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사라진 날
할런 코벤 지음, 부선희 옮김 / 비채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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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해튼의 유능한 투자자문가 사이먼 그린은 직업적으로나 가정적으로 남부러울 것 없는 삶을 누리고 있었지만, 큰딸 페이지가 대학 입학 후 한 학기 만에 마약중독자가 되어 가출한 뒤로 엉망진창이 되고 맙니다. 어느 날 공원에서 길거리 공연을 하던 페이지를 발견하고 쫓아가지만 에런이라는 남자의 방해 때문에 오히려 폭행범 신세가 됩니다. 가까스로 피소를 면했지만 사이먼은 얼마 후 충격적인 소식을 듣습니다. 자신을 방해했던 에런이 실은 페이지의 남자친구이자 그녀를 마약중독에 빠뜨린 장본인이었는데 그는 자신이 살던 아파트에서 참혹하게 살해당했으며 페이지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결국 사이먼은 아내 잉그리드와 함께 직접 페이지를 찾기로 결심하고 위험천만한 마약소굴로 향합니다.

 

네가 사라진 날까지 한국에 출간된 작품이 18편이고, 그중 8편을 읽었으니 아직 제대로 된 팬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명성과 필력에 비해 저에게 무척 야박한 평점을 받아온 작가가 할런 코벤입니다. 최근 읽은 작품들은 비교적 호평과 함께 만점에 가까운 평점을 줬지만, 초기에 만났던 작품들에겐 무슨 이유에선지 혹평이나 다름없는 서평을 남겨놓았기 때문입니다. 개정판으로 출간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를 읽은 뒤에도 절감했던 바지만, ‘네가 사라진 날을 읽고 나니 혹평을 남겼던 그 작품들을 꼭 다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할런 코벤의 진가를 뒤늦게 깨달았다고나 할까요?

 

네가 사라진 날은 할런 코벤의 트레이드마크나 다름없는 실종이 또 한 번 매력을 발산한 작품입니다. 이야기는 크게 두 개의 축으로 전개됩니다. 하나는 마약에 중독된 채 끔찍한 살인사건 현장에서 종적을 감춘 큰딸 페이지를 찾으려는 사이먼의 분투이고, 또 하나는 사이비종교단체와 연관 있어 보이는 살인청부사 커플이 도처를 돌아다니며 살인행각을 벌이는 이야기입니다. 전혀 관련 없어 보이던 두 이야기는 사이먼이 사립탐정 엘레나 라미레스를 만나면서 접점을 맞이합니다. 바로 이 지점부터 사이먼의 본격적인 위기가 시작되는데, 동시에 지금까지 전혀 알지 못했던 페이지의 비밀과 비극까지 드러나면서 사이먼에게는 감당하기 힘든 혹독한 시간들이 밀려듭니다.

 

나는 누군가 죽는 이야기보다 사라지는 이야기에 매료되는 편이다. 살인은 사건 해결에 초점을 두지만 실종은 희망을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희망이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것이자, 우리를 산산이 깨부술 만한 거대한 것이다.” (할런 코벤, 출간 인터뷰에서)

 

독자 입장에서 사이먼에게 이입하지 않을 수 없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희망때문입니다. 만약 페이지가 살해당한 상태에서 사이먼이 범인을 찾는 이야기라면 이 이입의 쾌감은 결코 만끽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사이먼은 페이지를 찾는 내내 자책과 절망을 거듭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이지를 집으로 데리고 돌아가겠다는 희망하나로 위험천만한 고비들을 넘곤 합니다. 반면 우리를 산산이 깨부술 만한 거대한 것이라는 표현대로 희망은 순식간에 그 얼굴을 뒤집으며 사이먼을 심연 속으로 집어던질 수도 있는데, 실제로 사이먼은 마지막 페이지에 이르기까지 수시로 희망에게 배신을 당하곤 합니다. 영영 페이지를 찾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절망감은 말할 것도 없고, 그동안 상상조차 하기 힘들었던 가족들의 비밀을 알게 되면서 사이먼의 희망에는 셀 수 없는 균열이 일어납니다.

