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정 갈릴레오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 1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억관 옮김 / 재인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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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모태 문과인 저는 장르와 매체를 불문하고 수학이나 과학이 개입된 이야기는 (아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곤) 대체로 외면하는 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가시노 게이고의 갈릴레오 시리즈를 탐독했던 건 한국에 가장 먼저(2006) 소개됐던 용의자 X의 헌신’(시리즈 3)에 흠뻑 빠졌기 때문입니다. 실은 용의자 X의 헌신이 과학 혹은 이과 미스터리라는 사실을 모른 채 읽기 시작했고, 읽는 동안에도 전혀 거부감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에 이후 물리학 교수 유가와 마나부와 경시청 수사1과 구사나기 슌페이 콤비의 이야기가 출간되기를 간절히 바라게 됐습니다. 당시 용의자 X의 헌신은 한국에서 대박에 가까운 성적을 냈고 그 덕분에 2년 후인 2008, 시리즈 첫 편인 탐정 갈릴레오를 시작으로 순서대로 출간되기에 이르렀는데, 그때부터 새 작품이 나올 때마다 허겁지겁 읽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2024년 시리즈 8편인 금단의 마술이 출간되자 이왕이면 오랜만에 첫 편부터 순서대로 다시 읽어봐야겠다는 욕심이 들었고, 한두 편 외엔 서평도 남기지 못한 터라 2025년 독서계획에 갈릴레오 시리즈 다시 읽기를 포함시키기로 했습니다.

 


수록된 다섯 편의 단편 모두 초자연 현상이나 다름없는 기이한 사건 또는 살인인지 사고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애매한 사건을 다룹니다. 자연발화 또는 자연폭발 외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는 의문의 화재사건(‘타오르다’), 물리적으로 제작이 불가능한 금속제 마스크의 비밀(‘옮겨 붙다’), 욕조에서 발견된 사체의 가슴에 생긴 기이한 괴사 흔적(‘썩다’), 바다 밑에서 불기둥이 치솟고 수면 위로 불티가 퍼져나간 기괴한 사건(‘폭발하다’), 원래라면 볼 수 없었던 장면을 유체 이탈을 통해 본 뒤 그림으로 그려 수사진을 혼란에 빠뜨린 한 소년(‘이탈하다’) 등 하나같이 일반적인 수사와 감식으로는 해결하기 어려운 사건들이 천재 물리학자 유가와와 평범한 경시청 형사 구사나기 앞에 숙제로 등장합니다.

 

데이도 대학 동창인 유가와와 구사나기의 콤비 플레이는 아직은 시리즈 첫 편이라 그런지 약간 서먹하고 어색하게 보일 때가 더 많습니다. 대체로 천재 유가와가 범인(凡人) 구사나기를 놀려먹거나 한 수 지도하며 사건의 진상으로 이끄는 경우가 많은데, 그래선지 간혹 구사나기가 소소한 반격을 시도하는 장면에선 통쾌함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시리즈가 거듭될수록 이들의 관계에도 약간의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오랜만의 다시 읽기를 통해 두 사람의 밀당을 지켜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 될 것 같습니다.

 

이과 미스터리답게 플라스마, 충격파, 전기에너지, 마이너스 압력, 빛의 굴절 등 이야기 곳곳에서 머리 아픈 과학 용어들이 난무합니다. 하지만 히가시노 게이고는 굳이 모든 개념을 이해할 필요가 없는 대목에선 사회학부 출신인 구사나기의 입을 빌어 무슨 소린지 전혀 모르겠다.”는 조언을 해줌으로써 모태 문과인 저의 부담감을 덜어주곤 합니다. 동시에 상식 수준의 간단한 실험들을 통해 미처 몰랐던 과학세계의 흥미로운 일면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마치 초중등 시절의 과학시간에 신기한 현상을 직접 목격하며 감탄했던 경험과 비슷하다고 할까요? 반면 때론 과학이야말로 가장 확실한 완전범죄 도구라는 깨달음까지 얻게 해서 섬뜩한 느낌을 받은 적도 여러 번 있습니다.

