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르는 사람들 스토리콜렉터 107
마이크 오머 지음, 김지선 옮김 / 북로드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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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경찰 최고의 인질협상가인 39세의 애비 멀린은 어느 날 아들이 납치됐다며 도와달라는 한 여자의 다급한 전화를 받습니다. 그리고 이내 그녀가 30여 년 전 사이비 종교집단에서 함께 지내다가 대규모 참사에서 자신과 더불어 가까스로 살아남았던 이든 플레처임을 알곤 깜짝 놀랍니다. 과거의 트라우마에서 자유롭지 못한 애비는 당시를 떠올리게 만드는 이든이 불편하지만 어쩔 수 없이 무거운 마음으로 그녀의 아들 네이선 납치 사건에 뛰어듭니다. 그리고 이 사건의 배후에 심상치 않은 사이비 종교집단이 존재한다는 걸 알곤 더욱 긴장합니다. 얼마 후 애비는 납치범이 이든의 딸이자 SNS 인플루언서인 개브리엘에게 집착하고 있음을 눈치 챕니다. 일반적인 납치와는 다른 행태를 보이는 범인 때문에 애비가 궁지에 몰린 무렵, 다른 지역에서 발생한 끔찍한 살인 현장에서 네이선의 흔적이 발견되어 애비를 큰 충격에 빠뜨립니다.

 

2020년 한국에 소개된 두 편의 조이 벤틀리 시리즈’(‘살인자의 사랑법’, ‘살인자의 동영상’)를 읽고 마이크 오머의 팬이 됐지만 2년 넘게 후속작 소식이 없어서 아쉬워하던 차에 인질협상가 애비 멀린을 앞세운 새로운 시리즈가 출간돼서 다소 의외였습니다. 검색해보니 조이 벤틀리 시리즈3편인 ‘Thicker Than Blood’에서 종료됐고, 이후 애비 멀린 시리즈2022년까지 모두 세 편이 출간된 상태입니다. 어쩌면 애비 멀린 시리즈역시 3편에서 종료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앞선 시리즈의 주인공 조이 벤틀리가 돌직구 스타일의 범죄심리학자라는 캐릭터 때문에 매력적이었다면 새로운 주인공 애비 멀린은 언론에도 여러 차례 노출될 정도로 유능한 인질협상가이자 골칫덩이 남매 때문에 고달픈 싱글맘이자 30여 년 전 사이비 종교집단에서 성장하다가 죽음의 위기를 가까스로 벗어났던 다채로운 이력의 소유자라 단번에 눈길을 사로잡았습니다. 특히 애비가 맡은 사건의 배후에 신흥 사이비 종교집단이 자리 잡고 있어서 아직도 과거의 트라우마에서 자유롭지 못한 그녀가 어떤 태도로 사건을 대할지 궁금증을 증폭시킵니다. 또한 충성도 높은 추종자를 거느렸다는 점에서 사이비 교주와 일면 닮은꼴이라 할 수 있는 SNS 인플루언서의 이야기가 병행되어 더욱 흥미를 자아내고 있습니다. “가장 위험하고 치명적인 두 우상(사이비교주, SNS 인플루언서)과 그들의 맹종자들(추종자, 팔로어) 사이에 놓인 어둠의 미로라는 출판사 소개글은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입니다.

 

조이 벤틀리와 마찬가지로 애비 역시 형사가 아닌데다 인질협상가라는 캐릭터를 부여받은 탓에 그녀의 주된 활약은 을 통해 발휘되는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애비는 파트너인 뉴욕경찰청 형사 조너선 카버와 함께 형사 못잖은 활약을 펼칩니다. 탐문은 물론 필요할 때는 고글과 글록을 휴대하고 적진에 뛰어들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상대방의 심리를 정확히 꿰뚫은 뒤 적절하고 신속한 상황 판단을 해야 하는 인질협상가의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합니다. 말하자면 추리도 잘 하고, 행동도 민첩하고, 협상까지 잘 하는 완벽한 주인공입니다.

