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름 엘릭시르 미스터리 책장
로스 맥도날드 지음, 김명남 옮김 / 엘릭시르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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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초반, 사립탐정 루 아처는 재판 증인으로 출석하기 위해 LA 남쪽 해변도시 퍼시픽포인트에 왔다가 우연히 만난 청년 앨릭스로부터 신혼여행 첫날 흔적도 없이 사라진 신부 돌리를 찾아달라는 의뢰를 받습니다. 주변 탐문을 통해 어렵지 않게 돌리를 찾긴 했지만 아처는 퍼시픽포인트를 떠날 수 없는 처지가 되고 맙니다. 탐문 중 만났던 한 여성이 총에 맞아 살해됐고, 하필 돌리가 그 시신을 발견하는 바람에 유력 용의자로 몰렸기 때문입니다. 돌리가 범인이 아니라고 확신한 아처는 진범 찾기에 나서지만 그 과정에서 각각 10년 전과 22년 전에 벌어진 살인사건이 현재 벌어진 살인사건과 연관 있음을 깨닫곤 크게 놀랍니다.

 

로스 맥도날드의 루 아처 시리즈를 처음 접한 건 2017블랙 머니’(1966)를 통해서입니다. 대실 해밋과 레이먼드 챈들러의 뒤를 이은 ‘3대 하드보일드 거장이라지만 블랙 머니를 읽기 전만 해도 작가와 주인공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는데, 당시 여러 가지 아쉬움이 남아서 언젠가 루 아처 시리즈를 한 편 정도는 더 읽고 싶다는 생각을 해왔습니다. (모두 18편인 루 아처 시리즈가운데 소름1963년 작으로 11, ‘블랙 머니13편입니다.)

블랙 머니와 마찬가지로 소름역시 아처가 쉽고 평범한 의뢰를 받는 것으로 이야기를 발진시킨 뒤 어마어마하게 복잡한 사건들과 인물들을 이끌어내는 구조를 지니고 있습니다. 신혼여행지에서 사라진 신부 돌리를 찾는 일은 아처에겐 한나절이면 충분한 일이었지만, 이후 살인사건이 벌어지고 용의자로 몰린 돌리의 비극적인 가족사가 드러나면서 이야기는 순식간에 볼륨감을 최대치로 키웁니다.

 

누군가 자신을 죽이려는 것 같다며 아처에게 도움을 청했다가 실제로 살해당한 여성, 그 여성과 친밀한 관계였으며 시신을 처음 발견한 탓에 용의자로 몰린 돌리, 아내를 죽인 혐의로 10년을 복역한 돌리의 아버지, 돌리의 비밀을 알고 있지만 입을 꼭 다무는 정신과 의사, 어머니의 눈을 피해 살해된 여성과 각별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대학 학생처장 등 돌리 주변의 많은 인물들이 아처의 주목을 끄는데, 문제는 그들에 관해 조사하면 할수록 점점 더 많은 인물들과 사건들이 줄줄이 딸려 나온다는 점입니다. 특히 22년 전에 사고사로 판명된 부유한 사업가의 죽음과 10년 전 남편에게 살해된 돌리의 어머니의 죽음에 주목한 아처는 어쩌면 현재 벌어진 살인사건이 그 사건들과 깊은 연관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에 이릅니다.

 

외관상으론 살인사건의 진실을 찾는 이야기지만, 읽는 내내 묵직한 불편함을 느끼게 만든 건 사건에 관련된 사람들 대부분이 고통스러운 가족사를 지니고 있다는 점입니다. “부모가 철저하게 파괴했고, 그들의 죗값을 대신 치러야만 하는 운명을 가진 아이들.”을 그렸다는 해설대로 그들은 권위적이고 독재적인 부모(가족)의 폭력과 압박에 의해 몸과 마음이 피폐해졌고, 시간이 지나도 치유되지 않은 그 피폐함은 끝내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무심하지만 인간미 넘치는 하드보일드 탐정 루 아처의 매력이 더 빛났던 건 사건 해결 자체보다 가족에게 당한 오랜 상처를 지닌 인물들을 대하는 그의 태도 때문입니다. 하드보일드 탐정의 전형적인 습성인 무력이나 직감 대신 그들의 입을 저절로 열게 만드는 아처의 카리스마는 때론 냉정하게, 때론 능글맞게, 때론 온기를 품은 채 발휘됩니다. 그들이 털어놓은 진술과 정보는 너무나도 많고 복잡하지만 아처는 어디에 집중해야 할지, 어디를 파고들어가야 할지 정확히 포착합니다. 그리고 막연한 추정이었던 ‘3중 살인을 입증하고 범인을 지목합니다.

