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참자 재인 가가 형사 시리즈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난주 옮김 / 재인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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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 3편인 악의부터 7붉은 손가락까지 네리마 경찰서 소속이던 가가는 이 작품부터 니혼바시 경찰서로 소속을 옮깁니다. (시리즈 1졸업에선 대학생으로, 2잠자는 숲에서는 경시청 수사1과 소속으로 등장합니다.) 낯선 곳에 부임한 터라 스스로 신참이라 자칭하며 사건 수사와 함께 니혼바시의 곳곳을 익히고 배우는 모습이 함께 전개됩니다.

 

이 동네에 대해 공부하는 중입니다. 이른바 신참이죠.” (p354)

 

첫 출간 당시 읽었을 때 느꼈던 당혹감이 지금도 기억나는데, 45세 여성이 살해당한 사건을 추적하는 미스터리지만 이야기의 대부분은 사건과는 무관한 휴먼 일상미스터리처럼 전개되기 때문입니다. 모두 아홉 편의 연작단편이 실려 있는데, 범인을 체포하고 사건의 진상을 밝혀내는 마지막 편 외에 모든 수록작이 탐문 대상자인 니혼바시 사람들이 품고 있던 내밀한 사연이나 비밀을 가가 형사가 풀어주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 살인사건과는 무관한, 탐문 대상자들만의 개인적인 문제들을 본의 아니게 가가가 해결해주는 구조라고 할까요? 암에 걸린 어머니 때문에 고민하는 아들, 호스티스에게 돈을 갖다 바치는 남편 때문에 열받은 요릿집 여주인, 감당할 수 없는 고부 갈등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은 남자, 남자와 눈이 맞아 집을 나간 딸 때문에 격분한 아버지 등 사건 자체와는 무관하지만 목격자 또는 용의자인 탐문 대상자들의 문제를 지혜롭게 해결하는 가가의 모습은 또 다른 매력을 발산합니다.

 

가가 씨는 사건 수사를 하는 게 아니었나요?”

사건 때문에 마음의 상처를 받은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 역시 피해자입니다. 그런 피해자들을 치유할 방법을 찾는 것도 형사의 역할입니다.” (p278)

 

그렇다고 해서 가가가 살인사건 수사에 소홀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수사에 집중한 덕분에 탐문 대상자들이 감추거나 고민하고 있는 문제들을 자연스레 알게 되고 그 해법과 조언을 진심을 담아 건네곤 합니다. 안 그래도 사소한 단서와 평범한 진술 속에서 진실과 진상을 알아내는데 탁월한 능력을 지닌 가가가 동네에 대해 공부하는 신참의 자세를 성실하게 견지했기에 누구도 쉽게 알아차릴 수 없는 내밀한 사연들을 눈치 챌 수 있게 된 셈입니다. 부임한지 얼마 되지도 않은 가가가 센베이 가게 젊은 딸에게 가가 형사님! 또 땡땡이치는 거에요?”라는 정감어린 꾸중을 듣는 대목은 이 작품의 재미가 함축된 장면입니다.

 

에도 문화가 상당히 많이 남아있는 동네 니혼바시라는 무대는 스토리 못잖게 눈길을 끄는 정감어린 곳입니다. 개인적으로 일본 여행지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이 규슈의 히타(日田)인데, 시대물 배경으로도 손색없는 그곳의 조용한 정취가 무척 인상적이기 때문입니다. 니혼바시 역시 곳곳에 노포가 자리 잡은 올디스 벗 구디스의 향기가 진한 곳으로 묘사돼있습니다. 그곳의 속살을 기웃거리며 하나하나 배워나가는 가가의 모습은 미스터리와는 또 다른 볼거리임에 틀림없습니다.

