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의자 X의 헌신 - 제134회 나오키상 수상작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 3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억관 옮김 / 재인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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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현대문학에서 나온 구판을 읽고 쓴 서평입니다)

 

호스티스 생활을 접고 도시락 가게에서 일하며 중학생 딸 미사토와 살아가던 야스코는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을 찾아온 전 남편 도미가시 때문에 공포에 사로잡힙니다. 돈을 갈취하고 폭력을 휘두르던 그에게서 도망쳤지만 끝내 뒤를 밟히고 만 것입니다. 문제는 그가 집까지 찾아와 의붓딸인 미사토에게까지 음흉한 시선을 보낸 점. 그런데 우발적인 사태가 벌어지고 모녀는 도미가시를 살해하고 맙니다. 그때 모녀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민 건 이웃집의 고교 수학교사 이시가미. 그는 시신 처리를 떠맡으며 모녀에게 완벽한 알리바이 전략을 알려줍니다. 다음날 도미가시의 시신이 발견되고 사건을 맡은 경시청의 구사나기는 전처인 야스코를 용의선상에 올립니다. 이어 어딘가 수상한 이웃집 남자 이시가미에게서도 미묘한 위화감을 느낍니다.

 


용의자 X의 헌신갈릴레오 시리즈최고의 작품이자 일본 미스터리를 통틀어 명품으로 꼽히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대표작입니다. 일본 미스터리 입문기인 17~18년 전에 처음 읽었을 때 막판 반전에 깜짝 놀란 것은 물론 마지막 장을 덮으며 강렬하고 깊은 여운에 사로잡혔던 기억이 생생한데, 서평을 쓰지 않던 시절에 읽은 탓에 대략의 줄거리만 생각날 뿐 구체적인 내용은 가물가물해서 거의 새로 읽는 기분으로 첫 페이지를 펼쳤습니다.

 

이야기의 구도는 심플합니다. 과거 천재 수학자로 불렸던 이시가미가 야스코 모녀의 살인을 덮기 위해 완벽한 알리바이 전략을 구사하고, 경시청의 구사나기가 모녀의 알리바이를 의심하며 이웃집 남자 이시가미의 공범 가능성을 떠올리는 가운데, 이시가미의 데이도 대학 동창이자 천재 물리학자인 유가와가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로 형사 구사나기를 따돌리면서까지 살인사건의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 분투합니다.

 

심플한 구도에 비해 독자는 복잡하고도 미묘한 심정으로 페이지를 넘기게 됩니다. 범인과 공범이 일찌감치 공개된 가운데 이시가미-야스코-구사나기-유가와가 벌이는 치열한 두뇌싸움과 미스터리가 가장 먼저 독자의 눈길을 끌지만, 그에 못잖게 이들 사이에 흐르는 갖가지 감정들 때문에 마음이 산란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학창 시절 백 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 한 천재라는 소리를 들었지만 지금은 수학교사로 초라한 삶을 살고 있는 이시가미가 자신의 인생까지 걸고 옆집 모녀에게 헌신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유도 모른 채 이시가미의 도움을 받는 야스코 모녀는 어떤 엔딩을 맞이하게 될까? 그녀들은 단죄돼야 할까? 아니면 이시가미의 의도대로 완전범죄를 이뤄내야 할까? 구사나기를 통해 거의 20년 만에 이시가미의 근황을 알게 된 유가와는 어떻게 단 한 번 그와의 만남을 통해 살인사건의 진상을 절반쯤 파악할 수 있었을까? 또 구사나기를 따돌리면서까지 사건의 진상을 알아낸 유가와는 마지막에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야스코 모녀를 향한 이시가미의 헌신과 진실을 알게 된 유가와의 고뇌가 끝까지 독자의 마음을 흔드는 가운데 아무도 예상 못한 트릭의 진상이 반전과 함께 밝혀지면서 네 인물은 혼란과 충격에 빠집니다. 또한 네 명 모두 자신이 알게 된 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할지 거부해야 할지 판단조차 할 수 없는 기로에 내몰립니다. 독자 역시 왜 이들에게 이렇듯 가혹한 운명이 부여된 건지 안타까워하면서도 어떻게 이야기가 마무리될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마지막 남은 한 장을 넘기게 됩니다.

