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임수
샤를로테 링크 지음, 강명순 옮김 / 밝은세상 / 2017년 4월
평점 :
품절


영국 동북부 스카보로경찰서에서 혁혁한 공을 세우고 퇴직한 리처드 린빌이 자택에서 잔인하게 살해당합니다. 케일럽 헤일 반장은 과거 리처드에게 체포당한 뒤 공공연히 복수를 다짐했던 전과자 데니스 쇼브를 용의자로 지목하지만 어디에서도 그의 흔적을 찾지 못합니다. 그러던 중 리처드의 딸이자 런던경찰국 형사인 케이트가 아버지의 유산을 정리하기 위해 고향에 왔다가 의외의 상황에 직면합니다. 케일럽 반장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독자적으로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수사를 벌이던 케이트는 또 다른 살인사건 현장을 목격한 것은 물론 미처 몰랐던 아버지의 추악한 과거를 알게 된 것입니다.

 

고백하자면, 샤를로테 링크는 스릴러 카페 멤버 한 분이 대가라고 극찬하셔서 알게 된 작가로, 한국에 소개된 작품이 여섯 편이나 되는데도 무슨 이유에선지 지금까지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한 게 사실입니다.

최근 넬레 노이하우스의 사악한 늑대를 다시 읽은 뒤 로미 하우스만의 사랑하는 아이까지 계속 독일 스릴러를 접한 탓에 올해 초엔 유독 독일 작품과 인연이 있나보다 싶었는데, 작가도 독일인이고 원제도 독일어임에도 불구하고 의외로 배경도 영국이고 주인공도 영국인이라 무척 놀랐습니다. ‘옮긴이의 말을 보니 대부분의 작품이 영국을 배경으로 집필됐다는데 무척 특이한 케이스라 그 사연이 궁금해지기도 했습니다.

 

두 개의 사건이 병행되는데, 하나는 퇴직형사 리처드가 피살당한 것을 시작으로 연이어 발생하는 의문의 연쇄살인이고, 또 하나는 번 아웃에서 벗어나기 위해 외진 산장으로 휴가를 떠난 크레인 가족이 맞닥뜨린 치명적인 위기입니다. 메인 사건은 연쇄살인이지만 크레인 가족의 위기 역시 거의 대등한 분량으로 다뤄지고 있는데, 개인적으론 조연들의 이야기에 불과한 크레인 가족 사건이 이만한 비중과 분량을 차지한 게 잘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나중에 출판사의 소개글과 옮긴이의 말을 보니 작가의 특징 중 하나인 것 같아 나름 수긍이 가기도 했습니다.

 

연쇄 살인을 소재로 삼았음에도 참혹한 살인의 충격적인 정황에 집중하기보다는 그에 얽힌 (인물들의) 사연을 더 드라마틱하게 만든다. (중략) 쉽고 빠르게 읽을 수 있는 페이지터너 스릴러이지만, 그 씁쓸한 분위기는 책장을 덮고 나서도 꽤 오래 여운을 남길 것이다.”라는 알라딘 소설MD 최원호 님의 소개글대로 이 작품은 사건 자체보다는 가해자, 피해자, 가해자이자 피해자, 그리고 경찰에 이르기까지 본인 혹은 가족의 문제로 인해 크고 깊은 상처를 지닌 인물들의 사연에 더 방점을 찍고 있습니다.

결여된 자신감과 대인기피 증세로 인해 경찰로서도, 여성으로서도 무기력한 삶을 살아온 케이트, 유능한 형사지만 알코올중독으로 인해 모든 것을 잃을 뻔한 케일럽 반장, 불임 이후 입양을 통해 얻은 아들 덕분에 삶의 빛을 되찾았지만 그로 인해 치명적인 위기에 빠지게 된 크레인 부부, 밤낮이 따로 없는 형사로 일하면서 심각한 장애가 있는 가족을 돌봐야 하는 제인 등 대부분 누구에게도 쉽게 털어놓을 수 없는 고통을 짊어진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자연히 각 인물의 내면에 대한 묘사가 풍부해질 수밖에 없는데, 연쇄살인이긴 해도 스케일도 크지 않고 그리 복잡하지도 않은 사건에 비해 다소 과도해 보이는 592페이지라는 분량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빚어진 결과물입니다. 그래선지 우연히 사건에 휘말려든 조연들의 심리에 대해서까지 지나치게 친절하고 상세한 묘사를 할애한 점은 개인적으론 무척 아쉬웠던 대목입니다. 이 작품을 심리스릴러 범죄소설이라고 칭한 번역가의 해설이 이해가 되긴 했지만, 아마 그 때문에 독자의 취향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럽 스릴러답지 않게 난해하지도, 배배 꼬지도 않은 간결하고 선명한 문장들 덕분에 페이지는 엄청 빠른 속도로 넘어가는 게 사실이기도 합니다.

