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정 없는 검사의 분투 표정 없는 검사 시리즈
나카야마 시치리 지음, 문지원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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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학재단, 재무공무원, 국회의원까지 연루된 국유지 헐값 매각 사건이 오사카지검을 긴장하게 만듭니다. 수사결과에 따라 정권을 위협하는 대형스캔들로도 비화할 수 있는 사건이라 오사카지검은 특수부를 비롯하여 유능한 검사들을 다수 투입하지만, 얼마 후 특수부 검사 한 명이 증거를 조작한 사실이 밝혀지면서 오사카지검은 패닉에 빠집니다. 수년 전에도 비슷한 사건이 벌어졌고 그때 바닥까지 추락한 지검의 신뢰는 아직도 회복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대검에서 조사팀을 투입하기에 이르렀고, 그때까지 특수부 파견을 거부해온 오사카지검의 에이스 후와 슌타로는 지검장의 명령으로 대검 조사팀과 함께 진실 찾기에 나섭니다.

 

2020년에 한국에 출간된 표정 없는 검사에 이은 후와 슌타로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입니다. 일본에서는 2021년에 출간됐던 터라 곧 만나볼 수 있을 거라 여겼는데, 거의 3년이 지난 후에야 한국 독자를 찾아왔습니다.

 

나카야마 시치리의 주인공들 대부분이 비범한 캐릭터를 지니고 있지만 후와 슌타로는 이른바 能面檢事’, 즉 일본 전통극 ’()에 쓰이는 가면을 쓴 듯 그 표정에 전혀 변화가 없는 기계와도 같은 얼굴을 지니고 있어서 더 도드라져 보입니다. 뛰어난 능력 덕분에 오사카지검의 에이스라 불리면서도 후와는 상대를 가리지 않는 무표정한 얼굴과 차가운 말투 때문에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인 인물입니다. 하지만 과거 도쿄지검 재직 시 저지른 최악의 실책 이후 제대로 된 사법기관으로서 역할하기 위해 표정을 지웠을 뿐 그는 타고난 반골은 아닙니다.

그와 반대로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기분은 어떤지, 좀전에 뭘 했는지 등 그야말로 머릿속의 모든 것이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나는 사무관 소료 미하루가 후와의 곁을 지킵니다. 1편에서 후와의 사무관으로 배속된 이후 숱한 좌절과 절망을 겪으면서도 1년 가까운 시간을 견뎌내긴 했지만, 그녀는 여전히 후와의 일거수일투족에 놀라고, 당황하고, 허둥댑니다.

 

1편에서 오사카 경찰을 상대로 전쟁을 벌였던 후와가 이번에 상대하는 건 자신이 속한 조직인 검찰입니다. 수년 전 세상을 놀라게 했던 특수부 검사의 증거조작이 또다시 되풀이되면서 오사카지검은 궁지에 몰렸고, 대검의 조사팀에게 지검의 운명을 맡겨야 하는 처지에 빠집니다. 그런데 대검 조사팀 중 한 명인 도쿄지검 차장검사 미사키는 과거 자신의 부하였던 후와를 수사에 합류시켰고, 결과적으로 후와는 대검 조사팀의 일원이 되어 오사카지검의 동료를 조사해야 하는 난감한 상황에 처합니다. 성과를 올릴 경우 동료를 욕보인 원흉이 될 것이고, 실패할 경우에도 오사카지검의 공중분해를 야기한 주범이 될 뿐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후와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진실 찾기에 나서겠다고 대응했고, 실제로 그는 주위에서 놀랄 정도로 냉정하게 조사를 진행합니다. 문제는 그가 조사해야 하는 대상도 검사이고, 시기심과 공명심에 사로잡혀 그를 비난하고 견제하는 것도 검사라는 점입니다. 말 그대로 검사가 벌이는 검사와의 전쟁이라고 할까요?

