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린의 날개 재인 가가 형사 시리즈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난주 옮김 / 재인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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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중년 남자가 가슴에 칼이 꽂힌 채 니혼바시 다리 한가운데 있는 기린의 날개 동상 앞에서 발견됩니다. 피해자의 소지품을 갖고 있던 유력한 용의자가 도주 중 교통사고로 혼수상태에 빠지자 경찰은 일찌감치 사건을 마무리하려 하지만 심증 외에 결정적 증거를 확보하지 못해서 안달이 납니다. 하지만 니혼바시 경찰서의 가가 형사는 사건의 이면에 또 다른 진실이 있다고 확신합니다. 파트너이자 사촌동생인 경시청 수사1과 형사 마쓰미야와 함께 니혼바시 인근을 집요하게 탐문하던 가가는 아무도 예상 못한 곳에서 단서와 목격자를 찾아내곤 충격적인 진실을 밝혀냅니다.

 

기린의 날개는 니혼바시 경찰서로 소속을 옮긴 가가 형사의 두 번째 활약을 그린 작품이자 가가 형사 시리즈의 아홉 번째 작품입니다. 이 시리즈는 다음 작품인 기도의 막이 내릴 때를 끝으로 마무리되는데, 그야말로 가가의 매력이 한참 물이 오른 상태에서 시리즈가 종료된 탓에 지금까지도 아쉬움을 지우지 못하고 있습니다.

시리즈 첫 편인 졸업에서 대학생 탐정으로 등장했던 가가는 기린의 날개에선 인간적으로 성숙한 것은 물론 경찰로서의 능력도 최고치를 찍습니다. ‘조용한 반골이라고 부를 만한 그만의 물러서지 않는 고집은 사건을 얼른 마무리하고 싶어 하는 상부 관료들을 꼼짝 못하게 만들고, 누구든 대수롭지 않게 지나칠 게 분명한 사소한 단서와 진술을 통해 끝내 진실을 파헤쳐냅니다. 우연과 필연이 뒤섞인 참혹한 사건들의 연결고리는 가가가 아니라면 끝내 미궁에 빠질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겉모습은 위압적이지만 조금만 얘기를 나눠보면 따뜻한 인간미를 발견할 수 있는 남자, 조직에 얽매이기 싫어 관할서를 전전하는 자유인,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사소한 단서와 말 한마디에서 실마리를 찾아내는 집중력과 추리력, 집요함과 끈기로 똘똘 뭉친, ‘진짜 이 세상에 있었으면 하는 경찰의 표본.”

 

시리즈를 읽으면서 메모해놓은 저만의 가가 인물평입니다. 픽션의 주인공이라 가능한, 그야말로 판타지 같은 캐릭터이긴 하지만, 히가시노 게이고는 섬세하고 자연스러운 리얼리티를 통해 그에게 이웃의 친근한 형사같은 사실감 넘치는 매력을 부여했습니다. 물론 결정적인 순간마다 가가를 돕는 천우신조들 - 기막힌 타이밍에 그에게 전달되는 정보들, 기다렸다는 듯 나타나는 목격자들의 신비한(?) 기억력과 진술 등 - 이 간혹 그 사실감에 작은 흠집을 내곤 하지만, 그 천우신조들 가운데 상당부분은 가가의 노력의 성과이기도 해서 특별히 거부감이 들지는 않습니다.

