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슐리외 호텔 살인 클래식 추리소설의 잃어버린 보석, 잊혀진 미스터리 작가 시리즈 1
아니타 블랙몬 지음, 최호정 옮김 / 키멜리움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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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미국 남부 소도시에 자리한 리슐리외 호텔엔 괴팍한 독신녀 애들레이드 애덤스를 비롯 여러 장기투숙자들이 머무르고 있습니다. 부유한 미망인과 조카, 은행원, 갈등 중인 부부, 이혼한 요부, 몸이 불편한 어머니와 딸, 그리고 바람둥이 영업사원이 그들입니다. 어느 날 1주일 전부터 호텔에 투숙해온 한 남자가 애들레이드의 스위트룸에서 잔혹하게 살해당한 채 발견됩니다. 그의 정체가 장기투숙객 중 한 명이 고용한 사립탐정으로 밝혀지면서 경찰은 그들 가운데 범인이 있다고 확신하곤 모두를 철저히 조사합니다. 하지만 그 와중에 연이어 살인사건이 벌어지자 경찰과 투숙객들은 충격에 빠집니다. 특히 모든 살인에 직간접적으로 연루된 탓에 경찰의 주목을 받게 된 애들레이드는 어쩔 줄 몰라 합니다.

 

아칸소가 낳은 범죄소설의 여왕이란 극찬까지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이름이 생소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는 건 아니타 블랙몬이 1920~30년대에 활동한 작가라서 그렇기도 하지만 그녀가 남긴 추리소설이 단 두 편뿐이기 때문입니다. ‘리슐리외 호텔 살인’(1937)돌아올 길이 없다’(1938)는 각각 2013년과 2016년에 미국에서 복간되면서 재조명됐다고 하는데, 그래선지 클래식 추리소설의 잃어버린 보석이라는 출판사의 홍보카피는 더없이 적절해 보였습니다.

하지만 고전 추리 잔혹코믹극이란 타이틀은 자칫 이 작품의 진가를 가릴 수도 있어 보이는데, 분명 잔혹함을 상쇄하는 유쾌한 유머”, “긴장과 웃음이 교차하는 풍자와 반전”, 그리고 주인공인 50대 여성 애들레이드 애덤스의 까칠하기 이를 데 없는 캐릭터가 빛나는 작품인 건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코믹극으로 분류하기엔 곤란한 게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범행은 끔찍할 정도로 잔인하고, 용의자 취급을 받으며 호텔에 구금상태에 놓인 장기투숙자들 사이의 의심과 갈등은 어떤 진지한 미스터리보다도 무겁고 어두운 기운을 발산합니다.

 

리슐리외 호텔의 장기투숙자들은 결코 가난하거나 오갈 데 없는 인물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여유롭게 삶을 즐기는 쪽이 더 많은데, 그런 그들이 연쇄살인에 휘말린 것도 모자라 용의자로 몰려 호텔에 구금된 상황은 밀실이나 무인도보다 더 팽팽한 긴장감을 선사합니다. 특히 이 안에 범인이 있다!”라는 두려움은 늘 고상하게 모여 앉아 조식과 커피를 즐기던 그들 사이를 하루아침에 불신과 의심으로 갈라놓습니다. 또 첫 희생자인 사립탐정을 누가, 왜 고용한 건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연이어 잔혹하게 살해된 사체들이 발견되면서 경찰의 수사마저 장벽에 가로막히자 기약 없는 구금상태를 못 이긴 끝에 크고 작은 충돌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이 작품에서 단연 눈길을 끄는 건 리슐리외 호텔에서 가장 비싼 스위트룸에 머무는 주인공 애들레이드 애덤스입니다. 50대 중반으로 큰 덩치에 관절염을 앓고 있는 그녀는 노점에서 음식을 사먹은 적이 한 번도 없을 정도로 가정교육을 제대로받은 미국 남부 숙녀임을 자부하는 인물입니다. 천박하거나 요염함을 감추지 않는 젊은 여성에겐 거침없이 독설을 날리고, 젠틀하지 않은 남성들에겐 특유의 까칠함을 조금도 숨기지 않습니다. 주인공이긴 하지만 애들레이드는 탐정처럼 범인 찾기에 앞장서는 인물은 아닙니다. 하지만 비상한 기억력과 추리력을 통해 사건 해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물론 까칠함 속에 깃든 의외의(?) 모성애와 인간미를 발휘하여 엔딩을 훈훈하게 만드는 매력적인 여성이기도 합니다.

