니다. 말하자면 상대가 보낸 도전장에 대해 자기만의 스타일로 요리한 미스터리로 답했다는 점에서 독자는 맛과 모양이 전혀 다른 두 가지 음식을 한 번에 맛보는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용만 놓고 보면 수조성의 살인의 경우 트릭이 다소 작위적으로 보인 점이 아쉬웠고, ‘흔한 잠은 미묘한 관계로 엮인 두 남매의 이야기가 눈길을 끈 반면 미스터리 자체는 단선적으로 설정된 게 아쉬웠습니다. 하지만 내용보다 더 아쉬웠던 건 두 작가의 장점과 매력을 미리 알고 있었더라면 이 작품의 진가를 좀더 진하게 음미할 수 있었을 텐데 전작들을 읽어보지 못해 좋은 기회를 놓친 점입니다.

 

아직 많은 편수는 아니지만 한국에 출간된 두 작가의 작품을 찾아 읽어보려고 합니다. 그런 뒤에 당신에게 보내는 도전장을 다시 읽으면 상대의 도전장에 부응하여 내놓은 두 작가의 작품의 미덕을 제대로 만끽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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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비 낭군가 - 제7, 8회 ZA 문학 공모전 수상 작품집 밀리언셀러 클럽 - 한국편 36
태재현 외 지음 / 황금가지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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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체를 불문하고 좀비물은 제 취향과는 거리가 좀 먼 장르지만 이상하게도 그동안 황금가지에서 출간된 한국 좀비소설은 무척 재미있게 읽어왔습니다. ‘광인들’(김중의), ‘난쟁이가 사는 저택’(황태환), 3~4ZA문학 공모전 수상작품집 크르르르등이 대표적인데, 그래선지 표제작의 제목이 단번에 눈길을 끈 제7~8ZA문학 공모전 수상작품집 좀비 낭군가도 남다른 기대를 갖고 읽게 됐습니다. 모두 일곱 편의 단편이 실렸는데, 수록작마다 소재도 다양하고 이야기의 개성도 강해서 역시 좀비물은 무한한 확장성을 갖고 있다는 걸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좀비 낭군가 (태재현)

과거 시험을 보러갔던 낭군이 좀비가 되어 돌아와선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듭니다.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활을 익혀온 한씨는 목숨을 걸고 괴물들과 맞서기로 합니다.

 

침출수 (최영희)

작은 시골마을에 사는 16살 도아가 자신을 추행해온 남자를 살해한 날, 오염된 침출수가 일으킨 좀비 바이러스가 온 마을에 퍼집니다. 도아는 망치를 들고 좀비를 처리하러 나섭니다.

 

메탈의 시대 (서재이)

첫 공연을 1주일 앞둔 인디 메탈밴드의 베이시스트 밸지는 홍대 일대를 휩쓴 좀비의 공격에 망연자실해집니다. 동료를 모두 잃었지만 밸지는 사선을 뚫고 공연장으로 향합니다.

 

삼시세킬 (정예진)

감염병이 확산되고 감염자들의 공격이 난무하는 와중에도 남편의 삼시세끼를 챙기기 위해 분투하는 70대 할머니 보배의 괴물과의 전쟁’.

 

화촌(火村) (경민선)

업무 차 강원도로 가던 구대리는 화촌휴게소에 발이 묶입니다. 휴게소 앞뒤의 터널 두 개가 붕괴됐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갑자기 나타난 괴물들의 공격에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집니다.

 

제발 조금만 천천히 (전효원)

숙취에 시달리며 잠을 깬 채하는 갑자기 변해버린 세상에 놀랍니다. 빠른 사람(속인)과 느린 사람(완인)으로 갈라진 세상은 이내 피와 살이 난무하는 살육장으로 변해버립니다.

 

각시들의 밤 (장아미)

섬의 생활에 환멸을 느낀 진홍은 매년 봄마다 치러지는 혼례의식을 이용하여 섬을 빠져나가기로 결심합니다. 하지만 진홍은 은밀하게 감춰져온 섬의 비밀을 알곤 큰 충격에 빠집니다.

