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티켓
조 R. 랜스데일 지음, 박미영 옮김 / 황금가지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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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말, 천연두로 부모를 잃은 16살 잭 파커와 여동생 룰라는 할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친척집으로 가던 중 은행을 털고 도주하던 강도들과 마주칩니다. 할아버지는 숨지고 여동생 룰라가 강도들에게 납치됐지만 그 누구도 잭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 않습니다. 그런 잭에게 손을 내민 건 거구의 흑인 추적자 유스터스와 난쟁이 총잡이 쇼티. 잭은 할아버지에게 받은 땅 문서를 내걸며 두 사람에게 도움을 청합니다. 그렇게 시작된 여동생 구출작전에 새로운 삶을 꿈꾸는 매춘부, 전직 현상금 사냥꾼인 보안관, 유치장 요강 청소담당인 흑인, 그리고 성질 고약한 멧돼지가 가세하면서 피비린내 진동하는 추격전이 텍사스를 무대로 펼쳐집니다.

 

납치된 여동생 구출하기라는 결코 가볍지 않은 주제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이 16살 소년인데다 구출을 위해 조직된 팀원 면면이 어딘가 블랙 코미디 같은 분위기를 풍겨서 처음엔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서부극 정도로 여겼던 게 사실입니다. 물론 그런 분위기가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빅 티켓은 걸쭉하고 노골적인 음담패설, 피와 살이 튀는 무자비한 폭력, 총잡이가 활약하던 서부시대와 본격적인 산업혁명의 시대가 묘하게 겹친 19세기 말 미국의 혼란 등 날것 같은 잔혹함을 생생하고 역동적으로 그려낸 작품입니다.

 

추격전 자체도 흥미롭지만 독자의 눈길을 끄는 건 인물 하나하나의 독특한 캐릭터입니다. 선교사인 할아버지의 영향으로 독실한 기독교인이 된 16살 잭은 사건 전까지만 해도 모든 게 주님의 계획대로 이뤄진다고 믿으며 살인을 죄악시 여겨왔습니다. 하지만 여동생을 구출하기 위한 여정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살인을 비롯한 온갖 불법을 저지르게 되자 단단했던 종교적 신념이 무너지면서 크나큰 혼란에 휩싸입니다.

백인+흑인+코만치 인디언 혼혈인 유스터스는 흑인과 거지와 무법자의 시신을 묻고 수고비를 받는 천민이지만, 간간이 현상금 사냥꾼으로 활동하기도 합니다. 술에 취하면 피아를 구분 못하고 총질을 해대는 게 문제지만, 뛰어난 추적꾼의 기량을 갖추고 있습니다.

난쟁이로 태어나 아버지에게 학대당한 끝에 어린 시절 서커스단에 버려졌던 쇼티는 그곳에서 세상과 문학과 사격술을 배운 독특한 인물입니다. 핸디캡인 작은 키에도 불구하고 정찰병과 탐정을 거쳐 뛰어난 현상금 사냥꾼이 됐지만, 밤마다 망원경으로 별을 관찰하고 항상 마크 트웨인의 소설을 탐독하는 로맨티스트이기도 합니다.

16살 잭의 동정을 책임진 매춘부 지미 수는 새로운 삶을 위해 매춘굴을 도망쳐 나온 뒤 잭의 팀에 합류한 당차고 활달한 인물입니다. 매춘부가 될 당시 끔찍한 기억을 잊지 못하고 있지만 그래선지 강도들에게 여동생을 납치당한 잭에게 큰 위안과 힘이 돼주기도 합니다.

