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러티
콜린 후버 지음, 민지현 옮김 / 미래지향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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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고에 직면한 무명작가 로웬 애슐레이는 어느 날 거짓말 같은 제안을 받습니다. 교통사고를 당한 베스트셀러 작가 베러티 크로퍼드 대신 그녀의 유명 시리즈 마지막 세 편을 집필해달라는 것입니다. 베러티의 명성에 부담을 느낀 로웬은 처음엔 제안을 거절하지만 베러티의 남편 제러미가 엄청난 고료를 제시하자 자기도 모르게 수락하고 맙니다. 베러티가 남겨놓은 메모와 원고 등 필요한 자료를 구하기 위해 베러티 부부가 사는 대저택에 도착한 로웬. 하지만 그녀는 베러티의 서재에서 미발표 자서전 원고를 발견하곤 큰 충격에 빠집니다. 거기엔 베러티 본인 외엔 아무도 모르는 베러티 가족의 끔찍한 비극의 진실이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굳이 장르를 따지자면 베러티는 한 가족에게 연이어 들이닥친 비극과 그 진실을 다룬 심리 스릴러이자 집착과 광기에 가까운 사랑을 그린 노골적인 성애 로맨스이기도 합니다. 로웬이 발견한 베러티의 미발표 자서전 원고는 그녀가 어떻게 제러미를 만나 사랑에 빠졌고, 어떻게 3남매를 둔 가족을 일궜으며, 연이은 사건과 사고가 어떻게 가족을 붕괴시켜 지금에 이르게 만들었는지를 상세하게 담고 있는데, 그 자체가 심리 스릴러이자 성애 로맨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또한 안 그래도 몽유병, 광장공포증, 대인기피증 등 심리적으로 불안정한 로웬이 제러미의 대저택에 도착한 이후 겪는 질풍노도와도 같은 감정적 동요와 갈등, 그리고 위태로운 로맨스까지 더해져서 평범한 도메스틱 스릴러와는 사뭇 다른 결의 서사를 선보이고 있습니다.

 

그 누구도 읽을 리 없다는 전제 하에 쓰인 내밀한 자서전에 담긴 베스트셀러 작가 베러티의 충격적인 비밀과 그 가족에게 닥친 연이은 비극의 실체, 그리고 홀로 그 모든 것들을 알게 된 로웬이 베러티의 남편 제러미에게 품게 되는 복잡 미묘한 감정들 - 연민과 동정에서 시작된 뒤 자신이 알게 된 비밀을 알려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다가 결국엔 넘어선 안 될 선을 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히고 마는 - 은 그리 길지 않은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페이지까지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하게 만드는 가장 큰 힘입니다.

 

마지막에 몰아치는 파국과 에필로그의 반전은 그 자체로는 큰 힘을 지니고 있진 않지만, 독자에게 당신이 목격한 진실들가운데 어떤 게 참이고 어떤 게 거짓일까?”라는 정답 없는 질문을 던짐으로써 불편하면서도 묵직한 여운을 남깁니다. 독자 입장에선 로웬과 베러티를 통해 목격한 진실들가운데 어느 쪽이 참이라고 해도 조금도 마음이 편해지지 않습니다. 각각의 진실은 어느 쪽이 더 비참하다고 판결하기 어려울 정도로 막상막하의 비극으로 마무리되기 때문입니다. “끝났지만 끝나지 않는 논쟁적 소설이라는 평가는 이런 이유 때문에 나온 것으로 보입니다.

 

