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이름은 어디에
재클린 부블리츠 지음, 송섬별 옮김 / 밝은세상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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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3, 위스콘신에 살던 18살 앨리스 리와 호주 여성 36살 루비 존스가 각자 다른 사연을 갖고 한날 뉴욕에 도착합니다. 앨리스가 절망뿐이던 과거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삶과 빛나는 미래를 꿈꾸며 뉴욕에 왔다면, 루비는 이미 다른 여자와 약혼한 남자를 사랑했다가 더는 희망이 보이지 않자 불안감과 우울함을 못 이기고 도망치다시피 뉴욕으로 왔습니다. 화려한 대도시 뉴욕에서 상반된 행보를 보이던 두 사람은 한 달 후 기구한 만남을 갖게 됩니다. 폭우가 쏟아지던 날 아침, 허드슨 강 자갈밭에서 괴한에게 무참히 살해된 앨리스의 사체를 루비가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그날 이후 루비는 경찰이 이름조차 알아내지 못한 그 소녀가 누군지, 왜 무참히 살해당해야 했던 건지 알아내지 않곤 견딜 수 없을 것 같아집니다.

 

살인사건이 벌어지고 종국엔 그 범인을 찾아내는 이야기이긴 하지만, ‘네 이름은 어디에는 단순히 살인 미스터리 혹은 범죄소설로 볼 수 없는, 여러 장르가 복합된 작품입니다. 무엇보다 범인은 누구?”보다 피해자는 누구?”에 더 방점이 찍혀 있는데다, 살해된 앨리스의 영혼1인칭 화자로 등장해서 사랑과 영혼스타일의 판타지가 전개되기도 하고, 사체를 발견한 충격으로 트라우마에 사로잡힌 루비가 위안을 찾기 위해 가입한 소모임 데스클럽멤버들의 대화는 마치 죽음에 관한 에세이의 분위기를 풍기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막판에 범인을 찾아내는 미스터리가 전개되긴 하지만, 살해당한 앨리스의 영혼이 바랐던 건 범인 찾기가 아니라 내 이름이 뭔지, 내가 누구인지, 내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를 사람들이 알아주는 것.”이라 미스터리 자체가 이 작품의 결정적 서사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살인사건을 다루는 작품이라면 거의 100% 경찰이나 탐정이 신출귀몰하고 사악한 범인을 찾는 것이 기본 틀입니다. 하지만 작품 속 대부분의 피해자들은 소품이나 단역, 즉 범인의 잔혹한 범행수법을 묘사하기 위한 도구처럼 잠깐 등장했다가 사라지곤 합니다. 특히 계획범죄가 아닌 우발적인 묻지마 범죄의 피해자인 경우엔 이름이나 나이 등 한두 줄의 정보 외엔 아무 것도 남는 게 없습니다. 그리고 이런 사정은 현실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름조차 밝혀지지 않은 피해자 앨리스의 영혼과 그녀의 사체를 발견한 루비가 번갈아 화자를 맡아 피해자의 삶에 초점을 맞춘 네 이름은 어디에는 무척 파격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어떤 기대와 희망을 갖더라도 주인공인 앨리스가 어차피 살해될 것이란 점 때문에 이 작품을 읽기를 주저했던 게 사실입니다. 단돈 600달러와 카메라만 갖고 뉴욕에 도착한 18살 앨리스가 새로운 삶의 단초를 찾아내고 난생 처음 행복이란 걸 맛보는 초반을 읽을 땐 더는 페이지를 넘기고 싶지 않은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앨리스의 시신을 발견한 루비가 큰 충격과 트라우마에도 불구하고 앨리스에 대해 알아내기 위해 애쓰는 장면이 이어지면서 그녀의 분투가 어떤 결실을 맺게 될지 궁금해졌고, 소멸되지 못한 채 루비 곁에 머물며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앨리스의 영혼이 애틋했던데다 루비가 가입한 데스클럽멤버들이 삶과 죽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들도 눈길을 끌어 결국 마지막 장까지 달릴 수 있었습니다.

