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아 우리의 앞머리를
야요이 사요코 지음, 김소영 옮김 / 양파(도서출판) / 2022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전직 변호사인 이모부가 공원에서 살해당한 뒤 수사가 미궁에 빠진 상태에서 이모를 만난 유키는 놀라운 이야기를 듣습니다. 이모는 양아들인 시후미를 범인으로 의심하면서도 동시에 절대 그렇지 않기를 바란다며 유키에게 시후미가 범인이 아니란 걸 입증해달라고 부탁합니다. 탐정사무소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 유키는 시후미의 주변을 조사하면서 예상 밖의 단서들을 손에 넣습니다. 그리고 최근 몇 년간 또 다른 죽음 혹은 사건들이 시후미 주변에서 벌어진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 죽음과 사건들은 하나같이 사고로 처리됐지만 유키는 탐문과 조사 끝에 이면의 진실을 조금씩 파악합니다. 그리고 20여년에 불과한 시후미의 삶이 놀랍도록 많은 비밀과 수수께끼로 들어찼음을 깨닫고 충격에 빠집니다.

 

서평에서 어느 정도까지 내용을 공개해도 좋을지 무척 애매해서 출판사 소개글과 다른 독자들의 서평을 모두 찾아 읽었는데, 일단 두 소년 주변에서 의심스러운 죽음이 잇달아 일어난다.”, “죄와 벌, 그리고 평생 끝나지 않을 첫사랑 이야기.”라는 홍보 카피를 기준으로 최대한 스포일러를 피해보도록 하겠습니다.

 

300페이지가 채 안 되는 분량이지만 등장인물도 꽤 많고 사건도 여러 개인데다 묵직한 심리스릴러 서사까지 갖추고 있어서 농도와 밀도가 꽤 진하고 높게 느껴지는 작품입니다. 무엇보다 추악하게 일그러진 가족사, 비정상적인 인간관계, 한 사람의 삶을 철저히 파괴시킬 정도로 잔혹했던 학대와 억압이 이야기 전반에 깔려 있어서 유키의 조사가 진실에 다가가면 갈수록 독자는 무거운 돌덩이가 마음속에 하나 둘씩 쌓여가는 기분을 피할 수 없게 됩니다.

 

바람아 우리의 앞머리를누가 범인인가?’보다는 ?’어떻게?’에 방점이 찍힌 미스터리입니다. 특히 ?’를 알아내기 위한 유키의 조사는 짧게는 1년 전, 길게는 시후미가 중학생이던 10년 전까지 거슬러 오르는데, 그 과정에서 유키는 시후미가 유일하게 친구로 삼았던 한 인물을 알게 되고, 그들 사이의 우정 이상의 감정이 현재의 사건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는 점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그를 통해 어렴풋이나마 어떻게?’라는 미스터리의 해법을 찾아냅니다.

하지만 ?’라는 미스터리를 풀어낸 순간 유키는 큰 혼란에 빠집니다. 과연 누가 죄를 지었으며 누가 벌을 받아야 하는가, 팩트와 무관하게 진짜 가해자는 누구이고 진짜 피해자는 누구인가, 감히 누가 진실을 논할 것인가 등 신조차 단정할 수 없는 난제에 휩싸이기 때문입니다.

 

잔혹한 미스터리답지 않게 어딘가 애틋하면서도 비극을 암시하는 시적 언어로 지어진 제목에서 떠올릴 수 있듯 이 작품은 독자에게 동정이나 연민 이상의 감정을 남겨놓습니다. 그래선지 미스터리 자체보다도 등장인물들의 상처와 내면이 훨씬 더 기억에 깊게 각인되는데, 아마 이 지점에서 살짝 호불호가 갈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또 미련해 보일 정도로 집요하게 탐문을 벌이는 유키의 행보는 아날로그 시대의 탐정을 떠올리게 하는 미덕이 있긴 하지만, 동시에 모든 걸 기억하는 말 많은 관련자들에 의지하고 있다는 아쉬움도 품고 있습니다.

