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내상자 미야베 월드 2막
미야베 미유키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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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내상자’(원제 堪忍箱)1996년 작품으로 미야베 월드 2초기작에 속하는 단편집입니다. ‘미시마야 변조 괴담 시리즈최신작 영혼통행증의 후속작을 기다리고 있었던 터라 다소 아쉽긴 했지만, 오랜만에 초기 미야베 월드 2의 향기를 맛볼 수 있었다는 점에서 나름 흥미로운 시간을 만끽했습니다.

 

조금 긴 편집자 후기를 빼면 230여 페이지의 분량에 여덟 편, 즉 편당 평균 30페이지 남짓한 미니급 단편들이 실려 있습니다. 특유의 기담이나 괴담을 기대한 독자에겐 조금은 심심하게 읽힐 수 있는 에도 시대 일상 미스터리가 대부분인데, 재미있는 건 수록작들을 관통하는 공통의 요소가 비밀이라는 점입니다. 대대로 소중히 간직하며 후대에 물려줘야 하는, 하지만 그 안에 뭐가 들었는지 아무도 모르며 절대 열어서도 안 되는 비밀투성이 상자를 다룬 표제작 인내상자를 시작으로, 납치자작극을 요구하는 당돌한 소년의 집안에 깃든 비밀, 전직 사무라이라지만 도무지 내력을 알 수 없는 비루한 낭인의 비밀, 매년 816일이 돌아올 때마다 공포에 사로잡히는 한 도매상의 비밀, 피 한 방울 안 섞인 부모-자식이 간직한 각자의 애틋하고도 가슴 아픈 비밀 등 누구에게 털어놓을 수도, 털어놓고 싶지도 않은 내밀한 비밀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여덟 편 가운데 표제작 인내상자십육야 해골이 괴담 혹은 그에 가까운 서사를 다룬다면 나머지 여섯 편은 일상 미스터리 혹은 애틋하거나 블랙코미디 같은 가벼운 소재의 작품들입니다. ‘인내상자보다 먼저 나온 신이 없는 달’(1994)맏물 이야기’(1995) 역시 비슷한 톤의 작품들인데, 이후 미인’(1997)부터 미야베 월드 2이 본격적으로 괴담을 다룬 걸 보면 이 세 편의 작품은 에도시대 사람들의 다양한 삶의 모습과 그 안에서 벌어지는 희비극을 담담하게 그려내고자 기획된 것으로 보입니다.

 

아무래도 괴담에 관심이 더 많다 보니 인내상자십육야 해골에 더 주목할 수밖에 없었는데, 고백하자면 두 작품 모두 애매한 전개와 엔딩 때문에 다 읽고도 난감함을 느낀 게 사실입니다. 이에 대해선 편집자 후기에서 어느 정도 보충설명을 들을 수 있는데, 독자에 따라선 꿈보다 해몽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지만, 제 경우엔 작가의 의도를 어느 정도 따라잡을 수 있을 것 같은 결정적인 힌트로 읽혀서 큰 도움이 됐습니다.

 

인내상자를 통해 미야베 월드 2을 처음 접한 독자라면 시리즈 전체가 이런 스타일일 거라고 오해할 수 있는데, 미야베 미유키가 그린 에도시대 괴담의 진수를 맛보고 싶다면 흑백’, ‘안주’, ‘피리술사’(이상 미시마야 변조 괴담 시리즈’), ‘미인’, ‘괴수전중 한 작품만이라도 꼭 읽어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또 이 방대한 시리즈를 어떤 순서로 읽는 게 좋을지 모르겠다면 출판사 블로그(https://blog.naver.com/hongminkkk) 또는 제가 정리한 순서(https://blog.naver.com/memories226/221539848880)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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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자나 2022-09-21 1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내상자가 표제작인데 좀 애매하더라구요~~사실 뭔말인지 뭘 전달하는지 ... 엥? 했네요
 
홀리데이 아르테 미스터리 15
T. M. 로건 지음, 천화영 옮김 / arte(아르테)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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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트, 로언, 제니퍼, 이지. 대학시절부터 20년 동안 절친으로 지내온 네 사람은 각자의 가족들을 데리고 남프랑스의 고급 별장에서 1주일간의 여름휴가를 보내기로 합니다. 하지만 별장에 도착하자마자 남편 숀의 폰에서 불륜의 흔적을 발견한 케이트는 충격과 절망에 사로잡힙니다. 더욱 놀라운 건 숀과 메시지를 주고받은 여자가 절친 셋 중 한 명이 틀림없다는 점입니다. 분노와 자책을 거듭하며 싸울 것인지, 떠날 것인지 혼란을 겪던 케이트는 별장에서 절친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며 자신을 배신한 게 누구인지 알아내기로 결심합니다.

