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나를 버린 날
마츠무라 료야 지음, 권하영 옮김 / 북플라자 / 2022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가족이 해체된 뒤 고교를 중퇴하고 인생의 막다른 벽에 다다른 19살 준키는 삶을 마감하려던 순간 내 이름을 줄게. 죽을 바에야 나대신 나로 살아줘.”라는 켄스케의 제안을 받고 두 번째 인생을 살기 시작합니다. 애초 켄스케의 의도를 알 수 없었던 준키는 그가 본명도 얼굴도 감춘 채 시오미 하루라는 필명으로 소설을 쓰고 있으며, 그 익명성을 지키며 집필 활동에 전념하기 위해 자기 대신 켄스케로 살아갈 사람이 필요했다는 걸 알게 됩니다. 준키의 가짜 인생은 두 사람이 동거한 2년 동안 순탄하게 이어졌지만, 어느 날 켄스케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경찰이 찾아와 켄스케’, 즉 준키를 살인용의자로 의심하면서 하루아침에 악몽으로 변하고 맙니다. 그날부터 준키는 진짜 켄스케를 찾기 위해 그의 과거를 파헤치기 시작합니다.

 

19살 준키가 켄스케로부터 새 신분과 인생을 부여받고 순탄한 생활을 누리는 2년의 시간은 이야기의 도입부, 그러니까 불과 50여 페이지의 분량에 불과합니다. 그 뒤로 200여 페이지에 걸쳐 전개되는 건 간단하게 말하면 준키의 켄스케 찾기이고, 조금 풀어서 말하면 켄스케를 찾기 위해 그의 과거를 추적하던 준키가 심연보다 더 어둡고 참혹한 그의 비극들을 알게 되는 과정입니다. 물론 살인용의자로 몰린 가짜 켄스케준키가 켄스케 주위에서 일어난 네 건의 살인사건의 진실을 알아내는 이야기도 포함돼있습니다.

 

준키의 켄스케 찾기는 우선 직관적인 단서와 지인을 통한 정보 찾기부터 시작되지만 결정적인 곳에서 늘 막다른 벽에 부딪힙니다. 결국 준키가 주목한 것은 켄스케가 시오미 하루라는 필명으로 펴낸 두 편의 소설과 아직 미출간 상태인 원고 한 편입니다. 폐쇄적이고 우울한 분위기가 지배하는 그의 소설 속엔 켄스케 본인으로 보이는 고독한 소년과 몇 살 아래로 보이는 불행한 소녀가 등장하는데, 만일 실존한다면 그 소녀야말로 켄스케를 찾을 수 있는 유일한 열쇠가 돼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소녀를 찾는 과정에서 준키는 켄스케의 삶에 드리운 너무나도 슬프고 끔찍한 사연들을 하나둘씩 알게 됩니다. 켄스케 주위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의 진실도 함께 말입니다.

 

이 작품 속 살인사건들의 1차적 성격은 사적 복수지만 동시에 사회파 미스터리의 면모도 함께 지니고 있습니다. 가족의 해체를 불러일으킨 알코올중독과 폭력, 소소한 이익을 위해 자식을 학대하고 이용한 부모의 만행, 그리고 그 악의들이 나비효과처럼 일으킨 또 다른 참극 등 일련의 사회적 문제들이 야기한 사건들이 줄줄이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스스로도 이런 비극의 희생자인 탓에 켄스케의 과거를 파헤칠수록 고통만 배가될 뿐인 준키와 함께 독자의 마음은 한없이 무거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사건 개요만 정리해놓고 보면 무척 단선적인 구조지만 준키와 켄스케가 신분을 바꾼 설정 덕분에 이야기는 입체감을 얻습니다. 또 켄스케가 쓴 세 편의 소설은 액자구성의 맛을 넘어 그 자체만으로도 이야기의 비극성을 한층 더 고조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엔딩은 예상에서 크게 벗어나진 않았지만 애초 큰 반전보다는 애틋함과 애절함에 방점을 찍은 서사라서 충분히 수긍하고 만족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저런 미덕과 장점에도 불구하고 평범한 평점에 그친 이유는 어느 독자의 서평대로 “(뭔가 있는 것 같은데) 매끄럽지 않다.”라는 점 때문입니다. 네 건의 살인 중 시기나 계기가 다소 모호한 경우도 있고, 준키와 켄스케의 신분 바꾸기자체도 완벽한 설득력을 갖추진 못했습니다. 켄스케를 찾아 나선 준키의 행보를 묘사하는 대목에서도 뭔가 있어 보이기 위해애매한 문장들을 구사한 작가의 태도가 못마땅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이야기도, 캐릭터도 좀더 단순하고 선명했더라면 이 작품의 매력은 훨씬 더 독자들에게 소구될 수 있었을 거란 생각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잠자는 숲 현대문학 가가 형사 시리즈 개정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9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잠자는 숲 속의 미녀공연을 코앞에 둔 명문 다카야나기 발레단에서 연이어 비극적인 사건이 벌어집니다. 발레리나 하루코는 사무실에 난입한 정체불명의 남자를 죽인 뒤 정당방위를 주장하지만 경찰에 체포됐고, 이어 발레단의 중추적 인물이 연습 도중 살해되는가 하면, 독살 미수 사건에 수면제 과다복용으로 인한 자살까지 연달아 일어납니다. 경시청 수사1과의 가가는 선임파트너인 오타와 함께 관할서 수사에 파견돼 수사에 나서지만 각각의 사건들이 연관돼있긴 한 건지, 동일범에 의한 소행인지조차 쉽사리 파악하지 못해 애를 먹습니다. 수사가 난항을 거듭하는 와중에 가가는 발레리나 아사오카 미오에게 특별한 감정을 품기 시작합니다.