 

다 읽고 복기해보면 뼈대 자체는 그리 특별할 게 없습니다. 하지만 작가는 특유의 감성적인 문장과 이미지를 통해 잔혹하지만 서정적인 미스터리를 자아냈습니다. 아마도 바람아 우리의 앞머리를의 가장 큰 장점이자 개성은 바로 이 대목이 아닌가 싶습니다. 취향에 잘 맞는 서사는 아니지만, 그리 길지 않은 분량에 독특한 미스터리를 담고 있어서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영원한 우정으로 1 스토리콜렉터 102
넬레 노이하우스 지음, 전은경 옮김 / 북로드 / 2022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무자비한 독설가로 유명한 출판 편집자 하이케 베르시가 실종됩니다. 살의까지는 아니어도 그녀를 증오한 출판 관계자들이 적지 않다는 걸 알게 된 호프하임 경찰서 강력11반의 보덴슈타인과 피아는 일일이 그들을 조사하지만 좀처럼 혐의점을 찾지 못합니다. 그러던 중 하이케의 시신이 발견되고 그녀의 동료였던 알렉산더마저 의문의 사고로 중태에 빠지자 동일범에 의한 연쇄살인을 의심하기에 이릅니다. 무엇보다 하이케와 알렉산더를 포함하여 30년 넘게 우정을 쌓아온 6명의 영원한 친구들이 직종은 달라도 모두 출판계에 종사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35년 전 프랑스의 한 섬에서 일어났던 비극적인 사고가 현재의 사건과 연관된 게 확실하다는 점에 착안한 보덴슈타인과 피아는 과거와 현재의 접점을 찾아내기 위해 분투합니다.

 

영원한 우정으로는 넬레 노이하우스의 타우누스 시리즈열 번째 작품입니다. 그 때문인지 몰라도 본문 곳곳에서 과거 사건들에 대해 언급하는 대목을 자주 목격하게 되는데, 시리즈를 계속 읽어온 독자라면 보덴슈타인과 피아의 데뷔작인 사랑받지 못한 여자부터 직전 작품인 잔혹한 어머니의 날까지를 파노라마처럼 떠올릴 수 있을 것입니다.

 

오랜 과거에 잉태됐던 비극이 현재에 이르러 끔찍한 사건을 일으킨다.”타우누스 시리즈의 단골 설정입니다. 이번 작품의 프롤로그를 장식한 사건은 1983, 그러니까 작품 속 현재 시점인 2018년을 기준으로 35년 전에 프랑스의 한 아름다운 섬에서 일어났습니다. 모두 7명이었던 영원한 친구들중 한 명이 익사하는 사고가 벌어졌고, 그 뒤로 그들의 삶은 제각각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누군가는 그 사고로 인생의 순풍에 올라탔지만, 누군가는 폐인이 되다시피 독일을 떠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그들 모두 2018년 현재 편집자, 기획부장, 에이전트, 인쇄업 등 출판계에 몸담은 채 타우누스 일대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 두 명이 살해되고 나머지 멤버들 역시 35년 전 사건의 진상을 묘사한 듯한 익명의 복사본 편지를 받으면서 혼란과 공포에 빠집니다.

 

사건은 단순하지만 넬레 노이하우스는 언제나 그랬듯 과거와 현재의 미스터리를 절묘하게 엮는 것은 물론 누가 범인이라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것 같지 않은 등장인물들에 대한 긴장감 넘치는 묘사로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또 현재의 사건을 파헤치기 위해 과거를 들여다보던 보덴슈타인과 피아가 누구도 예상 못한 30여 년 전의 참혹한 진상을 파악하는 이야기는 700여 페이지의 볼륨감을 더욱 탄탄하고 충실하게 만듭니다. 별개의 사건들이지만 실은 거대한 악연에 의해 지배된 한 개의 사건처럼 촘촘하고 정교하게 구성된 덕분입니다.

