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마물의 탑 모토로이 하야타 시리즈
미쓰다 신조 지음, 민경욱 옮김 / 비채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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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침략전쟁에 대해 참회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던 모토로이 하야타는 1945년 패전 후 국가 재건을 위한 노동의 최전선에 몸담기로 결심합니다. 처음 향했던 곳은 탄광이었지만 노동의 보람을 느끼기도 전에 끔찍하고 기괴한 연쇄살인사건을 겪은 탓에 이내 행로를 바꿉니다. 그의 선택은 항로표식 직원, 즉 등대지기입니다. 나름의 사명감을 갖고 등대정신을 실천하던 하야타의 두 번째 부임지는 험준하기로 소문난 고가사키 등대. 그런데 도착과 동시에 하야타는 마음속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불길함을 감지합니다. 등대 앞의 바다에 솟아오른 거대하고 날카로운 바위, 하얀 마물을 닮은 듯한 등대, 그 등대 앞에 배를 대기 두려워하는 어부, 그리고 등대 위에 서있던 사람을 닮은 기이한 존재 등 모든 것이 불온해보였기 때문입니다.

 

검은 얼굴의 여우이후 3년 반 만에 출간된 모토로이 하야타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입니다. 시리즈 첫 편이 탄광을 무대로 괴담이 가미된 미스터리를 다뤘다면 하얀 마물의 탑은 등대와 그 일대를 무대로 한 정통 호러물에 가까운 이야기입니다. 미쓰다 신조의 작품 중에서도 특히 호러와 미스터리가 적절히 조합된 경우를 좋아해서 도조 겐야 시리즈노조키메같은 작품을 손에 꼽는 편인데, 전작인 검은 얼굴의 여우가 다소 밋밋한 호러 설정 때문에 아쉬움을 남긴 반면 하얀 마물의 탑은 미쓰다 신조의 장기가 제대로 배어있어서 마지막 페이지까지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거친 파도와 짙은 안개와 험준한 지형 때문에 더 위압적으로 보이는 고가사키 등대가 주 무대지만, 초반 1/3은 그곳에 도착하기까지 하야타가 겪는 기이하고 믿을 수 없는 괴현상들을 그리고 있습니다. 무슨 이유에선지 등대 앞에 내려주기를 거부하는 어부, 등대까지의 길안내를 약속해놓고 사라져버린 마을사람, 밀림을 방불케 하는 숲을 지나는 동안 하야타의 뒤를 따라오는 듯한 하얀 마물, 그리고 인적 하나 없는 숲속에 자리한 기괴한 분위기의 오두막 등 하야타는 등대에 도착하기도 전에 숱한 괴현상들을 체험합니다. 가까스로 등대에 도착하지만 하야타는 숲에서 목격한 하얀 마물 때문에 마음을 놓지 못합니다. 하야타를 더욱 놀라게 한 건 고가사키 등대를 책임지고 있는 등대장 이사카 고조가 20년 전 자신과 똑같은 경험을 했다는 사실입니다.

 

굳이 비율로 따지자면 호러가 80%, 미스터리가 20% 정도로 배합돼있습니다. 20년의 시차를 두고 하야타와 이사카가 겪은, 우연으로만 치부할 수 없는 똑같은 경험들의 실체를 파악하는 미스터리가 깔려있긴 하지만, 서사의 중심은 제목 그대로 하얀 마물이며 마지막 반전에 이르기까지 호러의 미덕에 충실한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해운산업의 부흥을 위한 근대적 시설인 등대와 아직도 전근대적인 기운이 만연해있는 등대 주변 지역의 분위기가 충돌하면서 호러의 농도가 더욱 짙어지는데, 그런 면에서 1950년대 초반이라는 시대적 배경 자체가 이 작품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비슷한 시대적 배경에 아날로그 감성과 호러의 매력이 철철 넘쳤던 도조 겐야 시리즈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혹시 검은 얼굴의 여우에 아쉬워했더라도) 그 이상의 감흥을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일본에서는 2021년에 시리즈 세 번째 작품 赫衣’(붉은 옷의 어둠)까지 출간된 상태입니다. ‘미즈치처럼 가라앉는 것이후 10년째 소식이 없는 도조 겐야 시리즈에 대한 미련을 아직도 버리지 못하고 있지만, 모토로이 하야타의 새로운 이야기라면 그 미련을 조금은 접어둘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2024년에 도조 겐야와 모토로이 하야타를 모두 만날 수 있다면 그보다 좋은 일은 없겠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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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나는 알고 있다
클라우디아 피녜이로 지음, 엄지영 옮김 / 비채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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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둥 번개를 동반한 큰비가 쏟아진 어느 밤, 독실한 가톨릭 신자 리타가 성당 종탑에 목을 맨 채 발견된다. 사건은 자살로 종결되지만 리타의 어머니 엘레나는 딸이 살해당했음을 주장하며 재수사를 요구한다. 딸을 가장 잘 아는 것은 자신이라고, 사건의 진실은 따로 있다고 확신하는 엘레나. 그러나 누구도 그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고, 본인 또한 병을 앓고 있어 직접 수사에 나서기는커녕 제대로 걸을 수조차 없는 처지다. 상실감과 무력감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던 엘레나는 불현듯 이십 년 전 리타에게 큰 빚을 진 여자 이사벨을 떠올린다. 리타의 도움으로 무사히 아이를 낳아 가족을 이룬 이사벨. 엘레나는 이사벨이라면 진실을 대신 파헤쳐주리라 기대를 안고 기차에 오른다. (출판사 소개글을 인용했습니다.)