 

이야기는 긴박하면서도 무자비한 액션 장면과 함께 대미를 장식하지만, 독자는 에필로그에서 또 한 번 뒤통수를 맞을 준비를 해야 됩니다. 그것은 희망이 사이먼에게 가한 가장 큰 배신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사이먼으로 하여금 새로운 형태의 희망을 품게 만드는 채찍질이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책을 덮을 때까지 결코 마음을 놓을 수 없는 반전이 거듭된다는 뜻입니다. 수많은 인물들과 사건들, 복잡하게 얽힌 심리와 감정들, 그리고 놀라움과 함께 애틋한 여운을 품게 하는 반전 어린 엔딩에 이르기까지 할런 코벤이 직조한 정교한 설계도에 감탄하면서 마지막 장을 덮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아직 한국에 소개된 작품의 절반도 못 읽은 상태지만 단언컨대 할런 코벤 최고의 작품이라는 해외언론의 호평에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질 만큼 네가 사라진 날은 매력적인 작품입니다. 조만간 보이 프럼 더 우즈를 읽을 예정인데, 점점 더 그 진가를 맛보게 되는 할런 코벤의 필력을 다시 한 번 만끽할 수 있으리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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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입통제구역 잭 리처 컬렉션
리 차일드 지음, 정세윤 옮김 / 오픈하우스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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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에 탄 노인의 돈봉투를 노리던 한 남자를 제압한 리처는 사채업자에게 시달리는 노인의 딱한 사정을 듣게 된다. 노인이 살고 있는 도시는 우크라이나인과 알바니아인 갱단이 구역을 나눠 지배하고 있는데, 이들이 사채업을 비롯해 여러 불법적인 사업을 운영하면서 시민들의 돈을 갈취하고 있었다. 리처는 노인을 대신해 사채 문제를 해결하려다가 의도치 않게 두 갱단에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사건에 휘말리면서 조직 간에 난투극이 벌어지게 만든다. 이 틈을 타 갱단들을 박살내려던 리처는 갱단을 움직이는 더 큰 세력이 존재함을 알게 되고 코어 집단을 파괴하기 위해 출입통제구역으로 향한다. (출판사 소개글을 일부 수정 후 인용했습니다.)

 

출입통제구역잭 리처 시리즈24번째 작품입니다. 이 시리즈는 제게는 무척 애매한 상태로 남아있습니다. 중고로 구매한 7편을 소장하고 있지만 아직 읽은 적이 없고, 유일하게 읽은 건 우연히(?) 도서관에서 대출했던 나이트 스쿨한 편 뿐입니다. 구매한 작품들을 읽지 않은 건 언젠가 순서대로 시리즈를 읽고 싶은 욕심 때문에 차일피일 미루다 벌어진 사태이고, ‘나이트 스쿨은 어쩌다 보니 대출한 책에 끼어 있어서 우발적으로 읽게 됐을 뿐입니다. 핑계에 불과하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잭 리처 시리즈초기작이 뭉텅이로 한국에 출간되지 않은 것도 읽고 싶은 마음이 덜 들게 만든 이유 중 하나입니다. (현재 한국에는 3~8, 12편 등 모두 일곱 작품이 출간되지 않았습니다.) 원톱 주인공이 이끌어가는 시리즈인데 그의 성장과정중 가장 중요한 부분들을 읽을 수 없다 보니 좀 맥이 빠진다고 할까요?

 

아무튼... 그런 이유 때문에 뜬금없이 읽게 된 출입통제구역은 이야기는 술술 읽히지만 잭 리처가 어떤 사람인지를 파악하기는 여러 가지로 무리인 작품이었습니다. 무엇보다 퇴역 후 미국 전역을 떠도는 잭 리처는 칫솔 하나만 달랑 들고 마음 내키는 곳에 머물며 법의 영역을 벗어난 범죄자들을 모조리 처단한다.”는 시놉시스에서 알 수 있듯 고정 조연들이 없다 보니 더더욱 잭 리처의 과거와 현재를 제대로 맛볼 수 없었습니다. 역시 빠진 작품들이 많더라도 시리즈 첫 편인 추적자부터 차근차근 읽어봐야 할 것 같긴 합니다.