 

출판사 소개글에 따르면 집으로 돌아오지 못한 모든 여성들을 대변하는 소설이자 거리를 안전하게 걸을 수 있는 여성들의 권리에 대한 소설이라고 하지만, 넓게 보면 이 작품은 성별을 떠나 피해자에 초점을 맞춘 이야기라는 생각입니다. 물론 작가가 곳곳에서 사회적 약자이자 성범죄 피해자의 대부분인 여성을 강조하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성별 논쟁을 전면에 내세운 것은 절대 아닙니다. 성폭행 피해자의 끔찍한 삶과 함께 남성 중심의 사회가 여성을 성적 도구로만 바라보는 방식을 다룬 마리에게 생긴 일’(이네스 바야르)과 달리 네 이름은 어디에는 좀더 보편적인 의미에서 범죄 피해자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란 뜻입니다.

 

누가 범인?”에만 관심 있는 독자라면 당혹감을 느낄 수도 있겠지만, 그동안 소설 속에서 소품이나 도구로 등장했던 피해자를 주인공으로 삼은 이야기는 일반 미스터리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인상과 여운을 남겼습니다. 무엇보다 현실에서든 소설에서든 범죄 피해자를 예전과는 조금은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더 각별하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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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53회 나오키상 수상작
히가시야마 아키라 지음, 민경욱 옮김 / 해피북스투유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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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기 전에 가급적 소개글이나 정보를 자세히는 안 보는 편이라 처음엔 를 대만 출신 일본인 작가가 쓴 ‘70년대 대만을 배경으로 한 시대극 미스터리로 예상했습니다. 물론 할아버지를 살해한 자를 찾아내겠다는 손자 예치우성의 집념이 10여년 만에 결실을 맺긴 하지만 미스터리 서사는 대략 30% 정도이고, 나머지는 중공과의 팽팽한 긴장감이 감도는 계엄령 하의 대만에서 10대 소년 예치우성이 산전수전을 겪으며 성장하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습니다. 바람 잘 날 없는 가족, 사고에 사고를 부르는 친구와 동료들, 아슬아슬한 줄타기처럼 전개되는 첫사랑 등 예치우성의 10대의 삶은 이른바 문제적 청소년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1970~80년대 대만의 정치적, 사회적 상황 때문에 조금은 특별한 색깔을 띠게 됩니다.

 

일본의 패망 이후 중국을 공산당의 중공국민당의 대만으로 갈라지게 만든 국공내전(國共內戰)20여년이 훌쩍 지난 1975년까지도 수많은 사람들, 특히 본토에서 도망쳐 나와 대만에 삶의 터전을 잡은 외성인(外省人)들의 삶을 이리저리 뒤흔들어놓습니다. 예치우성의 가족은 그런 상황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경우인데, 10대인 예치우성은 대만에서 태어나 본토에 대한 개념 자체가 거의 없는 편이지만, 아버지는 본토 태생에 어린 시절부터 대만에서 성장한 인물이며, 할아버지 예준린은 스스로를 뼛속까지 본토 사람으로 여기며 언젠가는 반드시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는 희망을 품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3대에게 있어 본토의 의미는 모두 제각각입니다. 그런 이유로 본토와 정치적, 군사적으로 대치하며 살벌한 계엄령이 일상을 지배하고 있는 대만은 세대간의 혼란마저도 극심한 상태입니다. 이런 설정은 해방 후 남북으로 분단된 채 70년 넘는 세월을 보내온 우리에겐 남다른 의미로 다가올 수밖에 없습니다.

