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반사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23
누쿠이 도쿠로 지음, 김소영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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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시아버지 병문안을 마치고 귀가하던 미쓰에와 두 살배기 아들 겐타를 강풍에 뿌리째 뽑힌 가로수가 정면으로 덮칩니다. 미쓰에는 머리를 크게 다친 겐타를 급히 병원으로 옮기려 하지만 구급차는 갑작스런 교통 정체에 휘말리고 인근 병원에선 응급환자가 많은데다 외과의사가 없다며 진료를 거부합니다. 악운이 이어진 끝에 치료시기를 놓친 겐타는 끝내 숨지고 맙니다. 겐타의 아버지 가야마는 가로수 관리를 소홀히 한 조경회사에 책임을 물으려 하지만, 사고의 원인을 파헤칠수록 겐타의 죽음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한 이들이 한둘이 아님을 깨닫습니다. 하지만 법으로 재단할 수 없는 사소한 죄의 조각들은 가야마를 심연과도 같은 절망과 분노 속으로 몰아넣습니다. (출판사가 공개한 선에서 정리한 줄거리입니다.)

 

통곡’, ‘후회와 진실의 빛’, ‘우행록’(개정판 제목은 어리석은 자의 기록’) 등 누쿠이 도쿠로 작품의 매력은 아이러니하게도 독자의 마음속에 바윗돌 하나를 얹어놓은 듯한 불편함을 느끼게 만든다는 점입니다. 결과보다 과정에, 사건보다 심리나 감정에 소구하는 그의 작품들은 매번 저절로 한숨이 나오게 만들거나 다소 우울한 여운을 길게 늘어뜨리기 때문입니다. ‘난반사는 누쿠이 도쿠로의 여느 작품보다도 그런 느낌이 더 강렬한 편에 속하지만 500페이지에 육박하는 분량을 순삭 시킬 정도로 재미면에서도 압도적입니다. 또 형식적인 면에서도 일반 미스터리와 전혀 다른 독특한 구성을 갖추고 있어서 여러 가지로 눈길을 끈 작품입니다.

 

언뜻 불운한 사고로만 보이는 아이의 죽음은 사실 살인이었다. 그것도 수많은 사람들이 합세해서 죄 없는 아이를 죽인, 더할 수 없이 이상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누구 하나 그 죽음의 특이성을 알아채는 이 없이 범인들은 오늘도 평범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 (p 6)

 

시작하자마자 범인()과 피해자와 사건의 개요가 공개됩니다. 줄거리와 프롤로그를 조합해보면 두 살배기 아이가 쓰러진 가로수에 맞아 사망한 사건에 여러 사람이 직간접적으로 관여됐다는 것, 또 그들은 명백히 아이의 죽음을 야기한 범인이지만 어떤 처벌도 받지 않고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미스터리 애호가가 아니더라도 이야기의 윤곽을 예상할 수 있을 정도니 다소 맥이 빠지는 게 아닐까, 우려할 수도 있지만 누쿠이 도쿠로는 누가 범인?’이 아니라 작고 사소한 악의와 이기심들이 어떤 식으로 난반사 된 끝에 무고한 아이의 죽음을 일으켰는가를, 그리고 그 악의와 이기심이라는 것이 흉악하고 난폭한 자들의 것이 아니라 실은 세상사람 누구나 하루에도 몇 번씩 저지르곤 하는 일상적인 행동이란 것을 집요하게 그려내어 독자에게 분노와 절망과 공감과 비탄을 한꺼번에 맛보게 만듭니다.

 

허영심에서 사회운동을 시작한 전업주부, 적당주의에 물든 태만한 의사, 복잡한 낮시간을 피해 응급환자용 야간진료를 찾는 대학생, 별 탈 없이 무난한 직장생활만 원하는 전형적인 공무원, 동생에 대한 열등감과 타고난 소심함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 젊은 여성, 반려견의 분변을 길에 방치하는 노인, 그리고 노부모 간병 때문에 갈등을 벌이다가 아들을 잃고 비극의 주인공이 된 부부 등 두 살배기 겐타를 죽음으로 내몬 인물들의 사연이 천천히, 하지만 그래서 더 고조된 긴장감과 비극성을 품은 채 하나씩 독자에게 설명됩니다.

