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 픽처
더글라스 케네디 지음, 조동섭 옮김 / 밝은세상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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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월스트리트의 변호사 벤 브래드포드는 안정된 수입과 고급 주택을 둔 가장으로, 겉으로는 남부러울 게 없는 인물이지만 정작 본인은 조금도 지금의 삶에 만족하지 못합니다. 어릴 적부터 사진작가가 되고 싶었지만 아버지의 반대로 변호사의 길을 걷게 된 그에게 사진은 그저 호사스런 취미로 남았을 뿐입니다. 그런 와중에 아내 베스와의 결혼생활이 삐거덕거리기 시작했고 벤의 자괴감은 점점 더 최악을 향해 치닫습니다. 어느 날 아내 베스가 이웃남자와 불륜관계임을 눈치 챈 벤은 늦은 밤 그의 집을 찾아가는데, 그날 밤에 벌어진 비극을 기점으로 벤은 전혀 다른 인생을 살게 됩니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신간이나 근간도 아니고 12년 전에 출간된 작품이라 별 의미 없는 조언이겠지만, 아직 이 작품을 읽지 않은 독자라면 인터넷서점의 출판사 소개글은 물론 책 뒤표지의 짧은 홍보카피조차 보지 말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이 작품의 결정적인 변곡점들이 모두 노출돼있어서 엔딩만 빠진 스포일러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만큼 서평을 쓰는 일이 곤혹스러워진 건 당연한 일이고, 위의 줄거리 외에 달리 이 작품을 소개할 길이 없는 것도 사실입니다.

 

미국에서 태어난 뒤 작품 활동은 주로 영국에서 하고 있는 더글라스 케네디가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는 곳은 프랑스라고 합니다. 이 작품의 프랑스판 제목은 자신의 삶을 살고 싶었던 남자인데, 다소 직설적이지만 주인공 벤 브래드포드의 천당과 지옥을 오가는 굴곡진 삶을 잘 대변하고 있는 제목이기도 합니다. 이 작품은 꿈을 접은 채 살아가던 한 남자가 아이러니하게도 인생 최악의 사건을 겪은 뒤 자신이 꿈꾸던 삶을 살게 된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렇게 손에 넣은 삶이 평탄하게 이어질 리는 없습니다. 벤이 올라탄 삶의 롤러코스터는 최대치의 급경사를 오르내리며 그를 쉴 새 없이 극과 극의 상황 속에 내던지곤 합니다.

 

사실, 극과 극의 상황이 이 작품의 뼈대이자 가장 큰 변곡점들인데, 스포일러 때문에 일일이 소개할 수 없는 건 이 작품을 직접 읽어본 독자라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최소한의 힌트라고 해봐야 줄거리에서 언급한 벤은 전혀 다른 인생을 살게 됐다.” 정도인데, 아마 이쯤만 해도 이 작품의 대략의 흐름을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이야기가 무척 빠르고 긴장감을 놓기 어려운데다 크고 작은 반전들이 연이어 벌어져서 무척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이란 점, 그리고 법적으로나 도덕적으로 비난받아야 할 주인공이지만 어떻게든 그가 위기를 헤치고 성공과 행복을 손에 넣길 바라게 된다는 점이 이 작품의 가장 큰 미덕이란 건 확실히 보장할 수 있습니다.

 