 

엘레나는 딸의 죽음이 자살이 아니라 타살임을 입증하려는 간절함 가득한 어머니지만 동시에 파킨슨병으로 인해 자신의 몸을 뜻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중증 환자이기도 합니다. 작가나 작품에 대한 정보를 모르는 상태에서 읽기 전만 해도 같은 병을 앓고 있는 심리학자 조 올로클린(마이클 로보텀이 창조한 스릴러 시리즈 주인공)을 떠올렸던 게 사실인데, 실은 이 작품은 영어판 번역자의 말대로 범죄소설처럼 시작해서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는 줄거리를 품고 있습니다. 시작은 딸의 죽음의 미스터리를 파헤치려는 파킨슨병에 걸린 엄마의 분투지만 몸통은 여성, 성역할, 종교사회의 억압, 가부장적 문화, 자기결정권 등 묵직하면서도 행간에 숨은 의미가 무척 깊은 주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야기는 엘레나가 딸의 죽음에 관해 대신 조사해줄 이사벨을 찾아가는 하루 동안의 여정을 그립니다. 중증 파킨슨병을 앓고 있는 엘레나에게는 발걸음 하나 움직이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더구나 목 근육까지 손상돼서 그녀의 시선은 늘 바닥에 고정돼있고 그런 탓에 수시로 침이 흘러내리는 수치스러운 상황까지 감내해야만 합니다. 작가는 엘레나의 이런 일거수일투족을 지독하리만치 디테일하게 묘사합니다. “독자는 엘레나의 움직임에 집중하고, 엘레나의 생각에 집중한다. 독자는 엘레나라는 인물에 파묻혀버린다.”라는 추천의 말을 쓴 정보라의 표현대로 독자는 어느새 추리소설과는 전혀 다른 영역으로 휩쓸려 들어가게 됩니다.

 

기차와 택시를 번갈아 타며 지난한 여정을 거치는 동안 엘레나는 딸 리타와의 과거와 현재를 끊임없이 돌아봅니다. ‘여성으로서 당연한 삶을 살아온 자신과는 다르게 결혼도 출산도 거부했던 리타. 짝수년마다 떠난 모녀의 여행에서 채찍질을 하듯 모진 소리를 퍼부으며 자신과 싸우곤 했던 리타. 어린 시절부터 가톨릭 교리에 대해 무심하거나 반발하는 태도를 보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가톨릭 학교에서 오랫동안 일하며 때론 타인에게 가톨릭 교리를 앞세우곤 했던 리타.

엘레나의 회상은 희로애락을 오가지만 대부분 딸을 사랑하는 어머니의 관점에서 서술됩니다. 하지만 이 모성애는 독자에게는 오히려 불안감을 고조시키는 시한폭탄으로 여겨질 뿐입니다. 리타도 과연 그러했을까, 라는 의문과 함께 말입니다.