 

작가 스스로 “‘난반사의 테마와 무관한 사람은 한 명도 없을 겁니다.”라고 했듯 실은 겐타의 죽음에 관여한 이들의 행동은 너무나 평범하고 흔한 것들이라 역설적이지만 더 큰 무게감과 충격을 지닙니다. 법보다는 도덕과 양심에 영향을 받는 행동들, 하지만 그래서 누구나 쉽게 어기고 무시하는 행동들, 그리고 그 행동들을 스스로 어쩔 수 없었다.”, “딱 한 번만.”이란 식으로 합리화하는 작은 악의와 이기심들. 누구나 하루에도 몇 번씩 마주치게 될 평범한 상황들이지만 그런 것들이 연쇄적으로 일으킨 불운의 나비효과는 두 살배기 겐타에겐 너무나 잔혹한 것들이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내가 뭘 잘못했냐?”만 내뱉을 뿐 그 누구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도, 겐타의 죽음에 대해 사과하지도 않는다는 점, 그리고 그들을 법으로 단죄할 수도, 언론을 통해 응징할 수도 없다는 점입니다. 겐타를 죽음으로 내몬 사람들을 찾아다니던 아버지 가야마는 매번 참을 수 없는 분노에 사로잡히지만, 스스로도 그들과 다를 바 없음을 깨닫곤 어찌할 수 없는 절망감에 자책을 거듭하게 됩니다.

 

개운하지도, 통쾌하지도 않은 누쿠이 도쿠로 식 엔딩은 독자마다 호불호가 많이 갈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어두운 면을 그만의 특별한 구성과 문장을 통해 깊이 있게 그려내는 누쿠이 도쿠로의 스타일을 저는 무척 좋아합니다. 한국에 출간된 12편 가운데 난반사까지 9편을 읽었으니 나름 팬이라 자처해도 될 것 같습니다. 다만, 2017년 이후 더는 한국 출간 소식이 없어서 그저 아쉬울 따름인데, 아껴 읽느라 몇 년씩 책장에 방치해놓은 나머지 세 작품도 이제는 한 편씩 꺼내 먼지를 털어줘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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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 마땅한 자
마이클 코리타 지음, 허형은 옮김 / 황금시간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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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작품도 ‘내가 죽기를 바라는 자들‘만큼 강렬한 내용일 것 같네요. 제목부터 무척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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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한 장난감 케이 미스터리 k_mystery
박상민 지음 / 몽실북스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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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면부족은 기본이고 비인간적인 초과근무에 대학병원 내 모든 직종의 이나 다름없는 신세라 공공연히 최하층 계급으로 불리는 인턴. 장래 정형외과 의사를 꿈꾸는 명성대학병원 인턴 강석호는 오로지 레지던트 합격을 위해 오늘도 지옥 같은 인턴 생활을 견디는 중입니다. 하지만 갑작스레 병세가 악화되어 사망한 두 환자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며 징계위원회에 회부되고, 이어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로 경찰 수사를 받는 것은 물론 인턴 자격을 박탈당할 수도 있다는 통보를 받곤 패닉 상태에 빠집니다. 두 환자의 죽음이 자신의 실수 탓이 아니란 걸 입증할 수 있는 시간은 24시간도 채 남지 않은 상황. 강석호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조사에 나서지만 그 과정에서 괴물과도 같은 대학병원의 민낯과 마주치게 됩니다.

