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백의 길
메도루마 슌 지음, 조정민 옮김 / 모요사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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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 출신의 '행동하는 작가' 메도루마 슌의 소설집 혼백의 길은 태평양전쟁 막바지인 19454월에 벌어진 오키나와 전투가 80년이 흐른 현재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뇌리에 남긴 비극과 트라우마를 그린 작품입니다. 나라와 시대를 불문하고 전쟁의 참상과 비극을 그린 문학작품에 관심이 있다 보니 오키나와 전쟁을 둘러싼 다섯 가지 이야기라는 띠지 카피에 저절로 눈길이 끌렸고, 그동안 어설프게만 알고 있던 그 전투의 이면을 들여다보고 싶어졌습니다.

 

지금은 유명 여행지로만 알려져 있지만 오키나와의 역사는 눈대중으로만 훑어봐도 안타까운 마음이 들 정도로 참혹합니다. 류큐국이란 이름으로 존재하다가 일본 영토에 강제로 병합됐지만 본토 사람들에게 멸시와 냉대를 받았고, 이 작품의 한국어판 서문대로라면 “1920~30년대 일본 본토에서는 식당 앞에 '조선인, 류큐인 사절'이라는 벽보가 붙기 일쑤였습니다. 패전의 기운이 명확해진 1945년에 벌어진 오키나와 전투는 연합군과 일본군의 희생도 컸지만 오키나와 주민 네 명 중 한 명의 목숨을 앗아간 엄청난 참극으로 기록됐습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현재의 오키나와는 본섬의 20%를 주일미군의 기지에 점령당한 채 과거의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수록된 다섯 편 가운데 대부분은 이제 80~90대에 이른, 즉 당시 10대 소년소녀였던 인물들이 주인공입니다. 80년이 흐른 뒤에도 전쟁이 남긴 악몽과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한 노년의 주인공들이 우연 또는 필연처럼 과거와 조우하곤 잊고 싶지만 결코 잊히지 않을 기억을 떠올리는 이야기들이 전개됩니다.

공습을 당해 후퇴하던 도중 중상을 입은 채 죽여 줘라며 매달리는 한 여성의 간청을 외면하지 못해 칼을 빼들었던 남자(‘혼백의 길’), 전쟁터에서 살아남기 위해 끔찍한 짓을 저질렀던 일들을 회상하는 남자들(‘이슬’), 연합군과 일본군 사이에서 스파이로 오인당해 살해된 아버지를 둔 남자가 40년 만에 아버지 살해범과 마주친 이야기(‘() 뱀장어’), 미군기지 건설현장을 착잡하게 바라보던 80대 여성이 전쟁의 와중에 남동생을 잃었던 그날을 떠올리는 이야기(‘버들붕어’), 15살에 전쟁에 동원됐다가 이웃남자를 스파이로 고발한 일 때문에 평생을 죄책감에 사로잡혀 살아온 90살 남자(‘척후’) 등 애초 전쟁 따위에 휘말릴 이유가 없었던 평범한 사람들의 잔혹한 운명을 그린 이야기들이 실려 있습니다.

 

전쟁이 남긴 상흔은 예외 없이 비슷한 형태를 지니고 있습니다. 읽는 내내 한국전쟁과 제주 4.3항쟁을 다룬 우리 소설과 2차 대전을 다룬 외국소설이 자연스레 생각이 났는데, 그 작품들의 공통점이라면 전쟁의 비극은 실제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터보다 겁에 질려 숨거나 도망쳐야만 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터전에서 더 잔인하게 벌어진다는 사실입니다. ‘혼백의 길역시 같은 궤도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데, “오키나와 전쟁을 둘러싼 다섯 가지 이야기가 조금 더 특별하게 읽힌 건 80년이 지난 지금도 미군 기지에게 점령당한 채 과거의 상흔을 반강제로 되새김질해야만 하는 오키나와 사람들의 역설적인 처지 때문입니다. 작가 메도루마 슌은 미군기지 건설현장에서 해상 시위를 벌일 정도로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작가입니다. 그런 그가 자신이 나고 자란 오키나와의 비극을 정면으로 그려낸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며 출판사 소개글대로 오키나와 안팎의 폭력을 겨냥한 결연한 문학적 응전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딱히 오키나와의 역사에 관심이 없더라도 전쟁의 참상과 비극을 진지하게 마주하고 싶은 독자라면 메도루마 슌의 혼백의 길을 읽어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더불어 한국전쟁을 무대로 한 비슷한 서사를 맛보고 싶다면 (이제는 고전이라고 해도 괜찮을) 임철우의 아버지의 땅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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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 나라
오카자키 다쿠마 지음, 구수영 옮김 / 내친구의서재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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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입니다.