 

범인의 정체는 몇 차례의 반전이 거듭된 끝에 밝혀질 정도로 베일에 싸여있고, 살인사건의 진상 역시 겉으로 보였던 것과 달리 예상 밖의 동기를 품고 있어서 마지막 장까지 쉽사리 엔딩을 예상하기 어려운 작품입니다. 1930년대 미국 남부의 분위기라든가 그 무렵의 다양한 세태도 별미처럼 맛볼 수 있어서 고전 미스터리의 향기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기대 이상의 정취를 즐길 수 있을 것입니다.

유일한 아쉬움이라면 의미나 맥락이 모호한 문장들 때문에 상황이 한눈에 쏙 들어오지 않는 장면들이 종종 등장한다는 점입니다. 작가 특유의 스타일일 수도 있고 번역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지만 단어 하나하나까지 신경 써서 읽지 않으면 두어 번은 되읽어야 할 대목들이 곳곳에서 목격됩니다. 재미있게 읽고도 별 1개를 뺀 유일한 이유는 이 때문입니다.

 

출판사에 따르면 이 작품은 잊혀진 미스터리 작가 시리즈 1입니다. 다른 작가의 작품도 당연히 나오겠지만 가능하다면 아니타 블랙몬의 나머지 한 작품도 꼭 소개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지만 그 작품에서 애들레이드 애덤스를 다시 만날 수 있다면 더없이 기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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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 이전의 샹그릴라
나기라 유 지음, 김선영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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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라면 몰라도 소설에 관한 한 인류 종말을 그린 이야기엔 별로 관심이 없는 편이지만, ‘멸망 이전의 샹그릴라에 눈길이 끌린 건 2년 전 인상 깊게 읽은 유랑의 달의 작가 나기라 유의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소아성애 납치범과 피해아동이란 딱지가 붙은 채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고 구원을 주고받는 두 남녀의 이야기를 그린 유랑의 달은 장르물을 과하게 편식하면서도 사쿠라기 시노를 최애작가로 꼽는 제 취향에 너무나도 잘 맞는 작품이었고, 그래서 나기라 유의 후속작 소식을 내내 고대해왔습니다.

 

샹그릴라는 잘 알려진 대로 지상에 있는 이상향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그런 점에서 지구의 생명체를 전멸시킬 소혹성과의 충돌 전 한 달의 시간을 그린 작품의 제목이 멸망 이전의 샹그릴라라는 점은 그 자체가 역설입니다. 이런 제목이 붙은 이유는 평화로운 세상에서는 얻지 못했던 평안과 행복을 (지구의 멸망을 앞두고) 찾은 사람들”(옮긴이의 말 ), 즉 죽음을 목전에 두고야 자신이 살아있는 이유를 깨닫는 사람들, 또 사랑했던 사람, 사랑하는 사람, 미처 사랑을 줄 수 없었던 사람과 마지막을 함께 보내며 켜켜이 쌓아두었던 속내를 내보이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열흘밖에 없어. 슬프고, 무섭고, 최악이지만, 그래도 나는 조금 괜찮게 변한 것 같아. 세상이 그대로였다면 오래 살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이런 마음은 모른 채로 죽었겠지.”(p276)

 

내일 죽을 수 있다면 편해질 거라 꿈꾸었다. 그렇게 바랐던 내일이 마침내 찾아왔다. 그런데 이제야 조금 더 살아봐도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p393)

 

네 편의 연작단편의 주인공들은 행복이나 기쁨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온 인물들입니다. 아버지 없이 성장한 17세 소년 유키는 끔찍한 집단 괴롭힘에 시달리고 있고, 아버지의 폭력과 어머니의 무관심 속에 야쿠자의 똘마니를 전전하며 40세에 이른 메지카라 신지는 거절할 수 없는 살인청부 때문에 남은 인생을 포기해야 할 상황에 놓여있습니다. 고등학교도 졸업 못한 불량소녀 출신인 중년의 시즈카는 지구 멸망을 코앞에 두고 18년 만에 만난 연인 때문에 혼란에 빠집니다. 한편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던 29세의 가희(歌姬) Loco는 경쟁자의 등장과 함께 자신의 시대가 끝났음을 깨닫고 절망에 빠진 채 극단적인 선택을 앞두고 있습니다. 이들에게 한 달 앞으로 다가온 지구의 멸망은 남다른 의미일 수밖에 없습니다.

