윈저 노트, 여왕의 비밀 수사 일지 첩혈쌍녀
소피아 베넷 지음, 김원희 옮김 / 북스피어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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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흔 살 생일을 앞둔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윈저성에서 열린 연회에서 러시아 피아니스트가 변사체로 발견되자 충격에 빠집니다. 무엇보다 다분히 변태적인 성행위를 연상시키는 시신의 상태 때문에 철저한 보안 하에 보안정보국과 경찰이 비밀리에 내사를 벌일 수밖에 없습니다. 당일 방문객과 성의 직원들까지 샅샅이 조사하지만 좀처럼 단서가 드러나지 않는 것은 물론 수사책임자인 보안정보국장이 러시아의 암살 음모가 확실하다고 주장하는 바람에 여왕의 혼란은 더욱 깊어집니다. 여왕의 선택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진실을 캐는 것. 여왕은 신참 보조비서 로지를 비롯한 측근들을 지휘하여 사건의 진상을 하나둘씩 밝혀내기 시작합니다.

 

올해 9월 서거한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주인공인데다 그녀 자신이 왕관을 쓴 미스 마플’, 즉 미스터리 해결사로 등장한다고 해서 더욱 관심을 끈 작품입니다. 노인이나 주부 등 아마추어 탐정이 활약하는 미스터리를 선호하는 편은 아니지만 윈저성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을 추적하는 현직 여왕은 저 같은 취향의 독자에게도 충분히 어필할 수 있는 설정이었습니다.

 

자칫 러시아 남자, 여왕의 파티에서 섹스에 탐닉하다 사망해!”라는 기사가 나올 수도 있는 상황이라 철저한 보안이 이뤄진 가운데, 사건 전날부터 윈저성에 묵은 50여 명의 방문객과 수백 명에 달하는 성의 직원들을 상대로 벌이는 수사는 초반부터 난항에 부딪힙니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수사의 두 주체는 명확히 다른 관점을 드러냅니다. 보안정보국의 수장 개빈 험프리스가 푸틴의 지시를 받은 내부 스파이의 소행!”이라고 단정한 반면, 여왕의 직감은 전혀 다른 방향을 향합니다. 그리고 그 직감을 입증하기 위해 측근들을 활용하기로 합니다.

 

하지만 여왕이 측근들을 고르는 기준은 좀 독특합니다. 아무리 자신의 수족과 같은 자라 해도 자신을 그저 블로그가 뭔지도 잘 모르는 90살 할머니로만 여기는 자들은 일부러 배제합니다. 대신 자신의 이야기를 경청해주는 자, 자신과 소통이 되는 자들을 선택합니다. 왕실 기마포병대에서 복무한 뒤 여왕의 보조비서가 된 지 고작 6개월밖에 안 된 신참 로즈메리 그레이스 오쇼디(이하 로지)가 선발된 건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과거 경호팀에서 일하다 은퇴한 빌리 매클라클런 역시 이런 맥락에서 여왕의 팀에 합류하게 됩니다.

 

직접 수사에 뛰어들 수도, 관련자들을 탐문할 수도 없는 여왕을 위해 로지와 빌리는 분주하게 발품을 팝니다. 특히 로지는 여왕의 최측근이자 자신의 직속상관인 사이먼 경마저 속여야 하는 것은 물론 비밀리에 대포폰까지 마련하는 등 생전 경험해보지 못한 스파이역할에 때론 당황하기도 때론 묘한 흥분을 느끼기도 합니다. 또한 자신뿐 아니라 이미 오래 전부터 왕관을 쓴 미스 마플을 보좌하던 전임자들이 있었다는 사실에 크게 놀라기도 합니다.

 

재미있는 건, 측근들을 활용하여 미스터리를 풀어내긴 하지만 정작 여왕 자신이 해결사란 점은 결코 드러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 측근들이 모아온 결정적인 단서와 자신이 직접 추리하여 얻어낸 사건의 진상을 티 안 나게 넌지시 던져주고 결과가 발표되기를 기다릴 뿐입니다. 수사에 가담한 측근 1~2명을 제외하곤 아무도 그 사실을 눈치 채지 못합니다.

