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형의 것들 이판사판
고이케 마리코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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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치고 싶어지는 공포가 아니라 그 자리에 못 박힌 듯한...

무섭지만 시선이 빨려 버리는 듯한 그런 공포”(p226)

 

무섭지만 따스한 한편으로 그리움을 불러일으킨다.” (문예평론가 이케가미 후유키)

 

2017년 출간된 고이케 마리코의 괴담-서늘한 기척은 제목에 걸맞게 수록작 모두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사람들이 등장하는 기이한 이야기들이지만, 이상하게도 그들이 풍기는 분위기나 남겨 놓은 자취들은 대부분 온기가 도는 것들입니다. 그런 탓에, 좀 이상한 조어지만, 개인적으로는 따뜻한 호러라고 명명하고 싶은 작품입니다.

5년 만에 다시 만난 고이케 마리코의 괴담집 이형의 것들역시 전작과 비슷한 궤적을 그리고 있는데, 굳이 따지자면 수록된 여섯 작품 중 세 편은 고이케 마리코 특유의 따뜻한 호러이고, 나머지 세 편은 정통에 가까운 호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망자가 품은 어찌할 수 없는 미련과 안쓰러운 집착을 그린 숲속의 집’, 세상에 존재할 리 없는 이세계(異世界)를 경험한 한 여자의 이야기를 다룬 히카게 치과 의원’, 노년에 이른 여자가 이 세상의 존재가 아닌 것과 이웃하고 지냈던 반세기 전의 시절을 회상하는 붉은 창등 세 편은 한 문예평론가의 표현대로 무섭지만 따스한 한편으로 그리움을 불러일으키는작품들입니다.

반면 질투와 원망이 가득 찬 귀신 얼굴을 본 딴 가면을 쓴 여자와 마주한 뒤 과거의 기억들을 떠올리는 한 남자의 이야기인 얼굴’, 남편이 죽은 뒤 집안에 나타나기 시작한 이국의 유령 때문에 전율하는 한 여자의 사연을 다룬 조피의 장갑’, 메이지시대부터 온천여관 지하동굴에서 목격된 두 유령 이야기를 그린 산장기담등은 사념 혹은 원념에 바탕을 둔 정통 호러에 가까운 작품들입니다.

 

주제나 소재 자체가 따뜻한 호러를 드러내기도 하지만, 고이케 마리코만의 개성이 더욱 강하게 드러나는 대목은 달고 찬 민트 같은 냄새가 가득한 겨울 숲”, “(거무스름한 우윳빛 같은) 음울한 안개”, “잘 익은 토마토의 과즙 같은 저녁놀등 오감을 자극하는 풍성한 감각적 묘사들입니다. 분명 이 세상의 존재가 아닌 것들을 다루는 괴담집임에도 불구하고 고이케 마리코가 풀어놓은 아름답다고 할 수밖에 없는 시적 혹은 미적 표현들에 빠져들다 보면 정작 무서움보다는 안쓰러움이나 애틋함이 더 강하게 느껴지는데, 그 덕분에 단순히 기괴한 분위기를 강조하는데 역점을 둔 일반 괴담집과는 전혀 다른 결의 서사를 맛볼 수 있게 됩니다.

 

