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우가 잠든 숲 1 스토리콜렉터 53
넬레 노이하우스 지음, 박종대 옮김 / 북로드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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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프하임 경찰서 강력11반의 피아 산더와 올리버 보덴슈타인 콤비의 활약을 그린 타우누스 시리즈여덟 번째 작품으로 보덴슈타인의 개인사와 직결된 사건을 다룹니다. 50대 중반의 보덴슈타인은 경찰로서의 사명감도, 의욕과 열정도 바닥을 드러낸 상태에서 더는 참혹한 사건과 마주치기 싫어졌고, 사랑하는 여인과의 평온한 삶을 위해 안식년 휴가를 신청합니다. 다만 그의 진짜 속내는 피아에게 반장직을 물려준 뒤 영원히 경찰을 떠나는 것입니다. 하지만 마지막 사명이라 여긴 연쇄살인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보덴슈타인은 큰 충격에 빠집니다. 유년기를 보냈던 폐쇄적인 소도시 루퍼츠하인 곳곳에서 일주일동안 하루 한 건 꼴로 벌어진 살인사건들이 42년 전 11살이던 자신이 겪은 악몽과 직결돼있음을 감지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보덴슈타인은 러시아 출신의 소중한 친구와 자신이 직접 기르던 새끼 여우를 잃었는데, 그것이 나이는 어렸지만 어른 못잖게 잔인하고 비열했던 루퍼츠하인의 10대 패거리의 소행임을 짐작하긴 했어도 11살의 보덴슈타인으로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더구나 경찰마저 부실한 수사 끝에 유력 용의자의 자살 시도를 끝으로 유야무야 마무리하고 말았는데, 42년이 지난 현재 그 사건의 관련자들이 하나둘씩 끔찍하게 살해당하자 보덴슈타인으로서는 다분히 개인적인 감정이 깃든 수사를 벌일 수밖에 없게 됩니다. 하지만 객관성을 잃은 그의 수사는 자꾸 엉뚱한 곳으로만 흘러가고, 과거의 악몽에 깊이 사로잡히면서 갈팡질팡하는 모습만 보일 뿐입니다. 결국 피아에게 지휘권을 넘긴 후에야 보덴슈타인은 사건의 윤곽을 제대로 볼 수 있게 됐고, 현재의 참극의 근원이 된 42년 전의 진실을 제대로 들여다보게 됩니다.

 

타우누스 시리즈는 무척 많은 인물과 복잡하게 꼬인 사건으로 유명하지만, (제 기억에 따르면) 이번 작품처럼 본문 앞에 인물표가 등장한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보덴슈타인이 의심하는 42년 전 10대 패거리만 9명인데, 당시 그들의 부모는 물론 현재 그들의 자식들까지 3대에 걸친 인물들이 등장하고, 그들 사이에 복잡한 결혼 관계까지 맺어진 탓에 독자 입장에선 인물별 족보라도 메모해놓지 않으면 읽는 내내 혼란을 겪을 수밖에 없을 정도입니다.

과거와 현재에 걸쳐 많은 인물이 복잡하게 얽힌 것은 독자뿐 아니라 피아를 비롯한 강력11반 모두에게도 곤혹스런 일입니다. 과거의 비밀을 공유한 채 서로 연대하고 비호하면서도 뒤로는 경계와 의심, 비난과 질투를 숨기지 않는데다 혈연과 결혼으로 엮인 폐쇄적인 소도시 루퍼츠하인의 수많은 토박이들을 상대하는 것은 그야말로 악몽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더 큰 문제는 약속이라도 한 듯 42년 전 사건에 대해 모르쇠로 일관하는 그들의 비협조적인 태도입니다. 추악하고 더럽고 불길한 기운을 감지하면서도 직감 이상의 성과를 내지 못하는 피아와 보덴슈타인의 고민은 갈수록 깊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적잖은 인물이 용의선상에 오르내리기를 반복하다가 막판 반전과 함께 진범의 정체가 밝혀집니다. 그리고, 과거로 돌아가 단 한 순간만 바꿔놓는다면 결코 벌어지지 않았을 루퍼츠하인에서의 수십 년에 걸친 여러 참극들의 진상이 만천하에 드러납니다. 모든 것은 악마적이기까지 했던 10대들의 잔학성과 추악하고 더러운 어른들의 욕망에서 비롯됐고, 마치 신이 짜놓은 듯한 거짓말 같은 우연이 기폭제 역할을 한 셈이었는데, 이런 방식의 결론은 타우누스 시리즈를 통해 꽤 익숙해진 서사이긴 하지만, ‘여우가 잠든 숲은 보덴슈타인 개인의 삶이 직접 투영됐기 때문인지 여느 작품보다 훨씬 더 강렬한 인상을 남겨놓았습니다.

