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 심장 스토리콜렉터 100
크리스 카터 지음, 서효령 옮김 / 북로드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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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시절 내내 월반을 거듭해 23살에 범죄심리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지금은 LAPD 특수사건전담반 팀장으로 일하는 로버트 헌터는 FBI도 탐내는 뛰어난 프로파일러이기도 합니다. 그런 그가 파견 형식으로 콴티코의 FBI 아카데미에 오게 됩니다. 우연한 사고로 범행이 드러난 살인용의자가 헌터에게만 말하겠다.”며 입을 다물고 있기 때문입니다. 헌터는 심문실에 도착해서야 용의자가 과거 대학시절 절친이자 범죄심리학도로서 라이벌이었던 루시엔 폴터라는 걸 알곤 크게 놀랍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며칠 동안 헌터는 평생 잊을 수 없는 지옥과도 같은 날들을 보내게 됩니다. 희생자의 수조차 가늠할 수 없는 역대급 연쇄살인의 진실을 파헤치는 일도 고통스러웠지만, 오랫동안 봉인해온 끔찍한 트라우마까지 폭발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한국에 처음 소개되는 낯선 작가의 작품 띠지에 “‘양들의 침묵을 능가하는 충격 심리스릴러라는 문구가 들어가 있다면 일단은 과장 광고로 여길 가능성이 많습니다. 하지만 북로드에서 출간한 작품이라면 의심보다는 호기심이 먼저 발동하는 게 당연한 일이었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능가여부는 독자 개개인이 판단할 일이지만, 개인적으론 양들의 침묵에 못잖은 소름 돋는 소시오패스 스릴러라는 생각입니다.

 

연쇄살인마와 강력계 형사로 마주한 두 범죄심리학자, 끝을 알 수 없는 두뇌 싸움으로 서로의 심연을 들여다보다!”라는 홍보 카피대로 이 작품은 사건도 사건이지만 범죄심리학자간의 불꽃 튀는 심리공방전이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미세한 표정 변화, 사소한 몸짓, 미묘한 말투만으로도 상대방의 심리와 생각을 읽어내는 능력을 가진데다 함께 범죄심리학을 전공하며 치열하게 논쟁을 벌였던 추억을 공유한 연쇄살인마와 강력계 형사의 만남은 양들의 침묵에서 그려진 FBI 연수생 클라리스 스탈링과 식인 살인마 한니발 렉터의 심리전과는 전혀 다른 결의 긴장감을 초반부터 팽팽하게 부풀려 놓습니다.

 

이미 체포된 범인과 안전한 거리를 두고 심문을 벌이는 형사라는 구도 때문에 자칫 한정된 공간에서 벌어지는 지루한 심문 일지로 오해할 수도 있지만, 작가는 여러 개의 액자소설을 끼워 넣는 형식을 통해 연쇄살인마가 저지른 끔찍한 고문과 살인, 헌터의 비극적인 가족사와 트라우마 등을 번갈아 그려내면서 조금도 느슨해질 틈이 없는 스피디한 스릴러를 구축했습니다.

무엇보다 흥미로운 설정은 어디에 묻혀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수십 명에 달하는 희생자들의 사체를 찾아야만 하는 헌터에게 루시엔이 그 누구도 짐작하기 어려운 기괴한 범행동기를 자랑스럽게 피력하는 것은 물론 헌터가 원하는 걸 얻으려면 자신이 제안하는 심리전에 가담하도록 요구한다는 점입니다. 루시엔에게서 정보를 얻기 위해서 헌터는 그가 던진 질문에 거짓 없이 답을 해야만 하는데, 문제는 루시엔이 던지는 질문 하나하나가 헌터에겐 참혹한 고문과도 같은 일이라는 점입니다. 루시엔의 집요한 질문은 뛰어난 범죄심리학자이자 프로파일러인 헌터의 평정심을 요동치게 만들고, 결국엔 파국에 가까운 상황을 초래하고 맙니다. 그리고 그제야 루시엔이 헌터를 콕 찝어 심문자로 선택한 이유도 함께 폭로됩니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서 제대로 언급할 순 없지만 루시엔의 범행 동기는 그동안 보아온 어느 가공할 소시오패스와도 차별화되는 독특함을 지니고 있습니다. 다 읽고 찬찬히 생각해보면 지금까지 책이나 영화로 만난 소시오패스들은 루시엔에 비하면 잔챙이처럼 느껴진다고 할까요? 물론 중후함(?)에 있어서는 한니발 렉터가 으뜸이지만, 루시엔은 범죄심리학자 출신 연쇄살인마답게 그만의 확고하고 뚜렷한, 하지만 동시에 어이없으면서도 이상하게 공감이 가는 범행동기를 지니고 있어서 개성에 관한 한 한니발 렉터에 못잖은 캐릭터라는 생각입니다.

