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더 크라임 이판사판
덴도 아라타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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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중년남성이 알몸의 사체로 발견됩니다. 그의 몸에선 눈에는 눈이라는 범인의 메시지가 발견되고, 이내 그가 3년 전 집단 성폭행 사건의 범인 중 한 명의 아버지로 밝혀지면서 경찰은 피해 여대생과 그녀의 가족을 주시합니다. 당시 경찰 고위직과 정치권 인사가 압력을 행사한 끝에 검찰은 기소를 포기했고 범인들은 유유히 법망을 벗어났지만 피해자와 그 가족은 사죄 한 번 받지 못한 채 지옥과도 같은 삶을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관할서 베테랑 형사 구라오카는 본청 수사1과의 루키 시바 린리와 파트너가 되어 수사에 나서지만, 3년이나 지나 복수에 나선 건지, 또 성폭행범이 아니라 그의 아버지를 살해한 이유는 무엇인지 알 수 없어 답답할 따름입니다.

 


그것은 여자라는 성을 무의식중에 낮춰보기 때문이겠죠. 성범죄라고 해도, 겨우 그것쯤이야, 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죠.” (p283)

 

젠더 크라임이라는 제목과 표지 속 ‘Stop killing women’이라는 메시지에서 짐작할 수 있듯 이 작품은 갖가지 여성 대상 범죄의 실상을 폭로하고 그런 범죄를 양산하고 비호하는 사회적 토양을 정면으로 비판합니다. 3년 전 성범죄에 대한 복수로 보이는 살인사건을 추적하는 미스터리로 출발하지만 딥 페이크, 아동 포르노, 가정폭력, 데이트폭력, 성희롱, 강간 등 여성을 먹잇감이나 장난감으로 여기는 추악한 범죄들이 메인 사건 못잖은 비중으로 다뤄지고, “성에 관한 편향된 생각이나 무자각적인 차별의식, 예로부터 내려온 왜곡된 성문화가 모든 여성 상대 범죄의 근원이라는 점을 돌직구처럼 강조하고 있어서 단순한 사회파 미스터리 이상의 울림을 품고 있습니다.

 

경찰은 성범죄를 수사하는 주체이기도 하지만, 남성 중심으로 돌아가는 조직이다 보니 의도적이든 아니든 성차별이 만연한 곳이기도 합니다. 주인공인 베테랑 형사 구라오카는 그런 이율배반적인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인데, 성범죄에 관한 한 누구보다 단호한 입장을 취하면서도 정작 그 자신이 무의식적으로 가부장적이고 성차별적 언행을 저지른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합니다. 그런 그가 요즘 젊은이같으면서도 바른생활 남자처럼 올바른 말만 하는 파트너 시바와 함께 수사를 진행하면서 젠더와 차별의 문제에 관해 크고 작은 깨달음을 얻는 모습은 단순히 교과서적인 계몽과는 차원이 다른, 의미 있는 경종으로 읽힙니다.

 

이 작품에서 또 한 가지 중요한 주제로 다뤄지는 건 속죄입니다. 애당초 죄를 짓는 것 자체가 잘못이지만 어떤 이유로든 죄를 지었다면 벌을 받고 속죄하는 것이 피해자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임을 덴도 아라타는 거듭 강조합니다. “한 사람의 인생을 망치고 영혼을 죽이는 것이나 다름없는 잔인한 범죄를 저지르고도 속죄를 거부했던 가해자들과 그 가족은 중년남성이 살해된 직후 뒤늦게 공포에 사로잡히면서 속죄에 관해 서로 다른 입장을 보이기 시작하고, 그렇게 촉발된 가해자들 간의 갈등은 또 다른 살인사건의 단초가 됩니다. 그 대목부터 덴도 아라타는 다소 노골적으로 주제의식을 드러내는데, 살짝 작위적인 느낌이 들긴 해도 거부감이 들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젠더 크라임이라는 제목은 한편으론 호기심을 자아내면서도, 또 한편으론 혹시나 이 작품이 젠더 문제에 관한 계몽 소설이 아닐까, 라는 의구심을 품게 만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덴도 아라타의 작품을 읽어본 독자라면 그가 결코 둘 중 어느 쪽으로도 치우지지 않을 거란 걸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젠더 크라임은 미스터리에도 충실했고, 젠더와 차별의 문제에도 진심으로 접근한 작품입니다. 그래선지 젠더의 문제에 관한 한 옛날보다 퇴보한 듯한 이즈음의 한국에서 이 작품이 널리 읽히면 좋겠다는 생각을 여러 번 해봤습니다. 북스피어 삼송 김사장님의 편집후기의 마지막 문장을 인용하며 서평을 마치겠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동의 없이 타인의 몸을 만지지 말고, 성적인 말로 상대를 불편하게 하지 말자. 그리고, 죽이지 말자.”