 

2063, ‘일본의 애거서 크리스티로 불리던 미스터리의 여왕 무로미 교코가 사망한 후 조카인 는 저작권을 물려받아 그녀의 유고인 거울 나라의 출간을 준비합니다. 그런데 교코를 오랫동안 담당했던 편집자가 뜻밖의 의문을 제기하면서 는 혼란에 빠집니다. 그에 따르면 거울 나라원고에 삭제된 부분이 있는 것 같다는 것입니다.

거울 나라40년 전인 2020년대를 배경으로 한 교코의 자전적 소설로 일러두기에 따르면 논픽션에 가까운, 그러니까 실존인물들이 등장한 소설입니다. 외모 때문에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던 세 사람을 비롯하여 모두 네 명의 인물이 등장하는 가운데, 자신들의 삶을 일그러뜨린 과거사를 추적하는 미스터리가 펼쳐집니다.

 


형식, 소재, 캐릭터 등 여러 면에서 독특함을 풍기는 미스터리입니다. 또한 애증, 죄책감, 자기혐오, 이기심 등 사람과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갖가지 어둡고 불온한 감정들을 집요하게 그려낸 안타까운 비극 서사이기도 합니다. 흥미로운 건 미스터리와 비극의 중심에 루키즘(외모지상주의) 또는 외모와 관련된 질병이 자리 잡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야기의 본체라 할 수 있는 액자소설 거울 나라를 이끌어가는 건 네 명의 남녀입니다. 아이돌로 데뷔할 정도로 외모가 빼어나지만 신체이형장애(평균보다 외모가 뛰어난데도 불구하고 특정 부위에 대한 불만족 또는 혐오감이 지나친 나머지 자신을 추하거나 못났다고 여기며 극심한 콤플렉스에 빠지는 정신적 질병)에 시달리는 웹 미디어 편집자 히비키, 어린 시절 화재로 얼굴에 화상을 입었지만 지금은 카메라 필터로 상처를 가린 채 라이브 스트리머로 활동하고 있는 사토네, 안면인식장애 때문에 연인과 직장을 잃은 적 있는 셰프 이오리, 그리고 히비키의 직장선배이자 그녀에게 특별한 관심을 품고 있는 다쿠미가 그들입니다.

15년 전, 히비키가 선물한 향초가 일으킨 화재 때문에 사토네는 얼굴에 화상을 입었고, 그로 인해 히비키는 오랜 시간 죄책감에 사로잡힌 채 살아왔습니다. 극적으로 재회한 두 사람은 그 당시 잠시 이웃에 머물렀던 동갑내기 소년 이오리와도 우연히 만나는데, 이들은 15년 전의 화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던 중 그것이 히비키가 선물한 향초 탓이 아닐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떠올리게 됩니다. 히비키의 직장선배 다쿠미까지 가세하여 조사에 나선 가운데 네 사람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15년 전의 진실과 마주칩니다.