 

잭 일행의 추격전은 피비린내 그 자체입니다. 가는 곳마다 강도 일당이 저지른 참혹한 살인 현장과 마주쳐야 했고, 일당을 숨기려는 자들과 예상치 못한 총격전을 벌이며 큰 위기를 맞기도 합니다. 하지만 작가는 추격전 위주의 액션물에 그치지 않고 각 인물들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그들의 희망과 체념을 골고루 채워 넣어 두텁고 탄탄한 서사를 구축합니다. 한편에선 현상금을 노리는 총잡이와 법적 절차를 무시한 교수형이 횡행하고, 다른 한편에선 금덩이 노릇을 하는 석유 유정탑과 부의 상징인 자동차가 혼재하는 시대를 살아가는 여러 인물들의 다채로운 캐릭터는 스토리 못잖게 흥미로운 대목입니다. 특히 잭을 돕는 추적팀이 밑바닥 출신의 혼혈 흑인, 모든 이에게 손가락질 받는 난쟁이, 돈을 위해 몸을 팔아야 하는 매춘부로 구성된 점은 뿌리 깊은 차별을 상징적으로 강조하는 특별하고도 매력적인 설정입니다.

 

적잖이 발견된 오타와 간혹 이해가 잘 안 되는 번역 때문에 별 0.5개를 빼긴 했지만 빅 티켓은 기대 이상의 재미와 흥분을 안겨준 명품이란 생각입니다. 휴스턴 크로니클은 “‘톰 소여의 모험의 어두운 버전과 코엔 형제 영화처럼 느껴진다.”라는 평을 남겼는데, 만일 이 작품이 코엔 형제에 의해 영화화된다면 고민할 것도 없이 찾아보게 될 것 같습니다. 출판사 소개글에 따르면 실제로 할리우드에서 영화로 제작 중이라고 하는데, 코엔 형제가 감독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화려한 볼거리와 독특한 서사를 맛볼 수 있을 게 분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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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 건의 완벽한 살인
피터 스완슨 지음, 노진선 옮김 / 푸른숲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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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턴에서 추리소설 전문서점을 운영하는 40대 맬컴 커쇼는 어느 날 FBI 요원 그웬 멀비의 방문을 받고 큰 충격에 빠집니다. 맬컴이 오래 전 블로그에 올린 여덟 건의 완벽한 살인이란 포스팅을 그대로 모방한 살인사건들이 벌어지고 있다는 그녀의 추측 때문입니다. 실은 그 포스팅은 가장 독창적이면서 실패할 확률이 없는 완벽한 살인을 다룬 여덟 편의 추리소설을 소개한 것으로 당시 맬컴이 일하던 서점의 홍보를 위해 올린 것에 불과하지만, 그웬의 주장대로 누군가 현실 속 완벽한 살인을 구현하기 위한 도구로 이용했다면 그것은 엄청난 문제일 수밖에 없습니다. 최악의 경우엔 본인이 살인용의자 혹은 공범으로 의심받게 될 상태에서 맬컴은 그웬과 함께 일련의 살인사건을 하나하나 조사해보기로 결심합니다.

 

한국에 출간된 피터 스완슨의 작품은 빼놓지 않고 모두 읽었는데, 매번 데뷔작 죽여 마땅한 사람들에 맞먹는 작품을 기대했다가 다소 아쉬움만 느끼곤 했던 게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투적이고 틀에 박힌 서사 대신 늘 새로운 설정을 추구하는 점은 높이 평가해왔고, 그래서 이번 신작 역시 기대를 갖고 읽기 시작했습니다.

 

제일 먼저 눈에 띈 건 고전 추리소설 팬들을 위한 오마주라는 출판사 소개글이었습니다. 처음엔 이야기 자체가 고전적이란 뜻으로 해석했는데, 읽어보니 애거서 크리스티를 위시한 황금시대(1920~30년대) 작품부터 길리언 플린의 나를 찾아줘에 이르기까지 미스터리 팬이라면 한번쯤 들어봤거나 필독서 목록에 올려야 할 명작들이 여러 가지 방식으로 작품 속에 녹아들어 있었습니다. 특히 맬컴이 작성한 여덟 건의 완벽한 살인에 등장하는 애거서 크리스티,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아이라 레빈, 도나 타트 등 가장 독창적이면서 실패할 확률이 없는 완벽한 살인을 그려낸 당대의 거장들의 작품들이 자주 언급됩니다.