이런 설정은 흥미로우면서도 동시에 주인공이 발산하는 쾌감을 맛볼 수 없다는 단점도 지니는데, “윈저성에서 펼쳐지는 본격 탐정 서사를 기대한다면 실망할 공산이 크다. 이 작품은 여왕이 자기만의 방식 - 능청스럽고 우아하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무위의 기술 - 으로 미스터리를 푸는 과정을 그린다.”(p389)라는 역자 후기는 그런 맥락에서 나온 것으로 보입니다.

 

개인적으론 미스터리 못잖게 70년 가까이 왕위를 지켜온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소소한 일상들이 매력적으로 읽혔는데, 어쩌면 불과 얼마 전에 그녀가 서거했다는 사실 때문에 더욱 애틋하게 다가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남편 필립 공과의 소박한 부부생활, 증손녀의 생일을 기다리는 작은 기쁨, 애마(愛馬)에 대한 무한하고도 따뜻한 애정, 그리고 윈저성의 모든 직원들에 대한 푸근한 배려 등 여왕의 일상 하나하나가 흥미진진하게 그려졌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미스터리의 난이도나 그 결과에 대해 다소 아쉬움이 남긴 했지만 이런 미덕들 때문에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작품이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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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원
다이몬 다케아키 지음, 남소현 옮김 / 북플라자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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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교토. 유망한 법대생 야기누마 신이치가 친구인 남녀 두 명을 잔혹하게 살해한 혐의로 체포됐습니다. 10년이 넘는 긴 재판 끝에 사형선고를 받은 신이치는 수기까지 발표하며 무고함을 주장하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아버지 에츠시를 포함하여 그 누구와의 면회도 결단코 거부합니다. 전단지까지 돌리며 아들의 무죄를 호소하던 에츠시는 어느 날 충격적인 전화를 받습니다. 자신을 메로스라고 칭한 자가 신이치는 무죄이며 진범은 자신.”이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더구나 자수의 대가로 5천만 엔이라는 거금을 요구하자 에츠시는 혼란에 휩싸입니다.

 

올해(2022) 초 출간된 다이몬 타케아키의 완전무죄를 무척 흥미롭게 읽어서 2009년 요코미조 세이시 미스터리 대상과 TV도쿄상을 수상한 설원의 출간을 고대해왔습니다. 원죄(冤罪, 억울하게 뒤집어쓴 죄)와 진범 찾기 미스터리가 절묘하게 조합된 완전무죄와 마찬가지로 설원은 사형제도의 문제를 진범 찾기 서사 속에 잘 녹여낸 사회파 미스터리입니다. “원통함을 씻어준다”(雪寃)는 뜻의 제목만 봐도 이 작품의 성격을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들 신이치의 무죄를 확신하는 전직 변호사 에츠시가 이야기를 이끄는 가운데 신이치에게 사랑하는 언니를 빼앗긴 임상심리사 나츠미, 선대 변호사의 뒤를 이어 신이치의 변호를 맡은 이사와, 무슨 이유에선지 에츠시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한 듯한 길거리 뮤지션 모치다 등 가해자와 피해자 주변 인물들이 진실 찾기 공방을 벌이며 동시에 사형제도의 문제에 관한 격렬한 논쟁을 벌입니다. 과연 신이치는 누명을 쓴 것인가? 전화를 걸어온 자는 진짜 범인인가? 그렇다면 그가 두 명을 살해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 죄를 신이치에게 뒤집어씌운 건 애초부터 계획했던 것인가? 등 여러 겹의 이야기가 빠르고 긴장감 넘치게 전개됩니다.

 

일반적으로 사형제도 논쟁은 응징이 필요하다.”는 찬성론과 원죄의 가능성을 주장하는 폐지론으로 갈립니다. 하지만 설원의 주인공인 에츠시의 입장은 좀 독특합니다. 존치(찬성)론자들이 피해자 유족의 원통한 마음을 근거로 드는 건 치사한 짓이야. 누명을 쓰고 잡혀 들어간 사람들의 억울함을 폐지론의 근거로 삼는 것도 마찬가지야.”라며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의미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 논의는 무의미하다.”는 주장을 펼칩니다. 말하자면 사형 역시 살인행위란 관점에서 들여다봐야 한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그런 에츠시조차 진범이 따로 있다는 걸 알게 된 뒤로는 그 자를 찾아내 죽이고 말겠다는 집념에 사로잡히고 맙니다. ‘남의 일로만, 혹은 논쟁거리로만 여겼던 사형제도가 자신의 일이 됐을 때 벌어질 수 있는 지극히 현실적인 케이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작가는 에츠시 외에도 여러 사람의 입을 빌어 사형제도의 존폐에 관한 여러 의견을 소개하는데, 정답 없는 어려운 논쟁이긴 하지만 이만큼 다양한 관점을 접한 건 무척 이례적인 일이었습니다.

