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란한 아침의 나라
신원섭 지음 / 황금가지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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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동산 개발업자 한병진은 자신이 소유한 땅과 맞붙어있는 미혼모 쉽터 사랑의 집의 부지를 탐내지만 일언지하에 거절당하자 변칙적인 방법을 동원합니다. 경찰 출신 용역깡패 이진수를 섭외하여 사랑의 집운영자인 오유라의 비리를 파헤치도록 하고, 젊고 강직해 보이는 변호사 하나연을 자신이 급조한 시민단체의 대표로 영입한 것입니다. 시민운동가로서 명망을 얻고 있었지만 실은 오유라는 비리덩어리 그 자체였고, 이진수와 하나연을 통해 그 사실을 알아낸 한병진은 무난한 성공을 기대했지만, 시장을 비롯하여 권력자들과 단단하게 이어진 오유라의 저항은 만만치 않습니다. ‘땅 빼앗기로 시작된 작은 싸움은 어느 새 폭로전은 물론 피와 살이 튀는 무자비한 전쟁으로 확대됩니다.

 

2018년에 출간된 신원섭의 짐승은 각자의 욕망에 충실하지만 선택과 행동은 하나같이 짐승의 그것과 닮아있는 여섯 명의 인물을 등장시킨 흥미로운 군상극이자 매력적인 스릴러였습니다. 이후 몇 편의 앤솔로지에서만 그 이름을 발견할 수 있었던 신원섭이 5년 만에 새로운 장편을 펴내서 무척 기대가 됐습니다.

제목부터 눈길을 끄는 요란한 아침의 나라40년간 위성도시 베드타운이었지만 지금은 쇠락의 기운이 더 강하게 감도는 가양시를 무대로 한 작품으로, 전작과 마찬가지로 특정 주인공이 없는 속도감 넘치는 군상극이자 누아르의 기운이 짙게 밴 스릴러입니다. 이야기의 연속성은 전혀 없지만 전작에 등장했던 두 인물 - 경찰 출신 용역깡패 이진수, 재력가이자 시장의 최측근인 도미애 5년 만에 악연을 거듭하는 대목은 꽤 흥미로웠습니다.

 

자신이 소유한 땅의 진입로를 확보하기 위해 바로 옆 미혼모 쉼터의 부지가 필요했던 부동산 개발업자 한병진의 탐욕에서 시작된 땅 빼앗기 싸움은 그 상대가 시장을 비롯한 권력자들과 유대 관계가 깊은 사악한 시민운동가 오유라인 탓에 쉽사리 마무리되지 못하고 시간이 갈수록 점차 그 규모가 커져갑니다. 오유라 죽이기로 끝나는 싸움이 아니라 그녀의 동지들인 시장과 권력자들을 아군으로 만들거나 반대로 무너뜨려야만 하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싸움의 주체들은 하나같이 탐욕스럽고 이기적이며 비열한 인물들입니다. 심지어 주인공인 깡패 이진수와 변호사 하나연 역시 악당은 아니더라도 정의나 선()과는 거리가 먼, 자기 욕망에 충실한 캐릭터들이라 독자 입장에서 딱히 이입하며 쫓아갈 인물이 없는 셈입니다. 하지만 이런 군상극은 오히려 독자에게 상황 전체를 골고루 조망할 수 있게 만들어줘서 이야기 자체에 몰입하도록 도와주기도 합니다. 탐욕, 오만, 증오, 시기에 사로잡힌 인간들이 맞이하는 파멸의 전 과정을 적나라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설정이라고 할까요?