아쉬운 점도 분명 있긴 합니다. 처음 읽은 더글라스 케네디의 작품이라 그의 성향이 원래 그런지는 잘 모르지만, 거의 일지에 가까운 디테일한 묘사들 때문에 집중력이 떨어지는 대목이 꽤 여러 곳 있었습니다. 꼭 필요한 부분들 - 가령, 벤이 애착을 갖고 있는 사진에 관한 기술적 설명들 - 은 아무리 자세하더라도 이해가 됐지만, 몇 줄로 요약해도 충분한 장면들에까지 과도하게 분량을 할애한 점은 납득하기 어려웠습니다. 1997년에 출간된 작품임을 감안하더라도 벤이 도주, 인멸, 위장, 위조 등 난이도 높은 장벽을 헤쳐 나가는 과정이 너무 쉬워 보여서 사진작가를 꿈꾸던 변호사가 아니라 베테랑 스파이처럼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이 작품과 함께 책장에 오래 방치돼있던 위험한 관계도 곧 읽을 예정인데, ‘빅 픽처의 아쉬움을 상쇄시킬만한 더글라스 케네디만의 진짜 매력을 제대로 맛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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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홍색 여인에 관한 연구 레이디 셜록 시리즈 1
셰리 토머스 지음, 이경아 옮김 / 리드비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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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라면 사교계에서 좋은 남자를 만나 결혼-출산-양육-내조를 거치는 것이 당연이자 의무로 여겨지던 1886년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 하지만 딸만 넷인 홈스 집안의 막내딸 샬럿은 결혼 자체를 거부하는 것은 물론 독립적인 삶을 꿈꾸는 당찬 여성입니다. 25살이 되던 해, 샬럿은 런던 사교계를 뒤집어놓을 만한 사건을 벌인 뒤 집을 나와 독립하지만 현실은 너무나도 가혹했습니다. 끼니마저 걱정해야 하는 상황에서 우연히 만난 조력자 덕분에 샬럿은 가까스로 큰 위기를 넘깁니다. 그리고 셜록 홈스라는 가명으로 런던 경시청을 도왔던 이력을 살려 탐정의 길에 들어섭니다. 샬럿이 당장 해결해야 할 문제는 언니 리비아와 아버지 헨리가 용의자로 의심받고 있는 의문의 살인사건입니다.

 

셜록 홈스의 유산은 오늘날까지 다양한 형태로 그 저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각종 패러디나 패스티시(혼성 모방)는 물론 수많은 오마주 작품들이 있지만 개인적으론 그레이엄 무어의 셜로키언외엔 딱히 인상적인 작품이 없었고, 그래서 언젠가부터 셜록 홈스를 내세운 작품들은 오히려 기피하게 됐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주홍색 여인에 관한 연구에 관심이 간 건 무척 이례적인 일인데, 일단 100페이지 정도까지만 읽어보자는 심산이었던 게 사실입니다.

 

시집 못 간 딸은 재산이나 축내는 창녀들과 마찬가지.”라는 히스테릭한 어머니의 주장은 실은 당시 영국에서 여성을 대하는 보편적인 태도입니다. 그에 비해 내 생식 능력과 남자의 부양을 교환한다는 생각이 마음에 들지 않아.”라는 샬럿 홈스의 선언은 그야말로 경천동지할 만큼 파격적인 것으로 또래 여성들조차 공감하지 못하는 주장입니다. 어릴 때부터 뛰어난 상상력과 추리력은 물론 당당하고 주체적인 사고방식을 지닌 샬럿은 자신의 꿈 결혼하지 않고 독립하여 런던에서 여학교 교장이 되는 것 - 을 이루기 위해선 설득이나 타협 따위론 불가능하다는 것을 간파하곤 런던 사교계를 발칵 뒤집어놓을 만한 초대형 사건을 일으킨 뒤 집을 빠져나옵니다. 카리스마 넘치는 주인공의 출발점으로는 매력 만점의 설정이 아닐 수 없습니다.

 

샬럿 홈스는 집을 나오기 전부터 운이 따랐다면 인연이 될 수도 있었던 남자잉그램 경을 통해 런던경시청의 로버트 트레들스 경사를 여러 차례 도운 적 있습니다. 물론 샬럿이 아니라 셜록이란 가명을 통해, 또 만남이 아니라 편지를 통해서였고, 트레들스 경사는 당연히 셜록을 뛰어난 남성으로 추정하며 매번 고마움을 전달하곤 했습니다. 이 아이러니한 상황은 셜록 홈스와 같은 재능을 지닌 여성이 여성을 하찮게 여기는 빅토리아 시대에 존재했다면?”이라는 이 작품의 아이디어에서 도출된 것으로 셜록 홈스가 실은 샬럿 홈스라는 여성 탐정의 가명이라는 아주 흥미로운 설정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샬럿의 주위엔 셜록 홈스의 팬이라면 누구나 잘 아는 조연들(왓슨, 허드슨 부인, 모리아티)이 하나둘씩 모여듭니다. 샬럿이 그들과 인연을 맺고 베이커가 18번지에 자리 잡는 과정은 각별한 재미를 주는 대목인데, 특히 조력자이자 후원자 역할을 맡은 왓슨과의 관계가 가장 눈길을 끌었습니다. , 샬럿과 런던경시청을 연결시켜주는 중개인이자 샬럿을 음으로 양으로 도와주는 유부남 귀족 잉그램 경은 아슬아슬한 로맨스 분위기까지 풍겨서 이후 두 사람의 관계를 무척 궁금하게 만듭니다.