 

17살의 예치우성은 할아버지 예준린의 죽음이 무자비한 살육전이 벌어졌던 항일전쟁과 국공내전이 빚어낸 원한때문이라고 확신합니다. 참인지 거짓인지 과장인지 모르지만 자칭 타칭 할아버지는 꽤 많은 적을 살상한 영웅이었고, 특히 친일파 가족과 그 마을사람들을 몰살한 일은 수도 없이 들어온 터라 예치우성은 누군가 그때의 일을 이제 와서 복수한 게 아닐까 추리한 것입니다. 하지만, 17살 소년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경찰의 무기력한 수사를 원망하면서도 예치우성은 그 또래 소년의 삶으로 돌아가 희로애락이 뒤섞인 성장기를 겪게 됩니다. 손에 꼽히는 수재였지만 몇 차례의 폭력사건을 겪으면서 나락에 빠진 뒤 군대에 끌려가고, 가슴 벅찼던 첫사랑은 예기치도 못한 형태로 붕괴를 맞이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20대 중반에 이른 예치우성은 어느 날 갑자기 할아버지의 죽음의 진실을 알아내곤 위험천만한 본토행을 결심합니다. 그곳에 할아버지를 죽인 범인이 있기 때문입니다.

 

애초 장대한 시대극 미스터리를 기대했던 터라 예치우성의 성장기를 읽을 땐 다소 당황한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대만이 처한 시대적 상황, 그 시대를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개성 넘치는 인물들, 그리고 할아버지 세대와 아버지 세대, 그리고 자신의 세대가 구축한 너무나도 이질적이지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세계를 고군분투하며 살아내는 예치우성의 이야기는 미스터리 이상의 힘과 매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간혹 끼어드는 판타지 설정들 예언, 유령, 도깨비불, 분신사바 등 - 은 위화감이나 이물감보다는 그 시대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이상야릇한 재미를 선사하기도 합니다.

 

대만에서 태어난 일본인 작가가 쓴 1970~80년대 대만 이야기는 독자에 따라 다소 호불호가 갈릴 수도 있고, 잘 모르는 역사 때문에 거리감이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미스터리와 역사물과 성장스토리가 절묘하게 잘 배합된 는 첫 페이지를 열면 좀처럼 책갈피를 끼울 틈을 주지 않는 특별한 재미가 있는 작품임에 분명합니다. 기회가 된다면 일본에서 보다 2년 늦게 출간됐지만 한국에는 먼저 소개된 내가 죽인 사람 나를 죽인 사람을 통해 히가시야마 아키라의 독특한 필력을 다시 한 번 맛볼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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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 플레이스의 비밀 - 그녀가 사라진 밤
리사 주얼 지음, 이경아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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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10대 미혼모인 탈룰라가 친구 스칼렛 자크가 사는 대저택 다크 플레이스에서 열린 심야 풀 파티 이후 연인이자 아이 아빠인 잭과 함께 실종됩니다. 탈룰라의 어머니 킴은 백방으로 두 사람을 찾지만 다크 플레이스 사람들 모두가 모르쇠로 일관하는 가운데 경찰의 수색마저 무위로 돌아가자 깊은 절망에 빠집니다. 2018, 런던에서 필명으로 추리소설을 발표해온 소피는 교장이 된 연인 숀을 따라 소도시의 사립기숙학교 메이폴 하우스에 옵니다. 새 환경에서 신작을 준비하려던 소피는 관사 뒷마당에서 발견한 물건1년 전 실종된 탈룰라-잭 커플과 연관 있음을 알게 된 뒤로 글 한 줄 쓰지 못하고 사건에 몰입합니다. 탈룰라의 어머니 킴을 도와 조사를 하던 소피는 의외의 장소에서 다크 플레이스의 비밀을 포착합니다.

 

두 달 전 출간된 리사 주얼의 엿보는 마을’(Watching You, 2018)확장된도메스틱 스릴러, 즉 가족이나 연인을 넘어 고급주택단지 주민들 여러 명이 얽힌 흥미진진한 작품이었다면, 가장 최근작이자 그녀의 19번째 작품인 다크 플레이스의 비밀’(The Night She Disappeared, 2021)은 어느 날 갑자기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미혼모 탈룰라의 이야기와 함께 음울하고 끔찍한 역사를 지닌 대저택 다크 플레이스의 감춰진 비밀을 30대 여성 추리소설가 소피가 추적하는 정통 스릴러에 가까운 작품입니다.