 

사족으로...

원래는 이 작품과 맥이 닿아있는 영원의 아이’(1999)를 먼저 읽으려 했는데, 삼송 김사장님께서는 젠더 크라임과 자신의 편집후기를 먼저 읽은 뒤 영원의 아이를 읽어보기를 권하셨습니다. 무거운 마음으로 읽어야 하는 작품이라 연이어 읽긴 부담스럽지만, 조만간 일본 문단 최대의 사건이라고까지 불렸던 영원의 아이를 꼭 읽어볼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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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지몽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 2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억관 옮김 / 재인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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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레오 시리즈의 첫 편인 탐정 갈릴레오가 과학적인 기현상에 바탕을 둔 사건들을 다뤘다면, 두 번째 작품인 예지몽꿈에서 본 소녀’, ‘영을 보다’, ‘떠드는 영혼등 수록작의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 주로 비과학적인 심령 현상과 관련된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오컬트와 미스터리의 절묘한 크로스오버!”라는 띠지 카피 역시 예지몽이 어떤 작품인지 노골적으로 암시하는데, 그래선지 경시청 수사1과 구사나기 슌페이는 동료와 상관으로부터 신비주의 사건 전문 형사라는, 놀림 아닌 놀림을 받는 처지가 되고 맙니다.

 


탐정 갈릴레오라는 별명을 가진 천재 물리학자 유가와 마나부가 시리즈 주인공답게 맹활약을 펼치는 가운데 예지몽을 꾸는 소년과 소녀, 살해당한 바로 그 시간에 다른 곳에서 살아있는 모습이 목격된 여자, ‘시끄러운 영들이 피우는 소란 탓에 건물이 뒤흔들린다는 이른바 폴터가이스트 현상 등 그야말로 순도 100%의 오컬트 소재와 미스터리 서사가 잘 배합된 이야기들이 펼쳐집니다. 물론 사건의 진상은 오컬트와는 무관한, 그야말로 과학적인 설명과 논리적인 추리로 완벽하게 입증되지만, 독자는 에피소드 초반부에 으스스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비과학적인 심령 현상에 눈길을 빼앗길 수밖에 없습니다. 도대체 이 말도 안 되는 현상을 어떻게 과학과 논리의 힘으로 파헤칠 수 있는 걸까, 라는 의문과 함께 말입니다.

 

연이어 신비주의 사건을 맡은 것도 억울하지만 도무지 해법을 찾아내지 못해 전전긍긍하는 구사나기와 시니컬하면서도 예리한 시각으로 진상을 파헤치는 유가와의 콤비 플레이는 탐정 갈릴레오에 이어 이번에도 소소한 재미와 웃음을 선사하는데, 한번쯤은 구사나기가 유가와에게 멋진 한 방을 날리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역시나 거의 전편에서 KO패를 당하고 있어서 살짝 실망스럽기도 했습니다.

 

오컬트와 미스터리의 크로스오버도 매력적이고, 미스터리 자체의 촘촘함이나 반전의 맛도 훌륭한 작품이지만, 아무래도 깊고 묵직한 서사를 구사하기 힘든 단편의 한계 때문에 이야기의 무게와 사이즈가 더 이상 확장되지 못한 점은 탐정 갈릴레오때와 마찬가지로 가장 큰 아쉬움으로 남았습니다.

