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포의 밤 안 된다
미치오 슈스케 지음, 김은모 옮김 / 청미래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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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포의 밤은 전작인 절벽의 밤에 이은 이른바 안 된다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입니다. 시리즈 명이 좀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두 편 모두 수록된 단편들의 제목이 하나같이 ‘~해서는 안 된다로 끝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실제로 일본에서도 이 시리즈의 명칭은 いけないシリーズ입니다.

이 시리즈의 가장 큰 특징은 각 단편의 마지막 페이지에 실린 한 장의 사진을 통해 독자 스스로 사건의 진상을 파악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터무니없이 어렵진 않아서 저처럼 둔한 독자라도 대부분 진상을 알아챌 수는 있는데, 두 작품 모두 딱 한 장의 사진은 결국 마지막에 실린 옮긴이의 말의 힘을 빌려야만 했습니다. 혹시 미션에 실패하더라도 이어지는 수록작에 그 진상이 설명되는 경우도 있으니 과도한 스트레스를 받을 일은 없습니다.

 

전작인 절벽의 밤이 자살 명소로 유명한 유미나게 절벽을 배경으로 삼았다면 폭포의 밤은 모란꽃으로 유명한 미고오리 시 주변의 명승지들이 사건의 주 무대로 등장합니다. 그런데 뛰어난 풍광을 자랑하는 그 명승지들의 이름은 불길한 뜻이나 유래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가쿠레이 산에는 죽는다’, 고코 강에는 죽은 뒤 신에게 바쳐지는 공물’, 묘진 폭포에는 저승’, 무쿠로 다리에는 송장이라는 뜻이 담겨있습니다. 그래서인지 기이한 사건들이 연이어 벌어지지만 미스터리는 쉽사리 풀리지 않습니다. 또 주요 인물 대부분이 각 단편에 번갈아 등장한다는 점, 즉 사건은 달라도 이런저런 식으로 얽혀있다는 설정 때문에 미스터리는 더욱 복잡하고 흥미롭게 전개되기도 합니다.

 

수사를 맡은 주인공은 이제 형사과에 배치된 지 1년밖에 안 돼서 처음으로 살인사건과 마주하게 된 신참 구마지마입니다. (실은 구마지마의 형도 형사였는데, 그는 전작인 절벽의 밤에 등장한 바 있습니다.) 피의자 심문조차 처음 겪는 구마지마는 어설픈 초짜의 티를 벗지 못하지만 엄격한 베테랑 형사 도코로의 질책 속에 조금씩 형사로서의 촉을 발휘해나갑니다.

 

묘진 폭포에서 소원을 빌어서는 안 된다

1년 전 묘진 폭포 앞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 언니 히리카의 비밀 SNS 계정을 뒤늦게 발견한 모모카는 언니의 행적을 따라 산에 들어갔다가 산장지기 오쓰키의 도움을 받지만 그의 산장에서 절대 봐서는 안 될 것을 보고 맙니다.

 

머리 없는 남자를 구해서는 안 된다

담력시험을 통해 친구를 놀려주려던 초등학생 신은 은둔형 외톨이로 지내는 삼촌의 도움을 받아 목 없는 인형을 빌려 숲속에 설치하지만 예상치 못한 사고가 벌어진 탓에 패닉 상태에 빠집니다.

 

그 영상을 조사해서는 안 된다

한 노인이 폭력을 휘두르던 아들을 살해하고 시신을 강에 유기했다고 자수합니다. 하지만 시신은 발견되지 않고 노인의 진술은 어딘가 진실을 숨기는 듯한 뉘앙스를 풍깁니다. 가까스로 진상을 담은 영상을 발견하지만 오히려 형사 구마지마의 수사를 혼돈에 빠지게 만듭니다.

 

소원 비는 목소리를 연결해서는 안 된다

숲에서 오래 전 매장된 사체가 발견됩니다. 그리고 이 사체는 앞서 벌어진 세 개의 사건을 한 곳으로 소환합니다. 우연과 필연이 복잡하게 얽힌 가운데 형사 구마지마는 가까스로 모든 진실에 다가가게 됩니다.