 

이 모든 의도치 않은 불행의 시발점에 그 자신이 있었다. 쓰디쓴 진실이었다. 대체 자신이 무슨 일을 저질렀는가? 보덴슈타인은 극심한 죄책감에 사로잡혔다. 아무도 그에게 손가락질을 하지 않고 책임을 묻지 않았지만, 그게 오히려 더 최악이었다.” (2p250)

 

믿고 싶지 않은 사실 앞에서 분노하고 폭발하고 오열하는 보덴슈타인을 보면서 어쩌면 넬레 노이하우스가 평범한 일반인으로 돌아가려는 그에게 의도적으로 큰 짐을 안겨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물론 그 덕분에 독자로선 갖가지 감정을 느끼며 재미있는 책읽기를 만끽할 수 있지만 말입니다.

 

수많은 인물과 방대한 서사를 정교하게 구성한 넬레 노이하우스의 필력에 감탄하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별 0.5개를 뺀 것은 막판의 비약때문이었습니다. 피아와 보덴슈타인이 마지막 난관에서 발휘한 힘은 증거나 단서나 논리적 추리가 아니라 갑자기 하나의 깨달음이 머릿속에서 전깃불처럼 번쩍 켜진덕분이었습니다. 그들은 진작 의심했어야 할 단서, 진작 캐물었어야 할 질문, 진작 고려했어야 할 인간관계를 다 놓친 후에야 갑작스런 깨달음의 순간을 맞이했습니다. 마치 진범을 외곽에 감춰놓았다가 느닷없이 무대 중심으로 끌어들인 느낌이랄까요? 차라리 쉽게 예상되더라도 좀더 그럴 듯한 사연을 가진 인물이 진범이었다면 오히려 더 큰 여운을 남길 수 있었을 거란 생각에 막판의 비약이 무척 아쉽게 느껴졌습니다.

 

이 작품의 후속작인 잔혹한 어머니의 날을 이미 읽긴 했지만, 경찰 옷을 벗으려던 보덴슈타인이 어떤 경위로 계속 강력11반에 남게 됐는지는 전혀 기억을 못합니다. 에필로그에서 시원섭섭한 마음으로 루퍼츠하인을 떠나 연인의 품으로 날아간 보덴슈타인의 이후 행보도 궁금하고, 그의 후임으로 반장직을 임명받은 피아의 처지도 역시 궁금할 뿐입니다. 이제 타우누스 시리즈 다시 읽기잔혹한 어머니의 날한 편만 남았는데, 두 사람의 소식이 궁금해서라도 하루 빨리 읽어보려고 합니다.

 

사족으로... 2019년에 출간된 시리즈 9잔혹한 어머니의 날이후 2년 가까이 후속작 소식이 없어서 무척 안타까웠는데, 다행히 202111월에 독일에서 시리즈 10‘In ewiger Freundschaft’(네이버 번역에 따르면 영원한 우정정도?)가 출간됐습니다. 전작들이 거의 실시간으로 한국에 소개됐던 점을 감안하면 반년이 다 되도록 아무 소식이 없는 게 의아하긴 하지만, 어째든 올해 안에는 출간되지 않을까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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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디, 천국에 닿지 않기를
하세가와 유 지음, 김해용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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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쇄된 테마파크에서 벌어진 끔찍한 대량 살인극을 독특한 구성과 문장으로 그려낸 나는 너를 죽일 수 없어로 데뷔한 하세가와 유의 두 번째 작품입니다. 독자에 따라 ‘4차원으로 여길 여지가 많은 데뷔작이었지만 개인적으로 꽤 강한 인상을 받아서 두 번째 작품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처음엔 다소 얇은 분량에 다섯 편의 단편으로 이뤄진 연작집이라고 해서 살짝 실망했던 게 사실이지만, 읽는 내내 그리고 다 읽은 뒤에는 진짜 괴물 같은 작가가 나타났네!”라는 감탄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수록작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확실히 호러물 주인공들입니다. 남들 눈에 보이지 않는 검은 실에 이끌려 동물과 사람의 사체를 발견하는 소년, 타인의 원한을 알아볼 수 있는 남자, 봉인된 소각로에 갇혀 있던 신비한 소녀와 마주친 뒤 연이어 소중한 사람들을 잃은 소년, 죽은 뒤에도 의식이 또렷한 채 어둠의 세계를 헤매면서 창과 거울을 통해 현실세계를 지켜볼 수 있게 된 남자, 그리고 아주 특별한 봉인의 능력을 지닌 소녀와 그녀에게 봉인당한 채 지하실에 갇힌 소년이 그들입니다. 하지만 이들이 펼치는 이야기는 단지 무섭고 흉흉한 호러 스토리가 아니라 오히려 가슴 한쪽에 돌덩이가 턱 얹힌 듯한 먹먹함과 애잔함을 진하게 남겨놓습니다.