 

잠자는 숲가가 형사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입니다. 80년대를 배경으로 한 시리즈 첫 작품인 졸업에서 20대 초중반의 대학졸업반이었던 가가는 이 작품에서 30세 전후로 등장합니다. 대학졸업 후 중학교 교사로 근무했다는 본인의 짧은 설명 외에 그 사이 가가의 행적이 그려지진 않았지만 이른 나이에 경시청 수사1과에 소속된 걸 보면 경찰로서도 유능한 경력을 쌓아왔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유명 발레 잠자는 숲 속의 미녀에서 따온 제목 잠자는 숲은 폐쇄적이고 엄격한 발레단의 속성과 발레인들의 삶을 대변합니다. 외부인들 눈에 화려하고 부유한 이미지로 각인된 발레는 실은 혹독한 훈련과 필사적인 자기관리를 요구하면서도 (일부 톱클래스를 제외하곤) 경제적인 여유와는 거리가 먼 배고프고 힘든 예술입니다. 더불어 비중 있는 역할을 따내기 위해 단원들 간에 필사적으로 경쟁하면서도 동시에 완벽한 호흡을 이뤄내기 위한 결속력도 필요하기에 누구도 쉽게 접근할 수 없는, 미녀가 갇힌 잠자는 숲의 이미지와 잘 어울리는 것입니다.

 

이처럼 폐쇄적이고 엄격한 분위기가 감도는 발레단에서 벌어진 연이은 사건은 초반부터 경찰의 수사를 난관에 빠뜨립니다. 피해자의 신분 파악부터 벽에 부딪힌 첫 살인, 알리바이 파악 자체가 불가능한 극장 한복판의 살인, 의도가 모호한 독살사건에 유력 용의자의 의문의 자살 등 무엇 하나 실마리를 찾기 어려운 사건들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여러 사건들 사이에 접점이 있는지 자체가 불확실한데다 어느 하나 범행동기가 불명확하다는 사실은 가가에게 있어 가장 곤혹스러운 점입니다.

 

발레단이라는 특수한 환경 속에서 다양한 종류의 살인사건이 일어나고 그만큼 다양한 트릭도 쉴 새 없이 등장해서 안 그래도 길지 않은 분량을 순식간에 읽게 만드는 히가시노 게이고 특유의 마력이 더없이 발휘된 작품입니다. 더구나 미스터리 못잖게 가가와 발레리나 미오 사이의 로맨스도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는데, 그래서인지 역자 후기에 따르면 “‘잠자는 숲(가가 형사 시리즈 중) 가장 로맨틱한 추리소설로 손꼽힌다.”고 합니다. 시리즈 마지막 작품인 기도의 막이 내릴 때를 읽은 지도 2년이 넘어서 가가에게 아내 혹은 연인이 있었는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는데, ‘잠자는 숲에서 만난 미오가 이후 가가와 어떤 인연을 이어나가는지 지켜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일 것 같습니다.