 

미스터리로서의 완성도는 말할 것도 없고 사랑과 헌신을 모티브로 한 애틋하면서도 잔인한 비극이 절절하게 그려져서 장르물 독자가 아니더라도 감동과 여운을 만끽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다만 너무 오랜만에, 그것도 너무 큰 기대를 갖고 읽어서 그런지 처음 읽었을 때만큼의 감흥에는 이르지 못했습니다. 그동안 그 감흥을 간직하고 싶어서 한국과 일본에서 만들어진 영화를 일부러 보지 않았는데, 다시 읽고 보니 이제는 한번쯤 찾아봐도 괜찮겠다는 생각입니다.

 

-사족 하나. ‘다시 읽기중에 갈릴레오 시리즈의 신작(‘침묵의 퍼레이드’)이 출간됐다는 소식이 들려서 무척 반가웠습니다.

 

-사족 둘. 제가 소장한 구판에는 오타가 상당히 많아서 책읽기에 방해가 될 정도였는데, 출판사가 바뀐 개정판에선 모두 수정됐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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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좀 드리겠습니다
리베카 머카이 지음, 조은아 옮김 / 황금가지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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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입니다.

 

영화학 교수이자 유명 팟캐스터인 보디 케인은 무려 23년 만에 모교인 명문 기숙학교 그랜비를 방문합니다. 2주에 걸쳐 영화학과 팟캐스트에 관한 강의를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모교로 향하는 보디의 머릿속엔 23년 전인 1995, 학교 수영장에서 피살체로 발견된 룸메이트 탈리아 생각으로 가득합니다. 당시 흑인 트레이너 오마르가 범인으로 체포됐지만 아직도 범인은 따로 있다!”라는 주장들이 인터넷에서 심심찮게 제기되기 때문입니다. 보디 역시 다른 사람을 의심해왔지만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팟캐스트 강의 수강생 중 한 명이 탈리아 사건을 다루고 싶다고 밝히면서, 그랜비에서의 보디의 2주는 진범을 찾고 오마르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한 험난한 여정으로 돌변합니다.

 


질문 좀 드리겠습니다에 관한 해외 언론의 추천사와 출판사 소개글을 간략하게 편집하면 페미니즘적인 분노를 동력 삼아 그루밍 성범죄, 미투 운동, 교내 성폭력의 본질을 다룬 여성혐오 범죄미스터리입니다. 실제로 주인공 보디가 진실을 추적하는 사건은 젊고 부유하고 어여쁜 소녀의 죽음이며, 메인 사건 외에도 갖가지 여성혐오 범죄가 등장하는가 하면, 심지어 보디의 남편 제롬이 미투 가해자로 지목되는 에피소드가 전개되기도 합니다. 나이와 지위에 관계없이 여성을 혐오하고 성적으로 공격하는 남성이 수두룩하게 등장하고, 그 수법 역시 비열하고 음험해서 읽는 내내 공분을 자아내곤 합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노골적이고 직설적인 방식으로 여성혐오라는 주제를 드러내진 않습니다. 오히려 미스터리, 인종갈등, 계급의 문제 등 다양한 서사들을 적절히 버무림으로써 강조하지 않고도 더 강렬한 방식으로 작가의 의도를 독자에게 전달합니다.

 

초반부터 보디는 당신이라는 자를 탈리아 살해범으로 지목하며 조사에 나섭니다. 그는 1995년 당시 오페라를 가르치던 30대 교사였고, 보디는 탈리아와 부적절한 관계였던 그가 어떤 이유로든 살인을 저질렀다고 믿어왔습니다. 탈리아의 연인이었던 학생을 의심하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30대 교사를 향한 보디의 의심은 거의 확신에 가까운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23년이란 시간이 흐른 터라 새로운 증거를 찾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제 40대에 접어든 동급생들의 기억을 소환하는 것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당시 경찰의 수사가 터무니없이 허술했고, 학교는 사건을 은폐하기에 급급했으며, 트레이너가 범인으로 몰린 건 단지 흑인이란 이유 때문이란 걸 잘 알지만, 그 모든 걸 입증하기엔 보디는 너무나도 무력합니다.

