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계단 - 제47회 에도가와 란포상 수상작 밀리언셀러 클럽 29
다카노 가즈아키 지음 / 황금가지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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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해치사로 복역 중 가석방된 27세 미카미 준이치는 교도소 간수장 난고 쇼지로부터 의외의 제안을 받습니다. 익명의 독지가가 거액의 성공보수를 내걸고 사형수 사카키바라의 무죄 입증을 의뢰해왔는데 그 일을 함께 하자는 것입니다. 피해자 유족에게 엄청난 배상을 하느라 집안이 몰락한 사실에 죄책감을 느끼던 준이치는 순전히 거액의 성공보수만 보고 뛰어들었지만, 조사를 진행하면 할수록 누군가 사카키바라에게 죄를 뒤집어씌웠다는 확신을 갖게 됩니다. 사형집행까지는 단 3개월. 준이치는 난고와 함께 진범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합니다. 그리고 난고가 왜 이 일을 맡은 건지, 또 자신을 끌어들인 이유가 뭔지 조금씩 깨닫게 됩니다.

 

다카노 가즈아키의 데뷔작이자 47회 에도가와 란포상 수상작인 ‘13계단을 처음 읽은 건 일본 미스터리에 막 빠져들기 시작했던 2000년대 중반입니다. 미미 여사와 히가시노 게이고로 입문한 뒤 일본 작가들에게 관심을 두던 중 ‘13계단을 읽고 다카노 가즈아키에게 반해 그 뒤로 그레이브 디거’, ‘6시간 후 너는 죽는다’, ‘제노사이드까지 연이어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서평을 쓰지 않던 시절이라 애매한 기억만 남아있었지만 오랜만에 다시 읽은 ‘13계단은 에도가와 란포상 만장일치 수상작이라는 명성에 걸맞은 대단한 힘과 재미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야기의 골자는 주인공들이 한 사형수의 무죄를 밝혀내는 전형적인 원죄 미스터리지만, ‘13계단의 가장 큰 특징은 두 주인공이 각각 가석방된 상해치사범과 교도소 간수장이란 점입니다. 준이치의 경우 우발적인 몸싸움 끝에 의도치 않은 살인을 저지르긴 했지만 어쨌든 사람의 목숨을 빼앗은 적이 있는 살인자입니다. 간수장인 난고의 경우 두 번의 사형집행에 참여했던 트라우마, 즉 합법적인 과정이긴 했어도 사람을 죽였다.”는 평생 지워지지 않을 상처를 지니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사형수의 무죄를 밝혀내는 미션을 사람을 죽인 적 있는 두 사람이 수행한다는, 무척 역설적인 설정인 셈입니다.

 

이와 같은 주인공 캐릭터는 흔한 원죄 미스터리를 넘어 사형제도 전반에 대한 통찰과 죄인에 대한 극단적인 대처법(처벌 vs 갱생)에 대한 논쟁 등 진지하고 묵직한 주제를 다루기 위한 특별하고도 의미 있는 설정입니다. 교도소 간수장인 난고는 두 번의 사형집행 이후 불면과 악몽에 시달리다가 가정이 깨질 위기까지 겪었고, 스스로도 더 이상 간수장으로 일할 마음이 사라진 상태입니다. 그런 난고가 사표를 낼 각오로 사카키바라의 무죄 입증 의뢰를 받아들인 건 그를 구함으로써 과거 두 번의 살인을 속죄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반면, 성공보수만 바라고 가담했던 준이치는 자신이 저지른 살인의 죗값을 새삼 절감하는 한편 사형제도의 모순이라든가 갱생이란 가능한가?” 등 스스로에 대해 수없이 자문하는 시간을 갖게 됩니다.

 

두 주인공의 활약과 함께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게 정당하냐?”는 사형제도에 관한 1차적인 논란은 물론 사형집행에 가담한 수많은 사람들(검찰, 법원, 법무부 관료, 교도소 관계자)이 겪는 고뇌와 갈등까지 다루고 있어서 주제의 폭이 남달라 보였습니다. 또한 제목에 들어간 13이란 숫자는 사형 판결 선고 이후 집행까지의 절차 횟수이자 사형집행 서류에 결재할 관료들의 인원 수를 의미한다는 점에서 작가의 의도를 더없이 잘 반영한 제목이란 생각입니다.

