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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 무죄
다이몬 다케아키 지음, 김은모 옮김 / 검은숲 / 2022년 2월
평점 :
대형로펌에 근무하는 29살의 젊은 변호사 마쓰오카 지사는 시니어 파트너로부터 21년 전 연쇄 유괴살인사건의 재심 변호를 제안 받고 깜짝 놀랍니다. 무기수로 복역 중인 범인 히라야마는 당시 7살 소녀를 유괴하여 살해한 혐의로 체포됐습니다. 그 직전 두 명의 소녀가 비슷한 방식으로 유괴당한 바 있고, 한 명은 끝내 시신조차 찾지 못했지만 또 다른 한 명은 가까스로 범인에게서 도망쳐 나왔는데, 그 살아남은 한 명이 바로 마쓰오카 본인이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밤마다 그날의 악몽을 꾸며 괴로워하는 상황에서 어쩌면 자신을 유괴한 범인일지도 모르는 히라야마의 무죄를 입증해야 하는 처지가 된 셈입니다. 우여곡절 끝에 히라야마의 원죄를 밝혀내긴 했지만, 진범을 찾아내기 위한 마쓰오카의 진짜 싸움은 그때부터 시작됩니다.
“경찰의 정의는 범인을 체포하는 것, 검찰의 정의는 재판에서 지지 않는 것, 법원의 정의는 법적 안정성. 변호인의 정의도 마찬가지야. 모두가 정의에 매몰되는 바람에 무고하고 약한 사람만 눈물을 흘려.” (p91)
이 작품의 세 번째 챕터의 제목은 ‘정의라는 이름의 죄’입니다. 내가 체포한, 내가 구형을 내린, 내가 선고를 내린, 그리고 내가 변호한 그 혹은 그녀가 진범이든 아니든 단지 “내가 이기면 그것이 곧 정의.”라고 믿는 그 오만한 착각 또는 신념을 작가는 단연코 ‘죄’라고 부른 것입니다. 그 ‘죄’가 낳을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이 바로 원죄(冤罪, 억울하게 뒤집어쓴 죄)입니다.
개인적으로 원죄 이야기를 무척 좋아하는데, 이 작품은 한 발 더 나아가 ‘진범 찾기 미스터리’까지 다루고 있어서 마지막까지 재미와 긴장감을 함께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무죄를 주장하는 무기수 히라야마, 자신을 유괴한 범인일지도 모르는 히라야마의 무죄를 입증하려는 변호사 마쓰오카, 히라야마를 범인이라고 확신하고 무리수를 둔 끝에 그를 체포했던 경찰 아리모리 등 세 명의 주인공은 시종 외줄타기 같은 팽팽한 대결을 펼쳐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평범한 상황이라면 마쓰오카가 유괴범 히라야마를 변호할 일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유괴범에게서 도망치던 당시의 끔찍한 상황을 아직도 매일 밤 기괴하게 생긴 괴물에게 쫓기는 악몽으로 무한반복하고 있는 마쓰오카가 히라야마를 변호하기로 한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히라야마든 진짜 범인이든 자신의 삶을 피폐하게 만든 그 괴물과 정면으로 마주 싸우겠다는 각오이고, 또 하나는 도망칠 당시 옆방에서 비명을 지르고 있던 소녀와 이후 그 괴물에 의해 기어이 목숨을 잃은 또 한 명의 소녀에 대한 죄의식 때문입니다. 마쓰오카가 그 두 가지 이유를 해소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진범을 찾아내는 것밖에 없고, 그를 위한 첫 단추는 히라야마가 진정 원죄의 피해자인지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출판사 소개글대로 마쓰오카의 활약 덕분에 히라야마의 무죄가 밝혀지긴 하지만 주위사람들이나 언론은 물론 마쓰오카 본인조차 히라야마의 무고함까지 확신하진 못합니다. 진범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중에도 마쓰오카는 혹시 자신이 진짜 유괴살인범을 세상에 풀어놓은 것이 아닐까 두려워하기도 합니다. 무죄와 무고함은 전혀 다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 역시 ‘완전 무죄’가 다루는 꽤 중요한 주제인데, 작가는 “히라야마가 범인일 수도 있음”이란 흔적들을 여기저기 뿌려놓아 독자를 긴장상태에서 풀어주지 않습니다.
마쓰오카 못잖게 원죄의 문제를 대변하는 인물은 과거 무리한 방법을 통해 히라야마를 체포했던 전직 경찰 아리모리입니다. 사건 당시 피해자에게 지나치게 이입했고, 자신만의 정의를 확신한 나머지 경찰로서의 기본기를 망각했으며, 뒤늦게 자신의 판단이 한 사람의 삶을 어떻게 망가뜨린 건지 깨닫는 아리모리의 행적은 원죄 자체의 무게감과 비극성을 더욱 강조합니다. 더불어 21년 만에 자유를 되찾았지만 더 큰 비극과 마주치게 되는 히라야마 역시 이 작품의 엔딩을 착잡하고 씁쓸하게 만드는 역할을 떠맡는데, 그의 마지막 장면은 ‘완전 무죄’를 지금까지 읽은 그 어느 원죄 이야기보다도 오래 기억에 남게 만들어줬습니다.
‘원죄’는 ‘사적 복수’만큼이나 더 이상 새로운 이야기가 나올 것 같지 않은 낡은 소재입니다. 하지만 끊임없이 출간되는 일본의 원죄 미스터리를 보면 신기하기도 하고 부럽기도 한 게 사실입니다. 다이몬 다케아키는 한국에 처음 소개된 작가지만 사형제도와 원죄를 다룬 ‘설원’(2009)으로 요코미조 세이시 미스터리 대상을 받으며 데뷔한 중견작가입니다. 사법의 문제를 다룬 사회파 미스터리를 좋아해서 이 작가의 작품이 앞으로도 계속 소개됐으면 하는 바람인데, 조만간 그의 데뷔작부터 한 권씩 차례로 만나볼 수 있기를 기대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