 

시리즈 명품 중 하나인 붉은 손가락과 마찬가지로 기린의 날개역시 미스터리 못잖게 사건 이면의 비하인드 스토리에 많은 분량을 할애합니다. 다 읽은 뒤 복기해보면 오히려 미스터리 자체보다 사건에 관련된 인물들의 크고 작은 비극들이 더 강한 인상을 남긴 걸 깨닫게 되는데, 이는 비단 가가 형사 시리즈뿐 아니라 히가시노 게이고의 수작들에서 공통적으로 느껴지는 미덕이기도 합니다. 살해당한 중년남자의 기이한 행동들, 유족들의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과 분노, 용의자로 몰린 채 의식을 잃은 남자의 연인의 슬픔 등 사건에 관련된 여러 사람들의 사연은 냉정하지만 따뜻한 형사 가가의 매력과 잘 어우러져 이야기의 힘을 몇 배는 더 매력적으로 만들어줍니다. 제가 히가시노 게이고의 원픽으로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을 고르는 건 바로 이런 매력에 반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점에서 알라딘 MD 최원호의 소개글은 120% 이상 동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특유의 인간미를 품은 형사 가가 교이치로가 등장하는 작품들은 등장인물들의 사연에 꽤 많은 분량을 할애한다. 범죄 트릭은 주역이라기보다는 보조적인 역할에 가깝다. 살인 사건에 얽힌 인물들의 슬픈 이야기와 함께 부조리한 압력에도 결코 포기하지 않으려는 인간성의 힘 같은 드라마적 요소들이 전면에 나선다.”

 

시리즈 마지막 편인 기도의 막이 내릴 때는 오래 전 집을 나간 뒤 홀로 삶을 마감한 가가의 어머니의 사연이 미스터리와 연결돼서 무척 큰 여운과 인상을 남긴 걸로 기억합니다. 가가의 매력과 시리즈 특유의 서사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 작품이라고 할까요? ‘기린의 날개의 뒷맛을 좀더 오래 만끽하고 싶지만 아무래도 조만간 가가의 마지막 이야기를 허겁지겁 읽게 될 것 같습니다. 한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아쉬움이 잔뜩 묻어나겠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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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 노웨어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2-11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2
제프리 디버 지음, 안재권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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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트(Phate)라는 닉네임을 쓰는 천재 크래커(cracker) 존 패트릭 핼러웨이는 자신이 사냥감으로 삼은 사람의 컴퓨터에 침입하여 그()의 일상을 장악한 뒤 무참하게 살해하는 연쇄살인범입니다. 그에게 살인은 일종의 게임에 불과하며 피해자는 게임 속 캐릭터와 다를 바 없습니다. 그는 좀더 난이도가 높은 미션을 추구하며 끝없는 살인행각을 저지릅니다. 한편 CCU(캘리포니아주 경찰 컴퓨터범죄반)는 새로운 종류의 컴퓨터 바이러스가 범행에 사용됐다고 판단하곤 해킹죄로 수감 중인 해커 와이어트 질레트를 가석방시켜 수사에 참여시킵니다. 전통적인 강력계 형사인 프랭크 비숍은 주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질레트를 신뢰하며 수사를 이어나가지만 페이트의 신원을 파악해내고도 예기치 못한 사태가 거듭 벌어지자 큰 위기에 빠집니다.

 

인터넷 대중화의 초기를 통상 1990년대 중반으로 본다면, 이 작품이 출간된 2001년은 뉴스와 쇼핑과 SNS 등 인터넷이 여러 가지 형태로 일상 속에 안착한 시기입니다. 그때만 해도 컴퓨터 이용자에게 가장 큰 위협은 트로이목마 같은 바이러스 정도였고, 그 누구도 피부에 와 닿는 공포를 느낄 일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스파이웨어, 악성코드, 랜섬웨어 등 한 사람 혹은 기업이나 국가마저 위기에 빠뜨릴 수 있는 심각한 위협을 누구나 체감하고 있고, 실제로 그런 뉴스를 심심찮게 들을 수 있는 세상입니다. ‘블루 노웨어는 천재적인 크래커이자 연쇄살인범인 페이트와 역시 뛰어난 화이트 해커인 와이어트 질레트를 등장시켜 그리 머지않은 미래에 현실이 될 악몽을 리얼하게 그린 테크노스릴러입니다.