다만 진짜 무서운 괴담을 기대한 독자에겐 다소 심심하게 읽힐 수 있다는 점 역시 사실입니다. 그런 취향의 독자라면 미쓰다 신조나 스티븐 킹을 택해야 하겠지만, 가끔은 고이케 마리코의 특별한 괴담을 간식처럼 맛보는 것도 아주 괜찮은 선택이라는 생각입니다. 무서움보다는 애틋함이, 소름보다는 온기로 채워진 괴담에 흥미를 가진 독자라면 고이케 마리코의 괴담집을 꼭 찾아 읽어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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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 사냥 나비사냥 1
박영광 지음 / 매드픽션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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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납치사건을 맡은 형사 하태석은 유력한 용의자를 특정하고 살인혐의로 체포하지만 아무런 물증도 없고 사체도 찾지 못한 상태에서 과잉 수사라는 비난만 받은 끝에 고향인 전남 영광경찰서로 좌천됩니다. 여동생 미숙과 친구 근식 외에 아무도 반겨주지 않는 상황에서 하태석은 영광경찰서 동료와 선후배들에게도 요주의 혹은 비아냥의 대상이 되고 맙니다. 강력팀이긴 해도 단순 업무에 발목이 잡혀있던 하태석은 미심쩍은 실종사건과 교통사고를 들여다보던 중 그만의 특유의 을 발동시킵니다. 납치에 이은 연쇄살인이 분명하다고 판단한 그는 수상한 탑차 운전자를 체포하지만 이번에도 운은 그의 편이 아닙니다. 서울에서 벌인 치명적인 실수와 똑같은 상황이 벌어지고 하태석은 직감만 믿는 어리석은 폭주형사로 낙인찍히고 맙니다.

 

2013나비사냥이 출간됐을 무렵 현직 형사가 쓴 범죄소설이란 카피 때문에 흥미를 가졌지만 구토를 유발하는 잔혹함이 전부라는 몇몇 독자의 서평을 읽곤 관심목록에서 제외시켰던 게 사실입니다. 그래선지 4년 후인 2017년 후속작 시그니처가 나왔을 때도 제대로 알아보지 않았는데, 2022년 들어 세 번째 작품인 소녀가 사라지던 밤까지 출간되고 여기저기서 호평을 발견한 덕분에 더는 이 시리즈를 외면하기 어렵게 됐습니다.

 

90년대 지존파 사건은 할리우드 영화에서나 볼 법한 끔찍한 연쇄살인마를 대한민국 한복판에서 목격하게 만든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나비사냥에 등장하는 연쇄살인마는 바로 그 지존파를 차용하여 만든 캐릭터로 납치, 고문, 폭행, 살해를 태연히 자행합니다. 출판사 소개글을 인용하면 범인은 불우한 유년시절을 보내고 사회의 냉대와 무시로 인해 세상에 대한 복수심에 불타는”, 그리고 멍청한 신을 대신해 배부른 돼지들을 모조리 살해하려는 야망을 가진 사이코패스입니다. 외진 곳에 살인과 고문을 위한 아지트를 마련하고, 특별한 기준도 없이 닥치는 대로 피해자를 납치하는가 하면, 미래에 저지를 살인을 위한 예행연습으로 피해자들을 잔혹하게 고문하고 살해합니다. 그리고 그 인육을 먹는 엽기적인 행태까지 보입니다.

 

이런 사이코패스를 상대하는 주인공 하태석은 왠지 영화 살인의 추억에 어울릴 것 같은 아날로그 스타일의 형사입니다. 사소한 단서에서 출발하여 추리를 통해 범인을 특정하긴 하지만 결국 그가 가장 의지하는 것은 직감 또는 이기 때문입니다. 확실한 물증도, 피해자의 사체도 없는 상태에서 그는 자신이 찍은 범인을 오로지 강압적인 방법으로 다룰 뿐입니다. 외모 역시 조폭인지 형사인지 구분할 수 없는데다 한번 꽂힌 사건에는 물불도, 낮밤도 가리지 않고 전력을 다 하는 그는 과학수사가 발전한 21세기와는 굉장히 거리가 멀어 보이는 인물입니다.

 

서장이며 과장이며 처음 보는 선후배들은 말할 것도 없고, 과거 파트너였지만 지금은 팀장이 돼있는 인물조차 자신을 꺼리는 상황에서 하태석은 또다시 물증도, 사체도 없는 사건을 연쇄납치살인이 확실하다고 여기며 단독수사를 감행합니다. 경찰 내부에서 갖은 방법으로 압박을 가해오지만 여동생마저 실종되자 하태석은 눈이 뒤집힌 채 폭주하기 시작하고, 끝내 도저히 인간이라 부를 수 없는 희대의 사이코패스와 마주하게 됩니다.