 

워낙 많은 인물과 사건이 등장하기 때문에 중간에 혼란을 겪지 않으려면 메모장이 필수인 작품입니다. 이토록 복잡한 설정을 어떻게 설계했을까, 의문과 감탄이 저절로 들 수밖에 없었는데, 그래도 짧은 분량 안에 머리가 터질 듯한 복잡함을 담았던 블랙 머니에 비해서는 수월하게 읽힌 게 사실입니다. 다 읽고 복기를 해보면 이야기의 윤곽이 선명하게 잡히긴 하지만, 읽는 동안엔 작가와의 머리싸움을 각오해야 할 작품입니다.

 

루 아처 시리즈18편 가운데 단 5편만이 한국에 소개됐습니다. 그나마도 2010년대에 출간된 건 블랙 머니소름뿐입니다. 원작 자체가 1950~70년대에 출간돼서 고전으로 취급받는 이 시리즈가 출판사 입장에선 그다지 매력이 없겠지만, 그래도 이미 출간된 작품들의 개정판이 나오거나 새로 출간되는 작품이 있다면 특별한 고전 간식을 즐기는 기분으로 꼭 찾아 읽을 생각입니다. 미스터리 자체보다 하드보일드 명탐정 루 아처의 시크한 카리스마를 다시 한 번 만끽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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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변의 창 - 피의 노래
박성신 지음 / 북오션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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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신은 현대와 1960~70년대를 배경으로 가족의 비극과 시대의 문제를 정교한 미스터리로 풀어낸 3의 남자’(2017)로 처음 알게 됐는데, 재미와 완성도를 모두 갖춘 작품이라 후속작 소식을 기다렸지만 두 권의 앤솔로지 외엔 신작이 나오지 않아서 아쉬움이 남았던 작가입니다. 5년 만에 나온 새 작품이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역사물이라 다소 의외였지만, “실존인물 추남 남학을 소재로 한 충격적인 성형살인사건이라는 카피와 함께 피해자들의 얼굴을 잔혹하게 난도질한 연쇄살인사건을 다룬다고 해서 나름 기대감을 갖게 됐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남학은 난쟁이의 몸, 사자의 코, 늙은 양의 수염, 미친개의 눈, 닭발 같은 손을 지닌남자입니다. 하지만 그의 노래는 아름답고 영롱했으며, 여자 목소리까지 잘 내는 특별한 능력을 가졌다고 합니다. 작가는 이 남학이란 인물의 추한 외모와 아름다운 목소리에 착안하여 우정과 광기, 그리고 잔혹한 복수극의 주인공을 창조해냈습니다.

 

근친상간의 결과로 태어난 아기의 외모는 인간이라 할 수 없을 만큼 끔찍했습니다. 그저 괴물아이라 불리며 노파와 사냥꾼에게 이용당하다가 동굴에 버려진 아이는 11살 때 세상의 빛을 얻습니다. 또래인 양반 이수가 손을 내밀었고, 자신의 집에 살게 하며 황선이란 이름까지 지어주곤 사람에겐 귀천이 없으며, 우린 벗이다.”란 말과 함께 세상을 가르쳐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몇 년 후 이수는 한양으로 떠났고, 이후 황선은 또다시 괴물의 처지로 돌아가고 맙니다. 우여곡절 끝에 외모를 바꾸고 이름까지 남학으로 바꾼 황선은 한양에 도착해 이수를 만나지만 그는 자신을 못 알아보는 것은 물론 황선에 대해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날부터 남학은 자신의 특별한 능력을 이용하여 이수의 모든 것을 파멸시키기로 결심합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3의 남자때문에 생긴 기대감이 너무 컸던 탓인지 300여 페이지에 불과한 분량을 읽는 동안 여러 번 한숨이 나올 정도로 실망스러운 작품이었습니다. 이야기 자체부터 질릴 만큼 봐온 퓨전 역사물의 플롯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문장은 소설다운 깊이나 진중함은 찾아볼 수 없었으며 시나리오의 지문마냥 불면 휙 날아갈 듯 한없이 가벼웠습니다. , 경어와 평어가 한 문장에 뒤섞이거나 줄 바꿈이 제대로 안 이뤄지기도 하고, 한참 전 날아간 비둘기가 갑자기 되돌아와 눈앞에서 피를 토하기도 하고, 능동태 자리에 수동태가 들어오는 등 여기저기서 디테일의 문제가 목격됐는데, 수두룩한 오타를 비롯한 무성의한 편집까지 가세한 탓에 실은 중간에 포기할 마음이 들었던 게 사실입니다. 다른 건 이해한다 쳐도 두 주인공의 캐릭터목표3의 남자에서 맛봤던 박성신의 필력과는 너무나도 거리가 멀었습니다.