 

엘레나가 도움을 받기 위해(엘레나의 관점에선 빚을 받기 위해’) 방문한 이사벨은 이 작품의 또 다른 주제 - 여성의 성역할, 육체의 존재의 의의, 자기결정권 등을 드러내는 인물입니다. 그리고 엘레나로 하여금 리타와의 관계를 다시금 돌아보게 만드는 역할도 맡고 있습니다. ‘엘레나의 도우미가 될 거라는 초반부의 나이브한 기대와는 달리 20년 전 엘레나 모녀와 맺은 인연이 그녀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를 보여주며 묵직한 여성 서사를 발산하는 인물입니다.

 

좀 심할 정도로 장르물에 편식하는 취향이라 다소 낯선 아르헨티나의 여성 미스터리라는 카피 한 줄만 보고 덥석 집어 들었던 작품인데, 고백하자면 그리 길지 않은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쉽지 않은 책읽기가 됐습니다. 무겁든 가볍든 선명하고 확실한 서사를 좋아하다 보니 이렇듯 단어 하나, 문장 하나는 말할 것도 없고 행간의 의미와 무게에까지 집중해야 하는 작품은 다소 낯설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옮긴이의 말추천의 말까지 다 읽고 나니 이 작품의 의미가 좀더 확연하게 다가온 건 사실입니다. 아마 한 번 더, 그리고 천천히 집중해서 읽는다면 이 작품의 진가를 제대로 맛볼 수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넷플릭스에서 이 작품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가 공개된 걸로 아는데, 기회가 되면 꼭 한 번 챙겨보려고 합니다.

 

엘레나는 알고 있다에 이어 대실 해밋 상을 수상한 신을 죽인 여자들이 최근 출간됐습니다. 소개글에 따르면 세 자매의 종교적 신념을 소재로 여성에게 가해지는 사회적 압제를 폭로한 뛰어난 범죄 소설이라고 하는데, 클라우디아 피녜이로의 범죄소설가로서의 명성을 맛볼 수 있는 작품이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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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자에게 잊혀진 시체 보관 기록 쿤룬 삼부곡 3
쿤룬 지음, 진실희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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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살인마에게 바치는 청소 지침서’, 2선생님이 알아서는 안 되는 학교 폭력 일기에 이은 쿤룬 3부곡의 마지막 작품입니다. 1편이 무차별 살인집단 잭(Jack)의 조직원들에게 피의 복수를 펼치는 미소년 스녠의 이야기였다면 2편은 학교 폭력에 시달리다가 살인괴물이 돼버린 장페이야의 이야기였는데, 3편은 이전까지 등장했던 모든 인물들이 총출연하여 대미를 장식하고 있습니다.

 

3편의 핵심 서사는 그동안 스녠에게 속수무책으로 사냥 당하던 살인집단 잭이 드디어 스녠의 정보를 입수하곤 반격에 나서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이 반격의 여파는 스녠뿐 아니라 이 시리즈의 주요 인물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쳐 말 그대로 피의 광풍을 일으킵니다. 앞선 1~2편보다 더 많은 시신들이 등장하고 더 잔혹한 장면들이 쉴 새 없이 이어집니다.

더불어 2편에서 살인괴물로 변신한 장페이야가 종적을 감춘 연인 촨한을 찾기 위해 분투하는 이야기, 기억을 잃은 채 신입 시체 수거업자가 된 한 남자가 자신의 과거와 정체성 때문에 혼란을 겪다가 끝내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히게 되는 이야기 등 시리즈 대미에 걸맞은 살인마 스릴러가 실려 있습니다.

 

쿤룬 3부곡의 살인마 서사 자체는 무척 비현실적입니다. 전설적인 살인마 잭 더 리퍼(Jack The Ripper)를 숭배하며 무차별 살인을 저지르는 잭이라는 조직도, 그들에게 복수하기 위해 밤낮없이 조직원을 색출해 살해하는 스녠도, 학교 폭력에 시달리다가 하루아침에 살인괴물로 진화하는 장페이야도, 또 순전히 재미와 쾌감을 위해 음모를 꾸미고 살인을 조장하는 주요 조연들도 판타지에 가까운 인물들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책을 읽는 동안에는 그 비현실감을 거의 느끼기 어려운데, 그것은 아마도 각 인물들을 움직이게 만드는 동기가 묘하게도 공감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중에서도 주인공들에게 부여된 결코 충족되지 않는 복수심은 그들을 응원하고 지지하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잭의 조직원에게 누나를 잃은 스녠과 살인마에게 아버지를 잃은 뒤 학교폭력의 희생자가 됐던 장페이야는 이미 이야기가 시작되는 순간 독자를 응원군으로 얻게 되는 것입니다. 현실감도 없고, 잔인한 장면들이 거듭되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게 어디 있어?”라는 자문 없이 마지막 장까지 단번에 달릴 수 있는 건 바로 이런 설정 덕분이란 생각입니다.