 

주제의식을 강하게 소구하는 작품인 건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13계단이 딱딱하고 재미없다는 뜻은 절대 아닙니다. 오히려 긴박한 상황과 예측불허의 반전들, 그리고 뒤늦게 밝혀지는 사건의 진상 등 미스터리의 재미에 관한 한 별 다섯 개도 부족할 만큼 뛰어난 작품입니다. 준이치와 난고는 거듭 유력한 범인을 추정하지만 번번이 막다른 장벽에 부딪히곤 합니다. 결정적인 순간에는 오히려 경찰의 추격을 받기도 하고, 진상을 밝혀낸 순간에 목숨을 잃을 위기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대목마다 작가가 하고 싶은 말들이 절묘하고 진하게 배어있습니다. 말하자면 재미와 주제의식이 가장 이상적으로 배합된 작품이라고 할까요?

 

서평을 남기지 못했거나 남기긴 했어도 읽은 지 한참 된 다카노 가즈아키의 몇몇 작품들을 계속 읽어나갈 생각입니다. 무슨 이유에선지 2013‘KN의 비극을 마지막으로 그의 작품이 더는 한국에 소개되지 않아서 무척 아쉬운데, 이미 읽었던 작품들을 다시 읽으면서 그 아쉬움들을 달래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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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종자 2 - 상극 타카시로 시리즈
도바 순이치 지음, 한성례 옮김 / 태동출판사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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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5살 중학생의 신고를 받은 실종자 수사과 3분실 형사 타카시로 켄고는 여중생 노조미 실종사건을 맡습니다. 애초 사건성 자체가 불분명했지만 가출할 이유가 전혀 없다는 친구들의 진술과 딸이 사라졌는데도 조금도 동요하지 않은 채 수사를 회피하는 듯한 부모의 태도 때문에 타카시로는 더더욱 사건에 매달립니다. 그러던 중 동료들이 진행하던 상해사건 목격자 실종사건과 노조미 실종사건 사이의 접점을 발견한데다 노조미의 아버지가 감춰온 가족의 비밀을 알아낸 타카시로는 유괴와 납치의 가능성에 비중을 두고 수사에 박차를 가합니다.

 

타카시로 시리즈또는 실종자 수사과 시리즈로 알려진 도바 슌이치의 작품으로, 약혼자의 실종을 다룬 1실종자 1 : 식죄의 후속작입니다. 일본 원작과 국내 두 출판사에서 지은 번역제목이 모두 제각각이라 좀 복잡해 보이는데, 1편의 경우 일본 원제는 식죄(蝕罪, 죄로 인해 썩어 들어간 상처)지만, 한국에서는 실종자 1’, ‘사라진 약혼자, 2편의 경우 일본 원제는 상극(相剋)이지만, 한국에서는 실종자 2’, ‘사라진 여중생으로 출간됐습니다. 이후 3편과 4편은 각각 사라진 대학 이사장’, ‘사라진 베스트셀러 작가라는 번역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판권 부분에 표기된 작가 이름은 Doba Shunichi인데, 한 출판사는 슌이치대신 순이치로 표기했으니 인터넷 서점에서 검색할 때 두 이름을 모두 찾아봐야 합니다.)

 

죽음보다 더 잔혹한 공중에 매달린 상태’”라는 점에서 실종은 생사가 확인되기 전까지 주위사람들의 모든 것을 잠식하는 끔찍한 범죄입니다. 특히 실종자의 가족은 좀처럼 사건으로 인정하지 않는 경찰의 초기대응 때문에 속이 썩어 문드러지는 고통을 받기도 합니다. 그런 점에서 실종은 그 어떤 강력사건보다 비중 있게 다뤄져야 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잘 모르겠지만) 45살의 베테랑 형사 타카시로가 속한 일본 경찰청 실종자 수사과는 마지못해 만들어진 전시행정의 산물이자 동료들로부터도 짐짝또는 쓸모없는 맹장취급을 받는 조직입니다. 실제로 구성원 면면을 살펴보면 상부에게 밉보였거나 나사 하나쯤 빠진 듯 문제가 있거나 몸에 이상이 있는 말년형사로 채워져 있는데, 평소에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듯한 그들이지만 정작 실종사건 수사에 임할 때는 그 어떤 엘리트 팀보다 더 열정적으로 움직이곤 합니다.