콜린 후버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어서 베러티가 한국에 소개된 첫 작품인 줄 알았는데, 검색해보니 무려 다섯 편의 작품이 출간돼있었습니다. 다만 다섯 편 모두 그녀의 전공인 로맨스 작품이라 장르물로서는 베러티가 처음인 셈인데, 스릴러와 로맨스를 절묘하게 결합한 필력을 감안하면 언젠가 베러티를 능가하는 작품이 나올 수도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5개를 주진 못했지만 무척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이니 치명적인 로맨스와 심리 스릴러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한번쯤 만나볼 것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사족으로 딱 한 가지만 흠을 잡자면, 남자 주인공인 제러미는 대략 30대 후반인데 그의 대사는 모두 하오~ ’, 그러니까 밥 먹었소?”, “편하게 생각해주시오.”, “금방 가져오겠소.” 식의 사극 톤으로 번역된 점입니다. 그가 딱히 고전적인 캐릭터도 아닌 상황에서 독자로 하여금 남자 주인공을 10~20년이나 늙게 느끼게끔 만든 이유를 정말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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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의 섬 아르테 미스터리 8
사와무라 이치 지음, 이선희 옮김 / arte(아르테)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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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년 전, 유명한 영능력자 우쓰기 유코가 TV프로그램 촬영 차 방문했던 세토 내해의 작은 섬 무쿠이섬에서 원령의 저주를 받고 쓰러졌습니다. 2년 동안 시름시름 앓던 그녀는 숨지기 직전 최후의 예언을 남겼는데, 20년 후 무쿠이섬에서 여섯 명이 원령의 저주로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현재. 30대 중반의 죽마고우 준, 하루오, 소사쿠는 어린 시절 우쓰기 유코에게 열광했던 기억을 갖고 있습니다. 하루오는 우쓰기 유코의 예언도 확인할 겸 직장 내 갑질로 상처를 받은 소사쿠도 위로할 겸 무쿠이섬으로의 여행을 제안합니다. 하지만 섬에 도착하자마자 우여곡절과 함께 이상한사람들을 만난 준 일행은 불길함 예감을 품게 됩니다. 그리고 이튿날 새벽, 첫 시체가 발견되면서 만 하루에 걸친 끔찍한 비극이 시작됩니다.

 

보기왕이 온다’, ‘즈우노메 인형히가 자매 시리즈를 통해 호러 작가로 잘 알려진 사와무라 이치의 호러 미스터리입니다. 몇몇 등장인물의 입을 통해 여러 번 언급되기도 하지만 읽는 내내 요코미조 세이시의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 미쓰다 신조의 도조겐야 시리즈가 연상됩니다. 외지고 폐쇄적인 공간에서 주술과 미신 혹은 인습과 전설이 개입된 으스스한 사건들이 발생하고 외지인과 현지인 모두 공포에 사로잡힌 가운데 주인공이 사건의 미스터리를 풀어낸 뒤 지극히 현실적인 결론을 내놓는 이야기들입니다. ‘예언의 섬은 탐정역할을 맡은 주인공이 등장하진 않지만 앞서 언급한 두 시리즈처럼 호러와 미스터리를 작가 특유의 스타일로 배합해놓은 작품입니다.

 

기괴한 죽음들이 우쓰기 유코의 예언대로 벌어집니다. 폭우와 태풍으로 고립된 섬을 가리키는 듯한 구원은 눈물의 비에 가로막히리라.”는 첫 구절을 시작으로, “바다의 밑바닥에서 뻗어 나오는 손.”, “살아 있는 피를 마시는 길고 새카만 벌레.”, “그림자가 있는 피에 물든 칼날.” 등 현장을 직접 목격한 듯한 예언이 그대로 현실이 됩니다. 무엇보다 모두를 겁에 질리게 한 건 예언의 마지막 구절인 여섯 영혼이 명부로 떨어지로라.”입니다. 다섯 구의 시체가 나온 뒤 사람들은 누가 어떻게 마지막 희생자가 될 것인지 몰라 두려움에 휩싸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섬을 찾은 외지인 가운데 우쓰기 유코의 예언을 가장 강력하게 부정하는 것은 그녀의 손녀인 사치카입니다. 어릴 때부터 우쓰기의 손에 키워진 그녀는 할머니의 영능력이 거짓임을 알아봤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부정하지도 못했습니다. 이른바 지속적인 가스라이팅을 당한 탓에 무의식속 어딘가에는 할머니의 영능력이 진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자리 잡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녀가 섬을 찾은 건 할머니의 예언이 틀렸음을 직접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죽마고우 세 명 중 화자 역할을 맡은 건 아마미야 준입니다. 그의 시선을 통해 원령의 저주를 두려워하면서도 외지인들에게 뭔가를 감추는 섬사람들의 수상한 태도가 묘사되고, 동시에 원령을 확신하거나 부정하는 민박집 외지인들의 갈등이 그려집니다. 누군가는 우쓰기 유코의 예언을 신봉하며 연이은 참극을 당연한 일로 여기지만, 누군가는 모든 것이 미신이며 예언 같은 건 애초 결과론적으로 조작된 것이라고 반박하기도 합니다. 이에 대한 논쟁이 꽤 여러 번 등장하는데 호러 독자에겐 꽤 흥미롭게 읽힐 만한 대목입니다.

