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소리 에를렌뒤르 형사
아날두르 인드리다손 지음, 이기원 옮김 / 영림카디널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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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직전의 호텔 지하실에서 도어맨이 살해된 채 발견된다. 피해자의 신상을 알 수 없어 수사는 처음부터 벽에 부딪힌다. 호텔에서 20년 가까이 일했지만 그가 누구인지 제대로 아는 사람은 없다. 확실한 건 구드라우구르라는 이름뿐, 원한관계나 범행 동기도 눈에 띄지 않는다. 형사반장 에를렌두르는 호텔에 숙박하며 수사를 진행한다. 얼마 후 호텔 직원들 사이의 갈등과 수상쩍은 거래가 드러나고, 구드라우구르를 찾아온 영국 관광객을 통해 피해자의 기구한 어린 시절이 밝혀지기 시작한다. 그는 왜 가족과 수십 년 동안 인연을 끊었을까? 왜 아버지와 누나는 그에게 그토록 적개심을 보이는 걸까? 호텔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졌으며 직원들은 무엇을 숨기고 있는 걸까? (출판사 소개글을 일부 수정 후 인용했습니다.)

 

서울 영등포구와 인구는 거의 비슷하지만(37), 땅덩어리는 무려 4,000배에 달하는 아이슬란드는 말하자면 총기난사나 살인사건 같은 건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조용하고 한적하고 광활한 이미지를 가진 나라입니다. 아날두르 인드리다손은 그런 아이슬란드의 수도 레이캬비크를 주 무대로 한 미스터리 스릴러 형사 에를렌두르 시리즈(2010년까지) 모두 11편 출간한 인기 있는 대중작가입니다. 아무리 조용하고 한적한 나라라고 해도 역시 사람 사는 곳에서는 사건과 사고를 피할 수는 없는 일이고, 미스터리와 스릴러 역시 대중적인 인기를 끌 수밖에 없는 모양입니다.

 

한국에 소개된 아날두르 인드리다손의 작품은 모두 네 편입니다. (인터넷 서점에서는 7편이 검색되는데 그중 목소리를 비롯하여 무덤의 침묵저주받은 피는 각각 개정판이 출간된 탓에 중복 검색됩니다.) 재미있는 건 그의 이름 Arnaldur Indriðason이 아날두르 인드리다손 또는 아르드날뒤르 인드리다손으로 제각각 표기된 점인데, 안 그래도 쉽지 않은 이름이라 더 헷갈릴 수 있습니다. 주인공의 이름 Erlendur도 엘릭시르가 펴낸 작품은 에를렌뒤르, 영림카디널이 펴낸 작품은 에를렌두르로 표기하고 있습니다.

 

