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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의가 모이는 밤
니시자와 야스히코 지음, 주자덕 옮김 / 아프로스미디어 / 2022년 5월
평점 :
태풍이 북상 중인 가운데 M대학 2학년인 마리와 소노코는 A고원에 자리 한 미노리 교수의 호화별장을 찾습니다. 하지만 교수 부부 대신 이오스미라는 청년 홀로 별장을 지키고 있는 가운데 산사태로 상하행길이 모두 막히자 마리와 소노코는 당황합니다. 더구나 폭우와 바람을 피하려는 낯선 자들이 연이어 별장을 찾아와 하룻밤을 함께 보내게 되자 어색한 분위기는 극에 달합니다. 그리고 깊은 새벽, 잠 못 들던 마리는 어처구니없게도 사고, 과실, 정당방위 등 갖가지 이유로 순식간에 도미노 살인을 저지르고 맙니다. 그 와중에 함께 온 소노코가 누군가에게 살해된 걸 발견한 마리는 자신의 도미노 살인을 소노코 살해범에게 뒤집어씌우기로 결심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추리를 거듭해도 소노코를 죽인 범인은 오리무중일 뿐입니다.
2013년 ‘일곱 번 죽은 남자’를 읽은 뒤 홀딱 빠져 ‘닷쿠&다카치 시리즈’를 포함, 한동안 니시자와 야스히코의 작품을 탐독한 적이 있습니다. 그 뒤로 출간 소식이 뜸해져서 무척 아쉬웠는데, 2019년에 나온 ‘끝없는 살인’은 재미있긴 해도 기대에 살짝 못 미쳤고, 다시 3년이 지나 만난 새 작품은 오랜만에 니시자와 야스히코의 명품 미스터리를 제대로 맛보게 해줬습니다.
이야기는 크게 두 갈래로 전개됩니다. 하나는 호화별장에서 엉겁결에 도미노 살인을 저지른 마리가 자신의 죄를 뒤집어씌울 소노코 살해범을 찾는 것이고, 또 하나는 D경찰서의 중년형사 미모로가 (자신이 직접 목격했지만 불가피한 사정으로 바로 체포할 수 없었던) 호스티스 살해범을 찾는 것입니다. 별개의 사건처럼 흘러가던 두 이야기는 중반부쯤 접점을 갖게 되고, 마리와 미모로는 마지막에 이르러 태풍이 몰아치는 호화별장 앞에서 극적으로 마주치게 됩니다.
밀실이나 다름없는 호화별장에서 벌어진 연속살인을 다룬 마리의 이야기는 숨 돌릴 틈도 없이 팽팽하게 전개됩니다. 하지만 마리가 자신의 범행을 뒤집어쓸 소노코 살해범을 찾아 급박하게 추리를 펼치는 장면은 아이러니하게도 공포와 코믹 코드가 한데 어우러져있어서 ‘닷쿠&다카치 시리즈’가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또 독자로 하여금 “살인자를 응원해야 되나?”라는 딜레마와 함께 과연 소노코 살해범이 누구인지 궁금하게 만드는 흥미진진한 구도를 갖추고 있습니다.
반면, 형사 미모로가 호스티스 살해범을 쫓는 이야기는 굉장히 무겁고 음침한 분위기를 발산합니다. 트라우마, 욕망, 집착 등 어둡고 끈적끈적한 것들로 채워진 듯한 미모로의 캐릭터는 페이지를 넘길수록 괴담 혹은 호러물의 색채를 더해 가는데, 마지막에 밝혀진 미모로의 진짜 속내와 정체는 호스티스 살인사건의 진실과 함께 짜릿한 반전을 이뤄냅니다.
후반에 실린 ‘작가 후기’가 무척 재미있었는데, 그에 따르면 니시자와 야스히코는 이 작품에 대해 “터무니없는 짓, 품위 없는 작풍(作風), 결점투성이, 젊음의 소치”라면서도 동시에 “이 작품이 ‘가장 니시자와 야스히코다운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소회를 밝혔습니다. 실은 ‘살의가 모이는 밤’은 니시자와 야스히코의 통산 네 번째(1996년)이자, 대표작인 ‘일곱 번 죽은 남자’ 직후에 나온 작품입니다. 전작의 부담감에 짓눌렸던 심정, 하지만 전작을 능가하는 미스터리를 위해 고민했던 그의 노력과 자신감을 잘 대변한 ‘작가 후기’인 셈인데, 개인적으로도 이 작품은 ‘일곱 번 죽은 남자’에 필적하는 재미와 완성도를 지녔다는 생각입니다.
다 읽고 나면 ‘살의가 모이는 밤’(원제 殺意の集う夜)이란 제목이 얼마나 함축적이고 적절한지, 또 우연과 필연이 겹쳐졌을 때 일어날 수 있는, 너무나도 황당하지만 동시에 피할 수 없는 운명 같은 사건들을 잘 집약한 제목인지 실감할 수 있습니다. 또 “1페이지의 첫 줄부터 마지막 페이지에 이르기까지의 기술이 전부 복선이 되어, 마지막 한 줄에서 밝혀지는 것.”을 이상적인 미스터리로 여긴 니시자와 야스히코의 논리 퍼즐의 진수를 맛볼 수 있는 작품이라, 그를 처음 만나는 독자에게 적극 추천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방대한 저작에 비해 한국에서 출간된 건 이 작품까지 단 아홉 편뿐인데, 중도에 포기할 정도로 취향이 안 맞는 작품도 있긴 했지만, 앞으로도 니시자와 야스히코의 작품이 꾸준히 한국독자들에게 소개됐으면 좋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사족이지만, 혹시 마지막 페이지의 반전이 잘 이해가 안 된다면 맨 앞장부터 찬찬히 복기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아 반전의 단서가 눈에 확 들어올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