 

살인사건이 등장하긴 하지만 소년 납치사건이 중심이다 보니 여러 명의 참혹한 희생자가 발생했던 조이 벤틀리 시리즈에 비해 사건성은 다소 약합니다. 또한 30여 년 전 애비가 사이비 종교집단에서 겪었던 과거사도 적잖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고, 10대 남매를 키우는 고달픈 싱글맘 사연까지 심심찮게 등장해서 마이크 오머 특유의 잔혹한 스릴러를 기대했던 독자라면 조금은 싱겁게 읽힐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제대로 맛볼 수 없는 인질협상가의 고뇌와 결단과 고도의 심리전은 이 작품의 가장 큰 미덕이며, 그런 면에서 조이 벤틀리 시리즈와는 사뭇 결이 다른 재미를 만끽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슈퍼 히로인이 아니면서도 캐릭터의 힘을 최대치로 발휘하는 애비 멀린의 매력은 이 작품의 거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압권입니다.

 

이야기는 예상치 못한 떡밥을 남겨놓은 채 마무리됩니다. 그 떡밥이 애비의 과거 트라우마와 연결된 것인지 아니면 새로운 사건을 위한 교두보 역할을 할 것인지는 후속작이 나와 봐야 알 수 있겠지만, 어쨌든 벌써부터 출간소식이 기다려지는 건 저만의 기대는 아닐 것입니다. 다만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한국에 출간되지 않은 조이 벤틀리 시리즈의 마지막 작품 ‘Thicker Than Blood’도 꼭 출간됐으면 하는 점입니다. 피해자의 피를 마시는 무자비한 소시오패스가 등장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 그를 상대하는 조이의 마지막 활약은 꼭 지켜보고 싶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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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소리를 듣다
우사미 마코토 지음, 이연승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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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둔형 외톨이인 19세 소년 류타는 어느 날 자기 눈앞에서 손목을 그은 소녀 유리코와의 인연 덕분에 고교 야간부에 입학합니다. 류타는 또래인 다이고와 가까워지고, 그가 숙식을 해결하며 아르바이트를 하는 재활용품점 겸 심부름센터 달나라에 드나듭니다. 다이고를 고용한 사장 할머니는 고집쟁이에 안하무인이지만 류타는 달나라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다이고와 친해지고 조금씩 은둔형 외톨이의 틀을 벗어나기 시작합니다. 또한 달나라에 의뢰 들어온 괴팍한 사건들을 해결하기도 하는데, 그러던 중 11년 전에 벌어진 참혹한 가족 몰살사건과 연결되고 맙니다. 당시 유일하게 살아남은 소년, 용의자로 몰렸다가 자살하고 만 한 남자의 어머니, 그리고 사건을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다는 자책에 빠져있는 경찰을 지켜보며 류타는 이제는 아무런 단서도 남아있지 않은 오래 전 사건에 점점 더 빠져들기 시작합니다.

 

연작단편집 소녀들은 밤을 걷는다로 처음 만나 홀딱 빠진 뒤로 어리석은 자의 독’, ‘전망탑의 라푼젤’, 그리고 밤의 소리를 듣다까지 한국에 출간된 우사미 마코토의 작품은 모두 읽었습니다. 정통 미스터리는 아니지만 어둡고 불길하면서도 애틋함이 녹아있는 독특한 분위기와 매력적인 서사 때문에 매번 긴 여운을 느끼며 책장을 덮곤 했습니다. 하지만 밤의 소리를 듣다는 기대했던 우사미 마코토 특유의 맛을 제대로만끽하지 못한 탓에 처음으로 평점에서 별 1개를 빼게 됐습니다. 고백하자면, 중반쯤을 지날 땐 우사미 마코토 작품에 별 3개를 줄 수밖에 없는 건가?”라는 불안함까지 들었던 게 사실인데, 중반 이후에야 기대했던 분위기와 서사가 펼쳐지면서 그야말로 최악의 사태(?)는 모면할 수 있었습니다.