시리즈 중 유일하게 읽은 작품은 저체온증인데, 읽은 지 6년이 지났어도 음울하고 냉기가 몰아치던 분위기만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당시 써놓은 서평을 찾아보니 스릴러라기보다 저체온증에 걸린 사람들의 비극에 더 가깝다.”, “어디 한군데 밝은 곳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싸늘한 냉기만 내뿜는”, “에를렌뒤르라는 인물이 평생을 겪어 온 저체온증에 전염된 듯한 느낌등 저의 기억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려주는 문구들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선지 살인사건이 벌어진 호텔에서 태연히 식탐을 부리며 뷔페 음식을 공짜로만끽하는 에를렌두르의 첫 등장 모습은 꽤 의외였습니다. 마치 가볍고 코믹한 경찰소설의 도입부처럼 읽혔는데, 이런 분위기는 얼마 못가 급변합니다. 살해된 도어맨 구드라우구르의 비극적인 과거와 가족사가 밝혀지면서부터 에를렌두르의 평생의 트라우마가 다시 발동하기 때문입니다. 에를렌두르는 어린 시절 8살 동생과 함께 산에 올랐다가 화이트아웃에 휘말린 뒤 자신만 구조되고 동생은 시신조차 발견되지 못한 채 사라지고만 충격적인 사고를 경험한 바 있습니다. 이후 그의 삶은 완전히 붕괴됐고, 결혼생활 역시 순탄치 못하게 마무리된 것은 물론 자식들과도 거의 연을 끊은 채 피폐한 삶을 살아왔습니다. 한참의 시간이 지나 재회한 자식들은 그를 더욱 고통스럽게 만들었습니다. 성장한 딸 에바는 마약 중독에 매춘을 일삼다 유산을 겪었고, 아들 신드리는 알코올중독 상태였습니다. 시체조차 발견 못한 동생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은 그의 일생을 저체온 상태로 밀어 넣은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살해된 도어맨 구드라우구르 역시 에를렌두르 못잖은 참혹한 10대를 보냈습니다. 한때 촉망받는 소년성가대원이었던 그는 일찌감치 찾아온 사춘기와 변성기로 인해 목소리를 잃은 직후 자신은 물론 가족마저 철저하게 붕괴되는 비극을 겪었습니다. 이후 집을 떠나 가족들과 연을 끊은 채 호텔에서의 밑바닥 삶을 살아왔고 누군가에게 잔혹하게 살해당한 채 발견된 것입니다. 에를렌두르는 형사반장으로서 냉정하게 수사를 지휘하면서도 구드라우구르의 삶을 자신의 그것과 자꾸만 비교해가며 끝없는 우울감에 빠집니다. 크리스마스를 함께 보내기 위해 찾아온 딸 에바는 급격한 감정 변화를 보이며 안 그래도 힘든 에를렌두르를 더욱 궁지에 몰아넣습니다. ‘저체온증에 썼던 서평과 마찬가지로 에를렌뒤르라는 인물이 평생을 겪어 온 저체온증에 전염된 듯한 느낌을 이번에도 피할 수 없었는데, 역설적이긴 하지만 이 시리즈의 가장 큰 미덕이자 매력은 바로 이 에를렌두르의 트라우마입니다. 아직 안 읽은 작품들은 물론 한국에 소개되지 않은 작품들도 대략 비슷한 서사가 아닐까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살해된 도어맨 구드라우구르 외에도 이 작품에는 에를렌두르와 비슷한 고통을 겪은, 그러니까 가족의 붕괴나 반목 혹은 상실을 겪은 인물들이 여럿 등장합니다. 무엇보다 가족에게 어린 시절을 빼앗기고 만 인물들이 다수 등장합니다. 때론 누가 범인?’보다도 그 인물들의 행로가 더 눈길을 끌기도 합니다. ‘저체온증에 비하면 책 읽기 자체는 비교적 덜 고통스럽고 덜 힘들었지만 역시 내가 가장 관심 있는 인물은 상실을 맞닥뜨린 사람들, 시간 속에 얼어붙어버린 사람들.”이라는 아날두르 인드리다손 본인의 변대로 목소리는 흥미진진한 미스터리 스릴러이자 가족으로 인한 거대한 트라우마를 정면으로 그린 비극 서사입니다. 편하게 페이지를 넘길 수는 없지만 아이슬랜드의 혹독한 추위를 체감하면서 묵직하고 깊은 여운을 맛볼 수 있는 작품이란 생각입니다.

 

형사 에를렌두르 시리즈

01 Synir duftsins (Sons of The Dust, 1997)

02 Dauðarósir (Silent Kill, 1998)

03 Mýrin (Jar City, 2000, 한국 출간 저주받은 피’)

04 Grafarþögn (Silence of the Grave, 2001, 한국 출간 무덤의 침묵)

05 Röddin (Voices, 2003, 한국 출간 목소리’)

06 Kleifarvatn (The Draining Lake, 2004)

07 Vetrarborgin (Arctic Chill, 2005)

08 Harðskafi (Hypothermia, 2007, 한국 출간 저체온증’)

09 Myrká (Outrage, 2008)

10 Svörtuloft (Black Skies, 2009)

11 Furðustrandir (Strange Shores,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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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운
티파니 D. 잭슨 지음, 김하현 옮김 / 한겨레출판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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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살 인챈티드 존스는 실력 있는 가수 지망생이자 수영 선수다. 맏언니로서 책임감 있게 동생들을 돌보며, 흑인이란 이유로 억측의 대상이 되지 않기 위해 백인이 대부분인 학교에서 모범적으로 생활한다. 전설적인 R&B 가수 코리 필즈는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인챈티드를 유망주로 점찍고, 그녀는 코리와 투어를 떠나면서 가수로서 성공할 기회를 잡는다. 하지만 코리는 꿈과 사랑을 미끼삼아 그녀를 정신적으로 지배해 성적인 착취와 폭력을 일삼는다. 코리가 의문의 죽음을 맞이하자 인챈티드는 유력한 살인 용의자가 된다. (출판사 소개글을 인용했습니다.)