 

확실하진 않지만, 한국에 가장 먼저 소개된 용의자 X의 헌신의 인상이 너무 강렬해서 그 뒤에 출간된 갈릴레오 시리즈는 다소 밍밍하고 아쉬운 기분으로 읽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하지만 15년도 더 지난 시점에 다시 읽은 탐정 갈릴레오는 마치 추억이 깃든 고전과도 같아서 약점이나 아쉬운 점보다는 흐뭇한 정감 같은 게 더 강하게 느껴졌습니다. ‘용의자 X의 헌신과 아직 읽어보지 못한 최근작 금단의 마술을 제외하곤 대부분의 작품에서 비슷한 느낌을 받을 것 같은데, 그런 게 아무래도 오랜만에 다시 읽기의 매력 중 하나가 아닐까 싶습니다.

시리즈 두 번째 작품인 예지몽은 기억조차 거의 안 날 정도로 가물가물하지만, 오히려 그 덕분에 처음 읽는 듯한 기대감이 피어오릅니다. 원래는 다음 달쯤 읽을 예정이었지만 아무래도 조만간 유가와와 구사나기의 두 번째 이야기를 접하게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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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천대루
천쉐 지음, 허유영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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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 45층의 고층 아파트 마천대루에서 한 여자가 숨진 채 발견된다. 아름다운 용모와 상냥한 성격으로 주민들 사이에서 유명 인사였던 29세의 카페 매니저 메이바오의 죽음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그녀를 둘러싼 복잡한 인간관계와 비밀스러운 사연이 차츰 수면 위로 떠오르지만, 그럴수록 사건은 미궁에 빠져든다. 잔인한 운명의 손아귀에서 도망치려 발버둥치던 그녀를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은 누구인가? (출판사 소개글을 일부 수정 후 인용했습니다.)

 


이야기의 중심에 살인사건이 놓여있고, 수많은 사람들의 진술을 토대로 진범을 찾아가는 미스터리 형식을 띄고 있지만 마천대루는 누가 메이바오를 죽였는가, 보다는 군상극에 가까운 서사를 통해 그녀의 과거와 현재, 그녀와 인연을 맺었던 사람들의 기구한 사연, 그리고 그녀의 죽음이 주변사람들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를 묵직하면서도 집요한 스타일로 그려낸 작품입니다.

 

이야기의 주 무대인 마천대루는 지은 지 20년 가까이 돼서 조금씩 쇠락의 기운을 보이고 있긴 해도 여전히 대만에서 세 번째로 높은 빌딩이자 하늘을 찌를 듯 우뚝 서서 난공불락인 듯하지만 또 모래성처럼 아스라한 자태를 지니고 있습니다. 값비싸고 평수도 넓은 앞쪽 동과 원룸 위주의 저렴한 뒤쪽 동이 혼재된 마천대루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격차가 고스란히 반영된 현대사회의 축소판입니다. 빈부, 성별, 세대 같은 현실적인 격차 외에도 욕망, 이기심, 시기와 질투, 병증, 광기 등 사람들이 모인 곳이라면 어디서든 목격되는 갖가지 감정적인 격차가 요동치는 곳이기도 합니다.

 

입주민, 경비원, 부동산중개인, 가사도우미, 카페 아르바이트생 등 마천대루에 살거나 그곳을 근거지 삼아 살아가는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하고 그들은 살해당한 메이바오와 어떤 식으로든 인연을 맺은 탓에 그녀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습니다. 동시에 그들 중엔 메이바오를 살해할 만한 동기를 가진 자도 적지 않아서 용의자로 지목되기도 하는데, 독자는 경찰 심문에 응한 그들의 답변을 통해 메이바오의 기구하다고 밖에 할 수 없는 끔찍한 과거와 현재를 목도하게 됩니다. 그리고 용의선상에 오른 인물들이 하나같이 자신이 죽였다고, 자신 때문에 그녀가 죽었다고 자책하며 괴로워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모두가 범인인 동시에 누구도 범인이 아니다.”라는 출판사 소개글의 의미가 무엇인지 무거운 마음으로 깨닫게 됩니다.