 

함께 1주일의 휴가를 보내게 된 절친 가운데 남편과 불륜을 저지르는 친구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케이트가 배신자를 찾아 나선다는 설정은 확장된 도메스틱 스릴러 구도이자 밀실 아닌 밀실에서 범인을 찾는 서사와 닮은꼴이라 초반부터 눈길을 끕니다. 남편은 물론 친구들의 사소한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까지 눈여겨보며 은밀하게 숨겨진 불륜의 흔적을 캐내려는 케이트의 심정은 남프랑스의 아름다운 풍광과는 대조적으로 거의 숨 막힐 듯한 절박함 그 자체입니다. 더구나 세 친구 모두 의심스러운 언행들을 거리낌없이 저지르는데다 남편 숀 역시 수시로 부적절한 모습을 보이는 탓에 케이트의 혼란은 더욱 가중됩니다. 나보다 똑똑하고 돈 잘 버는 로언, 나보다 예쁜데다 학창시절 숀의 연인이었던 제니퍼, 마흔까지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싱글 생활을 즐기다가 정착하기 위해 돌아왔다는 매력적인 이지, 그리고 여전히 여성들의 눈길을 끄는 다정다감한 남편 숀. 이들은 하나같이 케이트로 하여금 분노 이상의 자책과 열등감을 느끼게 만드는 인물들입니다.

 

절친들 가운데 배신자를 찾아내려는 케이트의 이야기가 중심축이지만, 그녀들의 남편과 자식들의 이야기 역시 꽤 큰 비중으로 나란히 전개됩니다. 케이트의 남편 숀을 비롯하여 아내의 불륜을 의심하는 남편, 문제 있는 자식들을 마치 연구대상인 타인처럼 여길 뿐인 상담심리사 남편이 등장하고, 단순히 질풍노도의 시기를 지나는 중이라고 치부할 수 없는 예비 사이코패스 10대 형제와 역시 10대지만 뭔가 심각한 고민거리를 지닌 듯한 소녀 등 주인공들 못잖게 눈길을 끄는 문제적 가족들이 시한폭탄마냥 고급별장을 어슬렁거립니다.

 

출판사 소개글 중 마지막 100페이지를 위해 달려가는 심리 스릴러라는 문구가 있는데, 이 작품을 잘 압축한 카피입니다. “절친들 중 진짜 불륜녀가 있을까?” “혹시 케이트가 불륜의 증거로 여긴 단서들이 다른 사건과 어떤 식으로 연결돼있는 건 아닐까?” 이런 궁금증에 대한 해답이 막판 100페이지에 걸쳐 폭죽처럼 터지기 때문입니다. 앞선 500여 페이지가 시속 60km의 정속주행 구간이었다면, 막판 100페이지는 그야말로 아우토반 그 자체입니다.

 

재미있게 읽었지만, 몇 가지 아쉬운 점도 있었는데, 우선 케이트의 직업은 런던경찰청 범죄과학수사관으로 설정돼있지만 그 재능이 특별히 발휘되진 않습니다. 또 막판 100페이지가 분명 전광석화 같은 전개를 보이긴 하지만, 거꾸로 말하면 정속으로 주행한 서론이 너무 길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전작인 ‘29에서도 비슷한 아쉬움을 느꼈는데, ‘홀리데이의 경우 인물과 사건만 놓고 보면 600여 페이지의 분량까지 필요해 보이진 않았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한 가지만 더 얘기하자면, 케이트의 의심을 초래한 숀의 수상쩍은 행동들의 진짜 이유, 그러니까 막판에 드러난 진짜 사건은 개연성도 충분하고 얼마든지 납득 가능한 설정이지만 다소 뜬금없어 보인 면도 없지 않습니다. 물론 작가가 중간중간 노골적인 힌트를 주긴 했지만, 그렇다 해도 역시 앞선 500여 페이지는 너무 길었다.”라는 느낌을 피할 수는 없었습니다.