 

잔혹한 묘사가 거북한 독자라면 아마 범인의 첫 시퀀스를 절반도 채 마무리하지 못할 것입니다. “구토를 유발하는 잔혹함이 전부라는 서평이 아주 틀린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도 한국형 형사 캐릭터인 하태석의 매력과 범죄스릴러로서의 이 작품의 미덕까지 부정한 건 좀 지나쳤다는 생각입니다. 수많은 영화를 통해 익숙해지긴 했지만 현직 형사가 묘사한 한국 경찰의 현실과 민낯도 생생했고, 긴장감 가득한 추격전과 액션 장면도 기대 이상이었다는 생각입니다. 물론 직감과 에 의지한 아날로그 방식의 수사라든가 경찰 내에서 왕따를 당하는 하태석의 처지에 대한 묘사가 다소 지루하고 느슨했던 점은 아쉬웠지만, 후속작을 꼭 읽어봐야겠다는 기대감을 자아낸 걸 보면 충분히 상쇄하고도 남을 아쉬움으로 보입니다. 모르긴 해도 조만간 후속작인 시그니처가 제 장바구니에 담기게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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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인의 목격자
E. V. 애덤슨 지음, 신혜연 옮김 / 하빌리스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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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삶을 노골적으로 공개한 칼럼으로 인기와 비난을 동시에 얻으며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아온 저널리스트 젠 헌터는 그동안 감춰왔던 치명적인 비밀 하나 때문에 하루아침에 해고 통보를 받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한낮의 유명 관광지에서 벌어진 끔찍한 살인-자살사건의 목격자가 되고 맙니다. 여자친구를 살해한 남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장면을 눈앞에서 지켜봐야 했던 젠은 큰 충격을 받습니다. 대학시절부터 절친인 벡스는 오래 전부터 불안정한 심리상태를 보여온 젠이 걱정되지만, 오히려 젠은 직접 목격한 사건을 기사로 쓸 계획을 세웁니다. 누군가 사건의 진범이 따로 있음을 암시하는 트위터 메시지를 보내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날 이후로 젠은 트위터를 통한 협박에도 불구하고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기 위해 분투합니다.

 

훤한 대낮에, 그것도 자신을 포함하여 다섯 명이 코앞에서 목격한 살인-자살사건에 진범이 따로 있다는 설정은 무척 흥미롭습니다. 물론 이 설정은 젠에게 날아온 트위터 메시지에 의해 제기된 것일 뿐 초반부터 확정된 상황은 아닙니다. 40대 초반인 젠이 젊은 시절부터 심리적인 불안정을 겪어왔다는 점에 착안한 독자라면 누군가의 악의적인 장난에 휘말린 젠이 지독한 심리 호러 서스펜스 서사를 이끌어갈 가능성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고, 이 설정이 사실이라고 믿는 독자라면 누군가 두 연인을 조종하여 끔찍한 살인-자살극을 유도했을 가능성에 주목할 것입니다. 중반부까지 두 가지 가능성을 모두 열어놓고 독자를 혼란스럽게 만들던 작가는 이내 범인의 정체를 공개하곤 손에 땀을 쥐게 만드는 스릴러로 방향을 확실히 잡습니다.

 

저널리스트라기보다는 자신의 삶을 과장되게 까발린 칼럼으로 인기를 얻은 젠은 과잉공유욕구, 공황장애, 심리적 의존증을 겪는 유약한 인물입니다. 대학시절 만난 절친 벡스 덕분에 가까스로 안정된 삶을 유지해왔지만 얼마 전 연인인 로렌스와 끔찍한 방식으로 헤어진데다 해고통보에 이어 살인사건까지 목격하면서 심리적으로 완전히 붕괴 일보직전에 이릅니다. 그런 그녀가 진범이 따로 있다는 익명의 트위터 메시지를 받은 뒤 사건의 진상을 기사화함으로써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제대로 된 저널리스트로 거듭나겠다고 다짐하는 건 무척이나 역설적인 일입니다. 문제는 조사를 시작하자마자 익명의 트위터를 통해 연이어 날아드는 스토킹에 가까운 협박장들입니다. 협박장을 보낸 익명의 존재가 실은 살인-자살극의 범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도달한 젠은 벡스의 도움으로 유력한 용의자의 행적을 뒤쫓기 시작하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젠의 마음속엔 진실 찾기를 넘어선 욕구가 자리 잡습니다. 그건 바로 복수심입니다.