 

탈리아를 살해한 진범을 찾는 미스터리와 노골적으로 자행되는 여성혐오에 대한 비판이 이야기의 주축이긴 하지만, ‘질문 좀 드리겠습니다는 그랜비에서 질풍노도와도 같은 시기를 거쳤던 23년 전 10대들의 이야기에도 적잖은 분량을 할애합니다. 우정, 애증, 시기, 혐오, 비밀과 거짓말로 뒤섞인 그들의 관계는 지금의 눈으로 보면 야만의 시대라고 불러도 무방한 1995년이라는 배경 때문에 더욱 날것 같은 불안함과 위태로움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탈리아의 죽음은 끔찍한 비극이긴 해도 소녀 살인사건치곤 그 수법이 잔인하지도, 선정적이지도 않았지만, 그녀와 또래들 사이에 흐르던 시한폭탄 같은 분위기 때문에 그 어떤 살인사건보다 더욱 참혹하고 서늘하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정통 미스터리와 범죄스릴러를 기대했거나 돌직구 같은 젠더 크라임 스토리를 기대한 독자라면 23년 전 진실을 찾아가는 보디의 여정이 다소 느리고 답답하게 읽힐 수도 있습니다. 사건 외적인 이야기도 많고, 보디의 내적 갈등이나 심리묘사도 적지 않은데다 그것들을 표현한 문장은 꼭꼭 씹어 읽어야 그 맛을 음미할 수 있을 만큼 은유적 혹은 상징적이기 때문입니다. (번역의 문제인지는 몰라도) 두세 번 되읽어야 할 문장도 제법 됐고, 과거와 현재가 혼재된 구성이라든지 헷갈릴 정도로 많은 등장인물 수도 한몫 거든 게 사실입니다. 재미있게 읽었지만 별 1개를 뺀 건 이런 이유들 때문입니다.

 

이 작품 전에 출간된 ‘The Great Believers’(2018)가 뉴욕 타임스가 선정한 ‘21세기 100대 도서에 선정된 걸 보면 리베카 머카이라는 이름을 꼭 기억해놓아야 할 것 같습니다. ‘질문 좀 드리겠습니다가 좋은 성과를 내서 조만간 ‘The Great Believers’의 한국 출간 소식이 들려오기를 기대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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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교전 1
기시 유스케 지음, 한성례 옮김 / 현대문학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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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입니다.

 

검은 집과 함께 기시 유스케의 대표작으로 알려진 악의 교전14년 만에 개정판으로 다시 출간됐습니다. 서평을 쓰지 않던 시절에 읽어서 자세한 줄거리는 생각나지 않았지만, 기시 유스케 특유의 공포 코드가 학교라는 무대에서 제대로 폭발했다는 인상만큼은 확실히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 제목 속 교전이 전쟁을 뜻하는 交戰이라고 여겼다가 다 읽은 뒤에야 법칙, 경전, 규범을 뜻하는 敎典이란 걸 알곤 새삼 서늘함을 느꼈던 일도 생각납니다.

 

봉쇄된 학교 안에서 한 사이코패스 교사에 의해 일어난 무차별 살인이란 카피처럼 악의 교전은 절대 악()이자 최악의 사이코패스인 영어교사 하스미 세이지가 어떻게 학교를 지배하고 조종하다가 대량 살인이라는 극단적인 사태를 벌이게 됐는지를 1,000페이지에 가까운 방대한 분량을 통해 그려낸 작품입니다. 외형상으론 대량 살인극을 그린 범죄 스릴러지만, ‘일본 모던 호러의 대표 작가로 불리는 기시 유스케만의 독특한 코드들이 작품 전반에 진하게 녹아있어서 호러물의 면모도 함께 지니고 있습니다.

 


선한 웃음, 재미있는 수업, 강한 책임감, 솔선수범하는 자세 등 하스미는 학교 운영진과 동료 교사는 물론 학생들에게도 인기 최고인 영어교사입니다. 하지만 그는 타고난 사이코패스로 인간적인 감정이 결여돼있으며 공감 능력이라곤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인물입니다. 어려서부터 태연히 살상을 저질러왔지만 그는 가짜 감정가짜 공감력을 무기삼아 모두에게 호감 받는 인물로 위장할 수 있었고, 누구에게도 의심받지 않고 현재에 이를 수 있었습니다. 방해가 되는 인물은 가차 없이 제거하고 탐이 나는 인물은 어떻게든 정복하고 소유하지만, 필요한 경우엔 하찮은 자에게라도 한없는 굴종과 양보를 드러내며 자신의 입지를 다집니다. 그리고 학교는 그런 하스미의 본색을 드러내기에 더없이 좋은 무대입니다.