 

다소 딱딱하고 어려운 용어들이 난무하는 국유지 헐값 매각 사건과 증거조작 사건은 중반 이후 후와와 미하루의 현장 조사를 통해 과거의 다른 사건과 맥이 닿으면서 급물살을 탑니다. 이 대목이 살짝 비약처럼 느껴지긴 했지만, 집요한 탐문과 현장조사를 통해 후와가 알아낸 진실은 원래 사건에선 도저히 유추할 수 없었던 소소한 감동과 안타까움을 선사합니다. 나카야마 시치리 특유의 연속 반전의 쾌감과 함께 말입니다. 물론 거들먹거리는 태도로 회의실에 앉아서 후와의 공을 훔치고 오사카지검을 공중분해시키려던 대검 조사팀을 제대로 물 먹이는 일도 잊지 않습니다. (애초 후와를 조사팀에 끌어들인 도쿄지검 차장검사 미사키는 이 작품에서 거의 유일하게 좋은 검사로 활약하는데, 그는 나카야마 시치리의 또다른 주인공 미사키 요스케의 아버지로 밝혀집니다.)

 

나카야마 시치리는 자신들의 업무를 소홀히 하는 공무원들이 심심치 않게 언론과 신문 지면을 장식하는 와중에 영웅 같은 공무원이 활약하는 작품을 쓰는 것이 대중 소설가의 책무라고 집필의도를 밝힌 바 있는데, 요즘의 한국 상황을 보면 후와 같은 검사가 한 명쯤 있으면 좋겠다, 라는 생각이 저절로 들 수밖에 없습니다. ‘표정 없는 검사 후와 슌타로 시리즈가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한두 작품쯤은 더 만나볼 수 있기를 기대해봅니다. ‘옮긴이의 말에 나온 것처럼 부러질지언정 휘어지지 않는 신념 투철한 사법기계의 활약은 언제 읽어도 속 시원한 사이다처럼 짜릿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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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연극 킴 스톤 시리즈 4
앤절라 마슨즈 지음, 강동혁 옮김 / 품스토리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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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체의 부패를 연구하는 웨스털리의 법의학연구소, 일명 시체농장을 방문했던 킴 스톤과 그녀의 팀원들은 그곳에 있어서는 안 될 시체, 즉 전날 밤 살해된 뒤 유기된 것이 분명한 한 여자의 시체를 발견합니다. 완전히 함몰된 얼굴, 몸에 난 의문의 자국, 깨끗하게 면도된 다리털과 일부러 광택을 없앤 손발톱 등 기이한 시체의 상태에 모두들 놀랐지만, 다음날 똑같은 형태의 피해자가 시체농장에서 또다시 발견되자 큰 충격에 휩싸입니다. 피해자의 신원 확보부터 난항을 겪지만 킴 스톤은 집요한 탐문 끝에 오래 전 벌어졌던 한 사건이 현재의 연쇄살인을 촉발시켰음을 깨닫습니다. 한편 증오심이 들 정도로 자신을 괴롭혀온 기자 트레이시의 도발에 넘어간 킴 스톤은 다른 경찰서 관할인 한 미제사건에도 관심을 갖기 시작합니다.

 

죽음의 연극은 출판사에서 돌김이라는 재미있는 별명을 붙여준 열혈 걸크러시 여형사 킴 스톤의 네 번째 이야기입니다. 잔혹한 사건과 긴장감 넘치는 스릴러 서사에다 의외의 반전까지 여러 가지 미덕을 골고루 갖추고 있지만, 이 시리즈의 단연 최고의 매력은 바로 주인공 킴 스톤의 캐릭터입니다. 앞서 전작의 서평에 쓴 내용을 그대로 인용하면, 제로에 가까운 사교술, 휘발된 감정과 공감능력, 상대는 안중에도 없는 거친 태도, 조직의 논리나 정치적 맥락 따위는 무시하고 오롯이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길만 걷는 타고난 반골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능력으로 초고속 승진을 거듭한 현재 나이 34세의 팀장급 여형사입니다. 용의자는 물론 직속상사에게까지 거침없는 돌직구를 던지는 킴의 언행은 매번 사이다의 쾌감을 전해주는데 그래선지 때로는 이야기의 흐름보다도 킴의 광폭 행보에 더 관심을 갖게 되기도 합니다.