 

부디, 천국에 닿지 않기를이란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이 작품 속의 인물들은 참혹한 상황과 피할 수 없는 저주에 휩싸여있는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구원을 바라지 않습니다. 원치 않는 특별한 능력 때문에 어려서부터 경계와 혐오의 대상이 됐으며, 그 때문에 강제로 시설에 갇히거나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타인을 불행에 빠뜨리거나 주위의 소중한 사람들을 비명에 사라지게 만들었던 그들은 결국 성인이 된 후에도 자책과 절망에 허우적대다가 대부분 구원 대신 파멸을 선택합니다. 그리고 차라리 지옥에 떨어지기를 바라는 염원을 담아 부디, 천국에 닿지 않기를!”이라는 가슴 아픈 기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린 날부터 이어진 피할 길 없는 불행의 연속, 그리고 끝내 그것을 종식시키기 위한 그들의 마지막 선택을 지켜보는 건 호러물의 엔딩에서 만날 거라곤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특별함 그 자체였습니다.

 

이 작품의 백미는 연작이란 형식을 통한 절묘한 구성에 있습니다. 각각의 인물들은 수록작을 넘나들며 등장하는데, 과거와 현재의 이야기가 뒤얽히고 미스터리 요소까지 가세하면서 독자의 높은 집중력을 요구합니다. 아무런 메모도 없이 페이지를 넘겼다간 마지막 장에 이르러 다시 첫 장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난감한 상황을 맞이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대신 사방에 흩어진 퍼즐들을 제대로 꿰맞춘다면 그 어느 미스터리나 연작집에서도 맛보지 못한 짜릿한 쾌감과 진한 애틋함을 만끽할 수 있습니다.

 

실은 다 읽은 뒤 남겨놓은 메모들을 토대로 시간 순으로 이야기를 정리하는 데만 1시간 가까이 걸렸는데, 고백하자면 그 과정에서 이 작품의 진가를 맛볼 수 있었습니다. 인물들의 관계, 그들의 과거와 현재, 그들이 구원 대신 기꺼이 지옥을 선택한 이유 등 작가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의 알맹이를 정리 과정에서 제대로 발견할 수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런 점에서 가능하다면 매 수록작마다 등장인물에 관한 짧은 메모라도 남길 것을 꼭 권하고 싶습니다. (위화감과 모호함, 설명 부족 등으로 보이는 대목들이 수두룩하지만 다음 수록작 또는 마지막 수록작에서 해답을 얻을 수 있으니 복잡하고 답답하게 느껴지더라도 어떻게든 견뎌내시기 바랍니다.)

 