 

이야기의 중심축은 네 사람에 의한 진상 추적 미스터리입니다. 하지만 미스터리 못잖게 눈길을 끄는 건 신체이형장애, 얼굴에 입은 화상, 안면인식장애 등 형태는 달라도 하나같이 외모와 관련하여 고통스러운 삶을 살고 있는 세 인물 사이의 미묘한 관계와 감정들입니다. 15년 전부터 서로를 알아온 히비키와 사토네와 이오리는 죄책감, 애증, 의심, 고마움 등 엇갈린 감정을 품으면서도 동시에 아슬아슬한 삼각관계를 이루기도 합니다. 거기에 히비키에게 특별한 관심을 품은 다쿠미까지 끼어들면서 이야기는 미스터리와 비극 외에 치정의 분위기까지 풍깁니다. 그리고 이리저리 뒤섞였던 서사들은 미스터리의 진실이 밝혀지는 순간 일제히 한 방향으로 치달으며 독자의 뒤통수를 강하게 내리칩니다.

 

현재의 는 교정지를 거듭 읽으면서도 편집자가 주장한 삭제된 내용을 좀처럼 찾아내지 못하는데, 독자 역시 삭제된 내용이 과연 있긴 있는 건지, 만약 있다면 미스터리를 뒤집는 반전일지 혹은 네 사람의 운명에 관한 내용일지 궁금증을 품을 수밖에 없습니다. 막판에 뜻밖의 방식으로 공개된 삭제된 내용은 미스터리의 여왕 무로미 교코가 유고 거울 나라를 통해 감추려고 했던 또는 드러내려고 했던 진실을 찬찬히 설명하는데, 이 대목에 이르러서야 독자는 교코와 소설 속 인물들과 현재의 가 품고 있는 복잡미묘한 감정들을 제대로 들여다볼 수 있게 됩니다.

 

거울 나라는 치밀하고 정교한 미스터리라기보다는 외모로 인해 고통스러운 삶을 살던 인물들이 어떻게든 각자의 상처에서 벗어나려 발버둥치는 안타까운 비극의 기운이 더 강한 작품입니다. 정통 미스터리를 기대한 독자에겐 다소 느슨하게 읽힐 수도 있지만, 워낙 감정선들이 세고 독한데다 외모지상주의에 관한 사회파 미스터리의 분위기도 만끽할 수 있어서 신선한 책읽기가 될 수 있을 거란 생각입니다.

오카자키 다쿠마의 대표작인 커피점 탈레랑의 사건 수첩시리즈는 라이트한 일상 미스터리 같아서 읽을 생각을 안 했는데, ‘거울 나라를 읽고 나니 기회가 되면 한 편쯤은 찾아보고 싶다는 욕심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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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작은 무법자
크리스 휘타커 지음, 김해온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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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입니다.

 

7살 소녀 시시 래들리를 죽이고 살인죄로 수감됐던 빈센트 킹이 30년 만에 출소한다는 소식에 해안도시 케이프 헤이븐의 분위기는 뒤숭숭해집니다. 하지만 당시 15살 동갑으로 빈센트와 단짝이었던 경찰서장 워크는 그의 출소와 귀향을 누구보다 반기고 기뻐합니다. 다만 죽은 시시의 언니이자 자신과 빈센트의 소꿉친구이기도 했던 스타 래들리를 생각하면 마음이 착잡해집니다. 스타는 어린 남매 더치스와 로빈을 두고도 술과 약에 중독돼 툭하면 응급실에 실려 가곤 했고, 워크는 그런 스타 가족을 각별하게 지켜보며 도움을 줘왔기 때문입니다. 빈센트의 귀향이 스타 가족에게 미칠 영향 때문에 고심하던 워크는 별 풍파 없이 시간이 흐르자 안심하지만 어느 날 빈센트로부터 충격적인 전화를 받습니다. 자신이 스타를 죽였다는 것입니다.

 


나의 작은 무법자는 작은 해안도시에서 벌어진 끔찍한 사건이 30년에 걸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망가뜨리고 피폐하게 만들었는지를 보여주는 비극적인 서사이자, 30년 만에 다시 벌어진 살인사건의 진상을 조사하는 범죄소설이며,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에 시작되어 아직도 진행 중인 비극에 휘말린 13살 소녀 더치스의 복수극과 성장기를 그린 작품입니다.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건 과거에 매달린 채 고통스런 30년을 살아온 경찰서장 워크와 스스로 무법자임을 자처하며 자신 앞에 놓인 지독한 현실에 저항하는 13살 소녀 더치스입니다.