 

페이트의 주 무기는 단순한 바이러스를 넘어 다른 사람의 컴퓨터를 완전히 장악하는 것은 물론 멋대로 조종할 수 있는 트랩도어라는 소프트웨어로, 오늘날의 스파이웨어와 비슷한 개념입니다. 당시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그야말로 SF영화에나 나올 법한 신무기라고 할까요?

그가 사냥감을 선정하고 그()의 컴퓨터에 침입하여 일상을 장악한 뒤 잔인하게 살해하는 일련의 과정은 게임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여성호신술 웹사이트를 운영하는 여자, 외부침입에 만반을 대비했다고 자랑하는 학교관계자, 크래커의 침입을 완전히 봉쇄할 수 있다고 떠벌이는 기업가, 경호원을 대동하고 다니는 정치인 등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거나 도전정신(?)을 자극하는 사람들을 철저하게 망가뜨리면서 쾌감을 얻는 것이 그의 목적입니다.

한 가지 특이한 건 그의 범행이 사이버테러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흉기를 이용한 아날로그 방식의 살인으로 이어진다는 점입니다. 그 이유는 과거 그가 즐겼던 게임에서 살인자에게 주어진 유일한 제한, 살인자는 칼로 심장을 찌를 수 있을 만큼 상대에게 가까이 접근해야 한다.”는 룰을 충실하게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그야말로 디지털과 아날로그가 믹스된 희대의 연쇄살인범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페이트와 맞붙는 화이트 해커 와이어트 질레트는 페이트 못잖은 천재지만 넘어선 안 될 선을 넘은 탓에 교도소에 수감 중입니다. CCU의 요구로 페이트 수사에 가담한 그는 종횡무진 활약을 펼치지만 절대 드러내지 못할 비밀을 안고 있기도 합니다. 그런 탓에 한때 페이트의 공범으로 오해받기도 하고, 그런 상태에서 탈주극을 벌여 위기에 빠지기도 하고, 예상치 못한 인물에게 뒤통수를 맞거나 목숨이 달아날 치명적인 상황에 마주치기도 합니다.

이런 그를 페이트 수사에 가담시킨 CCU컴퓨터범죄반이라는 그럴듯한 명칭을 갖고 있긴 하지만 그 누구도 중요성을 인정하지 않아 인원도, 예산도 부족한 초라한 조직입니다. 더구나 페이트의 수사는 CCU의 컴퓨터 전문가가 아니라 마초 스타일의 강력계 형사 프랭크 비숍이 지휘하게 되는데, 질레트와 비숍의 조합은 처음엔 물과 기름 이상으로 뒤섞이기 어려워 보이지만 시간이 갈수록 묘하게도 매력적인 콤비 플레이로 발전하게 됩니다.

 

링컨 라임 시리즈는 물론 여러 편의 스탠드얼론에서도 막판까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제프리 디버의 서사는 블루 노웨어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됩니다. 초반에 공개된 범인 페이트의 잔인한 범행은 매번 예측불허로 전개되고, 누군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페이트의 공범의 정체는 사건이 일단락됐다고 여길 때쯤 새로운 반전과 함께 폭로되며, 질레트를 비롯한 CCU 내 수사관들의 어딘가 평범해 보이지 않는 캐릭터도 수시로 소소한 반전의 맛을 더해줍니다.

 