 

갖가지 시신의 부패과정을 연구하는 시체농장에서 갓 발생한 살인사건의 시체가 발견됐다는 아이러니, 너무나도 비상식적인 자세로 발견된 나머지 동기나 수법을 가늠하기 어려운 것은 물론 신원확인 자체가 난감한 시체들, 그리고 어딘가 조금씩 비밀과 거짓말을 품고 있는 듯한 시체농장의 여러 연구원 등 킴에게는 이번에도 좀처럼 풀기 어려운 난제가 주어집니다.

사건도 사건이지만 이번 작품에선 킴의 과거와 현재에 걸친 개인사가 어느 때보다 더 구체적이고 고통스럽게 묘사됩니다. 범죄 혐의가 있는 정신 질환자들을 수용한 폐쇄병동에 입원 중인 어머니와 어릴 적 잠시나마 자신의 삶을 행복하게 만들어줬던 양부모에 대한 기억이 수시로 킴을 고통스럽게 만들고 있다면, 자신에게는 희망이나 행복 따위는 어울리지 않는다며 모든 감정을 억지로 억누르고 일부러 일에 몰입하는 안쓰러운 모습은 현재의 킴이 처한 처지를 잘 대변하고 있습니다. 그래선지 (실은 언제나 그랬지만) 사건을 대하는 킴의 태도는 일반적인 스릴러 주인공과는 사뭇 다른 결을 지니고 있습니다. 지나치게 몰입한 나머지 사건을 개인적인 차원의 것으로 만들어버린다고 할까요?

 

대장은 어떻게든 피해자들과 친숙해지고, 그러면 변화가 일어나요. 더는 정의를 위해 살인자를 잡으려 하지 않죠. (피해자들을 위해서 움직이는 거예요.) 이젠 개인적인 사건이 된 겁니다. 그러면 대장의 목소리가 바뀌어요.” (p350~351)

 

킴 못잖게 독자의 눈길을 끄는 건 영국식 블랙유머를 난사하는 감초 조연들입니다. 수사 자체에 큰 역할을 하는 건 아니지만 킴의 폭주와 분노를 제어하는 역할을 맡은 띠동갑 연상의 베테랑 형사 브라이언트를 비롯하여 툭하면 킴에게 꾸중을 들으면서도 나름 열심히 애쓰는 케빈과 탁월한 정보수집력을 자랑하는 스테이시 등 킴의 팀원들의 활약도 이 시리즈를 꾸준히 지켜봐온 독자라면 애정과 흥미를 갖고 읽게 될 대목입니다.

가장 의외였던 건 그동안 살의를 야기할 정도로 킴의 증오를 샀던 기자 트레이시가 이번 작품에서 중요한 조연으로 등장한 점입니다. 스릴러 시리즈의 주인공을 괴롭히는 기자는 비중은 작더라도 늘 밉상 캐릭터로 그 존재감을 드러내곤 하는데, 전작인 사라진 소녀들에서 킴을 궁지에까지 몰아넣었던 트레이시가 이번에는 사건의 한복판에 휘말리면서 킴과 더 세게 충돌하기 때문입니다.

 

스릴러의 구도 자체는 그리 복잡하지 않고 범인의 정체 역시 예상 못할 반전의 수준은 아니지만, 구원(舊怨)과 복수심이 오랜 시간 켜켜이 쌓인 뒤 폭발했을 때 얼마나 가공할 만한 사태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또한 별개의 것으로 보이던 사건들이 의외의 접점을 통해 연결되는 짜릿함도 맛볼 수 있고, 덤으로 시체농장이라 불리는 법의학연구소의 기괴하고도 음습한 분위기도 마치 그곳을 직접 견학하는 듯 생생히 느낄 수 있습니다.