 

어제보다 오늘, 오늘보다 내일, 이 아이는 조금씩 나의 창조물에 가까워진다. 어쩌면 이런 감각이야말로 교사의 보람일지도 모른다. 그래, 교육이란 결국 세뇌의 일종에 지나지 않는다.” (2, p24)

 

흔히 학교를 안전한 곳이라고 여기지만 실은 그 안에선 교사와 학생을 불문하고 집단 따돌림, 폭력, 절도, 성추행 등 갖가지 범죄가 만연하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그리고 지극히 폐쇄적인데다 교사와 학생이라는 두 계층만으로 이뤄진 권력 구도 역시 언제라도 폭발할 수 있는 시한폭탄 같은 위험요소이기도 합니다. 아이러니 한 일이지만, 이런 불안정함 때문에 학교라는 공간은 지배와 조종에서 쾌감을 느끼는 사이코패스에겐 최적의 무대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애초 교직과는 거리가 먼 금융 엘리트였던 하스미가 우연히 학교의 맛을 알고 그곳에 몸담게 된 건 그에게 희생당한 자들에게는 엄청난 불운이었던 것입니다. 책의 첫머리에 학교라는 고인 늪에 흘러든 상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라고 밝힌 기시 유스케의 소개글이 다 읽은 뒤에도 기억에 남은 건 사이코패스의 대량 살인극의 무대로서 학교 이상의 공간이 없겠다는, 씁쓸하면서도 현실적인 깨달음 때문이었습니다.

 

1권에선 학교를 지배하고 조종하는 하스미의 이중적인 모습과 무자비한 살인을 저질러온 그의 과거, 그리고 그를 의심하는 일부 학생들의 동요가 그려지고, 2권에선 위기를 감지한 하스미가 자신의 실체를 눈치 챈 일부 학생들을 제거하다가 결국 한밤중에 완벽하게 외부와 통제된 학교에서 대량 살인을 저지르는 참극을 그립니다. 영화 배틀 로열을 연상시키는 참혹한 살인 장면은 때론 거북함과 구토감을 유발하기도 하지만, 독자는 극도로 담담하고 차가운 문장들을 통해 악의 실체를 그려내려는 기시 유스케의 의도에 말려들어 그 장면들에 빠져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과연 이 참극이 어떻게 막을 내릴지, 살아남는 자가 있긴 있을지, 하스미는 제대로 단죄 받을지 궁금증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절대 악의 이야기를 읽는 건 무척 불편하면서도 호기심 혹은 관음증에 가까운 흥미로운 일이기도 합니다. 특히 제정신이 아닌 엉망진창 사이코패스가 아니라 정확히 자신의 목적을 향해 폭주하는 진정한 사이코패스는 독자의 이중적인 감정을 더더욱 자극하는 설정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극단적인 평가가 나올 수도 있는 작품이지만 기시 유스케가 그린 절대 악의 이야기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꼭 한 번 도전해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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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아래
야쿠마루 가쿠 지음, 양수현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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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행 후 살해당한 7세 여아의 사체가 발견되자 히다카 경찰서 소속 나가세 카즈키는 24년 전 똑같은 방식으로 살해당한 여동생 에미를 떠올리며 분노에 사로잡힙니다. 한편 사카도 지역의 공원에서 키무라라는 남자의 잘린 목이 발견되고, 이내 그가 과거 어린 소녀를 성폭행하고 살해했던 전과자임이 밝혀집니다. 그런데 얼마 후 자신을 상송(프랑스에서 6대에 걸쳐 사형집행인을 맡았던 가문)이라 자칭하는 인물이 범행성명을 통해 키무라를 죽인 건 자신이며, “앞으로 아이들이 살해당하는 범죄가 일어나면 예전에 아이를 죽이고 상해를 입힌 인간을 산 제물로 삼겠다.”라는 살인예고장을 발표합니다. 상송을 지지하는 여론이 급등하는 가운데, 여아 살인사건을 수사하던 나가세는 갑자기 상송을 수사하는 사카도 수사본부로 전출됩니다.

