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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지니아 - 전면개정판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3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21년 12월
평점 :
호쿠리쿠 지방 K시, 존경받는 명가 저택에서 독살 사건이 벌어진다. 3대의 생일이 겹친 잔칫날, 저택 가족과 초대받은 동네사람 등 17명이 정체불명의 사내가 배달한 독극물이 든 음료수를 마시고 사망한 것. 저택주인의 딸인 눈먼 소녀는 유일하게 독을 마시지 않아 살아남았지만 패닉에 빠진 채 알아들을 수 없는 진술만 한다. 얼마 후 한 청년이 자백 메모를 남긴 뒤 자살해 사건은 종결되지만, 진범이 따로 있다는 의혹은 해소되지 않는다. 그로부터 20여 년 후, 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이 당시 관련자들 인터뷰를 시작한다. 그 사건을 책으로 펴낸 작가와 편집자, 담당 형사, 독을 마셨지만 가까스로 살아난 가정부, 범인을 따랐던 동네아이, 유일한 생존자로 이제 중년이 된 눈먼 소녀까지...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2013년 ‘목요조곡’으로 처음 온다 리쿠를 접한 뒤 10년 가까이 여덟 편을 읽었지만, 그녀의 작품은 매번 마지막 장을 덮을 때마다 몽환적인 여운과 정리되지 않는 혼란을 남겨놓곤 합니다. 비교적 대중적이고 쉬운 서사를 다룬 ‘목요조곡’과 ‘꿀벌과 천둥’을 제외하면 늘 비슷한 경험을 하곤 했는데, 초기에 읽은 ‘Q&A’, ‘몽위’, ‘달의 뒷면’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생소한 맛에 이끌렸던 반면, 최근 읽은 ‘여섯 번째 사요코’는 더는 제 취향이 온다 리쿠를 따라갈 수 없음을 깨닫게 해준 작품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과 함께 ‘여섯 번째 사요코’ 이후 2년 만에 ‘유지니아’를 집어든 건 “온다 리쿠 미스터리 소설의 정점”이라는 출판사 소개글과 함께 일본추리작가협회상을 수상한 이력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조금은 선명한 이야기가 전개되지 않을까, 라는 막연한 기대를 품었다는 뜻입니다. 물론 읽기 시작한지 얼마 안돼 그 기대는 정말 너무나도 막연했다는 걸 깨달았지만 말입니다.
이야기의 몸통은 20여 년 전에 벌어진 독살사건에 관한 인터뷰입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한 인물이 당시 사건 관련자들을 만나 자세한 정황을 들으면서 조금씩 진실에 다가갑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진술은 미묘하게 엇갈리고, 팩트와 상상이 혼재된 기억들은 인터뷰어는 물론 독자를 끊임없이 혼란스럽게 만듭니다. 특히 어딘가 특별한 기운을 내뿜던 ‘둥근 창의 집’ 저택, 그 저택 안에 자리 잡은 기괴한 파란 방과 하얀 꽃을 피운 백일홍, 그리고 앞을 볼 수 없지만 더 뛰어난 오감을 지닌 매력적인 소녀 등 사건의 무대인 저택과 유일한 생존자인 소녀에 대한 진술은 대답하는 사람에 따라 ‘동경’과 ‘의심’이라는 큰 간극을 보입니다.
눈먼 소녀만큼 눈길을 끈 인물은 당시 이웃에 살던 소녀로 사건이 일어난 지 12년 후 독살사건을 ‘잊혀진 축제’라는 제목의 르포 스타일의 소설로 펴낸 마키코입니다. 그녀의 취재과정은 마치 독살사건의 범인을 밝히려는 듯한 형사의 탐문과도 유사했지만, 그녀 역시 끝내 새로운 진실을 얻어내진 못했습니다. 하지만 현재 시점에 인터뷰를 진행하는 인물은 마키코의 소설에서 지독한 위화감을 느꼈고, 누구에게도 밝히지 않은 ‘어떤 이유’ 때문에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힌 독살사건을 집요하게 조사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독자는 현재 인터뷰 대상자들의 진술 속에서 독살사건 당시의 정황을 포착해내야 하는 것은 물론 사건 발생 12년 후 마키코가 그 사건을 소설을 펴낸 목적도 함께 알아내야 한다는 뜻입니다. 온다 리쿠의 몽환적인 서술에 정신이 어른거리는 상태에서 말입니다.
사실, 온다 리쿠가 깔끔하고 친절한 미스터리를 선사할 거라고 기대하진 않았지만, 지루함을 느낄 틈이 없는 인터뷰 형식의 전개와 (다소 애매하긴 해도) 막판에 설명된 독살사건의 진실 덕분에 이도저도 아닌 혼란 속에 마지막 장을 덮는 일은 피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론 여전히 “온다 리쿠 미스터리 소설의 정점”이라는 출판사의 소개글과 일본추리작가협회상을 수상한 이력이 의문일 뿐입니다. 어쨌든 미스터리인데 다 읽고도 진범도, 동기도, 방법도 제대로 이해한 게 맞는지 확실치 않았고, 미스터리 외에 작가가 의도한 특별한 주제가 있었다고 해도 피부에 와 닿게 느껴지지 않았으니 조금은 허망한 기분이 들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작품의 완성도와 무관하게 순전히 취향의 차이 때문에 든 의문들이지만 지독히도 주관적인 이유로 야박한 평점을 줄 수밖에 없었던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제 책장엔 아직도 읽지 못한 온다 리쿠의 작품이 여러 권 쌓여있습니다. ‘여섯 번째 사요코’ 이후 2년의 공백을 두고 다시금 온다 리쿠에 도전했지만 비슷한 좌절감(?)을 맛본 걸 보면 아마 다음 ‘온다 리쿠 읽기’는 더 많은 공백을 필요로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책장을 정리하기보다 재도전할 의지를 품는 걸 보면 아직은 온다 리쿠를 완전히 포기할 생각은 없어 보이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