 

검색해보니 크리스 카터는 이미 로버트 헌터 시리즈로 큰 명성을 얻은, 그래서 이제야 한국에 소개되는 게 이상할 정도인 스릴러의 대가입니다. 그의 홈페이지를 보니 악의 심장은 시리즈 여섯 번째 작품(2014)인 듯 싶은데, 대단한 필력에도 반했지만 매력적인 주인공 로버트 헌터 때문에라도 이 시리즈가 앞으로 계속 출간되기를 간절히 바라게 됐습니다. FBI의 애원에도 불구하고 연방요원 대신 LAPD의 강력계를 고집해온 그의 출발점부터 차근차근 읽을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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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의 시효
요코야마 히데오 지음, 김성기 옮김 / 노블마인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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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3의 시효F현경 수사1과를 배경으로 한 여섯 편의 단편이 실린 연작집입니다. 매 수록작마다 참혹한 범죄를 다루고 있고 진범과 진상을 파헤치는 미스터리가 전개되지만, 실은 범죄소설이라기보다는 경찰소설에 가까울 정도로 F현경 수사1과 내부의 사연들이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는 작품입니다.

 

뛰어난 능력자지만 제각각 강한 개성과 실적에 대한 집착 때문에 윗선들을 골치 아프게 만드는 반장들, 너무 뛰어난 부하 반장들 때문에 자괴감과 열패감에 사로잡힌 수사과장, 수사1과의 명성에 짓눌려 스스로 파멸하고 마는 형사, 어린 시절 살인도구로 이용된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해 형사가 된 수사1과의 막내 등 다양한 인물들이 이야기를 이끌어갑니다.

그 중에서도 치열한 경쟁을 넘어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인 수사11,2,3반의 반장들이 실질적인 주인공인데, 이들은 각각 시리즈 주인공으로 삼아도 모자람이 없을 만큼 독특한 캐릭터와 카리스마를 지니고 있습니다.

 

차세대 간부가 유력한 1반 반장 구치키는 20여 년 전 겪은 참혹한 사고로 인해 웃음을 잃어버렸습니다. ‘파란 귀신이란 별명대로 굳은 표정과 서늘한 인상을 풍기는 그는 누구에게도 속내를 드러내지 않지만 이치를 따지며 수사하는 전형적인 형사입니다.

공안형사 출신으로 냉혈한이란 별명을 가진 2반 반장 구스미는 상관은 물론 부하들과도 좀처럼 소통하지 않는 괴짜입니다. 부하들에게 현장을 떠맡긴 채 독자적인 수사를 벌이며 범인 검거를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1반 반장 구치키와 함께 검거율 100%를 기록하며 누구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카리스마를 지닌 인물입니다.

반면 3반 반장 무라세는 직감이 아주 뛰어난 형사로, 부하들은 그가 현장을 둘러본 뒤 내뱉는 첫 마디를 듣고 사건의 성격과 해결방향을 가늠하곤 합니다. 다른 두 반장과 대조적으로 감각적인 천재형 형사라고 할까요?

 

일반적인 형사들을 집념이나 직업정신’, ‘프로 근성이라는 말로 표현한다면 그 세 사람은 공통적으로 정념이나 저주’, ‘원망같은 불길한 단어들을 떠올리게 한다. (수사과장인) 다하타는 사건으로 먹고 살았지만 그들은 사건을 먹고 살았다. (p131)

 

경찰소설의 대가 요코야마 히데오의 작품답게 수록작 모두 대단한 흡입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64’사라진 이틀처럼 장편은 아니지만 짧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장편 이상의 묵직함과 비극성을 담고 있습니다. 그 묵직함과 비극성은 참혹한 사건이나 놀라운 반전 때문이라기보다는 사건을 둘러싼 인물들의 복잡한 내면과 심리라든가 우연과 필연이 겹쳐진 듯한 어찌할 수 없는 운명 때문에 더 강렬하게 느껴집니다. 이런 특징은 요코야마 히데오의 모든 작품에서 공통적으로 엿보이는데, ‘3의 시효는 경찰소설이자 범죄소설이면서 동시에 사건 이면의 비극을 잘 포착한 수작 중의 수작이라는 생각입니다.