 

이렇듯 재미있는 설정들에도 불구하고 평범한 평점을 준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이야기 자체의 문제로, 분량에 어울리지 않는 단조로운 사건, 지루한데다 지나치게 디테일한 수사 과정, 그리고 수시로 모호함을 느끼게 만드는 영국식 불친절입니다. 시대를 역행한 샬럿이 베이커가 18번지에 자리 잡기까지의 과정만 놓고 보면 별 5개도 충분하지만, 정작 살인사건 자체는 아쉬움이 많았다는 뜻입니다. 또 하나는 (상대적으로 그렇게 많다고 할 순 없지만) 곳곳에서 발견된 오타인데, 샬롯 홈스의 매력을 깎아내린 꽤 큰 옥의 티였다는 생각입니다.

 

출판사 소개글을 보니 곧 후속작 벨그라비아의 음모가 출간된다는데, 이 작품과 엇비슷한 문제를 초반부터 목격하게 될까봐 미리부터 주저되는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샬럿과 왓슨과 잉그램 경의 캐릭터만 생각하면 읽고 싶은 욕심을 외면하기란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주홍색 여인에 관한 연구가 남긴 아쉬움이 후속작에서는 모두 극복됐기를 기대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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엿보는 마을
리사 주얼 지음, 안은주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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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비하와 연민에 휩싸여 살다가 충동적으로 결혼한 뒤 고향으로 돌아와 오빠 부부 집에 얹혀살게 된 26살 조이는 이웃의 한 남자에게 주체할 수 없는 욕망을 느낍니다. 하지만 상대가 자신보다 나이가 두 배는 많은 51살의 공립학교 교장이자 유부남인 톰 피츠윌리엄이다 보니 조이 스스로도 당혹스러울 뿐입니다. 지역주민들에게 젠틀하고 유능한 성자로 칭송받는 훌륭한 교육자인데다 15살 여학생의 마음마저 흔들리게 하는 완벽남 톰을 볼 때마다 죄책감과 욕망 사이에서 흔들리던 조이는 의도적으로 톰에게 접근하기 시작했고 넘어선 안 될 선 직전까지 이르지만, 하루아침에 살인용의자로 몰려 경찰의 심문을 받는 처지가 되고 맙니다.

 

개인적으로 도메스틱 스릴러(Domestic Thriller, 가족 혹은 연인 사이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다루는 스릴러)를 그리 좋아하진 않습니다. 길리언 플린의 나를 찾아줘이후 봇물처럼 쏟아진 도메스틱 스릴러를 읽다가 피로감이 높아진 탓인데, 그래도 엿보는 마을처럼 설정 자체가 눈길을 끄는 경우엔 일단 100페이지까지만 읽어보자.”라는 심정으로 찾아 읽곤 합니다.

 

엿보는 마을은 장르상 도메스틱 스릴러가 맞긴 하지만 가족의 범위를 넘어 27채의 빅토리아풍 저택으로 이뤄진 멜빌 하이츠라는 고급주택단지의 주민들이 이야기를 이끌어갑니다. 결혼한 지 몇 달 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51살의 유부남에게 마음을 빼앗긴 26살 조이, 이른바 불량학교 재건 전문가이자 주민과 학생 모두에게 칭송과 사랑을 받는 완벽남 톰 피츠윌리엄, 그런 톰을 자신을 노리는 집단스토킹의 리더라며 비난하는 것은 물론 끊임없이 감시하는 이웃의 망상녀 트립, 트립의 딸이자 톰에게서 역겨움밖에 느끼지 못하는 탓에 그에게 홀딱 빠진 친구를 이해할 수 없는 15살 제나, 그리고 톰의 아들이자 언어와 기계에 천재적인 재능을 지녔지만 친구 하나 없을 정도로 사회성이 결여된 14살 프레디 등 고급주택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먼, 어딘가 불안정하고 위태로운 인물들이 불온한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324일 밤에 벌어진 살인사건 관련자들에 대한 경찰심문이 간간이 끼어드는 가운데 직전 두 달 동안 톰과 관련된 멜빌 하이츠 주민들의 수상하거나 이상하거나 불안한 행적들이 이야기의 몸통을 이룹니다. 특히 완벽남으로 정평이 난 톰에 대한 의심들 여학생을 유혹한다느니 가정폭력을 휘두른다느니 대놓고 불륜을 저지른다느니 심지어 몇 년 전 수상쩍은 장면이 목격됐다느니 - 이 몇몇 사람들에 의해 제기되는 탓에 독자는 그가 혹시 가면 뒤에 추악한 진면목을 숨기고 있는 게 아닌지 의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무엇보다 26살 조이와 15살 소녀가 그에게 홀딱 빠져 위험천만한 애정을 품고 있다 보니 긴장감은 몇 배로 고조됩니다.