 

종말을 다룬 여느 작품과 마찬가지로 멸망 이전의 샹그릴라에도 무자비한 파괴와 약탈의 참상이 그려집니다. 자살과 살인이 일상화되고, 평범한 사람들이 패닉에 빠진 채 강도와 강간을 일삼습니다. 할리우드 영화와 달리 영웅이 등장할 가능성도, 세계의 경찰 미국이 알아서 소혹성을 파괴해줄 가능성도 전무합니다. 하지만 작가는 비관과 공포만 남은 한 달의 카운트다운 와중에 뒤늦게 소중한 무엇혹은 누군가를 찾아내는, 그래서 누구나 죽을 때는 혼자다. 그래도 마지막 순간에 누구와 함께 있을지는 중요한 문제다.”(p222)를 깨닫는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차분하고 담담하게 그려냅니다. 희망 없는 미래에 절망하며 차라리 지구가 멸망하기를 바랐던 인물들이 아이러니하게도 소혹성 충돌이라는 피할 수 없는 재난 덕분에 삶의 마지막 순간에 짧지만 소중한 행복과 웃음, 즉 샹그릴라를 되찾는 이야기인 셈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작품이 종말에 대처하는 계몽서 혹은 힐링 에세이같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멸망 직전의 공포와 절망은 소름 돋을 정도로 생생하고, 주인공들이 행복과 웃음을 되찾는 과정은 말 그대로 악전고투이며, 겨우 손에 넣은 그 순간은 고작 찰나의 순간에 불과해서 독자 입장에선 허황된 종말 액션영화와는 차원이 다른 리얼리티와 긴장감을 맛보게 됩니다. 그래서인지 마지막 몇 페이지를 앞두곤 뜬금없는 영웅이 나타나도 좋으니 지구를 구하고 이들 모두에게 새로운 미래를 열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해지기도 했습니다.

 

전작인 유랑의 달에서도 느낀 바지만 나기라 유의 문장은 제가 좋아하는 사쿠라기 시노와 많이 닮아 있습니다. 애틋함과 처연함, 따뜻함과 담담함을 머금은 문장들이 지구 멸망이라는 특별한 소재와 잘 어우러져서 훨씬 더 강렬한 인상을 남겼는데, 덕분에 벌써부터 다음엔 어떤 이야기로 그녀를 만나게 될지 기대감을 갖지 않을 수 없게 됐습니다. 아직은 다소 낯선 작가인 나기라 유의 진가가 한국 독자에게도 널리 알려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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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스풀 플레이스 더블린 살인수사과 시리즈
타나 프렌치 지음, 권도희 옮김 / 엘릭시르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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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12월 아일랜드 더블린. 19살의 프랭크 매키와 로지 데일리는 끊임없는 폭력과 암울한 미래밖에 남지 않은 고향 페이스풀 플레이스를 떠나 잉글랜드에서의 새로운 삶을 위해 야반도주를 계획합니다. 하지만 당일 밤 로지는 약속장소인 16번지 폐가에 나타나지 않았고 결국 프랭크 홀로 고향을 등집니다. 그로부터 22년 후, 유능한 잠복수사관이 된 프랭크는 유일하게 연락을 주고받던 막내 동생으로부터 다급한 연락을 받습니다. 16번지 폐가에서 로지의 여행 가방이 발견됐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버리고 혼자 잉글랜드로 갔다고 여겼던 로지가 페이스풀 플레이스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걸 알게 된 프랭크는 그날의 진실을 알아내기 위해 분투합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충격적인 사망사건이 벌어지면서 프랭크는 큰 혼란에 빠집니다.

 

한국에 소개된 타나 프렌치의 두 번째 작품입니다. 데뷔작인 살인의 숲’(2007)2010년에 출간됐으니 12년 만에 한국 독자와 재회한 셈인데, 뒤늦게라도 그녀의 더블린 살인수사과 시리즈를 다시 만나볼 수 있게 돼서 무척 반가웠습니다. 20년 전 숲에서 두 친구를 잃고 홀로 살아남은 주인공이 살인사건 전담반 형사가 되어 다시금 그 숲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을 수사하는 이야기를 다룬 살인의 숲과 마찬가지로, ‘페이스풀 플레이스역시 22년이라는 짧지 않은 간극을 두고 벌어진 끔찍한 살인사건과 비극으로 점철된 가족사를 그리고 있습니다.