 

워낙 좋아하는 작가라 아껴 읽다보니 14년 전에 한국에 출간된 이 작품을 이제야 읽게 됐는데, 역시 이번에도 기대 이상의 만족스런 책읽기가 됐습니다. 매번 느끼는 바지만 군더더기 없는 묘사와 한눈에 읽히는 쉽고 간결한 문장들, 그리고 캐릭터, 사건, 반전, 여운이 적절하게 믹스된 서사는 요코야마 히데오를 최애작가중 한 명으로 꼽는데 조금도 주저함이 없게 만듭니다. ‘빛의 현관이나 그림자밟기등 간혹 의미나 문학성이 더 강조된 작품도 있지만, 경찰소설에 관한 한 그만의 독보적인 매력은 누구에게나 추천하고도 남을 만큼 압도적이라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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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한 보상
새러 패러츠키 지음, 황은희 옮김 / 검은숲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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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은행 상속자인 대학생 피터가 살해되고 동거하던 그의 연인 애니타가 자취를 감춥니다. 피터는 부유한 신분에도 불구하고 허름한 아파트에 살며 노동운동에 관심을 갖고 있었고, 거대 노조 대표의 딸인 애니타는 피터와 뜻을 함께 하며 장래 노동변호사를 꿈꾸던 여대생입니다. 사건에 뛰어든 워쇼스키는 조사를 진행할수록 단순 살인사건이 아님을 깨닫습니다. 시카고 최대 은행의 부행장, 막대한 자산을 소유한 거대 노조의 대표, 연금과 산재 등 각종 상품으로 이익을 내는 보험사의 간부, 그리고 마약과 청부살인을 일삼는 폭력조직 등 하나같이 부담스럽고 위험한 자들이 사건의 배후에 있음을 알게 됐기 때문입니다. 더 큰 문제는 심증은 있지만 그 어디에도 확실한 단서가 없다는 점. 더구나 석연치 않은 과정을 거쳐 엉뚱한 자를 체포하곤 수사를 종결한 시카고 경찰의 행태도 워쇼스키에겐 악재 중의 악재입니다.

 

새러 패러츠키의 데뷔작이자 ‘V. I. 워쇼스키 시리즈의 첫 편인 제한 보상은 이야기 자체도 궁금했지만 주인공에 대한 호기심과 기대감 때문에 읽게 된 작품입니다. 미스터리와 스릴러에서 여성 주인공, 특히 형사나 탐정으로 국한시키면 그 비중이 상대적으로 낮은 건 사실이지만, 그 때문에 더 주목과 관심을 받게 되거나 조금은 더 엄격한 잣대로 캐릭터가 평가되는 것 역시 사실입니다. 개인적으론 하무라 아키라, 히메카와 레이코, 피아 키르히호프, 제인 리졸리, 아멜리아 색스 등 예리함과 추진력을 겸비한 여성 캐릭터를 무척 좋아하는데, 이 작품의 주인공 V. I .워쇼스키는 이들에게는 큰언니이자 교과서와도 같은 인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1960년대부터 여성의 권리를 주장하는 급진적 운동이 전개됐음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의 배경인 1979년의 미국은 여성탐정에게 전혀 우호적이지 않습니다. 워쇼스키를 대하는 남성들의 시선은 연령과 계층에 관계없이 냉소적입니다. 아버지뻘인 남자들은 조신한 주부가 되기를 강요하며, 또래들조차도 독립심 강하고 자기 주장이 강한 워쇼스키를 경계합니다. 탐정이라는 신분을 밝히면 그들의 경계와 냉소는 더욱 노골적이고 차가워집니다.

국선변호사로 일하다가 사법체계의 부패함에 질려버린 뒤 사립탐정의 길에 들어선 워쇼스키는 여성이라는 편견을 사전 차단하기 위해 원래 풀 네임인 빅토리아 이피게니아 워쇼스키대신 일부러 ‘V. I. 워쇼스키라는 이름을 명함에 새겨 넣었으며 친한 사람들에게만 이라는 호칭을 허용합니다. 주저 없이 상대방의 갈비뼈를 부러뜨릴 수 있는 가라데 유단자이며,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상황에서도 상대의 감정을 농락할 만큼 배짱도 두둑합니다. 강직한 경찰이던 아버지와 현명하고 자립심 강한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유전자에 자신만의 무기와 갑옷까지 갖춘 그녀는 그야말로 여성 장르물 주인공의 모범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심증밖에 없는 상태에서 워쇼스키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땡볕 아래 이어지는 고된 탐문과 행운이 따라주기만을 바랄 수밖에 없는 단서 찾기입니다. 하지만 사라진 딸 애니타를 찾아달라고 의뢰했던 거대 노조대표는 물론 살해된 피터의 아버지까지 수사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는가 하면, 워쇼스키 본인은 괴한에게 납치당하는 등 끊이지 않는 시련이 잇따를 뿐입니다. 그런 와중에 실낱같은 단서를 찾아내고 사건 관련자들에게서 중요한 진술을 얻어내 결정적인 실마리를 포착해낸 것은 결코 운이 좋아서가 아니라 워쇼스키의 이러한 집요한 노력 덕분인데, 거기에 덧붙여 가라데 유단자다운 적절한 폭력을 구사하여 통쾌한 액션을 선보이는 장면은 일종의 보너스처럼 독자의 눈을 즐겁게 만들어줍니다.