 

이 작품에 관심을 갖게 된 건 어른들의 세상이 나를 널빤지 아래로 떠밀어 악어들의 먹잇감으로 만들었다.”(본문 속 한 줄이자) 홍보 카피와 흑인소녀가 그려진 표지 때문입니다. 인종차별과 성차별에 관한 묵직한 서사일 거라고 예상하고 읽기 시작했는데, 본문이 시작되기 전 일러두기경고 : 성적 학대와 강간, 폭행, 아동학대, 납치, 마약중독이 언급됩니다.”라는 문구를 보곤 그 이상의 불편하고 고통스러운 이야기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노래에 대한 진심 어린 사랑, 세계적인 가수가 되고 싶은 순수하고 뜨거운 열망, 17살에 어울리는 폭발적인 에너지와 적당한 반항심, 그리고 자신에게 찾아온 믿을 수 없는 행운과 사랑에의 흥분 등 인챈티드 존스의 17살은 눈부심 그 자체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꿈을 현실로 만들어줄 신과도 같은 존재이자 영원히 함께 하고 싶을 정도로 몸과 마음을 들뜨게 만들었던 R&B 가수 코리 필즈로 인해 인챈티드의 17살은 참혹하게 무너지고 맙니다. “가해자가 피해자와 친밀한 관계를 맺고 신뢰를 얻은 뒤 행해지며 피해자를 길들이고 가스라이팅을 일삼아 피해자의 정신상태를 지배하는 범죄인 그루밍 성폭력이 인챈티드를 망가뜨렸던 것입니다.

 

이야기는 경찰이 문을 두드리는 가운데 인챈티드와 코리가 온통 피범벅이 된 공간에 쓰러져있는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그리고 과거로 되돌아가 인챈티드의 에너지 넘치던 시절과 오디션장에서 코리를 만나게 된 사연을 소개합니다. 분명 암울하고 고통스러운 이야기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작가가 그려낸 인챈티드의 빛나던 시절은 부디 이 이야기가 아무런 굴곡도 없는 행복한 성장소설로 마무리되기를 바라게 만듭니다. 속도감 넘치는 짧은 챕터와 짧은 문장들은 바닷가에서 성장하며 물과 노래를 사랑하게 됐던 인챈티드의 밝고 통통 튀는 캐릭터를 더욱 싱그럽게 만들었고, 10대다운 반항심과 미국사회에서 가장 무시당하는 계층이라는 흑인여성이라는 핸디캡을 갖고 있지만 언니로서, 딸로서, 학생으로서 나름의 방식으로 세상과 당당하게 마주하며 긍정적인 삶을 살고 있는 인챈티드를 더욱 사랑스럽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인챈티드가 악어들의 먹잇감으로 전락하여 그루밍 성폭력의 피해자가 되는 과정은 눈부시게 그려진 그녀의 빛나던 시절 때문에 더욱 고통스럽게 읽힙니다. 스스로 피해자임을 인지하지 못한 채 여전히 꿈과 사랑을 믿으며 폭력의 고리 안에 머물고 마는 인챈티드는 가스라이팅을 통한 그루밍 성폭력이 얼마나 잔인하게 한 사람의 인격을 파괴하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또한 흑인여성이 입은 피해를 보듬기는커녕 거꾸로 외면하고 의심하는 대중과 언론과 경찰의 행태는 인종차별과 성차별이 그루밍 성폭력과 결합됐을 때 얼마나 더 끔찍한 상황을 만들 수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인챈티드가 코리를 살해한 용의자로 지목된 상태에서 진행되는 심문기록은 정말 할 말을 잃게 만들기도 합니다.

 