 

후반에 실린 해설을 보면 여성 누아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부패와 비리를 일삼는 사랑의 집대표 오유라, 정치적 야망을 숨기지 않는 시장 김주미, 시장의 귀찮은 일들을 은밀히 처리해주는 실력자 도미애, 인권변호사를 표방하지만 실은 부와 명예를 탐내는 현실주의자 하나연, 그리고 그루밍 성범죄의 피해자였던 나약한 미혼모에서 끝내 자신의 길을 찾아내고 마는 고영희에 이르기까지 이 작품의 주요 서사는 대부분 여성이 끌고 갑니다. 누아르의 별미인 폭력은 남성들의 몫이지만 그저 말 그대로 별미일 뿐 실제로 가양시에서 벌어진 참혹한 전쟁을 이끄는 것은 모두 여성입니다. 정작 읽을 때는 잘 못 느꼈던 점인데, 이 작품의 특별한 미덕이기도 하니 아직 읽지 않은 독자라면 이 점을 염두에 두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입니다.

 

아쉬운 점이 두 가지 정도였는데, 하나는 사랑의 집이슈가 너무 쉽게 전국적인 뉴스거리가 된다는 점(요즘 흉악한 뉴스가 워낙 많다 보니 가양시 정도에서 벌어진 흔하디흔한 비리에 전국적인 관심이 몰린다는 게 영 어색했습니다), 또 하나는 아직 이야기가 많이 남았을 것 같은데 막판에 너무 서둘러 마무리한 점입니다. 마지막 장까지 몇 장 남지 않았을 때 후속작 한 편 정도는 더 나올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는데 갑작스레 모든 상황이 종료되면서 을 보게 된 건 무척 아쉬웠습니다.

 

신작 소식을 기다리게 되는 한국의 장르물 작가 중 한 명이 신원섭입니다. 앤솔로지를 통해 꾸준한 활동을 해왔지만 아무래도 장편이 더 기대되는 작가입니다. 새로운 군상극도 괜찮고, 확실한 주인공이 끌고 가는 누아르도 괜찮으니 머잖아 그의 새 작품을 만나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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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기맨을 찾아서
리처드 치즈마 지음, 이나경 옮김 / 황금가지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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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미국 메릴랜드주의 소도시 에지우드에서 참혹한 연쇄살인이 벌어집니다. 피해자는 모두 긴 머리의 10대 소녀들이었고, 참혹한 폭행을 당한 후 교살된 채 발견됩니다. 엽기적인 범행 때문에 언론에서는 범인에게 부기맨이라는 별명을 붙였고, 대대적인 수사가 소도시 에지우드를 휩쓸지만 범인은 작은 단서조차 남기지 않은 채 불규칙한 간격을 두고 범행을 이어갑니다. 범죄미스터리와 공포물 소설가의 길을 꿈꾸는 22살의 청년 리처드 치즈마는 대학을 갓 졸업하고 잠시 돌아온 고향에서 마주한 끔찍한 연쇄살인사건에 각별한 관심을 보이는 것은 물론 또래 기자인 칼리 올브라이트와 함께 부기맨의 뒤를 쫓기 시작합니다.

 

실화와 허구의 경계를 무너뜨린 파격 범죄 스릴러라는 띠지의 문구대로 부기맨을 찾아서는 범죄 실화를 추적하는 르포와 허구의 세계를 그리는 소설이 절묘하게 믹스된 작품입니다. 1988년 당시 22살이던 작가 리처드 치즈마가 자신의 고향 에지우드에서 직접 겪은 연쇄살인사건을 1인칭 시점의 서술과 함께 수십 장의 사진(피해자, 사건현장, 담당수사관 등)까지 동원하여 디테일하게 그려냈다는 점에서 교과서적인 르포의 형식을 갖추고 있지만, 동시에 소설로서의 미덕도 제대로 갖춘 특이한 작품이란 뜻입니다. “과연 어디까지가 실화고 어디까지가 허구인가? 이 독특한 형식의 소설을 십분 즐기고 싶다면 부디 첫 페이지부터 순차적으로 따라가 보라.”라는 출판사 소개글대로 일단은 화자인 22살 리처드 치즈마의 부기맨 추적기를 한 페이지씩 음미하기를 추천하고 싶습니다.