 

개인적으로 가이도 다케루의 메디컬 엔터테인먼트 미스터리 다구치-시라토리 시리즈를 무척 좋아합니다. 도조대학병원을 무대로 펼쳐지는 흥미진진한 이야기는 메디컬 스토리의 미덕과 미스터리의 강점을 두루 갖추고 있어서 첫 편인 바티스타 수술 팀의 영광이후 한 편도 빠지지 않고 읽어왔습니다.

위험한 장난감에 눈길이 갔던 건 무엇보다 메디컬 엔터테인먼트 미스터리라는 홍보 카피 때문인데, 가이도 다케루의 다구치-시라토리 시리즈에 대한 오마주로 보이기도 했고, 또 그 작품들에 맞먹겠다는 자신감이 엿보이기도 했습니다. 대학병원이라는 무대까지 닮은꼴이라 더 기대감이 들었는데, 드라마나 소설로 많이 봐온 일본 대학병원에 비해 정작 그 내부 사정을 잘 모르는 한국 대학병원의 속살을 들여다볼 기회가 될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야말로 인생 자체가 개고생인 인턴 강석호는 하루아침에 자신의 모든 것을 잃을 위기에 처합니다. 두 환자의 죽음의 책임을 지고 그동안 쌓아온 것들과 다가올 미래를 통째로 내놓게 됐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한 명의 환자에 관한 한 자신의 책임이 아님을 확신한 강석호는 순진하게도 인간의 양심을 믿어보지만 바보 취급을 당하거나 미안하지만 도와줄 수 없다.”는 냉정한 대답만 듣고 맙니다. 징계위원회까지 24시간도 채 안 남은 상태에서 강석호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두 환자의 죽음의 진상을 알아내기 위해 분투합니다. 사망자가 발생한 병실의 환자들을 탐문하고, 몰래 시신 안치실에 잠입하고, 사망자들의 기록을 열람했던 의료진 명단을 입수하는 등 물러설 곳 없는 각오로 조사를 하면서도, 한편으론 자신의 실수를 덮기 위해 엉뚱한 희생양을 찾는 탐정 놀이를 하고 있는 건 아닌지 자괴감에 빠지기도 합니다.

 

복잡한 의학용어들이 난무하지만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가는 데는 큰 무리가 없습니다. 교수, 레지던트, 간호사, 사무직 등 인턴을 으로 아는 대학병원 내의 인간관계도 흥미롭습니다. 자칫 의사로서의 인생을 종치게 될지도 모를 강석호의 진실 찾기는 피를 말리는 시간제한 설정 속에 팽팽한 긴장감을 놓치지 않습니다.

하지만 결정적인 대목에서 미스터리가 힘을 잃은 건 무척 아쉬웠습니다. 범인의 동기는 억지에 가까울 정도로 설득력이 없었는데, 앞서 그럴 만한 정황이나 밑밥이 뿌려진 적이 없다보니 그 사람들이 그런 관계였어?”라는 허망한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범인 입장에서 살인으로 인해 얻을 것이 별로 없다는 점도 의아한 대목입니다. 범행수법들 역시 설정을 위한 설정’, 즉 새롭고 기발한 방법을 고민하다가 오히려 사실감을 놓쳤다는 생각인데, 그중 한 가지 방법은 허술하고 들통 날 여지가 너무 많아서 범인의 수준을 훅 떨어뜨리고 말았습니다.

 