 

표제작인 좀비 낭군가는 스토리와 구성 모두 정직하고 예측 가능한 방향으로 흘러가지만 감칠맛 나는 문장과 생생한 캐릭터가 돋보인 작품입니다. ‘침출수는 가장 인상적인 작품이었는데, 장편 사회파 호러물로의 확장성이 기대됐기 때문입니다. ‘삼시세킬은 영화 킬 빌의 우마 서먼을 연상시키는 70대 노파의 블랙코미디 풍 좀비물이라 흥미로웠고, ‘화촌제발 조금만 천천히는 좀비라는 소재가 얼마나 신선하고 새롭게 구사될 수 있는 지를 잘 보여준 작품들입니다.

가장 아쉬움이 많이 남은 건 마지막 수록작 각시들의 밤인데, 아이디어는 너무 좋았던 반면 독자를 끌어들이기 위한 전략, 특히 구성이 다소 허술해 보였기 때문입니다. 작가가 필요한 정보들을 제때 풀어놓지 않은 채 새로운 인물들을 계속 등장시키다 보니 이야기에 몰입하기가 쉽지 않았고, 막판에 한꺼번에 공개된 정보는 왠지 뒷북처럼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구성만 좀더 짜임새가 있었다면 정말 매력적인 작품이 됐을 거란 아쉬움이 진하게 남은 작품입니다.

 

그리 길지 않은 분량이지만 다양한 소재와 개성 강한 서사들로 채워진 덕분에 한국 좀비소설의 특별한 맛을 즐길 수 있었고, 이름을 기억해둬야 할 작가들과 처음 만난 것도 반가운 일이었습니다. 취향과 거리가 먼 장르라고 생각하면서도 매번 재미있게 읽는 걸 보면 어쩌면 저도 이미 좀비물의 팬이 된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시간이 되면 다른 독자들의 서평을 참고하면서 읽을 만한 한국 좀비소설을 찾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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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캡슐 - 15년 만에 도착한 편지
오리하라 이치 지음, 김윤수 옮김 / 문학수첩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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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개의 관’(2015) 이후 무려 8년 만에 한국에 출간된 오리하라 이치의 신간입니다.(일본에서는 2018년에 출간됐습니다.) ‘15년 만에 도착한 편지라는 부제처럼 15년 만에 배달된 편지 한 통이 몰고 온 일곱 개의 사건을 묶은 연작소설입니다. 오리하라 이치의 주 무기인 서술트릭의 진수를 맛볼 수도 있고, 뒤통수를 치는 반전의 향연과 절묘하게 회수되는 복선의 쾌감 등 그야말로 미스터리의 다채로운 맛을 한꺼번에 만끽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15년 전의 과거가 집 안에 흙발로 들이닥친다면 어떻게 될까. (...) 행복한 과거면 괜찮지만 (...) 불행한 과거가 쏟아져 들어오면 당연히 불행해진다. (...) 행복하게 생활하던 사람은 불행해지고, 불행하게 생활하던 사람은 한층 더 불행해진다.” (p353)

 

먼 훗날 열어보기로 작정하고 자발적으로 쓴 타임캡슐 속 편지와 달리 포스트 캡슐 속 편지들은 발신자의 의도와 무관하게 배송이 15년이나 지연된 것들입니다. 그 편지들은 하나같이 받은 사람이 황당해 할 수밖에 없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청혼을 담은 고백편지, 어머니에게 보낸 아들의 유서, 전 직장상사에게 보낸 감사편지, 돈을 요구하는 협박편지, 소설 신인상 수상을 알리는 통보, 가출한 손녀를 그리워하는 할머니의 편지 등이 그것입니다.

 

일부는 편지의 소인이 15년 전임을 알아보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불과 며칠 전에 발신된 편지로 오해합니다. 어느 쪽이 됐든 받은 사람들의 첫 반응은 당황 그 자체입니다. 그리고 점차 다양한 감정을 품게 됩니다. 그중 반가워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고, 대부분은 의문을 품거나 분노에 사로잡힙니다. 고백, 유서, 협박, 수상통보 등 받을 시기를 놓치면 곤란해질 수밖에 없는 편지를 받은 사람들은 진상을 알아보기 위해 혹은 자신의 감정을 전달하기 위해 답장을 쓰지만 그 답장으로 인해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을 자초하거나 평온하게 유지될 수 있었던 삶이 무너지는 상황에 놓이고 맙니다. 편지의 당사자들은 편지를 주고받는데서 그치지 않고 실제로 만나기까지 하는데, 바로 그 지점부터 예기치 못한 사고나 범죄가 일어난다는 뜻입니다.