 

이 작품의 제목인 페이스풀 플레이스’(Faithful Place)는 주인공 프랭크가 19살까지 나고 자란 작은 동네의 이름입니다. 하지만 그곳은 긍정적이고 우아하기까지 한 이름과는 달리 폭력과 욕설, 시기와 질투, 이간질과 염탐으로 물든 데다 타인의 불행을 고소해하고 자신의 잘못을 은폐하려는 비뚤어지고 일그러진 사람들이 살던 동네입니다. 22년 전 이 시궁창과도 같은 페이스풀 플레이스와 폭력적인 부모로부터 도망치려 했던 프랭크와 로지의 꿈이 산산조각 나면서 모든 비극은 잉태됐고, 22년 동안 외면했던 가족과 고향을 다시 마주한 프랭크는 두 번째 지옥을 예감하면서도 로지의 진실을 알아내기 위해 기꺼이 시궁창에 발을 들입니다.

 

22년 전 실종된 로지의 진실과 살인사건의 범인을 추적하는 미스터리가 밑바탕을 이루고 있지만 실은 이 작품의 중심서사는 애증으로 얼룩진 프랭크의 가족사입니다. 자신의 분노와 좌절을 폭력으로 해소한 아버지, 정신적인 폭력으로 자식들을 압박한 어머니, 그리고 아버지를 꼭 닮은 권위적이고 냉소적인 큰형 등 프랭크의 어린 시절을 지배한 스트레스와 트라우마는 22년 전 그로 하여금 첫사랑 로지와 함께 잉글랜드로 도망칠 수밖에 없게 만들었습니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로지의 여행 가방이 발견되면서 피할 수 없는 재회를 하게 된 프랭크와 그의 가족 사이엔 조금의 감동도 눈물도 없습니다. 오히려 폭발 직전의 팽팽한 긴장만 어른거립니다. 아내와 이혼한 뒤 9살 딸과 1주일에 한 번밖에 만날 수 없는 프랭크의 현재 처지도 불행까진 아니어도 신산 그 자체입니다. 과거의 가족과 현재의 가족, 그리고 두 가족 사이에 낀 프랭크의 복잡다단한 감정은 미스터리 못잖게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는 대목입니다.

 

로지의 실종과 현재 벌어진 살인사건의 진실은 중후반쯤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어서 대단한 반전의 힘을 발휘하진 못합니다. 하지만 22년이라는 세월의 두께, 한없이 무거워질 수밖에 없는 애증의 가족사, 그리고 어떤 진실이 드러나더라도 결코 해피엔딩이 될 수 없는 암울한 미스터리는 반전 이상의 힘과 여운을 독자에게 선사합니다. 세상의 불행을 혼자 다 짊어져온 프랭크의 삶은 아주 약간의 희망만을 남긴 채 마무리되는데, 그래서인지 이후 타나 프렌치의 더블린 살인수사과 시리즈어느 작품에서라도 한번쯤은 꼭 다시 만나보고 싶어졌습니다.

 

출판사 소개글에 따르면 “‘더블린 살인수사과 시리즈는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일어나는 살인 사건을 소재로 하며, 형사 한 명이 각 작품에서 주요 수사관으로 활동한다. 주인공은 다른 작품에서 보조 인물로 출연하는 식으로 각 작품이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다.”라고 합니다. 또 이 작품의 후속작인 브로큰 하버시크릿 플레이스도 곧 출간될 예정이라는데, 아쉽게도 프랭크가 주인공인 작품은 아닌 듯 하지만, 카메오처럼이라도 잠깐 만나게 된다면 무척 반가울 것 같습니다. (가능하다면 시리즈 두 번째 작품인 ‘The Likeness’도 소개되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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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렸던 먹잇감이 제 발로 왔구나
고호 지음 / 델피노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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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계 최상위 지보그룹의 차녀인 여고생 선초아가 납치됩니다. 범인들은 50억의 몸값을 요구하고 경찰 최고위층까지 나선 총력수사가 시작됩니다. 납치범의 리더인 전직 조폭 장강식만이 의뢰자의 신분을 알뿐, 그의 부하인 동욱을 비롯한 네 명의 공범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자신에게 떨어질 10억에만 혈안이 돼있습니다. 동욱의 동생인 재욱과 그의 애인인 나타샤, 그리고 탈북민 우향란은 장강식의 지시를 받고 납치한 초아를 여기저기로 유기하지만 예상치 못한 상황에 큰 충격에 빠집니다. 한편 담당 수사관인 윤경위는 그야말로 콩가루에 가까운 지보그룹 선영태 회장 가족과의 면담을 진행하며 그들 가운데 누군가가 납치사건의 배후에 있다는 확신을 가집니다. 그 누구도 납치된 선초아의 안전에 관해 관심이 없어 보였기 때문입니다.