 

데뷔작인 리얼 라이즈를 무척 흥미진진하게 읽었지만 ‘29에서 다소 실망한 기억이 있어서 세 번째 작품인 홀리데이는 남다른 기대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와 취향이 잘 맞는 작가는 아닌 것 같지만, T. M. 로건이 궁금한 독자라면 우선 리얼 라이즈를 먼저 읽어볼 것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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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탑의 살인
치넨 미키토 지음, 김은모 옮김 / 리드비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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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노 현 산악지대에 들어선 원뿔 모양의 거대한 유리탑은 생명과학자이자 중증의 미스터리 마니아인 코즈시마 타로의 대저택입니다. 그는 세상이 놀랄 깜짝 발표를 하겠다며 자칭 명탐정 아오이 츠키요를 비롯 형사, 미스터리 작가, 편집자, 영능력자 등 미스터리계의 유명 인사들과 주치의 유마를 유리탑에 초대합니다. 하지만 다른 손님들과 달리 유마에겐 별도의 목표가 있습니다. 바로 유리탑의 주인 코즈시마를 죽이는 것입니다. 나름 완벽한 준비를 마치고 실행에 옮겼지만 예기치 못한 사태가 벌어진데다 자칭 명탐정 아오이 츠키요가 집요하게 범인 색출에 나서면서 유마는 패닉 상태에 빠집니다. 더구나 눈사태로 외부와 고립되자마자 연이어 살인사건이 벌어지면서 유마는 물론 유리탑 안의 사람들 모두 공포에 휩싸입니다.

 

지금까지 읽은 치넨 미키토의 작품은 리얼 페이스’, ‘가면병동’, ‘시한병동등 주로 현직 의사인 그의 전공이 녹아든 미스터리였습니다. 그 외에 판타지 혹은 라노벨 스타일의 미스터리도 출간되긴 했지만 그쪽으론 통 눈길이 가지 않았는데, 그런 치넨 미키토가 제목에서부터 신본격 미스터리를 표방한 작품을 냈다는 소식은 꽤나 의외이기도 했고 동시에 강렬한 호기심과 기대감을 자아내기도 했습니다.

 

설원에 고고히 자리 잡은 거대한 유리탑, 그곳에 모여든 미스터리계의 유명인사들, 때마침 몰아친 눈사태에 더해 통신까지 두절된 상황, 그리고 연이어 벌어지는 끔찍한 밀실살인 등 유리탑의 살인은 신본격 미스터리의 부활을 알리는 듯한 완벽한 외양을 지녔습니다. 뿐만 아니라 치넨 미키토는 작품 곳곳에서 동서양의 고전에 등장하는 밀실과 트릭에 대해 거듭 언급하는데, 특히 1980~90년대 신본격 미스터리의 리더인 시마다 소지와 아야츠지 유키토에 대한 오마주 이상의 존경과 헌사를 드러냄으로써 이 작품의 성격을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첫 페이지에서 첫 살인의 범인(유리탑의 주인 코즈시마를 죽인 주치의 유마)을 공개한 작가는 자칭 명탐정인 괴짜 캐릭터 츠키요에게 진실 찾기 역할을 맡깁니다. 쉽고 평범한 사건 따윈 안중에도 없는 그녀는 완벽한 밀실에서 벌어진 연쇄살인에 흥분하는 것은 물론 참혹하게 살해된 시체를 보며 아름답고 예술적이야!”라고 대놓고 기뻐하는 4차원 인물입니다. 상대가 누구든 매몰차고 냉철한 말투로 기선을 제압하며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가 하면, 대화 도중 수시로 샛길로 빠져 동서양의 고전을 아우르는 미스터리 강의에 열을 올리기도 합니다.