 

일단 시작은 역시 우사미 마코토!”라고 할 만큼 매력적입니다. 나이에 비해 지나치게 똑똑한데다 어릴 때 어머니를 잃은 트라우마 때문에 죽음에 너무 친숙해져 버린 은둔형 외톨이 류타가 습관성 리스트 커터’, 즉 수시로 손목을 긋는 여학생 유리코와 대면하는 장면은 우사미 마코토 특유의 분위기가 진하게 배어 있어서 이후 전개될 이야기에 대한 기대감을 한껏 고조시켰습니다.

하지만 유리코에 이끌려 자신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고교 야간부에 들어간 뒤로 류타의 행보는 그저 그런 일상 미스터리속 캐릭터가 되고 맙니다. 또한 자신과는 정반대의 캐릭터인 다이고와 친해지고 달나라에서 소소한 미스터리들을 해결하면서 그동안 어리석게 살아온 자신을 반성하는 전형적인 청소년 성장물의 주인공으로도 보입니다. 사실 이 지점을 읽을 때가 제일 힘들었는데, ‘그저 그런 일상 미스터리들이 중반 이후에 펼쳐질 류타의 진짜 미션, 11년 전 가족 몰살사건 해결을 위한 필수적인 재료들로 밝혀지긴 하지만, 우사미 마코토를 처음 만난 독자라면 그녀의 진면목을 오해할 수밖에 없는 대목이라 무척 아쉽게 느껴졌습니다.

 

아무튼... 11년 전 사건이 본격적으로 전개되면서 우사미 마코토는 자신의 장점과 개성을 유감없이 드러냅니다. 운명, 악연, 악의, 회한, 죽음 등 인간의 의지만으로는 피할 수 없는 어둡고 무거운 주제들을 류타와 여러 조연들을 통해 진하고 농밀하게 그립니다. 그리고 자신만의 밤의 소리에 사로잡혀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온 여러 인물들의 감정에 깊이 몰입하게 만듭니다. “인간 내면의 어둠을 교묘하게 드러내는 재주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다.”라는 출판사 소개글이 결코 과장이 아님은 바로 이 지점부터 공감할 수 있게 됩니다. 다만 미스터리의 클라이맥스가 다소 설명적인 점이 아쉽긴 했지만, 그 대목에서 독자의 관심은 누가 범인?”보다는 류타와 여러 조연들이 감내해야 할 가혹한 운명에 쏠려 있기 때문에 크게 거슬려 보이진 않았습니다.

 

기대가 컸던 탓에 아쉬움도 남긴 했지만 그래도 머잖아 또다시 그녀의 새 작품 출간 소식을 들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혹시 이 작품이 아쉬웠음에도 불구하고 우사미 마코토의 매력을 제대로 맛보고 싶은 독자라면 어리석은 자의 독소녀들은 밤을 걷는다를 읽어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아직 한국에 소개되지 않은 우사미 마코토의 작품이 10여 편에 이르지만 그녀의 진면목을 드러내기에 이보다 더 적합한 작품을 찾기는 쉽지 않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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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려 마땅한 사람들
피터 스완슨 지음, 이동윤 옮김 / 푸른숲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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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가제본을 제공받아 읽고 쓴 서평입니다.)

 

피터 스완슨은 2016년 한국에 소개된 죽여 마땅한 사람들’(이하 죽마사’, 원제 The Kind Worth Killing, 2015)로 독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작가입니다. 13살 때부터 죽여 마땅한 사람들을 완벽한 방법으로 살해하는 여주인공 릴리 킨트너의 맹활약(?)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한데, 7년 만에 그 후속작인 살려 마땅한 사람들’(원제 The Kind Worth Saving, 2023)이 출간돼서 무척 반가웠습니다.