2022년의 독자에겐 페이트와 질레트의 대결이 고전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 2001년의 독자에겐 치명적인 소프트웨어를 통한 페이트의 가공할 사이버 테러가 (한 등장인물의 표현대로) ‘도시괴담처럼 읽혔을 게 분명합니다. 하지만 제프리 디버가 내다본 온라인 세계, 즉 블루 노웨어의 공포는 오늘날 명백한 현실이 돼버리고 말았습니다. 일본작가 시가 아키라의 스마트폰을 떨어뜨렸을 뿐인데가 없어선 안 될 존재가 된 스마트폰이 한순간에 악마를 자신의 일상으로 불러들이는 통로가 될 수 있다는 교훈을 남겼다면, ‘블루 노웨어는 컴퓨터와 온라인 세상을 무대로 그 이상의 교훈을 다룬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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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하우스
피터 메이 지음, 하현길 옮김 / 비채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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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살 아들을 사고로 잃고 절망감에 빠져있던 에든버러 경찰서 형사 핀 매클라우드는 상부의 지시로 18년 전 도망치듯 떠나온 고향 루이스 섬에 파견됩니다. 한 달 전 에든버러에서 벌어진 것과 동일한 수법의 살인사건이 벌어진데다 피살자가 핀의 지인이기 때문입니다. 가족이 붕괴된 최악의 상황에서 다시는 돌아오고 싶지 않던 고향에 돌아온 핀은 어떻게든 과거와 마주치는 걸 회피하려 하지만 피살자 주변 인물들을 탐문하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망령과도 같은 지난 시간들을 반추하게 됩니다. 지독한 상처만 남긴 첫사랑, 애증으로 뒤얽힌 절친, 따돌림과 폭력으로 얼룩진 유년기, 그리고 떠올리는 것조차 혐오스런 절해고도에서의 2주간의 잔혹한 전통 집단사냥 등 핀에게 있어 루이스 섬은 모든 게 악몽일 뿐입니다.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를 무대로 한 스릴러는 더 북쪽에 있는 북유럽 배경 스릴러와는 또 다른 서늘함을 지니고 있습니다. 특히 독립과 분리를 위한 오랜 투쟁의 역사가 스릴러의 밑바탕에 깔려 있을 땐 특유의 공격적이고 냉소적인 분위기가 그 서늘함을 더욱 강조하곤 합니다. 또 이 작품의 주 무대인 루이스 섬처럼 거칠기 짝이 없는 자연환경과 그에 맞서온 사람들의 지난한 삶이 이야기의 중심축일 경우에는 (작가 본인의 설명대로) “휘몰아치는 바람, 예측할 수 없는 날씨, 깎아지른 절벽과 매서운 파도, 그리고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하는 섬사람들의 가혹한 삶이 서늘함 이상의 공포심을 자극하기도 합니다.

 

맨 뒤에 실린 영국 및 루이스 섬 지도를 보면 주인공 핀의 고향이 얼마나 척박하고 거친 환경인지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사시사철 폭풍우가 몰아치고, 본토와의 거리 탓에 생활양식마저 유폐된 루이스 섬은 지리적기후적심리적 고립감을 자아내며 폐쇄된 공간 특유의 공포를 불러일으킨다.”는 출판사 소개글대로 사실상 이 작품의 실질적인 주인공은 루이스 섬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마치 섬 자체가 사람들의 삶을 꼭두각시처럼 좌지우지한다고 할까요?

그래선지 블랙하우스의 중심서사는 범인 찾기가 아니라 과거의 참혹한 유령들과 18년 만에 정면으로 마주선 핀의 고통과 회한으로 보입니다. 분량으로 봐도 핀이 태어나 섬을 떠나기까지의 시간들을 회상하는 이야기가 더 많아 보이는데, 독자에 따라 그 대목들이 다소 지루하고 느슨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핀이 맞닥뜨려야 할 극적인 엔딩을 위한 필요불가결한 설정이므로 작가가 집요하리만치 세세하게 그려낸 디테일들을 놓치지 말고 차분하게 읽어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루이스 섬에는 수백 년을 내려온 전통이 있습니다. 육지에서 80km나 떨어진 절해고도 안 스커에서 12명의 사냥꾼이 2주에 걸쳐 가넷새의 새끼를 사냥하는 것입니다. 수천 마리의 새끼 새를 잡아 목을 자르고 내장을 꺼내고 염장을 하여 육지로 돌아오는 이 참혹한 전통은 루이스 섬에서는 일종의 성인식으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단 한 번 이 사냥에 반강제로 끌려갔던 핀은 돌이킬 수 없는 일을 겪었고, 그것은 지금까지도 그의 삶을 불안하게 뒤흔드는 악몽입니다. 아들을 잃은 상태에서 영원히 잊고 싶었던 고향에 돌아와 과거의 인물들과 만나며 살인사건을 수사하는 핀의 캐릭터를 더욱 심연처럼 느껴지게 만드는 이 새끼 새 사냥은 왜 표지에 스코틀랜드 호러 스릴러라는 문구가 인쇄됐는지를 120% 공감하게 만드는 설정입니다.