 

여러 사람들의 사연을 풀어주며 조금씩 진상에 다가가던 가가는 마지막까지 그다운 카리스마와 따뜻한 온기를 전해줍니다. 가가의 예리한 추리와 탐문 덕분에 범인은 체포되고 상부는 사건을 마무리하려 하지만 바로 그 시점에 가가는 범행 이면의 진짜 사연을 밝혀냅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작가는 가가가 냉정한 형사지만 동시에 얼마나 상대를 배려하는 속 깊은 인물인지를 잘 그려냅니다. 그의 새 상사인 니혼바시 경찰서장은 이번에 좀 재미난 형사를 데려왔다. 머리는 좋은데 삐딱하고 고집이 세다.”라고 표현하지만 이 작품을 읽은 독자라면 형사들이 가가를 절반만 닮는다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 작품 말미에 처음으로 가가가 왜 경시청에서 네리마 경찰서로 좌천됐는지 잠깐 설명이 됩니다. 살인사건 재판에서 변호 측 증인, 즉 범인을 비호하는 증언을 한 탓에 유족들의 항의가 이어지자 좌천됐다는 점만 설명될 뿐 구체적으로 어느 사건인지까지는 묘사되지 않지만 이 시리즈를 읽어온 독자라면 가가가 유일하게 경시청 형사로 등장했던 두 번째 작품 잠자는 숲을 자연스레 떠올리게 될 것입니다. 물론 추정일 뿐이지만 말입니다.

 

이제 가가 형사 시리즈 다시 읽기도 단 두 편만을 남겨놓고 있습니다. 제 기억으로 남은 두 편 모두 정통 미스터리와 함께 가슴 아픈 사연들이 전개되는데, 그래서인지 더는 가가 형사를 볼 수 없다는 사실이 더 안타깝게 느껴집니다. 아껴 읽고 싶지만 니혼바시의 신참가가가 또 어떤 성장을 보였을지 궁금해서라도 조만간 두 편 모두 폭주하듯 달리게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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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손가락 현대문학 가가 형사 시리즈 개정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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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매에 걸린 노모,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된 아내, 제멋대로인 중3 아들과 함께 사는 40대 가장 아키오는 퇴근 직후 끔찍한 광경을 목격합니다. 마당 한쪽에 어린 소녀의 사체가 비닐에 덮여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아들의 소행이란 사실을 아내에게 듣곤 망연자실해집니다. 경찰에 신고하려 했지만 아내는 아들을 살인범으로 만들 수 없다며 목에 가위를 들이대면서까지 반대합니다. 결국 아키오는 소녀의 시신을 유기하지만 다음날부터 경찰의 수사가 시작되자 패닉 상태에 빠집니다. 겁에 질린 상태에서도 아키오와 아내는 끝내 아들의 살인을 은닉하기로 합니다. 그리고 경찰을 속이기 위해 누구도 떠올리기 어려운 극단적인 선택을 내립니다.

 

붉은 손가락가가 형사 시리즈의 일곱 번째 작품이지만 시리즈 가운데 한국에 가장 먼저 소개된 작품입니다. 일본에서 2006년에 출간된 작품이 바로 다음 해 한국에 나왔으니 출판사가 최신간을 먼저 소개했다고 볼 수도 있지만, 개인적으론 그때까지 나온 작품 가운데 가장 완성도가 높고 매력적인 작품이라 먼저 출간할 수밖에 없었다는 생각입니다.

 

가정이라는 밀실과 가족애라는 굴레’, 그 어두운 초상이라는 출판사 소개글대로 붉은 손가락은 어린 소녀가 살해된 사건을 통해 평범해 보이던 한 가족의 민낯과 고통, 그리고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을 그립니다. 온기라고는 조금도 남아있지 않던 아키오의 가족은 중3 아들이 저지른 살인사건으로 인해 벼랑 끝에 몰립니다. 이성과 상식이 남아있었다면 순리대로 처리했겠지만 부모의 그릇된 선택은 그나마 형태라도 유지하고 있던 가족을 완전히 산산조각 내버립니다. “현대화에 따른 가족의 해체, 고령화 사회의 노인 문제, 청소년 범죄 등 폭넓고 다양한 문제의식을 작품 속에 담아낸다.”는 옮긴이의 말대로 붉은 손가락은 일본사회가 안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를 아키오의 가족을 통해 가감 없이 드러낸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소한 힌트를 바탕으로 범행에 쓰인 도구와 방법을 밝혀내는 예리한 관찰력의 소유자 가가는 탐문과정에서 느낀 위화감과 잠깐 목격했을 뿐인 평범한 풍경 때문에 아키오의 가족에 주목합니다. 대단한 추리나 번득이는 혜안이나 천재적인 직감이 아니라 그야말로 관찰력의 힘만으로 사건의 진상을 풀어나간다는 뜻인데, 언제나 그랬지만 특히 붉은 손가락에선 그 능력이 진짜 형사들에게 얼마나 필요한 덕목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한 사건의 특성상 기계적으로 범인을 지목하기보다는 스스로 죄를 깨닫기를 기다려주는 인상적인 태도를 취해서 그의 매력을 한층 더 빛나게 만듭니다.