 

한 사람이 죽었다. 우리가 모두 좋아했던 사람이고, 결코 그런 방식으로 죽어서는 안 되는 여자였다. 하지만 난 알고 있다. 누가 죽였든, 그녀의 죽음이 우리와 관련이 있다는 것을. 누구도 무관할 수 없다는 것을.” (p202)

 

메이바오와 주요 인물들의 과거와 현재를 소개한 1부에 이어 2~3부에서는 용의선상에 오른 인물들이 경찰 조사에 답변하는 내용이 그려지고, 마지막 4부에서는 사건 이후 1년이 지나는 동안 마천대루와 그곳 주민들이 겪은 변화와 함께 사건의 진상이라 할 수 있는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다소 파격적인 형식에다 살인사건을 수사하는 장면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고, 오히려 메이바오의 죽음과는 무관한 조연이나 단역들의 개인사가 적잖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어서 미스터리를 기대한 독자라면 조금은 어리둥절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출구 없는 지옥을 살아온 메이바오의 삶과 죽음, 그리고 그녀를 향해 지독한 애증을 품었던 주변사람들의 심정을 생생하게 전달하기 위해선 정통 미스터리보다는 이런 군상극 스타일의 서사가 더 잘 어울린다는 생각입니다. 메이바오의 죽음과 무관한, 몰라도 될 것 같은, 그래서 눈대중으로 넘기고 싶은 대목이 나오더라도 찬찬히 읽다 보면 막판에 이르러 응축된 감정의 농도와 두께를 제대로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비록 제 취향과는 조금 거리가 있는 이야기였지만, 읽는 내내 가슴속에 누름돌이 얹힌 것처럼 무겁고 묵직한 감정에 취해있었고, 다 읽은 뒤엔 꽤 오래 갈 여운에 잠기기도 했습니다. 온통 비극으로 점철된 가운데 아주 잠깐씩 찾아든 희망에 모든 것을 걸었던 메이바오의 삶이 온갖 격차와 감정이 들끓는 마천대루라는 공간에서 마감되는 과정을 지켜보는 건 심적으로 꽤 힘들긴 해도 동시에 많은 생각을 품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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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일
오츠이치 지음, 김수현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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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일여름과 불꽃과 나의 사체17세에 데뷔한 오쓰이치가 두 번째로(문고판 기준 2001) 발표한 단편집입니다. 원제는 수록작 중 한 편인 천제요호(天帝妖狐)’인데, 한국 독자에겐 좀 어렵고 낯선 제목이라 그런지 수록작들을 관통하는 개념인 베일이라는 제목을, 그리고 저 너머, 바라보아서는 안 될 그것이라는 특이한 부제를 붙인 것 같습니다.

 

각각 100페이지 안팎인 두 개의 단편이 수록됐는데, ‘천제요호는 오쓰이치가 야마시로 아사코라는 필명으로 낸 이즈미 로안 시리즈에서 맛봤던 특유의 기괴하면서도 서글픔이 배어있는 호러물이고, ‘A MASKED BALL’은 고등학교 화장실에 적힌 의문의 낙서에서 시작되는 도시괴담에 가까운 미스터리입니다.

 

천제요호

친구도 형제도 없이 외롭게 지내던 11살 소년 야기는 홀로 코쿠리상(일종의 초혼술, 한국의 분신사바와 유사한 놀이)을 하던 중 사나에라는 귀신과 소통하게 됩니다. 어느 날 친구의 죽음을 목격한 야기는 말할 수 없는 공포에 휩싸이는데, 그 순간 사나에는 야기의 귀가 솔깃할 만한 달콤한 제안을 건네옵니다.

 

그럼 내 아이가 돼. 그러면 영원한 생명을 줄게. 몸을 나에게 넘겨. 대신 더 튼튼한 몸을 줄게. 그러면 너는 나이도 먹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을 거야.”

 

A MASKED BALL

교내 외딴 화장실을 흡연실로 애용하던 우에무라는 어느 날 낙서하지 말라, 정자체로 쓰인 이상한 낙서를 발견합니다. 낙서를 금지하는 그 낙서 옆에 다른 학생들이 댓글처럼 낙서를 적으면서 화장실은 서로 누군지 모르는 학생들끼리 낙서로 이야기를 주고받는 공간으로 변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정자체는 교칙을 어기거나 무례한 짓을 벌이는 자를 배제하겠다는 낙서를 남겼고, 실제로 그 배제는 무자비한 방법으로 벌어지기 시작합니다.

 

이 학교에는 깡통이 너무 많다.”

학교에는 질서를. 그것이 나의 흔들리지 않는 바람.”

새로운 죄가 발각. 나는 OOO를 학교에서 배제할 것이다.”

