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생지, 개미지옥
모치즈키 료코 지음, 천감재 옮김 / 모모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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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나이부터 성매매를 일삼아온 20대 여성 두 명이 연이어 살해당합니다. 수사본부가 우왕좌왕하는 사이 한 식품회사에 세 번째 희생자를 내기 싫으면 2억엔을 준비하라.”는 협박문이 도착합니다. 전혀 연관성이 없어 보이던 두 사건 사이에 접점이 생기자 수사는 오히려 더 큰 혼선을 빚습니다. 프리랜서 기자인 기베 미치코는 자신이 취재해오던 식품회사 협박 건 때문에 성매매 여성 살인사건에 관심을 갖게 됐고, 특유의 부지런함과 촉을 발휘하여 수사본부조차 파악하지 못하는 사건 이면의 진실을 하나하나 밝혀냅니다.

 

2013대회화전’, 2014신의 손에 이어 세 번째로 만난 모치즈키 료코의 작품입니다. 두 작품 모두 흥미롭게 읽어서 그 뒤로 신작을 기대했었는데, 무려 10년 가까이 지나서야 새 작품을 만나게 됐습니다. ‘옮긴이의 말을 읽고서야 이 작품이 기베 미치코 시리즈의 다섯 번째 작품(일본출간 2018)이란 걸 알게 됐는데, 2014년에 한국에 소개된 신의 손이 이 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일본 출간 2004)이라고 합니다. 다른 작품들도 한국에 꼭 소개됐으면 좋겠는데, 다소 무겁고 어두운 소재들을 다루고 있어서 한국 독자들에게 얼마나 호응을 얻어낼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프리랜서 기자인 기베 미치코가 미궁에 빠진 살인사건과 협박사건을 취재하며 진상을 파헤친다는 게 큰 줄기이긴 하지만, 작가는 기베 미치코를 슈퍼 히로인으로 묘사하지도, 자칫 자극적일 수 있는 소재를 흥미 위주의 미스터리로 포장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읽는 동안 소설이라기보다 르포에 가깝다는 인상을 자주 받을 정도로 냉정하고 객관적인 시선을 견지합니다. 또한 성매매, 아동학대, 빈곤 등 사회적 문제들을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정면으로 다루고 있어서 주인공 기베 미치코가 어떤 진상을 밝혀내든 결코 가벼운 마음으로 마지막 장을 덮을 수 있는 작품이 아니라는 걸 쉽게 예상할 수 있습니다.

 

작가는 초반부터 범인으로 보이는 일군의 인물들을 공개합니다. 어떻게든 양지로 나가고 싶었지만 빈곤과 범죄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막장에 갇힌 요시자와 스에오, 번듯한 의사 집안의 장남이자 명문대 학생이지만 도박과 폭력과 기행에 빠진 반사회적 인물 하세가와 쓰바사, 성매매를 일삼으면서 숱한 인간들에게 무시와 경멸을 받지만 그에 대한 인식 자체가 없어 보이는 노가와 아이리, 그리고 조폭 출신처럼 보이는 불량배 산토 가이토가 그들입니다.

작가는 이들의 과거와 현재를 통해 이른바 개미지옥’(원제 개미가 사는 집이란 뜻입니다), 즉 아무리 탈출하려 발버둥 쳐도 더 깊은 수렁으로 가라앉기만 하는 지독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묘사합니다. 독자 입장에선 누가 범인인가?’보다도 개미지옥의 참상에 더 눈길이 끌릴 수밖에 없게 되는데, 바로 이런 점 때문에 미스터리 소설보다는 르포에 가깝게 읽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론 이 작품의 가장 큰 미덕이 바로 이런 점이라는 생각입니다.