 

사건 못잖게 독자의 눈길을 끄는 건 가가의 가족사입니다. 관할서 형사인 가가의 파트너가 된 경시청 수사1과의 마쓰미야 슈헤이는 가가의 외사촌동생입니다. 아버지 없이 어머니와 함께 자라면서 외삼촌, 즉 가가의 아버지 다카마사에게 큰 도움을 받은 마쓰미야는 그를 존경한 나머지 경찰까지 됐고, 현재 말기암으로 투병중인 그를 극진히 간호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가가가 아버지를 조금도 신경 쓰지 않자 도무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 감정은 수사 도중에도 툭툭 튀어나옵니다. 그러나 가가의 불행한 가족사, 특히 어머니의 가출과 불행한 죽음을 알게 된 뒤론 다카마사를 향한 가가의 감정을 어느 정도 받아들이게 됩니다. (시리즈 마지막 작품인 기도의 막이 내릴 때에서 마쓰미야는 가가와 함께 가가 어머니의 죽음과 관련된 살인사건 수사를 벌입니다.)

 

살인사건에 휘말린 붕괴 직전의 아키오의 가족과 서로에게 너무나도 큰 상처를 입힌 나머지 뿔뿔이 흩어지고 만 가가 가족의 이야기는 미스터리 못잖게 독자에게 묵직한 인상을 남깁니다. 따뜻한 인성을 품었지만 냉철한 형사이기도 한 가가가 평소와 다른 태도로 사건에 임한 건 아마도 산산조각 난 아키오 가족에게서 안타까움을 느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작품을 끝으로 가가는 네리마 경찰서를 떠나 니혼바시 경찰서에 몸담습니다. 그 첫 이야기가 시리즈 여덟 번째 작품인 신참자인데, 역시 붉은 손가락못잖게 매력적인 작품이라 오랜만에 다시 읽을 생각만으로도 기대감에 들뜨게 됩니다. 물론 가가 형사 시리즈가 이제 세 편밖에 남지 않았다는 아쉬움은 그만큼 커졌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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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중괴담 스토리콜렉터 104
미쓰다 신조 지음, 현정수 옮김 / 북로드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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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호러 소설 작가다. ‘는 꽤 오랜 기간 괴담을 수집해왔기에 종종 자신이 겪은 괴이한 일을 들려준다며 그 해석을 요구하는 이들도 있을 정도다. 이번에 는 다섯 명의 사람에게서 기이한 체험담을 듣는다. 일곱 살 때 시골집에 보내져 일곱 밤을 집안에 갇힌 채로 보내면서 겪어야 했던 이상한 체험, 남의 불행을 예고하는 그림을 그리는 아이와 담임교사의 이야기, 어느 무명작가가 종교 단체 시설의 경비원으로 근무하다 경험한 설명할 수 없는 일화, 할머니의 부탁으로 타지의 저택을 찾았다가 알 수 없는 것을 불러내고 만 으스스한 일, 그리고 비 오는 날마다 나타나 괴담을 들려주는 한 가족을 만난 이의 고백 등이 그것이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인용했습니다.)

 

여러 시리즈와 스탠드얼론을 통해 자신만의 독특한 호러 세계를 구축해온 미쓰다 신조의 신작입니다. 무척 좋아하는 작가인데다 한국에 출간된 21편 중 딱 한 편을 제외하고 모두 읽었으니 나름 마니아라고도 자처할 만하지만, 최근 몇 년간 읽은 작품들은 살짝 범작에 가깝다는 인상만 받아서 우중괴담에 거는 기대는 남달랐습니다.

 

출판사의 소개글에서 엿볼 수 있듯 현실에서 벌어진 불가해한 현상과 그것이 몰고 온 공포가 미쓰다 신조 스타일의 서사를 통해 매력적으로 그려집니다. 작가 자신이 라는 화자로 등장하며, 그가 누군가에게서 들은 체험담을 바탕으로 쓴 네 편의 이야기와 그 네 편을 아우르는 마무리 편까지 모두 다섯 편의 호러물이 수록돼있습니다.