 

줄거리대로 잭 리처는 위기에 처한 노인을 돕는 아주 작은 선행 하나 때문에 거대한 갱단의 살육전에 말려드는 것은 물론 그보다 더 큰 세력과의 목숨을 건 싸움을 시작하게 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육군 헌병대 출신인 잭 리처를 돕는 건 해병대 출신의 드럼연주자와 냉전시대를 겪은 기갑부대 출신의 노인입니다. 갱단에게 끔찍한 일을 당했던 웨이트리스와 재즈 밴드의 리더 역시 잭 리처의 지원군으로 활약합니다.

잭 리처가 갱단의 살육전을 촉발시키는 초반부는 마치 블랙코미디처럼 전개됩니다. 잭 리처의 소행을 상대 갱단의 도발로 여긴 오해들이 차곡차곡 쌓이다가 무자비한 보복전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갱단들이 잭 리처의 존재를 깨달으면서 이야기는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하고 잭 리처는 사악하기 짝이 없는 갱단들과의 전쟁을 냉정하면서도 한 치의 자비심도 없이 벌여나갑니다. 그 와중에 자신에게 선의를 베푼 웨이트리스와 짧지만 강렬한 로맨스도 빠뜨리지 않습니다. 피도 눈물도 없어 보이는 하드보일드 캐릭터지만 나름 할 일은 다 하는 매력적인 잭 리처가 아닐 수 없습니다.

 

팽팽한 긴장감 속에 재미있게 읽긴 했지만 유일하게 읽은 나이트 스쿨과 달리 별 5개를 주지 못한 건 몇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우선 잭 리처에게 도무지 인간미를 찾아볼 수 없었는데 어쩌면 이건 이 시리즈의 가장 고유한 특징일 수도 있기 때문에 읽는 내내 좀 혼란스러웠던 점입니다. 위기의 노인을 구하고 그를 돕는 과정이나 웨이트리스와 로맨스를 벌이는 대목에서도 잭 리처에게서 온기라곤 거의 느낄 수 없었습니다. 마치 비즈니스의 일환처럼 보였다고 할까요? ‘나이트 스쿨의 서평을 다시 찾아보니 딱히 그런 느낌은 없었던 것 같은데 어쩌면 작품에 따라 인간미를 맛볼 수 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또 한 가지 아쉬웠던 건 클라이맥스와 엔딩을 장식한 거대 세력과의 일전입니다. 갱단들 역시 만만치 않은 존재들이었는데 그보다 더 거대한 세력을 등장시켜 잭 리처를 폭주하게 만든 건 왠지 사족처럼 느껴졌습니다. 더구나 우연히 얻은 지원군들이 없었다면 100% 불가능한 작전이었기에 현실감이 많이 떨어지기도 했습니다. 오히려 갱단들과의 전쟁으로 이야기가 끝났다면 훨씬 더 깔끔한 마무리가 됐을 거란 생각입니다.

 

작품 자체보다 엉뚱한 소리가 더 많았던 서평이 되고 말았는데, 쓰다 보니 조만간 잭 리처 시리즈를 순서대로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간절해지고 말았습니다. 분명 매력 넘치는 캐릭터인데 그의 초기 모습부터 제대로 맛보지 않으면 잭 리처는 물론 이 시리즈 자체를 만끽하는 게 불가능할 것 같기 때문입니다. 뭉텅이로 빠진 초창기 작품들이 뒤늦게 한국에 출간될 것 같진 않지만 아쉬운대로 첫 편부터 차근차근 읽어봐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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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포의 밤 안 된다
미치오 슈스케 지음, 김은모 옮김 / 청미래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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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포의 밤은 전작인 절벽의 밤에 이은 이른바 안 된다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입니다. 시리즈 명이 좀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두 편 모두 수록된 단편들의 제목이 하나같이 ‘~해서는 안 된다로 끝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실제로 일본에서도 이 시리즈의 명칭은 いけないシリーズ입니다.