 

이야기는 2016년에서 출발하지만 탈룰라와 잭의 실종 전후를 다룬 2017년과 유력한 물증이 발견되면서 수사가 재개되고 추리소설가 소피가 조사에 나서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는 2018년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사건 자체는 두 사람의 실종이 전부로 외견상으론 무척 단순합니다. 하지만 실종 직전 위태로운 관계를 이어가던 탈룰라와 잭의 갈등, 대저택 다크 플레이스에 사는 카리스마 소녀 스칼렛과 그녀를 추종하는 친구들의 방종, 계층도 성격도 전혀 다른 탈룰라와 스칼렛이 어느 날 갑자기 특별한 사이가 되기까지의 미묘한 과정, 실종사건에 관해 뭔가 알고 있는 것 같지만 끝까지 입을 다무는 풀 파티 참석자들의 수상한 태도, 실종된 딸을 찾기 위해 1년 넘게 분투하는 어머니 킴의 절망, 그리고 이사오던 날 관사 뒷마당에서 발견한 수상한 메시지와 물건때문에 1년 넘게 미제상태인 실종사건에 개입하게 된 소피의 사정 등이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복잡하게 전개돼서 이야기의 볼륨감은 가공할 연쇄살인사건을 다룬 어지간한 벽돌책보다 더 두툼하고 묵직하게 느껴집니다.

 

무엇보다 눈길을 끈 건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주인공들이 모두 여성이란 점입니다. 제각각의 사연과 뚜렷한 개성을 지닌 그녀들은 모든 남성캐릭터들을 압도하는 매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애초 자신감과 카리스마로 똘똘 뭉친 인물도 있지만, 수동적이고 의존적인 삶을 살다가 자신만의 삶을 되찾기 위해 분투하는 인물도 있습니다. 각각 사건 해결사, 사건의 주인공, 사건으로 인해 상처받은 조연들로 활약하는 그녀들의 이야기는 작가가 노골적으로 여성중심서사를 강조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작품 곳곳에서 힘과 매력을 발휘하곤 합니다.

 

사건 자체도 단순하고 진실을 밝히는 단서와 과정도 그리 복잡하거나 충격적인 반전을 내포하진 않습니다. 오히려 이 작품의 알맹이는 두 사람이 실종된 이유는 무엇인가? 실종 전후 사정은 어떠했는가?”라는 사건 이면에 숨겨진 이야기입니다. 말하자면 심리스릴러의 미덕과 함께 리사 주얼의 주 특기인 도메스틱 스릴러의 향기가 진하게 배어있다는 뜻입니다.

 

엿보는 마을을 읽기 전만 해도 고만고만한(?) 도메스틱 스릴러 작가라고 오해했지만, 1999년 이후 20편 가까운 스릴러를 펴낸 베테랑이란 걸 알고 깜짝 놀랐고, (두 작품밖에 못 읽었지만) 사건 못잖게 인간의 심리와 내면을 그려내는 필력에 또 한 번 놀라기도 했습니다. 이후 출간될 그녀의 작품들도 계속 관심을 가질 생각인데, 최근작 위주로 먼저 출간되고 있지만 초기작들 역시 궁금할 따름입니다. 이만한 작가가 이렇게 뒤늦게 한국에 소개됐다는 건 여전히 의아한 일이기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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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와 잠수복
오쿠다 히데오 지음, 김진아 옮김 / 북로드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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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과 주제 모두 폭넓은 스펙트럼을 갖고 있는 오쿠다 히데오지만 역시나 그의 이름을 들으면 바로 떠오르는 작품은 공중그네남쪽으로 튀어입니다. 물론 최악이나 방해자처럼 읽는 내내 불편함과 재미를 함께 준 작품들도 인상적이었지만,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거나 의외의 지점에서 웃음을 터뜨리게 만드는 재능이야말로 그의 트레이드마크라는 생각입니다. 다섯 편의 단편이 수록된 코로나와 잠수복은 바로 그런 그의 장기가 잘 발휘된 작품입니다.