 

살려 마땅한 사람들은 전작과 마찬가지로 여러 인물이 화자를 맡습니다. 그중에서도 전작에서 연쇄살인 용의자 릴리 킨트너를 추격하면서도 미묘한 감정에 휩싸이고 만 형사 헨리 킴볼(이 작품에선 사립탐정)이 메인 화자를 맡았고, 30대 중반이 된 릴리 킨트너는 킴볼을 도와 자신의 능력을 또 한 번 유감없이 발휘하는 역할을 맡습니다. 그 외에도 10대 시절부터 비밀 친구가 되어 수차례에 걸쳐 완벽한 살인을 저질러온 남녀가 중요한 화자로 등장합니다.

죽마사가 응원하고 싶은 마음이 저절로 들게 만드는 연쇄살인마 릴리 킨트너의 통쾌하고 속 시원한 폭주 스토리였다면, ‘살려 마땅한 사람들은 차분한 분위기 속에서도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심리스릴러의 면모를 갖춘 작품입니다. 사건 자체보다는 각 인물들의 심리와 동기가 강조되고 있고, 킴볼과 릴리가 상대해야 할 범인이 일찌감치 노출되기 때문에 ?’어떻게?’에 서사가 집중되기 때문입니다.

 

전작에서 릴리를 쫓던 형사 킴볼은 이제 고만고만한 사립탐정이 돼있습니다. 소소한 일거리 외에 무기력한 삶을 살던 킴볼은 과거 딱 1년 동안 재직했던 교사 시절의 제자 조앤이 나타나 남편의 불륜을 입증해달라는 의뢰를 하자 당혹감 속에서도 일을 맡습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살인사건이 벌어지는 바람에 킴볼의 조사는 개운치 못한 상태에서 마무리되고 맙니다. 끝내 의심을 지우지 못한 킴볼은 여전히 연락을 주고받고 있던 릴리를 찾아가 의견을 나눈 끝에 살인사건의 진상을 찾기로 결심합니다.

 

스포일러가 될 대목이 여러 곳이라 애매한 줄거리 요약이 되고 말았는데, 킴볼과 릴리의 미묘한 관계 역시 죽마사의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서 더는 자세히 소개하기가 어렵습니다. 다만 큰 뼈대는 오래 전부터 잔인하고 교묘하게 살인을 저질러온 두 남녀의 행각을 킴볼과 릴리가 파헤치는 내용입니다.

사실 두 남녀의 행각도 그렇고 킴볼과 릴리의 조사 과정 역시 스펙타클하거나 반전이 거듭되는 숨 가쁜 이야기는 아닙니다. 오히려 차분한 전개 속에 각 인물들의 심리가 더 도드라져 보이는 작품입니다. ‘죽마사의 속사포 같은 서사를 기대한 독자라면 초반에 다소 처진다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지만 이 작품의 진짜 미덕은 페이지를 넘길수록 점차 고조되는 긴장감입니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진실에 다가가는 킴볼과 릴리의 조사, 마음에 안 드는 상대를 완벽하게 살해해온 두 남녀의 뒤틀린 심리와 공포, 그리고 킴볼에게 닥치는 거대한 위기와 릴리의 끝내주는 마지막 한 방에 이르기까지 작가는 결코 서두르지 않고 완만한 전개 속에 긴장감을 고조시킵니다. ‘죽마사와는 사뭇 다른 스타일이지만 마지막 장을 덮고 나면 죽마사를 다시 한 번 읽어보고 싶게 만드는 작품이랄까요?