 

우선 이야기의 핵심인 남학의 복수 자체가 전혀 공감을 얻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이수의 모든 걸 빼앗고 파멸시키겠다는 남학의 심정이 공감을 얻으려면 그만큼 이수에게 얻은 상처가 깊고 커야 되는데 실제론 별 일 아니듯 대수롭지 않게 그려질 뿐입니다. 뒤늦게 남학을 갖고 놀았던어린 시절 이수의 본심이 설명되긴 하지만 그 설명이 초반에 나왔더라도 남학의 복수심을 이해하는 데는 별 도움이 되지 않았을 거란 생각입니다.

또 하나는 과하게 설정된 남학의 초능력입니다. 그는 세상의 모든 소리를 흉내 낼 수 있는 것은 물론 목소리만으로 타인을 완벽히 통제할 수 있는데다 아주 먼 곳의 소리까지 들을 수 있습니다. 어린 시절 사냥꾼과 노승에게 배운 해체술과 의학지식 덕분에 뛰어난 외과의사의 능력까지 갖췄습니다. 판타지라고 해도 좀처럼 이입하기 어려울 정도로 과했다는 생각입니다.

마지막으로 이수를 향한 남학의 복수극이 뜬금없이 반역도당과 연결되는 설정인데, 안 그래도 설득력이 전혀 없던 그의 복수심이 반역으로까지 확장되는 대목은 결국 반역 외엔 달리 해법이 없는 퓨전사극의 폐해를 그대로 모방한 듯 보였습니다. 그나마 반역 시퀀스가 재미있었다면 몰라도, 막판 관군과 반역군의 대결 장면은 좀 심하게 말하면 거의 메모 수준이었습니다.

 

기대가 컸던 탓에 실망이 컸던 것도 사실이지만, 최대한 객관적으로 봐도 살변의 창은 주인공의 성격과 목표, 사건의 전개, 클라이맥스와 엔딩, 문장력과 편집 모두 부족함이 많아 보인 작품입니다. 부디 다음 작품에서는 3의 남자에서 만끽했던 박성신의 매력을 다시 한 번 맛볼 수 있기를 기대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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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몰리션 엔젤 모중석 스릴러 클럽 28
로버트 크레이스 지음, 박진재 옮김 / 비채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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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능한 폭탄전문가 캐롤 스타키는 3년 전까지만 해도 LA경찰국 폭발물처리반에서 근무했지만, 그녀의 연인이자 파트너였던 슈거의 목숨을 앗아간 폭발사고 이후 범죄음모수사과에서 근무하는 중입니다. 몸과 마음에 남은 상처와 트라우마로 인해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지만, 스타키는 홀로 살아남은 죄책감을 못 이기고 술 담배에 찌든 채 냉소적인 성격으로 변해버렸습니다. 어느 날, 폭발물처리반의 한 요원이 LA 실버레이크에서 폭탄 제거 중 폭사하는 사건이 일어나고, 스타키는 폭탄에 대한 조사와 함께 주변 탐문을 벌입니다. 그러던 중 ATF(주류-담배-화기 단속국)에서 파견된 잭 펠이 나타나면서 상황은 급변합니다. 그의 말대로라면 이 사건은 미스터 레드라 불리는 폭탄 사이코패스의 범행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데몰리션 엔젤에 관심을 갖게 된 건 2017년에 읽은 로버트 크레이스의 ‘L.A. 레퀴엠때문입니다. ‘L.A. 레퀴엠은 엘비스 콜과 조 파이크가 주인공인 작품이지만, 짧은 등장에도 불구하고 주인공 못잖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조연이 바로 이 작품의 히로인이자 폭탄전문가인 캐롤 스타키입니다. 다른 독자의 서평을 통해 캐롤 스타키가 로버트 크레이스의 스탠드얼론 데몰리션 엔젤의 주인공이란 걸 알게 된 뒤 빨리 읽고 싶은 조바심이 일었지만, 게으름을 부리다가 결국 5년 만에 캐롤 스타기를 만나게 됐습니다. (참고로 원작 기준으로 ‘L.A. 레퀴엠1999, ‘데몰리션 엔젤2000년 작품입니다.)