 

일본 원작 제목도 코로나와 잠수복이라 처음엔 수록작 모두 코로나 상황을 소재로 삼은 줄 알았는데, 표제작인 한 작품을 제외하곤 모두 코로나와는 무관한 이야기들입니다. 오히려 놀란 대목은 수록작 모두 (‘옮긴이의 말을 인용하면) “신기한 체험담이나 비과학적 괴담, 비일상적 판타지를 담은 장르소설이란 점입니다. 인간의 형상을 한 유령이 거의 모든 수록작에 등장하고 특별한 초능력을 가진 아이가 등장하기도 합니다. 그의 모든 작품을 읽은 건 아니지만 부족한 기억력대로라면 오쿠다 히데오가 이렇게 대놓고 판타지 설정을 선보인 적은 없는 것 같아서 무척 흥미로웠습니다. 물론 특유의 따뜻함과 치유의 문장들은 판타지 혹은 괴담 속에서도 그 진가를 발휘합니다.

 

불륜을 저지른 아내에게 제대로 분노도 표하지 못한 채 제 발로 집을 나와 바닷가의 고택에서 여름을 보내기로 한 소심한 중년작가의 이야기(‘바닷가의 집’), 조기퇴직을 거부한 탓에 경비원 보조 업무로 내쫓긴 중년남성들이 복싱을 통해 생애 처음으로 고양감과 해방감을 만끽하는 이야기(‘파이트 클럽’), 자기중심적인데다 조건만 따지며 남자를 만나던 여자가 인기 절정의 프로야구 선수인 현재 연인 때문에 고민에 빠져 점쟁이를 찾아가는 이야기(‘점쟁이’), 스스로 코로나에 감염됐다고 확신한 30대 남자가 5살 아들의 외출을 위해 부득이 잠수복을 입었다가 TV와이드쇼에까지 출연하게 된 웃지 못할 코미디(‘코로나와 잠수복’), 오랜 로망이던 1984년 형 이탈리아 자동차 판다를 구매한 55세 남자가 그 차에 담긴 기막힌 사연을 알게 되면서 놀라우면서도 가슴 뭉클한 12일을 보내게 된 이야기(‘판다를 타고서’) 등이 실려 있습니다.

 

수록된 다섯 편 모두 따뜻함과 치유, 흐뭇함과 의외의 폭소로 잘 채워져 있습니다. 아내의 불륜이나 조기퇴직으로 인해 인생 최대의 위기에 빠진 중년남자들은 실은 어둡고 무거운 이야기에 어울리는 주인공들이지만 자신이 맞닥뜨린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도 그 속에서 어떻게든 작은 탈출구를 찾아내는데 성공합니다. 조건만으로 남자를 고르는 지독히도 속물적인 여자는 끝까지 자신의 탐욕을 버리지 못하지만 그런대로 개과천선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자신이 코로나에 걸렸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패닉상태에 빠져 잠수복 차림의 외출을 감행하는 남자의 이야기는 어쩌면 코로나가 정점에 이르렀을 때 누구나 한번쯤 상상해봤을 수도 있는 슬픈 희극입니다. 어렵게 구입한 희귀한 중고차가 알고 보니 슬프디 슬픈 사연을 지녔다는 이야기는 오랜만에 판타지를 읽으며 콧등이 시큰해지는 경험을 선사해줬습니다.

 

오쿠다 히데오의 매력과 장점이 잘 배인 작품들이긴 하지만 유일하게 아쉬운 점은 따뜻함과 치유의 농도가 조금 과한 탓에 전체적으로 싱겁거나 밍밍하게 느껴졌다는 점입니다. 굳이 비유하자면 어른들을 위한 동화라고 할까요? 좀더 톡 쏘는 맛과 촌철살인을 기대한 독자라면 저와 비슷한 아쉬움을 느낄 가능성이 높을 것 같습니다.