 

될 수 있으면 모르고 지나치고 싶은 일, 보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일을 독자의 목덜미를 붙잡고 억지로 눈앞에다 들이민다.”는 평을 들을 정도로 기베 미치코 시리즈는 지독한 사회파 미스터리로 분류된다고 합니다. ‘출생지, 개미지옥역시 결코 뒷맛이 개운한 작품은 아니지만, 읽고 돌아서면 금세 기억에서 휘발되고 마는 가벼운 작품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짙은 여운을 남깁니다. 작가가 그린 개미지옥은 비록 나의 일은 아닐지라도, 세상 어딘가에 존재하는, 그래서 외면하고 무시할 수만은 없는 명확한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사회파 미스터리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적극 추천하고 싶은 작품입니다.

 

- ‘기베 미치코 시리즈’ (원제, 일본 출간년도)

1. 신의 손 (, 2004, 한국 출간)

2. 살인자 (殺人者, 2004)

3. 저주인형 (人形, 2004)

4. 부엽토 (腐葉土, 2013)

5. 출생지, 개미지옥 (, 2018, 한국 출간)

6. 들불의 밤 (野火,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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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 걸 배드 걸 스토리콜렉터 106
마이클 로보텀 지음, 최필원 옮김 / 북로드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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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혹한 범죄가 벌어진 현장에서 이름도 나이도 알 수 없는 어린 소녀가 발견된다. 6년 후, ‘이비 코맥이라는 이름으로 소년원에 수감돼있는 소녀는 법적으로 성인임을 인정받아 소년원에서 벗어나고자 하지만 상황은 여의치 않다. 그때 사이러스 헤이븐이라는 경찰 심리학자가 나타나 이비의 후견인을 자처하고, 진실을 볼 수 있는 소녀의 특별한 능력에 관심을 가진 그의 도움으로 이비는 마침내 소년원을 벗어난다. 그렇게 두 사람의 기묘한 동거가 시작된다. 한편, 15세 소녀 조디 시핸이 숲속에서 주검으로 발견된다. 용의자는 곧 체포되지만, 사이러스는 의구심을 품고 조디 시핸의 가족들을 상대로 조사를 벌인다. 이비는 자신의 특별한 능력을 사용해 그를 도우려 하는데... (출판사 소개글을 일부 수정 후 인용했습니다.)

 

굿 걸 배드 걸은 마이클 로보텀이 새롭게 런칭한 사이러스 헤이븐 시리즈의 첫 작품입니다. 그의 대표작인 조 올로클린 시리즈역시 임상심리학자가 경찰을 도와 사건을 해결하는 스릴러였던 점을 감안하면 주조연의 직업과 캐릭터는 물론 서사 역시 큰 틀에서 비슷한 모양새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 가지 큰 차이점이라면 사이러스의 파트너 역할을 맡게 된 정체불명의 소녀 이비 코맥의 존재입니다. 끔찍한 살인사건 현장에서 발견된 그녀는 이름도, 나이도 알 수 없는 것은 물론 난독증에 반사회적이고 폭력적인 성격 때문에 소년원에서도 위험한 인물로 분류돼있습니다. 심리학자인 사이러스의 관심을 끈 건 이비가 진실 마법사’, 즉 상대방이 진실을 말하는지 거짓을 말하는지 알아보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 자신이 참혹한 가족사 약에 취한 형이 부모와 여동생들을 잔인하게 살해한 를 지닌 사이러스는 이름도, 나이도, 가족도 기억하지 못하는 이비에게서 연민 이상의 공통점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런 이유로 모두가 반대하는 가운데 그녀의 보호자를 자처한 사이러스는 이비를 소년원에서 빼내 자신의 집에 머물게 하며 정상인으로서 살아갈 수 있게끔 도와주려 합니다.