 

거의 순도 100%의 오락성 스릴러라고 할 수 있지만, ‘충족되지 않는 복수심이 주요 코드라서 그런지 결코 사이다처럼 읽히는 작품은 아닙니다. 오히려 무겁고 어두운 여운을 남긴다고 할 수 있는데, 시리즈는 마무리됐지만 살아남은 인물들이 앞으로 마주해야 할 날들이 지금보다 괜찮을 거라고 확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손에 묻은 피는 지울 수 있겠지만, 마음속의 지옥은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고 할까요? 다만 피의 복수를 거듭하면서도 종종 소박하고 따뜻한 행복을 그리워하던 스녠의 소망만큼은 조금이라도 이뤄지기를 간절히 바라기도 했습니다.

 

1~2편의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서 자세한 줄거리를 언급할 수 없다 보니 시리즈 전체에 대한 인상 비평이 되고 말았습니다. ‘잔혹한 살인마 스릴러를 좋아하는 독자에게는 더없이 흥미로운 작품이 되겠지만, 그 수위가 좀 높은 편이라 이야기와 관계없이 거부감을 갖는 독자도 적지 않을 거란 생각입니다. 개인적으론 시리즈가 종료된 게 좀 아쉽긴 하지만, 동시에 쿤룬이 어떤 이야기를 들고 다시 독자를 찾을지 사뭇 궁금해지기도 합니다. ‘3부곡이 완결된 게 2018년이니 꽤 많은 시간이 흐른 셈인데, 조만간 그의 신작 소식이 들려오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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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널목의 유령
다카노 가즈아키 지음, 박춘상 옮김 / 황금가지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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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도쿄. 2년 전 아내와 사별한 뒤 신문사를 그만뒀던 54세의 마쓰다 노리오는 현재 여성잡지 계약직 기자로 일하는 중입니다. 계약 만료 두 달을 앞둔 어느 날, 편집장의 지시로 심령 소재 취재를 시작한 마쓰다는 한 건널목에서 찍힌 긴 머리 여자의 사진과 영상을 보고 크게 놀랍니다. 조작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데다 여자의 모습은 분명 유령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그 여자가 1년 전 그 건널목에서 피살됐음을 알아낸 마쓰다는 큰 충격과 함께 그녀의 정체를 파악하기로 결심합니다. 사건 당시 그녀의 본명이나 주소는 물론 가족조차 경찰이 전혀 알아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얼마 안 가 마쓰다는 그녀에 관한 놀라운 정보를 하나둘씩 알게 되면서 특종 이상의 흥분과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제목도 그렇고 출판사의 소개글도 그렇고, 아마도 작가가 다카노 가즈아키가 아니었다면 읽을까 말까 한참을 주저했을 게 분명한 작품입니다. 물론 미쓰다 신조의 도조겐야 시리즈작가 시리즈였다면 체할 정도로 급하게 찾아 읽었겠지만, 기본적으론 현대를 배경으로 한 유령 호러물은 제 취향 중 좀 아래쪽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처음엔 다카노 가즈아키의 작품 중 한국에 처음 소개된 유령인명구조대의 개정판인 줄 알았는데, 검색해보니 제노사이드이후 11년 만에 내놓은 신작이었고, 그래서 너무나 반가운 마음에 당장 읽지 못하는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곧바로 구매신청을 해버렸습니다.

 

주인공인 마쓰다 노리오는 54세의 월간지 계약직 기자입니다. 가정을 내팽개칠 정도로 사회부 기자로 평생을 일해 온 마쓰다는 2년 전 아내와 사별한 뒤 절망감에 사로잡혀 신문사까지 그만둔 바 있습니다. 먹고 살기 위해 계약직 기자가 된 그가 계약 만료를 앞두고 취재하게 된 건 심령 소재입니다. 먼저 간 아내를 유령 형태로라도 다시 한 번 보고 싶어 하루에도 몇 번씩 눈물을 흘리곤 했던 마쓰다지만 정작 심령 소재 취재를 맡게 되자 심한 거부감과 함께 기자로서 막장에 이르고 말았다는 자조적인 태도까지 숨기지 않습니다.