 

전형적인 할리우드 액션물의 구도를 갖춘 데몰리션 엔젤은 간단하게 요약하면 폭탄에 환장한 사이코패스와 화이트 사이코패스의 대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파괴의 쾌감과 돈을 위해서라면 수많은 인명을 살상하는 것을 조금도 주저하지 않는 미스터 레드가 희대의 폭탄살인마라면, 캐롤 스타키는 유능한 수사관이자 폭탄처리전문가지만 동시에 폭탄과 단 둘이 있을 때면 자신을 폭탄의 일부로 느끼며 안도감을 느끼는 독특한 인물입니다.

두 사람의 대결에 끼어드는 세 번째 주인공은 ATF 요원 잭 펠입니다. 그는 7건의 폭탄사건을 일으킨 미스터 레드를 집요하게 쫓고 있으며, LA 실버레이크 사건 역시 그의 짓이라고 확신합니다. 안 그래도 냉소적이고 공격적인 스타키가 볼 때 사건을 빼앗으려는 듯한 잭 펠은 눈엣가시입니다. 하지만 잭은 수사의 주도권을 스타키에게 넘긴 채 조력자로 남습니다. 스타키를 못미더워하는 경찰 상부는 여차하면 사건을 강력과로 넘길 태세지만 스타키와 잭은 사소한 단서들을 통해 점차 진실에 다가갑니다.

 

로버트 크레이스의 대표작인 엘비스 콜 & 조 파이크 시리즈에서도 여러 번 맛봤지만 그의 액션 스릴러는 단순명쾌하고 시원한데다 엄청난 속도로 폭주합니다. ‘데몰리션 엔젤은 그런 미덕에 더해 캐롤 스타키라는 주인공의 트라우마까지 더해져 더욱 눈길을 끕니다. 3년 전 연인 슈거를 폭발사고로 잃은 정신적 트라우마는 말할 것도 없지만, 누구에게도 보여줄 없는 전신의 끔찍한 상처는 그녀로 하여금 절망 이상의 심연에서 허우적대게 만들었습니다. (심지어 스타키는 당시 245초 동안 심장이 멈추기도 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맞닥뜨린 미스터 레드사건은 스타키에겐 한편으론 동료를 죽인 범인을 잡겠다는 절실함을 발동시키지만, 다른 한편으론 3년 만에 누군가에게 자신의 몸을 보여주고 싶은 특별한 감정을 불러일으키기도 합니다. 해직과 징계를 각오하면서까지 미스터 레드를 잡기 위해 수사에 집착하는가 하면, 잭 펠 때문에 흔들리는 자신의 감정으로 인해 혼란을 느끼는 스타키의 캐릭터는 사건 자체보다 더 흥미롭게 읽히는 대목임에 분명합니다.

 

제가 잘못 아는 게 아니라면 캐롤 스타키의 다음 이야기를 그린 작품은 없습니다. 너무나도 매력적인 캐릭터지만 데몰리션 엔젤자체가 단 한 방에 그녀의 매력과 에너지를 모조리 소진시킨 탓에 더 이상 강렬한 이야기를 자아낼 수 없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저 아쉬울 수밖에 없지만, 아직 시리즈 전체(19) 가운데 단 4편만 한국에 소개된 엘비스 콜 & 조 파이크 시리즈에서 카메오로라도 좋으니 스타키의 모습을 다시 한 번 만나볼 수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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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 교실 - 젠더가 금지된 학교
무라타 사야카 지음, 최고은 옮김 / 하빌리스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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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이상한 소설뿐이지만, 나는 쓰는 동안 이런 일이 언젠가 실제로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기묘한 감각에 사로잡히고 말았습니다. 그렇기에 이 소설들은 매우 이상하지만, 내게는 매우 사실적인 이야기였습니다.”