 

옮긴이의 말에 따르면 이 작품은 요코미조 세이시의 옥문도에 대한 오마주라고 합니다. 실제로 공간이나 이야기 전개에서 유사점이 굉장히 많습니다. 호러의 분위기는 미쓰다 신조의 도조겐야 시리즈와 닮았고, 밀실이나 다름없는 섬에서 연이어 죽음이 벌어진다는 점에서 (출판사 소개글이나 추천사를 인용하면) ‘본격 미스터리의 향기를 품고 있기도 합니다. 또 중후반쯤부터는 호러 미스터리에 더해 사회파의 미덕까지 만끽할 수 있으니, 일본 미스터리 팬이라면 귀가 솔깃할 만한 작품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러 가지 매력을 골고루 갖춘 작품이긴 하지만 개인적으론 몇몇 대목에서 아쉬움이 느껴지기도 했는데, 크게 보면 하나는 기대했던 것보다 긴장과 공포의 체감지수가 높지 않았다는 점, 또 하나는 조연들 다수가 사건보다는 속박, 가스라이팅, 저주에 관한 논쟁을 위해 설정돼서 존재감이 약했다는 점, 마지막으로 살짝 뜬금없거나 사족처럼 느껴진 막판 트릭입니다. 세 가지 모두 스포일러 없이는 설명하기 어려워서 더 언급할 수는 없지만 총평하자면 호러와 미스터리 양쪽 모두 사와무라 이치의 명성에는 조금씩 못 미쳤다는 게 저의 결론입니다. 다만 히가 자매 시리즈를 재미있게 읽은 독자라면 사와무라 이치만의 특별한 호러코드를 맛볼 수 있는 작품이니 기회가 된다면 찾아 읽어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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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문 Medusa Collection 1
토머스 H. 쿡 지음, 김시현 옮김 / 시작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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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952년 가을, 뉴욕. 공원 연못가에서 8살 소녀 캐시 레이크의 사체가 발견되고, 인근 굴다리 아래 살던 노숙자 앨버트 스몰스가 유력한 용의자로 체포됩니다. 하지만 심증만 가득할 뿐 물증도 목격자도 없고 자백도 얻지 못한 상태에서 더는 스몰스를 붙잡아둘 수 없게 됐고, 경찰은 그를 풀어줘야 하는 다음날 오전 6시까지 12시간 동안 최종 심문을 가하기로 합니다. 담당형사인 코언과 피어스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스몰스를 심문하지만 좀처럼 자백을 이끌어내지 못합니다. 그러던 중 스몰스의 과거를 파헤치기로 한 코언은 피어스를 그의 고향으로 추정되는 곳으로 보내고 홀로 심문을 이어갑니다. 잔혹한 연쇄 아동살해범이 분명해 보이지만 심문이 진행될수록 코언은 스몰스에게서 이루 말할 수 없는 위화감만 느낄 뿐입니다.

 