 

이 작품엔 여러 차례 큰 변곡점이 등장하는데, 각 변곡점들이 모두 대형 스포일러라 더 이상 자세한 내용 소개는 곤란합니다. 출판사의 소개글이 지극히 짧게 초반부만 소개하고 있는 것도 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다만 독자의 예상이나 기대를 매번 엇나가게 하는 의외의 전개 덕분에 마지막까지 어떤 엔딩이 기다리고 있을지 좀처럼 추측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전작인 완전무죄와 마찬가지로 한 번에 마지막 장까지 달릴 만큼 흥미로운 이야기지만, 아쉬운 점도 몇 가지 있습니다. 무엇보다 사형제도에 관한 논쟁이 적잖은 분량을 차지한 점이 부담스러웠는데, 주요 인물 대부분이 어떤 식으로든 사형제도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는 가해자 혹은 피해자로 설정된 탓으로 보입니다. 더 아쉬웠던 건 막판에 밝혀진 진실이 어떻게 봐도 현실감이 없었다는 점입니다. ‘진범으로 드러난 인물의 정체도 정체지만, 과연 저런 생각과 행동이 가능할까, 라는 의문과 함께 반전을 위한 반전으로밖에 보이지 않은 엔딩은 독자에 따라 앞서 읽은 이야기들을 다소 허무하게 만들 수도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개인적으로 사회파 미스터리, 그중에서도 원죄에 관한 이야기를 무척 좋아해서 한국에 소개된 다이몬 타케아키의 두 작품 모두 재미있게 읽었는데, 일본에서 펴낸 것만 30여 편에 이르는 그의 나머지 작품들이 좀더 많이 한국에 소개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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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미하라
츠지무라 미즈키 지음, 문지원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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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미하라(ハラ) = 야미() + Harassment

정신과 심리가 어둠에 잡아먹힌 상태에서 자신의 생각이나 사정 등을 상대에게 일방적으로 강요해 불쾌하게 하는 언동과 행위.

 

야미하라(闇祓)

어둠을 뿌리는 사람들, 즉 야미하라(ハラ)를 물리치는 사람들

 

갑질, 가스라이팅, 마운팅(언어나 태도로 상대보다 우위에 서려는 행위) 등 비교적 최근에 만들어진 폭력 혹은 학대에 관한 신조어들은 어느 날 갑자기 생긴개념들이 아닙니다. 실은 아주 오래전부터 일상에 만연해있었지만 수면 아래 감춰지거나 개인의 문제로 치부되거나 극소수의 일탈행위로 여겨왔을 뿐입니다. 또 요즘처럼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기 전에는 오롯이 피해자 혼자 그 극심한 공포와 두려움을 감당해야만 했습니다.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할, 털어놓는다 해도 네가 참아야지 별 수 있니?”라는 소극적인 답변만 돌아올 게 뻔한 그 공포와 두려움은 실은 한 개인의 삶을 완전히 박살낼 수도 있는 엄청난 것인데도 말입니다.

 

야미하라는 바로 그 공포와 두려움을 호러라는 장르 속에 절묘하게 결합시킨 작품입니다. 모두 다섯 편의 연작 단편으로 이뤄진 이야기엔 교묘하게 상대의 마음에 어둠을 심고 끝내 그 사람은 물론 주변까지 황폐화시키는 야미하라(ハラ)가 등장합니다. 같은 성()을 쓰는 일가족으로 보이는 그들은 갑질, 가스라이팅, 마운팅은 물론 때론 누군가의 이야기를 하염없이 들어주는 것을 통해 상대의 마음을 지배하고 탁하게 만들어버립니다. 피해자 가운데 죽음에 이르는 자도 무수하고, 본인만이 아니라 주변에까지 오염된 어둠을 퍼뜨리기도 합니다. 그렇게 피해자를 잡아먹고나면 야미하라는 또 다른 목표물을 향해 거침없이 움직입니다. 그리고 이런 야미하라를 상대하는 건 아이러니하게도 동명의 야미하라(闇祓)입니다. 어두울 과 부정을 없애는 이란 한자어로 이 작품의 원제이기도 합니다. 이들의 임무는 어둠을 퍼뜨리는 야미하라를 쫓아 소멸시키는 것입니다.

