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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받지 못한 밤
미치오 슈스케 지음, 김은모 옮김 / 놀 / 2022년 3월
평점 :
소박한 식당을 경영하는 유키히토는 낯선 남자의 협박전화를 받습니다. 그는 15년 전 유키히토의 아내 에쓰코의 죽음이 당시 4살이던 딸 유미 때문이란 걸 안다며 돈을 요구합니다. 유미에게 숨겨온 비밀이 폭로될 위기에 처하자 유키히토는 심신이 망가졌고, 끝내 식당 문을 닫고 잠시 몸을 피하기로 결심합니다. 그런데 유미는 아버지의 고향인 하타가미에 가고 싶다며 고모 아사미까지 함께 갈 것을 제안합니다. 31년 전 어머니가 의문사했고, 그 1년 후엔 아버지가 살인범으로 몰렸던 고향이라 유키히토로선 내키지 않았지만, 어쩌면 부모의 비극의 진실을 알아낼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취재진으로 위장하고 하타가미를 찾습니다. 그리고 유키히토는 끔찍하지만 정면으로 마주할 수밖에 없는 진실과 맞닥뜨립니다.
(대표작은 읽지도 못했고 겨우 여섯 편밖에 못 읽었지만) 최근에 읽은 ‘절벽의 밤’까지 미치오 슈스케는 제게 다소 ‘애매한 작가’였던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용서받지 못한 밤’은 그가 일본 유수의 문학상에서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점, 또 이 작품에 대해 “앞으로 내가 쓰는 작품들의 강력한 라이벌이 될 것”이라며 과도한 자신감을 내비친 이유를 확실히 공감하게 만든 명품입니다. 다 읽은 뒤 인터넷 서점에서 발견한 “반전이라는 흔한 단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압도적 수수께끼”라는 일본 독자의 호평 역시 100% 공감할 수 있었는데, 연말에 선정할 개인적인 ‘미스터리 베스트’에도 포함될 것이 거의 분명할 정도로 매력적인 작품입니다.
40대 중반에 이른 유키히토에겐 인생을 뒤흔든 세 번의 위기가 있습니다. 30년 전 고향 하타가미에서 벌어진 부모의 비극, 15년 전 4살 딸 유미가 일으킨 아내 에쓰코의 죽음, 그리고 현재 딸 유미에게 아내의 죽음의 진상을 알리겠다며 돈을 요구하는 한 남자의 협박이 그것입니다. 어머니는 의문의 죽음을 당했고, 아버지는 살인범으로 몰리다가 고향을 등졌으며, 누나 아사미는 신사에서 벼락을 맞아 온몸에 번갯불 모양의 흉터가 남는 비운을 겪은 탓에 유키히토에겐 딸과 아내와 함께 꾸린 가족이 이 세상 무엇보다 소중한 존재였지만, 아내가 죽고 15년이 지난 지금, 딸마저 잃을 위기에 처하자 유키히토는 극심한 공포에 사로잡힙니다.
그런 그가 몸을 피한 곳이 부모와 누나에게 끔찍한 참극을 남긴 고향 하타가미라는 건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유키히토를 더욱 긴장하게 만든 건 이왕 하타가미로 갈 거라면 30년 전 사건의 진실을 알아내겠다고 결심한 점입니다. 딸 유미와 누나 아사미까지 취재진으로 위장한 가운데 하타가미의 신사를 지키는 신관 기에, 하타가미에 머물고 있던 향토연구가 아야네, 그리고 30년 전 사건을 기억하고 있는 이웃들을 통해 조금씩 진실에 다가가지만, 유키히토는 “이 세상에는 어떤 신도 없다.”는 결론을 내릴 만큼 가혹하고 잔인한 운명의 장난들을 알게 되면서 자책과 회한에 사로잡히고 맙니다.
출판사 소개글에 따르면 이 작품은 “시간과 기억 그리고 가족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30년이라는 장구한 시간, 왜곡되거나 훼손된 기억의 문제, 그로 인해 벌어진 기막힌 오해와 의심들, 그리고 30년의 간극을 두고 벌어지는 잇단 살인과 자살은 유키히토 집안 3대에 걸쳐 악몽과도 같은 시련을 안겨줍니다. 마지막에 밝혀진 진실이 오랜 시간의 오해와 의심을 불식시켜주긴 하지만 위로와 안식 대신 씁쓸함, 안타까움, 자책감을 더할 뿐이라 독자로선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마음으로 느껴지는 무게감이 엄청날 수밖에 없습니다.
앞서 소개한 “반전이라는 흔한 단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압도적 수수께끼”라는 일본 독자의 호평은 클라이맥스에서 엔딩에 걸친 폭발적인 전개를 읽다 보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을 텐데, 가족의 비극과 정교한 미스터리가 제대로 합을 이룬 가운데 과거와 현재가 뒤엉킨 미스터리가 완벽한 복선 회수와 함께 명쾌하게 설명되는 대목은 말 그대로 ‘압도적’이라 감탄과 한탄을 번갈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 작품에서 눈길을 끄는 설정 중 하나는 ‘벼락’입니다. 이 작품의 원제는 ‘뇌신’(雷神)이며, 유키히토의 고향 하타가미는 ‘벼락이 많이 치는 마을’이란 뜻에서 붙은 지명입니다. 아버지가 살인범으로 몰렸던 그해 아사미는 벼락에 직격당했고, 사건 해결에 중요한 역할을 맡은 신관 기에가 모시는 신은 뇌신입니다. 명백한 과학현상이지만 어딘가 종교적이거나 신화적인 성격도 갖고 있는 벼락과 그것을 관장하는 뇌신의 이야기는 유키히토의 진실 찾기에서도 꽤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설정이라 읽는 내내 눈길이 끌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미치오 슈스케의 작품을 읽을 때마다 매번 그의 대표작 ‘해바라기가 피지 않는 여름’을 읽지 못한 게 마음에 걸렸는데, ‘용서받지 못한 밤’ 덕분에 조만간 책장에서 구해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비록 작품마다 호불호가 많이 갈리긴 했지만 그의 진가를 뒤늦게나마 알게 된 것 같아 반갑고 또 반가운 책읽기가 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