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자의 쇼핑목록 네오픽션 ON시리즈 2
강지영 지음 / 네오픽션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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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자의 쇼핑목록다섯 번째로 만난 강지영의 작품입니다. 제목만 보면 장편 살인자의 쇼핑몰의 후속작으로 오해하기 쉽지만, 표제작 살인자의 쇼핑목록을 포함하여 모두 7편의 작품이 수록된 단편집입니다.

 

영수증 속 쇼핑목록을 근거로 엽기적인 연쇄살인마를 뒤쫓는 프로관찰러마트 캐셔, 향낭 주머니를 매개로 귀신들과 접촉하다가 위기에 빠지는 교수, 게임 속 캐릭터가 죽으면 그만큼의 현실 속 사람들이 사라진다는 도시전설, 태어나 100일이 되기 전까지 전생의 기억을 간직할 수 있다는 판타지, 타고난 사이코패스 기질을 더욱 무시무시하게 진화시키는 괴물, 그리고 마을의 결계를 하나둘씩 무너뜨리며 죽음의 그림자를 드리우는 염병귀신 등 미스터리, 스릴러, 호러, 판타지를 넘나드는 다양한 작품들이 수록돼있습니다.

 

다섯 번째 만남이긴 하지만 개인적으론 강지영과 처음 만났던 단편집 개들이 식사할 시간이 가장 인상 깊은 작품입니다. 당시 서평에 편혜영의 아오이 가든이나 히라야마 유메아키의 남의 일’, 오츠이치의 ‘ZOO’ 등이 생각나곤 했다.”라고 적을 정도로 흥미로운 불쾌감을 만끽했기 때문인데, ‘살인자의 쇼핑목록은 그에 못잖은 매력적인 이야기들을 담고 있습니다. 물론 수위나 기괴함에 있어선 개들이 식사할 시간이 압도적인 게 사실이지만, 이 단편집에 실린 7편의 작품 역시 잘 차려진 고급 뷔페처럼 오감을 자극하는 강렬한 맛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표제작인 살인자의 쇼핑목록과 귀신호러물 데우스 엑스 마키나’, ‘전설의 고향을 떠올리게 하는 각시는 단편영화나 단막극으로 만들어진다면 원작 못잖게 서늘한 공포를 발산할 작품들이라 영상화가 기대되기도 합니다.

 

그동안 읽은 작품들에게 준 평점이 2.5개에서 4.5개에 이를 정도로 개인적인 호불호가 심하긴 하지만, 두 편의 단편집에 유독 높은 평점을 준 건 한국 장르물에서 보기 드물 정도로 뛰어난 강지영의 상상력 때문입니다. 타고난 이야기꾼이기도 하지만 발상 자체가 차원이 다르다 보니 어떤 작품이든 초반부터 옆구리를 찔린 듯한 인상을 받게 되는데, 단지 뛰어난 발상에 머물지 않고 그것을 긴장감과 속도감을 갖춘 이야기 속에 잘 녹여내는 건 강지영만의 특별한 매력이라는 생각입니다. 덧붙이자면, 형식의 힘, 즉 단편이기에 그 매력이 더욱 빛난 게 아닐까 생각되는데, 그래선지 다음에 만나게 될 새 작품 역시 장편보다는 단편집이기를 더 기대하게 됩니다. 욕심을 부리자면 개들이 식사할 시간살인자의 쇼핑목록보다 조금 더 독하고 센 이야기라면 바랄 나위가 없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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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A 살인사건
이누즈카 리히토 지음, 김은모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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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전 촉법소년 폐지 여론을 들끓게 했던 고쿠분지 여아 살해사건이 다시금 주목을 받습니다. 당시 14살이던 범인 소년A가 촬영한 범행영상이 최근 다크웹 경매 사이트에 올라왔기 때문입니다. 불과 4년의 의료소년원 보호조치 이후 자유의 몸이 됐던 소년A에 대한 비난과 함께 촉법소년 논쟁이 다시금 불거지는 가운데 경시청 감찰계장 시라이시 히데키는 20년 전 수사담당자들을 대상으로 영상유출자 파악에 나섭니다. 한편 인터넷 사적 제재 사이트인 자경단에서 만난 료마와 에리코는 사이트 운영자 야요이와 함께 소년A의 정체를 세상에 폭로하기로 결심합니다. 가까스로 소년A의 정체를 파악하고 그의 신상을 인터넷에 알린 그들은 잠시 승리감에 도취하지만 예상 밖의 상황이 벌어지면서 도리어 심각한 위기에 빠지고 맙니다.

