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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도망자의 고백
야쿠마루 가쿠 지음, 이정민 옮김 / ㈜소미미디어 / 2022년 7월
평점 :
스무살 명문대생 마가키 쇼타는 늦은 밤 술에 취한 상태에서 운전을 하다가 잠시 한눈을 판 사이 뭔가를 치곤 끔찍한 비명소리를 듣지만 두려움에 사로잡혀 그대로 도망칩니다. 다음 날 뉴스를 통해 자신이 친 것이 길을 건너던 노인이란 걸 알게 된 쇼타는 겁에 질리고 며칠 뒤 경찰에 체포됩니다. 모든 사실을 솔직히 인정할 경우 잃어버릴 것들이 너무나 많았던 쇼타는 경찰 심문은 물론 법정에서조차 변명과 거짓말로 일관합니다. 만기출소 후에도 쇼타는 피해자 유족에게 사과하기를 꺼려합니다. 억울하거나 화가 나서가 아니라 단지 두렵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자신은 단지 운이 없었을 뿐이라는 생각을 떨치지 못합니다. 한편, 사망한 노인의 남편 노리와 후미히사는 ‘중대한 결심’을 품은 채 출소한 쇼타의 흔적을 추적하기 시작합니다.
10여 년 전, ‘천사의 나이프’로 처음 만난 야쿠마루 가쿠는 매번 사회파 미스터리의 매력과 함께 ‘진실 찾기’ 이상의 깊고 짙은 여운을 남겨주곤 했습니다. 특히 ‘죄를 지은 인간’의 빛과 그림자를 자신만의 관점과 문장으로 그려내면서 “모든 게 다 사회적, 구조적 문제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라는 식의 도식적인 사회파 미스터리를 뛰어넘는 서사를 선사했습니다.
야쿠마루 가쿠와 12번째로 만난 ‘어느 도망자의 고백’은 미스터리가 아닙니다. 인터넷서점에서도 ‘1950년대 이후 일본소설’ 혹은 ‘일본문학’으로만 분류하고 있습니다. 범인 혹은 진실을 찾는 이야기가 아닌, 한 사람의 목숨을 앗아간 뺑소니사고의 가해자, 피해자, 가족과 유족, 제3자 등 여러 사람의 고통과 비극에 관한 담담한 기록에 가깝습니다.
사고를 내고 하루아침에 인생 밑바닥으로 추락한 쇼타는 ‘도망자 아닌 도망자’입니다. 사고를 낸 뒤 종적을 감춘 것도 아니고, 탈주나 탈옥을 저지른 것도 아니니 누군가의 추격을 받는 도망자는 아니지만, 스스로를 속이고 진실을 왜곡하며 진정한 속죄를 외면한 탓에 세상 모든 것과 등질 수밖에 없어진, 또 그 어디도 갈 곳이 없어진 영원한 도망자가 됐다는 뜻입니다.
이야기의 핵심은 출소 후 음지와 양지를 오가며 고뇌와 갈등, 한탄과 절망에 사로잡혀있던 쇼타가 가족, 연인, 피해자 유족 등 여러 사람과의 만남을 통해 진심으로 자신의 죄와 마주하게 되는 과정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작품이 ‘쇼타의 속죄 과정’을 시간 순으로 나열해놓은 지루한 기록물이란 뜻은 결코 아닙니다. 특히 낙인이 찍힌 채 붕괴된 가해자 가족, 가눌 수 없는 분노와 절망에 휩싸인 피해자 유족, 그리고 쇼타를 향한 구체적이고 명백한 복수의 조짐은 읽는 내내 또 다른 사건이 일어나는 것은 아닐까 조마조마하게 만드는 요소들입니다.
이중적 의미의 ‘도망자’를 담은 번역제목도 괜찮았지만, 마지막 장을 다 읽은 후 문득 ‘속죄’나 ‘참회’가 이 작품의 제목에 잘 어울리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검색해보니 역시나 원제가 고해(告解, 2020년)였습니다. 야쿠마루 가쿠 특유의 반전이 빛나는 사회파 미스터리를 기대한 독자에겐 조금은 싱겁게 읽힐 수도 있겠지만, 진실과 양심을 외면했던 쇼타가 끝내 고해에 이르는 과정은 나름 큰 의미와 감동을 품고 있다는 게 저의 결론입니다. 그런 점에서 쇼타의 아버지가 편지를 통해 남긴 한마디는 이 작품에서 가장 인상 깊은 구절이었습니다.
“계속 도망치는 한 사람은 진심으로 웃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언젠가 네가 진심으로 웃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p340)
지극히 현실적인 사족 하나만 덧붙이자면, 적어도 운전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언제든 쇼타의 처지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누구나 사건의 가해자가 될 수 있습니다. 만약 당신이 가해자가 된다면 당신은 자신이 저지른 죄와 똑바로 마주할 수 있을까요?”라는 야쿠마루 가쿠의 일성은 충분히 귀 기울여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별로 어렵지 않은 일 같아 보이지만 이 작품을 읽고 나면 자신의 죄와 똑바로 마주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고통스러운 일인지 실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