 

마지막에 진실이 밝혀지는 과정은 충격적인 반전과는 거리가 멀지만, 화려해 보이기만 하는 발레의 이면과 그것이 개개인의 삶을 어떻게 뒤흔들어놓았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어서 통쾌함이나 시원함 대신 씁쓸함과 애틋함을 진하게 남겨놓습니다. 개인적으로 가가 형사 시리즈중 가장 좋아하는 붉은 손가락도 이와 비슷한 인상을 남긴 걸로 기억하는데, 그러고 보면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 중 장르를 불문하고 베스트로 꼽는 작품 대부분이 닮은꼴의 엔딩을 갖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가가 형사 다시 읽기를 시작하면서 가장 기대했던 점도 바로 이런 씁쓸함과 애틋함이었는데 남은 작품들에서도 그런 엔딩들을 만끽하고 싶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얼론
리사 가드너 지음, 박태선 옮김 / 도서출판두드림 / 2007년 7월
평점 :
절판


연초에 세운 책장에 방치된 책 구하기계획 중 절대 빼먹지 않기로 결심한 게 리사 가드너의 얼론입니다. 2005년 작품으로 한국엔 2007년에 소개됐고, 그해 네이버 카페 러니의 스릴러 월드가 선정한 10대 스릴러에도 뽑힌 작품이라 기대를 하고 있었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읽는 건 물론 구매조차 차일피일 미루기만 해왔습니다. 결국 인터넷 중고서점을 통해 손에 넣은 건 출간 후 10년이 훌쩍 지난 시점이었는데, 그러고도 5년을 더 방치했으니 책에 대한 미안함이 이루 말할 수 없었고, 그래서 올해는 어떻게든 읽어내리라 다짐하게 된 것입니다.

 

분량에 걸맞게 꽤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핵심인물은 두 명입니다. 심야에 아내와 아들에게 총을 겨누고 있는 남자를 사살했지만 오히려 살인범으로 몰린 경찰 저격수 바비, 남편의 폭력과 바람에 시달리면서도 병약한 아들 네이던을 위해 헌신해왔지만 시아버지로부터 경찰을 끌어들여 남편을 죽게 만든 악녀취급을 받으며 양육권과 재산을 모조리 빼앗길 위기에 처한 캐서린이 그들입니다.

그리고 며느리 캐서린으로부터 손자 네이던을 빼앗고 저격수 바비의 삶을 박살내겠다고 으르렁대는 냉혈한 고위급 판사 제임스와 25년 만에 가석방된 뒤 캐서린 주위의 인물들을 살해하고 다니는 일명 미스터 보수리처드가 중요한 조연으로 등장합니다.

 

출판사 홍보카피에 심리범죄스릴러라는 문구가 포함된 데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이 작품은 단지 저격수 바비의 누명을 벗기고 진실을 밝히는 것 이상의 미묘한 심리극 서사가 작품 전반에 흐르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두 주인공 바비와 캐서린 모두 어린 시절 평생 지워지지 않을 끔찍한 폭력을 겪었으며 지금도 그 트라우마에서 자유롭지 못한 상태인데, 하필 그런 두 사람이 정당한 법 집행이냐? 사전에 모의된 계획살인이냐?”라는 미묘한 사건을 통해 만난 탓에 그들의 어둡고 음습한 내면이 적잖은 분량을 통해 설명됩니다.

 

바비의 경우 베테랑으로서 확실한 판단에 의거하여 예비살인자를 사살했다고 확신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어쩌면 폭력으로 인해 가족이 해체된 이후 억눌러왔던 자기 안의 무언가가 방아쇠를 당기게 했을지도 모른다는 회의에 빠집니다. 또 남편이 총을 겨눈 와중에도 아들을 꼭 끌어안고 있던 캐서린에게 정체모를 욕망을 느끼는 자신이 너무나도 낯설게만 느껴집니다.

캐서린의 경우는 더욱 참혹합니다. 12살 때 소아성애자에게 납치되어 28일간 감금됐다가 극적으로 구조된 그녀는 몸과 마음에 남은 깊은 트라우마로 인해 자살시도까지 경험한 바 있습니다. 부자 남편을 만나 잠시 행복을 누렸지만 결국 또 다른 비극의 주인공이 되고 만 그녀는 이제 병약한 아들을 학대한 혐의와 함께 의도적으로 남편을 도발하여 죽음에 이르게 만든 악녀로 취급받기에 이릅니다.

 

이야기를 좀더 풍성하게 만드는 역할은 희대의 소아성애자이자 소시오패스인 일명 미스터 보수리처드입니다. 과거 캐서린을 납치 감금했던 그가 25년 만에 누군가의 사주로 가석방된 뒤 캐서린 주변 인물들을 살해하면서 바비 사건과 접점을 이뤄가는 과정은 흥미로우면서도 시종 긴장감을 유지하게 만듭니다. 부와 권력을 지닌 냉혹한 판사 제임스가 며느리 캐서린을 증오하며 손자 네이던의 양육권을 확보하려는 이유 역시 마지막까지 독자의 궁금증을 유발하는데 클라이맥스 즈음에서 생각지도 못한 반전과 함께 밝혀집니다.