다행히도 갈릴레오 다시 읽기의 다음 작품은 장편입니다. 그것도 무려 이 시리즈의 대표작이자 히가시노 게이고의 최고 명품으로 꼽히는 용의자 X의 헌신입니다. 일본 미스터리에 입문하고 얼마 안 돼 읽은 작품으로 그 진한 감흥을 깨고 싶지 않아서 일부러 한국과 일본에서 제작된 영화도 보지 않았는데, 대략 17~18년 만에 다시 읽었을 때 어떤 느낌을 받게 될지 사뭇 궁금할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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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에 귀 기울일 것
에이미 틴터라 지음, 이유림 옮김 / 북플라자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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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시 체이스가 머리에 큰 상처를 입고 피를 뒤집어쓴 채 발견되고, 인근에서 절친인 새비의 시신까지 발견되자 경찰은 누군가 두 사람을 공격한 것으로 추정합니다. 하지만 살해된 새비의 손톱에서 루시의 피부조각이 발견되고, 루시 옷에 묻은 피가 새비의 것으로 밝혀지면서 루시는 살인용의자로 몰립니다. 그러나 증거도, 목격자도, 흉기도 발견되지 않자 수사는 미궁에 빠졌고 루시는 무혐의 처분을 받은 뒤 집을 떠납니다. 5년 뒤, 미제 사건을 해결해 유명해진 한 팟캐스트가 새비 사건을 다루면서 자신을 여전히 유력한 용의자로 언급하자 루시는 큰 충격에 빠집니다. 할머니 생신을 맞아 고향을 찾은 루시는 5년 전 새비의 죽음의 진상과 정면으로 마주하기로 결심합니다.

 


초반 설정이 무척 흥미로운 작품입니다. 5년 전 살인사건에서 무혐의로 풀려난 루시 체이스가 한 팟캐스트 때문에 다시금 유력 용의자로 대두되고 인터넷은 물론 지인들에게마저 마녀사냥의 대상으로 전락하는데, 공교롭게도 그 팟캐스트를 운영하는 벤 오웬스와 함께 사건의 진상을 찾아 나선다는 이야기입니다.

 

5년 전 살인용의자로 몰렸지만 무혐의로 풀려난 루시가 지금까지 범인으로 의심받는 가장 큰 이유는 사건 당일의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루시 역시 머리에 큰 상처를 입었고 그로 인해 단기 기억상실증에 걸린 건데, 경찰은 물론 가족들조차 그 사실을 의심합니다. 문제는 루시 본인도 혹시 자신이 새비를 죽인 게 아닐까, 스스로 의심한다는 점입니다. 또한 희미하게 떠오르는 기억들 가운데 어떤 게 진짜인지 구별할 수 없었던 탓에 5년 동안 그날의 일들을 떠올리는 것을 포기해왔는데, 그런 그녀가 할머니의 생신을 계기로 5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오면서 이야기는 본론으로 진입합니다. 아직도 자신을 운 좋게 붙잡히지 않은 살인자로 여기는 인구 15,000명의 소도시 플럼튼의 불온한 공기도 불편했지만, 루시를 가장 놀라게 한 건 갑자기 자신 앞에 모습을 드러낸 팟캐스트 운영자 벤이었습니다.

 