 

개정판을 제외하더라도 올 한해에만 킴 스톤 시리즈두 편이 한국에 출간됐는데, 영국에서 20편까지 출간된 점을 감안하면 내년에는 좀더 많은 작품들을 만나보고 싶은 욕심입니다. 부디 제 욕심과 바람이 조금이라도 실현되기를 간절히 기대해봅니다.

 

(사족으로, 전작까지만 해도 킴 스톤의 소속이 웨스트미드랜드 경찰청 산하 헤일조웬 경찰서였는데, 이번 작품부터 갑자기 웨스트미들랜즈 경찰청 산하 헤일소언 경찰서로 바뀌었습니다. 관점에 따라 사소한 문제일 수도 있지만 읽는 내내 살짝 거슬렸던 게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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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속의 유괴 붉은 박물관 시리즈 2
오야마 세이이치로 지음, 한수진 옮김 / 리드비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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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없는 실수를 저지른 탓에 하루아침에 경시청 수사1과에서 한직 중의 한직인 경시청 부속 범죄자료관, 일명 붉은 박물관으로 추락한 데라다 사토시와 경찰로서 뛰어난 스펙은 물론 천재적인 추리능력까지 지녔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수년째 붉은 박물관관장으로 살아가고 있는 히이로 사에코 콤비의 두 번째 이야기로 모두 다섯 편의 단편이 수록된 작품입니다.

 

붉은 박물관의 원래 목적은 미결 혹은 종결된 형사사건의 증거품과 수사 서류를 보관하는 것에 불과하지만 이곳에서는 간혹 이 사건의 재수사를 실시한다!”라는 사에코의 목소리가 울려퍼지곤 합니다. 사에코는 과거의 자료들 속에서 의문점을 발견하거나 위화감이 느껴지면 그것이 미제사건이든 이미 시효가 지난 사건이든 관계없이 기어이 재수사를 감행하는 것입니다. 다만, “나는 이 붉은 박물관이 법망을 피해 도망치는 범인을 막아내는 최후의 보루라고 생각한다.”라는 멋진 사명감을 갖고 있긴 해도 의사소통능력 자체가 거의 제로에 가까운 탓에 탐문은 아예 불가능한 4차원 캐릭터이기도 합니다. 그런 이유로 아직 초짜 티를 벗진 못한데다 비록 좌천되긴 했어도 수사1과 출신의 자부심을 품고 있는 사토시가 그녀의 곁을 지키며 현장 조사와 탐문을 도맡습니다.

 

사에코의 추리는 대범하다 못해 기괴하다는 인상을 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망상에 가까운 추리력을 발휘할 때마다 사토시가 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발상인가?”라고 탄식을 내뱉곤 하는데, 그것은 곧 독자의 심정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모두가 당연하다고 여긴 사건의 대전제들을 180도 뒤집는가 하면, 애초 상상 자체가 불가능한 추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툭툭 던지다가 곧바로 진상에 도달하곤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런 사에코의 기행이야말로 이 시리즈의 가장 큰 매력이자 미덕이기도 합니다. 본격과 트릭의 향연을 맛깔나게 만들어주는 결정적인 소스라고 할까요?

 

시리즈 첫 편인 붉은 박물관에서 사에코에게 하도 여러 차례 놀란 덕분인지, 두 번째 작품인 기억 속의 유괴는 조금은 더 객관적이고 차분하게 마주할 수 있었습니다. 심지어 다섯 편의 수록작 중 한 편은 (비록 과정까지는 제대로 맞히지 못했지만) 중반쯤 범인의 윤곽을 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으니 전작의 교훈을 제대로 숙지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모든 수록작에서 사에코의 파격적인 추리는 여전히 빛났고, “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발상인가?”라는 독자와 사토시의 탄식 역시 매작품마다 반복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전작인 붉은 박물관서평에 재미있게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별 0.5개를 뺀 건 사에코의 비범한 능력이 종종 과도한 비약처럼 보였기 때문.”이라고 썼는데, ‘기억 속의 유괴역시 비슷한 느낌입니다. 물론 붉은 박물관보다는 훨씬 더 현실감 있고 안정적으로 읽혔지만 아무래도 결정적인 순간마다 비약하는 사에코의 모습에서 살짝 이물감이 느껴진 건 어쩔 수 없었습니다. 다만 역설적이게도 비약 없는 사에코였다면 과연 이만큼 재미있게 읽혔을까, 라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긴 합니다.