 

보덴슈타인과 피아가 수사를 이끌긴 하지만, 의외의 인물들이 세컨드 탐정역할을 펼치는 설정도 흥미롭습니다. 전도유망한 젊은 편집자 율리아는 본의 아니게 35년 전 프랑스에서 벌어진 사고의 진상을 그린 미완성 원고를 읽게 된 탓에 현재 벌어진 사건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그녀에게 결정적인 도움을 주는 건 피아의 전 남편이자 뛰어난 법의인류학자인 헤닝입니다. 헤닝은 보덴슈타인과 피아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범죄소설로 일약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상태인데, 마침 율리아가 그의 담당 편집자라 그녀의 의문을 해소해주는 역할을 맡습니다. (말하자면 헤닝은 소설 속에서 타우누스 시리즈의 작가가 된 것입니다. 그가 발표한 작품도 실제 타우누스 시리즈의 작품과 이름이 같습니다.) 두 사람의 수사는 때로 선을 넘은 탓에 피아의 격분을 사기도 하지만 결정적인 단서를 포착하여 사건 해결에 큰 공을 세웁니다.

 

사건 외에 눈길을 끈 건 보덴슈타인의 불운한 결혼생활입니다. 58세의 보덴슈타인은 세 번째 결혼마저 파국 직전인 가운데 간암에 걸린 전처 코지마를 위해 자신의 간을 이식해주기로 결심합니다. 매번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주인공들의 사생활 이야기는 잔혹한 사건에서 잠시 눈을 돌릴 틈을 주곤 하지만, 행복과는 거리가 먼 고통스런 내용이 대부분이라 아무래도 마음 편히 읽을 수는 없습니다. 해리 보슈와 해리 홀레를 포함하여 제가 좋아하는 스릴러 주인공들도 비슷한 삶의 궤적을 그린 걸 생각해보면 스릴러의 맛이 좀더 진하고 깊어지기 위해선 아무래도 주인공의 불행이 필수요소라는 걸 부인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독일에서 2021년에 출간됐지만 이 작품의 배경은 2018년입니다. 아무래도 각각 58, 51세에 이른 보덴슈타인과 피아를 한 살이라도 젊게 그리려는 의도로 추정되는데, 독일 경찰의 정년이 몇 살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리 늦어도 시리즈 12~13편쯤에 보덴슈타인이 퇴직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저 우울해질 따름입니다. ‘잔혹한 어머니의 날서평 말미에도 쓴 내용이지만, 넬레 노이하우스가 시간을 거스르는 소재를 통해서라도, 아니면 보덴슈타인으로 하여금 탐정사무소를 차리게 해서라도 언제까지든 타우누스 시리즈를 이어가기를 간절히 바랄 뿐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거짓말, 딱 한 개만 더 현대문학 가가 형사 시리즈 개정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9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가가 형사 시리즈의 여섯 번째 작품인 거짓말, 딱 한 개만 더는 다섯 편의 단편으로 이뤄진 작품입니다. 편당 50페이지 안팎에 불과해서 복잡하거나 정교한 서사와는 거리가 멀지만, 수록작 모두 가가 형사의 매력과 히가시노 게이고 특유의 미스터리를 잘 담아냈습니다. 또한 등장인물도 가가 외에 극소수라 대부분 가가와 범인의 ‘2인극이라 할 수 있고, 범죄 역시 흉악함보다는 그 이면의 사연들이 더 강조되는 일상 살인미스터리의 성격이 더 강합니다.

 

수록작들의 얼개를 대략 살펴보면, 사회적 명성 때문에 저지른 치명적인 거짓말 하나가 어떤 비극을 야기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 거짓말, 딱 한 개만 더’, 모두에게 비난받아 마땅한 범죄지만 실은 그 이면에 가족 혹은 부부의 문제가 도사리고 있음을 가가의 추리를 통해 폭로하는 차가운 작열’, 자식교육에 모든 것을 건 어머니의 비극이란 소재 때문에 범행의 진실이 드러났을 때 더욱 더 소름을 돋게 만든 2지망’(개정판 제목은 두 번째 꿈’), 남편의 학대에 절망한 아내가 마지막 탈출구를 모색하지만 아이러니한 비극에 마주치고 마는 이야기를 다룬 어그러진 계산’, 친구의 교통사고에 의심을 품은 가가가 자신이 목격한 작은 단서들을 통해 친구 부부의 내밀하고도 서글픈 사연을 파헤치는 친구의 조언이 수록돼있습니다.