이 시리즈의 가장 큰 특징은 각 단편의 마지막 페이지에 실린 한 장의 사진을 통해 독자 스스로 사건의 진상을 파악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터무니없이 어렵진 않아서 저처럼 둔한 독자라도 대부분 진상을 알아챌 수는 있는데, 두 작품 모두 딱 한 장의 사진은 결국 마지막에 실린 옮긴이의 말의 힘을 빌려야만 했습니다. 혹시 미션에 실패하더라도 이어지는 수록작에 그 진상이 설명되는 경우도 있으니 과도한 스트레스를 받을 일은 없습니다.

 

전작인 절벽의 밤이 자살 명소로 유명한 유미나게 절벽을 배경으로 삼았다면 폭포의 밤은 모란꽃으로 유명한 미고오리 시 주변의 명승지들이 사건의 주 무대로 등장합니다. 그런데 뛰어난 풍광을 자랑하는 그 명승지들의 이름은 불길한 뜻이나 유래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가쿠레이 산에는 죽는다’, 고코 강에는 죽은 뒤 신에게 바쳐지는 공물’, 묘진 폭포에는 저승’, 무쿠로 다리에는 송장이라는 뜻이 담겨있습니다. 그래서인지 기이한 사건들이 연이어 벌어지지만 미스터리는 쉽사리 풀리지 않습니다. 또 주요 인물 대부분이 각 단편에 번갈아 등장한다는 점, 즉 사건은 달라도 이런저런 식으로 얽혀있다는 설정 때문에 미스터리는 더욱 복잡하고 흥미롭게 전개되기도 합니다.

 

수사를 맡은 주인공은 이제 형사과에 배치된 지 1년밖에 안 돼서 처음으로 살인사건과 마주하게 된 신참 구마지마입니다. (실은 구마지마의 형도 형사였는데, 그는 전작인 절벽의 밤에 등장한 바 있습니다.) 피의자 심문조차 처음 겪는 구마지마는 어설픈 초짜의 티를 벗지 못하지만 엄격한 베테랑 형사 도코로의 질책 속에 조금씩 형사로서의 촉을 발휘해나갑니다.

 

묘진 폭포에서 소원을 빌어서는 안 된다

1년 전 묘진 폭포 앞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 언니 히리카의 비밀 SNS 계정을 뒤늦게 발견한 모모카는 언니의 행적을 따라 산에 들어갔다가 산장지기 오쓰키의 도움을 받지만 그의 산장에서 절대 봐서는 안 될 것을 보고 맙니다.

 

머리 없는 남자를 구해서는 안 된다

담력시험을 통해 친구를 놀려주려던 초등학생 신은 은둔형 외톨이로 지내는 삼촌의 도움을 받아 목 없는 인형을 빌려 숲속에 설치하지만 예상치 못한 사고가 벌어진 탓에 패닉 상태에 빠집니다.

 

그 영상을 조사해서는 안 된다

한 노인이 폭력을 휘두르던 아들을 살해하고 시신을 강에 유기했다고 자수합니다. 하지만 시신은 발견되지 않고 노인의 진술은 어딘가 진실을 숨기는 듯한 뉘앙스를 풍깁니다. 가까스로 진상을 담은 영상을 발견하지만 오히려 형사 구마지마의 수사를 혼돈에 빠지게 만듭니다.

 

소원 비는 목소리를 연결해서는 안 된다

숲에서 오래 전 매장된 사체가 발견됩니다. 그리고 이 사체는 앞서 벌어진 세 개의 사건을 한 곳으로 소환합니다. 우연과 필연이 복잡하게 얽힌 가운데 형사 구마지마는 가까스로 모든 진실에 다가가게 됩니다.