 

그런 마쓰다가 취재를 시작한 이후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직접 겪으며 혼란에 빠집니다. 심령사진 속의 여자가 1년 전 끔찍하게 살해된 장본인이라는 걸 안 뒤로 마쓰다는 여자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과거 사회부 기자처럼 열정적으로 취재에 나섭니다. 그런데 동시에 현실에선 절대 일어날 리 없는 기이한 현상들도 경험하게 됩니다. 심령현상이 일어나기 직전의 전조라는 나무줄기 쪼개지는 소리를 자주 듣기도 하고, 여자가 살해된 새벽 13분만 되면 울리는 전화기 속에서 희미한 비명 소릴 듣기도 하고, 심지어 사건현장인 건널목에서 유령임에 분명한 존재를 발견하곤 기차가 달려오는 줄도 모른 채 건널목 안으로 달려들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한편에선 살해된 여자의 정체와 사건 이면의 진상을 알아내려는 열정적인 기자 마쓰다의 취재 미스터리가 전개되고, 다른 한편에선 명백히 비현실적인 유령의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하지만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 단 한 번도 말도 안 돼.”라는 생각이 든 적은 없습니다. 오히려 너무나도 사실적인 나머지 (마치 영화 사랑과 영혼처럼) 마쓰다가 유령과 소통할 수 있기를 바라기도 했고, 막판에는 마쓰다가 유령의 원통함을 통쾌하게 풀어주기를 바라기도 했습니다. 물론 다카노 가즈아키가 절대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끌고 갈 작가는 아니기에 헛된 바람이란 건 너무나도 잘 알았지만 말입니다.

 

취재를 거듭할수록 마쓰다의 마음은 점점 어둡게 물듭니다. 그녀의 정체는 여전히 요원했지만 적어도 사람들이 그녀에 대해 해준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인연을 맺었던 모든 사람으로부터 소외당한 여자.”, “늘 음울하게 웃으며 돈을 위해 몸을 파는 성격 나쁜 여자.”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녀가 그런 평판을 얻기까지의 사연을 하나둘씩 알게 되면서, 그리고 그녀의 죽음이 얼마나 억울하고 원통한지를 알게 되면서 마쓰다는 특종을 노리는 기자의 마음가짐 대신 쉽게 꺼지지 않을 분노에 사로잡힙니다. 마쓰다가 바라는 건 그녀의 유령을 안식에 들게 하는 것뿐이고, 실제로 마쓰다는 그렇게 되게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합니다.

 

정서는 전혀 다르지만 영화 사랑과 영혼에 등장한 유령 샘도 생각이 많이 났고, 비참함으로 점철된 한 여자의 삶이란 점에서 일본 드라마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도 많이 생각났습니다. 다카노 가즈아키 특유의 정통 사회파 미스터리는 아니지만 성실하고 열정적인 기자 마쓰다를 통해 저널리즘 미스터리의 진한 맛을 만끽할 수도 있었습니다. 무겁고 어둡지만 길고 오래 갈 여운도 함께 말입니다.

 

무슨 이유에서 11년 동안 신작을 내지 않은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이 작품을 계기로 해서 다카노 가즈아키의 작품들을 자주 만나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일본 위키피디아를 검색해 봐도 이후 신작 소식은 나오지 않는데, 머잖아 그가 새로운 작품을 냈다는 소식이 들려오길 간절히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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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 프럼 더 우즈 보이 프럼 더 우즈
할런 코벤 지음, 노진선 옮김 / 문학수첩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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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롭힘을 당하던 여학생 나오미가 사라지자 같은 반의 매슈는 형사사건 전문변호사인 할머니 헤스터에게 도움을 청합니다. 헤스터는 매슈의 대부인 와일드에게 나오미를 찾아줄 것을 부탁합니다. 의외의 장소에서 나오미를 찾아내긴 하지만 얼마 후 다시 사라진데다 이번에는 사건으로 비화할 조짐까지 보이자 와일드는 초조해집니다. 와일드는 나오미를 괴롭히던 일당의 우두머리 크래시에게 나오미의 행방을 물으며 거칠게 몰아세우지만 그 직후 크래시마저 실종되자 당황합니다. 더구나 경호원까지 내세워 자신을 압박하던 크래시의 부모가 헤스터와 자신을 초대하자 크게 놀랍니다. 헤스터와 함께 크래시 부모의 저택을 찾은 와일드는 크래시의 목숨을 담보로 요구조건을 내건 범인들의 이메일을 보곤 더 이상 실종이나 가출이 아닌 납치사건임을 깨닫습니다.