 

사회적 명성이라는 허상을 다룬 표제작 거짓말, 딱 한 개만 더를 제외하곤 모두 가족 혹은 부부의 갈등이 범죄로 이어지는 이야기들입니다. 살인을 야기한 갈등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사회적 이슈를 내포하고 있기도 합니다. 지루하고 답답한 일상에다 육아의 책임까지 떠맡은 전업주부의 일탈이라든가 아내를 도구로 여기는 남편의 폭력과 학대, 자신의 꿈을 자식에게 투영하려는 집착에 가까운 교육열 등이 갈등의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트릭 자체를 강조했던 전작들과 달리 이 작품은 사회파 미스터리의 경향이 상대적으로 짙어보였습니다.

 

언제나처럼 가가는 사소한 힌트를 바탕으로 범행에 쓰인 도구와 방법을 밝혀내는 예리한 관찰력”(역자 후기)을 발휘합니다. 결정적인 단서와 증거보다 담배 냄새나 샴푸 냄새, 싱크대의 유리컵이나 벽에 걸린 초등학생의 그림 같은 일상 속 흔적들이 더 큰 추리의 단초들입니다. “모든 건 현장에 있다.”는 교훈을 은근히 강조하고 있는 셈인데, 덕분에 마치 일선 형사들을 위한 교과서처럼 읽히기도 했습니다.

 

대단한 반전도, 복잡한 미스터리도 없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사실감을 풍성하게 맛볼 수 있는 작품입니다. 장편이 부담스러운 독자라면 이 작품을 통해 가가 형사와 처음 만나보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미궁
나카무라 후미노리 지음, 양윤옥 옮김 / 놀 / 2022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름 일본 미스터리 마니아지만 좀처럼 친해지지 못하는 작가가 몇 있는데, 그중 하나가 나카무라 후미노리입니다. 한국에 출간된 일곱 편 가운데 쓰리왕국을 읽었고 교단 X’는 도중에 포기했는데, 비교적 쉽고 선명한 서사의 쓰리외에는 읽을수록 머릿속이 어질어질해지고 혼돈만 가중되는 경험을 거듭했습니다. 그런 탓에 책장에 보관 중인 악과 가면의 룰은 도저히 읽어낼 자신이 없어 기약 없이 방치해 온 게 사실입니다. 그러던 중 미궁8년 만에 개정판으로 출간됐다는 소식을 듣고 내심 약간의 기대를 품고 읽어보기로 결심했는데, 결론부터 말하면 기대한 만큼의 만족이 절반, “역시나...”라는 아쉬움이 절반이었습니다.

 

지나치게 아름다운 엄마와 그런 아내를 광적으로 감시하는 아빠, 사춘기의 성적 욕망을 여동생에게 푸는 아들과 오빠를 피해 다니는 딸. 묘하게 뒤틀린 가족이 집에서 죽었다. 사건이 미궁에 빠진 채 22년이 흐른 지금, 살아남은 딸은 여전히 두려움에 떨고 있다.”라는 설정만 보면 엽기적인 사건을 다룬 전형적인 미스터리로 예단하기 쉽지만, 을 테마로 인간의 밑바닥을 집요하게 그려온 나카무라 후미노리는 단순히 누가 범인? 진실은 무엇?”을 넘어 한껏 일그러진 여러 인간의 심리와 그들이 느낀 출구 없는 미궁의 공포에 방점을 찍습니다.

 

어릴 적부터 음울함에 휩싸인 채 내면에 또 다른 인격을 만들기도 했던 신견은 30대 법률사무소 직원이 된 지금, 겉으로는 평범한 직장인처럼 보이지만 실은 염세적이고 비관적인 생각과 함께 머릿속에 온통 위악만을 품고 있는 인물입니다. 바에서 만나 하룻밤을 함께 보낸 사나에가 22년 전 사건의 유일한 생존자라는 걸 알게 된 신견은 미궁에 빠진 그 사건에 이상하리만치 집착하기 시작합니다. 사건 관련자들을 찾아다니는 것은 물론 자신만의 추리로 사건의 진실을 알아내려고 합니다. 하지만 밀실상태에서 벌어진 엽기적인 사건이 신견의 추리로 해결될 리는 없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신견은 사나에로부터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진 그녀의 가족사와 함께 범행 당일의 상황을 전해 듣습니다. 언뜻 앞뒤가 잘 맞아 보이긴 하지만 그녀의 이야기는 곳곳에서 위화감을 자아냅니다. 그리고 사나에가 우연을 가장해 자신을 만난 이유를 듣곤 충격과 안도감이라는 이질적인 감정을 동시에 느낍니다.