 

촉법소년과 사적 제재는 무척 좋아하는 미스터리 소재지만 동시에 읽는 내내 마음에 돌을 얹어놓은 것처럼 묵직한 불편함에 시달리게 만드는 소재이기도 합니다. 한국에서도 더는 소년, 소녀라는 이유만으로 면죄부를 줘선 안 된다는 촉법소년 폐지 여론이 비등하고 개인적으로도 거기에 동의하는 입장이라 더 관심이 갔고, 이미 다수의 작품을 통해 활용됐던 촉법소년 소재가 과연 사적 제재 서사와 어떻게 연결될지 궁금함과 기대감이 들기도 했습니다.

 

이야기는 크게 두 갈래로 전개됩니다. 여아 살해사건 영상을 유출한 20년 전 수사담당자를 찾는 경시청 감찰계장 시라이시 히데키의 이야기가 한 축이고, 인터넷 자경단에서 만난 료마와 에리코와 사이트 운영자 야요이가 소년A의 정체를 추적하는 게 다른 한 축입니다. 하지만 이 작품의 진가와 의미는 소년A의 정체가 세상에 폭로된 뒤부터 시작됩니다. , 단순히 벌 받지 않은 촉법소년에 대한 응징을 넘어 결코 치유되지 않는 피해자 유족의 상처와 고통, “인간이 만든 법이 악을 제대로 심판하지 못한다면 인간 스스로 법을 초월해 악을 심판하는 수밖에.”라는 사적 제재에 관한 논쟁, 그리고 타인의 비극을 흥미나 호기심을 갖고 들여다보거나 멋대로 자신만의 정의의 잣대를 내세워 단죄하려는 이기심과 영웅심 등 다양하고 무거운 주제들이 작품 전반에 녹아있습니다.

 

경시청 감찰계장 시라이시의 수사는 정통 경찰소설의 플롯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요즘 들어 특수설정 혹은 기발한 트릭을 앞세운 함량 미달의 작품들이 적지 않아서인지 오히려 정통 경찰소설 서사는 더 신선하게 느껴졌습니다. 수사1과가 아니라 감찰계 소속의 주인공이 등장한 점도 매력적이었는데, 덕분에 이 작품으로 데뷔한 이누즈카 리히토가 앞으로 시라이시 시리즈를 계속 이어가기를 기대하게 됐습니다.

인터넷 자경단 멤버들의 이야기도 흥미진진한데, 미성년자가 낸 교통사고로 딸을 잃은 야요이, 뛰어난 수사력과 행동력으로 자경단 사이트에 고발된 인물들을 찾아내 실명과 얼굴을 공개하는 료마, 그리고 자신이 사이트에 올린 범법자가 실제로 경찰에 체포되자 승리감과 영웅심을 맛봤던 에리코는 사적 제재의 정당성이라든가 익명성에 기댄 막연한 정의감의 문제를 독자에게 묻는 역할을 맡습니다.

 

소년A 살인사건은 주제와 의미는 물론 매력적인 반전을 포함한 미스터리라는 점에서도 독자의 기대에 부응한 작품입니다. 촉법소년과 사적 제재라는 두 소재를 잘 융합시키면서 다른 작품들과 차별화된 주제를 잘 드러냈고, 시라이시와 자경단의 긴장감 넘치는 활약과 함께 영상유출범의 정체와 동기가 밝혀지는 막판 반전은 재미와 의미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아냈기 때문입니다. 더는 새로운 이야기가 나올 것 같지 않은 소재에서 누구도 쉽게 예상할 수 없는 이야기를 뽑아냈다고 할까요?