 

이 작품엔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는 다양한 종류의 폭력이 등장합니다. 데이트 폭력, 가스라이팅, 스토킹, 가정폭력, 시기와 질투를 넘어선 집착, 그리고 죄의식 없는 살인이 그것입니다. 대부분의 폭력은 상대를 지배하고 통제하려는 욕구에서 출발하며, 그 욕구가 자기 뜻대로 이뤄지지 않을 경우 물리적 수단을 이용한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젠과 그녀의 절친인 벡스는 물론 살인-자살사건의 목격자들 대부분 이런 식의 폭력으로 인한 크고 작은 트라우마를 지니고 있는데, 그 때문에 젠은 조사를 거듭할수록 다분히 감정적이고 불안정한 태도를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살인을 목격한 뒤 협박을 받아가며 진상을 밝히려는 처지에서 스스로 극단적인 폭력을 저지르겠다고 마음먹게 되는 젠의 일거수일투족은 말하자면 폭력에 관한 심리 스릴러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수의 목격자가 있는 사건이지만 실은 진범이 따로 있다.”는 설정 자체는 독특하고 매력적이며, 심리 스릴러의 미덕도 함께 녹아있어서 500여 페이지의 분량을 금세 완주할 수 있었지만 크게 보면 두 가지 아쉬움이 남았는데, 하나는 사건의 성격이나 규모에 비해 과도한 분량입니다. 사건 자체보다 더 큰 비중을 차지하는 여러 인물의 심리를 강조하기 위해 이야기가 여러 번 반복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적어도 100페이지 정도는 사족이었다는 생각입니다. 또 하나는 막판 반전을 위해 동원된 개연성 부족한 우연입니다. 차라리 상투적인 엔딩이었다면 이해됐겠지만 희박한 우연에 기댄 반전을 위한 반전은 앞서 읽은 이야기들을 다소 허망하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이 두 가지 아쉬움만 없었더라면 적어도 4.5~5점을 줄 수 있는 작품이니 설정에 흥미를 느낀 독자라면 한번쯤 읽어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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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망탑의 라푼젤
우사미 마코토 지음, 이연승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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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전 후 공업과 유흥의 도시로 성장했지만 빈곤과 폭력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위험하고 더러운 곳이라는 이미지가 고착된 다마가와남부. 아동상담소의 마쓰모토 유이치는 아동가정 지원센터의 마에조노 시호와 함께 문제 있는 가정들을 방문해 필요한 조치를 취하는 성실한 공무원입니다. 유이치와 시호가 특히 주목한 건 6살 아들 소타를 학대하고 방치하는 것으로 보이는 이시이 집안. 한편 화려한 전망탑 아래 폐창고가 늘어선 부둣가의 빈촌에는 언젠가 이곳을 떠날 결심을 한 필리피노카이, 정체성 때문에 혼란을 겪는 재일한국인야스나리, 그리고 어려서부터 성적 학대를 당해온 나기사 등 18살 청춘들이 막장 같은 오늘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느 날 그들 앞에 말문을 닫아버린 어린 소년 하레가 나타납니다.