 

사이러스와 이비의 기묘한 동거와 탐색전이 펼쳐지는 가운데 15세 소녀가 잔인하게 살해당한 사건이 병행됩니다. 지역사람 모두가 사랑스러운 소녀이자 유망한 피겨스케이팅 선수로 칭송하던 조디의 잔혹한 죽음은 큰 충격을 몰고 옵니다. 용의자가 금세 체포되긴 하지만 사이러스는 심문 영상을 지켜보던 중 의구심을 품게 되고, 소녀의 가족과 지인에 대한 탐문에 나섭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본의 아니게 이비의 도움을 받게 됩니다. 그 자신이 유능한 심리학자지만 진실 마법사라 불릴 정도로 촉이 뛰어난 이비의 거짓말 탐지 능력은 사이러스에게 큰 힘이 돼줍니다.

 

유일하게 중도 포기했던 완벽한 삶을 훔친 여자를 제외하곤 마이클 로보텀의 작품은 조 올로클린 시리즈와 스탠드얼론 모두 높은 평점을 주며 재미있게 읽어왔습니다. 새로운 시리즈의 런칭이라 기대감이 너무 높았던 탓인지 모르겠지만 굿 걸 배드 걸은 재미있게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분량 면에서 살짝 아쉬움이 남은 작품입니다. 시리즈 첫 작품이다 보니 두 주인공의 캐릭터 설명과 관계 설정에 꽤 많은 분량이 할애됐습니다. 살인사건은 복잡하고 지난한 과정을 거쳐 해결되긴 하지만 600페이지에 육박하는 분량에 비해 다소 단선적인 구성이라 긴장감을 극대화시키지는 못합니다. 물론 거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사이러스와 이비의 이야기가 끊임없이 궁금증과 긴장감을 자아내 마지막 페이지까지 한 번에 읽게 만들지만 말입니다.

 

끔찍한 과거사와 트라우마는 물론 상대의 마음속을 들여다볼 수 있는 공통점을 지닌 사이러스와 이비의 콤비 플레이는 이미 3편까지 나와 있다고 합니다. 작가는 이비의 과거에 관한 결정적인 정보 몇 가지를 일부러 공개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사이러스가 조 올로클린의 제자라는 에필로그의 한 줄을 통해 어쩌면 후속작에서 조 올로클린이 특별출연을 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도 갖게 만듭니다. 이 두 가지 점 때문에라도 후속작을 기다릴 수밖에 없게 되는데, 한 가지만 더 바란다면 두 사람이 마주치게 될 사건들이 조금은 더 세고 독했으면 하는 점입니다. 그야말로 마이클 로보텀다운 스릴러를 만끽하고 싶은 작은 욕심이라고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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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하늘에 별을 뿌리다
구보 미스미 지음, 이소담 옮김 / 시공사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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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물, 특히 미스터리와 스릴러 편식이 과하게 심한 독자지만, 가끔씩 사람 사는 이야기에 대한 갈증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물론 따뜻하고 뭉클하고 건전한(?) 이야기보다는 다소 무겁고 어둡고 파괴적인 이야기에 더 끌리는 게 사실이긴 합니다. 그럴 때마다 신작 소식을 기다리게 되는 일본 작가 두 명이 있는데 사쿠라기 시노와 구보 미스미가 그들입니다.

 

무슨 일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불온한 기운도 느껴지는가 하면, 어딘가 서정적이거나 애틋한 감상에 젖게 만들기도 하고, , 짙은 해무 속에 무엇이든 감출 수 있을 것 같은 관능적인 분위기도 감지되는 훗카이도의 소도시 구시로를 배경으로 다양한 군상들의 이야기를 펼치는 게 사쿠라기 시노의 작풍이라면, “인간의 가장 순수한 본능인 성()을 매개로 상처와 상실에 잠식된 사람들의 삶을 그리는 것이 구보 미스미의 특징입니다.