 

유리탑에서 연이어 벌어지는 연쇄살인 때문에 가장 난감해진 건 첫 사건의 범인인 유마입니다. 자칫 자신의 범행이 드러날 경우 나머지 사건들마저 뒤집어쓸 게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유마는 경찰이 눈사태를 헤치고 도착하기 전에 범인을 찾아내 자신의 죄를 뒤집어씌우기로 하고, 그를 위해 명탐정 츠키요를 이용하기로 합니다. 물론 그녀가 자신의 범행을 먼저 밝혀낸다면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갈 벼랑 끝 전술이지만 유마에겐 달리 선택지가 없습니다.

 

밀실과 트릭의 향연을 거쳐 사건의 진상이 밝혀지지만 실은 그 뒤로 무려 100페이지 가까이 남아있어 도대체 얼마나 큰 규모의 반전이 기다리고 있을지 무척 궁금해졌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 반전은 독자의 예상을 완전히 뒤집는 것은 물론 신본격 미스터리의 진수를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어서 그야말로 빛의 속도로 마지막 페이지까지 달려가게 만듭니다. 이토록 빈틈없는 설계와 매력적인 인물들을 만들어낸 치넨 미키토의 필력에 혀를 내두르지 않을 독자는 없을 거란 생각입니다.

 

일본 미스터리를 처음 접했을 무렵엔 (이 작품에서 여러 차례 거듭 언급되는) 시마다 소지의 점성술 살인사건과 아야츠지 유키토의 관 시리즈등 신본격 작품들을 흥미진진하게 읽었지만, 언젠가부터 다소 무리한 트릭과 설정에 질리기 시작한 나머지 외면해왔던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유리탑의 살인덕분에 아련한 향수와 함께 다시금 관심을 갖게 됐는데, 특히 관 시리즈는 기회가 된다면 순서대로 다시 읽어보려고 합니다. 그 외에도 이 작품의 별미이기도 한 명탐정 츠키요의 미스터리 강의에서 언급된 동서양의 명품들도 별도로 메모해놓았다가 찾아 읽어보려고 합니다.

 

치넨 미키토가 또다시 신본격 미스터리에 도전할지는 알 수 없지만, 언젠가 한번쯤은 꼭 다시 맛보고 싶은 욕심입니다. 단순히 복고풍의 미덕을 넘어 신본격의 서사를 현대적 느낌으로 되살려낸 그만의 뛰어난 재능이 이 한 작품으로 그치는 건 너무나도 안타까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만한 작품이 나오려면 꽤 긴 시간을 기다려야 하겠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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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도망자의 고백
야쿠마루 가쿠 지음, 이정민 옮김 / ㈜소미미디어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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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살 명문대생 마가키 쇼타는 늦은 밤 술에 취한 상태에서 운전을 하다가 잠시 한눈을 판 사이 뭔가를 치곤 끔찍한 비명소리를 듣지만 두려움에 사로잡혀 그대로 도망칩니다. 다음 날 뉴스를 통해 자신이 친 것이 길을 건너던 노인이란 걸 알게 된 쇼타는 겁에 질리고 며칠 뒤 경찰에 체포됩니다. 모든 사실을 솔직히 인정할 경우 잃어버릴 것들이 너무나 많았던 쇼타는 경찰 심문은 물론 법정에서조차 변명과 거짓말로 일관합니다. 만기출소 후에도 쇼타는 피해자 유족에게 사과하기를 꺼려합니다. 억울하거나 화가 나서가 아니라 단지 두렵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자신은 단지 운이 없었을 뿐이라는 생각을 떨치지 못합니다. 한편, 사망한 노인의 남편 노리와 후미히사는 중대한 결심을 품은 채 출소한 쇼타의 흔적을 추적하기 시작합니다.

 

10여 년 전, ‘천사의 나이프로 처음 만난 야쿠마루 가쿠는 매번 사회파 미스터리의 매력과 함께 진실 찾기이상의 깊고 짙은 여운을 남겨주곤 했습니다. 특히 죄를 지은 인간의 빛과 그림자를 자신만의 관점과 문장으로 그려내면서 모든 게 다 사회적, 구조적 문제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라는 식의 도식적인 사회파 미스터리를 뛰어넘는 서사를 선사했습니다.

 

야쿠마루 가쿠와 12번째로 만난 어느 도망자의 고백은 미스터리가 아닙니다. 인터넷서점에서도 ‘1950년대 이후 일본소설혹은 일본문학으로만 분류하고 있습니다. 범인 혹은 진실을 찾는 이야기가 아닌, 한 사람의 목숨을 앗아간 뺑소니사고의 가해자, 피해자, 가족과 유족, 3자 등 여러 사람의 고통과 비극에 관한 담담한 기록에 가깝습니다.

