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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너는 무엇을 했는가 ㅣ 그날, 너는 무엇을 했는가
마사키 도시카 지음, 이정민 옮김 / 모로 / 2022년 6월
평점 :
2004년, 세상 부럽지 않은 행복을 누리던 주부 미즈노 이즈미의 삶이 산산조각납니다. 새벽녘 자전거를 타던 아들 다이키가 연쇄살인 용의자로 오인받아 경찰에게 추격당하던 중 사고로 목숨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아들의 죽음이 자기 탓이라고 여긴 이즈미는 그날 이후 생지옥에서 빠져나오지 못합니다. 2019년, 한 빌라에서 여성의 시신이 발견되자 경찰은 그녀와 불륜관계이던 유부남 다쓰히코를 의심하지만 문제는 그 역시 종적을 감췄다는 점입니다. 경시청 수사1과의 ‘괴짜’ 미쓰야 슈헤이는 실종된 다쓰히코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막연하지만 왠지 15년 전 소년 다이키의 죽음이 이번 사건과 연결돼있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근거 없는 추측에서 시작된 미쓰야의 수사는 예상치도 못한 곳에서 15년의 간극을 둔 두 사건의 접점을 찾아냅니다.
마사키 도시카는 ‘그날, 너는 무엇을 했는가’로 한국에 처음 소개된 작가입니다. 1965년 생으로 2008년 데뷔를 했지만 이 작품 이전까지는 일본에서도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고 하니 생소한 게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정교한 설계 속에 사건, 심리, 반전을 잘 담아낸 묵직한 미스터리를 읽은 뒤엔 그녀의 오랜 무명생활이 잘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2004년 소년 다이키의 죽음은 명백히 ‘사고’였습니다. 경찰의 추격을 피해 달아나다가 주차중인 트럭과 충돌한 것이 사인입니다. 그리고 2019년에 벌어진 한 여성의 죽음은 15년 전 다이키의 죽음과는 접점 같은 게 있을 리 없어 보이는 명백한 ‘사건’입니다. 하지만 수사에 몰입하면 아무 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경시청 수사1과의 ‘괴짜’ 미쓰야 슈헤이의 촉은 상식과는 반대로 움직입니다.
다만, 미쓰야의 그런 상식밖의 움직임엔 특별한 사연이 깔려있습니다. 15년 전 자신이 관여했던 사건이 나비효과처럼 엉뚱한 파장을 일으켜 다이키를 죽게 만들었다는 자책 아닌 자책을 오랫동안 품어온 미쓰야는 다이키가 그 새벽에 자전거를 탄 이유, 또 경찰 심문에 응하지 않고 도주한 이유, 그래서 결국 참혹한 죽음에 이른 이유를 알아내려 합니다. 자신 역시 이유를 알 수 없는 가족의 죽음을 겪은 바 있는 미쓰야에게 다이키의 죽음의 이유를 알아내는 것은 살인사건 못잖은 무거운 책임감으로 다가옵니다.
미스터리만큼 비중 있게 그려진 서사는 가족, 특히 어머니에 관한 것입니다. 15년 전 다이키를 잃고 생지옥에 빠진 이즈미, 현재 종적을 감춘 채 불륜녀 살해범으로 의심받는 다쓰히코의 어머니 지에, 다쓰히코의 장모이자 나나코의 친정어머니인 이누이 등 이 작품 속엔 자식 때문에 인생의 방향이 크게 뒤틀어진 여러 어머니가 등장합니다. 이들은 가족의 빛과 어둠을 대변하는 것은 물론 행복이란 게 얼마나 쉽고 간단하게 무너질 수 있는지, 또 가족에 대한 집착과 망상이 얼마나 위험한 파국을 초래하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초중반까지는 이들의 다소 과한 감정 토로 때문에 살짝 지루함을 느낄 수 있지만, 뒤로 갈수록 이들이 깔아놓은 ‘판’이 얼마나 중요하고 의미심장한지 조금씩 깨달을 수 있습니다.
수사를 이끄는 경시청 수사1과의 미쓰야 슈헤이의 매력도 눈길을 끌었는데, 불행한 가족사, 뛰어난 기억력, 차가워 보이지만 실은 한없이 따뜻한 속내 등 다채로운 면모를 지니고 있어서 시리즈 주인공으로도 손색없어 보였습니다. ‘옮긴이의 말’에 따르면 실제로 일본에서 이미 후속작인 ‘그녀가 마지막에 본 것은’이 출간됐다고 하니 다시 한 번 미쓰야의 독특한 매력을 맛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더불어 미쓰야의 파트너이자 관할서 신참 형사 다도코로 가쿠토가 조금씩 제대로 된 형사로 성장하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입니다.)
마지막 에필로그까지 이어지는 연이은 반전도 매력적이고, 복잡한 구도를 매끄럽게 잘 풀어낸 필력도 안정적입니다. 낯선 작가와의 첫 만남으론 더없이 만족스러웠는데, 이 작품이 호평을 받아 후속작도 곧 한국에 출간되기를 기대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