작가는 이 작품이 조종당한 소녀들을 향한 노골적인 비판에 관한, 죄를 저지른 장본인에게 책임을 묻는 일에 관한, 피해자들이 용기를 낸 순간에 그들을 보호하고 도와야 함에도 절대 그들의 말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 관한, 세상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려 애쓰는 소녀들에 관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피해자가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일은 그 입장이 돼본 적 없는 사람으로선 상상하기 힘들 만큼 용기가 필요한 일입니다. 피해자라면 딛고 일어설 용기를, 그동안 방관자였다면 한걸음 다가갈 용기를 17살 인챈티드의 이야기를 통해 얻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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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것이 오지 않기를
아시자와 요 지음, 김은모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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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간절히 원하지만 정작 남편은 불륜 중이고, 조산원의 간호조무사로 일하지만 성취감도 보람도 느끼지 못하며 힘든 날들을 보내고 있는 이하라 사에. 그리고 어려서부터 엄마의 지독한 통제와 간섭에 큰 상처를 입은 탓에 혼전 임신으로 낳은 딸을 소중히 키워온 가시와기 나쓰코. 두 사람의 관계는 절친 이상의 특별함을 갖고 있습니다. 마치 서로가 서로에게 전부인 것처럼 힘들 때나 기쁠 때나 늘 함께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불륜을 저지르고 있던 사에의 남편 다이시가 실종되면서 두 사람의 관계는 조금씩 일그러지기 시작합니다.

 

이 작품까지 한국에 출간된 7편 중 6편을 읽었을 정도로 아시자와 요는 저의 관심작가 중 한 명입니다. 출판사 소개글에는 이야미스(인간의 어두운 심리를 교묘하게 파헤쳐 불편한 여운을 남기는 작품)의 대표 작가라고 돼있는데, 개인적으론 정통 이야미스와는 살짝 결이 다른, 애틋하면서도 씁쓸한 여운이 더 인상적인 작가라는 생각입니다. 또 작품마다 다양한 스타일과 개성을 지니고 있어서 특정 장르만 추구한다고 단정 짓기 어려운 작가이기도 합니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는이 독특한 연작 괴담집이라면, ‘죄의 여백은 학교폭력과 복수의 문제를 다루고 있고, ‘용서는 바라지 않습니다는 일상에 깃든 농도 짙은 공포를 소재로 한 단편집입니다. 그런 아시자와 요가 이번에는 가족, 여성, 모성, 부부 등 가장 가깝지만 한없이 먼 존재가 될 수도 있는 관계를 소재로 지독한 심리극이자 반전 미스터리를 선보였습니다.

 

이야기는 사에와 나쓰코 두 사람의 시점에서 번갈아 전개됩니다. 남편이 회사동료와 불륜 중인 걸 알면서도 모르는 척 외면하며 오로지 아이를 갖는 일에만 몰두하는 사에에겐 오직 나쓰코만이 유일한 안식처이자 탈출구입니다. 다른 여자들의 임신과 출산을 돕는 조산원의 간호조무사라는 직업은 아이를 갖지 못하는 사에에게는 아이러니한 현실이자 고된 노동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사에는 나쓰코와 함께 시간을 보낼 때만이 마음의 평화를 얻습니다. 반면 엄마의 강압적인 통제와 지배에 질린 채 성장한 나쓰코는 혼전 임신으로 낳은 딸을 위해 이 아이의 앞길에 행복만 있기를. 나쁜 것이 오지 않기를.”이라고 기원하는 간절한 엄마이자 늘 자신에게 기대어 오는 사에에게 기꺼이 따뜻한 위로와 휴식을 제공하는 넉넉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누구도 방해하지 못할 것 같던 두 사람의 관계는 사에의 남편 다이시의 실종으로 인해 파국으로 치닫습니다. 미스터리의 출발점인 이 사건은 대략 1/3 지점에서 일어납니다. 나머지 2/3는 사건을 대하는 사에와 나쓰코 두 사람의 불안과 공포와 의심, 그리고 막판 반전과 함께 밝혀지는 사건 이면의 진실과 진범의 정체 등으로 채워집니다.

 

사실 눈썰미 있는 독자라면 중반부쯤 이 작품의 반전 중 한 가지는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작가의 의도인지는 몰라도 살짝 위화감이 드는 대목들이 수시로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반전을 눈치 챈다 하더라도 나머지 내용들이 예상대로만 전개되는 것은 아닙니다. 또 이 작품은 미스터리 자체보다 인물들의 일그러지고 고통스러운 심리와 관계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서 누가, , 어떻게등은 그다지 큰 의미가 없어 보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야미스까지는 아니지만) 불편하면서도 애틋하고 씁쓸한 여운을 남기곤 하는 아시자와 요 특유의 미덕이 잘 살아있는 작품이라고 할까요?