 


오쓰이치가 20대 초반에 발표한 초기작이지만, 두 작품 모두 이후에 출간된 그의 명품들에 깃든 매력과 미덕을 품고 있습니다. 특히 천제요호는 오쓰이치의 여러 경향 가운데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코드들(한마디로 요약하면 애틋한 호러’)로 채워져 있는데다 영상물에 더없이 잘 어울리는 이야기라 더욱 몰입해서 읽을 수 있었습니다. 또한 100여 페이지에 불과한 분량이지만 그 몇 배의 묵직함과 공포와 여운을 맛볼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도시괴담과 진범 찾기 미스터리가 뒤섞인 ‘A MASKED BALL’은 오쓰이치의 으스스한 장난끼가 잘 배어있어서, 가볍게 읽히면서도 내내 서늘함을 느낄 수 있는 작품입니다.

 

베일에 대해 더 알아보기 위해 일본 위키피디아를 검색해보니 오쓰이치는 최근까지도 활발하게 작품을 내고 있었습니다. (20249大樹館幻想출간) 하지만 그에 비해 한국 출간소식은 (여러 필명을 통틀어도) 너무 빈약하고 뜸해서 저 같은 팬들에겐 그저 아쉬울 수밖에 없습니다. 개인적인 바람이라면 오쓰이치의 작품이든 야마시로 아사코의 작품이든 2025년에 한 편쯤은 꼭 출간됐으면 하는 건데, 그리 낙관적이진 않지만 그래도 기대를 걸어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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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컬렉터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2-1 링컨 라임 시리즈 1
제프리 디버 지음, 유소영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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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시경 과학수사국장이던 3년 반 전, 현장 감식 도중 불의의 사고로 전신마비가 된 링컨 라임은 더는 삶을 이어나갈 의욕을 잃고 안락사를 계획 중입니다. 그런데 절친한 동료였던 강력반 형사 론 셀리토가 찾아와 기이한 납치살인사건의 수사에 협력해줄 것을 부탁합니다. 미량 증거물을 통해 수많은 사건을 해결해 온 라임의 천부적인 능력이 필요한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안락사를 결심했던 라임은 고민 끝에 론의 요청을 수락하곤 현장을 처음 발견한 순찰경관 아멜리아 색스를 호출합니다. 생활안전과로의 전출을 앞두고 마지막 순찰에 나섰다가 생매장당한 남자의 시신을 발견한 색스는 엉겁결에 라임의 손과 발이 되어 끔찍한 연쇄살인마 본 컬렉터를 추적하는 위험천만한 여정에 나서게 됩니다.

 


링컨 라임 시리즈1997년에 출간된 본 컬렉터를 시작으로 2023년까지(미국 기준) 무려 16편을 이어온 범죄스릴러의 대작입니다. 한국에선 2020년에 소개된 12스틸 키스’(미국 2016)를 끝으로 더는 신간 소식이 없어서 내내 아쉬워하고 있었는데, 그래선지 새해가 되자마자 그동안 들쑥날쑥 읽어온 링컨 라임 시리즈를 한번쯤 순서대로 정주행하고 싶다는 욕심이 들었습니다. ‘본 컬렉터41살의 링컨 라임과 31살의 아멜리아 색스가 그야말로 우여곡절을 겪으며 첫 인연을 맺는 작품이라 더욱 각별하게 기억하고 있었는데, 오랜만에 다시 읽어보니 그 이상의 감흥과 재미를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시리즈물의 첫 편 대부분은 주인공()의 캐릭터와 과거사를 소개하느라 이야기가 좀 처지거나 사건이 조연으로 밀려나는 경우가 많은데, ‘본 컬렉터는 라임과 색스 두 주인공의 운명적인 첫 만남과 충돌은 물론 뼈를 숭배하는 연쇄살인마본 컬렉터가 저지르는 전대미문의 사건까지 한데 잘 버무려내서 540여 페이지를 읽는 내내 단 한 순간도 지루함을 느낄 수 없었습니다.

 

두 주인공은 각자 인생에서 중대한 변곡점을 앞두고 뜻밖의 상황에 직면합니다. 전신마비 상태의 라임이 안락사 실행을 앞두고 다시금 사건 현장에 나서게 됐다면, 모델로 일하다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순찰경관이 됐지만 더는 견디지 못하고 생활안전과로 자리를 옮기려던 색스는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현장 감식 일을 떠맡게 된 것입니다.