거짓말에 귀 기울일 것은 기본적으론 살인사건 미스터리로 분류되지만, 좀더 세밀하게 분류하면 심리 스릴러, 도메스틱 스릴러, 커뮤니티 스릴러의 서사를 골고루 갖춘 작품입니다. 살해당한 새비의 환청과 환영에 시달리는데다 자신이 범인일지도 모른다는 압박감 속에 진실 찾기에 나선 루시의 복잡한 심리묘사가 중요한 축을 차지하고 있고, 루시와 가족, 루시와 남편 사이에 상존하는 갈등과 의심과 불륜과 폭력의 문제가 이야기 저변에 깔려있는가 하면, 벤의 팟캐스트에 출연하여 5년 전 사건에 대해 언급하는 플럼튼 사람들의 악의 또는 호의는 한 다리만 건너면 모르는 사람이 없는 소도시를 배경으로 한 스릴러 특유의 불안정한 분위기를 내뿜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유력한 용의자로 여기는 걸 인정하면서도 중립적인 조사를 약속한 팟캐스터 벤과의 협업은 루시에겐 일종의 도박이나 다름없는 선택인데, 그래선지 독자 입장에선 두 사람의 심리전과 케미가 사건 못잖게 흥미진진하게 읽힙니다. 벤을 믿어도 될까? 루시는 정말 아무것도 기억 못하는 걸까? 두 사람의 협력 관계는 언젠가 깨지지 않을까? 호기심과 궁금증을 자아내는 두 사람의 관계는 뜻밖의 행보를 보여서 마지막까지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사실 루시의 기억만 돌아오면 미스터리가 종결되는 구도라서 초반 설정에 비해 긴장감은 그리 팽팽하지 않습니다. 루시와 벤이 탐정 역할을 맡았지만 소극적인 탐문 외에는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서 중반부쯤엔 살짝 지루함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5년 전의 진실이 드러나는 클라이맥스는 어김없이 반전을 품고 있긴 하지만 충격과 파괴력에 있어선 살짝 기대에 못 미친 게 사실입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별 1개를 빼긴 했지만 그래도 거짓말에 귀 기울일 것은 독특한 소재와 맛깔나는 문장이 매력적인 미스터리 스릴러입니다. 관심 있는 독자라면 다른 서평들도 참고한 뒤에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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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선 - 뱃님 오시는 날
요시무라 아키라 지음, 송영경 옮김 / 북로드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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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17가구가 모여 사는 에도 시대의 작은 어촌마을엔 독특한 풍습이 있습니다. 겨울이 되어 바다가 사나워지면 뱃님이 오시기를 기원하는 의식이 열리는 것입니다. 낮에는 바닷가에 모여 합장을 하고 제물을 바치는가 하면, 밤이면 모래사장에 소금가마를 설치하고 불을 피웁니다. 언뜻 마을 앞바다를 지나는 배들의 무사 항해를 기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이 의식은 배를 암초 지대로 유인하여 난파되게끔 만드는 기만술입니다. 척박한 환경과 지독한 가난 속에 늘 생존의 위협에 시달리던 마을사람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이런 식으로 난파된 배에 실려 있는 양식과 재물을 통해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해왔고, 이제 9살이 된 이사쿠는 말로만 듣던 뱃님이 오시는 모습을 처음으로 목격하게 됩니다.

 


에도 시대를 배경으로 한 소설이라면 장르를 불문하고 좋아하지만, ‘파선은 생존을 위해 난파를 유도하는 한 어촌마을의 기괴한 풍습이란 설정 그 자체에 눈길이 끌려 출간과 동시에 장바구니에 넣은 작품입니다. 인터넷서점에선 미스터리로 분류해놓았지만 실은 호러 또는 공포물에 더 가까우며, ‘일본 기록문학의 대가요시무라 아키라의 작품답게 절반쯤은 논픽션의 향기까지 맛볼 수 있습니다.

 

섬의 끝단에 자리한데다 이웃마을을 오가는 데만 며칠이 걸릴 정도로 고립된 이사쿠의 마을은 대대로 생존의 위협에 시달려왔습니다. 부실한 땅에서 이뤄지는 농사는 잡곡 몇 가지가 전부일 뿐이고 주된 식량인 해산물 역시 해마다 들쑥날쑥인, 그야말로 살아남기엔 최악의 환경인 것입니다. 언젠지 알 수 없지만 암초투성이인 앞바다가 최초로 뱃님을 선물한 이래로 마을은 바람과 파도가 거세지는 겨울만 되면 뱃님 오시는 날을 기원하며 배의 난파를, 누군가의 죽음을, 그래서 먹고사는 문제가 최소한 몇 년은 해결되기를 간절히 바라왔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뱃님이 마을을 찾아오는 건 무척이나 드문 일입니다. 때론 몇 년씩 건너뛸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면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가족 중 누군가를 이웃마을의 고용하인으로 보내야만 합니다. 안 그러면 굶어죽는 건 시간문제이기 때문입니다.