 

이 작품으로 2018년 요코미조 세이시 미스터리대상 우수상을 수상하며 데뷔한 이누즈카 리히토는 이후 여러 작품을 펴내 사회파 미스터리 작가로 입지를 굳혔다고 합니다. 현재까지 나온 작품들은 시라이시 시리즈로 보이진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편이라도 더 한국에 소개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아직은 신인에 가깝지만 재미와 주제를 잘 요리하는 작가를 만나는 건 언제나 기분 좋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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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질긴 족쇄, 가장 지긋지긋한 족속, 가족 새소설 11
류현재 지음 / 자음과모음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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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부부가 사체로 발견되고 자식 중 한 명이 자수를 하지만, 다른 자식은 범인이 또 다른 자식이라고 주장하여 경찰을 당혹스럽게 만듭니다. 김영춘과 이정숙 부부에겐 4남매가 있습니다. 부모의 기대대로 잘 성장해서 교사가 된 맏딸 김인경과 대학병원 의사가 된 장남 김현창, 그리고 아픈 손가락 같은 차녀 김은희와 막내아들 김현기가 그들입니다. 여섯 식구에게 출구 없는 비극이 시작된 건 몇 년 전 어머니 이정숙이 쓰러지고부터입니다. 이혼한 차녀 김은희가 요양원을 거부하는 부모를 모시기 시작했고, 장남과 장녀는 자신들의 사정 때문에 점차 부모와 거리를 두기 시작합니다. 늘 모진 소리만 듣고 자란 막내는 아예 집을 나가버렸고, 그 뒤로 단란했던 한때를 구가했던 마당 딸린 2층집은 증오와 탄식만 남고 맙니다.

 

너무 노골적이어서 눈길을 끄는 제목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누군가에겐 딱 내 얘기네!”라며 가슴을 철렁하게 만드는 제목이기도 합니다. 다소 극단적인 제목과 스토리를 담고 있지만 알고 보면 자신의 가족을 질기고 지긋지긋한 족쇄로 여기는 사람들은 주변에 의외로 많을지도 모릅니다. 이 작품처럼 노부모 간병이 도화선이 되어 온 식구가 서로에게 날선 감정을 폭발시키는 경우도 있고, 그 외에도 수많은 이유로 부부, 부모자식, 형제자매가 어느 한쪽이 항복하기 전에는 절대 끝나지 않을 무자비한 전쟁을 벌입니다. 하지만 가족 간의 갈등은 깨진 유리마냥 봉합 자체가 불가능하기에 어느 한쪽이 항복해도 원상복구가 불가능한 게 사실입니다.

 

각 챕터의 제목이 네 명의 자식과 부모의 이름으로 돼있는데서 알 수 있듯 이들에겐 가족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각자의 비밀과 속내가 있습니다. 자식들은 부모를 향해 내 엄마만 아니었으면, 내 아버지만 아니었으면, 이혼으로 끝낼 수 있는 관계였으면 벌써 몇 번은 했을 거야.”라고, 형제자매를 향해선 핏줄이라는 말은 사기다. 진짜 피로 연결되어 있지도 않은데, 연결된 것 같은 착각을 하게 하니까.”라고, 또 부모는 자식들을 향해 어떻게 부모가 자식 잘못되는 걸 그냥 보고만 있어?”라고 토로합니다.

각자 불가피하고 정당한 사연들을 갖고 있는 탓에 모두 가해자이자 동시에 피해자이기도 한 그들은 차라리 남이었다면 봉합이든 결별이든 선택지를 고를 수 있었겠지만, 가족이기에 끝장외엔 달리 선택지가 없습니다. 버릴 수도, 끊을 수도 없는 관계인 탓에 오로지 죽거나 사라지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노부부의 죽음은 4남매에게는 비극이자 구원입니다. 절대 일어나선 안 될 일이었지만, 동시에 누군가 확 저질러주길 바랐던 일이기도 합니다. 자수를 한 자식, 결백을 주장하는 자식, 다른 자식을 고발하는 자식이 등장하면서 김영춘 일가의 비극은 부부가 죽은 뒤에도 결코 마무리되지 않습니다.

 

독자의 반응은 우리보단 낫네.”, “우리랑 똑같아!”, “저러고 어떻게 사냐?” 등 세 가지 중 하나일 것입니다. 아마도 다소 극단적인 김영춘 일가의 불행을 지켜보며 위안을 받는 경우가 가장 많을 것 같은데, 작가 역시 당신만 이기적이어서 그런 게 아니라고, 당신네 가족만 이상해서 그런 게 아니라고 따뜻한 위로의 말을 전하고 싶다.”는 작의를 밝히기도 했습니다.