 

명확한 사건이 있고 집요한 수사가 이뤄지지만 폭포의 밤은 전작인 절벽의 밤과는 달리 호러의 느낌이 강한 작품입니다. 불길한 이름과 유래를 내포한 자연경관 속에서 벌어지는 참혹한 사건들, 어둡고 음울하기 짝이 없는 주요 등장인물들의 심리, 모든 게 우연 같아 보이지만 실은 어차피 벌어질 수밖에 없어 보이기도 하는 지독한 운명 등 작품 전반을 아우르는 분위기는 호러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또 초반에는 다소 가벼운 서사처럼 읽힐 수도 있지만 페이지를 넘길수록 이야기의 무게와 어둠의 농도가 진해지는 걸 확연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그래선지 사진 속에 담긴 사건의 진상을 직접 알아냈을 때의 쾌감은 여느 미스터리에서는 맛볼 수 없는 색다른 간식처럼 다가오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론 미치오 슈스케가 안 된다 시리즈를 좀더 내줬으면 하는 바람인데, 혹시 나온다고 해도 구상하는 것 자체가 고역일 것 같은 이 시리즈가 몇 년 후에나 신작 소식을 들려줄 지는 쉽게 예상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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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시 20분의 남자 스토리콜렉터 109
데이비드 발다치 지음, 허형은 옮김 / 북로드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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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육군 특수부대 제75레인저연대의 유능한 장교였으나 동료의 죽음으로 인해 제대를 선택한 트래비스 디바인. 월가의 신참 애널리스트로서 투자회사 카울앤드컴리에 근무하며 매일 아침 620분 열차를 타고 출근하던 그에게 발신자 불명의 이메일 한 통이 날아든다. “여자가 죽었어.” 실제로 직장 동료이자 헤어진 연인이 자살한 채 발견되고 디바인은 경찰의 의심을 받는다. 더 큰 문제는 디바인 주위에서 연이어 살인사건이 벌어진다는 점. 그런 그에게 전직 장성인 의문의 남자가 접근해오고, 그는 군 시절의 디바인의 비밀을 폭로하겠다며 카울앤드컴리사에 대한 내밀한 조사에 협조할 것을 강요한다. 디바인은 졸지에 정부기관의 비공식 비밀요원이 되어 자신이 근무하는 회사와 관련된 거대한 음모를 밝혀야 할 입장에 처하고 만다. (출판사 소개글을 일부 수정 후 인용했습니다.)

 

에이머스 데커 시리즈2020진실에 갇힌 남자를 끝으로 3년 동안 소식이 없어 궁금해 하던 차에 북로드에서 데이비드 발다치의 신작을 출간해서 놀랍기도 하고 반갑기도 했습니다. 특히 스탠드얼론이 아니라 미국에서 ‘6:20 Man series’라 이름 붙은 새 시리즈의 첫 작품이라 더 기대가 됐는데, ‘모든 것을 기억하는 남자에이머스 데커에 맞먹는 매력을 지닌 주인공 트래비스 디바인은 데뷔 무대부터 압도적인 육체의 강력함과 명석한 지능’, ‘폭죽처럼 폭발하는 강렬한 액션을 선보이고 있습니다.

 

540여 페이지의 두툼한 분량에 적잖은 등장인물, 서로 연관이 있는지 끝까지 궁금증을 자아내는 두 개의 사건 - 연쇄살인과 국가안보의 위기 - ‘620분의 남자는 출판사 소개글대로 겹겹의 층위를 쌓은 다층구조의 플롯을 지닌 작품입니다. 국가안보를 위협하는 굴지의 투자회사 카울앤드컴리의 가공할 음모를 파헤치는 이야기에서 그쳤다면 이 작품은 평범한 스릴러에 그치고 말았겠지만, 데이비드 발다치는 범인도 동기도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참혹한 연쇄살인사건을 잘 결합시켜 이야기를 입체적으로 꾸며냈습니다. 밀접하게 연관된 것 같기도 하고 전혀 별개인 것 같기도 한 두 개의 사건은 디바인은 물론 독자의 머리를 무척이나 복잡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막판에 밝혀진 의외의 진실은 데이비드 발다치의 설계와 구성이 얼마나 정교하고 빈틈없이 이뤄졌는지를 제대로 실감하게 해줍니다.