 

핀의 고통스러운 과거에 주력하던 이야기는 막판에 이르러 약간은 막장에 가까운 코드들이 터지면서 살인사건의 진실을 찾아내는 쪽으로 급선회합니다. 동시에 살인사건을 놓고 제각각의 태도를 보여 온 섬사람들의 수상쩍은 행태의 이면도 속속들이 파헤쳐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핀이 마주한 건 미친 듯이 날뛰는 바다와 그 너머에서 자행될 예정인 또 하나의 살육극입니다. 차라리 죽음이 더 편할 것만 같은 최악의 상황이 핀을 기다리고 있는 셈입니다.

 

앞서 언급한대로 핀의 과거 장면이 다소 장황하게 이어질 때는 기대했던 스릴러 서사와 많이 달라 보여서 이른 실망감을 느꼈던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 대목을 견디고 마지막 장에 이른다면 이 작품의 깊이와 무게감이 얼마나 대단한지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루이스 섬 3부작의 첫 편인 이 작품의 후속작을 기대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거친 자연, 폐쇄적인 공간, 잔인한 관습, 그리고 거기에 순응하거나 저항해온 사람들의 일그러진 삶이 한데 빚어낸 독특한 스릴러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꼭 찾아 읽을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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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의 미스터리 키친
이시모치 아사미 지음, 김진아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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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 혹은 요리사가 등장하는 미스터리 가운데 가장 인상 깊게 남은 작품은 기타모리 고의 가나리야 시리즈입니다. 단번에 시선을 잡아 끈 제목에 홀려 읽은 시리즈 첫 편 꽃 아래 봄에 죽기를을 포함 모두 세 작품이 출간됐는데, 출판사 소개글을 그대로 인용하면 뒷골목 맥주바 가나리야의 마스터 구도 데쓰야가 단골손님들의 삶의 비애와 수수께끼를 해결하는 여섯 가지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그 이후로는 딱히 음식이나 요리사가 등장하는 미스터리에 관심을 두지 않았는데, 아무래도 잔혹한 미스터리를 좋아하는 취향 때문에 부드럽고 달달할 게 99% 확실한 소프트 미스터리를 멀리 했던 탓으로 보입니다.

 

그런 제가 한밤의 미스터리 키친을 읽겠다고 결심한 이유는 전적으로 이시모치 아사미의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이 작품 직전에 출간된 절벽 위에서 춤추다는 별 3개라는 야박한 평점을 줬지만 그 전에 읽은 청부살인, 하고 있습니다귀를 막고 밤을 달리다는 각각 4.5, 5개의 높은 평점을 준 바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제겐 믿고 읽을 수 있는 작가라는 뜻입니다.

 

출판사가 명명한 이 작품의 장르는 미식 미스터리입니다. 하지만 그 어떤 범죄도 등장하지 않는 순수한 일상 속 사연들을 다루고 있으니 더 엄밀히 얘기하면 미식 일상 미스터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화자인 나쓰미와 그녀의 남편 겐타, 대학교수이자 안락탐정인 나가에와 그의 아내 나기사, 그리고 그들의 자녀인 초등학생 다이와 사키 등 모두 여섯 명이 등장합니다. 두 부부는 번갈아 자기 집에서 술과 음식을 곁들인 만남을 이어갑니다. 나쓰미-나가에-나기사는 대학시절부터 절친이자 술친구였고 후일 나쓰미가 겐타와 결혼한 뒤에도 이 특이한 술자리는 지속됐습니다. 그러다가 이런저런 사정으로 10여년의 공백이 있었고 이제 예비중년이 된 그들은 다시금 좋은 술과 맛난 음식이 곁들여진 소소한 즐거움을 되찾게 됐습니다.