 

다만, 이런 구조의 작품을 여러 편 읽은 탓에 신선함을 만끽할 수 없었다는 점, 매번 새로운 스타일을 선보여 온 아시자와 요가 이제는 다소 상투적이라 할 수도 있는 이야기를 내세운 점은 아쉽게 느껴졌습니다. 물론 같은 소재나 주제라도 다루는 방식에 따라 전혀 새롭게 보일 수도 있긴 하지만 나쁜 것이 오지 않기를은 왠지 익숙한 이야기의 재탕이라는 인상을 피하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다른 작가의 작품이었다면 그냥 넘어갈 수도 있었겠지만, 워낙 좋아하는 작가이다 보니 조금은 더 아쉽고 서운하게 느껴졌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아시자와 요를 이 작품으로 처음 만나서 저와 비슷한 아쉬움을 느낀 독자라면 색다른 괴담과 공포를 맛볼 수 있는 매력적인 단편집 아니 땐 굴뚝에 연기는용서는 바라지 않습니다를 읽어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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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사냥 스토리콜렉터 108
크리스 카터 지음, 서효령 옮김 / 북로드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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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 분야의 명문 스탠퍼드 대학교에서 범죄심리학을 전공한 두 명의 천재, 로버트 헌터와 루시엔 폴터. 룸메이트이자 가장 친한 친구로 지내며 라이벌로서 함께 수학했던 두 사람은 세월이 흐른 뒤에 적이 되어 재회한다. 한 명은 로스앤젤레스 경찰국(LAPD)의 강력계 형사로, 또 한 명은 역사상 가장 위험한 연쇄살인범으로. 그러나 헌터와의 맞대결에서 패배해 3년 반 동안 감옥에 갇혀 있던 루시엔은 자신의 오랜 복수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로 결심하고, 마침내 잔혹한 살인과 함께 세상으로 탈주한다. 그리고 무고한 시민의 목숨을 볼모로 다시 한 번, 자기가 설계한 살인 게임에 헌터를 끌어들이는데... (출판사 소개글을 인용했습니다.)

 

악의 사냥2022년에 출간된 악의 심장의 후속편으로, 희대의 연쇄살인마인 루시엔 폴터가 3년 반 만에 탈옥한 뒤 저지르는 끔찍한 연쇄살인과 그를 쫓는 LAPD 특수강력범죄수사대 로버트 헌터의 고통스런 여정을 그린 작품입니다. 대학시절부터의 두 사람의 오랜 악연은 악의 사냥에서도 꽤 상세히 소개되고 있지만, 이 작품을 제대로 만끽하려면 전작인 악의 심장을 먼저 읽을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악의 사냥은 두 사람 사이의 개인적인 대결, 즉 헌터를 겨냥한 루시엔의 복수를 그리고 있기 때문에 예전의 사연을 모르면 아무래도 제 맛을 즐기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물론 순서를 뒤바꿔 읽어도 괜찮긴 합니다. 그럴 경우 악의 심장은 프리퀄이 되겠죠.)

 

루시엔은 지금까지 픽션에서 접한 그 어떤 연쇄살인마와도 비교 자체가 불가능한 역대급 사이코패스입니다. 충동을 통제하지 못하고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살인을 저지르는 일반 사이코패스와는 전혀 다른 면모를 지니고 있는데, 우선 족히 수백 명에 이를 것으로 보이는 그의 희생자들은 모두 다른 방법으로 살해된 탓에 3년 반 전 루시엔이 우연한 사고로 체포되기까지 그 어느 수사기관도 그가 저지른 수많은 살인 가운데 동일범의 소행으로 여긴 건이 하나도 없습니다. 또한 희생자를 고르는 단계부터 범행 실행과정은 물론 범행 후에 느낀 감정들까지 꼼꼼하게 기록해놓은 53권의 백과사전은 그가 체포된 뒤 FBI의 필수교재가 될 정도로 그야말로 사이코패스의 모든 것이 담겨있는 악마의 경전입니다.

 

나는 학자야. 사이코패스를 연구하는 사이코패스야 그들의 수법, 속임수, 사고방식, 행동... 모든 걸 연구해. (중략) 나는 죽이고 싶어서 죽이는 것이기 때문에 통제 불가한 내적 충동에 이끌리는 법이 없어. , 내 행동의 모든 게 계획적이라는 뜻이지.” (p268)

 

루시엔에 맞서는 LAPD 특수강력범죄수사대 로버트 헌터는 월반을 거듭한 끝에 16살에 대학에 들어갔고 그가 23살에 쓴 박사학위 논문은 FBI의 필독서가 될 정도로 뛰어난 범죄심리 전문가입니다. FBI의 삼고초려에도 불구하고 LAPD의 강력계에서 일해 온 그는 특별히 잔혹하고 가학적인 살인사건과 연쇄살인의 수사를 위해 LAPD가 창설한 특수강력범죄수사대의 팀장에 올랐는데, 바로 그 시점에 20여 년 전 대학에서 악연을 맺은 루시엔과 조우하게 됩니다. 그리고 3년 반 전 가까스로 그를 체포해 영어의 몸이 되게 만든 장본인입니다.