 

재벌가 차녀 납치극이란 외형을 갖고 있지만 시종 독자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건 등장인물들 간에 팽팽하게 오가는 의심과 배신, 비밀과 거짓말입니다. 한편에선 5명의 납치범들이 거액의 돈 앞에서 의심과 배신을 주고받으며 탐욕을 억누르지 못하고 있고, 다른 한편에선 서로를 적대시하는 재벌가 가족 사이의 오랜 비밀과 거짓말이 납치사건을 계기로 임계점을 뚫기 일보직전까지 끓어오릅니다.

 

5명의 납치범들은 무척 단순하고 초짜 같은 분위기마저 풍깁니다. 그래선지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재벌가 차녀 납치극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기도 하는데, 이런 설정은 의외의 엔딩을 위한 나름 특별한 설정이라 혹시 이들의 어설픈 행각 때문에 초중반에 실망하는 독자가 있다면 조금만 더 견디기를 권하고 싶습니다.

반면, 지보그룹 총수 선영태 가족은 막장 중의 막장을 선사하며 재미와 긴장감을 함께 느끼게 만듭니다. 뇌물과 지략으로 지보그룹을 키운 70대의 독재자 선영태 회장, 스무살에 국민여배우에 등극했지만 50대 선영태 회장의 후처를 선택했던 하미숙, 전처의 딸로 하미숙과 그 자식들을 혐오하며 장차 지보그룹의 후계를 탐내는 선도영, 그리고 하미숙이 낳은 선초석과 선초아 등 회장 일가족은 단지 한 지붕 아래 살고 있을 뿐 서로가 서로를 의심하고 경계하는 관계입니다. 그리고 막내 초아가 납치된 뒤 그 누구도 초조해하지도, 간절해하지도 않는 모습을 보여 면담에 나선 경찰들을 놀라게 만듭니다.

 

작가가 초반부터 외부 범인설자체를 차단한 덕분에 독자 입장에선 회장 일가족과 집사, 비서, 가정부 외에는 달리 의심할 대상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누구?’보다는 ?’에 관심이 생길 수밖에 없는데, 그래선지 막판에 밝혀진 진실은 놀라운 반전이라기보다는 오랜 시간 차곡차곡 쌓여온 악의들이 어떻게 폭발한 것인지를 재확인하는 인상이 더 강했습니다. 충분히 예측 가능한 엔딩이지만 그 무게감이 대단했던 건 바로 이 축적된 악의 덕분이란 생각입니다.

 

이야기 구조상 납치범과 회장 일가족 사이에서 끼인 경찰의 역할은 어차피 미약할 수밖에 없었지만, ‘정의감 넘치는 현장수사관탐욕에 찌든 지휘관을 설정한 건 별로 임팩트도 없고 흥미를 끌지도 못해서 더 아쉽게 느껴졌습니다. 윤 경위, 임 총경 식으로 이름 석 자도 부여받지 못한 두 경찰은 독자에게 정보와 상황을 설명하는 것 외엔 별로 한 일이 없는데, 좀더 두드러진 캐릭터와 역할을 맡았다면 이야기를 좀더 풍성하게 해줬을 거란 생각입니다.

 

큰 기대를 하지 않은데다 초반부터 이야기와 문장 모두 가벼워 보여서 1/3쯤엔 접을 생각도 했던 게 사실이지만, 뒤로 갈수록 점점 깊고 단단해지는 맛이 느껴져서 끝까지 완주할 수 있었습니다. 사건도 사건이지만 적잖은 인물들의 관계와 심리를 잘 그려낸 점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총평하자면 만족감 반, 아쉬움 반 정도라고 할까요? 그래도 기회가 된다면 언젠가 작가의 다른 작품도 한두 편쯤 더 읽어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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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벽의 밤 안 된다
미치오 슈스케 지음, 김은모 옮김 / 청미래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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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치오 슈스케는 제겐 참 애매한 작가입니다. 흥미진진하게 읽은 작품은 외눈박이 원숭이가 유일하고, 그 외엔 다소 난해(랫맨, 스켈리튼 키, 투명 카멜레온) 혹은 중도포기(수상한 중고상점 = 가사사기의 수상한 중고매장) 등 대부분 쉽게 읽어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책장에 꽂혀있는 해바라기가 피지 않는 여름’, ‘광매화등 그의 대표작을 아직 못 읽어서 타율이 저조한 것일 수도 있지만, 선입견 비슷한 게 생겨버린 바람에 그의 작품들에 쉽게 손이 안 나가는 게 사실입니다.