 

초반부만 해도 맬컴과 마찬가지로 독자는 다소 엉뚱한 추측과 개연성 없는 추리를 펼치는 FBI 요원 그웬 멀비를 과대망상증으로 여길 수밖에 없습니다. 결과를 과정에 끼워 맞춘 듯한 그녀의 추리는 무리수로 보였고, 단지 서점 홍보를 위해 블로그에 글을 올렸던 맬컴이 엉뚱한 상황에 휘말리는 것으로 보일 여지가 많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연쇄살인의 희생자(로 추정되는 자) 가운데 맬컴의 서점에 자주 드나들던 여성이 거론되자 맬컴은 그웬에겐 밝히지 않은 자신의 은밀한 과거를 떠올리며 공포에 사로잡힙니다. 자신과 그웬이 편의상 찰리라고 별명 붙인 그 연쇄살인범이 어쩌면 자신이 아는 그 사람일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 작품은 더 이상의 줄거리 소개가 쉽지 않은데, 초중반에 폭로되는 결정적인 변곡점(맬컴의 은밀한 과거)을 언급하지 않고는 그 뒷이야기를 설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변곡점으로 인해 맬컴은 찰리라 별명 붙인 범인을 추적하기 시작하고, 자기 주변의 인물들을 하나하나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유일한 아군이던 그웬마저 그를 돕지 못하게 된 상태에서 맬컴은 조금씩 진실에 다가가지만 결국 독자와 함께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으며 예상치 못한 엔딩을 맞이하고 맙니다.

 

이 작품에서 언급된 수많은 고전 가운데 제대로 읽어본 작품은 몇 편 안 됩니다. 가장 자주 언급된 애거서 크리스티의 작품들(‘ABC 살인사건’, ‘애크로이드 살인사건’,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은 워낙 어릴 적에 청소년 버전으로 읽은 기억밖에 없어서 무척 아쉬웠는데, 그래도 맬컴의 입을 통해 설명된 정보 덕분에 희미하게나마 줄거리가 떠오르곤 했습니다. 새삼 꼭 한 번 다시 읽어야겠다는 욕심이 들었는데 나머지 고전들 역시 기약할 순 없어도 필독 목록에 꼭 올려놓을 생각입니다. 다만, 이 작품에는 몇몇 고전에 대한 결정적인 스포일러가 들어있으니 그 점은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맬컴의 은밀한 과거, 블로그 포스팅을 모방한 연쇄살인범의 동기와 목적, 그리고 중간중간 ?” 소리가 저절로 나오게 만드는 위화감 가득한 서술 등 여덟 건의 완벽한 살인은 꽤 입체적인 구도를 지닌 작품입니다. “범인은 누구?”라는 미스터리 서사에다 복잡하고 몽환적인 심리스릴러의 면모까지 갖춰서 풍성한 볼륨감도 만끽할 수 있습니다.

 