제가 내린 한 줄 평은 특별한 능력 때문에 누구도 겪을 일 없는 비극을 맞이한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순수함과 처연함마저 느껴지는 비극성에 호러물의 미덕과 연작집의 장점까지 가미된 부디, 천국에 닿지 않기를은 결코 쉽게 읽힐 작품은 아니지만 공들여 읽은 뒤 참맛을 맛본 독자에겐 분량의 몇 배에 달하는 깊은 인상과 여운을 남겨줄 작품임에 분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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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이트 오브 테러
힐러리 로댐 클린턴.루이즈 페니 지음, 김승욱 옮김 / 열린책들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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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 미디어 제국의 수장인 50대 후반의 엘런 애덤스가 새 정부 초대 국무장관으로 임명되자 모두 놀랍니다. 경선 당시 자신을 지독하게 공격했던 엘런을 임명한 신임 대통령 윌리엄스의 결정도, 그 임명을 수락한 엘런의 결정도 이해하기 어려울 만큼 둘 사이는 견원지간에 가까웠기 때문입니다. 모종의 함정임을 알면서도 기꺼이 장관직을 받아들인 엘런은 어떻게든 난국을 헤쳐 나가려 하지만 유럽에서 잇달아 폭탄테러가 벌어지고, 거기에 중동의 테러리스트와 러시아 마피아는 물론 전직 대통령을 포함한 미국 내 극우조직까지 관련된 게 밝혀지자 혼란에 휩싸입니다. 전용기를 타고 유럽, 중동, 러시아를 날아다니며 테러의 배후와 궁극적인 목표를 조사하던 엘런은 미국을 향한 끔찍하고 명백한 공격 계획을 알게 되자 엄청난 충격에 빠집니다.

 

대통령이 될 뻔한 베테랑 정치인 힐러리 클린턴과 캐나다의 조용한 마을을 무대로 한 서정적인 미스터리 가마슈 경감 시리즈의 작가 루이즈 페니가 함께 소설을 썼다는 사실만으로도 호기심이 일었는데, 그 소설이 테러를 소재로 한 정치 스릴러라는 걸 알곤 놀람과 함께 고개가 갸웃거려진 게 사실입니다. 영부인, 상원의원, 국무장관을 역임한 힐러리가 재임 중에 겪었던 일을 자서전으로 펴낸 거라면 몰라도, 루이즈 페니와 함께 미치 랩 시리즈를 연상시키는 테러-액션-정치 스릴러를 썼다는 건 만우절 농담처럼 들렸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스테이트 오브 테러는 제목 그대로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충격적인 테러의 위협에 처한 미국의 상황을 어마어마한 스케일에 담아내고 있습니다.

 

주인공인 엘런 애덤스는 누가 봐도 힐러리 클린턴의 분신입니다. 거대 미디어 제국의 수장이었다는 이력만 빼면 거침없이 폭주하던 열혈 국무장관 힐러리의 모습이 수시로 연상되기 때문입니다. 전용기를 타고 테러 현장은 물론 관련 국가들의 수장을 만나기 위해 직접 발로 뛰는가 하면, 다소 무기력해보이기까지 한 미국 대통령을 향해 충고와 독설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완급을 조절한 외교술과 능란한 정치적 판단, 그리고 미스터리를 풀어내는 능력까지 겸비한 엘런은 미국을 향한 테러 계획을 밝혀내고 배후의 세력들을 발본색원하며 마치 중년여성으로 환생한 미치 랩을 보는 듯한 인상까지 뿜어냅니다.

 

엘런 외에도 이 작품에 등장하는 각국의 수장들은 누구라도 그 모델을 쉽게 떠올릴 수 있을 만큼 노골적으로 묘사됩니다. 막가파 식 정치와 외교로 미국을 혼란에 빠뜨린 전직 대통령 트럼프, 러시아의 패권을 노리는 세계적 문제아 푸틴, 그리고 이란의 전설적 지도자 호메이니 등이 그들입니다. 재미있는 건 이들 외에도 힐러리의 오랜 친구와 그 가족이 중요한 인물로 소설에 등장한다는 점, 또 루이즈 페니가 창조한 캐나다 스리 파인스의 유쾌한 경감 아르망 가마슈가 막판에 카메오로 꽤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는 점입니다.

 

세계를 무대로 삼을 만큼 스케일도 크고, 미국 본토를 향한 어마어마한 테러 계획이나 백악관을 중심으로 한 정치적 갈등이 디테일하게 묘사된 점은 힐러리의 경험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고, 테러-액션-정치 스릴러임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이 중요한 역할을 차지한 가운데 부드럽고 섬세한 문장들로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은 건 루이즈 페니의 공이 분명합니다. 두 사람의 협업이 적잖은 분량임에도 단번에 마지막까지 달릴 수 있을 만큼 흥미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낸 건 맞지만 몇 번이고 고개를 갸웃거릴 정도로 아쉬운 점도 있었던 게 사실입니다.