 

명확한 사건이 있고 집요한 수사가 이뤄지지만 폭포의 밤은 전작인 절벽의 밤과는 달리 호러의 느낌이 강한 작품입니다. 불길한 이름과 유래를 내포한 자연경관 속에서 벌어지는 참혹한 사건들, 어둡고 음울하기 짝이 없는 주요 등장인물들의 심리, 모든 게 우연 같아 보이지만 실은 어차피 벌어질 수밖에 없어 보이기도 하는 지독한 운명 등 작품 전반을 아우르는 분위기는 호러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또 초반에는 다소 가벼운 서사처럼 읽힐 수도 있지만 페이지를 넘길수록 이야기의 무게와 어둠의 농도가 진해지는 걸 확연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그래선지 사진 속에 담긴 사건의 진상을 직접 알아냈을 때의 쾌감은 여느 미스터리에서는 맛볼 수 없는 색다른 간식처럼 다가오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론 미치오 슈스케가 안 된다 시리즈를 좀더 내줬으면 하는 바람인데, 혹시 나온다고 해도 구상하는 것 자체가 고역일 것 같은 이 시리즈가 몇 년 후에나 신작 소식을 들려줄 지는 쉽게 예상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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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시 20분의 남자 스토리콜렉터 109
데이비드 발다치 지음, 허형은 옮김 / 북로드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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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육군 특수부대 제75레인저연대의 유능한 장교였으나 동료의 죽음으로 인해 제대를 선택한 트래비스 디바인. 월가의 신참 애널리스트로서 투자회사 카울앤드컴리에 근무하며 매일 아침 620분 열차를 타고 출근하던 그에게 발신자 불명의 이메일 한 통이 날아든다. “여자가 죽었어.” 실제로 직장 동료이자 헤어진 연인이 자살한 채 발견되고 디바인은 경찰의 의심을 받는다. 더 큰 문제는 디바인 주위에서 연이어 살인사건이 벌어진다는 점. 그런 그에게 전직 장성인 의문의 남자가 접근해오고, 그는 군 시절의 디바인의 비밀을 폭로하겠다며 카울앤드컴리사에 대한 내밀한 조사에 협조할 것을 강요한다. 디바인은 졸지에 정부기관의 비공식 비밀요원이 되어 자신이 근무하는 회사와 관련된 거대한 음모를 밝혀야 할 입장에 처하고 만다. (출판사 소개글을 일부 수정 후 인용했습니다.)

 

에이머스 데커 시리즈2020진실에 갇힌 남자를 끝으로 3년 동안 소식이 없어 궁금해 하던 차에 북로드에서 데이비드 발다치의 신작을 출간해서 놀랍기도 하고 반갑기도 했습니다. 특히 스탠드얼론이 아니라 미국에서 ‘6:20 Man series’라 이름 붙은 새 시리즈의 첫 작품이라 더 기대가 됐는데, ‘모든 것을 기억하는 남자에이머스 데커에 맞먹는 매력을 지닌 주인공 트래비스 디바인은 데뷔 무대부터 압도적인 육체의 강력함과 명석한 지능’, ‘폭죽처럼 폭발하는 강렬한 액션을 선보이고 있습니다.

 

540여 페이지의 두툼한 분량에 적잖은 등장인물, 서로 연관이 있는지 끝까지 궁금증을 자아내는 두 개의 사건 - 연쇄살인과 국가안보의 위기 - ‘620분의 남자는 출판사 소개글대로 겹겹의 층위를 쌓은 다층구조의 플롯을 지닌 작품입니다. 국가안보를 위협하는 굴지의 투자회사 카울앤드컴리의 가공할 음모를 파헤치는 이야기에서 그쳤다면 이 작품은 평범한 스릴러에 그치고 말았겠지만, 데이비드 발다치는 범인도 동기도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참혹한 연쇄살인사건을 잘 결합시켜 이야기를 입체적으로 꾸며냈습니다. 밀접하게 연관된 것 같기도 하고 전혀 별개인 것 같기도 한 두 개의 사건은 디바인은 물론 독자의 머리를 무척이나 복잡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막판에 밝혀진 의외의 진실은 데이비드 발다치의 설계와 구성이 얼마나 정교하고 빈틈없이 이뤄졌는지를 제대로 실감하게 해줍니다.