 

사건 당사자 외에 편집자라는 미지의 인물이 등장하는데, 그는 15년 전 포스트 캡슐을 기획한 자로 보이기도 하지만 뭔가 의도를 갖고 사건 당사자들을 지켜보는 듯한 묘한 태도를 보이기도 합니다. 그는 당사자들을 미행하거나 지켜보며 기록을 남기는 것은 물론 사건이 종료되면 후기라는 것을 남기기도 하는데, 그 모든 기록들의 집합체가 바로 이 포스트 캡슐이라는 소설입니다. 독자는 미스터리뿐 아니라 이 편집자의 정체와 의도가 무엇인지 궁금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후반부에 이르러 전혀 연관 없어 보이던 일곱 개의 사건들이 하나의 줄기로 묶이는 순간 편집자의 정체와 의도가 드러나는데, 바로 이 대목에서 오리하라 이치 특유의 서술트릭의 진가를 맛볼 수 있습니다. 눈앞에 빤히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도무지 종잡을 수 없던 단서들이 자동으로 맞춰지는 퍼즐처럼 순식간에 제자리를 찾아들어가는 쾌감도 짜릿하기 그지없습니다. 아주 가끔 애매모호거나 찜찜함이 남는 순간들이 있는 게 사실인데, 대부분은 찬찬히 복기해보면 정교한 설계의 일부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독자에 따라 막판 총정리가 다소 억지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개인적으론 별 4.5개는 충분하고도 남는다는 생각입니다.

 

평범한 한 통의 편지가 15년의 배송 지연으로 인해 위험천만한 흉기로 혹은 인간의 악의를 부추기는 불온한 촉매로 둔갑할 수도 있다는 기발한 발상에서 시작된 이 작품은 지금까지 읽은 오리하라 이치의 작품 가운데 손에 꼽을 만하다는 게 저의 지극히 주관적인 평가입니다. 물론 도착 시리즈시리즈를 모두 읽은 것도 아니고 한국에 출간된 그의 작품 중 절반 가까이밖에 못 읽어서 함부로 단정할 수는 없지만 아직 오리하라 이치를 만나본 적 없는 독자라면 이 작품으로 그에게 입문하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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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끝의 살인 첩혈쌍녀
아라키 아카네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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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행성 테로스와의 충돌로 지구가 멸망하기까지 두 달여밖에 남지 않은 20341231일의 후쿠오카현 다자이후. 멸망 예고 후 아버지는 자살했고 어머니는 집을 나갔으며 남동생 세이고는 히키코모리가 된 탓에 23살의 고하루는 거의 혼자가 되고 말았지만 오늘도 운전면허를 따기 위해 교습소를 방문합니다. 멸망이 코앞이지만 그녀에겐 꼭 이뤄야 할 꿈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차에 올라타기도 전에 고하루와 운전강사 이사가와는 차량 트렁크에서 참혹하게 살해된 여성의 시신을 발견합니다. 사방에 자살한 시신이 널린 지경이지만 범인은 무슨 이유에선지 여성의 시신을 감추려 한 것으로 보입니다. 고하루를 더 놀라게 한 건 반드시 범인을 잡겠다며 이미 무용지물이 된 경찰서로 향하는 운전강사 이사가와의 태도였습니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과 그녀의 신참 보조비서 로지가 윈저성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을 조사하는 미스터리(‘윈저 노트, 여왕의 비밀 수사 일지’), ‘각성하는 시스터 후드라는 부제가 붙은 바바야가의 밤에 이은 북스피어의 첩혈쌍녀 시리즈세 번째 작품입니다. 멸망을 앞둔 지구에서 살인사건 수사를 벌이는 두 여성의 활약을 그린 세상 끝의 살인은 제68회 에도가와 란포상 수상작이자 역대 최연소에 심사위원 만장일치라는 대기록을 달성한 작품이기도 합니다.