 

아직 보진 못했지만 붉은 박물관수록작 중 일부가 TV드라마로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기억 속의 유괴에도 영상화가 기대되는 수록작들이 몇 편 있습니다. 의문의 연쇄방화범을 그린 연화와 기이한 유괴사건의 진상을 파헤치는 표제작 기억 속의 유괴가 가장 기대됐고, 영상화가 쉽진 않겠지만 본격의 맛이 잘 살아있는 황혼의 옥상에서역시 드라마로 보고 싶어진 작품입니다.

 

본격과 트릭의 향연에 4차원 천재와 어리바리 형사의 콤비 플레이가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르겠지만 이 작품이 일본에서 20221월에 출간됐으니 어쩌면 1~2년 안에 그들의 세 번째 이야기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단편이지만 설계와 구성에 적잖은 공이 필요한 작품들이라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긴 하겠지만, 그래도 새 작품과 만나기까지 너무 오래 걸리진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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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스를 든 사냥꾼
최이도 지음 / 해피북스투유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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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의관 서세현은 소도시 용천에서 벌어진 살인사건 피해자를 부검하던 중 큰 충격을 받습니다. 범인은 죽은 피해자를 해부한 뒤 실로 꿰맨 흔적을 남겼는데, 이는 서세현에게는 너무도 낯익은 범행수법이기 때문입니다. 범인은 바로 오래 전 자신의 손으로 죽인 연쇄살인마이자 친아빠인 윤조균입니다. 그가 살아있다는 것도 충격적이지만 만일 그가 경찰의 손에 잡히고 자신의 친아빠임이 밝혀진다면 자신의 미래는 완전히 파멸될 것이라고 여긴 서세현은 경찰보다 먼저 윤조균을 찾아내 죽이기로 합니다. 일부러 용천경찰서 인근에 거처를 삼은 서세현은 담당 형사인 정정현에게 접근하여 수사 정보를 빼내려 합니다. 그러던 중 두 번째 살인사건이 벌어지고, 서세현은 윤조균이 아주 가까운 거리에 머물고 있음을 감지합니다.

 

독특한 인물들을 앞세운 연쇄살인 스릴러입니다. 반사회성 인격장애를 앓고 있지만 성공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법의관 서세현, 소년이던 21년 전 연쇄살인마 윤조균의 뒷모습을 우연히 목격한 적 있으며 경찰이 돼서도 미제살인사건에 집착하는 신참 강력팀장 정정현, 그리고 20여 년에 걸쳐 연쇄살인을 저질러 온 희대의 소시오패스 윤조균이 그들입니다.

 

법의관 서세현이 아버지이자 연쇄살인마인 윤조균을 쫓는 이유는 정의감도 사명감도 아닙니다. 그가 체포되어 과거 연쇄살인행각이 폭로될 경우 미성년자 시절 자신의 공범 행위가 드러나는 것을 막기 위해서입니다. ‘법의관 딸과 연쇄살인마 아버지의 대결이라는 구도 자체만으로도 흥미를 일으키는 설정인데, 거기에 가세한 형사 정정현은 베테랑도 아니고 마초 기질도 전혀 없는, 오히려 숙맥 같은 인물이라 독자의 눈길을 끕니다. 어차피 광역수사대가 사건을 접수할 거라는 생각에 용천경찰서 내 누구도 사건에 적극적이지 않은 상황에서 홀로 고군분투하긴 하지만 그는 경험도, 추리력도 딸리는 초짜 팀장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그에겐 미제사건에 대한 특별한 집착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번 연쇄살인사건이 과거의 미제사건들과 접점이 있을 거라고 짐작하며 수사 자료들을 재검토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정정현의 미제사건에 대한 집착은 그와 공조수사를 벌이던 서세현을 긴장하게 만듭니다.