 

이 작품의 미덕 중 하나는 곳곳에 배치된 매력적인 조연들인데, 우선 디바인이 머무는 타운하우스의 능력자동거인들은 각각 러시아 출신의 화이트 해커, 변호사 시험을 준비 중인 법대 졸업생, 유망한 스타트업을 이끄는 MIT 출신 재원으로 디바인의 수사에 큰 도움을 주기도 하지만 때론 그 정체를 의심할 수밖에 없는 미스터리한 인물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그리고 매일 아침 620분 열차를 타고 출근할 때마다 디바인이 지켜보곤 했던 대저택의 비키니미셸은 예상치 못한 행보를 거듭하여 독자의 흥미를 자극하는 인물입니다. 대형 스포일러까지는 아니어도 미리 알면 그 재미가 반감되는 인물이라 더 이상 언급은 어렵지만 이 작품의 재미를 배가시키는 존재인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전직 특수부대 장교답게 디바인은 수차례에 걸쳐 위험천만하면서도 카타르시스 만점의 액션 장면을 소화해냅니다. MBA 출신의 명석한 지능까지 겸비한 그의 화려한 액션은 에이머스 데커 시리즈에서는 맛볼 수 없었던 특별한 매력인데, 덕분에 앞으로 이어질 시리즈를 더욱 기대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또한 가족을 잃은 트라우마에 갇힌 에이머스 데커와 마찬가지로 불행한 가족사와 함께 특수부대의 마지막 날들을 악몽으로 간직하고 있는 디바인의 큰 상처 역시 그의 미래를 궁금하게 만드는 요소들입니다. 결코 완치될 수는 없겠지만 그 상처들을 짊어진 채 점점 더 성장해나갈 디바인을 응원하고 싶어지기 때문입니다.

 

미국에서는 시리즈 2편인 ‘The Edge(2023)’까지 출간된 상태입니다. 빠르면 내년쯤엔 만나볼 수 있을 듯 한데, 우선은 곧 한국에 출간될 에이머스 데커 시리즈의 여섯 번째 작품 사선을 걷는 남자를 읽으며 기다려야 할 것 같습니다. 첫 번째 큰 미션을 마친 디바인이 과연 어떤 모습으로 돌아올지, 어떤 고비를 맞이할게 될지 벌써부터 기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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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것이 아닌 잘못
아사쿠라 아키나리 지음, 문지원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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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택건설 대기업의 영업부장인 야마가타 다이스케의 삶이 하루아침에 붕괴되고 맙니다. 한 트위터 계정에 살인자와 피살자가 함께 찍힌 살해 현장 사진이 올라와 파문을 일으켰는데, 10년 전에 만들어진 그 계정의 주인이 바로 다이스케 자신으로 밝혀졌기 때문입니다. 물론 다이스케는 인터넷조차 서투른데다 트위터 계정 같은 건 만든 적도 없습니다. 그날 이후로 마녀사냥의 타깃이 된 다이스케는 경찰과 극렬 유튜버의 추적을 피해 기약 없는 도주길에 오릅니다. 하지만 또 다른 시신이 그의 집 창고에서 발견되면서 다이스케는 그 어떤 변명과 해명도 통하지 않을 거란 사실에 좌절합니다. 결국 그가 선택한 건 직접 진범을 찾는 것. 하지만 자신을 파멸에 이르게 만든 진범을 찾는 과정에서 다이스케는 더 큰 충격에 빠지고 맙니다.