막판에 누가 범인인가?”를 밝히는 미스터리가 전개되긴 하지만, 이 작품의 뼈대는 그리 새롭거나 특별하진 않은 지저분하고 꼴사나운 가족의 전쟁에 불과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느 막장 드라마와는 다른 묵직한 여운을 남기는 건 그만큼 생생하고 현실감 있는 설정들 때문입니다. 이미 시작된 고령화 사회, 더욱 팽배해지는 개인주의, 간병살인을 비롯하여 나날이 늘어가는 가족 대상 범죄 등 한국사회가 안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들이 김영춘 일가의 비극 곳곳에 잘 녹아있다는 뜻입니다. 나와는 거리가 먼 이야기, 나에게 닥치려면 아직 먼 이야기라며 외면하고 싶겠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예방주사 차원에서라도 생생하고 현실감 가득한 이 이야기를 한번쯤은 읽어봐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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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 무죄
다이몬 다케아키 지음, 김은모 옮김 / 검은숲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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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로펌에 근무하는 29살의 젊은 변호사 마쓰오카 지사는 시니어 파트너로부터 21년 전 연쇄 유괴살인사건의 재심 변호를 제안 받고 깜짝 놀랍니다. 무기수로 복역 중인 범인 히라야마는 당시 7살 소녀를 유괴하여 살해한 혐의로 체포됐습니다. 그 직전 두 명의 소녀가 비슷한 방식으로 유괴당한 바 있고, 한 명은 끝내 시신조차 찾지 못했지만 또 다른 한 명은 가까스로 범인에게서 도망쳐 나왔는데, 그 살아남은 한 명이 바로 마쓰오카 본인이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밤마다 그날의 악몽을 꾸며 괴로워하는 상황에서 어쩌면 자신을 유괴한 범인일지도 모르는 히라야마의 무죄를 입증해야 하는 처지가 된 셈입니다. 우여곡절 끝에 히라야마의 원죄를 밝혀내긴 했지만, 진범을 찾아내기 위한 마쓰오카의 진짜 싸움은 그때부터 시작됩니다.

 

경찰의 정의는 범인을 체포하는 것, 검찰의 정의는 재판에서 지지 않는 것, 법원의 정의는 법적 안정성. 변호인의 정의도 마찬가지야. 모두가 정의에 매몰되는 바람에 무고하고 약한 사람만 눈물을 흘려.” (p91)

 

이 작품의 세 번째 챕터의 제목은 정의라는 이름의 죄입니다. 내가 체포한, 내가 구형을 내린, 내가 선고를 내린, 그리고 내가 변호한 그 혹은 그녀가 진범이든 아니든 단지 내가 이기면 그것이 곧 정의.”라고 믿는 그 오만한 착각 또는 신념을 작가는 단연코 라고 부른 것입니다. 가 낳을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이 바로 원죄(冤罪, 억울하게 뒤집어쓴 죄)입니다.

개인적으로 원죄 이야기를 무척 좋아하는데, 이 작품은 한 발 더 나아가 진범 찾기 미스터리까지 다루고 있어서 마지막까지 재미와 긴장감을 함께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무죄를 주장하는 무기수 히라야마, 자신을 유괴한 범인일지도 모르는 히라야마의 무죄를 입증하려는 변호사 마쓰오카, 히라야마를 범인이라고 확신하고 무리수를 둔 끝에 그를 체포했던 경찰 아리모리 등 세 명의 주인공은 시종 외줄타기 같은 팽팽한 대결을 펼쳐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평범한 상황이라면 마쓰오카가 유괴범 히라야마를 변호할 일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유괴범에게서 도망치던 당시의 끔찍한 상황을 아직도 매일 밤 기괴하게 생긴 괴물에게 쫓기는 악몽으로 무한반복하고 있는 마쓰오카가 히라야마를 변호하기로 한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히라야마든 진짜 범인이든 자신의 삶을 피폐하게 만든 그 괴물과 정면으로 마주 싸우겠다는 각오이고, 또 하나는 도망칠 당시 옆방에서 비명을 지르고 있던 소녀와 이후 그 괴물에 의해 기어이 목숨을 잃은 또 한 명의 소녀에 대한 죄의식 때문입니다. 마쓰오카가 그 두 가지 이유를 해소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진범을 찾아내는 것밖에 없고, 그를 위한 첫 단추는 히라야마가 진정 원죄의 피해자인지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출판사 소개글대로 마쓰오카의 활약 덕분에 히라야마의 무죄가 밝혀지긴 하지만 주위사람들이나 언론은 물론 마쓰오카 본인조차 히라야마의 무고함까지 확신하진 못합니다. 진범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중에도 마쓰오카는 혹시 자신이 진짜 유괴살인범을 세상에 풀어놓은 것이 아닐까 두려워하기도 합니다. 무죄와 무고함은 전혀 다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 역시 완전 무죄가 다루는 꽤 중요한 주제인데, 작가는 히라야마가 범인일 수도 있음이란 흔적들을 여기저기 뿌려놓아 독자를 긴장상태에서 풀어주지 않습니다.