 

악의 사냥3년 반 만에 탈옥에 성공한 루시엔이 헌터를 상대로 벌이는 게임이자 복수극을 그립니다. 루시엔은 철저한 계획에 의거하여 그가 지금까지 시도한 적 없는 엄청난 살육극을 벌이는 것과 함께 헌터를 돌아올 수 없는 지옥으로 보내기 위해 전력을 다합니다. 만일 루시엔의 목표가 헌터를 죽이는 것이라면 진작 수백 번은 죽이고도 남았겠지만, 그는 고도의 범죄심리 전문가답게 헌터를 죽이지 않고도 죽이는방법을 택합니다. “영혼을 비운 다음 오로지 고통으로만 그 빈 곳을 다시 채우는, 즉 가장 사랑하는 것을 빼앗는방식으로 헌터를 벼랑 끝으로 몰고 갑니다.

 

내 계획은 네 삶과 항상 함께할 죄책감을 네 안에 불어넣는 거였어. 내면에서부터 너를 집어삼킬 죄책감, 네가 절대 없앨 수 없고 죽는 날까지 짊어지고 가야 할 죄책감.” (p468)

 

악의 심장이 쉴 틈 없이 벌어지는 잔혹한 연쇄살인 때문에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았다면 악의 사냥은 고도의 심리전에 어울리는 비교적 느리고 완만한 서사를 통해 으스스한 긴장감을 최대치로 끌어올립니다. 가끔 뭘 이런 것까지 이렇게 상세하게 묘사하나?”라는 의문이 들 때도 있지만, 다 읽고 돌이켜보면 실은 그런 디테일들이야말로 루시엔과 헌터의 대결을 짜릿하고 팽팽하게 만드는 기초들임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또 사건 자체는 몇 가지 없지만 5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을 순식간에 읽어낼 수 있는 것 역시 이런 디테일의 힘이라는 생각입니다.

 

후반부에 로버트 헌터 시리즈전체 목록이 소개됩니다. 모두 12편이 출간됐는데, ‘악의 심장6편이고 악의 사냥10편입니다. 개인적인 바람이라면 북로드에서 시리즈 전체를 순서대로 출간해줬으면 하는 건데, ‘악의 심장악의 사냥이 호응을 얻는다면 조만간 헌터의 맹활약을 만끽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봅니다. (사족이지만, 두 편 모두 잔인한 묘사가 꽤 심한 편이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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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가 이와 같이 아뢰옵니다 미야베 월드 2막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소연 옮김 / 북스피어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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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가 이와 같이 아뢰옵니다는 에도시대의 괴담을 다루는 미야베 월드 2중에서도 가장 편수가 많은 미시마야 변조 괴담 시리즈의 여덟 번째 작품입니다.

 

에도 간다 미시마초에 있는 주머니 가게 미시마야는 흑백의 방이라는 객실에 손님을 초대하여 조금 특이한 괴담 자리를 마련해왔다. 이야기꾼이 한 명에, 듣는 이도 한 명. 하는 이야기는 하나뿐. (중략) 그 자리의 이야기는 그 자리에만 그치고, 이야기꾼은 이야기를 하여 무거운 짐을 내려놓는다. 듣는 이는 받아든 무거운 짐을 흑백의 방에서만 듣고 잊는다.” (p 9)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 이야기, 너무나 고통스럽거나 무서워서 누군가에게라도 털어놓고 싶은 이야기 등 흑백의 방을 찾은 화자들의 사연은 듣는 것조차 사뭇 힘들고 괴로운 내용들입니다. “이야기하고 버리고, 듣고 버리고.”라는 흑백의 방의 원칙은 이런 이유에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화자는 이야기함으로써 고통과 번뇌를 버릴 수 있고, 청자(聽者)는 들어주긴 하지만 그것을 흑백의 방 밖으로 흘리지 않고 그대로 버릴 뿐입니다.