 

죽마사이후 피터 스완슨의 팬이 되어 지금까지 한국에 출간된 작품들을 전부 읽었지만 매번 아쉬움을 느껴온 게 사실입니다. 데뷔작의 인상이 너무 강렬했기 때문인데, ‘살려 마땅한 사람들역시 릴리의 대폭주를 다시 한 번 보고 싶은 마음이 너무 컸던 탓인지 살짝 아쉽게 느껴지긴 했습니다. 그래도 애착 캐릭터 중 하나였던 릴리를 다시 볼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운 책읽기가 됐습니다. ‘릴리 킨트너 시리즈가 세 번째 작품까지 이어질지는 모르겠지만, 카메오로라도 좋으니 피터 스완슨의 다른 작품에서 한번쯤은 재회할 수 있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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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소미미디어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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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가시노 게이고의 비밀을 지금까지 책으로 읽지 않은 건 20여 년 전 히로스에 료코가 주연을 맡은 동명의 영화를 너무나도 인상 깊게 봤기 때문입니다. 매체를 불문하고 먼저 인상 깊게 보고나면 다른 매체로는 도무지 보고 싶은 생각이 없어지곤 하는데, ‘비밀은 주룩주룩 눈물을 흘려가며 봤을 정도로 영화가 매력적이어서 그동안 계속 원작을 외면해왔던 것입니다. 하지만 영화를 본지 20년도 넘은데다 왓차에 올라온 비밀의 포스터를 보니 새삼 원작이 궁금해지기도 했고, 좋아하는 번역가 양윤옥의 번역으로 2021년에 재출간됐음을 우연히 알게 돼서 큰맘 먹고 원작 읽기에 나서게 됐습니다.

 

평범한 가장 스기타 헤이스케의 삶이 하루아침에 붕괴됩니다. 한겨울에 일어난 비극적인 버스 사고로 인해 아내 나오코가 사망하고 딸 모나미는 기적적으로 살아남긴 했지만 식물인간 상태가 됐기 때문입니다. 얼마 후 모나미가 의식을 되찾자 스기타는 감격하지만 이내 모나미의 몸에 깃든 영혼이 아내 나오코라는 것을 깨닫곤 경악합니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비밀을 품은 채 스기타는 딸의 몸에 깃든 나오코와 일상을 꾸려가지만, 시간이 갈수록 감당하지 못할 혼란에 휩싸이고 맙니다. 동시에 스기타는 사고버스의 운전자 유족과 인연을 맺은 뒤로 사고 이면의 기구한 사연을 접하게 됩니다. 불편하기 짝이 없는 인연이지만 스기타는 그를 통해 버스 사고의 진실을 접하곤 말할 수 없는 회한에 잠깁니다.

 

11살 딸의 몸에 깃든 36살 아내의 영혼과의 동거는 스기타에게 여러 가지로 곤혹스러운 상황을 안겨줍니다. 참담할 정도로 비극적인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제3, 즉 독자가 볼 때 웃음이 터져 나올 수밖에 없는 해프닝들이 연이어 벌어지기 때문입니다. 분명 대화를 나누고 밥을 함께 먹는 상대가 아내의 영혼이긴 하지만 어쨌든 눈에 들어오는 외관은 11살 딸이기 때문에 잠자리를 함께 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또 귀여운 초등학생이던 모나미가 중고교에 진학하면서 어느 새 자신이 나오코임을 잊은 듯 에너지 넘치는 10대의 모습을 보이며 남학생들과 어울리는 모습은 스기타로서는 참을 수 없는 질투심을 자아내는 장면들입니다. 아빠이면서 아빠가 아닌, 남편이면서 남편이 아닌 스기타의 처지는 그야말로 난감함 그 자체입니다.

하지만 나오코가 진심으로 모나미로서 새 삶을 살아가기를 바라는 것처럼 보이자 스기타의 감정은 단순한 질투를 넘어 집착과 분노에 이릅니다. 더구나 나오코는 이제 스기타의 아내가 아니라 모나미로서 살아가겠다는 뜻을 공공연히 밝힙니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예상치 못한 상황이 벌어지면서 스기타는 더욱 더 큰 충격에 빠지고 맙니다.