가이도 다케루의 다구치-시라토리 시리즈에서 가장 매력적인 대목은 대학병원 내의 치열하고 잔인한 권력구도입니다. 미스터리의 힘을 몇 배는 더 강렬하게 만드는 불쏘시개 역할 역시 그 권력구도입니다. ‘위험한 장난감은 분명 그 권력구도를 밑바탕에 깔아두고 있지만 정작 이야기의 몸통에선 그 부분이 제대로 묘사되지 않았습니다. 즉 최하층 계급이자 모두의 밥인 강석호의 수난사와 고군분투기가 대부분이라 뒤늦게 권력구도를 강조한 클라이맥스와 엔딩이 힘을 얻지 못한 것입니다. 에필로그와 작가의 말을 보면 강석호 시리즈가 계속 이어질 것 같은데, 후속작에서는 밑바탕과 몸통의 조화가 좀더 잘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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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웃는 숙녀 두 사람 비웃는 숙녀
나카야마 시치리 지음, 문지원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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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급호텔에서 열린 동창회에서 독살사건이 일어나고, 관광버스가 폭발하며 수십 명이 사망합니다. 이어 학교 방화와 살인, 피트니스 클럽 폭파 등 테러 수준의 범죄가 꼬리를 물고 벌어집니다. 수백 명의 인력을 동원하고도 피해자들 사이의 접점은 물론 제대로 된 단서 하나 찾지 못한 경찰이 궁지에 몰릴 무렵, 놀랍게도 CCTV에 유력 용의자가 포착됩니다. 엽기적인 연쇄살인에 관여한 뒤 의료교도소를 탈주해 지명 수배 중인 우도 사유리. 그녀는 희대의 악녀 가모우 미치루의 지시로 대량살상을 저지르고 있지만 경찰은 두 사람의 콤비 플레이는 상상도 하지 못한 채 우왕좌왕할 뿐입니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필수까지는 아니어도 비웃는 숙녀 두 사람을 제대로 맛보려면 먼저 읽어야 할 작품들이 있습니다. 악녀 가모우 미치루의 소름 돋는 행적을 그린 비웃는 숙녀 시리즈두 편과 사이코패스 우도 사유리의 과거를 그린 연쇄 살인마 개구리 남자 시리즈두 편이 그것입니다. (좀더 오랜 사유리의 과거는 미코시바 레이지 시리즈의 첫 편인 속죄의 소나타에 소개됩니다.)

 

간략하게 두 사람의 캐릭터를 정리해보면, 자신의 손은 조금도 더럽히지 않은 채 상대를 치명적인 절망에 빠뜨리거나 살인을 저지르게 만들거나, 심지어 자살에 이르게 만드는 희대의 악녀 가모우 미치루의 목적은 돈도 쾌락도 아닙니다. 그냥 툭 하고 머릿속의 방아쇠가 당겨지면 그 순간 상대를 으스러뜨리겠다는 욕망이 불붙고, 이어 누구도 생각해내기 어려운 치밀한 계획을 세운 뒤 그대로 실천할 뿐입니다. 반면 해리성 인격 장애와 반사회적 인격 장애를 지닌 우도 사유리는 어려서부터 의료소년원에 수용된 적이 있으며, 성인이 된 뒤 끔찍한 연쇄살인사건에 관여한 일로 의료교도소에 갇혔다가 탈주한 인물입니다. 두 악녀의 차이라면, 미치루가 동정도 자비도 공감 능력도 없으며 사람을 그저 벌레처럼 여기는 반면, 사유리는 적어도 상대를 동족으로 인식하기에 살인 행위에서 흥분과 희열을 느낀다는 점입니다.

 

두 사람 모두 살육과 파괴에 공포를 느끼지 않는다. 공포 불감증이기에 무감각하게 일을 벌일 수 있다. 두 사람이 만난 것은 기적 같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p293~294)

 

각각 다른 시리즈에서 희대의 악녀 역할을 수행한 미치루와 사유리가 콤비 주인공으로 등장한다는 것만으로도 비웃는 숙녀 두 사람은 올해 최고 기대작 중 한 편으로 꼽힐 만 했습니다. 과연 두 사람이 원 팀으로 활약할지, 아니면 누군가 죽어야 끝나는 벼랑 끝 게임의 적으로 만나게 될지 무척 궁금했는데, 결론적으론 두 이야기를 모두 맛볼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눈길을 끈 건 그동안 개인을 목표물로 삼았던 두 사람이 어마어마한 수준의 대량살상을 저지른다는 점입니다. 특히 앞선 작품들에서 타인의 악의를 부추겨 끔찍한 짓을 저지르게 사주하긴 했지만 단순히 악녀로만 볼 수 없는 선악의 경계선에 서있던 미치루가 독살과 폭탄을 이용하는 순도 100%의 악녀로 부활한 점은 꽤 충격적인 대목이었습니다. 테러 수준의 대량살상을 저지른 미치루와 사유리가 과연 어떤 엔딩을 맞이하게 될지 읽는 내내 궁금했는데, 나카야마 시치리는 예의 독자의 기대에 부응하는 흥미롭고 서늘한 종장을 선보입니다.