 

교실이, 혼자가 될 때까지’, ‘여섯 명의 거짓말쟁이 대학생에 이어 세 번째로 만난 아사쿠라 아키나리의 작품입니다. 앞선 두 작품이 각각 초능력과 신입사원 공채를 소재로 삼은 이야기들이라 읽을지 말지 무척 고민했던 게 사실인데, 예상외로 흥미롭게 읽었던 터라 이번에는 조금도 주저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출판사 소개글에 따르면 이 작품의 세부 장르는 인터넷 마녀사냥 미스터리 도주극입니다. 옮긴이의 말에 따르면 이 작품은 사회 문제와 본격 미스터리의 완벽한 만남을 그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두 설명 모두 이 작품의 반전의 미덕을 내포하진 못하고 있는데, 그건 아마도 그 반전을 상징하는 단 하나의 단어만 사용해도 초대형 스포일러가 되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도망자 다이스케를 향한 인터넷 마녀사냥이 횡행하는 미스터리도 맞고, 사회 문제를 다룬 미스터리도 맞지만, ‘내 것이 아닌 잘못은 딱히 어떤 장르라고 못 박기 어려운 다채로운 매력을 지닌 작품입니다. 살인, 도주, 마녀사냥, 인터넷범죄, 학대, 복수, 참회 등 여러 가지 소재가 복잡하게 버무려진 이야기라고 할까요?

 

이야기는 도망자 다이스케, 그의 딸 나쓰미, 관할서 형사 호리, 그리고 진범이 올린 트윗을 리트윗하여 폭발적으로 퍼지게 만든 대학생 쇼마 등 여러 사람의 시점으로 나뉘어 전개됩니다. 하루아침에 전 국민에게 지탄받는 연쇄살인마가 된 다이스케가 힘겨운 도주를 거듭하며 겪는 여러 에피소드들 외에도 그의 범죄를 부인하면서도 어딘가 어두운 표정을 숨기지 못하는 가족들, 다이스케의 진범 여부를 놓고 갈등을 벌이는 관할서 형사와 현경 형사, 갑자기 나타난 여대생 때문에 엉겁결에 다이스케 추격전에 나서게 된 대학생 등 여러 인물들의 다이스케를 향한 복잡한 시선과 감정들이 빠른 속도로 펼쳐집니다. 그리고 매 챕터 후반부에 인터넷과 트위터에서 벌어지는 막무가내식 마녀사냥이 적나라하게 소개됩니다.

 

다이스케가 범인이 아니라는 걸 확실하게 아는 건 독자뿐입니다. 당연히 그의 누명 벗기를 간절히 바라게 될 거라 생각했지만, 이야기는 예상외의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하고, 어느 시점인가부터는 진범의 의도는 무엇인가?’, 다이스케가 이런 궁지에 몰릴 수밖에 없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에 더 관심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막판의 한차례 반전을 통해 소개되면서 독자의 뒤통수를 때립니다. 저도 그랬지만, 대부분의 독자는 그 지점에서 책의 앞부분을 허겁지겁 뒤져볼 수밖에 없게 됩니다. 그리고 작가가 얼마나 교묘하게 복선을 깔아놓았는지를 뒤늦게 깨닫게 됩니다.

 

도주극은 빠른 템포에 긴장감과 사실감을 놓치지 않았고, 등장인물들의 복잡한 심리도 세밀하게 잘 묘사됐으며, 반전도 나름 매력적입니다. 하지만 딱히 어디라고 꼬집어 말할 수는 없어도 모든 것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고는 할 수 없는 작품입니다. 중요 인물의 부자연스러운 등장, 감동을 강요하는 듯한 반성과 참회, 누가 봐도 수상한 단서를 애써 무시하는 인물,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주제와 교훈에 대한 강의에 가까운 설파 등 위화감이나 불편함을 일으킨 이유가 여러 가지 있지만 가장 큰 것 하나만 꼽자면 진범의 동기입니다. 마지막에 밝혀진 진범의 동기는 그럴 만 했다라는 생각이 거의 들지 않을 정도로 다소 억지스러웠습니다. 연쇄살인도, 다이스케를 함정에 빠뜨린 일도 필연적이거나 운명적이란 느낌을 받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반전 자체는 놀라웠지만 설득력 없는 진범의 동기 때문에 그 맛이 반감된 게 사실입니다.