30년 전의 사건은 워크에게 가혹한 운명을 강요했습니다. 단짝 빈센트는 살인죄로 성인 교도소에 수감됐고, 소꿉친구였던 스타는 동생을 잃은 뒤 엄마마저 자살한 여파로 삶이 망가져버렸습니다. 자신의 잘못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죄책감에 사로잡혔던 워크는 오랜 시간 동안 가해자인 빈센트와 피해자인 스타 모두에게 진심을 다해왔지만, 30년 만에 출소한 빈센트가 스타를 살해하고 자수하자 말할 수 없는 충격에 빠집니다.

더치스는 불과 13살이란 나이에 세상의 막장과 마주한 소녀입니다. 술과 약에 찌든 엄마 대신 5살 동생 로빈을 지켜야 하는데다, 비열한 방식으로 자신과 동생을 공격하는 자들에게 맞서는 게 일상이다 보니 결코 평범한 13살이 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더치스는 스스로를 무법자라 자칭하며 거친 욕설과 폭력으로 무장한 채 힘든 나날들을 견뎌내지만 엄마 스타가 무참하게 살해당한 뒤엔 속절없이 무너지고 맙니다. 이후 외할아버지 핼의 농장에 머무는 동안 더치스는 세상 어디에도 없는 진정한 무법자로 성장합니다.

 

이 작품의 원제는 본문에 종종 등장하는 끝은 또 다른 시작이다.”라는 대사를 의미하는 ‘We Begin at the End’지만, 개인적으론 13살 소녀 더치스를 강조한 나의 작은 무법자라는 번역 제목이 훨씬 더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30년의 망령에 집착한 채 살인사건 미스터리를 담당한 워크의 이야기보다 스스로 무법자가 되기 위해 분투하는 더치스의 복수극과 성장기가 더 강렬하고 매력적으로 읽혔기 때문입니다. “난 무법자 더치스 데이 래들리다. 네놈은 겁쟁이 놈팡이고, 내가 네놈 목을 깔끔하게 날려주마.”라는 무자비한 대사와 함께 자신을 공격하는 자라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덤벼드는 더치스는 말 그대로 야생마 같은 날것의 힘을 폭발시키곤 합니다. 또한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에 벌어진 비극의 무게에 짓눌려 평범한 13살로 살아갈 길을 빼앗긴 더치스가 세상과 맞서 싸우는 대목에선 동정이나 연민 이상의 애틋함마저 느낄 수 있는데, 그래선지 마지막 반전과 함께 더치스에게 찾아온 가혹한 운명을 읽을 땐 가슴 한쪽이 시려올 정도였습니다.

 

등장인물도 많고 그 관계도 복잡하고 운명적으로 설정된 데다 사건의 비극성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참담하고, 각 인물들이 속에 품은 감정들 역시 하나같이 지독하거나 극단적이어서 결코 쉽고 편하게 책장을 넘길 수 있는 작품이 아닙니다. 이야기의 흐름 역시 완만하고 묵직한 편인데, 속독에 익숙하거나 성격 급한 독자라면 단선적인 구도에도 불구하고 느리게 진행되는 미스터리와 집요하고도 때론 넘쳐 보이는 풍경 및 심리 묘사 때문에 중반부쯤 살짝 느슨함과 지루함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어려움들은 진실이 밝혀지는 막판에 이르러 수십 배는 거뜬히 넘을 만큼 충분히 보상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작가가 왜 그토록 복잡하고 느리고 완만한 서사를 쌓아왔는지를 제대로 이해하게 됩니다.

 

단순한 범죄스릴러나 미스터리 이상의 문학성 짙은 장르물을 찾는 독자라면 한국에 처음 소개된 크리스 휘타커의 나의 작은 무법자를 꼭 읽어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무엇보다 13살 소녀 더치스가 진정한 무법자로 성장하는 지난하고 고통스런 과정을 다른 독자들도 공유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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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황홀한 순간
강지영 지음 / 나무옆의자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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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입니다.