 

이 특이한 괴담 자리는 애초 이 시리즈의 첫 번째 주인공인 17세 소녀 오치카를 위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괴로운 기억을 품은 채 고향을 떠나 친척의 가게인 미시마야에 머물게 된 오치카는 이 세상의 온갖 기구하고 이상한 이야기를 들으며, 상처 입은 마음을 봉합하고 그 흔적을 안고도 일어설 수 있는 힘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시리즈 여섯 번째 작품인 눈물점부터는 미시마야의 차남이자 오치카의 사촌인 도미지로가 청자의 자리를 이어받았습니다. 청자이자 주인공으로서 세 번째 작품을 맞이했지만 도미지로는 여전히 어리숙하고 순진할 뿐입니다. 더구나 이번 수록작 세 편 모두 간담이 서늘해지는 이야기들이라 도미지로는 때론 대놓고 놀라거나 화자 앞에서 구토를 하는 등 숙맥 같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사위와 등에

저주에 걸린 누나를 구하려다 그 자신이 저주에 걸려 오직 신들만이 출입할 수 있는 노름의 마을에 끌려간 11살 소년 모치타로는 언젠가 현세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고 고용일꾼처럼 부지런히 일을 하지만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끔찍한 파국뿐입니다. 그날 이후로 모치타로는 웃는 방법을 잃은 채 고통스러운 나날을 살아왔습니다.

 

질냄비 각시

거친 강물을 오가는 나룻배 선장인 기요마루와 누이동생 오토비는 어디서 나타난 건지 알 수 없는 질냄비로 인해 운명이 뒤바뀌고 맙니다. 그 질냄비 안에는 상상도 못할 기이한 것이 들어있었기 때문입니다.

 

삼가 이와 같이 아뢰옵니다

입동 아침, 연못에서 건져 올린 시체가 되살아나 인간을 공격하기 시작합니다. 시체의 공격을 받은 인간은 시체와 똑같이 괴물이 돼버립니다. 17살 소년 신고는 마을사람들과 함께 인간이 아닌 자들과 대적합니다. 하지만 기괴한 현상들이 벌어지고 무수한 인간이 아닌 자들이 나타나자 큰 위기에 빠지고 맙니다.

 

주사위와 등에는 스토리는 전혀 다르지만 미야베 월드 2미인또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연상시킬 만큼 화려한 색감과 이세계 시공간을 맛볼 수 있는 작품입니다. ‘질냄비 각시는 전형적인 괴담이지만 거친 강물과 그곳을 관장하는 수신(水神)의 마력이 눈길을 끄는 작품입니다. 표제작인 삼가 이와 같이 아뢰옵니다는 줄거리에서 알 수 있듯 미야베 미유키 표 좀비물입니다. ‘미야베 월드 2외딴집괴수전이 저절로 생각나는 작품이기도 한데, 스케일이나 여운 등 모든 면에서 두 작품에 결코 뒤지지 않습니다. 또한 괴물과 나쁜 정치는 사람의 목숨을 뿌리째 베어내는 것으로는 똑같은 해악이다.”라는 작품 속 한 줄에서 감지할 수 있듯 흥미로운 사회파 호러물이기도 합니다. (그래선지 다분히 후쿠시마 오염수를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이는 다음 편에는 오염된 바다를 그린 사회파 호러를 기대하며라는 삼송 김사장 님의 편집자 후기는 시원한 사이다처럼 읽혔습니다.)

 

미야베 월드 2은 저의 최애 시리즈 중 하나입니다. 그중에서도 미시마야 변조 괴담은 각별한 애정을 품고 있는데, “다음 작품인 9권이 일본에서 예약판매 중이라 2024년 봄쯤에는 한국에서도 만날 수 있다.”라는 편집자 후기를 보니 벌써부터 마음이 들뜰 따름입니다. 아홉 번째 작품에선 미시마야에 여러 가지 변화가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첫 청자였던 오치카의 출산, 오랜 시간 집을 나가있던 장남 이이치로의 복귀, 차남이자 현재 청자인 도미지로의 신상 등 미시먀야 전반에 크고 중요한 일들이 많이 벌어질 게 분명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와중에 과연 어떤 괴담들이 흑백의 방을 서늘하게 만들지, 그 괴담들이 미시마야의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기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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