다만, 팽팽한 긴장감과 막판 반전에 대한 기대감에 충분히 부응하지 못한 엔딩은 무척 아쉬웠습니다. 나름 몇 가지 반전이 일어나지만 이야기의 구도 상 모든 걸 뒤집는 짜릿하고 놀라운 장면을 연출하진 못합니다. 오히려 심연에 가까운 고통스럽고 씁쓸한 맛이 더 강하게 남는다고 할까요? 지금까지의 피터 스완슨의 작품들과는 완연히 다른 스타일의 작품인 건 맞지만 여전히 죽마사에 눈높이가 맞춰진 저로선 도리 없이 별 1개를 뺄 수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의 신작 소식이 들린다면 주저 없이 달려들겠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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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엘의 다이어리
리처드 폴 에번스 지음, 이현숙 옮김 / 씨큐브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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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콥 처처는 로맨스 소설 베스트셀러 작가지만 정작 본인은 제대로 된 로맨스를 맛본 적도 없고 가족의 사랑조차 결핍된 인물입니다. 어릴 적 형의 죽음 이후 우울증이 극심해진 어머니 때문에 아버지는 쫓기듯 집을 떠났고, 제이콥 자신도 16살 때 영문도 모른 채 한밤중에 어머니에게 내쫓겼습니다. 그렇게 20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 어느 날, 제이콥은 어머니의 부고와 함께 그녀가 살던 집을 상속받게 됐다는 연락을 받습니다. 호더(hoader, 저장강박증 환자)였던 어머니가 남긴 산더미 같은 물건들을 치우면서 제이콥은 평생을 품어 온 의문 왜 자신은 어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한 것일까? - 을 떠올립니다. 착잡한 마음으로 물건들을 치우던 제이콥에게 레이첼이란 여성이 찾아옵니다. 한때 이 집에서 살았던 자신의 생모를 찾으러 왔다는 레이첼에게 제이콥은 알 수 없는 연민과 동정, 그리고 그 이상의 감정을 품게 됩니다.

 

장르물 편식이 심한 제 취향과는 거리가 먼 로맨스 소설이지만 크리스마스 소설의 제왕”, “고전적인 로맨스의 탁월한 재해석이란 외신의 평가를 보니 왠지 제가 좋아하는 영화 러브 액츄얼리를 연상시키는 설정인 것 같아 관심이 생긴 작품입니다. 자신을 내쫓은 어머니의 유품을 정리하며 회한에 잠기는 베스트셀러 작가 제이콥과 태어나자마자 입양된 뒤 뒤늦게 자신의 생모를 찾아 나선 레이첼의 조합은 로맨스 소설의 정석에 가까운데다 이야기의 시간적 배경도 크리스마스를 코앞에 둔 시점이라 여러 모로 러브 액츄얼리와 닮은 작품이었습니다.

 

자신을 버린 어머니라는 공통점을 지닌 두 사람을 결정적으로 묶어준 건 레이첼의 생모 노엘이 남긴 다이어리입니다. 노엘은 피치 못할 이유로 임신한 상태에서 제이콥의 가족과 함께 지냈었고, 당시 자신의 처지와 심경을 절절하게 다이어리에 기록했던 것입니다. 노엘에 대해 알고 있는 유일한 인물은 제이콥의 아버지뿐입니다. 레이첼을 위해 오래전 가족을 버린 아버지를 만나야만 하는 제이콥과 생모를 만날 수도 있다는 기대감에 빠진 레이첼은 서로 복잡한 심경으로 긴 여정에 나섭니다. 그 여정은 두 사람에게 특별한 감정을 품을 기회를 선사하지만 동시에 예상치 못한 당혹스런 상황과 마주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해피엔딩은 절대 쉽게 그들을 찾아오지 않습니다.

 

어머니는 내가 수년 전에 저질렀던 것과 똑같은 실수를 저지르지 말아라. 나는 다른 사람들이 내 인생의 이야기를 쓰도록 내버려뒀어.’라고 말했어요. 우리는 우리의 이야기를 바꿀 수 있어요.” (p288)

 

제이콥과 레이첼의 이야기는 달달한 로맨스이자 가슴 아픈 상처 극복기이자 누군가에게 억눌리고 빼앗겼던 자신을 되찾는 성장소설이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자신을 버린 어머니를 이해하고 용서하고 끝내 화해의 손을 내미는 전통적인 가족 서사가 가미돼서 자칫 뻔한 로맨스가 될 뻔한 이야기를 한결 두텁고 훈훈하게 만듭니다.