 

멸망을 앞둔 후쿠오카의 분위기와 사정은 비슷한 설정의 여타 장르물들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약탈과 방화, 강력범죄가 횡행하고 비관에 빠진 나머지 자살한 자들이 지천입니다. 소행성 충돌지점이 후쿠오카와 가까운 구마모토로 발표되자 일본에선 해외로의 탈출이 줄을 이었고 이제 도심에서도 인적이나 차량을 찾아보기 힘든 상태입니다.

하지만 독자의 궁금증을 불러일으킨 건 이 와중에 운전면허를 따겠다며 교습소를 다니는 고하루와 무슨 이유에선지 홀로 남아 고하루를 가르치는 운전강사 이사가와입니다. 그리고 어차피 다 죽을 텐데 왜 살인을 저질렀을까?”, “어차피 범인도 죽을 텐데 왜 위험을 무릅쓰고 수사에 나서는 걸까?”라는, 주인공들과 범인의 이해할 수 없는 행태 역시 호기심을 자극하는 요소입니다.

 

고하루와 이사가와를 긴장하게 만든 건 동일범의 소행으로 보이는 또 다른 시신들이 후쿠오카현 여기저기서 발견된 점입니다. 그리고 피해자들 사이에 모종의 연관성이 있음을 파악한 두 사람은 좀더 절실한 마음으로 진범 찾기에 나섭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예기치 못한 인물들이 두 사람과 합류하게 되고, 심지어 일본을 떠나지 못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잔류촌을 발견하기까지 합니다. 이들과의 만남을 통해 잠시 멸망에 대한 두려움을 잊기도 하지만 얼마 후 고하루는 이사가와의 입에서 튀어나온 진범의 이름에 큰 충격을 받습니다.

 

함께 살인사건 수사에 나서긴 하지만 고하루와 이사가와는 전혀 다른 캐릭터입니다. “광기에 가까운 정의감으로 폭주하는 강사와 모든 걸 체념하고 차가운 관점을 견지하는 주인공이라는 소설가 시바타 요시키의 평대로 오히려 극과 극의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사가와가 악은 무조건 응징해야 한다는 과도한 정의감에 사로잡힌 다혈질이라면 고하루는 일찌감치 운명을 받아들이곤 자신이 사랑하는 별을 바라보며 종말을 맞기 위해 구마모토 천문대로 갈 것을 꿈꾸는 여린 인물입니다. 일본에서 탈출하지 않은 이유도 제각각이고, 도덕이나 정의에 대한 관념도 지극히 다릅니다.

그런 두 사람이 희대의 살인마를 잡는 과정에서 서로 부딪히기도 하고 연대하기도 하는 모습은 임박한 지구 멸망이라는 배경 속에서 더 극적으로 읽힐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클라이맥스와 엔딩에서 거듭되는 반전을 통해 오해가 풀리고 진실이 밝혀지는 과정에서도 두 사람은 갈등과 화해와 협력을 나누며 그리 오래 나눌 인연은 못 되더라도 아주 특별한 관계를 맺습니다. 그런 점에서 종말 소설답지 않게 이토록 뒷맛이 산뜻한 소설이라는 편집자 삼송 김사장 님의 마지막 코멘트는 이 작품의 분위기를 잘 압축해놓은 한 줄 평이란 생각입니다.

 

개인적으로 지구 멸망을 배경으로 한 소설을 아주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세상 끝의 살인은 미스터리의 매력과 종말 서사의 미덕이 잘 배합된 작품이라 한 번에 마지막 장까지 달릴 수 있었습니다. 장르에 대한 편견이 끝내 해소되지 않아 만점을 주진 못했지만 23살에 대기록을 세우며 데뷔한 아라키 아카네에 대해서는 앞으로도 계속 관심을 가지려고 합니다. 20238월에 두 번째 작품 ちぎれた이 일본에서 출간됐다고 하는데 혹시 기회가 닿는다면 북스피어를 통해 다시 한 번 만나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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깜빡이는 소녀들
스테이시 윌링햄 지음, 허진 옮김 / 세계사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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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전 루이지애나 주의 작은 마을 브로브리지에서 여섯 명의 소녀를 납치 살해한 혐의로 딕 데이비스가 체포됐습니다. 당시 12살이던 딕의 딸 클로이는 끔찍한 시간들을 견뎌낸 뒤 지금은 심리상담사가 됐지만 여전히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입니다. 다시없을 인연이라고 확신한 대니얼과의 결혼을 앞두고 12살 이후 처음 맞이한 행복에 젖어있던 클로이에게 또 다시 악몽이 찾아옵니다. 아버지의 사건 20주년을 맞아 뉴욕타임즈의 기자 에런 잰슨이 취재를 요청해온데다 아버지의 범행과 판박이처럼 보이는 소녀 실종사건이 클로이 주변에서 연이어 벌어졌기 때문입니다. 희생자 중 한 명이 자신의 환자였기에 범인이 딕의 딸인 자신을 겨냥하고 있다고 여긴 클로이는 대니얼 모르게 홀로 진실 찾기에 나서지만, 사태는 점점 악화되고 그녀의 공포심은 극에 달하게 됩니다.