 

마쓰오카 못잖게 원죄의 문제를 대변하는 인물은 과거 무리한 방법을 통해 히라야마를 체포했던 전직 경찰 아리모리입니다. 사건 당시 피해자에게 지나치게 이입했고, 자신만의 정의를 확신한 나머지 경찰로서의 기본기를 망각했으며, 뒤늦게 자신의 판단이 한 사람의 삶을 어떻게 망가뜨린 건지 깨닫는 아리모리의 행적은 원죄 자체의 무게감과 비극성을 더욱 강조합니다. 더불어 21년 만에 자유를 되찾았지만 더 큰 비극과 마주치게 되는 히라야마 역시 이 작품의 엔딩을 착잡하고 씁쓸하게 만드는 역할을 떠맡는데, 그의 마지막 장면은 완전 무죄를 지금까지 읽은 그 어느 원죄 이야기보다도 오래 기억에 남게 만들어줬습니다.

 

원죄사적 복수만큼이나 더 이상 새로운 이야기가 나올 것 같지 않은 낡은 소재입니다. 하지만 끊임없이 출간되는 일본의 원죄 미스터리를 보면 신기하기도 하고 부럽기도 한 게 사실입니다. 다이몬 다케아키는 한국에 처음 소개된 작가지만 사형제도와 원죄를 다룬 설원’(2009)으로 요코미조 세이시 미스터리 대상을 받으며 데뷔한 중견작가입니다. 사법의 문제를 다룬 사회파 미스터리를 좋아해서 이 작가의 작품이 앞으로도 계속 소개됐으면 하는 바람인데, 조만간 그의 데뷔작부터 한 권씩 차례로 만나볼 수 있기를 기대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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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엔딩 크레딧 이판사판
안도 유스케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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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나 영화는 메이킹 필름을 비롯해서 여러 방식으로 제작현장이 공개된 덕분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땀과 노고가 깃들었는지 널리 알려졌지만, 책의 경우 작가와 편집자 외엔 딱히 곧바로 떠오르는 사람이나 일이 없는 게 사실입니다. 완성된 원고가 독자에게 전해지기 위해선 인쇄를 통해 이라는 구체적인 형태로 제작되는 것이 필수임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하지만 대다수 독자는 인쇄란 작가의 원고를 기계가 찍어내는 일 아닌가?”라고 여깁니다. 이 작품의 작가인 안도 유스케조차 십여 권의 작품을 집필하는 동안 책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몰랐다고 고백할 정도였으니 일반독자들은 더 말할 나위도 없을 것입니다.

 

영화가 끝나면 스크린에 무수한 제작진의 이름이 올라가는데 그걸 우리는 엔딩 크레딧이라고 부르고 일본에서는 End Roll이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이 작품의 제목인 책의 엔딩 크레딧은 원제인 のエンドロール을 그대로 직역한 거나 마찬가지인데, 아마도 작가는 책에도 엔딩 크레딧이 있다면 한 권의 책을 만드는데 기여한 수많은 이름과 그들의 일을 독자에게 알릴 수 있을 텐데.”라는 아쉬움과 바람을 담아 제목을 지은 것 같습니다. 그중에서도 작가가 주목한 건 바로 인쇄입니다. 이 작품에는 물과 기름처럼 가치관이 판이한 인쇄회사의 영업맨들과 실제로 공장에서 일하는 다양한 인쇄기술자들이 주연으로 등장합니다. 책에 관한 소설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작가와 편집자도 등장하지만 이번에는 기꺼이 우호적이거나 적대적인 단역 혹은 조연의 자리로 물러섰습니다.