 

설정만 보면 100% 순도 높은 호러물로 보이지만, 같은 장르의 그 어느 작품보다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고 팽팽한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이유는 피해자들의 공포와 두려움이 딴 나라에서 벌어지는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학교와 친구, 집과 이웃, 회사와 동료 등 피할 수 없는 인간관계 속에서 누구나 몇 번쯤은 접하게 되는 일상적인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주변에 이런 인간 꼭 있지.” 혹은 생각만 해도 기분 나쁘거나 마주치면 어떻게든 피하고 싶은 인간.” 혹은 끊임없이 뭔가를 강요하거나 자신의 생각을 주입하려는 인간.” 등 누구나 한두 명쯤은 기억해낼 그런 가해자들을 츠지무라 미즈키는 야미하라라는 개념으로 포장했습니다. 그리고 피해자들의 경우 단순히 기분 나쁘거나 두려움을 느끼는데서 그치는 게 아니라 파멸이나 죽음 혹은 끔찍한 전염에 이르는 최악의 상황을 맞이하는 걸로 설정했습니다. 그래서인지 개인적으로는 이 작품을 사회파 호러라고 부르고 싶어졌습니다. 어울리지 않는 두 개념이지만 야미하라는 바로 이 미덕 때문에 빛을 발하는 작품이라는 생각입니다.

 

엔딩과 옮긴이의 말을 보면 언젠가 이 작품의 후속작이 나올 듯도 한데, 비슷한 서사가 반복될 가능성이 많아서 너무 큰 기대를 해선 안 될 것 같기도 합니다. 그래도 츠지무라 미즈키가 좀더 상상력을 발휘한다면 의외의 후속작을 만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옮긴이의 말의 한 대목을 인용하며 서평을 마칠까 합니다.

 

이름만 없었을 뿐 이미 오래전부터 세상에 넘쳐나던 야미하라. 가장 위험하고 오싹한 공포는 바로 가까이에 도사릴지니, 역시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사람이고 가장 알 수 없는 것은 사람 마음이랍니다.” (p502~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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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뢰성
요네자와 호노부 지음, 김선영 옮김 / 리드비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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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부 시리즈를 비롯하여 독특한 미스터리를 선보여온 요네자와 호노부가 역사미스터리, 그것도 440여 년 전인 1578년 전국시대를 배경으로 한 작품을 냈다고 해서 놀람 반, 기대 반의 심정으로 출간을 기다렸습니다. 읽기 전에 검색해보니 100% 픽션이 아니라 실존했던 인물들이 등장하는 팩션(Faction)인데다 주인공인 무장 아라키 무라시게와 지략가 구로다 간베에는 전혀 낯선 이름들이라 궁금증이 더해졌습니다.

 

1578, 오다 노부나가의 무장이던 아라키 무라시게가 근거지인 아리오카 성()에서 모반을 일으킵니다. 난공불락의 요새로 개조한 성에서 오다의 총공세에 맞설 준비를 마친 무라시게 앞에 오다의 군사(軍師) 구로다 간베에가 나타납니다. 무라시게가 결코 이길 수 없는 싸움임을 목숨을 걸고 설득하려던 간베에는 뜻밖에도 목이 달아나지도, 살아 돌아가지도 못한 채 지하감옥 흑뢰성에 갇힙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1년간 아리오카성에는 폭풍전야 같은 전운이 흐르는 가운데 크고 작은 기이한 사건들이 벌어집니다. 그 사건들은 미궁에 빠지면서 성내 군사들과 백성들의 사기를 크게 저하시켰고 무라시게를 곤혹스럽게 만듭니다. 결국 무라시게는 지하감옥의 간베에 외엔 누구도 그 미스터리를 풀 수 없음을 인정하고 도움을 청합니다.