미쓰다 신조의 작품 중 본인을 작가이자 화자인 나로 설정한 작품이 여럿 있는데, 그 작품들의 공통점은 독자가 느끼는 공포를 작가이자 화자인 나도 동일한 심정으로 겪는다는 점입니다. “괜히 이 이야기를 읽었다가 밤에 화장실도 못 가는 거 아닐까?”라는 일반독자의 두려움과 마찬가지로 괴담 수집가이면서도 정작 누군가에게 괴담을 들을 때면 모순된 감정에 빠지곤 하는 작가이자 화자인 나의 심정이 훨씬 더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만든다는 뜻입니다.

 

기대와 불안이 반반이었다. 전자는 어떤 괴이한 것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다. 그리고 후자는, 그 괴담이 뜻밖의 앙화를 초래하는 것은 아닐까, 라는 두려움이었다.” (p334)

 

수록작 가운데 타인의 불행을 예고하는 그림을 그리는 초등학생과 그의 담임선생의 이야기를 다룬 예고화가 가장 인상적이었는데, 이야기 자체도 서늘하고 소름 돋지만 막판 반전과 함께 미스터리 요소도 잘 갖추고 있어서 영상으로 만들어진다면 무척 재미있을 거란 기대감을 갖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기이한 저택에서 1주일의 은거를 견뎌야했던 소년이 마물과 마주치게 된 이야기를 다룬 은거의 집과 자기도 모르게 봉인된 마물을 풀어놓은 탓에 끔찍한 공포에 빠지게 된 한 여성의 이야기를 다룬 부르러 오는 것도 미쓰다 신조 특유의 호러를 맛볼 수 있는 작품들입니다.

 

개인적으로는 호러와 미스터리가 절묘하게 결합된 도조 겐야 시리즈작자미상’-‘사관장’-‘백사당으로 이어지는 작가 시리즈’, 그리고 궁극의 호러물인 노조키메를 좋아하다 보니 대체로 눈높이도 높아지고 호러의 강도에 대한 기대감도 커진 나머지 그의 다른 작품들이 다소 싱겁게 느껴진 게 사실인데, ‘우중괴담은 굳이 분류하자면 딱 그 중간쯤 되는 작품으로 보입니다. 출판사 소개글대로 미쓰다 신조 입문용으로는 더할 나위 없는 작품이지만, 제대로 된 섬뜩함을 맛보고 싶다면 위에서 언급한 작품들을 꼭 읽어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가장 큰 아쉬움이라면 만 9년 동안 한국에 감감 무소식인 도조 겐야 시리즈인데, 내년에는 만나볼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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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그니처 나비사냥 2
박영광 지음 / 매드픽션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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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영광경찰서에서 희대의 연쇄납치살해범을 체포한 공으로 광주 광역수사대로 발령받은 하태석 형사는 어느 날 옛 연인인 최지선이 정체불명의 남자에게 치명적인 공격을 당해 의식불명 상태에 빠진 것을 알게 됩니다. 정치인이던 그녀 아버지의 반대로 불행한 이별을 겪어야만 했던 하태석은 10여 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그녀를 사랑하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관할서와의 충돌을 무릅쓰고 수사에 참여하려 애씁니다. 그러던 중 범인이 체포되고 최지선 뿐 아니라 10여 명의 희생자가 있었음이 드러납니다. 하지만 하태석은 뚜렷한 증거가 없는데도 최지선을 공격했다고 자백한 범인에게 의심을 품습니다. , 최지선을 공격한 진범은 따로 있으며 그 진범과 이미 체포된 범인 사이엔 모종의 관계가 있다고 확신하게 된 것입니다.

 

하태석 시리즈라고도 부를 수 있는 나비사냥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입니다. 현직 형사가 집필한 범죄 스릴러로 소문이 났지만 워낙 묘사가 사실적이고 잔혹해서 독자들 사이에 호불호가 갈린 작품이기도 합니다. ‘허약한 서사에 묘사만 잔혹한 이야기라고 예단하곤 관심을 두지 않았다가 우연히 읽은 시리즈 첫 편 나비사냥에서 기대 이상의 매력을 맛본 덕분에 내쳐 두 번째 작품까지 읽게 됐습니다.