 

큰 그림은 무척 매력적입니다. ‘연쇄살인마를 쫓는 법의관과 형사로 시작되지만 곧바로 형사가 쫓는 연쇄살인마와 그 공범이라는 구도가 동시에 전개되면서 인물들 사이의 팽팽한 긴장감이 계속 독자의 호기심을 자극하기 때문입니다. 핸디맨이나 깜빡이는 소녀들같은 영미권 스릴러에서도 종종 차용하는 연쇄살인마의 자식이라는 소재는 그 자체만으로도 흡입력이 있는데 메스를 든 사냥꾼의 경우 연쇄살인마 아버지를 죽이려는 딸이라는 설정까지 더해져서 그 구도가 더 풍성해진 느낌입니다.

 

하지만 큰 그림에 비해 디테일은 다소 아쉬웠습니다. 무엇보다 쉴 틈도 없이 바쁜 법의관이 1시간 거리에 있는 소도시의 경찰서를 제집처럼 드나들며 형사보다 더 형사처럼 활약한다.’는 설정은 읽는 내내 위화감이 느껴졌습니다. 또 특별할 것도 없는 법의관의 현장 진술을 마치 대단한 추리력의 산물인 양 감탄하며 추종하는 형사팀장 정정현의 캐릭터도 작위적이었고, 방송국 차량이 진을 칠 정도로 전국적인 관심이 집중됐는데도 불구하고 (정정현 홀로 고군분투하게 만들기 위해) 일부러 수사를 기피하는 듯한 용천경찰서 수사진들의 태도도 억지스러워 보였습니다. 초반부터 이런 자연스럽지 못한 설정들이 뇌리에 박힌 탓에 이야기에 몰입하는 게 쉽지 않았고, 클라이맥스에 이르렀을 때도 당초 기대했던 스릴감을 제대로 만끽하지 못한 게 사실입니다. 디테일이 좀더 자연스러웠더라면 잘 짜인 큰 그림이 더 빛을 발했을 거란 아쉬움이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새로운 한국의 스릴러 작가를 만난 일은 무척 반가웠지만 그만큼의 아쉬움도 남긴 작품입니다. 다음에는 그 아쉬움들을 모두 잊게 만들 수 있는 작품으로 만나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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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선을 걷는 남자 스토리콜렉터 110
데이비드 발다치 지음, 김지선 옮김 / 북로드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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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유와 가스의 노다지로 알려진 노스다코타주의 소도시 런던에서 한 여성의 시신이 발견되자 FBI는 에이머스 데커와 파트너 알렉스 재미슨을 파견합니다. FBI가 개입할 만한 사건으로 보이지 않은데다 정작 데커와 재미슨조차도 자신들이 파견된 정확한 이유를 모릅니다. 문제는 수사를 시작하고 얼마 되지도 않아 살인과 실종사건이 연이어 벌어진 점입니다. 데커와 재미슨은 살인사건 외에도 불온한 기운이 감도는 런던의 분위기에 촉각을 곤두세웁니다. 사방에서 석유 시추가 이뤄지고 가스의 불기둥이 치솟는가 하면, 오래된 공군기지는 철저한 경비 속에 음모가 도사리는 듯 보였고, 인접한 종교단체 역시 전혀 순수해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석유와 가스가 창출한 부를 놓고 갈등을 빚는 지역유지들 역시 수상해 보일 뿐입니다.

 


모든 것을 기억하는 남자에이머스 데커의 여섯 번째 이야기로, 전작인 진실에 갇힌 남자이후 (한국 기준으로) 3년 만에 출간된 작품입니다. 미식축구선수 시절 엄청난 부상과 함께 과잉기억증후군공감각이라는 증상을 얻은 데커는 이후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FBI에서 일하게 됐고, 자신만의 특별한 능력을 통해 크고 작은 사건들을 해결해왔습니다. 이번 작품에서 데커는 그 특별한 능력을 발휘한다기보다 발군의 추리력과 순발력으로 다양한 사건들을 해결합니다. 재미있는 건 노스다코타주의 소도시 런던이 데커에게 내민 숙제가 꽤나 복잡해 보인다는 점입니다. 모두 연관된 것 같지만 동시에 전혀 별개의 것으로 보이는 여러 가지 사건들이 동시다발적으로 폭발하기 때문입니다.