 

이야기의 대부분은 몸의 성장과 함께 조금씩 변해가는 나오코의 모습에 어쩔 줄 몰라 하는 스기타의 롤러코스터 같은 감정 기복에 할애됩니다. 뜻하지 않게 10대로서 새롭게 삶을 설계할 수 있게 된 나오코의 기대와 동요도 흥미진진하게 그려집니다. 그런 면에서 비밀은 빙의를 소재로 한 극적인 가족소설 혹은 성장소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막판의 두 차례의 큰 반전은 히가시노 게이고의 미스터리에서 맛볼 수 있는 특유의 충격과 감동이 곁들여져 있어서 똑같은 소재를 갖고도 이렇게 요리할 수 있다니!”라는 감탄이 저절로 나오는 대목입니다. 행복하다고 할 순 없지만 나름 안정을 되찾은 듯한 스기타가 연이어 뒤통수를 맞는 장면들은 그야말로 압권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스기타-나오코-모나미의 이야기와 함께 병행되는 건 사고버스 운전자의 유족과 스기타가 맺은 불편하면서도 운명적인 인연입니다. 이 인연은 특별한 반전이나 사건을 포함하진 않지만 히가시노 게이고의 미스터리 작품에서 종종 느낄 수 있는 소박하면서도 애틋한 감동을 전해줍니다. 참사를 일으키고 본인도 현장에서 사망한 버스 운전자의 사연, 그의 유족이 감당해야 하는 말할 수 없는 고통, 그리고 그 유족과 이어진 또 다른 가족의 오래된 비밀은 스기타-나오코-모나미의 이야기와 절묘하게 이어지면서 따뜻한 엔딩을 맞이합니다.

 

20년도 넘은 기억이라 가물가물하지만 영화는 원작소설을 큰 폭으로 각색한 것 같습니다. 분명 큰소리로 웃으면서 보다가 마지막엔 눈물을 주룩주룩 흘렸던 영화에 비해 원작소설은 많은 부분에서 감정적으로 정제된 듯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선지 새삼 왓차에 올라온 비밀을 다시 한 번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약 20여 년 전처럼 웃다가 주룩주룩하게 된다면 역시 제겐 소설 비밀보다는 영화 비밀이 더 어울린다는 결론을 내게 될 것 같습니다.

(사족이지만, 다 읽고도 이 작품이 일본추리작가협회상을 수상한 이유나 인터넷서점에서 미스터리 장르로 분류되는 이유는 잘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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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 동지여 적을 쏴라
아이사카 토마 지음, 이소담 옮김 / 다산책방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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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소(獨蘇)전쟁은 2차 대전 중이던 1941~1945년에 벌어진 독일과 소련의 전쟁으로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단일 전쟁이자 가장 참혹한 전쟁으로 기록돼있습니다. 4년 가까운 전쟁 기간 동안 독일은 900만 명, 소련은 2,000만 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했습니다. ‘소녀 동지여 적을 쏴라는 이 독소전쟁을 배경으로 소련의 여성 저격수 세라피마와 그녀의 동료들이 겪은 지옥도와도 같은 참상을 그린 반전소설이자 여성소설입니다.

 

주민 40여 명의 작은 마을 이바노프스카야가 독일군에 의해 몰살당합니다. 눈앞에서 어머니의 죽음을 목도한 18살 소녀 세라피마는 저격병 훈련교관 이리나에 의해 구조된 뒤 저격병 훈련을 받게 됩니다. 세라피마는 침략자인 독일에 대한 복수는 물론 어머니를 죽인 독일 저격수 한스 예거, 자신을 구해줬지만 어머니의 시신을 모욕하고 마을을 불태운 교관 이리나를 죽이겠다는 일념으로 훈련에 몰두합니다. 고된 훈련 끝에 저격병여단 제39독립소대가 된 세라피마와 동료들은 스탈린그라드 탈환 작전을 시작으로 죽음이 지천에 널린 전쟁에 투입됩니다.