 

서장종장을 제외하고 네 개의 챕터로 구성돼있고, 매 챕터마다 아리오카 성에서 벌어진 기이하거나 불길한 사건들이 등장합니다. 완벽한 밀실상태에서 암살이 벌어지고, 전쟁에서 베어온 적군의 머리가 하루아침에 표정이 달라져있는가 하면, 적과 내통하던 자가 거짓말처럼 번개에 맞아 죽는 등 상식만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사건들 때문에 무라시게의 스트레스는 극에 달합니다. 단순히 범인을 찾고 못 찾고의 문제가 아니라 군사와 백성을 동요하게 만들어 전쟁의 승패까지 뒤바꿀 수 있는 심각한 사태를 야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막다른 길에 다다른 무라시게가 지하감옥의 간베에에게 조언을 구하고, 간베에가 남긴 수수께끼 같은 힌트를 바탕으로 무라시게가 사건의 진상을 밝히는 방식으로 전개되는데, 그렇다고 해서 두 사람이 홈즈와 왓슨처럼 사이좋게 미스터리를 푼다는 뜻은 절대 아닙니다. 과거의 인연에도 불구하고 현재 적장과 포로가 된 두 사람의 관계는 단순한 애증을 넘어 무척이나 복잡 미묘하게 꼬여있는데다 엔딩에서 거대한 반전을 이끌어낼 만큼 시한폭탄 같은 분위기를 발산합니다. “어찌 보면 의뢰인과 안락의자 탐정이지만, 동시에 끊임없이 죽고 죽여야 하는 전쟁에 휘말린 집단과 개인을 상징한다.”는 출판사 소개글은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입니다.

 

장르는 팩션 미스터리지만, 실은 이 작품의 화두는 전쟁의 민낯입니다. 패권을 쥐기 위해 동맹과 배신을 밥 먹듯 저지르는 무인들, 자신의 영달을 위해서라면 누가 주군이든 상관없는 휘하장수들, 전쟁의 참화 속에 벌레만도 못한 죽음을 당해야 하는 백성 등 약육강식이 시대정신이고, 살육이 일상인 날들이 미스터리의 저변에 깔려있습니다. 특히 전진하면 극락, 후퇴하면 지옥!”이라는 구호만 믿고 전쟁터에 내몰렸던 백성들이 단지 적장의 기분 때문에 대량학살을 당하는 장면은 이 작품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대목 중 하나입니다. 극락에 가기 위해 전진하자니 개죽음이 기다리고 있고, 살아남기 위해 후퇴하자니 지옥이 기다리고 있다는 딜레마는 내세를 확신하던 당시 사람들에게는 공포 그 자체나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오다 노부나가와는 다른 지도자가 되겠다는 다짐으로 반역을 꾀했지만, 어느새 전쟁의 광기에 사로잡혀 초심을 잃어버린 무라시게는 전쟁의 아이러니를 잘 보여주는 인물입니다. 또한 지하감옥에 갇힌 간베에는 전쟁에 관한 한 가담자이면서 동시에 희생자로 그려지는데, 무라시게의 미스터리 해결사인 그의 진짜 속내가 밝혀지는 엔딩은 전쟁이 한 개인에게 어느 정도까지 깊고 고통스런 화인(火印)을 남길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미스터리는 아니지만 막부 말기 한 사무라이의 처절하면서도 애틋한 삶을 그린 아사다 지로의 칼에 지다를 무척 좋아하는데, ‘흑뢰성은 전쟁의 민낯과 미스터리를 잘 결합함으로써 역사소설의 또 다른 참맛을 만끽하게 해준 작품입니다. 다 읽고도 정말 요네자와 호노부가 썼다고?”라는 의문이 쉽게 해소되지 않았는데, 그만큼 대단한 작가라는 반증이 아닐까 싶습니다. 데뷔 20주년 대작을 마무리한 요네자와 호노부가 다음엔 어떤 작품으로 독자들을 찾아올지 벌써부터 기대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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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사랑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민경욱 옮김 / ㈜소미미디어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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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토대학 미식축구부 출신인 니시와키 데쓰로는 13년 만에 팀 매니저였던 히우라 미쓰키와 만납니다. 그리고 그녀로부터 두 가지 놀라운 고백을 듣습니다. 하나는 자신의 몸은 여자지만 어려서부터 남자의 마음을 갖고 있었다는 점, 또 하나는 자신이 일하던 바의 호스티스를 스토킹해온 남자를 살해하고 도망치는 중이란 점입니다. 데쓰로와 그의 아내이자 역시 미식축구부 매니저였던 리사코는 신의 실수를 바로잡아 남자가 되려는미쓰키를 자신들의 집에 감춰주기로 합니다. 경찰에 체포된다면 미쓰키의 바람은 영원히 이뤄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미식축구부 동료였던 사회부 기자 하야타가 스토커 살해사건을 취재하며 데쓰로를 궁지에 몰아넣기 시작했고, 그 와중에 미쓰키마저 행방을 감추자 데쓰로는 당혹감에 어쩔 줄 모릅니다.