 

데커는 재미슨과 함께 런던에 파견된 첫 번째 이유, 즉 한 여성의 죽음에 몰입하려 하지만, 세기말적 풍경을 자아내는 석유 시추시설, 지금은 그 용도가 불분명한 오랜 공군기지, 비밀을 감추는 듯한 종교단체, 그리고 호황과 불황을 거듭해 온 런던을 손아귀에 넣기 위해 이전투구를 벌여온 지역유지 등 혼란스러운 상황들 때문에 좀처럼 수사의 실마리를 찾지 못합니다. 특히 정체불명의 청부살인업자가 자신을 노린 일도, 또 위기의 순간 느닷없이 나타나 자신을 구해준 인물의 등장도 데커의 수사 방향에 혼란만 가중시킵니다. 한 여성의 죽음의 배경에 무엇이 도사리고 있는지 감조차 잡기 힘들어졌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읽은 그 어느 작품보다 사선을 걷는 남자는 복잡한 설계도를 지닌 작품입니다. 꽤 많은 사람이 죽거나 실종되거나 아슬아슬하게 목숨을 건지는데, 이 많은 사건들이 전부 제각각의 단서를 남기는 바람에 하필데커가 와있는 중에 공교롭게도 사건들이 한꺼번에 일어난 건지, 아니면 그 많은 사건들이 실은 한 뿌리에서 시작된, 모조리 연관된 사건들인지 쉽게 판단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야기를 제대로 따라가려면 메모장에 등장인물의 이름이라도 적어놓는 것이 유용할 수도 있습니다. 또 한 번에 마지막 장까지 달려야 이 작품의 참맛을 만끽할 수 있으니 바쁜 시간을 쪼개 나눠 읽기보다는 주말에 완주하는 것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사선을 걷는 남자에는 데커와 재미슨 콤비만큼이나 눈길을 끄는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바로 윌 로비와 제시카 릴 콤비입니다. 해외 관련 첩보기관에서 일하는 것으로 보이는 두 사람은 이번 작품에서 가공할 살상력과 무력을 선보이며 데커와 재미슨의 수호천사같은 역할을 맡습니다. 후속작에서도 이들이 데커의 도우미가 돼줄 지는 알 수 없지만 여러 모로 합이 잘 맞는 네 사람의 협업을 기대해 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워낙 서사의 판이 크고 복잡하게 짜여서 그런지 다른 어느 작품보다 집중력이 필요하기도 했지만, 다소 아쉬웠던 건 결정적인 순간마다 데커의 추리가 다소 지나치게 비약을 반복한 점입니다. “왜 갑자기 저런 생각이 떠올랐을까?”라는 의문이 들 정도로 데커의 추리는 동료들은 물론 독자마저 멀찌감치 떼어놓고 홀로 폭주하곤 합니다. 나중에 그에 대해 딱히 설명해주지도 않습니다. 그래선지 ... 그런 거였나?”라고 애매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책장을 넘기곤 했는데, 흥분지수가 고조된 지점에서 그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 조금은 아쉽게 느껴진 게 사실입니다. 정말 재미있게 읽었지만 별 0.5개를 뺀 건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미국에서는 시리즈 일곱 번째 작품인 ‘Long Shadows’2022년에 이미 출간됐습니다. 올해 한국에 처음 소개된 데이비드 발다치의 새 시리즈 ‘620분의 남자의 두 번째 작품도 기대되지만 에이머스 데커의 새 이야기도 빠른 시간 안에 만나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두 작품 모두 주인공들의 매력과 카리스마가 철철 넘쳐흐르기 때문인데 이왕이면 2024년 상반기에 두 작품을 한꺼번에 만날 수 있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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