 

구보 미스미는 파격적인 성애묘사 때문에 19금 판정을 받은 한심한 나는 하늘을 보았다’(2011)로 한국 독자와 처음 만난 이후 밤하늘에 별을 뿌리다까지 모두 다섯 편을 선보였습니다. 앞선 작품들의 경우 조금씩 수위의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성()이 중요한 코드로 작용하고 캐릭터 대부분은 상처투성이이며, 연작단편이라는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에 비해 밤하늘에 별을 뿌리다(옮긴이의 말에 따르면) “밤하늘에 뜬 별을 장치로 삼아 등장인물의 복잡한 마음, 현실과 바람을 보여주는 단편집”, “힘들어도 슬퍼도 괴로워도 상실감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과 연작단편이라는, 구보 미스미의 가장 큰 매력이 빠진 탓에 아쉬움이 남긴 했지만, 그녀답지 않게(?) ‘희망의 기운을 담은 수록작들은 색다른 맛을 만끽할 수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다섯 편의 수록작의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상처와 상실에 잠식된 채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각자 소중히 여기는 밤하늘의 별을 품고 있습니다. 쌍둥이 여동생을 뇌출혈로 잃고, 애인으로 여겼던 남자마저 잃어버린 32살의 아야에게는 쌍둥이 별자리가(한밤중의 아보카도), 여름방학 중 바닷가에서 잠시 만난 터무니없는 첫사랑을 허망하게 잃은 16살 마코토에게는 남쪽하늘의 안타레스가(은종이색 안타레스), 교통사고로 엄마를 잃고 집단 괴롭힘에 시달리는 중학생 미치루에게는 처녀자리의 별 스피카가(진주별 스피카), 아내와 딸을 이혼으로 잃은 뒤 가까이 지내던 이웃의 모녀마저 잃은 37살 영업사원 사와타리에게는 밤하늘의 달이(습기의 바다), 그리고 부모의 이혼으로 엄마를 잃은데다 자신을 보살펴준 이웃의 할머니까지 잃은 초등학교 4학년 소우에게는 언제나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흐드러진 별들이(별의 뜻대로) 따뜻한 위안이자 의지처로 마음 한쪽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 별들을 지켜보며 힘들어도 슬퍼도 괴로워도 상실감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바로 밤하늘에 별을 뿌리다입니다.

 

이 작품은 2022년 상반기 나오키 상을 수상했습니다. 솔직하게 말하면, “이 작품이 나오키 상을 수상할 만했나?”라는 의문을 가질 정도로 딱히 개성이나 특징이 있는 작품은 아닙니다. 오히려 자주 볼 수 있는 전형적인 일본 소설에 가까운 게 사실입니다. 다만 저의 경우, 구보 미스미의 광팬이다 보니 사심이 잔뜩 들어갈 수밖에 없어서 문장 하나하나를 애틋한 심정으로 읽게 됐는데, 혹시라도 이 작품으로 구보 미스미를 처음 만난 독자라면, 그래서 그녀의 진면목을 맛보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면 지금은 절판된 한심한 나는 하늘을 보았다를 중고로라도 찾아 읽어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나머지 작품들도 모두 매력적이지만 한심한 나는 하늘을 보았다는 압권 중의 압권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지독한 성애 묘사가 거북한 독자라면 다른 작품들을 먼저 만나보기를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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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주의보 이판사판
리사 주얼 지음, 김원희 옮김 / 북스피어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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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번째 생일을 맞은 리비는 변호사로부터 편지를 한 통 받습니다. 거기엔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친부모가 자신에게 대저택을 유산으로 남겼다는 내용이 적혀 있습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리비는 오래 전 그 저택에서 세 사람이 동반자살했다는 신문기사를 발견합니다. 시신은 주인 부부와 정체불명의 한 남자였는데, 더욱 이상한 점은 저택의 외진 방에서 갓난아기가 발견됐다는 점입니다. 영양 상태도 좋고 방금 전까지 보살핌을 받은 듯한 아기의 이름은 서레니티 램’. 리비는 그 아기가 자신임을 깨닫곤 큰 충격에 빠지고, 그때부터 대저택의 비밀에 한걸음씩 다가가기 시작합니다. (출판사 소개글을 일부 수정 후 인용했습니다.)