 

서울에서 근무하다가 좌천돼 고향인 전남 영광경찰서로 돌아온 하태석이 동료들의 무시와 반대에도 불구하고 연쇄납치살해범을 체포하는 이야기가 나비사냥이라면, ‘시그니처는 범인을 체포하고 기자회견까지 연 관할서의 수사결과에 반발한 하태석이 1주일이라는 제한된 시간 안에 진범을 찾아내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하태석은 범인뿐 아니라 내부의 적과도 직()을 걸고 싸워야 한다는 뜻입니다. 나비사냥에서 막판에 하태석을 폭발시킨 게 사랑하는 가족이 범인의 목표물이 된 점이라면, ‘시그니처에선 한때 결혼까지 약속했지만 불행하게 헤어져야만 했던 옛 연인이 연쇄살인마에게 공격당해 의식불명 상태에 빠진 점입니다. 가공할 연쇄살인마와의 대결, 자신을 짓누르는 내부의 적과의 충돌, 그리고 가까운 사람이 범죄 피해자가 된 점 등 두 작품은 큰 얼개에서 무척 닮아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태석은 일반인이 익히 상상할 수 있는 전형적인 한국 형사입니다. 과학수사의 도움을 받긴 하지만 그의 방식은 무척이나 아날로그적입니다. 예리한 촉을 갖고 있긴 하지만 수시로 단순무식한 스타일로 밀어붙이기도 합니다. 동료는 말할 것도 없고 다른 관할서나 상부와의 충돌도 마다하지 않는 독불장군이지만 심성 하나는 아주 따뜻한 인물입니다. 그래선지 명탐정이나 대단한 형사가 주인공인 스릴러와 비교할 때 다소 답답하기도 하고 둔해 보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압도적인 리얼리티를 맛볼 수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특히 막판에 진범을 체포하는 과정은 독자에 따라 약간 허무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개인적으론 슈퍼 히어로가 아닌 평범한 한국 형사의 사실감 넘치는 진면목을 보여준 것 같아 훨씬 더 매력적으로 읽혔습니다.

 

인간이 되기를 포기한 희대의 살인마와 그의 범행 시그니처를 따라하는 또 다른 연쇄살인범 엑스. 두 명의 사이코패스가 살인경쟁을 시작한다.”는 출판사 소개글대로 이 작품엔 두 명의 연쇄살인마가 등장합니다. 먼저 체포된 범인이 최지선 살해미수까지 자백하지만 하태석은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몇몇 단서 때문에 진범이 따로 있음을 확신합니다. 사실 관할서에서 기자회견까지 연 마당에 광역수사대 형사가 진범은 따로 있다.”라고 주장하는 건 경찰 입장에서 보통 난감한 상황이 아닙니다. 결국 하태석에게 허락된 건 이미 체포된 범인을 검찰에 송치하기 전까지의 단 1주일. 하지만 범행수법을 수시로 바꾸는데다 흔적 하나 안 남기는 진범을 찾는 건 그야말로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기에 다름 아닙니다. 옛 연인을 잔인하게 공격한 진범을 쫓는 동시에 관할서와 경찰 상부의 지독한 견제까지 감내해야 하는 하태석의 행보는 마지막 페이지까지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전작에 비해 서사와 갈등 구조는 훨씬 더 풍부해졌고, 두 명의 연쇄살인마의 행각을 꽤나 잔혹하게 묘사한 대목도 흥미롭게 읽혔지만, 딱 한 가지 아쉬움을 남긴 건 의식불명에 빠진 옛 연인 최지선과 하태석 사이의 애틋한 사연이 지나치게 많은 분량을 차지한 점입니다. 아무래도 감정이입을 극대화하기 위해 비슷한 장면을 거듭 배치한 것 같은데, 그런 탓에 전작인 나비사냥보다 무려 120여 페이지가 늘어난 것으로 보입니다. 그 대목마다 다소 느슨하고 지루함을 느낀 건 다른 독자들도 비슷하지 않았을까, 추정해봅니다.