 

2003짝사랑’, 2006아내를 사랑한 여자라는 제목으로 한국에 출간됐던 히가시노 게이고의 2001년 작품입니다. 줄거리에서 짐작할 수 있듯 이 작품은 달달한 멜로처럼 보이는 제목과는 달리 무척이나 민감하고 논쟁의 여지가 많은 젠더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룹니다. 매체와 장르를 불문하고 지금도 여전히 다루기 조심스러운 소재라서 그런지 출간된 지 20년도 넘은 작품이란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습니다.

 

작가는 미쓰키를 통해 젠더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면서 거기에 스토커 살해사건이라는 미스터리를 접목시켜 이야기의 볼륨감을 더욱 두텁게 만듭니다. 자신의 성정체성 문제를 고백한 뒤 홀연히 사라진 미쓰키의 행방을 쫓는 과정에서 데쓰로는 미쓰키와 비슷한 처지에 놓인 사람들을 적잖이 만납니다. 그리고 몸과 마음의 정체성이 달라 고민하는 그들이 어떤 식으로 탈출구를 마련하는지 알게 되면서 큰 충격을 받습니다. 동시에 스토커 살해사건의 진실 - 혹시 범인은 따로 있는가? 그를 죽인 진짜 이유는 무엇인가? 경찰의 수사가 지지부진한 이유는 무엇인가? - 까지 추적하게 되는데, 거기에 냉정한 사회부 기자가 된 미식축구부 동료 하야타가 끼어들면서 예상치 못한 난관에 부딪힙니다. 한편으론 지금껏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 없는 젠더의 문제에 대해 고민하면서 다른 한편으론 미쓰키를 찾아 살인 미스터리의 진실을 알아내려는 데쓰로의 행보는 그저 무거울 수밖에 없고, 그 무게감은 고스란히 독자에게 전달됩니다.

 

당사자만의 내밀한 고민이자 같은 성향의 사람들끼리만 비밀리에 공유돼온 젠더의 문제가 스토커 살해사건이라는 돌발변수 때문에 만천하에 공개될 위기에 처하고, 거기에 휘말린 여러 인물들이 숱한 고민과 갈등, 위기와 충돌을 겪는 이야기가 700여 페이지라는 방대한 분량에 실려 있습니다. 미스터리 자체도 매력적이지만 아무래도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는 건 역시 젠더의 문제입니다. 꼼꼼하고 방대한 자료조사의 흔적이 역력한 가운데 몸과 마음의 정체성이 달라 삶 자체가 지옥이나 다름없는 사람들의 사연이 사실적이면서도 절실하게 그려져서 읽는 내내 안타까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마음이 남자인 미쓰키가 호르몬주사를 맞고 성대에 상처를 내면서까지 몸을 바꿔보려 몸부림치는 모습도, 대학시절 미쓰키와 성관계를 가진 적 있는 데쓰로가 착잡한 마음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모습도, 미쓰키가 남자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주변 인물들의 분투도 모두 100% 공감할 수밖에 없는 장면들이었습니다.

 

세상이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성정체성 문제를 겪는 미쓰키를 비롯한 여러 형태의 성소수자들은 여전히 따갑거나 호기심 어린 시선을 피하지 못합니다. 음지에서 같은 취향의 사람들과만 어울리거나 미쓰키의 동료들처럼 은밀하고 불법적인, 하지만 그래서 평생 두려움을 감당해야 할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언젠가 미쓰키가 당당하게 자신의 삶을 누릴 날이 올지 모르겠지만, 그러기 위해선 젠더의 문제가 좀더 자주, 폭넓게 논의돼야 할 것입니다. ‘외사랑은 한 편의 소설에 불과하지만 그런 논의의 장 가운데 하나가 되기에 충분한 텍스트입니다. 좀더 많은 독자들이 이 작품을 읽고 젠더에 관해 고민할 수 있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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