 

(개정판과 앤솔로지를 제외하고) 한국에 출간된 그의 21번째 작품인 절벽의 밤은 제 기준으로 분류하면 흥미진진다소 난해의 딱 중간쯤 되는 작품입니다. 재미있게 읽히지만 왠지 엷은 우유막이 가로막고 있는 듯한 모호함이 작품 전반에 흐르기 때문입니다. 미스터리 자체는 그리 복잡하거나 난이도가 높진 않아도 사건에 휘말린 사람들의 깊고 어두운 감정들이 작품 전반에 도사리고 있는데다, 진상이 밝혀져도 깔끔함이나 통쾌함과는 거리가 먼 여운들이 기다리고 있고, 특히 독자를 최대한 객관적인 위치에 머물게 하려는 건조하고 무심한 듯한 문장들 역시 우유막의 일부분으로 보입니다. 물론 이런 점들이 미치오 슈스케의 특기이자 장점이기도 하지만 저처럼 그를 애매한 작가로 여기는 독자라면 초반부터 고전을 면치 못할 수도 있는데, 일단 재미있고 독특한 작품이니 미리 예단하진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모두 네 편의 단편이 수록돼있는데, 서로 별개의 이야기처럼 보이기도 하고, 주요 인물들이 비중을 달리 하며 여러 수록작에 교차 등장하기 때문에 연작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앞의 세 작품이 서로 다른 살인사건들을 다루고 있고 마지막 작품에서 이른바 종합편처럼 마무리되는데, 흥미로운 건 작가가 미스터리의 진실을 독자에게 전달하는 방법입니다.

수록작 모두 그래서 마지막에 도대체 어떻게 됐다는 거야?”라는 의구심을 갖게 만드는데, 그 해답은 각 수록작의 마지막 페이지에 실린 한 장의 사진에 실려 있습니다. 문제는 독자에 따라 그 사진을 아무리 봐도 해답을 찾아내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점인데, 그래선지 출판사 소개글에 따르면 일본에서도 독자들이 해설을 요청하거나 직접 해설을 게재하는 등 화제를 불러일으킨 소설이었다고 합니다. (개인적으론 네 개의 사진 중 한 개는 결국 옮긴이의 말을 읽고야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애매한 미스터리 때문에 답답함이 치밀더라도 마지막에 실린 사진들을 통해 상상력을 발휘하다 보면 이 작품만의 독특한 매력을 만끽할 수 있으니 절대 중도에 포기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전부는 아니지만) 사건이 벌어지는 장소는 자살 명소로 유명한 유미나게 절벽입니다. 자살 외에도 뺑소니 사고, 자살을 위장한 살인 등 여러 사건이 벌어지면서 그 오명이 더욱 심각해졌지만, 마지막 수록작에서는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는 평화로운 공원으로 탈바꿈한 채 등장합니다. 그런데 그 마지막 수록작에게 거리의 평화를 믿어서는 안 된다라는 제목을 단 건 무척 아이러니한 일인데, 겉모습만 평화롭게 바뀌었을 뿐 실은 그 아래에 감춰진 불행과 비극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라는 섬뜩한 경고처럼 읽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그 공원에서 자신들의 용서받지 못할 죄를 자백하는 두 사람의 모습은 때론 피할 수 없는 운명이란 것도 있다.”라는 씁쓸함을 남겨서 더욱 인상적이었습니다.

 

올봄에만 개정판을 포함하여 미치오 슈스케의 세 작품이 출간됐습니다. 매번 다음에는 반드시 책장에 갇혀 있는 그의 대표작들을 읽을 테야!”라고 다짐하고도 금세 까먹거나 의도적으로 피해오곤 했는데, 아무래도 다음에 읽을 작품 역시 신간인 용서받지 못한 밤이 될 듯 합니다. 하지만 어떻게든 올해 안에 그의 대표작 한 권쯤은 책장에서 꼭 구해주도록 애써 볼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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