 

워쇼스키 시리즈에서 언제나 경이로운 것은 V. I. 워쇼스키 그녀 자신이다.”라는 볼티모어 선의 평가대로 이 작품에서 가장 돋보이는 건 이야기 자체보다 워쇼스키의 캐릭터입니다. 분량에 비해 사건은 단순하고, 반전이나 트릭보다는 고전다운 정공법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다 보니 긴장감도 기대만큼 강렬하진 않습니다. 진범의 정체도 일찌감치 그 윤곽이 드러난 탓에 누가 범인?” 대신 어떻게 잡을까?”가 더 관심사가 되는데, 그러다 보니 독자의 시선은 오로지 워쇼스키의 일거수일투족에 집중될 수밖에 없습니다.

제한 보상외에 2000년대 들어서 한국에 소개된 작품은 블랙리스트’(2005) 한 편뿐이라 무척 아쉬운데, 언제라도 워쇼스키 시리즈가 출간된다면 반가운 마음으로 찾아 읽게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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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을 삼킨 여자 케이 미스터리 k_mystery
김재희 지음 / 몽실북스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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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희연은 픽업아티스트입니다. 목표로 삼은 남자가 자신의 성적 매력과 따뜻한 미소에 넘어오면 두어 번의 짧은 만남을 통해 그를 완전히 사로잡습니다. 그리곤 소액의 돈을 빌린뒤 연락을 차단하고 종적을 감춥니다. 그녀는 1년에 단 두 달, 성적 매력을 자연스레 드러낼 수 있는 여름에만 활동합니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오피스텔의 1년 치 월세가 전부. 10여 명의 남자에게 각각 1백만 원 안팎만 받아낼 뿐 더 이상 욕심을 내지 않습니다. 한참 작업에 몰두하고 있던 어느 날, 그녀는 살인사건 용의자로 경찰의 추격을 받게 됩니다. 피살자와 마지막으로 통화한 게 그녀이기 때문입니다. 특채로 프로파일러가 된 후 현장실습 차 송파서에 파견돼있던 강아람이 10년 선배 서선익과 함께 설희연을 쫓기 시작합니다.

 

픽업아티스트의 세계를 그렸다는 소개글을 보고 새로 생긴 직업인가, 싶었는데, 검색해보니 특정 상대를 목표로 섹스나 금전적인 이득 혹은 그에 준하는 것을 얻으려고 하는 사기꾼들을 통틀어 지칭하는 단어.”라고 나옵니다. 20세기의 제비족과 꽃뱀의 활동무대가 오프라인밖에 없었다면 21세기의 픽업아티스트는 온라인에까지 진출하여 이른바 로맨스 스캠이라는 신종 사업(?)을 벌이는 중입니다. 하지만 이 작품의 주인공 설희연은 고전적인 오프라인 플레이만 고집합니다. 왁싱클럽, 워터파크, 카페 등 장소를 불문하고 자신의 촉으로 선택한 목표물에게 접근하여 호감을 얻은 뒤 잘 해야 1~2백만 원의 소소한 사기를 친 뒤 종적을 감춥니다. 미스터리 속 주연급 악녀치곤 잡범에 가까운 소박한 캐릭터입니다.

 

하지만 희연의 도피 과정과 과거사를 그린 챕터들은 이 작품이 단순히 범인 찾기에만 몰두하는 것이 아니란 점을 강조합니다. 어린 시절, 개차반인 부모로부터 도망친 뒤 가출팸과 보도방을 전전하며 몸과 마음에 큰 상처를 입은 끝에 누군가와 길게 만나는 것을 두려워하게 된 희연이 왜, 어떤 식으로 픽업아티스트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는지, 1년에 달랑 두 달, 그것도 큰돈도 아니고 낡은 오피스텔의 1년 치 월세만 손에 쥐고 물러나는 건지 그 내밀한 사연들을 조금씩 풀어놓습니다.