 

일곱 편의 수록작 모두 같은 형식으로 전개됩니다. 와인, 소주, 사케 등 다양한 주종과 함께 로스트비프, 연어 술지게미 절임, 오징어내장구이 등 맛깔난 안주들로 채워진 술자리에서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가는 도중 화자인 나쓰미가 문득 과거의 어떤 일을 떠올립니다. 그 일들이란 가십거리에 불과한 사소한 것들이지만 모두들 그 뒷이야기 혹은 숨겨진 사연들을 제멋대로 추리하기 시작합니다. 쌍둥이 자매가 서로 다른 날 학원을 다닌 이유, 싱글맘인 후배 여직원이 뒤늦게 이상한결혼을 한 이유, 자녀를 1류 사립학교에 보내려고 애쓰던 부모들이 맞이한 의외의 결과, 완벽한 스펙을 갖춘 남자가 이혼당한 이유, 감상문 숙제를 하기 싫어한 초등 3학년생의 기발한 노림수 등 일상에서 목격할 수 있는 흔한 사연들이 그 추리의 대상입니다.

 

미스터리의 소재를 제공하는 나쓰미와 그녀의 남편 겐타, 그리고 절친인 나기사는 속된 말로 아무거나 막 던지는역할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난상토론이 벽에 부딪힐 때쯤 대학시절부터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 뛰어난 두뇌를 샀다.”라는 말을 들어온 대학교수이자 안락탐정 나가에가 아무도 생각 못한 기발한 발상을 통해 진실을 추리해냅니다. 물론 사연의 당사자들이 그 자리에 없으니 정답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모두가 수긍할 법한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나가에의 추리는 왠지 심심하고 밋밋할 것만 같던 미식 일상 미스터리를 기대 이상으로 흥미진진하게 만들어놓습니다. 주목할 일 없는 작은 단서에서 진실을 찾아낸다든지 의외의 역발상으로 사연 속 인물들의 행동을 설명하는 나가에는 그 어떤 범죄 미스터리 속 명탐정보다 뛰어난 매력을 발산합니다. 거기에 읽기만 해도 군침이 도는 술과 안주가 곁들여져 있으니 본격 식욕자극 미스터리라는 출판사의 홍보카피에 고개가 끄덕여질 만도 합니다.

 

저 역시 이번에 알게 됐지만 이 작품에는 전작이 있습니다. 2016년에 국내에 소개된 나가에의 심야상담소가 그것인데, 화자인 나쓰미와 안락탐정 나가에, 그리고 그와 결혼한 나기사가 대학생이던 시절 자신들의 술자리에 초대된 손님들의 사연에 감춰진 미스터리를 풀어가는 이야기라고 합니다. ‘한밤의 미스터리 키친을 먼저 읽은 제겐 프리퀄이 돼버린 작품인데, 그들의 젊은 날의 치기와 열정 역시 언젠가는 꼭 한 번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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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번째 여름이 남긴 기적
나타엘 트라프 지음, 이정은 옮김 / 북플라자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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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서점의 소개글에는 없는 약간 상세한 내용이 포함돼있습니다. 스포일러는 아니지만 아무 정보 없이 책읽기를 즐기는 독자라면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2018, 프랑스의 소도시 발미쉬르라크의 마르셀비알뤼 고등학교에 다니는 레오는 6일 앞으로 다가온 학년말 축제 때문에 긴장상태입니다. 짝사랑하는 발랑틴을 어떻게든 축제 파트너로 만들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런 가운데 거리 곳곳에 30년 전인 1988년 축제의 밤에 호숫가에서 사체로 발견된 17살 여고생 제시카를 추모하는 포스터가 걸립니다. 당시 목격자는 제시카의 몸에 폭행의 흔적이 있다고 증언했지만 경찰은 단순사고로 결론을 냈습니다. 그 포스터를 볼 때까지만 해도 레오는 자신과는 무관한 과거의 일로 여겼지만, 다음날 아침 눈을 뜨자마자 믿기 어려운 엄청난 혼란에 빠지고 맙니다. 달력은 제시카가 살해당하기 6일 전인 19886월이었고, 얼굴과 몸도 자신이 아닌 낯선 사람의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굳이 장르를 따지자면 타임슬립 청춘 성장소설살인 미스터리가 곁들여진 흥미로운 작품입니다. 타임루프. 타임리프, 타임워프, 타임슬립 등 시간을 자유자재로 활용하는 작품들이 워낙 많아서 더는 새로운 이야기가 나올 것 같지 않지만, ‘7번째 여름이 남긴 기적은 나름대로 독창적인 서사를 펼쳐 보입니다.