사고를 내고 하루아침에 인생 밑바닥으로 추락한 쇼타는 도망자 아닌 도망자입니다. 사고를 낸 뒤 종적을 감춘 것도 아니고, 탈주나 탈옥을 저지른 것도 아니니 누군가의 추격을 받는 도망자는 아니지만, 스스로를 속이고 진실을 왜곡하며 진정한 속죄를 외면한 탓에 세상 모든 것과 등질 수밖에 없어진, 또 그 어디도 갈 곳이 없어진 영원한 도망자가 됐다는 뜻입니다.

 

이야기의 핵심은 출소 후 음지와 양지를 오가며 고뇌와 갈등, 한탄과 절망에 사로잡혀있던 쇼타가 가족, 연인, 피해자 유족 등 여러 사람과의 만남을 통해 진심으로 자신의 죄와 마주하게 되는 과정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작품이 쇼타의 속죄 과정을 시간 순으로 나열해놓은 지루한 기록물이란 뜻은 결코 아닙니다. 특히 낙인이 찍힌 채 붕괴된 가해자 가족, 가눌 수 없는 분노와 절망에 휩싸인 피해자 유족, 그리고 쇼타를 향한 구체적이고 명백한 복수의 조짐은 읽는 내내 또 다른 사건이 일어나는 것은 아닐까 조마조마하게 만드는 요소들입니다.

 

이중적 의미의 도망자를 담은 번역제목도 괜찮았지만, 마지막 장을 다 읽은 후 문득 속죄참회가 이 작품의 제목에 잘 어울리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검색해보니 역시나 원제가 고해(告解, 2020)였습니다. 야쿠마루 가쿠 특유의 반전이 빛나는 사회파 미스터리를 기대한 독자에겐 조금은 싱겁게 읽힐 수도 있겠지만, 진실과 양심을 외면했던 쇼타가 끝내 고해에 이르는 과정은 나름 큰 의미와 감동을 품고 있다는 게 저의 결론입니다. 그런 점에서 쇼타의 아버지가 편지를 통해 남긴 한마디는 이 작품에서 가장 인상 깊은 구절이었습니다.

 

계속 도망치는 한 사람은 진심으로 웃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언젠가 네가 진심으로 웃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p340)

 

지극히 현실적인 사족 하나만 덧붙이자면, 적어도 운전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언제든 쇼타의 처지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누구나 사건의 가해자가 될 수 있습니다. 만약 당신이 가해자가 된다면 당신은 자신이 저지른 죄와 똑바로 마주할 수 있을까요?”라는 야쿠마루 가쿠의 일성은 충분히 귀 기울여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별로 어렵지 않은 일 같아 보이지만 이 작품을 읽고 나면 자신의 죄와 똑바로 마주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고통스러운 일인지 실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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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셀로나 섀도우
마르크 파스토르 지음, 유혜경 옮김 / 니케북스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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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매춘부의 아이들이 연이어 실종됩니다. 하지만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은 물론 실종된 아이들의 어머니들마저 매춘부라는 신분 때문에 신고조차 하지 못합니다. 범인이 괴물이니 흡혈귀니 불온한 소문만 무성한 가운데 모이세스와 후안은 경찰 수뇌부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사라진 아이들을 찾는데 전력을 다합니다. 어딘가 수상쩍은 오스트리아 출신 골상학 박사 이삭의 설명을 듣고 아이들의 피를 탐하는 흡혈귀의 범행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게 된 모이세스는 그와 동시에 납치된 아이들을 성매매에 이용하는 대형 매음굴의 존재를 파악하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경찰 수뇌부는 모이세스의 수사를 중지시킵니다. 그런 가운데 평범한 중산층의 아이까지 실종되자 바르셀로나는 공포에 휩싸입니다.