 

2022년에 출간된 엿보는 마을’, ‘다크 플레이스의 비밀에 이어 세 번째로 만난 리사 주얼의 작품입니다. 고백하자면, 요 몇 년 동안 도메스틱 스릴러 또는 심리 스릴러에 살짝 질린 탓에 리사 주얼의 신작 소식을 듣고도 이번엔 패스라고 다짐했지만, 북스피어에서 출간했다는 걸 알곤 마음을 고쳐먹었습니다. 삼송 김사장 님의 야심찬(?) ‘이판사판 시리즈라면 기존 작품과는 조금은 색다른 느낌일 거란 막연한 기대 때문이었습니다.

 

20여 년 전 런던의 첼시에 자리 잡은 대저택에서는 요즘 말로 가스라이팅이 불리는 어이없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물려받은 부유한 유산을 지닌 남편과 사교계의 명사로 불리던 아내, 그리고 그들의 10대 자녀들은 어느 날 저택을 찾아온 한 여자와 그녀가 끌어들인 부부로 인해 모든 것을 잃게 됩니다. 그리고 몇 년에 걸친 가스라이팅으로 파멸을 코앞에 둔 어느 날, 이 저택에는 아기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고, 그로부터 채 1년도 되기 전에 세 구의 시신이 발견되는 참극이 벌어지고 맙니다. 경찰은 이 저택에 살고 있던 것으로 추정되는 네 명의 10대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사실에 놀라지만 결국 그 누구도 찾아내지 못합니다. 그리고 25년이 흐른 현재, 당시 저택에서 발견됐던 아기리비에게 의문의 상속 편지가 날아든 것입니다.

 

가족주의보는 가스라이팅을 소재로 한 심리 스릴러이자 당시 사라진 네 명의 10대 소년 소녀와 이제 25살이 된 아기리비가 이끌어가는 극적인 서스펜스 작품입니다. 20여 년 전의 충격적인 가스라이팅의 비극이 한 축이고, 이제는 중년에 이른 당시 10대들과 어느 날 갑자기 대저택의 상속인이 된 리비의 진실 찾기가 또 다른 한 축입니다.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참극을 겪었지만 진실의 일부밖에 모른 채 각자의 삶을 살던 당시 10대들은 리비가 25살이 된 현재에 와서야 비로소 과거의 참극의 실체와 마주하게 됩니다.

 

리비를 포함하여 여러 명의 화자가 번갈아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어서 극적인 사건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500여 페이지의 분량 내내 빠른 템포와 높은 긴장감을 놓치지 않습니다. 특히 복잡하게 꼬였지만 한눈에 확 들어오는 비극적인 인간관계와 그 과정에서 태어난 아기리비의 사연은 마지막 반전에 이를 때까지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오히려 가스라이팅은 부차적인 소재일 뿐 네 명의 10대 소년 소녀와 리비에게 닥친 비극적인 서사가 이 작품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앞서 읽은 리사 주얼의 두 작품이 전형적인 도메스틱+심리 스릴러였다면 가족주의보는 다소 막장스러운 면이 있긴 하지만 여러 가지 장르가 복합된 좀더 고급스러운 작품이라고 할까요? (사족으로, 이 작품의 가스라이팅 설정에 대해 비현실적이다.”라고 비판하는 서평들이 있긴 하지만, 현실에서는 이보다 더 말도 안 되는 일들이 버젓이 벌어지고 있어서인지 개인적으로는 전혀 위화감이 들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도메스틱+심리 스릴러에 대해 경계심(?)을 갖고 있지만 리사 주얼의 작품이라면 일단 무슨 이야기인지는 살펴보게 될 것 같습니다. 앞선 작품들에서도 충분히 느꼈지만 가족주의보는 여러 면에서 리사 주얼이 대단한 이야기꾼이라는 걸 확실히 각인시켜줬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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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의 집
나카야마 시치리 지음, 민현주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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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직 중학교 교사인 호카리 신이치는 한 여학생이 고발해온 학급 내 집단 괴롭힘 문제 때문에 고심 중입니다. 은폐를 암시하는 교장의 압력, 이런저런 후폭풍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보신주의에 가까운 소심함으로 인해 결국 호카리는 이도저도 아닌 애매한 태도를 취하고 맙니다. 그런데 12살 딸 유카가 집단 괴롭힘으로 인해 자살을 시도하는 사건이 벌어지면서 호카리의 삶은 엉망진창이 되고 맙니다. 집단 괴롭힘의 주동자가 누군지 알게 됐지만 호카리는 자신과 똑같이 애매한 태도만 취하는 유카의 담임에게 격분하게 되고, 결국 이 일을 세상에 알리기로 결심합니다. 하지만 오히려 사태는 더욱 최악으로 치닫기 시작하고, 예기치 못한 살인사건이 벌어지면서 호카리는 물론 그의 가족들은 붕괴 직전의 위기에 빠집니다.