희연은 언뜻 생계형 범죄자처럼 보이는데, 그 문제를 놓고 경찰 주인공인 서선익과 강아람이 논쟁을 벌이기도 합니다. 그녀의 범행에서 악의 같은 건 찾아보기 힘들며, 오로지 먹고 사는 것 이상의 목표를 찾아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가족에게 학대당하고 성()을 파는 것 외엔 달리 자신을 지킬 방법이 없었던 희연의 과거사는 단순히 그녀를 생계형 범죄자로만 볼 수 없게 만드는 착잡함을 불러일으킵니다.

 

희연이 사람의 감정을 제멋대로 갖고 놀다가 야비하게 큰돈을 뜯어내는 악녀 캐릭터였다면 이야기는 훨씬 흥미진진하고 재미있었겠지만, 평생 막다른 궁지에 몰린 채 살아온 그녀의 처지와 그녀가 먹고 살기 위해 선택한 픽업아티스트 사이의 모순 아닌 모순은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생각할 여지를 남겨줬습니다. 명백한 범죄자지만 마냥 미워할 수 없는 인물이랄까요?

다만, 그런 희연의 캐릭터 때문에 다 읽은 뒤 “So What?”이라는 조금은 맥 빠진 인상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이 부분은 독자마다 생각이 조금씩 다를 것 같은데, 개인적으론 작가가 희연에게서 악녀의 향기가 일체 느껴지지 않게 하려고, 어떻게든 그녀에게 구원의 여지를 남겨주려고 일부러 애썼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경찰 주인공인 송파경찰서 서선익과 강아람은 실은 수사보다는 젠더 이슈를 위해 투입된 것처럼 보였습니다. 나름 베테랑이라는 서선익은 전혀 베테랑처럼 보이지 않았고, 강아람 역시 프로파일러나 형사로서의 장점을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대신 두 사람은 밥을 먹을 때나, 잠복을 할 때나 시도 때도 없이 남자와 여자이야기를 꺼내는데, 딱히 새로울 것 없는 상투적인 논쟁이라 그리 눈길을 끌지 못했습니다. (작가의 전작 봄날의 바다에서 만났던 뼛속까지 속물 프로파일러감건호와 생계형 프로파일러여현정은 본의 아니게 살인사건 해결의 단초를 제공하긴 하지만 그들 역시 주된 역할은 서선익-강아람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색다른 범죄와 범죄자를 만날 수 있었던 건 흥미로운 일이었지만, “여성의 성 상품화와 섹슈얼리티, 그리고 젠더 이슈를 다룬 작품이란 소개글이 던진 기대감에 다소 못 미친 점, 그리고 독한 양념이 살짝 추가됐더라면, 또 서선익과 강아람이 조금만 더 진지한 태도로 사건 자체의 긴장감을 고조시켰더라면 좋았을 거란 아쉬움은 끝내 피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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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속가능한 영혼의 이용
마쓰다 아오코 지음, 권서경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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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가 아저씨에 의해 운영되는 이상 여자아이는, 여성은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든 아저씨의 손으로부터, ‘아저씨의 눈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없다. ‘아저씨가 정하지 않은 세계를 보고 싶다. ‘아저씨가 사라진다면 사회구조는 극적으로 바뀔 것이다.” (p271)

 

교복 입은 소녀를 소비하는 남자들, 호신용 스턴건을 소지한 여자에게 성인용품 아니냐?”고 낄낄대며 놀리는 남자들, 욕망의 대상으로 여자 아이돌을 바라보는 남자들, 뻔뻔하게 추행을 일삼는 것은 물론 저항하는 여자를 별나다는 듯 비난하는 남자들, 그리고 여자에게 한없는 순종과 겸손을 강요하면서 시선은 아래로! 목소리는 작게!”라고 당당하게 압박하는 남자들.

이 작품 속에서 소멸돼야 하고 벌 받아야 할 대상으로 규정된 아저씨는 바로 이런 사람들입니다. ‘아저씨는 겉모습이나 나이와는 상관없으며, 학교든 직장이든 지하철이든 어디에나 존재하면서 언제라도 가면을 벗고 본색을 드러냅니다. 심지어 아저씨중에는 여성도 있는데, ‘아저씨급으로 행동하는 여성은 아저씨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습니다.