 

언뜻 보면 아동을 대상으로 한 엽기적인 연쇄살인마 혹은 권력형 인신매매 사건을 다룬 정통 스릴러 같지만, ‘바르셀로나 섀도우는 괴담 스타일의 호러물에 더 가까운 작품입니다. 영원한 젊음을 유지하기 위해 아이들의 순수한 피를 마시는 흡혈귀, 살해한 아이들의 신체와 장기를 약재로 만들어 부자와 권력자들에게 밀매하는 인물, 여자라면 시체라도 마다하지 않는 중증 시간증(屍姦症) 소년, 시신을 해부하여 인간이 짐승처럼 행동하게 하는 메커니즘을 밝혀내려는 수상쩍은 골상학 박사, 그리고 이야기 곳곳에서 1인칭 화자로 등장하는 저승사자에 이르기까지 현실을 뛰어넘는 캐릭터가 훨씬 더 많이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수사를 이끄는 주인공 모이세스는 수뇌부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매춘부의 아이들을 찾아 나선 정의로운 경찰처럼 보이지만, 실은 아내 몰래 수시로 매춘부를 찾는 호색한이기도 하고, 상관의 명령을 개떡처럼 여기는 반골 기질인가 하면, 당시 인기를 끌고 있던 셜록 홈즈 시리즈를 비롯 탐정소설의 마니아라는 독특한 캐릭터를 지닌 인물입니다. 뼛속까지 마초 기질인 정의로운 한량이라고 할까요?

 

모이세스와 후안의 수사는 현실감을 갖춘 미스터리와 스릴러로 포장돼있지만, 사건에 연루된 인물들이 워낙 비현실적 호러물 캐릭터라 좀처럼 이야기의 정체성을 파악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거기다가 이야기가 3인칭 시점으로 전개되는 와중에 아무런 예고나 줄 바꿈도 없이 수시로 툭툭 튀어나오는 1인칭 화자, 그것도 죽은 자의 영혼을 데려가는 저승사자의 존재 때문에 독자 입장에선 무척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는 연극 속 설명역처럼 여기저기 출몰하여 그동안 자신이 거둬간 영혼들에 대한 이야기라든가 독자가 궁금히 여기는 정보들을 제공하긴 하지만 그다지 눈길을 끌진 못합니다. 그나마 (초반부터 정체가 공개된) 흡혈귀이자 연쇄살인마인 40대 여성 엔리케타가 어떤 인물인지를 알려주는 대목이 흥미롭긴 하지만 결과적으론 이야기에의 몰입을 방해하는 가장 큰 요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 작품의 원제는 ‘La Mala Dona’인데 어설프게 번역하면 악녀쯤 되는 것 같습니다. 즉 수사를 맡은 모이세스만큼 비중이 큰 흡혈귀이자 연쇄살인마인 40대 여성 엔리케타를 지칭하는 듯한데, 이 인물은 실은 20세기 초 실존했던 인물이라고 합니다. 출판사 소개글에 따르면 “‘바르셀로나의 흡혈귀로도 알려진 그녀는 아이들의 매춘을 알선했고, 아이들을 납치하여 살해한 다음 신체 부위를 이용해 연고와 물약을 만들어 부유한 고객에게 팔았다.”고 합니다. 팩션의 주인공으론 더없이 매력적인 인물이지만, 정작 이 작품에서는 너무 신비하거나 애매하게 그려진 탓에 다 읽고도 그녀의 정체성을 제대로 파악하기 어려웠습니다. 역할도 등장 이유도 불분명한 저승사자대신 엔리케타를 전면에 내세웠더라면 다소 평범하긴 해도 훨씬 더 흥미진진한 스릴러가 됐을 거란 생각입니다.

 

1911년의 바르셀로나에 대해 작가는 살아있는 자들의 묘지또는 빈부 격차가 극심하고 질병과 강력범죄가 만연한 암울한 공간으로 설명합니다. 바르셀로나가 풍기는 불온한 기운과 섬뜩한 호러물 캐릭터들이 자아낸 서늘한 분위기는 압권이었지만, 이야기 자체가 너무 산만하고 모호해서 좀처럼 몰입하기 어려웠던 건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불가능한 발상이긴 하지만 누군가 이 작품의 등장인물들을 고스란히 재활용하여 좀더 대중적이고 선명한 이야기를 만들어낸다면 제 취향에 너무나도 잘 맞는 매력적인 호러 스릴러가 돼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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