 

사랑에 실패하고 고향 연향으로 돌아와 역 앞 매점을 떠맡게 된 24살의 김하임은 자신의 보잘 것 없는 운명과 사랑 때문에 마음이 늘 신산합니다. 그러던 중 우유식빵 같은 역무원 윤지완에게 반하게 됐고 조금씩 그와의 거리를 좁혀갑니다. 하지만 어느 날 윤지완이 역 앞에서 피부가 가무잡잡한 한 여자와 수상쩍은 모습을 보이자 불안감에 사로잡힙니다.

10대 때 염희태에게 겁탈을 당한 뒤 임신까지 하자 집을 나왔던 이무영은 10년 만에 그와 우연히 만나 살림을 합칩니다. 하지만 염희태의 악마성은 여전했고 이무영과 딸 민아는 가혹한 폭력에 시달리며 고통스런 나날들을 보냅니다. 그러던 어느 날 끔찍한 사건이 벌어졌고, 이무영의 가족은 어쩔 수 없이 서울을 떠나 연고도 없는 연향으로 거처를 옮깁니다.

 


거의 황홀한 순간사랑이 태어나서 죽는 자리라는 사연 많은 지명을 가진 서울 근교의 소도시 연향을 무대로 김하임과 이무영, 두 여자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입니다. ‘1월 김하임’, ‘1월 이무영으로 이어지다 마지막 챕터 ‘12월 김하임에 이르는 독특한 구성도 눈길을 끌었지만, 전혀 다른 결을 지닌 두 여자의 삶을 전혀 다른 장르를 통해 풀어내다가 서술트릭의 반전과 함께 극적인 엔딩에 이르게 만드는 신선한 서사가 가장 기억에 남았습니다.

 

김하임의 챕터가 운명과 사랑 때문에 고민하는 20대의 달달한 로맨스이자 통일호와 홍익매점이 남아있던 2000년대 초반의 어느 중소도시에서 아직 사랑을 믿는 사람들의 이야기라면, 이무영의 챕터는 10대 시절부터 폭력과 강간에 시달린 한 여성의 비극이자 딸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목숨까지 내걸 수 있는 한 엄마의 투쟁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김하임의 챕터가 오쿠다 히데오의 남쪽으로 튀어!’를 떠올리게 했다면, 이무영의 챕터는 덴도 아라타의 젠더 크라임을 연상시켰다고 할까요?

 

전혀 만날 일이 없을 것 같던 두 여자의 삶은 이무영이 가족과 함께 연향에 머물게 되면서, 그리고 우유식빵 같은 매력적인 역무원 윤지완으로 인해 미묘한 접점을 갖게 됩니다. 곁을 주는 듯 하면서도 더 이상 다가오지 않는 윤지완에게 서운해 하던 김하임은 어느 날 갑자기 그의 옆에 나타난 피부가 가무잡잡한 여자 때문에 또다시 사랑에 실패하는 건 아닌가, 불안해집니다. 한편 윤지완의 어머니가 운영하는 감자탕 집에 몸을 의탁한 이무영은 한편으론 염희태의 폭력 속에 딸 민아를 지켜내기 위해 분투하면서도 또 한편으론 자신에게 호의를 베푸는 윤지완에게 특별한 감정을 품기도 합니다.

로맨스와 스릴러가 묘하게 뒤섞인 가운데 정체불명의 불안감을 뿜어내던 이야기는 마지막에 이르러 뜻밖의 진실을 폭로하면서 독자에게 여러 감정이 혼재된 짙은 여운을 전달합니다.