출판사 소개글에 따르면 넷플릭스 오리지널로 제작된다고 하는데, 잘 만들어진다면 러브 액츄얼리못잖은 따뜻한 로맨스가 돼줄 것 같습니다. 또 이 작품은 노엘 4부작의 첫 작품이라고 합니다. 전형적인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된 제이콥과 레이첼의 이야기가 어떤 식으로 확장될지 짐작조차 못하겠지만, “그들은 그 후로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를 넘어선 새로운 로맨스 스토리가 기대되는 게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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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유괴
니시무라 교타로 지음, 이연승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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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중반, 일본 총리공관으로 전대미문의 협박전화가 걸려옵니다. 일본 국민 12천만 명을 납치했으니 방위비 1년 예산에 해당하는 5천억 엔을 몸값으로 내놓으란 것입니다. 그리고 사흘 후 젊은 커플이 묻지마 살인방식으로 살해당하고, 이어 전국에서 의문의 살인사건이 벌어집니다. 자신들을 블루 라이언스라 칭한 범인들은 예측 불가능한 행보로 경찰을 곤혹스럽게 만든 것은 물론 일본 전체를 패닉 상태에 빠뜨립니다. 경시청 수사1과의 야베 경부는 첫 사건의 목격자이자 천재 탐정인 사몬지 스스무에게 은밀한 협조를 요청합니다. 아내이자 비서인 후미코와 함께 조사에 뛰어든 사몬지는 작은 단서를 통해 범인의 윤곽을 흐릿하게나마 포착하지만 매번 기발한 행보를 보이는 그들을 따라잡는 건 그저 요원해 보일 뿐입니다.

 

일본의 국민 미스터리 작가로 불렸고 지난 392세의 나이로 타계한 니시무라 교타로의 작품입니다. 700편의 작품을 발표한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에 소개된 건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라서 그런지 저 역시 살인의 쌍곡선’(1971년 작)이 유일하게 읽은 그의 작품입니다.

화려한 유괴1977년에 출간된 작품으로 천재 범죄집단 vs 천재 명탐정의 불꽃 대결이란 출판사 홍보카피대로 전대미문의 범죄를 저지른 천재들(블루 라이언스)과 그들에 맞먹는 천재성을 지닌 파란 눈의 일본인 탐정사몬지 스스무의 대결을 그립니다.

 

일본 국민 전체를 납치했다고 선언한 범인들은 누가 죽어도 상관없는묻지마 살인을 저지르며 총리에게 천문학적인 금액을 요구합니다. 애초 총리가 줄 수 있는 돈도 아니고, 준다고 해도 받아갈 방법도 전무한 불가능한 요구에 모두가 의아해하지만 이미 작은 단서에서 범인들의 윤곽을 파악한 사몬지는 범인들의 궁극적인 목적은 따로 있음을 간파합니다. 그리고 이때부터 이야기는 천재 범죄집단과 천재 탐정 사이의 고도의 심리전의 양상을 띠기 시작합니다.

 

미국에서 범죄심리학을 전공하고 탐정으로 일한 적도 있는 사몬지가 이 사건에서 가장 큰 무기로 삼은 것은 천재의 강점과 약점을 꿰뚫어볼 수 있는 능력입니다. 그 자신이 천재인 덕분에 같은 천재의 자부심과 우월감을 파악하는 것은 물론 약점까지도 내다볼 수 있는 것입니다. 애초 일본 국민 전체를 납치하겠다는 발상 자체도, 또 순식간에 전략을 바꿔가며 자신들의 목적을 차근차근 성취해가는 범행계획도 경찰의 평범한 탐문수사로는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음을 사몬지는 일찌감치 간파합니다. 물론 아내이자 비서인 후미코와 함께 부지런히 발품을 팔긴 해도 사몬지의 기본 전략은 일반인으로선 떠올리기 어려운 몇 수를 내다보는 천재의 지략’, 즉 천재는 단서와 물증이 아니라 머리싸움으로 잡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작품이 천재들의 황당하고 비약적인 두뇌싸움을 그렸다는 뜻은 절대 아닙니다.) 개인적으론 천재 탐정 캐릭터를 좋아하지 않는데, 사몬지는 스스로를 천재로 포장하지도, 대놓고 자랑질을 일삼지도 않는 소박한 인물이라 아무런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특이한 트릭과 다채로운 미스터리에 익숙해진 요즘 독자에겐 다소 쉽고 밍밍하게 읽힐 수도 있겠지만, ‘화려한 유괴클래식이란 이런 것!”임을 간결한 문장과 빠른 전개를 통해 매력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특히 전 국민 납치라는 설정은 얼마든지 현실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 어지간한 연쇄살인보다 훨씬 더 피부에 와 닿는 느낌이 강했는데, 1970년대라는 배경을 감안하면 당시 독자들에게 꽤 큰 충격을 줬을 게 분명하다는 생각입니다.