가장 큰 아쉬움은 판을 너무 크고 복잡하게 펼치느라 정작 단순하고 확실해야 할 요소들이 불분명하거나 모호해졌다는 점입니다.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정도로 전용기를 타고 바삐 날아다니는 엘런을 쫓아가다가도 지금 엘런의 목표는 뭐지?”라는 의문이 들 때도 있었고, 중동의 여러 나라와 러시아가 얽힌 테러 계획의 전체적인 그림이 문득문득 흐릿하게 느껴질 때도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디테일이 스케일의 무게에 짓눌렸다고 할까요? ‘스테이트 오브 테러못잖은 서사 속에서도 주인공과 악당, 동기와 목표, 계획과 실행이 선명하게 그려진 미치 랩 시리즈가 단순하고 확실한 설정 덕분에 한시도 긴장감을 놓치지 않았던 점과 확연히 비교되는 대목인데, 평점에서 별 1개를 뺀 유일한 이유는 이 불분명함과 모호함 탓입니다.

 

일촉즉발의 위기가 해소된 뒤 엘런은 앞으로도 결코 멈추지 않을 테러의 위협을 피부로 절감합니다. 이 마지막 장면을 엘런 애덤스 시리즈의 예고편으로 여기는 건 지나친 기대감이겠지만, 혹시라도 후속작이 나온다면 스케일과 복잡함보다는 단순하고 확실한 설정으로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렇다면 거침없는 국무장관 엘런의 매력도 훨씬 더 강렬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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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카타 돈코츠 라멘즈
키사키 치아키 지음, 박춘상 옮김 / 디앤씨미디어(주)(D&C미디어)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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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렵게 취업한 회사가 알고 보니 살인청부회사라는 걸 알게 된 사이토는 6개월의 훈련을 마치고 도쿄 본사에 투입되지만 큰 실수를 저질러 후쿠오카 지점으로 좌천됩니다. 그 무렵 후쿠오카는 시장 선거를 앞두고 킬러들의 움직임이 분주해지고 있던 시점. 3선을 노리는 현직 시장은 암흑가와의 긴밀한 유착관계를 통해 권력 기반을 다져왔고 이번 선거 역시 당선이 유력한 상황이었지만, 개망나니 아들 때문에 골치가 아픕니다. 시장에게 직속 고용된 킬러들은 선거 경호에 아들 문제까지 해결하느라 초죽음이 되는데, 이 과정에서 예기치 못한 사태가 벌어지면서 괴짜 탐정, 어리바리한 신참 킬러, 킬러를 죽이는 킬러, 조직과 정면대결을 선언한 중국계 킬러 등 여러 인물들이 얽혀들면서 사방팔방에 피와 살이 난무하는 참상이 벌어집니다.

 

하카타 돈코츠 라멘즈는 먹방 콘텐츠 같은 제목에다 라노벨 스타일의 표지 때문에 애초 관심조차 갖지 않았던 작품인데, 우연히 살인청부업자 이야기란 걸 알게 돼서 뒤늦게 찾아 읽게 됐습니다. 일본에서는 2014년부터 2021년까지 무려 10(외전 격의 단편집과 콜라보 작품은 제외)이 출간됐지만 한국엔 4(2018)까지 출간되곤 더 이상 소식이 없는데, 그래도 나름 화제성도 엿보였고, 특히 살인청부업자 이야기라면 좋아하는 소재 중 하나라서 기대감을 갖고 읽기 시작했습니다.

5년 전에 후쿠오카의 하카타에 머물면서 1주일 정도 규슈 여행을 한 적이 있는데, 그래선지 후쿠오카 인구의 3%가 킬러라는 설정에 깜짝 놀랐습니다. 물론 작가는 저자 후기를 통해 팩트가 아니라고 설명했지만, 이 작품 속의 후쿠오카는 본토 업자는 물론 해외에서 유입된 폭력조직과 살인청부업자가 경쟁적으로 살인을 벌이는 무시무시한 공간으로 설정돼있습니다.

 

킬러들의 대결과 합종연횡을 그리다 보니 꽤 많은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시장에게 직속 고용된 4인조 킬러, 인신매매를 주업으로 하는 중국계 신흥 조직,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모토에 따라 활동하는 복수대행업자, 그리고 어눌해 보이지만 뛰어난 정보망과 지략을 갖춘 괴짜 탐정 반바와 전혀 소질이 보이지 않는 허당 신참 킬러 사이토가 그들입니다.