 

매력적인 주조연과 잇달아 벌어지는 사건들 덕분에 페이지는 정신없이 넘어갔지만, 막상 다 읽고 보니 뭔가 좀 허전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뭐라 딱 꼬집어 말할 순 없지만 맛깔난 재료들이 너무 많이 들어간 탓에 정작 결과물은 무슨 맛인지 알 수 없게 됐다고 할까요? 미묘한 사건을 통해 얽힌 데다 각자 폭력의 트라우마를 품고 있는 바비와 캐서린, 25년 만에 출소한 뒤 연쇄살인을 저지르는 소시오패스, 비밀을 움켜쥐고 있는 듯한 고위급 판사의 폭주 등 따로 떼어놓고 보면 별개의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을 정도로 모두 매력적인 요소들인데 왠지 무리하게 하나의 이야기 속에 욱여넣은 듯한 인상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인터넷서점의 평가가 다소 극과 극으로 나뉜 건 어쩌면 이런 이유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얼론을 제외하고 한국에 소개된 리사 가드너의 작품은 서바이버 클럽과 앤솔로지 한 편(‘페이스 오프’)뿐입니다. ‘서바이버 클럽역시 오랫동안 책장에 방치돼있는 신세인데, 내년쯤엔 쌓인 먼지를 털어줘야 할 것 같습니다. ‘얼론보다 3년 앞서 출간된 작품이지만 리사 가드너의 진면목을 제대로 만끽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길 바래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살의의 대담
후지사키 쇼 지음, 김은모 옮김 / 엘릭시르 / 2022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특수설정 미스터리를 비롯하여 본 적 없는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경향이 최근 몇 년간 일본 미스터리에서 두드러지는 가운데, 이번엔 대담 미스터리라는 희한한 장르가 등장했습니다. 그동안 본 적 없는 새로운 것을 담은 작품들이 대부분 억지에 가까운 설정들로 인해 실망감만 남긴 탓에 살의의 대담역시 비슷한 아류라고 내심 짐작했고, 한두 챕터만 읽어보고 아니다 싶으면 바로 접을 생각을 했던 게 사실입니다. 툭 터놓고 고백하자면 첫 챕터는 의외로 재미있었지만 두 번째 챕터는 다소 평범했습니다. 결국 딱 한 챕터만 더 읽어보기로 마음을 굳혔는데, 예상과 달리 그 길로 마지막 페이지까지 단번에 달리고 말았습니다.

 

모두 7개의 챕터로 구성돼있는데(6편의 대담과 에필로그), 각자 독립적인 이야기를 담은 단편 같지만 실은 7편 모두 복잡하면서도 정교한 방식으로 서로 연결돼있었습니다. 영화 여주인공과 원작 소설가, 국가대표 공격수 자리를 놓고 경쟁을 벌이는 두 축구선수, 5년 만에 오리콘 차트 1위에 오른 3인조 밴드, 종방을 앞둔 드라마의 세 주인공, 그리고 이들의 대담을 진행하는 프리랜서 기자 등 다양한 인물들이 저마다의 사연을 갖고 대담에 임하지만, 이들은 이런저런 방식으로 과거와 현재에 걸쳐 직접적으로 혹은 간접적으로 연결돼있습니다. 그리고 대담이 진행될수록 불온한 기운이 고조되고 대담자들은 상대를 향해 심각한 살의를 품기 시작합니다. 문제는 그것이 단순한 의지에 그치지 않고 참혹한 살인사건으로 구체화된다는 점입니다.

 

좀처럼 보기 드물게 살의의 대담의 본문은 검은색과 빨간색의 활자로 인쇄돼있습니다. 검은색이 실제 대담 내용이고, 빨간색은 대담자의 마음의 소리입니다. 상대를 칭찬하고 덕담을 주고받는 대담 내용과 달리 마음의 소리는 악의와 증오로 가득 차있으며 그것들은 이내 무시무시한 살의로 진화됩니다. 단순한 악의가 살의로 몸집을 키우고, 그것이 실제 살인으로까지 이어지는 과정은 독자에게 빨간 글자색만큼이나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데, 각 인물들의 내밀한 심리 묘사뿐 아니라 구체적인 복선과 트릭도 풍부하게 가미돼서 페이지를 넘길수록 도대체 어떤 엔딩이 기다리고 있을지 그저 궁금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모두에서 작가가 직접 익숙해질 때까지는 다소 읽기 불편할 수도...”라고 미리 양해를 구할 정도로 독특한 형식인데다, ‘살의를 더 강조하기 위해서인지 훨씬 더 분량이 많은 마음의 소리가 빨간색으로 인쇄된 탓에 눈이 피곤해질 수밖에 없지만, 속도감도 엄청 빠르고 여러 사람의 살의가 내뿜는 긴장감도 팽팽해서 한번 가속이 붙으면 마지막 장까지 좀처럼 책을 손에서 내려놓을 수 없는 게 사실입니다.