 

시그니처이후 5년만인 올해(2022), 시리즈 세 번째 작품인 소녀가 사라지던 밤이 출간됐습니다. 700페이지가 훌쩍 넘어 1~2권으로 분권됐는데, 늘어난 분량만큼 캐릭터나 사건 등 모든 것이 풍성해졌겠지만 본론 외의 이야기가 불필요하게 많은 비중을 차지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물론 혹시 그렇다 하더라도 매력적인 한국 형사하태석의 이야기를 놓치고 싶은 생각은 절대 없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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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에게도 말하지 마
할런 코벤 지음, 최필원 옮김 / 비채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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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빈민가의 소아과 의사 데이비드 벡은 8년 전 여행 도중 납치된 뒤 참혹하게 살해돼 세상을 떠난 아내 엘리자베스의 이메일을 받고 큰 충격에 빠집니다. 이메일에 담긴 두 사람만 아는 암호 때문에 벡은 엘리자베스가 살아있는 게 분명하다고 확신하지만,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는 그녀의 경고 때문에 누구에게도 이 사실을 털어놓지 못합니다. 그러던 중 엘리자베스가 납치됐던 곳에서 두 구의 백골사체가 발견되는데, 문제는 이 일로 인해 FBI가 벡을 쫓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설상가상으로 벡의 과거 지인마저 살해되는 사건이 벌어지자 FBI는 벡을 공개수배하기에 이릅니다. 위기일발의 도주극을 벌이면서 엘리자베스의 흔적을 추적하던 벡은 8년 전 자신과 엘리자베스에게 가해졌던 끔찍한 진실과 마주하곤 큰 충격에 빠집니다.

 

2001년에 출간된 이 작품은 2005년 한국에 밀약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적 있습니다. 워낙 출간된 지 오래되기도 했고 번역제목도 원제(‘Tell No One’)와 너무 거리가 멀어서 이런저런 소문에도 불구하고 중고책 구하기가 주저됐는데 마침 새로운 번역으로 개정판이 출간돼서 얼른 찾아 읽게 됐습니다.

한국에 출간된 할런 코벤의 작품 15편 중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까지 겨우 7편밖에 못 읽었고 그나마도 최고평점이 4.5점으로 만점을 준 적이 한 번도 없으니 그의 광팬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이번엔 할런 코벤의 매력을 제대로 맛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됐습니다.

 

납치-실종 후 시신이 발견돼 장례까지 치른 아내가 8년 만에 연락을 해온다면 남편 입장에서 얼마나 기가 막힐까요? 그런데 무슨 이유에선지 아내는 자신에 관해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경고하는가 하면, 하필 그때 나타난 FBI는 남편을 살인용의자로 의심합니다. 아내가 납치된 곳에서 최근 발견된 백골사체는 물론 8년 전 아내의 죽음까지도 남편의 소행이라 여기는 FBI 앞에서 남편의 선택은 일단 튀어!’ 외에는 달리 있을 수가 없습니다.

주인공 벡을 위기에 빠뜨리는 건 단지 FBI뿐만이 아닙니다. 8년 전 엘리자베스를 살해하려던 악마와 그의 주구들은 말할 것도 없고 뭔가 결정적인 비밀들을 감추고 있는 벡과 엘리자베스 주위의 인물들도 알게 모르게 벡을 사지로 몰아넣습니다. 평범한 소아과 의사인 벡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엘리자베스에 관한 사소한 단서들에서 8년 전 진실의 작은 조각이라도 찾아내는 게 전부입니다. TV를 통해 전국에 공개수배가 내려진 상태에서 말입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400여 페이지 분량 전체가 반전의 연속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빠르고 과격하게 폭주하는 롤러코스터를 닮았습니다. 벡은 연이어 알게 되는 엘리자베스에 관한 진실 앞에서 때론 놀라고, 때론 분노와 절망에 휩싸이며 정신없는 시간을 보냅니다. 그리고 엘리자베스에게 닥친 사고가 깊고 복잡한 사연 속에서 벌어진 계획된 범죄라는 걸 확신하게 됩니다. 거기다가 자신과 엘리자베스 가족의 비밀까지 알게 된 벡은 바닥없는 심연에 빠진 채 허우적댈 수밖에 없습니다.

 

막판까지 반전의 연속이라 서평에서 공개하기 어려운 대목들이 많다 보니 두루뭉술한 인상비평이 되고 말았는데, 속도감 넘치는 짜릿한 스릴러를 찾는 독자라면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가 선사하는 치명적인 매력을 꼭 맛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개인적인 바람이라면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처럼 2000년대에 출간됐다가 지금은 절판된 할런 코벤의 작품들도 새로운 개정판으로 다시 만날 수 있었으면 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 전에 아직 못 읽은 그의 작품들도 부지런히 찾아 읽어야 하겠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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