 

우선 하루가 두 번씩 반복되고 있다. 한 번은 1988, 또 한 번은 2018.”(p104)이라는 설정이 눈길을 끄는데, 말하자면 1988년의 월요일을 산 레오는 다음날엔 2018년의 월요일을 살게 된다는 뜻입니다. 레오가 두 번의 하루를 사는 건 모두 6일이며, 마지막 날은 1988년과 2018년 모두 축제일입니다. 특히 1988년의 그날은 제시카가 살해든 사고든 죽음을 맞이한 날이기도 합니다.

두 번째는 1988년의 6일 동안 레오가 매일 다른 인물이 되어 잠에서 깨어난다는 점입니다. 물론 모두 제시카와 관련된 인물인데 때론 여학생의 몸으로 깨어날 때도 있어서 레오를 당혹스럽게 만들기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과거를 바꿔도 현재는 달라지지 않는다.”라는 타임슬립 서사의 원칙에 정면으로 도전한다는 점입니다. 레오는 매번 다른 인물로 1988년의 하루를 살아갈 때마다 이른바 자유의지운명에 대해 심각한 고민에 빠지곤 합니다. 특히 자신이 빌린 몸의 주인들이 30년 후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잘 아는 경우에는 고민이 더욱 깊어지는데, 자유의지로 반짝반짝 빛나던 1988년의 17살 청춘이 30년 후 꼴사납거나 우울한 중년으로 전락하는 게 과연 피할 수 없는 운명일까, 라는 근본적인 질문에 맞닥뜨리기 때문입니다. 미래를 바꿔서는 안 된다는 걸 잘 알면서도 레오는 소소한 말과 행동으로 변화를 시도해보기도 하는데, 그 결과는 다음날인 2018년이면 레오의 눈앞에 즉시 나타나곤 합니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말입니다.

 

이야기의 대부분은 1988년이든 2018년이든 17살 청춘의 열정과 사랑과 고민은 비슷하다는 점, 그리고 현재와 미래를 좀더 빛나게 하기 위해 이리저리 발버둥치지만 현실은 좀처럼 청춘들에게 희망 한 조각 쉽게 내주지 않는다는 점을 그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루하루 지날수록 레오와 독자를 사로잡는 건 실제 1988축제날 죽음을 맞이한 제시카가 레오가 존재하는 1988에 과연 다른 운명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인지 여부입니다. 레오의 목표는 어떻게든 제시카의 죽음을 막는 것이지만 그것은 2018년 현재를 어마어마하게 뒤바꿔버리는 일이기 때문에 작가가 어떤 엔딩을 선사할지 무척 궁금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청춘 성장소설의 분위기가 워낙 강해서 타임슬립 미스터리에 큰 기대를 건 독자에겐 다소 심심하게 읽힐 수도 있지만, 그리 길지 않은 분량인데다 프랑스 작품임에도 쉽고 평이한 문장들로 이뤄져서 금세 마지막 장까지 달릴 수 있는 작품이니 관심 있는 독자라면 한번쯤 찾아 읽을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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