 

호러, 판타지, 미스터리 등 다양한 장르가 포진된 단편집 소녀들은 밤을 걷는다와 개인적으로 ‘2020년 미스터리&스릴러 베스트 11’으로 꼽은 어리석은 자의 독등 앞서 만난 우사미 마코토의 작품들은 모두 깊은 인상과 여운을 남겨줬습니다. 덕분에 그녀의 신작 소식이 너무나 반가웠는데, 독특하고 깊이 있는 미스터리를 기대했던 탓인지 신작의 제목과 표지를 보곤 살짝 의아한 생각이 들었던 게 사실입니다. 다만 아이들은 죽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라는 홍보카피 때문에 피해자가 어린이인 음울한 미스터리가 아닐까 예상했는데, 결과부터 말하면 그 예상은 절반쯤만 들어맞았습니다.

 

이야기는 크게 세 가지 축으로 전개됩니다. 우선, 학대받는 아이들의 문제는 결국 가정 내에서 해결되는 게 바람직하다는 생각을 가진 아동상담소 공무원 유이치와 사회가 좀더 적극적인 태도로 문제가정에 개입해야 되며 필요하다면 아이와 부모를 분리하는 게 최선책이라 믿는 시호가 서로의 생각 차이 때문에 크고 작은 갈등을 겪으며 여러 케이스의 아동학대사건을 다룹니다. 학대, 방치, 성폭력 등 다양한 케이스가 등장하지만 그중에서도 6살 소년 이시이 소타의 학대와 방치가 유이치와 시호의 주된 관심사입니다.

도시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 전망탑 인근에 사는 18살 청춘들의 이야기는 더욱 암울합니다. 빈곤과 폭력에 시달리며 유년기를 보낸 다마가와시의 10대들에게 밝고 희망찬 미래 따윈 존재하지 않습니다. 부모들은 여전히 개망나니 같고, 또래들은 일찌감치 잔인한 먹이사슬 구조에 편입될 수밖에 없으며, 다마가와시를 떠나지 않는 한 내일은 오늘과 조금도 다를 것 없는 암담함 그 자체입니다. 초등학생 때부터 성노예로 살아온 나기사가 전망탑을 바라보며 동화 속 라푼젤의 구원만을 고대하는 모습은 그저 안타깝고 서글플 따름입니다.

마지막으로 불임 때문에 고통스러운 날들을 보내는 30대 부부 이쿠미와 게이고의 삶이 그려지는데, 특히 어떻게든 아이를 낳고 싶어 온갖 방법을 시도하는 이쿠미가 자신의 아이를 학대하는 이웃의 부모를 지켜보며 복잡한 감정에 휩싸이는 이야기가 눈길을 끕니다.

 

인터넷서점에서 추리/미스터리 소설로 분류되긴 했지만 전망탑의 라푼젤은 참혹한 현실을 고발하는 르포 혹은 그 와중에도 사소한 관심에서 구원이 탄생할 수 있다. 좌절과 절망뿐인 현실에서 누군가에게 먼저 손을 내밀 수 있는 용기야말로 인간의 삶을 기적으로 이끄는 첫걸음이다.”라는 주제를 앞세운 휴먼 드라마에 더 가깝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세 이야기가 한줄기로 엮이는 대목은 미스터리 못잖은 반전과 트릭을 선보이긴 하지만 역시 가슴을 뭉클하게 만드는 희망 가득한 메시지로 읽힙니다. 끝이 보이지 않을 것 같은, 전망탑의 라푼젤 따윈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암담한 현실 속에서도 구원과 희망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건 누구나 쉽게 써내려갈 수 있겠지만, 우사미 마코토는 서로 다른 결의 세 개의 이야기와 절묘한 트릭과 막판 반전을 통해 그저 막연하고 현실감 없는 희망 판타지가 아니라 더욱 더 설득력 있고 공감 가능한 이야기를 자아냈습니다.