 

교실이, 혼자가 될 때까지는 살짝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들었고, ‘여섯 명의 거짓말쟁이 대학생은 여러 번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었다면 내 것이 아닌 잘못은 딱 두 작품의 중간쯤이었다는 생각입니다. 한국에 출간된 아사쿠라 아키나리의 작품 중 누아르 레버넌트‘9번째 18살을 맞이하는 너와는 왠지 취향과 거리가 먼 것 같아 읽지 않았지만, 그의 정통 미스터리가 출간된다면 일단은 찾아 읽으려고 합니다. 아직은 호불호를 확실히 결정하지 못한 상태라 적어도 한 작품 정도는 더 읽어봐야 할 것 같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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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론의 법칙 변호사 미키 할러 시리즈 Mickey Haller series
마이클 코널리 지음, 한정아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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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능력을 갖췄지만 최악의 속물이기도 한 변호사 미키 할러는 또 한 번의 무죄 판결을 이끌어낸 축하 파티 직후 귀가하던 중 순찰경관에게 제지당합니다. 무슨 연유에선지 자동차 뒤 번호판이 사라져있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그의 트렁크에서 잔혹하게 살해된 샘 스케일스의 시신이 발견됐다는 점입니다. 희대의 사기범이었던 스케일스는 할러의 고객 중 한 명이었고, 끝이 안 좋게 헤어진 일이 있는 악연의 인물입니다. 현행범으로 체포된 할러는 결국 구치소에 수감됐고 피고인으로 법정에 서는 신세가 됐습니다. 스스로를 변호하기로 한 할러는 후배인 제니퍼와 함께 대응에 나서지만 모든 정황은 그를 꼼짝없는 살인범으로 지목합니다.

 

변론의 법칙은 미국에서 2020년에 출간된 작품으로 미키 할러 시리즈의 여섯 번째 작품입니다. 전작인 배심원단의 미국 출간이 2013년이니 무려 7년 만에 나온 신작인 셈인데, 그 사이 마이클 코넬리는 해리 보슈 시리즈르네 발라드 시리즈에만 주력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참고로 미키 할러 시리즈’ 7편인 ‘Resurrection Walk’2023년에 출간됐습니다.)

 

의뢰인이 악당이라 하더라도 수임료만 맞으면 기꺼이 변호를 맡고 특유의 재능으로 무죄 혹은 형 감경을 이끌어냈던 미키 할러는 사방에 적이 많습니다. 그런 그가 살인을 저지른 피고인의 처지가 되자 그 적들이 날뛰기 시작합니다. 할러에게 두 번이나 물을 먹었던 판사는 일반적인 보석금보다 두세 배 높은 금액을 책정해 그의 보석을 원천봉쇄했고, 할러에게 보복할 날만 기다려온 검찰은 사형집행인이라는 별명이 붙은 강력부 스타 데이나 버그를 투입하여 그를 완전히 매장하려 합니다. 검찰 못잖게 악당을 위한 변호사할러를 증오해온 경찰 역시 그의 몰락에 쾌재를 부릅니다. 피고인 할러가 그나마 다행스럽게 여긴 건 재판을 맡은 판사 워필드가 다혈질에 독선적이긴 해도 비교적 공정하고 객관적인 인물이란 점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할러는 단순히 무죄를 입증하는데 그치지 않고 진범을 직접 밝혀내기로 결심합니다.

 

변론의 법칙은 이른바 미키 할러 어벤저스의 맹활약을 그린 작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다섯 번째 증인에서 법대를 졸업한 지 10개월 된 풋내기로 등장했지만 이제 9년차 변호사가 되어 할러와 함께 공동변호인이 된 한 제니퍼 애런슨, 할러의 두 번째 아내이자 사무장인 로나, 유능한 검사지만 이번 사건 때문에 휴가를 내고 할러의 변호를 맡은 첫 번째 아내 매기, 그리고 이복형인 해리 보슈에 이르기까지 할러 주위의 인맥들이 총출연합니다. 로스쿨에 다니는 할러의 딸 헤일리, 경찰학교에 다니는 보슈의 딸 매디, 충직한 수사관 시스코까지 가세한 ‘‘미키 할러 어벤저스의 전방위적인 활약은 사건 못잖게 눈길을 끄는 대목입니다. 전작인 배심원단이후 7년 가까이 할러의 연인이었다가 헤어졌던 켄달이 오랜만에 그의 곁으로 돌아와 온기를 불어넣어주는 장면들도 아슬아슬한 로맨스의 묘미를 선사합니다.