 

살인사건 발생 시각에 수상쩍은 행보를 보인 탓에 조이의 처지는 궁지에 몰립니다. 물론 독자 입장에선 당연히 조이가 범인일 리 없다고 추정할 수밖에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딱히 유력한 용의자가 눈에 들어오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막판에 이르러 사건의 진상이 드러나면서 독자는 생각지도 못한 반전에 놀라게 됩니다. “독자는 교묘한 작가의 암시에 휘말려 계속해서 추리를 거듭하다가, 등잔 밑에 숨어 있던 보화를 찾아내게 된다.”라는 미국도서관협회의 리뷰대로 읽는 내내 엉뚱한 곳을 헤맸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데, 독자에 따라 그럼 그동안 쌓아온 이야기는 뭐냐?”라고 볼멘소리를 할 수도 있지만, 찬찬히 복기해보면 살인사건 자체와 연관 없어 보이던 크고 작은 에피소드와 해프닝들이 실은 정교하게 연결돼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톰을 칭송하거나 사랑하거나 의심해온 여러 인물들 역시 언뜻 보면 살인사건과 무관한 딴소리들만 한 것처럼 보이지만 작가의 정교한 설계 속에 누구 하나 빠져선 안 될 중요한 역할들 무엇보다 원제(Watching You)의 의미를 잘 드러낸 - 을 수행했음도 알 수 있습니다.

 

2018년에 출간된 엿보는 마을은 리사 주얼의 16번째 작품입니다. 한국 출간작으로는 그때 내 딸이 사라졌다’(Then She Was Gone, 2017) 이후 두 번째 작품인데, 작가의 이력에 비하면 의아할 정도로 덜 소개된 셈입니다. ‘엿보는 마을에 이어 한스미디어에서 다크 플레이스의 비밀’(The Night She Disappeared, 2021)을 출간할 예정이라고 하니 올해 안에 한번쯤 더 그녀의 쫄깃쫄깃한 도메스틱 스릴러를 맛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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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지니아 - 전면개정판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3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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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쿠리쿠 지방 K, 존경받는 명가 저택에서 독살 사건이 벌어진다. 3대의 생일이 겹친 잔칫날, 저택 가족과 초대받은 동네사람 등 17명이 정체불명의 사내가 배달한 독극물이 든 음료수를 마시고 사망한 것. 저택주인의 딸인 눈먼 소녀는 유일하게 독을 마시지 않아 살아남았지만 패닉에 빠진 채 알아들을 수 없는 진술만 한다. 얼마 후 한 청년이 자백 메모를 남긴 뒤 자살해 사건은 종결되지만, 진범이 따로 있다는 의혹은 해소되지 않는다. 그로부터 20여 년 후, 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이 당시 관련자들 인터뷰를 시작한다. 그 사건을 책으로 펴낸 작가와 편집자, 담당 형사, 독을 마셨지만 가까스로 살아난 가정부, 범인을 따랐던 동네아이, 유일한 생존자로 이제 중년이 된 눈먼 소녀까지...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2013목요조곡으로 처음 온다 리쿠를 접한 뒤 10년 가까이 여덟 편을 읽었지만, 그녀의 작품은 매번 마지막 장을 덮을 때마다 몽환적인 여운과 정리되지 않는 혼란을 남겨놓곤 합니다. 비교적 대중적이고 쉬운 서사를 다룬 목요조곡꿀벌과 천둥을 제외하면 늘 비슷한 경험을 하곤 했는데, 초기에 읽은 ‘Q&A’, ‘몽위’, ‘달의 뒷면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생소한 맛에 이끌렸던 반면, 최근 읽은 여섯 번째 사요코는 더는 제 취향이 온다 리쿠를 따라갈 수 없음을 깨닫게 해준 작품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과 함께 여섯 번째 사요코이후 2년 만에 유지니아를 집어든 건 온다 리쿠 미스터리 소설의 정점이라는 출판사 소개글과 함께 일본추리작가협회상을 수상한 이력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조금은 선명한 이야기가 전개되지 않을까, 라는 막연한 기대를 품었다는 뜻입니다. 물론 읽기 시작한지 얼마 안돼 그 기대는 정말 너무나도 막연했다는 걸 깨달았지만 말입니다.