 

이 작품의 미덕 중 하나는 곳곳에 배치된 매력적인 조연들인데, 우선 디바인이 머무는 타운하우스의 능력자동거인들은 각각 러시아 출신의 화이트 해커, 변호사 시험을 준비 중인 법대 졸업생, 유망한 스타트업을 이끄는 MIT 출신 재원으로 디바인의 수사에 큰 도움을 주기도 하지만 때론 그 정체를 의심할 수밖에 없는 미스터리한 인물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그리고 매일 아침 620분 열차를 타고 출근할 때마다 디바인이 지켜보곤 했던 대저택의 비키니미셸은 예상치 못한 행보를 거듭하여 독자의 흥미를 자극하는 인물입니다. 대형 스포일러까지는 아니어도 미리 알면 그 재미가 반감되는 인물이라 더 이상 언급은 어렵지만 이 작품의 재미를 배가시키는 존재인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전직 특수부대 장교답게 디바인은 수차례에 걸쳐 위험천만하면서도 카타르시스 만점의 액션 장면을 소화해냅니다. MBA 출신의 명석한 지능까지 겸비한 그의 화려한 액션은 에이머스 데커 시리즈에서는 맛볼 수 없었던 특별한 매력인데, 덕분에 앞으로 이어질 시리즈를 더욱 기대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또한 가족을 잃은 트라우마에 갇힌 에이머스 데커와 마찬가지로 불행한 가족사와 함께 특수부대의 마지막 날들을 악몽으로 간직하고 있는 디바인의 큰 상처 역시 그의 미래를 궁금하게 만드는 요소들입니다. 결코 완치될 수는 없겠지만 그 상처들을 짊어진 채 점점 더 성장해나갈 디바인을 응원하고 싶어지기 때문입니다.

 

미국에서는 시리즈 2편인 ‘The Edge(2023)’까지 출간된 상태입니다. 빠르면 내년쯤엔 만나볼 수 있을 듯 한데, 우선은 곧 한국에 출간될 에이머스 데커 시리즈의 여섯 번째 작품 사선을 걷는 남자를 읽으며 기다려야 할 것 같습니다. 첫 번째 큰 미션을 마친 디바인이 과연 어떤 모습으로 돌아올지, 어떤 고비를 맞이할게 될지 벌써부터 기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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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것이 아닌 잘못
아사쿠라 아키나리 지음, 문지원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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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택건설 대기업의 영업부장인 야마가타 다이스케의 삶이 하루아침에 붕괴되고 맙니다. 한 트위터 계정에 살인자와 피살자가 함께 찍힌 살해 현장 사진이 올라와 파문을 일으켰는데, 10년 전에 만들어진 그 계정의 주인이 바로 다이스케 자신으로 밝혀졌기 때문입니다. 물론 다이스케는 인터넷조차 서투른데다 트위터 계정 같은 건 만든 적도 없습니다. 그날 이후로 마녀사냥의 타깃이 된 다이스케는 경찰과 극렬 유튜버의 추적을 피해 기약 없는 도주길에 오릅니다. 하지만 또 다른 시신이 그의 집 창고에서 발견되면서 다이스케는 그 어떤 변명과 해명도 통하지 않을 거란 사실에 좌절합니다. 결국 그가 선택한 건 직접 진범을 찾는 것. 하지만 자신을 파멸에 이르게 만든 진범을 찾는 과정에서 다이스케는 더 큰 충격에 빠지고 맙니다.

 

교실이, 혼자가 될 때까지’, ‘여섯 명의 거짓말쟁이 대학생에 이어 세 번째로 만난 아사쿠라 아키나리의 작품입니다. 앞선 두 작품이 각각 초능력과 신입사원 공채를 소재로 삼은 이야기들이라 읽을지 말지 무척 고민했던 게 사실인데, 예상외로 흥미롭게 읽었던 터라 이번에는 조금도 주저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출판사 소개글에 따르면 이 작품의 세부 장르는 인터넷 마녀사냥 미스터리 도주극입니다. 옮긴이의 말에 따르면 이 작품은 사회 문제와 본격 미스터리의 완벽한 만남을 그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두 설명 모두 이 작품의 반전의 미덕을 내포하진 못하고 있는데, 그건 아마도 그 반전을 상징하는 단 하나의 단어만 사용해도 초대형 스포일러가 되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도망자 다이스케를 향한 인터넷 마녀사냥이 횡행하는 미스터리도 맞고, 사회 문제를 다룬 미스터리도 맞지만, ‘내 것이 아닌 잘못은 딱히 어떤 장르라고 못 박기 어려운 다채로운 매력을 지닌 작품입니다. 살인, 도주, 마녀사냥, 인터넷범죄, 학대, 복수, 참회 등 여러 가지 소재가 복잡하게 버무려진 이야기라고 할까요?