 

DNA 분석이 정교하지도, 신속하지도 않던 시기이기도 하지만,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은 범인의 행적 때문에 경찰은 미궁에서 헤어나지 못합니다. 라일 하퍼라는 훌륭한 수사관이 있긴 하지만 부기맨을 추적하는 역할은 주인공 치즈마와 기자 칼 리가 맡습니다. 치즈마가 장르물 소설가의 촉을 동원해 연쇄살인의 진상을 밝히려 한다면, 칼리는 정보원과 취재를 통해 경찰이 놓친 부분을 포착하려는 맹렬 기자로서 활약합니다. 또한 두 사람은 부기맨으로 보이는 자에게 직간접적으로 위협을 당하기도 하는데, 안 그래도 범인은 에지우드 사람이 분명하다.”라는 게 공공연한 사실로 드러난 터라 그 위협은 두 사람에 대한 실질적인 공격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점점 높아집니다.

 

읽으면서 가장 놀란 점은 챕터 사이사이에 배치된 다양한 종류의 사진들입니다. 살해된 10대 소녀들의 생전 사진, 사건이 벌어진 현장, 수사 중인 경찰, 취재 중인 칼리 등 다양한 사진들이 게재돼있는데, 조금 전까지 활자로 접한 인물과 풍경이 생생한 사진으로 눈앞에 나타나자 부기맨의 공포는 더 이상 소설 속 허구가 아닌 피부에 와 닿는 실체로 전화됩니다. 동시에 다시 한 번 과연 어디까지가 실화고 어디까지가 허구인가?”라는 의문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르포와 소설의 미덕이 절묘하게 믹스된 부기맨을 찾아서의 진면목은 마지막에 실린 작가의 말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범죄미스터리로서도 매력적이지만 형식이 어떻게 내용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어서 무척 색다른 간식 같은 쾌감을 만끽할 수 있습니다. 독자에 따라 뒤통수를 제대로 맞은 듯한 얼얼함도 즐길 수 있으니 작가의 말을 절대 놓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사족이자 쓴 소리를 한마디만 보태자면, 어쩌다 한 번씩 눈에 거슬렸던 의아한 번역 때문에 아쉬움을 느끼곤 했는데, 오역은 아니지만 매끄럽지 않거나 능동태와 수동태가 뒤바뀐 문장들은 편집과정 상의 옥의 티로 보였습니다. ‘부기맨을 찾아서가 좋은 성과를 거둬 증쇄를 하게 된다면 꼭 수정됐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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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사 변호인
야쿠마루 가쿠 지음, 남소현 옮김 / 북플라자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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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형사 스즈카가 남편 몰래 만나던 호스트 카노 레이지를 살해한 혐의로 체포됩니다. 언론의 관심이 집중되는 가운데 살인사건 변호는 처음인 30살의 모치즈키 린코가 스즈카의 변호인이 됩니다. 같은 법률사무소의 니시가 공동변호인으로 가세했지만 린코는 의뢰인을 함부로 대하곤 하는 니시의 태도가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모든 걸 솔직하게 털어놓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앞뒤가 안 맞는 진술을 거듭하는 스즈카입니다. 결국 린코와 니시는 가해자 스즈카와 피해자 카노의 관계는 물론 그들의 과거에 관해 직접 알아봐야 하는 처지에 이릅니다. 검찰이 계획된 살인을 주장하는 가운데 린코와 니시는 스즈카의 정당방위를 입증하기 위해 분투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상황은 악화될 뿐입니다.

 