 

이무영의 챕터가 긴장감과 속도감을 갖춘 몰입도 높은 스릴러인 반면, 김하임의 챕터는 다소 가벼운 20대의 로맨스에다 엉뚱한 가족 이야기(번개를 맞고 우주신이 된 할아버지, 단역에서 출발하여 유명 스타가 된 엄마, 그런 엄마의 로드매니저를 자청하는 아빠)가 곁들여져 있어서 마치 두 발을 냉탕과 온탕에 하나씩 담근 듯한 묘한 느낌을 선사합니다. 무엇보다 두 여자의 본격적인 접점이 언제쯤, 어떻게 이뤄질까 궁금하면서도 거의 종반부까지 눈에 띄지 않아서 살짝 지루함을 느낄 수도 있는데, 그래선지 2/3쯤까지만 해도 별 4개 정도의 무난한 작품이려니, 생각했던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막판에 단 한두 줄에 의해 트릭이 밝혀지는 순간 잠시 멍해지며 앞서 전개된 이야기들을 찬찬히 되새기게 되는데, 그 트릭을 제대로 이해하자마자 반전의 짜릿함과 함께 이 작품의 진가를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실은 작가는 군데군데 눈에 보일 듯 말 듯 단서와 복선을 숨겨놓았습니다. 조금이라도 위화감이 느껴지는 대목을 기억해두며 페이지를 넘긴다면 막판 반전과 트릭의 쾌감을 좀더 진하게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다양한 장르와 서사를 통해 늘 새로운 이야기를 풀어내는 강지영의 매력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어서 좋았고, 특히 서술트릭이라는 의외의 방식으로 전혀 결이 다른 두 이야기를 한데 묶어낸 필력이 매력적이었습니다. 300페이지가 채 안 되는 짧은 분량이지만 그 이상의 탄탄하고 농도 짙은 이야기가 실려 있으니 구미가 당기는 독자라면 관심을 가져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사족으로... 인터넷서점의 출판사 소개글은 이 작품의 줄거리를 너무 상세하게 공개해놓았습니다. 가급적이면 표지 앞뒷면의 카피 정도만 훑어본 뒤 본편을 읽기를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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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의 집 헬렌 그레이스 시리즈
M. J. 알리지 지음, 김효정 옮김 / 북플라자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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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진 해변에서 최소 3~4년 전에 살해당한 것으로 보이는 젊은 여성의 사체가 발견됩니다. 현장을 살피던 사우샘프턴 중앙경찰서 강력범죄수사팀의 헬렌 그레이스는 즉각 연쇄살인의 가능성을 떠올립니다. 한편 실종된 루비라는 여성에 대해 조사하던 중 동일범에게 납치된 것이 분명한 정황을 발견합니다. 헬렌은 두 여성 외에도 더 많은 피해자가 있을 것으로 보고 수사를 확대합니다. 하지만 사사건건 자신에게 반기를 드는 헬렌을 눈엣가시처럼 여기는 상관 세리 하우드는 어떻게든 그녀를 내쫓거나 몰락시키기 위해 악랄한 수법을 고안하기에 이르고, 헬렌은 최대의 위기에 빠지고 맙니다. 한편 정체불명의 남자에게 납치돼 지하실에 감금된 루비는 자기보다 먼저 납치됐던 여자들의 흔적을 발견하곤 말할 수 없는 공포에 휩싸입니다.

 


인형의 집이니미니’, ‘위선자들에 이은 헬렌 그레이스 시리즈세 번째 작품입니다. 헬렌은 잇따라 연쇄살인사건을 해결해 국민적 관심과 명예를 얻은 뛰어난 형사지만, 개인적으론 몸과 마음이 불행과 상처로 뒤덮인 인물이기도 합니다. 가족으로 인한 심각한 트라우마를 지니고 있고, 공식적인 관계 외엔 누구에게도 곁을 내주지 않으며, 견딜 수 없는 죄책감에 사로잡힐 때면 SM클럽에 가서 채찍질로 스스로에게 벌을 주곤 합니다. ‘뛰어나지만 상처투성이인 스릴러 주인공중에서도 꽤 도드라지는 캐릭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번에 헬렌이 쫓는 연쇄살인범은 특정한 외모의 젊은 여성만 골라 납치 살해하는 사이코패스입니다. 하지만 외모 상 공통점 외엔 피해자들의 처지가 모두 제각각이라 헬렌과 강력팀의 수사는 제자리를 맴돌거나 엉뚱한 헛발질만 반복합니다. 그런 와중에 헬렌은 자신을 증오하는 상관 세리 하우드가 파놓은 함정에 빠져 경찰이 된 뒤 가장 큰 위기에 봉착합니다. 전출 정도로 끝나지 않고 자칫 파면 혹은 체포될 상황까지 이르자 헬렌은 모든 것을 건 위험천만한 반격을 시도합니다.