 

나카야마 시치리의 작품을 읽는 재미 중 하나는 다른 시리즈의 인물들이 교차 출연하는 장면들입니다. 의료소년원에서 사유리와 각별한 인연을 맺은데다 현재는 그녀의 변호인 겸 신원보증인인 미코시바 레이지가 카메오 이상의 비중으로 등장하고, ‘연쇄 살인마 개구리 남자 시리즈에서 사유리를 쫓던 사이타마 현경의 신참 고테가와가 이제는 제법 구력이 붙은 형사로 찬조 출연합니다. 비웃는 숙녀 시리즈에서 미치루의 악행과 신출귀몰한 행적에 충격을 받았던 아소 반장은 수사를 이끄는 라이벌 기리시마 반장과는 사뭇 다른 추론을 내세웁니다.

 

흥미진진하게 읽었지만 두 가지 아쉬움이 남았는데, 하나는 두 악녀의 폭발력이 기대만큼 강렬하진 못했다는 점입니다. 아무래도 경시청 수사1과 형사 미야마의 관점에서 이야기가 전개된 탓으로 보이는데, 물론 마지막 장에서 작가가 독자의 기대와 갈증 두 악녀의 정면충돌 - 을 해소해주긴 하지만 그 역시 살짝 모자란 느낌이었습니다. 또 한 가지는 블루홀식스의 작품답지 않게 여러 곳에서 발견된 오타입니다. 조사 등 단순 오타는 물론 인물 이름까지 틀린 경우가 제법 있어서 무척 아쉬웠는데 이 부분은 나중에라도 꼭 수정되기를 바랍니다.

 

비웃는 숙녀 시리즈가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르겠지만 나카야마 시치리의 여러 시리즈 가운데 가장 관심을 두고 있는 독자 입장에서 앞으로 적어도 몇 편 정도는 미치루의 이야기를 더 만나보고 싶은 바람이 있습니다. 이번 작품에서 저지른 대량살상 때문에 미치루는 돌아올 수 없는 선을 확실히 넘었고 언젠가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반드시 치러야겠지만, 그 전까지 악녀미치루의 이야기가 좀더 이어지기를 바라는 욕심은 아마 저만의 것은 아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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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대왕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9
윌리엄 골딩 지음, 유종호 옮김 / 민음사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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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세에서 12세에 이르는 영국 소년들이 격추당한 비행기에서 비상 탈출한 뒤 태평양 무인도에 고립됩니다. 그들은 12세 소년 랠프를 대장으로 삼아 생존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하지만 얼마 못가 두 패로 갈라지고 맙니다. 랠프는 집단의 규칙을 정하고 봉화를 통한 구조요청을 최우선으로 삼지만, 애초 랠프가 대장이 된 것에 반감을 품고 있던 잭은 멧돼지 사냥을 통해 소년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는 한편 독재적이고 폭력적인 방식으로 권력을 휘두르기 시작합니다. 무인도라는 절박한 상황 속에서 이들의 갈등은 점점 심각해지고 끝내 살인까지 서슴지 않는 야만적인 형태에 이르고 맙니다.