 

타카시로가 뛰어든 여중생 노조미 실종사건은 애초 사건성 자체가 부족합니다. 부모조차 경찰의 수사를 회피하는 탓에 노조미에 관한 세세한 정보를 알아내기 위한 타카시로의 탐문 행보는 속이 터질 만큼 답답하고 느리게 이뤄집니다. 어렵게 찾아낸 작은 단서들을 이어 붙여 사건의 큰 그림을 그려내고 별개처럼 보이던 상해사건 목격자 실종사건과의 연관성까지 찾아내긴 하지만, 거기에 이를 때까지 타카시로가 겪은 고난은 실종사건 수사가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또 집요함 이상의 사명감 없이는 절대 불가능한 일임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하지만 타카시로를 움직이는 힘은 절대 사명감이 아닙니다. 7년 전 행방불명된 당시 7살이던 딸 아야나는 아직도 생사를 확인할 길이 없고, 그 사건으로 인해 타카시로의 가정은 완전히 해체되고 말았습니다. 이후 술과 담배에 찌들어 경시청 수사1과에서 쫓겨난 타카시로는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인 상태에서 실종자 수사과에 배속됐고, 이후 다른 사람과는 전혀 다른 마음가짐으로 실종사건 수사에 나서게 된 것입니다. 수시로 눈앞에 어른거리는 아야나의 망상은 지친 타카시로에게는 위안이자 격려이자 죄책감의 근원입니다. 사명감과는 전혀 다른 그 무언가가 타카시로를 움직이게 만든다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타카시로 외에 각자 사연을 가진 실종사 수사과 멤버들의 이야기도 눈길을 끄는데, 1편에서 타카시로와 묘한 케미를 발휘하며 수사를 이끈 27세의 묘진 메구미가 뒤로 한 발 물러선 대신 이번에는 전직 프로야구 선수였다가 부상으로 은퇴한 뒤 경찰이 된 35세의 다이고 루이가 중요한 역할을 맡습니다. 언제 심장이 멈춰도 이상하지 않지만 적극적으로 현장을 누비는 말년형사 노리즈키 다이치와 실적을 올려 다시 한 번 조직 내 주류에 편입하려는 아비루 마유미 실장 역시 매력적인 캐릭터입니다.

 

사건 규모에 비해 450페이지에 가까운 분량이 좀 과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지루할 정도로 집요한 탐문이 대부분이라 성질 급한 독자에겐 안 맞을 수도 있지만, 개인적으론 실종사건 수사의 교과서라고 해도 될 만큼 내실이 탄탄한 작품이란 생각입니다. 사건 자체도 꼼꼼하고 정교하게 묘사됐지만 타카시로를 비롯한 사건 관련자들의 심리와 내면을 섬세하면서도 찰지게 그려냈기 때문입니다. 사건보다 캐릭터에 더 빨려 들어갈 수 있는 작품이랄까요?

 