 

구치소에 수감된 상태에서 제한된 활동밖에 할 수 없지만 특유의 재능을 발휘하여 팀원들을 움직이는 할러의 활약도 매력적이고, 할러를 매장하기 위해 물불을 안 가리는 사형집행인이란 별명의 검사 데이나 버그의 맹공격도 화려하게 그려져서 500페이지를 훌쩍 넘는 분량에도 불구하고 흥미진진하게 읽힙니다. 전처인 매기와 로나, 현재의 연인인 켄달과의 미묘한 4각 로맨스도 재미있고, 성장기 내내 아빠 할러와 갈등을 겪었던 헤일리가 법정 안팎에서 할러를 응원하는 대목은 시리즈를 쭉 읽어온 독자에겐 그저 애틋하게 보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쉬운 점을 딱 한 가지만 꼽으라면, 법정 스릴러의 교과서를 방불케 하는 상세한 재판 과정 묘사들이 간혹 느슨하고 지루하게 읽힐 만큼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꼭 필요한 설명들이긴 하지만 지금까지 읽은 미키 할러 시리즈에 비하면 다소 과해 보였습니다. 그 부분들이 조금만 축약됐다면 훨씬 더 슬림하고 속도감 넘치는 이야기가 됐을 거란 생각입니다. 상대적으로 미스터리의 핵심인 살인사건 자체는 분량에 비해 단선적으로 전개됐기 때문에 그런 느낌을 더 강하게 받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책장을 덮으면서 가장 기대된 점은 할러의 딸 헤일리의 미래입니다. 후속작인 ‘Resurrection Walk’가 이 작품 이후 3년 만에 출간됐으니 현재 로스쿨에 다니고 있는 헤일리는 어엿한 변호사가 돼있을 것 같지만 어쩌면 정반대로 엄마인 매기의 뒤를 이어 검사가 됐을 수도 있습니다. 변호사가 됐다면 할러와 제니퍼의 동료가, 검사가 됐다면 할러의 이 되는 셈입니다. 어떤 사건이 할러를 궁지에 몰아넣을지도 궁금하지만 애초 가족이었다가 해체의 상처를 겪었던 할러-매기-헤일리가 어떤 미래를 맞이할지가 더 궁금해지는 건 미키 할러 시리즈의 팬이라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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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어의 눈물
시즈쿠이 슈스케 지음, 김현화 옮김 / 빈페이지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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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쇼 시대 이래 오랜 세월 동안 명성을 이어온 도자기 노포 도키야 킷페이. 안정과 번영만 누리던 그곳을 하루아침에 지옥으로 만든 건 장차 노포를 이어받을 아들 고헤이가 한밤중에 살해당한 사건입니다. 노포 주인 부부 사다히코와 아키미를 더욱 충격에 몰아넣은 건 범인이 고헤이의 아내, 즉 며느리인 소요코의 전 남자친구라는 점. 특히 범인이 법정에서 소요코가 살인을 사주했다는 뉘앙스의 말을 내뱉은 탓에 그 충격은 더욱 배가됩니다. 남편 사다히코가 범인의 말을 헛소리로 일축한 반면, 아내 아키미는 며느리 소요코에 대한 의심을 좀처럼 지워내지 못합니다. 사건은 종결됐지만 아키미의 의심은 점점 더 증폭되고, 이후 노포에서 일련의 사건들이 벌어질 때마다 배후에 소요코가 있다고 확신하게 됩니다.

 

검찰 측 죄인’, ‘범인에게 고한다’, ‘립맨등 매력적인 정통 미스터리로 만나온 시즈쿠이 슈스케지만 2020년에 읽은 염원은 심리 스릴러 혹은 도메스틱 스릴러로 분류할 수 있는 작품이라 무척 놀라웠습니다. “작정하고 심리묘사에 전력을 다하겠다.”는 작가의 출사표에도 불구하고 비록 별 3개라는 야박한 평점을 주긴 했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악어의 눈물은 마치 그 출사표를 다시 한 번, 그것도 훨씬 더 독하고 세게 다듬어서 내보인 듯한 인상을 풍깁니다. 시작과 동시에 살인사건이 터지지만 범인은 금세 잡히고 재판과정도 속전속결로 마무리됩니다. 진짜 이야기는 장례까지 마친 가족들이 집으로 돌아온 뒤부터 시작됩니다.