증인 따위는 절대 믿지 않으며 오직 현장에 남겨진 흙, 먼지, 섬유, 냄새 등 미량의 증거물만 신뢰하는 라임과, 아버지처럼 사람들을 상대하는 경찰이 되고 싶어 늦은 나이에 경찰이 된 색스는 물과 불처럼 정반대의 성질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더구나 한 사람은 사지가 마비된 채 머리와 입으로만 수사를 진행하고, 한 사람은 자신이 원하지도 않은 상황에서 피와 땀을 흘리며 현장을 뛰어다녀야만 합니다. 그야말로 대충돌이 벌어지지 않을 수 없는 관계입니다. 하지만 라임과 색스는 서로에게 독설을 날리고 상처를 주면서도 뉴욕의 오래된 지하를 무대로 끔찍한 범행을 저지르는 본 컬렉터를 수사하는 과정에서 조금씩 상대의 진심과 속내와 과거를 알아가기 시작하고, 끝내는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한 파트너로 성장합니다.

 

사건 역시 시리즈 첫 편답게 독자의 눈길을 단번에 사로잡는데, “한니발 렉터가 인육이라면, 본 컬렉터는 뼈라는 출판사 소개글대로 라임과 색스가 상대하는 본 컬렉터는 참혹한 방식으로 살인을 저지르는 것은 물론 희생자의 뼈에 집착하는 역대급 사이코패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75년 전에 출간된 범죄서적을 탐독하는가 하면, 뉴욕의 역사와 지하구조물에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으며, 피살자 주변에 다음 살인의 단서를 남겨놓아 라임과 색스를 극도의 초조함 속으로 몰아가곤 합니다. 그리고 막판에 밝혀지는 그의 정체와 범행 동기와 궁극적인 목적은 왜 제프리 디버가 트릭과 반전의 대가로 불리는지를 확실하게 보여줍니다.

 

1997년에 출간된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최첨단 법과학 수사의 진수를 맛볼 수 있는데다 제한된 시간 안에 다음 피해자를 구해내야 한다는 긴박감 넘치는 설정 덕분에 사건 자체만으로도 끝내주는 미덕을 갖춘 범죄스릴러지만, 역시 두 주인공 라임과 색스의 강렬한 첫 만남이야말로 본 컬렉터의 가장 큰 매력이라는 생각입니다. 특히 사지마비를 비관하며 안락사를 결심한 라임이 자기도 모르게 색스로 인해 새로운 삶을 꿈꾸게 된 점이라든지 “(현장에는) 범인의 주소와 전화번호, 인상착의, 그자의 소망과 열망이 담겨 있어.”라는 라임의 지시에 반발하던 색스가 어느 새 라임이 시키기도 전에 뭘 해야 할지 판단하고 결정할 줄 알게 되는 모습은 앞으로의 콤비 플레이에 대한 기대감을 한껏 높여주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편인 코핀 댄서에서 두 주인공이 펼칠 이야기가 벌써부터 기다려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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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주장법
허진희 지음 / 자이언트북스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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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천재 시인 백오교와 경성 제일 미남 미카엘이 잇달아 자살로 보이는 죽음을 맞이하자 각 신문이 1면에 대서특필로 보도하는 등 경성 전체가 들썩입니다. 그런 와중에 백오교의 탐미적이고도 염세적인 시에 몰입했던 청춘들이 연이어 자살하자 사태는 점차 심각한 지경에 이릅니다. 한편 미카엘의 죽음에 희귀 독초가 이용된 사실이 알려진 직후 독초 박사 구희비는 한 일본 유력 가문의 의뢰를 받고 미카엘의 죽음이 자살인지 타살인지 조사하기 시작합니다. 빈민촌에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구희비의 비서로 채용된 17세 소녀 차돌은 그녀를 보좌하면서 나름 사건의 진상을 추리하지만 연이어 사건 관련자들이 살해되자 큰 충격에 빠집니다.