무엇보다 대체 몇 번인지 세는 것도 힘들 정도로 되풀이되는 반전의 연속에 어쩌면 나가떨어질지도...”라는 출판사 소개글대로 막판에 몰아치는 연이은 반전은 이 작품이 단순한 대담 미스터리가 아니라 무심하면서도 정교하게 쌓아올린 뒤 독자의 뒤통수를 후려치는 매력적인 미스터리임을 잘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그 많은 인물들의 살의와 살인계획을 빈틈없이 직조한 뒤 연이은 반전을 통해 예상치 못한 엔딩을 끌어낸 작가의 필력은 초반에 느낀 싱거움을 120% 무색하게 만들 정도로 대단했습니다. 2014神様’(신의 숨겨진 얼굴)로 요코미조 세이시 미스터리 대상을 수상하며 데뷔한 이후 10편 이상의 작품을 내놓았지만 한국에는 이 작품으로 처음 소개된 후지사키 쇼의 다른 작품들이 너무 궁금해졌는데, 머잖아 살의의 대담못잖은 재미와 완성도를 다시 한 번 맛볼 수 있기를 진심으로 기대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호러 미스터리 컬렉션
홍정기 지음 / 북오션 / 2022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샤이닝캐리’(스티븐 킹), ‘검은 집’(기시 유스케), ‘노조키메’(미쓰다 신조) 등 오싹함과 짜릿함을 선사하는 장편도 좋아하지만, 때론 짧고 강렬한 단편이야말로 머리를 쭈뼛하게 만드는 호러물에 제격이란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아무래도 이야기가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호러의 농도가 옅어질 수밖에 없고 이것저것 사족들이 따라붙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오로지 호러의 정수만 담은 임팩트 있는 몇 십 페이지짜리 단편이 더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건 아마 저만의 경우는 아닐 것입니다.

 

8편의 단편이 수록된 홍정기의 호러 미스터리 컬렉션은 다양한 코드들이 잘 버무려진 흥미로운 호러물입니다. 희귀하고 오래된 책에 깃든 악의가 일으킨 피의 참극(‘쓰쿠모가미’),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은 사람들을 중독시킨 신비한 약이 빚어낸 지옥도(‘Low Spirit’), 슬럼프에서 벗어나려 발버둥 치던 미스터리 작가가 겪게 된 영원한 공포(‘슬럼프’), 아들과 함께 조난된 남자에게 닥친 돌이킬 수 없는 비극(‘조난’), 아이를 갖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일으킨 기괴한 상황(‘떠도는 아이’), 남자의 몸을 숙주로 삼은 정체불명의 생명체 이야기(‘번식’) 등 한여름에 잘 어울리는 다채로운 소재와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특히 슬럼프조난은 단편영화나 단막극에 잘 어울리는 영상미까지 갖추고 있어서 눈길을 끌었고, SF 코드를 좀더 가미한다면 이야기의 깊이와 폭이 더 확장될 것으로 기대되는 ‘Low Spirit’번식도 재미있게 읽혔습니다. 11페이지에 불과하지만 단번의 반전으로 이야기를 뒤집은 미안해역시 왜 짧은 호러물이 더 인상적일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 작품입니다.

 

소재 또는 호러 그 자체에 매몰돼 정작 이야기엔 공을 덜 들인 작품들이 적지 않은데, ‘호러 미스터리 컬렉션은 수록작 대부분이 두 가지 미덕을 갖추고 있습니다. 또 트릭이나 반전의 묘미도 맛볼 수 있어서 한국 호러물 중에는 꽤 좋은 기억으로 남을 작품이란 생각입니다.

다만, 다소 가벼워 보인 문장과 서사가 아쉬웠는데, 전작인 전래 미스터리에서도 비슷한 점을 느낀 걸 보면 작가 고유의 스타일인 듯 싶긴 합니다. (개인적으로 한국 장르물에서 가장 부족해 보이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독자들로 하여금 매년 여름 홍정기의 호러물을 기다리게 만들려면 문학성까진 아니어도 좀더 묵직한 문장과 표현으로 무장하기를 조심스레 바라고 싶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