토머스 H. 쿡은 해외에서의 명성에 비해 한국에서는 그리 환영받지 못한 작가입니다. 영문판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앤솔로지를 제외하고 그가 펴낸 작품이 2018년까지 모두 33편인데, 한국에는 6편만 소개된 상태이고, 그나마도 2017년에 출간된 브레이크하트 힐’(Breakheart Hill, 1995)을 끝으로 5년 동안 아무 소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한국에 소개된 6편 중 줄리언 웰즈의 죄를 제외하고 모두 읽었으니 쿡의 성향을 어느 정도는 파악했다고 할 수 있는데, 개인적으로 쿡이 한국에서 환영받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해외에서 그의 강점이자 미덕으로 꼽는 이유, 아름다우면서 고통스러운 이야기때문으로 보입니다. 깔끔한 미스터리도, 화려하거나 인상적인 스릴러도 아닌 그의 작품들은 매번 비슷한 인상과 여운을 남기곤 했는데, 읽는 내내 마음 한쪽에 무거운 돌이 얹힌 듯한 불편함과 묵직함을 감수해야 했고, 마지막 장을 덮을 무렵엔 한없는 안타까움 혹은 비정함이 전신을 뒤덮는 경험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상처 입은 천사처럼 글을 쓰는 작가’, ‘어두운 렌즈를 통해 밤을 그려내 영혼을 사로잡는 작가’, ‘음울한 아름다움과 철학적 고민을 담은 스릴러등이 쿡에게 바쳐진 헌사들인데, 바로 이런 매력들이 한국에선 좀처럼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심문은 개인적으론 붉은 낙엽다음으로 깊은 인상을 받았는데, 역시나 쿡의 환영받지 못한 재능이 강렬하게 배어있는 작품이라 소수의 팬들 외엔 쉽게 소구하기 어려웠을 거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증이나 단서 외에 범행을 입증할 수 있는 방법은 용의자의 자백밖에 없습니다. 심문은 용의자가 뛰어난 연기력을 지녔거나 애초 무죄라면 그저 강압적이되 아무 것도 얻어낼 수 없는 무력한 수단입니다. 8살 소녀를 상대로 악랄한 범죄를 저지른 것이 분명한 노숙자 스몰스가 범행을 부인하는 것은 물론 과거의 행적에 대해서도 입을 꼭 다문 탓에 담당형사인 코언과 피어스는 12시간이라는 시간제한까지 걸린 이 최종 심문이 더더욱 무력하게만 느껴집니다. ‘착한 경찰-나쁜 경찰’, ‘어르고 달래다가 느닷없이 윽박지르기’, ‘감정에 호소하기등 폭력 외에 가동할 수 있는 모든 전략을 구사하지만 스몰스의 태도는 체포됐을 당시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습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가고 어쩌면 잔혹한 연쇄 아동살해범일지도 모르는 스몰스가 자유의 몸이 될 오전 6시는 속절없이 다가옵니다.

 

심문정의롭고 선한 경찰이 심문과 단서 추적을 병행하며 악당을 응징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어딘가 다른 세계에 정신줄을 놓고 온 것 같은 평범한 노숙자 스몰스에게서 소녀 살해범의 기운 같은 건 엿보이지도 않습니다. 담당형사 중 유대인인 코언은 2차 대전 중 목격한 동족의 대량학살의 트라우마에 사로잡혀있고, 피어스는 어린 딸을 무참한 범죄로 잃은데다 그 용의자가 유유히 자유의 몸이 된 악몽을 품고 있는 인물입니다. 그 외에도 마약중독으로 만신창이가 된 아들을 둔 수사반장, 중후한 은발과 관대한 인격을 지닌 듯하지만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비밀을 가진 경찰청장, 무능하기 짝이 없지만 유일한 쓸모 한 가지 때문에 해고를 면한 부패한 경찰 등 소녀 살인사건을 둘러싼 인물 대부분이 악취와 불온함이 잠식한 1950년대 초반 뉴욕의 뒷골목 풍경과 꼭 닮아있어서 단순히 누가 범인인가? 스몰스는 정말 무고한가?”라는 미스터리 자체보다 더 눈길을 끕니다.

 

인물도, 사건도 어디 하나 밝은 구석을 찾을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문아름다우면서 고통스러운 이야기로 읽히는 건 참으로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쿡의 문장은 아름다움도 고통스러움도 강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냉엄한 하드보일드 스타일마냥 건조하고 객관적입니다. 하지만 그 문장들은 페이지와 챕터를 이루면서 쿡에게 바쳐진 헌사들이 그저 사탕발림이나 형식적인 예의에서 나온 것이 아님을 입증합니다. 읽을 때마다 힘들고 불편하면서도 간혹 그의 작품을 읽고 싶다는 욕망이 솟아오르는 것은 아마도 이런 이유 때문인 것 같습니다. 마약 같은 매력이라고나 할까요?

 