 


문학동네 청소년문학상 수상 작가이자 출간한 작품 대부분이 청소년물인 허진희의 작품을 읽어보기로 한 건 악의 주장법에 제가 좋아하는 코드들이 한데 버무려져있었기 때문입니다.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적 배경, 국권이 피탈된 후 한반도 곳곳에 피어나기 시작한 이름 모를 독초들과 그것을 이용한 살인, 그리고 미스터리 해결사를 맡은 29세의 독초 박사와 17세의 팔척장신소녀 콤비 등 매력적인 설정들이 단번에 눈길을 끌었던 것입니다.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미스터리는 사건 이면에 자리 한 시대적 비극성 때문에 서사의 두께가 자연스레 두터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다만 사건과 시대적 비극성이 매끄럽게 배합되지 않으면 자칫 겉멋을 위한 설정으로 전락할 수도 있는 양날의 검이기도 한데, 그런 면에서 악의 주장법은 시대적 비극성을 억지로 강요하지 않으면서도 그 위에 미스터리 서사를 차곡차곡 잘 쌓아올린 이야기라 마지막까지 조금의 거부감이나 위화감 없이 읽어낼 수 있었습니다.

망국의 한을 뿜어내듯 이름 모를 독초들이 곳곳에서 피어났다는 설정, 또 그 독초가 살인에 이용된 점, 그리고 세상을 뜬 부모의 뒤를 이어 독초 박사가 된 29세의 구비희가 진실 찾기의 주인공으로 등장한 점도 흥미로운데, 미스터리 자체는 그리 복잡하지도 않고 엄청난 반전을 품고 있지도 않지만 독초라는 소재의 매력을 다양한 레시피를 통해 잘 활용한 작가의 필력은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독초를 연구하던 부모는 정체불명의 독초에 중독돼 사망했고 자신은 태아 시절 어머니가 연구를 위해 섭취한 독초로 인해 평생 이름 모를 통증에 시달려왔으면서도 결국 독초 박사로 이름을 얻게 된 것은 물론 독초를 이용한 살인사건 조사까지 맡게 된 구희비의 캐릭터는 그야말로 아이러니 그 자체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녀의 연인과 친척들이 일제의 폭압과 만행으로 인해 지독한 불행 혹은 큰 위기에 빠진 것으로 설정돼있기도 해서, 개인의 비극과 시대의 비극이 안긴 고통을 온몸으로 견뎌내며 살아가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구희비의 비극성을 다소 순화시켜주는 건 팔척장신소녀 차돌입니다. 웬만한 사내 두세 명에 견줄만한 완력에다 때 묻지 않은 순수함과 성실함을 지닌 차돌이 구희비와의 만남을 통해 새로운 세상을 접하며 성장하는 과정은 무겁고 비극적인 이야기 속에서 유일하게 숨 쉴 틈을 내주는 장면들입니다. 구희비가 빈민촌의 소녀 차돌을 비서로 들인 사연은 후반부에야 공개되는데, 아마 앞부분에서 설명됐더라면 별 감흥을 느끼지 못했을 그 사연이 마지막에 공개되는 순간 독자는 소소한 감동과 함께 울컥함을 맛보게 됩니다. 동시에 언젠가 차돌에게 해사한 시대가 찾아오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도 품게 됩니다.

 

출판사 소개글 가운데 식민지 시대의 억압과 탄압으로 잉태된 악의 연쇄를 파헤치는...”, “악의 본질을 추격해가는...”이라는 대목이 있지만, 사실 개인적으론 그 정도까지의 서사를 담은 작품은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시대적 비극성이 살인사건 미스터리에 잘 녹아든 건 사실이지만 작가가 그만큼 거창하고 심오한 주제를 목표로 삼았다고 보이진 않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제목이 악의 주장법이고, 이 작품 속의 은 그 본질을 탐구해볼 만한 지독한 사이코패스이긴 하지만, 이야기의 중심은 자체보다는 인물과 시대에 방점이 찍혀 있기 때문입니다.

 

간토대지진 조선인 희생자 추모비를 일부러 찾아갔다는 작가가 “(그들의) 넋에 가닿는 울림 있는 소설을 쓰고 싶다라고 밝힌 걸 보곤, 언젠가는 악의 주장법보다 좀더 묵직하고 진하면서도 시대를 정면으로 돌파하는 이야기를 읽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게 됐습니다. 관심목록에 올려놓은 또 한 명의 한국 장르물 작가를 만나게 돼서 정말 반가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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