2009년 한국에 처음 소개된 천사의 나이프를 읽은 이후 야쿠마루 가쿠의 팬이 되어 그동안 꽤 많은 작품들을 읽어왔습니다. ‘형사 변호인은 한국에 소개된 그의 18번째 작품으로, 변호사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첫 작품입니다. 작가 스스로도 많은 준비를 거쳐 내놓은 첫 법정미스터리라고 밝혔지만 형사 변호인은 성격도 가치관도 판이한 두 변호사 린코와 니시가 가해자와 피해자의 행적을 조사하며 사건의 진실에 다가가는 과정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물론 클라이맥스와 엔딩은 법정에서 이뤄지긴 하지만, 독자 입장에선 물과 기름 같으면서도 비슷한 상처를 지닌 린코와 니시가 성실하고 집요하게 진실을 추적하는 과정, 그리고 서로에게 영향을 주면서 변호사로서 성장하는 과정에 더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법조인 가문에서 성장한 린코는 형사 전문 인권변호사였던 아버지의 영향 때문에 어떤 상황에서도 피고인의 이익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라는 생각을 갖고 있지만, 니시는 진실을 위해서라면 피고인에게 불리한 증거나 진술이라도 반드시 공개해야 한다.”라는, 변호사로서는 다소 파격적인 주장을 펼칩니다. 두 사람 모두 범죄자를 옹호한다는 이유 때문에 세간의 욕을 먹는 형사 변호사지만 지향하는 바는 전혀 다르다는 뜻입니다. 구치소에 갇힌 스즈카를 대하는 태도 역시 180도 다른데, 특히 니시는 변호사라기보다는 취조하는 경찰처럼 스즈카를 몰아붙입니다. 어르고 달래며 진술을 얻어내려는 린코와 달리 니시는 진실을 감추는 듯한 스즈카에게 조금의 동정도 없는 냉정한 태도를 보이는 것입니다. 팀플레이 자체가 불가능해 보이는 린코와 니시의 차이점은 미스터리만큼이나 흥미롭게 읽히는 대목입니다.

 

반면 범죄로 인해 가까운 사람을 잃은 적이 있으며 형사 변호사가 되기까지의 지난한 과거를 지녔다는 공통점 때문에 두 사람은 자신과는 전혀 다른 상대방의 가치관과 입장을 존중하기도 합니다. 또한 가까운 사람을 해친 범죄자도 변호할 수 있겠는가?”라는 고통스러운 질문을 주고받으며 서로를 위로하기도 응원하기도 합니다. 이런 매력들 때문에 린코와 니시를 주인공으로 한 법정미스터리 시리즈가 이어지기를 바라게 됐는데, 야쿠마루 가쿠가 후속작을 내줄 지는 좀더 두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대부분의 작품이 400페이지 안팎인데 반해 형사 변호인500페이지를 훌쩍 넘기는 작품입니다. 법정미스터리지만 막판 법정 장면은 20%에 불과하고 앞의 80%는 린코와 니시가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 및 과거를 파헤치는데 할애됩니다. 외양은 변호사지만 실은 형사나 다름없이 수많은 사람들을 탐문하며 정보를 모으는 것이 린코와 니시의 주된 업무입니다. 법정미스터리가 취향이 아닌 독자라도 형사 변호인은 야쿠마루 가쿠 특유의 묵직하면서도 흥미진진한 사회파 미스터리 서사를 맛볼 수 있는 작품이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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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소녀들 킴 스톤 시리즈 3
앤절라 마슨즈 지음, 강동혁 옮김 / 품스토리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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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친인 9세 소녀 두 명이 문화센터에서 납치당합니다. 13개월 전 벌어졌던 사건과 판박이라 경찰은 당황합니다. 당시 한 명의 소녀만 살아 돌아왔고 다른 소녀는 생사조차 밝혀지지 않은 채 미제사건으로 남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건을 조사 중이던 킴 스톤은 피해 가족 중 한 명이 자신을 담당수사관으로 지명했다는 소식에 크게 놀랍니다. 더구나 요청한 사람이 어릴 적 위탁가정에서 함께 지냈으며 극도로 혐오했던 캐런이란 사실에 킴은 당황합니다. 결국 팀원들과 함께 수사에 나선 킴은 이 사건이 모방범죄가 아니라 13개월 전 사건의 범인들의 소행이라고 확신합니다. 더 높은 몸값을 제시하는 가족의 아이만 살려주겠다는 범인의 문자 때문입니다. 가족 간에도 특별한 친분이 있었던 두 소녀의 가족은 극도의 혼란에 빠지고 맙니다.