 

전작인 살인출산소개글에 실린 무라타 사야카 본인의 말입니다. 10명의 아이를 낳으면 합법적인 살인권을 얻게 되는 세상, 세 사람의 사랑에서만이 쾌감과 정화를 느끼는 사람들, 섹스리스 부부의 섹스 없는 임신도전기, 의학의 발달로 자살만이 유일한 죽음의 방편이 된 세상 등 다소 불편하고 불쾌한 주제들을 상상을 초월하는 설정과 스토리를 통해 다뤘던 살인출산이 무척 인상 깊게 남았는데, 그 덕분에 무성 교실이라는 역시나 도발적인 제목이 붙은 새 단편집을 찾아 읽게 됐습니다.

 

네 편의 수록작은 살인출산소개글에 실린 작가의 말과 한 치도 어긋나지 않는 동일한 세계관을 그립니다. 27년 전 만화를 보고 따라 하기 시작한 마법소녀놀이를 36살이 된 현재까지 지속하며 현실에서 받는 스트레스의 용해제로 사용 중인 여성, 초등학생 때 품기 시작한 첫사랑에 대한 환상을 파괴하기 위해 첫사랑 당사자를 실제로 파괴하기로 결심한 여성, 성인이 될 때까지 학교에서 성별 노출을 금지시킨 세상에 살면서 자신의 성 정체성은 물론 사랑의 방법에 관해 큰 혼란을 겪는 여고생, 그리고 분노라는 감정 자체를 느끼지도, 알지도 못 하는 젊은 세대에게 큰 충격을 받은 40대 여성의 이야기가 그려집니다.

 

읽는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은 건 누가 정상이고 누가 비정상인가?”라는 생각입니다. 공교롭게도 출판사 소개글에도 바로 이 문구가 등장하는데, 매 수록작마다 초반엔 비정상으로 보이던 주인공이 갈수록 정상처럼 느껴지거나 반대로 정상으로 보이던 주인공이 점차 비정상으로 느껴지는 전개가 거듭됐기 때문입니다. 36살에도 마법소녀놀이를 그만두지 않는 여성이나 첫사랑의 환상을 파괴하기 위해 첫사랑 당사자를 실제로 파괴하는 여성이 전자라면, 성별이 금지된 학교에서 홀로 정상처럼 보이던 여고생이나 분노가 사라진 이상한 세상에서 홀로 정상적인 감정을 유지하고 있는 중년여성은 후자의 경우입니다.

감정이입의 대상인 주인공들이 이렇듯 정상과 비정상을 오락가락하는 동안 독자는 그들보다 더 큰 혼란을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곤 이런 일이 언젠가 실제로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기묘한 감각에 사로잡히고 말았습니다.”라는 작가의 말대로 리얼리티 충만한 판타지라는 역설적인 느낌까지 받게 됩니다.

 

살인출산이나 무성 교실은 일반적인 독자에겐 쉽고 편하게 읽힐 작품은 아닙니다. 가장 널리 알려진 무라타 사야카의 편의점 인간을 아직 읽어보진 못했지만, ‘크레이지 사야카라는 별명까지 얻은 걸 보면 그녀의 전공(그녀 표현대로라면) “매우 이상하지만, 매우 사실적인 이야기인 걸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야미쓰(イヤミス, 불쾌한 기분이 남는 미스터리)’를 좋아하는 제 취향과 일정 부분 맞닿긴 하지만 아무래도 그녀의 작품을 계속 찾아 읽는 건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딘가 도발적이고 호기심을 자극하는 소개글을 읽게 된다면 찜찜함 속에서도 관심을 갖게 될 게 분명하지만 말입니다. (무라타 사야카의 이상한 이야기가 궁금한 독자라면 살인출산을 먼저 읽을 것을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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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 마땅한 자
마이클 코리타 지음, 허형은 옮김 / 황금시간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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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인주 북부 대자연에서 전문 가이드로 살아가고 있는 리아 트렌턴. 하지만 그녀의 진짜 이름은 니나 모건이며, 공식적으로 니나는 10년 전에 사망했습니다. 사악한 민간 군수기업 라워리를 상대로 살인 목격증언을 할 예정이던 니나는 라워리가 고용한 킬러들에게 살해당할 위기에서 가까스로 벗어날 수 있었지만 그 대가로 이름과 가족을 버리고 죽은 자가 되기로 약속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온 지 10년 만에 리아는 남편이 불의의 사고로 사망한 소식을 듣고 충격에 빠집니다. 여전히 라워리의 살해 위협이 남아있었지만, 리아는 딸 헤일리와 아들 닉을 찾아가 자신을 이모라고 소개하곤 메인주로 데려옵니다. 하지만 우려했던 대로 라워리는 리아를 찾아냈고 두 명의 킬러를 보내 10년 전의 실수를 만회하려고 합니다.