요즘 일본에서 이른바 특수설정 미스터리가 유행 중인데, 읽은 건 몇 작품 안 되지만 왠지 그쪽으론 통 정이 가질 않았습니다. 오히려 특별한 간식이 생각날 때면 고전미 넘치는 오래된 작품들이 더 간절해지곤 하는데, 그런 점에서 니시무라 교타로의 작품들이 좀더 한국에 많이 소개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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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자키 목련 빌라의 살인 하자키 일상 미스터리
와카타케 나나미 지음, 서혜영 옮김 / 작가정신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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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력사건이라곤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해변 소도시 하자키. 그곳에 자리한 목련빌라에서 참혹하게 살해된 시체가 발견되자 빌라 주민들은 물론 경찰도 큰 충격을 받습니다. 형사반장 고마지와 신참 경사 히토쓰바시가 수사를 주도하는 가운데, 사건 당일 태풍이 들이친 데다 빌라 자체가 다소 외진 곳에 자리한 탓에 범인은 빌라 주민일 가능성이 높아졌고, 모두 열 채로 이뤄진 목련빌라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돕니다. 그러던 중 또 한 건의 살인사건이 일어나자 주민들은 두려운 가운데에도 범인이 누구인지 자신들만의 추리를 벌이기 시작합니다.

 

1999년 작품으로 한국에선 2010년에 빌라 매그놀리아의 살인이란 제목으로 소개된 바 있습니다. 당시엔 원제(ヴィラ・マグノリアの殺人)를 그대로 직역해서 사용했지만 2022년 개정판엔 하자키 목련 빌라의 살인이란 다소 엉뚱한 제목이 붙은 셈인데, 이어지는 시리즈들(‘헌책방 어제일리어의 사체진달래 고서점의 사체’, ‘네코지마 하우스의 소동고양이섬 민박집의 대소동’)도 모두 마찬가지 과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코지 미스터리를 싫어하진 않아도 딱히 찾아 읽는 취향은 아니지만 하무라 아키라 시리즈때문에 팬이 된 와카타케 나나미의 작품이라 늘 관심권에 두고 있었고, 이번에 마침 개정판이 나온 걸 계기로 순서대로 읽어보기로 했습니다. 와카타케 나나미가 내린 코지 미스터리의 정의는 작은 동네를 무대로 하여 누가 범인인지 수수께끼를 풀어나가는, 폭력행위가 비교적 적고 뒷맛이 좋은 미스터리입니다. ‘하자키 목련 빌라의 살인에 관한 한 대부분 맞는 이야기지만 적어도 뒷맛이 좋은 미스터리는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어쨌든 복수의 살인사건이 벌어지고,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며 드러난 진실은 독자에 따라 오히려 더 씁쓸함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잔인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전체적으론 코지 미스터리의 틀을 충실히 따르고 있어서 엽기적이거나 잔혹한 장르물을 싫어하는 독자라면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습니다.