 

학교폭력의 문제와 함께 그것이 파생시키는 수많은 악의와 비극을 정면으로 다룬 나카야마 시치리의 사회파 미스터리입니다. 가해자를 단순히 악당으로만 그리는 것도 아니고, 어정쩡한 태도를 취하는 학교 당국을 무작정 비난만 하지도 않습니다. 복수를 다루고 있지만 그것이 결코 정답도 아니며 만족감을 얻게 해주지도 않는다는 점을 강조하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학교폭력은 그 자체만이 문제가 아니며, 직접 겪지 않으면 상상하기 어려운 숱한 갈등과 비극들을 야기한다는 점을 적나라하게 그린 작품이란 뜻입니다.

 

중학교 교사인 호카리는 이 작품에서 여러 입장을 오갑니다. 학급 내 집단 괴롭힘 문제를 외면하는 비겁한 담임이었다가, 딸 유카의 자살 미수를 겪으며 집단 괴롭힘의 피해자가 됐다가 얼마 후엔 거꾸로 가해자로 비난받는 위치에 서게 됩니다. 주인공으로선 실격에 가까운 인물이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현실감을 발휘하기도 합니다. 또한 학교폭력을 다루는 과정에서 가장 큰 문제가 가해자가 피해자로, 피해자가 가해자로 순식간에, 그것도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뒤바뀔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하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학교폭력이 발진시킨 이야기는 예상치 못한 살인사건이 터지면서 더욱 긴장감을 고조시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호카리와 그의 가족들은 세간의 비난과 손가락질 속에서 최악의 궁지에 몰리고 맙니다. 나카야마 시치리 특유의 반전으로 마무리되는 이 살인사건 미스터리에는 학교폭력에 관한 구조적인 문제들까지 진지하고 절묘하게 녹아있어서 독자는 읽는 내내 단순한 흥미 이상의 심정을 품게 됩니다. 살인사건이 제대로 해결된다 하더라도 호카리와 그의 가족들은 평생 지워지지 않을 상처를 안게 되는 것은 물론 그 시발점이 된 학교폭력의 악몽에서 절대 벗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작품은 학교폭력은 나쁜 것!”이라는 교훈을 강조하는 것도 아니고, “가해자에게 응징을!”을 정당화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학교폭력은 학교도, 경찰도, 언론도 해결할 수 없는 뜨거운 감자이자 불가해한 난제라고 하소연하는 듯한 느낌이 더 강합니다. 호카리 가족이 결코 행복할 수 없는 해피엔딩을 맞이하는 장면에서 책장을 덮을 때 개운함 따윈 생각나지도 않고 거꾸로 가슴 한쪽이 한없이 무거워지는 느낌을 받은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그것은 사회파 미스터리의 숙명이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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