 

(서평에 앞서 먼저 언급하고 싶은 건 파리대왕을 읽고 싶은 독자라면 다른 출판사 혹은 다른 번역가의 작품을 찾거나 새로운 번역으로 출간되길 기다리는 게 낫다는 점입니다. 1999년에 1쇄가 나왔고 제가 읽은 건 2015년의 66쇄인데, 어설픈 직역 혹은 시대에 한참 뒤떨어진 번역으로 무려 16년 동안 66쇄까지 찍었다는 게 (출판사의 명성을 감안하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소년들이 할아버지 말투로 말하고 있다.”는 한 독자의 비판은 형편없는 번역의 문제를 단적으로 지적하고 있는데, 실은 이보다 심각한 대목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노벨상까지 받은 작품이 한국에서 이런 대접을 받는다는 게 그저 씁쓸할 뿐이었습니다.)

 

언젠가는 읽어야지, 생각만 하고 있던 윌리엄 골딩의 파리대왕을 뒤늦게 읽게 됐습니다. “무인도에 갇힌 소년들이 괴물이 돼버리고 마는 이야기라는 어설픈 정보만 알고 있었지만 개인적으로 무척 좋아하는 설정인데다 명품 고전에 대한 지적 허영심까지 더해져 나름 큰 기대를 가진 작품입니다.

 

요즘의 6~12세라면 어른 뺨 칠 정도로 알 건 다 아는 나이지만, 이 작품이 집필된 1954년을 기준으로 하면 리더 역할을 하는 12세 소년이라고 해봐야 세상에 대해 이제 막 눈을 뜬 정도에 불과합니다. 어른 하나 없는 무인도에 고립된 그 또래 소년들이 원초적인 본능과 욕망 때문에 자연스레 권력투쟁을 벌이고 살인을 서슴지 않게 되는 과정은 도구와 불을 손에 넣은 원시인들이 자신들의 영역을 주장하며 전쟁과 살상을 일으킨 먼 고대의 그것을 떠올리게 만듭니다. 모르긴 해도 15세 혹은 그 이상의 소년들이었다면 이 작품이 안긴 충격과 의미는 10분의 1도 채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랠프가 법과 규칙을 통해 집단을 조율하면서 분업과 협동으로 구조 계획을 세우는 인물이라면, 자신이 대장이 되지 못한 것에 분노한 잭은 멧돼지 사냥을 통해 식욕이라는 원초적인 욕망을 채워주며 야만성과 본능에 호소하는 인물입니다. 애초 합리적인 대장 랠프에게 기울었던 소년들은 무인도라는 무자비한 환경에 시달리면서 점차 구조 자체보다는 잭이 제공한 기름진 멧돼지 고기에 집착하기 시작했고, 결국 잭이 소년들을 손아귀에 넣을 무렵에는 통제 불가능한 광기가 무인도 전체를 지배하기에 이릅니다. 그리고 그때부터는 자기편이 아닌 자는 단지 갈등의 상대가 아니라 죽여 없애야 할 대상으로 여기기 시작합니다.

 

살아남기 위해 상대를 죽여야 하는 배틀 로열식 서바이벌 게임이 아니라, 아직 세상의 더러운 것들을 접하지 못한 무구한 소년들이 누가 가르쳐주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자연스레 권력투쟁의 당사자로, 무시무시한 괴물로 진화하는 과정은 그야말로 섬뜩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워낙 독하고 센 서사를 많이 접한 요즘 독자에겐 큰 감흥을 주기 어려운 이야기인 게 사실이고, 기대보다 다소 싱거운 엔딩 역시 무척 아쉽긴 했지만, 아마 1954년의 독자들에겐 꽤 큰 충격을 주고도 남았을 거란 생각입니다.

 

이 작품을 원작 삼아 제작된 영화가 있는 걸로 아는데, 소설의 깊이와 무게감이 제대로 구현됐을지는 미지수지만 번역의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서라도 한번쯤 찾아볼 생각입니다. 언젠가 다른 번역가에 의해 새로운 판본이 출간된다면 꼭 한 번 다시 읽어보고 싶은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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