 

9살 이사쿠가 세 번의 겨울을 지나는 동안 두 번의 뱃님을 맞이하는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이사쿠는 첫 뱃님과의 조우에서 배의 난파에 환호하고, 파선에서 획득한 식량과 재물에 눈물 흘리며, 파선의 생존자들이 마을사람들에 의해 입막음 당하는 걸 너무나도 당연하게 받아들입니다. 죽느냐 사느냐의 경계선에 선 자들에겐 도덕이나 윤리 따윈 애당초 관심 밖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 상황은 극한상황에서 인육을 먹은 자들에 관한 논쟁보다 더 극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들은 우연히 난파된 배를 기다리는 게 아니라, 명백히 난파를 유도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사쿠와 마을사람들의 3년의 시간을 지켜보는 동안 단 한 순간도 이들을 비난하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왜 뱃님이 빨리 안 오시나, 초조하게 기다리기도 했습니다. 그만큼 작가가 그린 이사쿠 마을의 비참함과 위기감이 생생했기 때문입니다.

 

이사쿠와 마을사람들의 뱃님 기다리기가 결코 해피엔딩으로 끝나지 않을 거란 건 초반부터 직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낭만적이고 정감 어린 뱃님 오시는 날이라는 부제가 실은 이사쿠와 마을사람들이 겪게 될 끔찍하고 비극적인 운명에 대한 예고라는 것도 쉽게 눈치 챌 수 있습니다. 그래선지 페이지를 넘길수록 부디 이들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를, 이라는 바람을 품게 되는데, 동시에 한편에선 오래전부터 태연히 자행되어 온 이 풍습이 과연 아무런 징벌 없이 계속 이어져도 될까, 라는 착잡한 생각이 든 것도 사실입니다.

 

240페이지의 짧은 분량이지만 주제와 서사의 무게감은 수백 페이지의 장편에 버금갑니다. 극적인 반전도 없고, 소름 돋게 만드는 공포 코드도 없지만 일본 기록문학의 대가가 담담하고 객관적인 시선으로 그려낸 이사쿠와 마을사람들의 뱃님 기다리기는 독자로 하여금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들고, 오랫동안 잊히지 않을 여운을 선사하기 때문입니다. 이 특별한 매력을 많은 독자들이 공유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사족으로... 아직 이 작품을 읽지 않은 독자라면 인터넷서점의 소개글을 읽지 말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어촌 마을의 기괴한 풍습이 초래한 잔혹 재앙의 시작이라는 카피까지는 괜찮지만 줄거리를 소개한 글에는 스포일러에 가까운 내용까지 포함돼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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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정 갈릴레오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 1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억관 옮김 / 재인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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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모태 문과인 저는 장르와 매체를 불문하고 수학이나 과학이 개입된 이야기는 (아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곤) 대체로 외면하는 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가시노 게이고의 갈릴레오 시리즈를 탐독했던 건 한국에 가장 먼저(2006) 소개됐던 용의자 X의 헌신’(시리즈 3)에 흠뻑 빠졌기 때문입니다. 실은 용의자 X의 헌신이 과학 혹은 이과 미스터리라는 사실을 모른 채 읽기 시작했고, 읽는 동안에도 전혀 거부감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에 이후 물리학 교수 유가와 마나부와 경시청 수사1과 구사나기 슌페이 콤비의 이야기가 출간되기를 간절히 바라게 됐습니다. 당시 용의자 X의 헌신은 한국에서 대박에 가까운 성적을 냈고 그 덕분에 2년 후인 2008, 시리즈 첫 편인 탐정 갈릴레오를 시작으로 순서대로 출간되기에 이르렀는데, 그때부터 새 작품이 나올 때마다 허겁지겁 읽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2024년 시리즈 8편인 금단의 마술이 출간되자 이왕이면 오랜만에 첫 편부터 순서대로 다시 읽어봐야겠다는 욕심이 들었고, 한두 편 외엔 서평도 남기지 못한 터라 2025년 독서계획에 갈릴레오 시리즈 다시 읽기를 포함시키기로 했습니다.