 

‘26년 전 아버지가 저지른 연쇄살인과 동일한 방식으로 희생자의 손목을 자르는 범인이 나타나자 외과의사인 노라가 주변 인물들을 의심하며 진실 찾기에 나서는 이야기를 다룬 프리다 맥파든의 핸디맨과 큰 얼개가 비슷한 작품입니다. 다만 핸디맨이 주인공 노라가 범인에게 여러 차례 공격을 당하며 겪는 공포를 강조했다면, ‘깜빡이는 소녀들은 자신 안의 불안감과 싸워가며 직접 범인을 잡으려는 클로이의 분투가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누구보다 다정하고 따뜻했던 아버지가 연쇄살인마로 밝혀진 충격이 가장 컸지만 아버지의 범죄를 입증할 증거를 직접 발견하고 제 손으로 경찰에 넘겼던 일은 클로이의 트라우마를 더욱 깊고 공고하게 만들었습니다. 세상의 비난과 호기심보다 클로이를 괴롭힌 건 죄책감이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살인마의 딸이라는 사실 때문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어쩌면 자신이 희생된 소녀들을 아버지에게 인도했을지도 모른다는 근거 없는 후회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은 어린 클로이에게 들러붙은 뒤 그녀로 하여금 세상을 경계하고 의심하게 만든 것은 물론 지금까지도 불법 처방한 약에 의존하지 않고는 불안감을 씻어내지 못하게 만들어버렸습니다. 자기 주위에서 일어나는 사고를 직접 조사해야만 안심할 수 있는 불행한 습관도 그 결과물 중 하나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등장한 아버지의 모방범은 클로이의 삶을 순식간에 패닉에 빠뜨렸고,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스스로 진실을 찾아내야만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히게 만듭니다. 그녀의 의심은 20년 전 과거 속 인물은 물론 현재 자기 주변의 인물들에게까지 미치는데, 어느 날 손에 넣게 된 결정적인 증거로 인해 클로이는 극도의 공포에 빠지고 맙니다.

 

연쇄살인마 아버지와 딸이라는 공식은 더는 신선한 소재는 아니지만 깜빡이는 소녀들은 과거와 현재를 자유롭게 오가는 흥미로운 구성, 과거와 현재의 클로이의 속내를 집요하고 디테일하게 그려낸 심리묘사, 여러 번 감탄을 자아내는 맛깔난 표현과 문장들, “이 지독하게 훌륭한 데뷔작에서는 누구도 믿지 마라는 피터 스완슨의 평가처럼 모두가 범인 같지만 누구도 범인 같지 않은 미스터리, 그리고 거의 마지막 장까지 거듭되는 반전 등 매력적인 요소가 다양해서 소재의 진부함을 충분히 상쇄하고도 남는 작품입니다.

0.5개를 뺀 유일한 이유는 중반부에 심리스릴러 서사가 전개되면서 약간 지루함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500페이지가 조금 넘는 분량 가운데 그 대목에서 딱 50페이지 정도만 슬림해졌더라면 더없이 좋았을 거란 생각입니다.

 

데뷔작이라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완성도 높은 스릴러를 선보인 스테이시 윌링햄은 이미 세 번째 작품의 출간을 앞두고 있다고 합니다. 후속작들이 한국에도 소개될지 알 수 없지만 깜빡이는 소녀들이 좋은 평가와 성과를 얻는다면 충분히 기대해도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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