심문의 엔딩은 화들짝 놀랄 정도는 아니어도 묵직한 반전을 품고 있습니다. 동시에 소녀 살해사건에 관련된 수많은 사람들, 특히 최종 심문에 관여한 사람들을 이루 말할 수 없는 절망감과 허탈함에 휩싸이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야말로 깊디깊은 심연 같으면서도 아주 미약한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미묘한 엔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한국에 소개된 쿡의 작품 중 유일하게 읽지 않은 건 줄리언 웰즈의 죄밖에 없습니다. 언제 읽을지 기약은 없지만 분명 언젠가 쿡을 읽고 싶다!”는 생각이 불쑥 튀어오를 게 분명합니다. 그리고 (그때까지 더 이상 쿡의 작품이 한국에 소개되지 않는다면) “더는 읽을 게 없구나.”라는 진한 아쉬움을 느낄 것만 같습니다. ‘다시는 읽고 싶지 않지만, 기어이 다시 읽게 되는 작가가 몇 명 있는데 아마도 쿡은 그 목록에선 거의 최상단이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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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도관의 눈
요코야마 히데오 지음, 허하나 옮김 / 폭스코너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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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도관의 눈은 한국출간 기준으로 보면 2020빛의 현관’(일본 2019) 이후 2년 만에 나온 요코야마 히데오의 신작이지만, 제목에서 감지되듯 빛의 현관이 미스터리의 농도가 그다지 짙지 않은 작품인 점을 감안하면 요코야마 히데오 스타일의 미스터리로는 2015그림자밟기’(일본 2003) 이후 무려 7년만의 신작인 셈입니다. 물론 교도관의 눈이 일본에서 2004년에 출간된 작품이니 신작이란 말이 무색하긴 하지만, 이렇게라도 그의 새 작품을 만날 수 있게 돼서 다행이란 생각입니다.

 

모두 여섯 편의 단편이 수록돼있는데, 가장 의외였던 건 형사가 주인공인 작품이 없다는 점입니다. 가장 근접한 경우라고 해봐야 현경의 정기간행물(일종의 사보) 편집을 맡은 경찰 사무원(‘교도관의 눈’), 현경 홈페이지를 관리하는 정보관리과 책임자(‘오전 다섯 시의 침입자’) 정도이고, 그 외에는 프리랜서 구성작가, 이혼 조정위원, 편집부 기자, 현 지사의 비서과장 등 일반인들이 주인공을 맡고 있습니다. 물론 각 수록작마다 살인, 폭력, 구원(舊怨) 등 미스터리 서사가 펼쳐지긴 하지만 아무래도 반전을 거듭하는 경찰 미스터리보다는 긴장감의 깊이와 무게가 조금은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요코야마 히데오의 매력이 가장 진하게 느껴진 건 표제작인 교도관의 눈인데, 평생 형사가 되고 싶었지만 경찰대학 성적 때문에 경력 대부분을 유치장 교도관으로 채운 남자가 퇴직 직전의 장기휴가를 이용하여 1년 전 발생한 미제 실종사건을 추적하는 이야기가 그려집니다. 비록 형사는 되지 못했지만 오랫동안 교도관으로서 범죄자들을 지켜보면서 형사 못잖은 을 가지게 된 그는 누구도 예상 못한 사건의 진상을 알아냅니다. 그리고 이 인물에게서 퇴직 수기를 받아내기 위해 안쓰럽게 분투하는 정기간행물 편집자가 화자이자 주인공으로 이야기를 이끌어갑니다.

한 기업 회장의 자서전을 쓰게 된 프리랜서 구성작가가 인터뷰 도중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되는 자서전과 베테랑 외근기자였지만 현재는 초보 편집기자가 된 주인공이 어처구니없는 오보 사태 속에 살인사건에 휘말리게 되는 조용한 집은 미스터리의 농도는 옅지만 어떤 엔딩이 펼쳐질지 무척 궁금하게 만든 작품들입니다.

그 외에는 사건성이 강하긴 해도 넓은 의미의 일상 미스터리 범주에 드는 작품들인데, 재미있게 읽히긴 해도 역시 요코야마 히데오의 강렬한 서사를 기대한 입장에선 다소 싱겁게 느껴졌습니다.

 