 

이른바 걸 크러쉬 형사인 킴 스톤의 캐릭터는 이 시리즈의 가장 큰 매력입니다. 앞서 두 작품의 서평에도 썼지만 제로에 가까운 사교술, 휘발된 감정과 공감능력, 상대는 안중에도 없는 거친 태도, 조직의 논리나 정치적 맥락 따위는 무시하고 오롯이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길만 걷는 타고난 반골인 킴의 거침없는 행보는 사이다 이상의 짜릿한 쾌감을 전해주기 때문입니다. 물론 띠 동갑 연상인 남성을 부하로 둘 정도로 초고속 승진을 거듭하게 만든 그녀만의 뛰어난 수사능력이 뒷받침 됐기 때문에 그런 폭주가 가능했던 것이고, 비록 시기와 질투가 뒤섞이긴 했어도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킴은 누구에게나 인정받는 유능한 경찰이 됐습니다.

 

그런 킴에게도 지워지지 않는 트라우마가 있는데, 어린 시절 비극적으로 가족이 해체된 이후 위탁가정을 몇 군데나 전전하며 얻은 끔찍한 상처들이 그것입니다. 어떻게든 과거를 망각의 상자 속에 가두며 살아왔던 킴이기에 두 소녀의 납치사건은 여러 면에서 킴에게 큰 충격을 가합니다. 하나는 납치된 한 소녀의 어머니이자 킴을 담당수사관으로 요청한 캐런이 과거 같은 위탁가정에서 트러블을 겪었던 인물이라는 점이고, 또 하나는 납치된 두 소녀가 어릴 적 끔찍한 비극을 겪었던 자신과 남동생 마이키를 떠올리게 했기 때문입니다. 어쩔 수 없이 과거에 한쪽 발을 담근 채 수사를 진행하게 된 킴은 어떻게든 두 소녀를 안전하게 데려올 것을 다짐합니다. 만일 누구 하나라도 범인의 의도대로 죽는다면 그건 과거 못잖은 큰 트라우마가 되어 자신의 삶을 망가뜨릴 게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이중납치극이라는 단선적인 사건 설정에도 불구하고 5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은 조금도 지루할 틈 없이 엄청 빠른 속도와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합니다. 더 높은 몸값을 제시한 가족의 소녀만 살려주겠다는 범인의 잔인한 경매에 맞선 킴과 팀원들의 분투가 가장 눈길을 끌지만, 자신의 딸을 살리기 위해 절친했던 가족과 경쟁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 두 가족의 갈등도 긴장감을 고조시키고 있고, 경찰과 피해 가족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희롱하는 것은 물론 납치된 소녀들을 위협하는 범인들의 잔혹한 행태 역시 손에 땀을 쥐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전작인 악마의 게임’(구판 상처, 비디오, 사이코 게임’)이 킴과 소시오패스 정신과 의사의 1:1 대결에 치중하느라 다른 팀원들의 활약을 덜 보여줘서 무척 아쉬웠는데, 이번에는 말 그대로 팀플레이를 통해 범인과 맞서고 있는데다 킴의 감정적 폭주도 최고조에 달해서 주저하지 않고 별 5개를 매겼습니다. “킴 스톤의 인간적인 모습과 그녀의 뛰어난 능력을 동시에 엿볼 수 있는 작품이라는 출판사의 소개글에도 100%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다만, 시리즈 세 편에서 공통적으로 목격되다 보니 작가의 개성으로밖에 해석할 수 없는 점 - 막판의 불친절함과 다소 비약에 가까운 킴의 추리 은 개인적으론 무척 아쉬웠습니다. 물론 이 부분은 독자에 따라 생각이 많이 다를 수도 있습니다.