도바 슌이치는 (2013년에 마무리된 것으로 보이는) 10편의 타카시로 시리즈를 포함하여 최근까지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지만, 한국에 소개된 건 4편의 타카시로 시리즈3편의 나루사와 료 시리즈’, 그리고 스포츠소설 오심이 전부이고 2014년 이후론 전혀 소식이 없습니다. 대중성과 완성도를 겸비한 작가라서 출판사들이 욕심을 낼 법도 한데 그저 아쉽고 의아할 뿐입니다. 언젠가 그의 작품들이 한두 편씩이라도 한국에 소개되기를 기대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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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한 강 캐트린 댄스 시리즈
제프리 디버 지음, 최필원 옮김 / 비채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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캘리포니아 연방수사국 CBI 특별수사관인 캐트린 댄스는 경찰국과 마약단속국 베테랑까지 포함된 대책본부에서 갱단 수사를 벌이던 도중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른 탓에 서류 업무만 전담하는 부서로 좌천됩니다. 하지만 그녀는 첫 임무에서 사건성을 밝혀냈고, 동일범에 의한 동종수법 사건이 연이어 벌어지자 비공식적으로 수사권을 되찾아옵니다. 피해자들을 직접 죽이진 않지만 극도의 공포심을 갖게 만들어 알아서 죽게 만드는가공할 범행수법에 댄스와 수사진은 경악합니다. 클럽, 카페, 병원 등 사람들이 밀집한 곳에서만 사건이 일어난 탓에 수많은 사상자가 나왔지만 수사는 좀처럼 앞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댄스는 누군가 피해자들의 비극을 구경거리로 삼기 위해 범행을 저질렀음을 감지하고 큰 충격에 빠집니다.

 

고독한 강‘XO’ 이후 5년 만에 출간된 캐트린 댄스 시리즈신작입니다. 현지 출간은 ‘XO’2012, ‘고독한 강2015년이니 한국 독자에겐 너무 야박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늦게 소개된 셈입니다. 그래도 기다렸던 만큼 신작 소식이 반가웠고 이른바 인간 거짓말탐지기라는 별명을 가진 캐트린 댄스가 어떤 활약을 펼칠지 무척 기대된 것 역시 사실입니다.

 

동작학, 즉 상대의 몸짓 언어를 통해 그의 진술의 진위 여부를 파악하는 것은 물론 말하지 않은 사실들까지 파악해내는 특별한 재능을 지닌 댄스는 이번에도 그녀의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합니다. 특히 이번 작품에서 댄스는 700페이지에 육박하는 분량에 걸맞게 다양한 사건과 상황들을 마주하게 되는데, 그 때문에 그녀의 인간 거짓말탐지기재능은 용의자는 물론 동료, 연인, 가족 등 상대를 가리지 않고 수시로 작동하게 됩니다.

 

메인 사건은 극도의 공포심을 조장해 사람들을 알아서 죽게 만드는희대의 연쇄살인마를 쫓는 것이지만, (좌천되기 전까지 댄스가 주력했던) 무기와 마약을 거래하는 대규모 갱단 소탕작전이 적잖은 비중으로 병행됩니다. 또 질풍노도의 시기에 접어든 아들 웨스와 딸 매기와의 갈등, 재혼까지 고려중인 연인 존 볼링과의 관계 등 댄스 본인의 개인사도 흥미진진하게 전개돼서 벽돌책에 가까운 분량을 지루할 틈 없이 꽉 채워주고 있습니다.

 

스너프 필름 제작자와의 치열한 두뇌 싸움!”이라는 홍보카피가 붙긴 했지만 엄밀히 말하면 스너프 필름을 훨씬 뛰어넘는 잔혹한 사디즘 광신도와의 대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살인과 강간은 물론 전쟁터, 수술실, 대재난 현장 등 끔찍하거나 역겨운 상황을 담은 영상에 심취한 자들은 이미 업로드된 영상을 돈을 내고 다운받기도 하지만, 특정한 시나리오를 요구하며 사건을 일으킬 것을 의뢰하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내가 요구하는 방식대로 사람들을 죽이면서 그 장면을 고화질 카메라로 촬영하라.”는 것입니다. 이 가공할 범죄의 진범은 처음부터 독자에게 공개됩니다. 주체할 수 없는 살인욕구에 휩싸인 지독한 소시오패스인 그가 궁극적으로 노리는 것은 자신을 추격하는 매력적인 요원 캐트린 댄스입니다.