 

보이 프럼 더 우즈는 할런 코벤의 와일드 시리즈의 첫 작품입니다. 주인공 와일드는 조금 특별한 이력을 가진 인물입니다. 30여 년 전 숲에서 야생 상태로 발견됐을 당시 6~8살로 추정됐던 와일드는 자신에 대한 기억 자체가 전혀 없었습니다. 숲에 살면서 유일하게 소통했던 인간은 형사사건 전문변호사 헤스터의 막내아들 데이비드뿐이었습니다. 그런 인연으로 와일드는 헤스터와 각별한 인연을 맺게 됐고, 이후 위탁가정에서 제대로 성장하여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유일한 친구였던 데이비드가 사고로 세상을 떠난 뒤에는 그의 아들이자 자신의 대자(代子)인 매슈, 그리고 데이비드의 아내 라일라를 각별히 살피기도 합니다. 학업과 운동 등 여러 방면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였고 특수부대원으로 파병된 경험까지 있지만 와일드는 여전히 사람들과 섞여 사는 것에 익숙하지 않습니다. 그는 숲 이곳저곳을 전전하며 에코캡슐이라는 일종의 캠핑카에서 홀로 살아갈 뿐입니다.

 

와일드에게 주어진 미션은 실종된 여학생 나오미 찾기로 시작되지만, 얼마 후 나오미를 괴롭히던 부잣집 아들 크래시까지 실종되면서 예상치 못한 형태로 확대됩니다. 몇몇 정황 상 나오미와 크래시가 동반가출한 것으로 보이기도 했지만, 그들이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였던 점을 감안하면 쉽게 납득하기 어려웠고, 이내 크래시를 인질로 삼은 범인들의 협박 이메일이 도착하면서 와일드는 이제 납치범들과의 전쟁에 나서게 된 것입니다.

 

할런 코벤이 즐겨 사용하는 실종으로 시작됐다가 납치극으로 이어지긴 해도 이 내용이 작품의 중심을 차지하는 것은 아닙니다. 출판사 소개글대로 음모와 비밀을 넘어 학원폭력, SNS 등 인터넷 문화의 어두운 뒷면, 인종차별, 미디어와 정치의 부패로까지 이야기가 확장되면서 꽤 다양한 이야기가 펼쳐지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다 가정폭력과 오래 전 살인사건의 진실 등 여러 가지 소재가 가미되기도 했고 그만큼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기도 해서 단 몇 줄로 줄거리를 요약하는 게 어려울 정도입니다.

 

하지만 이런 다채로움이 개인적으론 이 작품의 가장 아쉬운 부분으로 느껴졌습니다. 시리즈 첫 편이라 이것저것 설명할 정보가 많아서 산만하기도 했고, 서로 다른 이야기들이 제각각 흘러가다가 하나의 줄기로 합쳐지곤 하는 코벤 특유의 서사와 달리 여러 이야기가 (독립적으로 보일 정도로) 각자의 흐름을 갖고 있는 탓에 전체적으로 머릿속에 깔끔하게 정리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독자에 따라 이런 전개와 구성을 반길 수도 있으니 아직 이 작품을 읽지 않은 독자라면 다른 서평들도 꼭 참고했으면 좋겠습니다.

 

와일드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은 보이 인 더 하우스로 이미 한국에 출간돼있습니다. 당장 찾아 읽을 것 같지는 않지만 마지막 페이지에 실린 떡밥 때문에 와일드의 이후 행보가 궁금해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또 할런 코벤의 몇몇 작품에서 감초 같은 조연으로 활약하다가 이 시리즈에서 중심인물로 등장한 헤스터 역시 호기심을 자극하는 인물입니다. 이야기는 다소 아쉬웠지만 두 주인공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재미있는 책읽기였습니다. 후속작에서도 매력적인 두 주인공의 활약을 지켜볼 수 있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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