 

비록 한국에는 이제 세 편의 작품만 소개됐을 뿐이지만, 작가의 홈페이지와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영국에서는 20편까지 출간(예정)된 상태입니다. 작가의 왕성한 필력도 놀랍지만 이 많은 작품들이 언제쯤 한국에 모두 소개될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라진 소녀들2년 만에 나온 신작이긴 하지만 다음 작품은 좀더 빠른 시일 내에 만나볼 수 있기를 기대해봅니다. (이 서평을 쓴 게 지난주인데, 그 사이에 시리즈 네 번째 작품 죽음의 연극이 출간됐네요. 그저 반가울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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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갇힌 외딴 산장에서 히가시노 게이고 산장 3부작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난주 옮김 / 재인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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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오디션에 합격한 7명의 남녀가 연출가의 지시를 받고 외딴 펜션에 모입니다. 하지만 연출가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편지를 통해 “34일 동안 연극의 모든 것을 배우들 스스로 구성해보라.”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특이한 건 펜션을 폭설로 고립된 산장으로 여기라는 것, 외부와의 접촉을 일체 금지시킨 점입니다. 또한 뜻밖의 일이 벌어지더라도 연극의 일환으로 받아들이라는 애매한 부언까지 남깁니다. 어리둥절한 채 하룻밤을 보낸 일행은 충격적인 아침을 맞이합니다. 배우 한 명이 사라졌고 그 자리엔 살인을 암시하는 쪽지가 남아있었기 때문입니다. 논란 끝에 연극의 일부라고 결론 내렸지만 다음 날 또 한 명이 사라지고 명백한 실제 살인의 단서가 발견되자 일행은 현실인지 연극인지 구분할 수 없는 패닉 상태에 빠집니다.

 

편의상 붙인 이름이겠지만 이 작품은 하쿠바산장 살인사건’(1986, 구판 제목은 백마산장 살인사건’)가면산장 살인사건’(1990)에 이은 히가시노 게이고 산장 3부작의 한 편입니다. 일본에서 1992년에 출간된 작품으로 클로즈드 서클’, 즉 밀실살인을 소재로 다루고 있어서 다분히 고전적인 냄새를 풍기고 있습니다.

고립된 산장’, ‘연이어 발견되는 시체’, ‘범인은 일행 중 한 명이라는 전형적인 공식을 따르고 있지만, 이 작품은 펜션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사태가 실제 벌어진 살인사건인지 연극 연습의 일환이지 알 수 없기 때문에 7명의 배우는 물론 독자마저 혼란에 빠뜨린다는 점에서 나름 새로운 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첫 사건이 벌어진 직후만 해도 모두들 연극 연습이라 여기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다가 두 번째 사건과 함께 명백한 살인 도구가 발견되면서 큰 혼란에 빠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사건이라는 주장과 연극 연습이라는 주장이 팽팽하게 맞서면서 펜션에 모인 배우들은 공포에 휩싸입니다. 실제 사건임을 전제로 범행 동기를 캐려는 갑론을박도 벌어지지만 그 어떤 추리도 금세 모순이 드러나고 막다른 벽에 부딪힙니다. 독자 역시 배우들의 혼란을 고스란히 체감하게 되는데 동시에 현실이든 연극이든 그 어떤 결론이 나더라도 왠지 김이 샐 것 같은 불안한 예감을 피할 수 없는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히가시노 게이고는 누구도 예측하기 힘든 독특한 해법과 엔딩을 제시합니다. ‘현실이냐 연극이냐라는 이분법적 추리를 뛰어넘는 엔딩은 독자에 따라 다소 억지스럽게 받아들일 여지가 많은 게 사실이지만 개인적으론 고전적이면서도 꽤 참신한 해법으로 보였습니다. ‘누가 범인?’에만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가 의외의 진실 덕분에 기분 좋은 정도로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랄까요?

요약하자면, 요즘의 독자 눈높이에 어울리는 미스터리는 아니지만 가끔 특별한 간식이 생각나듯 아날로그 냄새가 폴폴 풍기는 고전을 읽고 싶은 생각이 간절해질 때 집어 들면 딱 어울리는 작품이라는 생각입니다. 새삼 오래 전에 읽은 하쿠바산장 살인사건과 아직 읽지 못한 가면산장 살인사건을 읽고 싶어졌는데, 연이어 읽기보다는 특별한 간식이 생각날 때를 기다려볼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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