서로 각자의 임무를 수행하던 그들은 몇몇 사건이 우연과 필연을 통해 이어지면서 정면대결을 벌이게 되는데, 이 대목에서 후쿠오카의 킬러라면 누구나 들어본 적 있는 도시전설과도 같은 코로시야코로시야’(屋殺)가 등장합니다. “악행을 지나치게 저지른 킬러는 그가 처단한다.”는 소문과 함께 니와카사무라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그는 탈을 쓰고 장검을 휘두르는 천하무적 킬러인데, 정작 그를 제대로 본 사람은 한 명도 없어서 더 신비감을 고조시킵니다.

 

킬러 이야기라는 속성 탓에 너무나도 쉽고 가볍게 사람들이 죽어나가서 현실감도 떨어지고 불편함이 느껴질 때도 있긴 하지만, 어쨌든 무척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엔터테인먼트 소설입니다. 각자 뚜렷한 개성을 지닌 캐릭터도 매력적이고, 사건도 원초적 본능을 자극하는데 충실하게 설정돼있는데, 가장 눈길을 끈 건 서로 다른 길을 걷고 있던 적잖은 킬러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한 사건들을 통해 한 자리에 모이게 만든 짜임새 있는 구성입니다. 라노벨 스타일의 쉽고 단순한 문장들 때문에 전체적으로 가벼워 보일 수도 있지만 나름 빈틈없이 촘촘하게 설계된 이야기는 마지막까지 독자의 흥미를 고조시켜줍니다. 그리고 깊이 고민할 것도 없이 확실하고 통쾌하게 악을 응징하는 엔딩은 비록 주인공들 대부분이 킬러 혹은 폭력을 거침없이 사용하는 자들이라 해도 짜릿한 쾌감을 남겨줘서 오락물로서의 미덕을 십분 발휘하고 있습니다.

 

킬러들의 이야기면서 왜 제목이 하카타 돈코츠 라멘즈일까, 궁금했는데, 그 사연은 마지막에 공개됩니다. 살인에 얽힌 위험천만한 인물들이 소박한 원 팀이 된다는 설정은 앞으로 이어질 시리즈들을 기대하게 만드는 또 하나의 흥미로운 미끼입니다. 가끔 킬링 타임용 오락물이 생각날 때면 남은 시리즈들을 읽어볼 생각인데, OTT에 올라와있는 애니메이션 역시 기회가 되면 꼭 찾아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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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년째 농담 중인 고가티 할머니
레베카 하디먼 지음, 김지선 옮김 / 북로드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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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 가족 3대가 펼치는 전대미문의 애정 활극이란 카피가 눈에 쏙 들어온 작품입니다. 이 카피를 보자마자 떠오른 건 중국 작가 디안의 개처럼 싸우고 꽃처럼 아끼고였는데, 한국형 막장드라마를 지독하게 확장시킨 듯한 다소 거칠고 요란한, 하지만 진저리 칠 정도로 현실적인 이야기를 다룬 작품입니다. 그렇다면 기질적으로 다소 시니컬하고 다혈질이며 배타적이라고 알고 있는 아일랜드의 가족이야기는 과연 어떻게 그려졌을까 무척 궁금해졌고, 무엇보다 주인공이 83세의 할머니라는 점 때문에 호기심이 더 일었습니다.

 

밀리 고가티는 남편과 사별한 83세의 할머니입니다. ‘옮긴이의 말에 따르면 순간의 스릴을 위해 필요도 없는 것들을 슬쩍하는 좀도둑 기질과 자신이 무대의 주인공이 되지 않으면 심통을 부리는 짜증나는 버릇이 있고, 그 어떤 가벼운 대화든 최소한 40~5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시작하는 등 여전히 질풍노도 한복판을 사는 인물입니다. 아무에게나 거침없이 말을 걸고, 상대가 가족이든 아니든 무례할 정도로 이것저것 요구하며, 비행기 안에서 담배를 피우는 건 예사이고 상황이 불리할 땐 치매노인으로 즉각 변신하는 악동이기도 합니다.