 

대형인쇄회사에서 식품패키지 영업을 하던 우라모토 마나부는 오로지 책을 만들고 싶은 소망에 훨씬 작은 규모의 도요즈미인쇄로 이직했습니다. 그는 인쇄가 모노즈쿠리(혼신의 힘을 쏟아 최고의 물건을 만드는 것 혹은 그 장인)로 인정받는 것을 꿈꾸는 이상주의자로 인쇄는 책을 만드는 이라고 믿습니다. 덕분에 그와는 정반대로 냉정하고 합리적인데다 인쇄는 책을 찍어내는 이라고 단언하는 톱 세일즈 영업맨 나카이도 고지에게 늘 쓴 소리를 듣곤 합니다. 또 고객(작가와 편집자)이 제멋대로 변덕을 부려도 반론 한 번 제기 못한 채 인쇄공장에 그대로 전달하곤 해서 뛰어난 인쇄기술자이자 자신의 일을 정해진 색깔의 잉크를 종이에 찍는 것뿐이라고 여기는 노즈에 마사요시에게 전서구라는 모욕적인 별명까지 얻습니다.

 

그 외에도 어릴 때부터 따돌림을 당하다가 책에서 위안을 얻은 끝에 디지털 인쇄판을 짜는 오퍼레이터가 된 후쿠하라, 잉크에 관한 최고 전문가인 40년 경력의 지로, 괴짜 북 디자이너 우스타, 정년을 1년 앞둔 베테랑 기술자 규, 그리고 책과 독자를 연결해주는 일에 보람을 느끼는 아르바이트 서점 점원 모리타 등 책을 만들어내는중요한 일을 맡고 있지만 정작 독자 눈엔 보이지 않았던 다양한 인물들이 이야기를 이끌어갑니다.

 

책의 엔딩 크레딧은 이상주의 영업맨 우라모토, 합리주의 영업맨 나카이도, 냉정한 인쇄기술자 노즈에의 성장기이기도 합니다. 때로는 냉소적으로, 때로는 무자비하게 서로의 신념을 들이밀던 세 사람은 숱한 위기와 갈등을 함께 겪어내며 점차 상대방을 이해하고 존중하기 시작합니다. 그것이 가능했던 건 세 사람 모두 책에 대한 애정을 마음 깊이 간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성장의 핵심은 인쇄는 책을 찍어내는일이 아니라 만드는일이며, 단지 이상에만 빠져있을 게 아니라 오늘 내가 해야 할 일을 실수 없이 마무리해야 한다는 긍지와 자부심을 서로 공유하는 것입니다. 비록 사양산업이라 불릴 정도로 출판계는 불황을 헤매고, 전자책의 급성장이 갖고 온 종이책의 위기는 날로 심각해지지만 책에 관한 그들의 열정만큼은 조금도 변치 않습니다. 그리고 그 대목에서 독자는 몇 번이고 울컥해지는 기분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동안 읽어온, 지금 읽고 있는, 그리고 앞으로 읽을 책들에 대해 각별한 마음을 갖게 되는 것과 함께 말입니다. 이 느낌을 너무나도 잘 대변한 알라딘의 소설 MD 권벼리 님의 글을 인용하며 서평을 마치겠습니다.

 

책을 만들고 책을 판매하는, 책과 함께하는 사람들이 등장하는 책은 언제나 지친 마음에 따뜻한 기운을 불어넣어 주었다. 울고 웃으며 읽은 이 책에서도 큰 위로를 받았다. 한 권의 책이 만들어져 독자의 손에 닿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그 여정 속에 있을까. 책의 뒤편에 서 있는 모든 이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사족으로...

개인적으로 이 작품은 독자뿐 아니라 책을 만드는 사람들도 반드시 읽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그렇지 않은 경우가 훨씬 더 많긴 하지만, 가끔 수두룩한 오타, 아무데서나 갖다 쓴 듯한 표지 디자인, 페이지가 뒤바뀐 인쇄 등 성의 없이 만든 책 - 우라모토 말에 따르면 어쩔 수 없이 나온 책” - 을 만나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는 낭만적인 판타지라고 치부할지도 모르지만 이 작품에 등장하는 동종업계 사람들의 치열하고 열정적인 이야기는 현실에서 책을 만들고 있는 사람들에게 따끔한 비판이자 따뜻한 격려가 돼줄 거란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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