 

대략의 줄거리만 보면 전형적인 할리우드 액션물이라는 선입견을 가질 수도 있는데, 반쯤은 맞는 말이고, 반쯤은 잘못 넘겨짚은 선입견입니다. 이름과 가족까지 버린 채 죽은 자로 살아온 어머니 리아가 자식들을 위기에서 구하기 위해 무자비한 킬러들과 싸우는 이야기란 점 때문에 반쯤 맞는 말이기도 하지만, 너무나도 독특하고 매력적이고 예측불허인 킬러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는 점을 감안하면 분명 잘못 넘겨짚은 선입견이라는 뜻입니다.

 

1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라워리가 자신을 추적할 가능성이 높은 상태에서 리아가 헤일리와 닉 남매 앞에 이모로 나타나는 걸 주저하지 않은 이유는 오로지 모성애 하나 때문입니다. 그리고 라워리의 킬러들의 추적을 감지한 리아는 메인주의 대자연 속으로 남매를 피신시키며 동시에 목숨을 건 반격을 준비합니다. 숱한 위기를 넘기며 리아의 미션이 성공하는 건 당연한 일이고, 그런 점에서 상투적인 서사인 건 부인할 수 없지만, 리아의 악전고투에 끼어든 세 명의 킬러들 때문에 이 작품은 여느 할리우드 액션물과 비교할 수 없는 독창성을 갖게 됩니다.


 

우선 라워리가 리아를 제거하기 위해 보낸 두 명의 킬러는 그야말로 피도 눈물도 없는 살상극을 벌이며 리아를 추적합니다. 그중에서도 블리크(Bleak, 황량한)라는 별명을 가진 흑인 킬러 마빈 샌더스가 눈길을 끄는데, 군인 출신인 그는 변화 없는 표정, 땀조차 흘리지 않는 냉철함, 로봇과도 같은 무자비함으로 지금껏 봐온 킬러들과는 레벨 자체가 달라 보이는 인물입니다. 그가 워낙 특별한 캐릭터라 파트너인 랜달 폴라드는 상대적으로 존재감이 미미해 보이지만 역시 살인을 소소한 유희로 여기는 끔찍한 인물입니다.

 

라워리의 두 킬러를 능가하는 희대의 캐릭터는 젊은 킬러 댁스 블랙웰입니다. 리아와 함께 실질적인 투톱 주인공이기도 한 그는 리아의 지인의 요청을 받고 리아를 돕기 위해 메인주로 향하지만, 정작 현지에 도착해선 예측불허의 행보를 보입니다. 정말 아군인지, 혹은 돈을 위해서라면 언제든 등을 돌릴 수 있는 예비 적군인지조차 불분명해 보입니다. 더구나 피와 살이 난무하는 총격전 속에서도 쾌감과 희열을 느끼고 사소하거나 자기중심적인 이유로 인명을 빼앗는 순도 100%의 소시오패스이기도 합니다.

댁스 블랙웰에 관한 재미있는 사실 하나는, 그가 증인 청부살해의 명문(?)인 블랙웰의 후손이며, 14살부터 실적을 쌓았다는 점, 또 그를 킬러로 키운 아버지 잭과 삼촌 패트릭이 마이클 코리타의 전작인 내가 죽기를 바라는 자들에서 주인공을 죽이기 위해 투입된 킬러로 등장했다는 점입니다. 그의 캐릭터나 출신성분, 그리고 이 작품에서의 맹활약을 감안해 보면 마이클 코리타가 댁스 블랙웰 시리즈를 내놓을 가능성도 충분해 보입니다.


 

내가 죽기를 바라는 자들과 마찬가지로 이 작품 역시 마이클 코리타가 직접 시나리오를 맡아 영화로 준비 중이라고 합니다. ‘내가 죽기를 바라는 자들이 산악지대의 대형화재라는 볼거리를 제공했다면 죽어 마땅한 자는 메인주의 대자연, 특히 리아와 킬러들의 숨 막히는 대결이 벌어지는 숲과 강과 호수가 압도적인 비주얼을 자랑할 것으로 보입니다. 가족을 위해 목숨을 건 각오로 싸우는 리아와 럭비공처럼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킬러 댁스 블랙웰의 카리스마 역시 너무나도 매력적이어서 영화로 개봉된다면 꼭 한 번 다시 맛볼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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