 

나는 이리나를 따라 살인자가 되었다. 나는 살아남기 위해 싸우는 길을 선택했다. 나는 살아가는 의미를 얻기 위해 복수를 갈망했다. 전부 틀렸다. 죽이기를 거절하고 살아가는 삶, 그쪽을 선택하는 길이 눈앞에 있었다.” (p509)

 

외교관을 꿈꿨지만 저격병이자 살인자가 되고만 세라피마의 이야기는 전쟁의 비극을 다룬 그 어떤 픽션보다도 묵직하고 가슴 아프게 읽힙니다. 눈앞에서 어머니를 잃은 뒤 동료를 지키고 여성을 지키고 복수를 완수하기 위해 피도 눈물도 없는 저격병이 된 세라피마는 숱한 위기를 겪으면서도 혁혁한 전과를 올리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감당하기 어려운 혼란을 겪습니다. 인간을 악마로 만드는 전쟁의 화마 속에서 언제부터인가 웃으면서 적병을 쏘고, 죽인 적의 숫자를 자랑하듯 떠벌리며 살인을 즐기는 괴물이 돼버렸음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괴물이 아니면 이 전쟁에서 살아남을 수 없기에 세라피마의 혼란은 더욱 더 극심해집니다.

 

또한 저격 말고는 어떠한 능력도 없는데다 전쟁이 끝나도 돌아갈 마을도 없고, 무엇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는 세라피마는 애초 자신이 왜 저격병이 됐는지에 대한 깊은 회의와 절망에 빠진 채 허우적댑니다. 세라피마의 혼란과 회의와 절망은 너무나도 생생한 전쟁 장면 묘사 덕분에 마치 독자 자신이 겪는 것처럼 절절하게 피부에 와닿습니다. 새삼 전쟁의 비극이란 것이 얼마나 깊고 지독한 것인지 깨닫게 되면서 말입니다.

 

전쟁의 화마에 휘말려 삶이 붕괴된 한 저격병의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소녀 동지여 적을 쏴라는 여성소설로서의 미덕도 갖추고 있습니다. 작가 스스로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2015년 노벨문학상 수상)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500명 이상의 여성 병사들의 증언을 읽고 그것을 모티브로 삼았다.”라고 밝힌 것처럼, 이 작품에는 여성만이 감내해야 하는 전쟁의 참극이 다양하게 묘사돼있습니다. 오늘날까지도 여성을 약탈과 무시의 대상으로 전락시키는 전쟁의 악마성은 80여 년 전에는 훨씬 더 날것 같은 잔인함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저항 한 번 못해보고 짓밟히는 사람부터 살아남기 위해 적군의 연인이 된 사람에 이르기까지 작가는 세라피마의 눈을 통해 전쟁이 여성에게 가한 갖가지 비극을 상세하게 묘사합니다. 물론 마녀부대로 불릴 정도로 무시무시한 활약을 펼친 세라피마와 동료들 역시 여성이기에 겪을 수밖에 없는 참혹한 상황에 수시로 내몰리곤 합니다. 그래선지 여성은 약자가 아니라 스스로 싸울 수 있는 자임을 증명하기 위해 저격병이 됐다.”고 당당하게 밝힌 세라피마의 동료 샤를로타의 일성은 지금도 깊은 여운으로 남아있습니다.

 

인간을 악마로 만드는 전쟁의 참상, 그 안에서 똑같이 적군을 죽이고도 유독 살인자소리를 들어야만 하는 저격수의 운명, 그리고 여성으로서 지옥과도 같은 전쟁의 한복판을 가로질러야만 했던 한 소녀의 비극. ‘소녀 동지여 적을 쏴라는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전쟁의 또 다른 민낯을 소름 끼칠 정도로 생생하게 그린 작품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과거의 일만은 절대 아닙니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는 크고 작은 전쟁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소녀 동지여 적을 쏴라에 그려진 비극은 그 전쟁들 속에서 여전히 현재진행형입니다. 작은 메아리에 불과하겠지만 소녀 동지여 적을 쏴라가 전하는 반전과 평화의 메시지가 조금이라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달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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