 

지속가능한 영혼의 이용은 성차별이 만연한 사회에 대한 고발, 그리고 그 사회를 손아귀에 쥔 채 여성을 악의와 욕망의 대상으로만 여기는 아저씨아저씨의 나라를 혁명을 통해 단죄하는 이야기입니다. 굉장히 전투적이고 과격한 이야기로 보일 수 있는데, 반쯤은 맞고 반쯤은 살짝 과장했다고 보면 됩니다. 여성에게 가해지는 부당하고 부도덕한 일들과 그에 저항하는 모습들이 간혹 독하고 세게 묘사되는 경우도 있지만, 작가는 대체로 냉정하고 이성적인 시선으로 그 모든 부당함과 부도덕함의 민낯을 그려냅니다.

 

피임조차 제 뜻대로 할 수 없는 여성, 성추행을 신고했다가 오히려 회사에서 쫓겨난 비정규직 여성, 자신을 성적 노예로 묘사한 아저씨의 천박한 글 하나 때문에 아이돌을 그만둬야 했던 소녀, 수유할 때조차 성적인 시선을 받아야만 하는 어머니 등 작품 속 여성들은 물건처럼 취급되거나 나이와 처지에 관계없이 아저씨의 손과 눈에 농락당하곤 합니다.

주인공 게이코 역시 그런 여성 중 한 명입니다. 퇴직을 강요당한 뒤 한 달 동안 여동생이 있는 캐나다에 머무른 게이코는 당당하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고 좀더 자유를 만끽하는 여성들을 보며 새삼스레 일본여성의 현실을 돌아보게 됩니다. 그리고 저항하지 않으면 어떠한 순간에든 아저씨의 악의에, ‘아저씨가 만든 이 사회의 악의에 결박당하고 만다. 나는 일본에 돌아가면 아저씨를 무너뜨릴 것이다.”라는 각오와 함께 귀국합니다.

 

하지만 공항에서, 거리에서, 카페에서 만난 일본여성들은 너무나 무기력해 보였고, 현실은 각오 하나만으론 작은 균열조차 만들기 어렵다는 걸 뼈저리게 깨닫습니다. 그런 게이코의 눈길을 사로잡은 건 여자 아이돌 그룹 XX입니다. 귀여움과 미숙함만 내세웠던 기존의 아이돌과 달리 저항적인 노래와 공격적인 태도를 앞세운 그들에게 빠져든 게이코는 자신의 분노를 살찌우고, 자신의 영혼을 더욱 사랑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에너지를 발판 삼아 아저씨를 무너뜨리기 위한 각오를 다시금 다집니다.

 

이 작품이 좀더 독특해 보이는 이유는 판타지 설정 때문입니다. 게이코가 살던 시대를 흥미와 놀라움으로 조사하는 어느 먼 미래의 소녀들이 등장하는데, 이들은 여고생 체험을 통해 당시 여성들이 겪은 가혹한 현실을 마주하곤 충격에 빠집니다. 아저씨아저씨의 나라에 저항했던 게이코와 동료들이 어떤 결과를 이끌어냈는지 상세히 설명하는 역할도 맡습니다.

사실 이 대목은 다소 모호한 상징들로 채워진 판타지인데, “뭐가 어떻게 됐다는 거야?”, “얘들은 누구야?”라며 따지기보다는 아저씨에게서 해방된 일종의 이데아 속 인물로, 그래서 수 세기 전의 여성들(아저씨가 아닌 남성들)이 어떻게 부당한 삶을 강요받았고, 어떻게 치열하게 싸웠는지를 알려주는 설명역으로 받아들이면 된다는 생각입니다.

 

‘82년생 김지영이 한 여성의 고통스러운 삶을 연대기의 형식을 빌어 서술한 정통 소설이라면, ‘지속가능한 영혼의 이용은 현실고발과 판타지 서사를 동시에 활용한 독특한 소설입니다. 하지만 두 작품 모두 그 어떤 과격한 성명서나 행동 못잖은 강한 울림을 품고 있습니다. 스스로 난 절대 아저씨처럼 살지 않았어!”라고 자신 있게 주장할 순 없지만 분명 아저씨를 혐오하는 한 사람의 남성으로서 ‘82년생 김지영지속가능한 영혼의 이용이 남겨준 공감, 분노, 부끄러움을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다는 생각입니다. “더 이상 아저씨들이 우리의 영혼을 망치게 두지 않아.”라는 주인공들의 절실하고도 강고한 각오와 함께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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