 


수록된 다섯 편의 단편 모두 초자연 현상이나 다름없는 기이한 사건 또는 살인인지 사고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애매한 사건을 다룹니다. 자연발화 또는 자연폭발 외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는 의문의 화재사건(‘타오르다’), 물리적으로 제작이 불가능한 금속제 마스크의 비밀(‘옮겨 붙다’), 욕조에서 발견된 사체의 가슴에 생긴 기이한 괴사 흔적(‘썩다’), 바다 밑에서 불기둥이 치솟고 수면 위로 불티가 퍼져나간 기괴한 사건(‘폭발하다’), 원래라면 볼 수 없었던 장면을 유체 이탈을 통해 본 뒤 그림으로 그려 수사진을 혼란에 빠뜨린 한 소년(‘이탈하다’) 등 하나같이 일반적인 수사와 감식으로는 해결하기 어려운 사건들이 천재 물리학자 유가와와 평범한 경시청 형사 구사나기 앞에 숙제로 등장합니다.

 

데이도 대학 동창인 유가와와 구사나기의 콤비 플레이는 아직은 시리즈 첫 편이라 그런지 약간 서먹하고 어색하게 보일 때가 더 많습니다. 대체로 천재 유가와가 범인(凡人) 구사나기를 놀려먹거나 한 수 지도하며 사건의 진상으로 이끄는 경우가 많은데, 그래선지 간혹 구사나기가 소소한 반격을 시도하는 장면에선 통쾌함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시리즈가 거듭될수록 이들의 관계에도 약간의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오랜만의 다시 읽기를 통해 두 사람의 밀당을 지켜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 될 것 같습니다.

 

이과 미스터리답게 플라스마, 충격파, 전기에너지, 마이너스 압력, 빛의 굴절 등 이야기 곳곳에서 머리 아픈 과학 용어들이 난무합니다. 하지만 히가시노 게이고는 굳이 모든 개념을 이해할 필요가 없는 대목에선 사회학부 출신인 구사나기의 입을 빌어 무슨 소린지 전혀 모르겠다.”는 조언을 해줌으로써 모태 문과인 저의 부담감을 덜어주곤 합니다. 동시에 상식 수준의 간단한 실험들을 통해 미처 몰랐던 과학세계의 흥미로운 일면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마치 초중등 시절의 과학시간에 신기한 현상을 직접 목격하며 감탄했던 경험과 비슷하다고 할까요? 반면 때론 과학이야말로 가장 확실한 완전범죄 도구라는 깨달음까지 얻게 해서 섬뜩한 느낌을 받은 적도 여러 번 있습니다.

 

확실하진 않지만, 한국에 가장 먼저 소개된 용의자 X의 헌신의 인상이 너무 강렬해서 그 뒤에 출간된 갈릴레오 시리즈는 다소 밍밍하고 아쉬운 기분으로 읽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하지만 15년도 더 지난 시점에 다시 읽은 탐정 갈릴레오는 마치 추억이 깃든 고전과도 같아서 약점이나 아쉬운 점보다는 흐뭇한 정감 같은 게 더 강하게 느껴졌습니다. ‘용의자 X의 헌신과 아직 읽어보지 못한 최근작 금단의 마술을 제외하곤 대부분의 작품에서 비슷한 느낌을 받을 것 같은데, 그런 게 아무래도 오랜만에 다시 읽기의 매력 중 하나가 아닐까 싶습니다.

시리즈 두 번째 작품인 예지몽은 기억조차 거의 안 날 정도로 가물가물하지만, 오히려 그 덕분에 처음 읽는 듯한 기대감이 피어오릅니다. 원래는 다음 달쯤 읽을 예정이었지만 아무래도 조만간 유가와와 구사나기의 두 번째 이야기를 접하게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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