 

이야기의 몸통은 20여 년 전에 벌어진 독살사건에 관한 인터뷰입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한 인물이 당시 사건 관련자들을 만나 자세한 정황을 들으면서 조금씩 진실에 다가갑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진술은 미묘하게 엇갈리고, 팩트와 상상이 혼재된 기억들은 인터뷰어는 물론 독자를 끊임없이 혼란스럽게 만듭니다. 특히 어딘가 특별한 기운을 내뿜던 둥근 창의 집저택, 그 저택 안에 자리 잡은 기괴한 파란 방과 하얀 꽃을 피운 백일홍, 그리고 앞을 볼 수 없지만 더 뛰어난 오감을 지닌 매력적인 소녀 등 사건의 무대인 저택과 유일한 생존자인 소녀에 대한 진술은 대답하는 사람에 따라 동경의심이라는 큰 간극을 보입니다.

 

눈먼 소녀만큼 눈길을 끈 인물은 당시 이웃에 살던 소녀로 사건이 일어난 지 12년 후 독살사건을 잊혀진 축제라는 제목의 르포 스타일의 소설로 펴낸 마키코입니다. 그녀의 취재과정은 마치 독살사건의 범인을 밝히려는 듯한 형사의 탐문과도 유사했지만, 그녀 역시 끝내 새로운 진실을 얻어내진 못했습니다. 하지만 현재 시점에 인터뷰를 진행하는 인물은 마키코의 소설에서 지독한 위화감을 느꼈고, 누구에게도 밝히지 않은 어떤 이유때문에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힌 독살사건을 집요하게 조사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독자는 현재 인터뷰 대상자들의 진술 속에서 독살사건 당시의 정황을 포착해내야 하는 것은 물론 사건 발생 12년 후 마키코가 그 사건을 소설을 펴낸 목적도 함께 알아내야 한다는 뜻입니다. 온다 리쿠의 몽환적인 서술에 정신이 어른거리는 상태에서 말입니다.

 

사실, 온다 리쿠가 깔끔하고 친절한 미스터리를 선사할 거라고 기대하진 않았지만, 지루함을 느낄 틈이 없는 인터뷰 형식의 전개와 (다소 애매하긴 해도) 막판에 설명된 독살사건의 진실 덕분에 이도저도 아닌 혼란 속에 마지막 장을 덮는 일은 피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론 여전히 온다 리쿠 미스터리 소설의 정점이라는 출판사의 소개글과 일본추리작가협회상을 수상한 이력이 의문일 뿐입니다. 어쨌든 미스터리인데 다 읽고도 진범도, 동기도, 방법도 제대로 이해한 게 맞는지 확실치 않았고, 미스터리 외에 작가가 의도한 특별한 주제가 있었다고 해도 피부에 와 닿게 느껴지지 않았으니 조금은 허망한 기분이 들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작품의 완성도와 무관하게 순전히 취향의 차이 때문에 든 의문들이지만 지독히도 주관적인 이유로 야박한 평점을 줄 수밖에 없었던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제 책장엔 아직도 읽지 못한 온다 리쿠의 작품이 여러 권 쌓여있습니다. ‘여섯 번째 사요코이후 2년의 공백을 두고 다시금 온다 리쿠에 도전했지만 비슷한 좌절감(?)을 맛본 걸 보면 아마 다음 온다 리쿠 읽기는 더 많은 공백을 필요로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책장을 정리하기보다 재도전할 의지를 품는 걸 보면 아직은 온다 리쿠를 완전히 포기할 생각은 없어 보이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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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래 미스터리 - 어른들을 위한 엽기적이고 잔혹한 전래 미스터리 케이 미스터리 k_mystery
홍정기 지음 / 몽실북스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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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양을 막론하고 권선징악과 해피엔딩을 담은 동화들이 실은 그 이면에 잔혹하고 엽기적인 진짜 이야기를 숨기고 있다는 건 무척이나 호기심을 자극하는 발상입니다. 기류 마사오의 알고 보면 무시무시한 그림동화 시리즈나 아오야기 아이토의 옛날 옛적 어느 마을에 시체가 있었습니다같은 잔혹동화에 끌렸던 건 바로 그런 호기심 때문이었는데, 처음으로 우리의 전래동화를 소재로 어른들을 위한 엽기적이고 잔혹한 전래 미스터리를 그려낸 홍정기의 전래 미스터리역시 같은 이유 때문에 찾아 읽게 된 작품입니다.