 

출판사 소개글에 따르면 앞으로도 우사미 마코토의 작품들을 계속 출간할 예정이라는데, 독특한 서사와 깊이 있는 이야기에 빠진 저로서는 그녀의 신작 소식을 늘 기다리게 될 것 같습니다. 물론 어리석은 자의 독과 같은 특별한 미스터리라면 더 바랄 나위가 없겠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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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한 라트비아인 매그레 시리즈 1
조르주 심농 지음, 성귀수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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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경찰청 기동수사대 반장 매그레는 국제적 사기범인 일명 라트비아피에트르가 파리로 온다는 전보를 받곤 기차역으로 출동합니다. 한 남자가 기차 화장실에서 사체로 발견돼 소동이 일어난 가운데 매그레는 피에트르로 추정되는 인물을 뒤쫓습니다. 고급호텔에 투숙한 피에트르가 미국인 거물 부부와 어울리는 걸 목격한 매그레는 하나둘씩 단서를 모아 피에트르의 정체를 밝혀내는데 골몰합니다. 국제적 사기범인 건 분명하지만 아무런 증거도 없어서 그를 체포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피에트르의 행적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매그레는 그가 도저히 한 인물이라고 볼 수 없는 극과 극의 모습을 지니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런 와중에 동료형사가 피살되는 사건이 벌어지고 매그레 본인도 부상을 입는 사태가 벌어집니다.

 

수상한 라트비아인1931년에 출간된 작품으로 매그레 시리즈의 첫 편이기도 합니다. 동시대의 유명한 캐릭터인 엘러리 퀸이나 에르퀼 푸아로에 비해 한국 독자들에겐 덜 알려졌지만 세계적인 판매부수나 영화로 만들어진 이력을 보면 매그레의 명성은 퀸과 푸아로에 조금도 뒤지지 않아 보입니다.

사실 수상한 라트비아인을 읽게 된 계기는 현대와 고전을 막론하고 유수의 시리즈들 가운데 전혀 접해보지 못한 작품을 첫 편만이라도 읽어보자는 욕심에서 비롯됐습니다. 결과적으론 제 취향과는 잘 안 맞는 걸 깨닫긴 했지만 고전의 풍미만큼은 충분히 맛볼 수 있는 특별한 기회가 돼줬습니다.

 

국제적 사기범을 추적하는 꽤 큼직한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이야기는 매그레 원 맨 쇼에 가깝습니다. 물론 파트너도 등장하고 후배형사도 등장하지만 매그레는 45세의 나이에 반장이라는 직책에도 불구하고 마치 전성기를 구가하는 젊은 형사처럼 홀로 현장을 누빕니다. 탐문과 단서 확보는 물론 잠복까지 마다하지 않은 그의 정열은 대단하지만 역설적으로 국제적 사기범을 쫓는다면서 다른 형사들은 다들 뭘 하고 있나?”라는 의문을 자아내기도 합니다. 물론 용의자가 눈앞에서 아른거려도 증거가 없어 체포할 수 없다 보니 이런저런 탐문과 조사가 필요한 건 맞지만 아무래도 사건의 규모에 비하면 매그레 원 맨 쇼는 오히려 현실감을 떨어뜨리는 요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막판에 매그레가 밝혀낸 수상한 라트비아인 피에트르의 정체는 무척 고전적인 트릭의 결과라서 요즘의 독자들에겐 먹히기 어렵지만, 앞서 전개된 이야기들 덕분에 나름 무게감을 발휘하는 것 역시 사실입니다. 또 집요할 정도로 이어지는 탐문 위주의 서사라 그리 길지 않은 분량에도 다소 지루하게 읽혔지만 매그레 반장의 매력적인 캐릭터 덕분에 끝까지 버틸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전체적으론 고전임을 감안하더라도 속도감이나 정교함 면에서 만족하기 어려워 높은 평점을 줄 수는 없었습니다. ‘수상한 라트비아인이 제대로 발동을 걸어줬더라면 후속작까지 달릴 수 있었을 텐데 아무래도 매그레 시리즈를 계속 읽게 될 것 같진 않습니다. 다만 다른 독자들의 서평을 통해 흥미를 유발하는 작품을 발견한다면 거구에 어울리지 않는 집요함과 소탈함을 지닌 매그레 반장의 대활약을 다시 만나 볼 생각이 100% 있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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