헬렌의 수사과정과 나란히 병행되는 건 어딘지 알 수 없는 지하실에 감금된 채 납치범의 기이한 행각에 시달리며 고통스런 시간을 견디는 루비의 이야기입니다. 저항과 체념을 반복하는 가운데 루비의 생명은 하루하루 꺼져갈 뿐입니다.

 

사건 못잖게 눈길을 끈 대목이 두 군데 있는데, 하나는 경찰 내부의 알력과 갈등이 흥미진진하고 긴박하게 그려진 점이고, 또 하나는 선악을 불문하고 거의 모든 인물에게 가족의 비극이란 서사를 부여한 점입니다. 헬렌과 세리 하우드의 충돌뿐 아니라 강력팀 형사들 간에 승진과 실적을 놓고 벌이는 경쟁도 치열하게 벌어지는데. 때론 선의를 넘어 악의와 탐욕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가족의 비극은 실은 헬렌 그레이스 시리즈의 숙명과도 같은 소재입니다. 주인공 헬렌의 캐릭터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이 괴물이나 다름없던 부모와, 지독한 애증을 주고받은 끝에 파멸에 이른 언니로 인한 트라우마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번엔 헬렌 못잖게 다양한 인물들 - 경찰, 피해자, 유족, 범인 - 에게도 엇비슷한 무게의 가족의 트라우마가 부여됐고, 그래선지 캐릭터는 전작들에 비해 더욱 생생해졌고, 이야기 전체의 볼륨감 역시 두터워진 느낌이었습니다. 사이코패스, 불륜, 마약 등 끔찍한 이유로 가족을 잃은 경우도 있고, 애증이 뒤섞인 가운데 남보다도 못한 관계를 이어가며 점차 서로를 잃어가는 가족도 있습니다. 누구보다 가족이란 말에 예민한 헬렌은 수사 과정 내내 타인의 가족들이 겪는 비극을 지켜보며 복잡한 감정에 빠져들곤 합니다.

 

여러 이야기 가운데 재미와 관심을 끈 순서대로 나열하면 헬렌과 세리 하우드의 충돌 경찰 내부의 알력과 갈등 가족의 비극 연쇄 납치살인사건입니다. 말하자면 가장 재미있었어야 할 미스터리 스릴러 서사가 기대에 비해 아쉬웠다는 뜻입니다. 수사 과정도, 범인의 정체와 동기도, 막판 반전도 대체로 단선적이고 덜 매력적이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페이지는 전작들처럼 엄청 잘 넘어가고, 빠른 템포와 속도감 역시 여전했으며, 개성 강하고 사연 많은 인물들에 대한 몰입도도 대단했지만 사건 자체의 힘이 다소 부족했다는 게 저의 총평입니다.

 

영국에선 헬렌 그레이스 시리즈12(2024‘Forget Me Not’)까지 출간됐지만, 한국엔 3인형의 집’(영국 2015, 한국 2016)을 끝으로 더는 소식이 없습니다. 성적 부진이 원인인지, 다른 이유가 있는지 알 순 없지만, 매력 만점의 주인공 헬렌의 이야기를 세 편밖에 읽지 못하게 된 건 그저 아쉽고 또 아쉬운 일입니다. 9년의 공백을 깨고 신작 소식이 들려올 가능성은 별로 없지만, 그래도 언젠가 헬렌의 활약을 다시 한 번 맛볼 수 있기를 고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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