 

메인 사건이 카리스마 넘치는 주인공 대 통제 불능의 소시오패스의 대결이라는 전형적인 구도로 전개된다면, 나머지 사건과 상황들 - 갱단 소탕작전, 댄스의 아들과 딸의 갈등, 댄스의 로맨스 은 모두 막판에 짜릿한 반전을 이끌어내며 마무리됩니다. 중반까지만 해도 다소 사족처럼 읽혔던 이야기들이 하나씩 복선을 회수하며 반전으로 이어진 덕분에 새삼 제프리 디버의 정교한 설계도에 감탄하게 됐는데, 다소 단조로워 보였던 메인 사건의 아쉬움이 충분히 상쇄되고도 남을 만큼 매력적인 구성이었다는 생각입니다.

 

사족에 가깝지만, 꼭 하고 싶은 이야기는 제목에 관한 것입니다. 이 작품의 원제는 ‘Solitude Creek’입니다. 첫 사건이 벌어진 클럽의 이름이자 그 일대를 흐르는 지류의 이름인데, 고유명사라는 점에서 원제를 그대로 썼더라면 좋았을 거란 생각입니다. 무엇보다 작품 속에서 고독한 강이라고 언급되는 부분이 하필 일본 이민세대의 과거사와 관련된 대목 한 군데밖에 없는데다 작품 전체의 주제나 의미와 아무 관련이 없기 때문입니다. 일본어판이라면 모를까 한국어판에 굳이 고유명사를 번역까지 해서 제목을 붙인 점 때문에 재미있게 읽고도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개운치 않은 기분을 느낀 게 솔직함 심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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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의가 모이는 밤
니시자와 야스히코 지음, 주자덕 옮김 / 아프로스미디어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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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이 북상 중인 가운데 M대학 2학년인 마리와 소노코는 A고원에 자리 한 미노리 교수의 호화별장을 찾습니다. 하지만 교수 부부 대신 이오스미라는 청년 홀로 별장을 지키고 있는 가운데 산사태로 상하행길이 모두 막히자 마리와 소노코는 당황합니다. 더구나 폭우와 바람을 피하려는 낯선 자들이 연이어 별장을 찾아와 하룻밤을 함께 보내게 되자 어색한 분위기는 극에 달합니다. 그리고 깊은 새벽, 잠 못 들던 마리는 어처구니없게도 사고, 과실, 정당방위 등 갖가지 이유로 순식간에 도미노 살인을 저지르고 맙니다. 그 와중에 함께 온 소노코가 누군가에게 살해된 걸 발견한 마리는 자신의 도미노 살인을 소노코 살해범에게 뒤집어씌우기로 결심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추리를 거듭해도 소노코를 죽인 범인은 오리무중일 뿐입니다.

 

2013일곱 번 죽은 남자를 읽은 뒤 홀딱 빠져 닷쿠&다카치 시리즈를 포함, 한동안 니시자와 야스히코의 작품을 탐독한 적이 있습니다. 그 뒤로 출간 소식이 뜸해져서 무척 아쉬웠는데, 2019년에 나온 끝없는 살인은 재미있긴 해도 기대에 살짝 못 미쳤고, 다시 3년이 지나 만난 새 작품은 오랜만에 니시자와 야스히코의 명품 미스터리를 제대로 맛보게 해줬습니다.

 

이야기는 크게 두 갈래로 전개됩니다. 하나는 호화별장에서 엉겁결에 도미노 살인을 저지른 마리가 자신의 죄를 뒤집어씌울 소노코 살해범을 찾는 것이고, 또 하나는 D경찰서의 중년형사 미모로가 (자신이 직접 목격했지만 불가피한 사정으로 바로 체포할 수 없었던) 호스티스 살해범을 찾는 것입니다. 별개의 사건처럼 흘러가던 두 이야기는 중반부쯤 접점을 갖게 되고, 마리와 미모로는 마지막에 이르러 태풍이 몰아치는 호화별장 앞에서 극적으로 마주치게 됩니다.