 


어둠 아래는 일본에서 2006년에 발표된 작품으로, 소년범죄를 다룬 천사의 나이프로 데뷔한 야쿠마루 가쿠가 두 번째로 내놓은 극장형 범죄미스터리이자 사적 제재 혹은 사형(私刑)을 소재로 한 사회파 미스터리입니다. 개인적으로 야쿠마루 가쿠의 사회파 미스터리를 무척 좋아해서 한국에 출간된 그의 작품은 거의 다 읽었는데, 아껴 읽는다고 미루다가 거의 방치 수준에 이르고 만 어둠 아래는 초기작임에도 불구하고 최근작들보다 훨씬 더 날것 같은 생생함이 배어있어서 천사의 나이프못잖은 충격과 여운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여동생을 참혹하게 잃은 뒤 경찰이 됐지만 여전히 분노와 증오심에 사로잡혀있는 30대 형사 나가세, 너무 오랫동안 잔혹한 범죄를 수사해온 나머지 심신이 피폐해진 베테랑 형사 무라카미, 그리고 자신을 사형집행인이라 자처하며 소녀살해범들을 응징하겠다고 발표한 남자등 세 인물이 번갈아 화자로 등장합니다.

 

그중에서도 범죄 피해자의 유족이자 지금은 경찰이 된 나가세는 독자에게 동정과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물론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은 불안감을 내뿜습니다. 범인이나 전과자를 대할 때면 자기도 모르게 분노의 게이지가 극에 달하는가 하면, 권총을 손에 쥘 때면 지금껏 쌓여온 증오가 해방되는 쾌감과, 인간을 죽이는 것을 상상하며 방아쇠를 당기는 자신에 대한 공포를 동시에 느끼는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가 애초 몸담고 있던 소녀살해범 수사본부에서 소녀살해범을 살해하는 상송 수사본부로 자리를 옮기게 되면서 이야기의 긴장감은 배가됩니다. 만일 여동생을 살해한 자를 상송이 죽여준다면 오빠로서 기뻐해야 할지, 경찰로서 자책감을 느껴야 될지 혼란에 빠진 나가세를 지켜보는 건 아무리 소설이라 해도 독자에겐 가혹한 일일 수밖에 없습니다.

 

남자혹은 상송으로 불리는 범인의 동기와 살해규칙은 무척 독특합니다. 5살 딸 사야에게 안전한 세상을 만들어주고 싶은 그는 범죄를 없애기 위해서는 공포밖에 없다. 범죄를 저지를지도 모르는 사람들의 마음에 바닥 모를 공포를 심어 주는 것이다.”라며, 어린 소녀가 성범죄로 희생될 때마다 자신의 살인리스트에 올라있는 자들을 죽일 계획을 세웁니다. 그리고 그 계획을 언론과 경찰에 알림으로써 큰 충격을 몰고 옵니다. 문제는 경찰의 수사가 지지부진한 가운데 여론이 상송을 지지하는 쪽으로 급격히 기운 점, 심지어 피해자가 어린 소녀들이다 보니 상송의 살인은 범행이 아니라 정당한 응징으로 평가받기 시작한 점입니다.

 

사적 제재 혹은 사형(私刑)을 소재로 한 사회파 미스터리는 차고 넘칠 만큼 다양하지만, 야쿠마루 가쿠의 작품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진정성과 공감력, 그리고 생생한 캐릭터와 예측하기 힘든 반전을 통해 매번 강한 여운과 깊은 인상을 남겨서 여느 사회파 미스터리와도 차별되는 매력을 발산합니다. ‘어둠 아래는 야쿠마루 가쿠의 초기작이지만 그의 매력을 십분 만끽할 수 있는 작품으로, 그의 팬이든 아니든 사적 제재 혹은 사형(私刑)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꼭 읽어볼 만한 명품이란 생각입니다.

이제 야쿠마루 가쿠의 작품 가운데 못 읽은 건 허몽’(일본 2008) 한 편뿐인데, ‘어둠 아래를 읽고 나니 좀더 아껴둬야 할지 당장이라도 꺼내 읽어야 할지 헷갈릴 따름입니다. 그 전에 그의 신간 소식이 들려온다면 더없이 반가운 일이겠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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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츠와프의 쥐들 - 카오스
로베르트 J. 슈미트 지음, 정보라 옮김 / 다산책방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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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여름, 대규모 천연두 감염 사태로 곳곳에 격리병동이 설치된 상황에서 변질자 혹은 죽지 않는 시체라 불리는 괴물이 출현하자 폴란드 서부 대도시 브로츠와프는 패닉 상태에 빠집니다. 무차별로 산 사람을 잡아먹는 그 괴물은 곧 좀비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고, 경미한 접촉 혹은 체액을 묻히는 것만으로도 멀쩡한 사람을 좀비로 변질시킨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됩니다. 유력한 정치인들이 모조리 도망친 가운데 군부와 경찰이 수습에 나서지만 백약이 무효한 상태에서 브로츠와프의 좀비는 시시각각 늘어갈 뿐입니다.