 

나답지 않은 짓을 하자고 생각했다. 내 존재의 경향과 반대되는 짓을 해보자. 한 번밖에 없는 인생을 항상 건전하게 살라고? 뭘 위해서?” (법률사무소 직원 신견)

 

나를 소유해줘. 당신 것으로 만들어. 나를 좀 더 사랑해줘. 죽여도 좋아. 당신 하고 싶은 대로 해.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도 좋아.” (22년 전 사건에서 살아남은 사나에)

 

위악에 사로잡힌 채 22년 전 사건에 집착하는 신견과 사건 이후 내면이 완전히 망가져버린 사나에가 이끌어가는 이야기는 시종 기묘한 공포와 섬뜩한 이물감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마치 타인의 일그러진 마음속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는 듯한 느낌이랄까요? 거기엔 희망이나 긍정 따윈 조금도 찾아볼 수 없고 오로지 의심, 증오, 욕망, 비관, 공포, 죽음만이 가득할 뿐입니다. 몸과 마음이 온통 오염된 듯한 두 사람에게 해피엔딩이란 가당치 않은 일로 보이고, 미스터리가 어떤 결말을 맞이할지는 어느 새 관심사에서 멀어져버리고 맙니다. 그래서인지 마지막 장을 덮을 무렵엔 길고도 긴 악몽 한 편을 꾼 듯한 으스스함이 전신을 지배합니다. 240여 페이지의 짧은 분량이지만 그 몇 배는 되는 듯한 서사에 억눌린 기분도 함께 말입니다.

 

이야기도 이야기지만 기승전결이라는 평범한 구조와도 거리가 멀어 독자 입장에선 결코 편하게 읽힐 작품은 아닙니다. 하지만 나카무라 후미노리의 독특한 정서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그 어느 작품보다 높은 몰입감과 만족도를 만끽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절반의 만족과 절반의 아쉬움을 느낀 제 경우엔 책장에 방치된 악과 가면의 룰을 읽을 일이 더더욱 기약 없는 일이 되고 말았는데, 그저 언젠가 알 수 없는 이유로 그의 작품을 다시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내가 그를 죽였다 현대문학 가가 형사 시리즈 개정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9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유명 소설가와 신예 시인의 결혼식을 앞두고 대중의 관심이 집중된 가운데, 신랑의 집에서 한 여성이 자살한다. 신랑은 매니저와 함께 시체를 그녀의 집으로 옮기는 등 필사적으로 그녀와의 관계를 감추려 한다. 하지만 결혼식 당일 그 자신이 수많은 하객들 앞에서 독살당하고 만다. 여동생을 향한 뒤틀린 사랑으로 인해 질투에 눈이 먼 신부의 오빠,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를 자살로 몰고 간 신랑에게 증오심을 불태우는 신랑의 매니저, 한때 죽은 신랑과의 결혼을 꿈꿨다가 배신당한 편집자. 이들 모두 그를 죽이고 싶어 했고, 스스로가 범인이라고 믿고 있다. 누가 언제 어떻게 독약을 건넸는지가 모호한 가운데, 가가 형사는 특유의 냉정하고 빈틈없는 추리력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가가 형사 시리즈다섯 번째 작품인 내가 그를 죽였다는 전작인 둘 중 누군가 그녀를 죽였다와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남녀의 애정 문제가 살인사건의 저변에 깔려 있고, 용의자는 극소수(전작은 2, 이 작품은 3)이며, 마지막까지 범인이 누군지 독자에게 알려주지 않아 독자와의 추리대결! 궁극의 범인 찾기 소설로 불린다는 점입니다. 두 작품 모두 말미에 추리과정을 설명하는 봉인 해설이 수록돼있지만, 후룩후룩 읽은 독자라면 그 해설을 읽고도 범인을 바로 짐작할 수 없는 것은 물론 어느 대목을 다시 읽어야 할지조차 알 수 없을 정도로 작가는 결정적인 단서들을 교묘하고도 감쪽같이 매복시켜놓았습니다.