 

밀실이나 다름없는 호화별장에서 벌어진 연속살인을 다룬 마리의 이야기는 숨 돌릴 틈도 없이 팽팽하게 전개됩니다. 하지만 마리가 자신의 범행을 뒤집어쓸 소노코 살해범을 찾아 급박하게 추리를 펼치는 장면은 아이러니하게도 공포와 코믹 코드가 한데 어우러져있어서 닷쿠&다카치 시리즈가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또 독자로 하여금 살인자를 응원해야 되나?”라는 딜레마와 함께 과연 소노코 살해범이 누구인지 궁금하게 만드는 흥미진진한 구도를 갖추고 있습니다.

반면, 형사 미모로가 호스티스 살해범을 쫓는 이야기는 굉장히 무겁고 음침한 분위기를 발산합니다. 트라우마, 욕망, 집착 등 어둡고 끈적끈적한 것들로 채워진 듯한 미모로의 캐릭터는 페이지를 넘길수록 괴담 혹은 호러물의 색채를 더해 가는데, 마지막에 밝혀진 미모로의 진짜 속내와 정체는 호스티스 살인사건의 진실과 함께 짜릿한 반전을 이뤄냅니다.

 

후반에 실린 작가 후기가 무척 재미있었는데, 그에 따르면 니시자와 야스히코는 이 작품에 대해 터무니없는 짓, 품위 없는 작풍(作風), 결점투성이, 젊음의 소치라면서도 동시에 이 작품이 가장 니시자와 야스히코다운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소회를 밝혔습니다. 실은 살의가 모이는 밤은 니시자와 야스히코의 통산 네 번째(1996)이자, 대표작인 일곱 번 죽은 남자직후에 나온 작품입니다. 전작의 부담감에 짓눌렸던 심정, 하지만 전작을 능가하는 미스터리를 위해 고민했던 그의 노력과 자신감을 잘 대변한 작가 후기인 셈인데, 개인적으로도 이 작품은 일곱 번 죽은 남자에 필적하는 재미와 완성도를 지녔다는 생각입니다.

 

다 읽고 나면 살의가 모이는 밤’(원제 殺意)이란 제목이 얼마나 함축적이고 적절한지, 또 우연과 필연이 겹쳐졌을 때 일어날 수 있는, 너무나도 황당하지만 동시에 피할 수 없는 운명 같은 사건들을 잘 집약한 제목인지 실감할 수 있습니다. “1페이지의 첫 줄부터 마지막 페이지에 이르기까지의 기술이 전부 복선이 되어, 마지막 한 줄에서 밝혀지는 것.”을 이상적인 미스터리로 여긴 니시자와 야스히코의 논리 퍼즐의 진수를 맛볼 수 있는 작품이라, 그를 처음 만나는 독자에게 적극 추천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방대한 저작에 비해 한국에서 출간된 건 이 작품까지 단 아홉 편뿐인데, 중도에 포기할 정도로 취향이 안 맞는 작품도 있긴 했지만, 앞으로도 니시자와 야스히코의 작품이 꾸준히 한국독자들에게 소개됐으면 좋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사족이지만, 혹시 마지막 페이지의 반전이 잘 이해가 안 된다면 맨 앞장부터 찬찬히 복기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아 반전의 단서가 눈에 확 들어올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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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러드 온 스노우 Oslo 1970 Series 1
요 네스뵈 지음, 노진선 옮김 / 비채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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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를 목전에 둔 1975년의 오슬로. 킬러 올라브 요한센은 보스인 호프만으로부터 아내 코리나를 살해하라는 뜻밖의 지시를 받지만 언제나처럼 묵묵히 임무에 임합니다. 하지만 그녀를 감시하던 올라브는 품어선 안 될 감정을 품게 됐고, 넘어선 안 될 선을 넘고 맙니다. 어느 밤, 무엇 하나 추억할 것도, 간직할 것도 없는 과거와 완전히 결별하기로 한 올라브는 중요한 결정을 내립니다. 누구를 죽일 것인지, 누구와 함께 할 것인지, 어디로 도망칠 것인지...

 

블러드 온 스노우2015년 출판사에서 보내준 교정지를 읽고 줄거리 하나 없는 짧은 서평만 남겼던 작품입니다. 이후 정식 출간된 책을 받았지만 다시 읽을 생각을 못하고 책장에 꽂아두었는데, 거의 7년 만에 그동안 쌓인 먼지를 털어주게 됐습니다.