 

용의자가 너무 많다는 한 챕터의 제목대로 열 채로 이뤄진 목련빌라 주민들 대부분이 용의선상에 오르다 보니 인물 하나하나를 머릿속에 담는 게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개성들이 워낙 강해서 식별하는데 큰 어려움은 없습니다. 이들 대부분은 용의자 취급과 함께 경찰의 집요한 탐문에 시달리면서도 누가 범인일까?”라는 궁금증을 숨기지 않고 아마추어 탐정처럼 진실 찾기에 나섭니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주민들 각자가 숨겨온 내밀한 비밀들이 연이어 폭로되면서 수사의 방향이 요동치게 된다는 점입니다. 자살이나 실종 등 비극적인 가족사를 지닌 자가 있는가 하면, 과거의 불륜이나 일그러진 애정관계가 폭로되는 경우도 있고, 파국 직전임이 드러나는 부부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사연은 어딘가 현재 벌어진 살인사건들과 미묘하게 맞닿아있어서 경찰 수사를 더욱 곤혹스럽게 만듭니다.

 

개성 강한 주민들도 코지 미스터리의 한 축을 담당하지만, 수시로 웃음을 자아내는 건 다름 아닌 경찰 주인공들입니다. 서장을 호구처럼 대하는 만사태평 스타일의 형사반장 고마지와 그런 형사반장에게 조금도 뒤지지 않는 신참 경사 히토쓰바시는 마치 만담을 나누듯 의견을 나누며 수사를 전개합니다. 어딘가 나사 하나 빠진 듯한 두 사람의 초반 행보는 과연 이들이 범인을 잡을 수 있을까?”라는 의구심마저 들게 만드는데, 그래서인지 아마추어 탐정처럼 추리를 발전시키는 빌라 주민들에게 더 믿음이 가게 되는 상황들도 종종 등장합니다. 물론 고마지와 히토쓰바시가 주고받는 만담 속엔 나름 가시가 들어있고, 그것들은 막판에 제대로 힘을 발휘하며 진실을 폭로하는 가장 큰 원동력이 되기도 합니다.

 

언뜻 보면 단순한 구도의 미스터리 같지만 다 읽은 뒤에 복기해보면 실은 무척 복잡하고 배배 꼬인 이야기임을 알게 됩니다. 주요 등장인물만 23명에, 빌라라는 한정된 공간을 무대로 삼은 데다 각자 지닌 사연들까지 부여한 점을 감안하면 이 모든 재료들을 어떻게 엮어낸 건지 신기할 정도인데, 이미 하무라 아키라 시리즈를 통해 익숙해진 저조차도 와카타케 나나미의 설계 능력에 새삼 놀라움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물론 모든 재료들과 복선을 회수하는 과정에서 다소 무리수가 엿보이기도 했고, 고마지-히토쓰바시 콤비가 진실을 설명하는 막판 클라이맥스에선 보통사람은 깨닫기 힘든 비약이 동원된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런저런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단번에 마지막 장까지 완주한 걸 보면 재미 면에선 하무라 아키라 시리즈못잖은 매력이 있는 건 분명하다는 생각입니다.

 

개인적인 취향만 놓고 보면 와카타케 나나미는 그리 궁합이 잘 맞는 작가는 아닙니다. 이 작품까지 모두 다섯 편을 읽었지만 별 5개를 준 건 이별의 수법이 유일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뭐라고 콕 찝어 설명할 수 없는 와카타케 나나미만의 묘한 마력 때문에 계속 찾아 읽게 되곤 하는데, ‘하자키 시리즈역시 확 끌리는 지점은 없더라도(심지어 코지 미스터리 계열인데도) 개정판으로 출간된 작품 모두 조만간 읽을 예정입니다. 고마지-히토쓰바시 콤비가 계속 활약해준다면, 또 목련빌라 주민들이 조연이나 카메오로 등장해준다면 훨씬 더 흥미진진한 책읽기가 돼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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