 

자살로 추정되는 사건과 독살이 분명한 사건 등 두 개의 죽음에서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유명 소설가이자 각본가인 호다카 마코토가 결혼식장에서 독에 의해 사망하자 경시청 수사1과가 수사에 나섭니다. 그러던 중 마코토와 연인관계였던 준코가 자신의 집에서 자살한 채 발견되자 관할서인 네리마 경찰서의 가가 형사가 투입됩니다. 용의자를 세 명으로 압축시킬 수 있었던 건 마코토를 죽인 독약이 평소 그가 지니고 다니는 필 케이스(휴대용 알약통)에 들어있었고, 결혼식 당일 그 필 케이스를 손에 넣을 수 있었던 게 단 세 명뿐이기 때문입니다.

 

이 작품의 특징 중 하나는 용의자 세 명이 한 챕터씩 1인칭 화자를 맡아 이야기를 진행한다는 점입니다. 사연은 제각각이지만, 그들은 하나같이 마코토를 죽이고 싶은 마음을 품고 있었고, 그 심정을 자신이 화자를 맡은 챕터에서 절절하게 풀어놓습니다. , 마코토가 죽은 뒤에는 모두 내가 그를 죽였다.”라고 확신하기도 합니다.

 

내 몸속에서 끓어오르는 것이 있었다. 내가 그를 죽였다.” (담당편집자, 유키자사 가오리)

죄책감 따위는 없었다. 나는 꼭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다.” (매니저, 스루가 나오유키)

내가 준 독에 의해 그 녀석이 죽어가던 광경은 지금도 눈꺼풀에 낙인처럼 찍혀 있다.” (신부 미와코의 오빠, 간바야시 다카히로)

 

말하자면 세 명의 용의자는 자신이 마코토를 죽였다고 확신하면서도 가가의 집요한 탐문을 이겨내야 하는 아이러니한 처지에 처한 셈입니다. 누가 범인이라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에서 가가는 집요한 탐문을 통해 세 용의자의 허점을 정확하게 포착해냅니다. 한때 모든 가설이 장벽에 부딪히기도 하지만, 가가는 누구든 허투루 여겼을 게 분명한 작은 단서를 통해 범인을 특정합니다. 그리고 범인은 당신입니다.”라는 말과 함께 이 작품의 막을 내립니다.

 

근친상간, 증오, 배신감 등 어둡고 음습한 감정을 품은 용의자들의 복잡 미묘한 심리라든가 사소한 단서들과 평범한 진술 속 허점을 파고들어 범인을 찾아내는 가가의 매력은 그리 길지 않은 분량이긴 하지만 마지막까지 단번에 완주하게 만드는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빠른 템포와 함께 독자의 자발적인 추리를 이끌어내는 히가시노 게이고 특유의 필력도 여전합니다.

다만, “독자와의 추리대결!”이란 형식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흥미진진하게 진범 찾기에 참여하겠지만, 사실 히가시노 게이고가 숨겨놓은 단서는 너무나 미시적인 것이라 알고 나면 다소 허탈해질 수도 있는 게 사실입니다. 특히 독자의 시선을 엉뚱한 곳으로 홀려놓곤 약간 모호한 정보를 결정타 삼아 범인을 특정한 건 반칙으로 여겨질 여지도 충분하다는 생각입니다.

 

가가 형사 다시 읽기가운데 이제 절반을 마친 셈인데, 3편인 악의를 제외하곤 오래 전 기억과 마찬가지로 다소 평범한 미스터리로 읽혔습니다. 가가의 진면목이 유감없이 발휘됐다고 기억하는 작품들이 대부분 후기작들(구체적으로는 시리즈 7붉은 손가락부터 마지막 편까지)이라 지금까진 예열 단계라고 생각해왔는데, 다음 작품인 거짓말 딱 한개만 더는 단편집이라 기억이 더욱 애매모호해서 예열의 마지막 편이 될지 진면목의 첫 편이 될지 잘 모르겠습니다. 일단 기대감을 갖고 조만간 달려볼 예정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