이 작품은 직후에 출간된 미드나잇 선과 함께 오슬로 1970 시리즈로 불립니다. 두 작품 모두 1970년대의 오슬로를 배경으로 한 누아르-스릴러로 해리 홀레 시리즈는 물론 요 네스뵈의 그 어떤 스탠드얼론에서도 맛볼 수 없는 독특한 풍미가 넘쳐나는 작품들입니다.

 

가장 눈에 띄는 건 일단 분량입니다. 매번 600~700페이지가 예사인 요 네스뵈가 200페이지에 불과한 스릴러를 썼다는 것 자체가 놀랍기도 하고, 비행기 안에서 12시간 만에 집필을 끝냈다는 점은 가히 전설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사심을 담아 해석하자면 그만큼 밀도도 높고 빈틈도 없으며, 주인공과 이야기를 향한 작가의 몰입도가 엄청났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출판사 소개글대로 그 짧은 분량 속에서도 고독한 분위기의 하드보일드에서 하드코어 스릴러로, 그리고 슬픈 로맨스로끊임없이 몸을 바꿉니다.

 

두 번째로 눈길을 끈 건 지독히도 시니컬하거나 생각나는 대로 툭툭 내뱉는 인상을 풍기는 요 네스뵈답지 않은 문장들입니다. “마음껏 망가지려고 작정한 듯 펄프 픽션이 갖는 싸구려 정서의 진수를 보여준다. 전개는 막장 같고, 분위기는 선정적이고, 피가 튀는 장면에서도 어쩐지 실소를 금할 수 없다옮긴이의 말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이 시니컬함과 싸구려 정서가 묘하게도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그리고 빈틈 하나 없는 냉정한 킬러이면서 동시에 어딘가 나사 하나가 빠진 듯한 모지리같은 주인공 올라브는 그 분위기에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캐릭터라 더욱 돋보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평범한 운전엔 재주가 없어서 도주차량 운전도 못하고, 은행강도는 적성에 맞지 않으며, 셈이 약해 마약 판매 일도 못하는데다, 너무 쉽게 사랑에 빠지는 바람에 매춘부 관련 일도 하지 못하는 게 올라브의 자화상입니다. 하지만 그런 그가 오슬로 마약시장을 양분하고 있는 호프만의 신뢰를 받는 킬러가 될 수 있었던 건 그만의 특별하고 전문적인 재능 덕분입니다. 그런데 그 재능의 뿌리는 (요 네스뵈 주인공들의 공통점 중 하나인) 저주받은 유년기의 트라우마에서 자라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또 난독증에도 불구하고 닥치는 대로 책을 읽으면서도 정작 원작의 지루한 부분들을 해체하고 대신 자신만의 이야기를 지어내는 그만의 독특한 취미 역시 고독한 킬러인 그의 정신을 지탱하는 중요한 기둥이기도 합니다. 그런 그가 킬러로서의 삶을 폐기하고 선택한 금지된 사랑은 과연 어떤 엔딩을 맞이하게 될까요?

 

7년 전에 교정지를 읽고 쓴 짧은 서평에 영화 ‘L.A 컨피덴셜과 홍콩의 느와르 영화들이 연상됐다. 한겨울 오슬로의 뒷골목을 무대로 한 비정한 액션과 애틋한 로맨스의 조화랄까?”라는 문구가 있는데, 딱 이만큼이 스포일러 없는 소개글 정도가 될 것 같습니다. 출판사가 공개한 자신이 죽여야 할 보스의 아내와 사랑에 빠진 킬러라는 카피와 조합하면 누구나 대략적인 줄거리는 쉽게 연상할 수 있겠지만, 요 네스뵈가 그렇게 허술하고 뻔한 이야기로 마무리했을 리는 없습니다. 영상으로 만들어진다면 오래 기억에 남을 엔딩이 기다리고 있으니 블러드 온 스노우를 그저 그런 킬러 스릴러로 예단하는 일은 없기를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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