 

거짓 눈물 말이지. 악어의 눈물. (중략) 악어는 먹잇감을 포식할 때 눈물을 흘리거든. 내가 긴자에 있을 때 눈물도 안 나오면서 억지로 울어서 여러 손님을 다루는 애들을 봐서 그런 건 예리하거든. 아키네 부부도 (소요코에게) 먹히지 않게 조심해.” (p114)

 

사건이 벌어지기 훨씬 전부터, 그러니까 소요코가 노포의 며느리가 된 3년 전부터 시어머니 아키미는 겉으로 드러나는 언행과 표정만으로는 도무지 속내를 알 수 없는 소요코 때문에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그런 와중에 아들을 죽인 범인이 소요코의 전 남친이라는 점, 또 소요코가 사주범이라는 법정에서의 범인의 최후 진술 때문에 아키미의 신경 어딘가가 툭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절대 사라지지 않을 의심의 씨앗이 뿌려졌습니다. 무엇보다 남편이 살해당했는데도 좀처럼 동요하지 않는 소요코의 태도가 원망스러웠던 아키미는 동생 하루코로부터 장례식장에서 흘린 소요코의 눈물은 억지로 쥐어짜낸 악어의 눈물이 분명해.”라는 말을 듣곤 그날 이후로 소요코에 대한 의심을 거두지 못합니다.

 

악어의 눈물은 엄밀히 말하면 미스터리가 아니라 어둡고 일그러진 심리를 그린 도메스틱 스릴러입니다. 소요코에 대한 끊임없는 의심으로 인해 점점 파국의 길을 걷게 되는 시어머니 아키미, 아키미의 의심에 동조하며 거침없이 소요코의 과거를 캐고 다니는 시이모 하루코, 반대로 소요코를 믿는 것은 물론 어린 손자 나유타를 노포의 후계로 생각하고 있는 시아버지 사다히코, 그리고 눈길을 끄는 외모와 달리 차분하고 내성적이면서도 (아마존 재팬 리뷰대로) 희대의 악녀인지 선량한 피해자인지 도무지 가늠할 수 없는 며느리 소요코에 이르기까지 주요 인물들의 불안정한 심리와 갈등이 디테일하게 묘사된 작품입니다.

 

노포 안팎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사건들은 인물들 사이의 의심과 반목을 더욱 심각하게 만드는 것은 물론 소요코가 진정 어떤 인물인지에 대한 판단을 더욱 불가해하게 만듭니다. 아키미의 의심대로라면 소요코는 완벽한 사이코패스입니다. 하지만 그 의심이 틀렸다면 노포를 잠식한 불온하고 어두운 기운은 그야말로 작은 의심의 씨앗이 야기한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영미권의 심리 스릴러와 도메스틱 스릴러에 질려 있던데다 작가의 전작인 염원에 야박한 평점을 주기도 했고, 큰 사건 없이 진행되는 서사가 다소 느슨하게 읽히기도 해서 중반쯤만 해도 또 시즈쿠이 슈스케에게 별 3개를 줘야 되나?”라는 고민을 한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 지점을 잘 넘어가면 이 작품의 특별한 미덕과 함께 이야미스에 버금가는 기묘한 여운을 만끽할 수 있습니다. 내 주위에 소요코라는 인물이 있다면 난 그녀를 믿을 수 있을까, 없을까? 내게 던져진 작은 의심의 씨앗을 단호하게 지워버릴 수 있을까, 없을까? 소요코는 과연 무죄일까, 유죄일까? 마지막 페이지를 덮을 때쯤 자신도 모르게 이런 씁쓸한 자문을 하게 되는 것이야말로 악어의 눈물의 진짜 미덕이라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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