 

이 작품의 두 번째 주인공으로 밀리보다 무려 67년이나 어리지만 악동 기질에 관한 한 쌍벽을 이루는 인물은 16살 소녀 에이딘입니다. 역시 옮긴이의 말에 따르면 밀리의 손녀인 그녀는 모든 부모의 악몽을 그대로 형상화한 듯한 사춘기 여자아이입니다. 미모와 능력에서 너무나도 뛰어난데다 자신을 하찮게 여기는 쌍둥이 언니 누알라를 원수로 여기는 에이딘은 그로 인한 스트레스를 모든 가족에게 거침없이 퍼붓습니다. 특히 아빠 케빈은 에이딘의 이나 다름없습니다. 말하자면 평범한 사춘기를 뛰어넘는 극한의 트러블메이커라고 할까요?

 

세상에 못마땅한 것투성이고 속칭 금사빠(금방 사랑에 빠지는 사람)에 항상 잘못된 결정을 내려 불필요한 재앙을 자초한다는 공통점을 지닌 밀리와 에이딘이지만, 두 사람 모두 실은 무척 소심하고 연약한 성격입니다. 밀리는 첫 아기를 잃어버린 상심과 사별한 남편에 대한 그리움을 마음 깊이 간직하고 있고, 에이딘은 약해 보이지 않기 위해사방팔방에 분노를 터뜨리며 위악을 떨긴 해도 딱 그 또래의 소녀일 뿐입니다. 그런 두 사람이 하나는 양로원에서, 또 하나는 기숙학교에서 본인들이 원치 않는 유배생활(?)을 시작하게 되는데, 생각지도 못한 우연한 사건들로 인해 각각의 유배지를 벗어나 기막힌 모험을 감행하면서 동료가 되고 동지가 되고 예전과는 다른 할머니-손녀 관계를 이루는 이야기가 이 작품의 골자입니다.

 

밀리와 에이딘의 공동의 적은 바로 밀리의 아들이자 에이딘의 아버지인 케빈입니다. 평생 해오던 잡지 일에서 해고당한 뒤 전업주부가 된 그는 여행업계에서 승승장구하며 야근과 출장을 거듭하는 아내를 지켜보며 자괴감과 열패감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의도적인 건 아니지만 말문이 통하지 않는 고집불통 어머니와 말썽쟁이 딸에게 유독 예민하게 구는 건 그런 그의 처지와 결코 무관하진 않습니다. 어머니를 양로원으로, 딸을 기숙학교로 유배 보내긴 했어도 결코 비열하거나 못된 인간은 아니지만, 그 스트레스를 엉뚱하게 자기 나이 절반도 안 되는 여학교 행정직원과의 불륜 로망으로 풀어볼까, 궁리하는 소심한 악당인 건 사실입니다.

 

이 작품에는 영어 F로 시작하는 욕을 번역한 ㅆㅂ이란 단어가 무수히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욕이 등장할 때마다 웃음이 튀어나옵니다. 진짜 욕 하고 싶겠다, 라는 공감 때문이기도 하고, 그 상황을 깔끔하게 대변하는 유일한 수식어처럼 보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독자에 따라 불편함을 느낄 수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론 이 단어가 이 작품의 제목이었어도 괜찮았을 거란 생각입니다.

 

출판사 소개글대로 언제 어느 부위가 찢어질지 모르는 누더기로 만든 옷처럼 위태로운고가티 가족은 일대 소동을 거쳐 다시 한자리에 모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억지스런 해피엔딩으로 포장되진 않습니다. 물론 모두가 처음보다는 조금은 편하게 웃을 수 있게 됐고 마음도 가벼워지긴 했지만 이들의 갈등은 언제라도 다시 터질 수 있는 시한폭탄인 것 역시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찢어지기 직전 가까스로 누더기를 봉합해낸 83살 밀리와 16살 에이딘의 분투는 독자에게 기분 좋은 웃음과 함께 마지막 장을 덮게 만들어줍니다.

 

끝으로, 아일랜드 특유의 유머와 유려하면서도 눈에 쏙 들어오는 작가의 매력적인 문장은 주인공들의 분투를 빛나게 만든 가장 큰 힘이었습니다. 특히 한없이 길게 늘어져도 전혀 어렵지 않게 읽혔던 문장들은 작가의 힘이자 번역자의 공이란 생각입니다. 이 작품으로 데뷔한 레베카 하디먼이 다음엔 어떤 이야기를 들고 독자를 찾을지 벌써부터 기대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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