 

이야기는 도망자 다이스케, 그의 딸 나쓰미, 관할서 형사 호리, 그리고 진범이 올린 트윗을 리트윗하여 폭발적으로 퍼지게 만든 대학생 쇼마 등 여러 사람의 시점으로 나뉘어 전개됩니다. 하루아침에 전 국민에게 지탄받는 연쇄살인마가 된 다이스케가 힘겨운 도주를 거듭하며 겪는 여러 에피소드들 외에도 그의 범죄를 부인하면서도 어딘가 어두운 표정을 숨기지 못하는 가족들, 다이스케의 진범 여부를 놓고 갈등을 벌이는 관할서 형사와 현경 형사, 갑자기 나타난 여대생 때문에 엉겁결에 다이스케 추격전에 나서게 된 대학생 등 여러 인물들의 다이스케를 향한 복잡한 시선과 감정들이 빠른 속도로 펼쳐집니다. 그리고 매 챕터 후반부에 인터넷과 트위터에서 벌어지는 막무가내식 마녀사냥이 적나라하게 소개됩니다.

 

다이스케가 범인이 아니라는 걸 확실하게 아는 건 독자뿐입니다. 당연히 그의 누명 벗기를 간절히 바라게 될 거라 생각했지만, 이야기는 예상외의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하고, 어느 시점인가부터는 진범의 의도는 무엇인가?’, 다이스케가 이런 궁지에 몰릴 수밖에 없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에 더 관심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막판의 한차례 반전을 통해 소개되면서 독자의 뒤통수를 때립니다. 저도 그랬지만, 대부분의 독자는 그 지점에서 책의 앞부분을 허겁지겁 뒤져볼 수밖에 없게 됩니다. 그리고 작가가 얼마나 교묘하게 복선을 깔아놓았는지를 뒤늦게 깨닫게 됩니다.

 

도주극은 빠른 템포에 긴장감과 사실감을 놓치지 않았고, 등장인물들의 복잡한 심리도 세밀하게 잘 묘사됐으며, 반전도 나름 매력적입니다. 하지만 딱히 어디라고 꼬집어 말할 수는 없어도 모든 것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고는 할 수 없는 작품입니다. 중요 인물의 부자연스러운 등장, 감동을 강요하는 듯한 반성과 참회, 누가 봐도 수상한 단서를 애써 무시하는 인물,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주제와 교훈에 대한 강의에 가까운 설파 등 위화감이나 불편함을 일으킨 이유가 여러 가지 있지만 가장 큰 것 하나만 꼽자면 진범의 동기입니다. 마지막에 밝혀진 진범의 동기는 그럴 만 했다라는 생각이 거의 들지 않을 정도로 다소 억지스러웠습니다. 연쇄살인도, 다이스케를 함정에 빠뜨린 일도 필연적이거나 운명적이란 느낌을 받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반전 자체는 놀라웠지만 설득력 없는 진범의 동기 때문에 그 맛이 반감된 게 사실입니다.

 

교실이, 혼자가 될 때까지는 살짝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들었고, ‘여섯 명의 거짓말쟁이 대학생은 여러 번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었다면 내 것이 아닌 잘못은 딱 두 작품의 중간쯤이었다는 생각입니다. 한국에 출간된 아사쿠라 아키나리의 작품 중 누아르 레버넌트‘9번째 18살을 맞이하는 너와는 왠지 취향과 거리가 먼 것 같아 읽지 않았지만, 그의 정통 미스터리가 출간된다면 일단은 찾아 읽으려고 합니다. 아직은 호불호를 확실히 결정하지 못한 상태라 적어도 한 작품 정도는 더 읽어봐야 할 것 같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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