 

콩쥐와 팥쥐’, ‘선녀와 나무꾼’, ‘해와 달이 된 오누이’, ‘여우 누이’, 그리고 혹부리 영감등 대표적인 전래동화를 기반으로 말 그대로 피와 살이 난무하는 끔찍한 이야기 다섯 편이 수록돼있습니다. 동화 자체에 충실한 경우도 있지만 다른 동화와 슬쩍 믹스된 경우도 있고, 동화에서 출발했지만 거의 새로운 이야기나 다름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콩쥐와 팥쥐를 원전으로 한 콩쥐 살인사건은 신데렐라의 유리구두 대신 콩쥐의 잘린 발목이 등장하는 후더닛 미스터리입니다. 콩쥐의 발목을 자른 범인을 찾기 위해 원님 앞에서 벌어지는 미스터리 대결이 흥미진진합니다.

나무꾼의 대위기는 우리가 잘 아는 선녀와 나무꾼에다 금도끼 은도끼가 믹스된 작품인데, 불륜(?), 살인, 원죄(冤罪) 등 동화와는 거리가 먼 코드들이 잘 버무려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제일 재미있게 읽은 살인귀 VS 식인귀해와 달이 된 오누이가 원전이지만 거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 텔레파시가 통하는 남매, 가족까지 잡아먹는 식인귀, 타고난 살인마가 등장하는 엽기적인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여우 누이를 원전으로 한 연쇄 도살마는 집 전체가 밀실인 상태에서 벌어지는 흉흉한 살육극을 그립니다. 짐승과 사람을 무차별로, 그것도 끔찍하기 짝이 없는 방법으로 살해하는 범인의 정체와 동기가 마지막에 밝혀집니다.

스위치는 전래동화 혹부리 영감과 연관 있긴 하지만 실제 이야기는 혹부리 영감의 거짓말에 격분한 도깨비와 파란 눈을 가진 백정의 아들이 이끌어갑니다. 도깨비와 거래를 한 이후 70년 가까이 사이코로 살아온 백정의 아들이 1인칭 화자로 이야기를 펼칩니다.

 

예상보다 독한 엽기성과 잔혹함이 눈길을 끌었고, 원전에 매몰되지 않은 자유분방한 상상력은 무척 매력적이었습니다. 다만, 살짝 가볍게 느껴진 서사와 (분량 때문에 불가피해 보인) 쉽거나 허술하거나 갑작스러운 미스터리가 아쉬움으로 남은 것도 사실입니다. 스릴러의 미덕이 잘 살아있는 살인귀 VS 식인귀가 가장 흥미롭게 읽힌 건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나무꾼의 대위기는 미스터리 자체보다 설정의 재미가 압권이어서 읽는 동안 몇 번이고 저절로 웃음이 터진 작품인데, 작가의 상상력이 가장 잘 발휘된 작품입니다.

 

전래동화라는 원전의 특성 상 10명의 작가가 달려들면 10개의 다른 이야기가 만들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앞으로 한국에서도 전래동화를 모티브로 한 미스터리와 스릴러가 좀더 창작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동화 속 인물이지만 너무 익숙한 나머지 실존인물처럼 여겨지는 주인공들이 권선징악과 해피엔딩의 틀을 넘어 잔혹하고 엽기적인 이야기 속에서 다양하게 변신하는 모습은 매번 색다른 매력을 전해줄 것 같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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