다만, 마지막 수록작인 판다를 타고서는 오쿠다 히데오의 모든 매력이 총출동한 최고의 단편이란 생각입니다. 이 한 작품만으로도 코로나와 잠수복을 읽기를 잘 했다는 만족감이 들었는데, 1시간 정도의 단편영화로 제작된다면 몇 번이라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팔색조처럼 다양한 이야기를 선보이는 오쿠다 히데오의 신작 소식은 늘 반갑습니다. 비록 아쉬운 점은 있었지만 코로나와 잠수복2년 넘게 지친 삶을 살아야만 했던 독자들이 마음 편히 읽을 수 있는 소소한 행복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독하고 센 장르물에 파묻혀 사는 독자들에겐 특별한 간식이자 아늑한 쉼터 이상의 작품이 돼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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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만 불짜리 속편 미스터리
이언 랜킨 외 지음, 오토 펜즐러 엮음, 김원희 옮김 / 북스피어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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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에 한국에 소개된 세상의 모든 책 미스터리는 오토 펜즐러가 을 주제로 엮은 미스터리 앤솔로지 1편입니다. ‘백만 불짜리 속편 미스터리는 그 두 번째 작품(원제 Bibliomysteries Vol. 2: Stories of Crime in the World of Books and Bookstores)으로 이언 랜킨을 비롯한 여섯 작가의 작품이 실려 있습니다. ‘존 리버스 시리즈로 익숙한 이언 랜킨과 가짜 경감 듀로 이름만 들어본 피터 러브시 외에는 모두 생소한 작가들이었지만, ‘책을 주제로 한 앤솔로지라는 타이틀에 걸맞게 매력적인 작품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단순명쾌한 미스터리를 고전적인 분위기에 담은 왕비에게 헌정한 초판본’, 엎치락뒤치락 연이은 반전에 흥미진진한 스릴러의 재미까지 갖춘 크리스티 컬렉션 미스터리’, 600년 동안 전설로만 회자되던 제프리 초서의 미발견 원고를 소재로 한 사자의 책’, 그리고 환상특급 혹은 괴담의 분위기까지 느껴지는 그것들이 보인다’, ‘백만 불짜리 속편’,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에 관한 소고등 여섯 편 모두 다양한 장르 속에 뚜렷한 개성을 지닌 이야기들을 담고 있습니다.

 

특히 여섯 편 중 네 편이 희귀 초판본 또는 미발견 원고를 소재로 삼고 있어서 미스터리의 재미를 더욱 배가시켰는데, 미스터리 여왕 애거사 크리스티의 초판본, 영문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제프리 초서의 미발견 원고,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이 불태워 없앤 걸로 알려진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의 초고 등이 그것입니다. 누군가는 그것을 통해 사사로운 이익을 도모하기도 하고, 누군가는 학구적 열망에 몸이 달아 이성을 잃는가 하면, 누군가는 내가 아는 나, 내가 믿는 가치, 내가 발붙인 세계를 몽땅 집어삼키는”(역자 후기) 그것을 읽은 뒤 파국을 맞이하기도 합니다.

 

에 관한 미스터리 앤솔로지는 장르물 독자에겐 호기심을 발동시킬 수밖에 없는 매력적인 형식입니다. 좀더 익숙한 작가들이 라인업에 포진됐더라면 더할 나위 없었겠지만, 이 작품이 아니면 만나볼 수 없었던 미지의 작가들을 알게 된 좋은 기회이기도 했습니다. 이후로도 오토 펜즐러가 계속 ‘Bibliomysteries series’를 내놓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출간된다면 더없이 반가운 일이 될 것 같습니다. (2015년 황금가지에서 출간된 페이스 오프처럼) 주제가 꼭 이 아니더라도 좋아하는 작가들이 하나의 주제 하에 모여 협업을 이룬 앤솔로지라면 역시 무조건 반갑겠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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