클라이머즈 하이’, ‘64’, ‘사라진 이틀등의 장편은 말할 것도 없고 단편에서도 자신만의 개성 넘치는 미스터리를 선보여온 요코야마 히데오는 저의 최애작가 중 한 명입니다. 하지만 ‘64’(2012) 이후 7년의 슬럼프를 겪고 발표한 작품이 빛의 현관’(2019)이고, 그 뒤로는 신작 소식이 더는 없어 무척 안타까울 뿐입니다. 언제쯤 새 작품을 만날 수 있을지 알 수는 없지만, 개인적인 바람이라면 (장편이라면 더더욱 좋고 단편도 좋으니) 경찰 미스터리의 거장으로서의 그의 진가를 다시 한 번 맛보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마저도 쉽지 않다면 (몇 편 안 남았지만) 아직 한국에 소개되지 않은 일부 작품에 대해 출판사들이 관심을 가져주기를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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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드나잇 선 Oslo 1970 Series 2
요 네스뵈 지음, 노진선 옮김 / 비채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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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러드 온 스노우에 이은 오슬로 1970’s 시리즈두 번째 작품입니다. 주인공은 다르지만 시공간적 배경이 동일하고 조연들(오슬로의 암흑가를 양분하고 있던 보스들)도 같은 인물이라 두 작품은 거의 쌍둥이 급으로 닮은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홍콩 느와르 영화를 연상시키는 비장미와 로맨스의 조합이라든가 킬러지만 킬러로서의 덕목을 상실한 아이러니한 캐릭터라든가 주인공 주변을 위성처럼 떠돌며 그의 트라우마를 보듬어주는 상처투성이 여인이라든가 많은 부분에서 무척 닮아있기 때문입니다. 6년 만에 다시 읽었지만 두 작품 모두 요 네스뵈의 새로운 면모를 만끽할 수 있는 특별한 작품들이었습니다.

 

1970년대 중반, 오슬로의 암흑가는 호프만과 뱃사람이 양분하고 있었습니다. 전작인 블러드 온 스노우의 주인공 올라브는 피도 눈물도 없는 프로페셔널 킬러였지만 아내를 살해하라는 보스 호프만을 배신하고 비극의 길을 걸었던 인물입니다. 반면 미드나잇 선의 주인공 울프는 호프만 사후 오슬로를 장악한 뱃사람을 배신하는 킬러인데, 문제는 그가 사람 하나 제대로 죽이지 못하는 어리숙한 인물이란 점입니다. 애초 킬러의 자질이라곤 조금도 없는 소심남이지만 엉뚱한 오해 때문에 반강제로 등을 떠밀린 끝에 킬러가 됐기 때문입니다.

그런 울프가 딸의 치료비를 위해 암살 대상을 살려 보낸 뒤 돈을 챙깁니다. 하지만 운명은 울프의 편이 아니어서 그는 우여곡절 끝에 황량하고 척박한 노르웨이의 최북단 핀마르크 주의 코순이라는 마을에 몸을 숨기게 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10살 소년 크누트와 그의 어머니 레아를 만납니다. 언제 자신을 찾아올지 모르는 뱃사람의 킬러를 기다리면서 말입니다.

 

블러드 온 스노우의 올라브가 그랬듯 울프 역시 절망적인 캐릭터입니다. 가족으로부터, 사랑으로부터 도망치기 급급했던 고독한 존재였고, 지금도 심연 속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어둠과 추위와 죽음 뿐이라 확신하며 생각하는 사람도, 돌봐줄 사람도, 돌봐야 할 사람도 없는삶을 살아가는 중입니다. 그런 그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해가 지지 않는 백야의 땅으로 도망친 끝에 자신보다 더 불행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여인 레아를 만난 일은 새로운 비극의 시작일 수도, 연약한 희망의 끈을 잡는 일일 수도 있어서 시종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말하자면 미드나잇 선은 소심한 킬러의 사투의 기록이자 수렁에 빠진 두 남녀의 로맨스입니다. 이야기의 흐름은 예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채 통속적으로 흘러가지만, 요 네스뵈 특유의 문장과 매력적인 인물들 덕분에 끝까지 긴장감을 놓치지 않고 읽을 수 있습니다.

 

(‘블러드 온 스노우의 서평에서도 썼듯이) 두 작품에서 공통적으로 느낀 점은 요 네스뵈의 대표 캐릭터 해리 홀레가 경찰이 아니라 킬러가 됐다면 올라브 아니면 울프 둘 중 한 인물이 됐을 게 분명하다는 점입니다. 안과 밖으로 가시를 두른 채 자신은 물론 자신에게 다가오는 모든 사람들을 상처 주는 인물, 하지만 저 깊은 곳 어딘가에 아주 작은 한 조각의 따뜻함을 간직하고 있는 인물, 그래서 차라리 자신이 더 다치고 상처받더라도 결국엔 사랑하는 사람을 지켜내고 마는 인물. 해리와 올라브와 울프는 자신만의 고유한 개성을 지닌 인물들이긴 하지만 속내를 뜯어보면 이란성 쌍둥이 같은 형제들인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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