 


좀비 이야기에 딱히 취향이 있는 건 아니지만, 그 배경이 1960년대 폴란드라는 이유만으로 관심을 갖게 된 작품입니다. 2차 대전 이후 소련의 위성국가로 전락했고 독재와 권위와 통제가 만연한 공산국가가 된 폴란드의 시대적, 역사적 상황이 좀비 서사와 어떻게 결합됐을지 무척 궁금했기 때문입니다. 슈퍼 히어로가 등장할 리도 없고, 인민에게 강압적인 군대와 경찰이 정의의 사도처럼 좀비를 퇴치할 리도 만무한 상황에서 안 그래도 암울하고 폐쇄적인 1960년대의 폴란드를 덮친 세기말적 비극은 지금껏 읽은 좀비 이야기와는 사뭇 다르게 전개될 것으로 보였습니다.

 

동료와 부하들을 잃어가면서 분투하는 군인과 경찰, 좀비 사태를 자신들의 정치적 발판으로 이용하려는 젊은 야심가들, 감염자를 분류하는 과정에서 잔혹한 선택을 강요받는 의사, 그리고 좀비의 공격에서 천신만고의 탈주극을 벌이는 간호학교 교장, 술집 주인, 일가족의 가장 등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하여 좀비의 공격이 시작된 직후 첫 12시간동안 브로츠와프가 어떻게 지옥으로 변해가는 지를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이들 가운데 마지막 페이지까지 목숨을 보존하는 자는 극히 일부뿐입니다. 또한 주인공이라 할 만한 인물도 없습니다. 말하자면 좀비의 공격 속에 생사의 갈림길을 걷게 된 수많은 인물들이 직조해낸 거대한 군상극이란 뜻입니다. 작가는 분() 단위로 쪼개진 짧은 챕터들을 속도감 있게 전개시키면서도, 독자들이 일말의 희망이나 기대를 품지 못하도록 군상극 속 인물들을 가차 없이 좀비의 희생양으로 전락시킵니다. 페이지를 넘길수록 비극의 무게는 한없이 무거워지기만 할뿐 어디에서도 잠깐의 안식이나 안도감을 느낄 수 없습니다.

 

그런 와중에 ‘1960년대의 공산주의 체제 폴란드라는 시대적 상황은 좀비에게 점령당한 브로츠와프의 비극을 더욱 참혹하게 만듭니다. 사태를 은폐하고 저 혼자 살겠다고 도망친 권력자들, 그들의 빈자리를 차지한 채 좀비 사태를 승진의 기회로 이용하려는 예비 권력자들, 상식과 소통을 거부한 채 무모하고 강압적인 작전만 거듭하는 군인과 경찰은 거리 곳곳에 피와 살과 내장을 흩뿌리며 무차별 살상을 자행하는 좀비 못잖게 위기감과 불안감만 부추기기 때문입니다. 물론 생존을 위해 용감하게 좀비에 맞서 싸우는 자들이 등장하긴 하지만 독재와 권위와 통제를 당연시 여기는 공권력의 무기력하고 비합리적인 태도는 브로츠와프의 운명을 더욱 암울하게 만들 뿐입니다.

 

어디에서도 희망과 기대를 찾아볼 수 없고 좀비의 공격은 날로 확산되는 가운데 브로츠와프를 덮친 첫 12시간의 비극이 마무리됩니다. ‘카오스라는 부제가 달린 이 작품은 760여 페이지의 엄청난 분량에도 불구하고 브로츠와프 3부작가운데 첫 편이라고 합니다. 아마 나머지 두 편 역시 이만한 분량의 이야기를 담고 있을 것으로 보이는데, 이 작품에서 살아남은 자들이 극히 일부인 걸 보면 2편과 3편도 거의 새 인물들이 이끌어갈 군상극이 아닐까 예상됩니다.

전혀 새로운 좀비 이야기라고 할 순 없지만 ‘1960년대의 공산주의 체제 폴란드라는 특수한 배경 덕분에 나름 색다른 서사를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살짝 부담되는 분량이긴 하지만 워낙 긴장감과 속도감이 충만해서 주말 하루를 꼬박 투자한다면 금세 마지막 페이지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저처럼 좀비 마니아가 아닌 어중간한 스탠스의 독자라도 공포와 연민과 분노를 동시에 맛볼 수 있는 작품이니 기회가 된다면 도전해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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