 

범인의 정체와 연쇄살인의 진실이 밝혀지는 막판 반전은 어느 정도 파괴력이 있지만, 어지간한 독자라면 중반부쯤 어렵지 않게 사건의 윤곽을 점칠 수 있어서 미스터리 자체의 힘은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습니다. 특히 마지막까지 설명되지 않은 왜 지금?”, 즉 사건의 출발점에 대한 설명이 너무 부족하거나 불친절하게 느껴졌는데, 작가가 중요하지 않다고 여겼거나 너무 당연한 일이니 새삼 설명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모르겠지만 그 의문이 끝내 해소되지 않은 탓에 이 작품의 미덕보다는 찜찜함이 더 강하게 남았습니다.

 

큰 명망을 얻은 작가를 단 한 편으로 평가할 수는 없지만 제 취향과 가깝지 않은 건 분명해 보입니다. 심리보다는 좀더 사건 쪽에 비중이 실린 이야기를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가장 최근에 출간된 수사’(2020)까지 도전해보고 샤를로테 링크를 계속 읽을지 여부를 결정하려고 합니다.

 

사족으로... 이 작품과 관련된 자체 스포일러가 너무 많습니다. 중반부쯤에나 밝혀지는 연쇄살인의 계기가 (간접적이긴 해도) 뒤표지에 버젓이 표기돼있고, 인터넷서점의 출판사 소개글에는 범인의 정체까지 다 공개돼있기 때문입니다. 이 작품을 아직 안 읽은 독자라면 가능하면 어떤 정보도 접하지 말고 바로 본 내용을 읽을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봄날의 바다
김재희 지음 / 다산책방 / 2016년 5월
평점 :
절판


12살에 서울을 떠나 엄마와 동생과 제주도 애월에 삶의 터전을 잡았던 희영은 불과 10년 만에 쫓기듯 그곳을 떠나야만 했습니다. 동생 준수가 잔혹한 살인범으로 체포된 뒤 구치소에서 목숨을 끊었기 때문입니다. 이후 10년간 희영의 삶은 두려움과 절망 그 자체였습니다. 가해자의 가족이란 사실이 드러날까 봐 세상과 담을 쌓았고, 동생에 대한 죄책감과 자괴감 때문에 소소하게 웃는 것조차 스스로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준수의 무죄를 주장하던 엄마가 얼마 전 세상을 떠난 뒤 희영은 인터넷에 올라온 글 하나 때문에 충격에 빠집니다. 제주도 애월에서 10년 전과 꼭 닮은 살인사건이 벌어졌는데, 어쩌면 두 사건의 범인이 동일인일지도 모른다며 유력한 용의자 후보까지 언급했기 때문입니다. 그게 사실이라면 준수의 무고함을 밝힐 수 있다고 믿은 희영은 무작정 제주행 비행기에 몸을 싣습니다.

 

간단하게 요약하면 가해자의 가족이란 이유만으로 고통받아온 희영이 동생의 무고함을 밝히기 위해 진범을 찾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희영이 탐정처럼 활약하는 이야기 혹은 반전을 거듭하는 팽팽한 미스터리라고 할 수도 없는, 그러니까 장르물과 장르물의 경계선에 있다고 볼 수 있는 미묘한 작품입니다.

그런 점에서 죽은 자와 감옥에 갇힌 자, 그리고 고통의 심연에서 웅크리고 숨죽인, 남겨진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라는 출판사의 소개글은 이 작품의 성격을 잘 드러냅니다. 가해자와 그 가족, 피해자의 유족, 그들의 친구와 이웃, 그리고 담당 형사와 프로파일러 등 꽤 많은 인물이 등장하는데, 그들은 10년의 간격을 두고 벌어진 두 개의 살인사건의 진실을 찾는다기보다는 그 비극들을 각자의 처지에 따라 극과 극의 형태로 다르게 받아들이는 역할에 더 충실합니다. , 회한에 잠기거나 고통스러워하거나 사악하게 이용하거나 또는 완벽하게 은폐하려 하는 등 비극에 대처하는 다양한 군상들의 이야기가 진범 찾기못잖게 묵직하게 그려집니다.

 

애월에 내려온 희영은 게스트하우스에 묵으면서 오로지 그 범인이 10년 전 (준수가 범인으로 지목됐던) 사건의 범인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최근 벌어진 여대생 살인사건의 진실을 알아내려 애씁니다. 게스트하우스에서 만난 사람들, 10년 만에 만난 학창시절의 절친과 가족, 당시 사건을 맡았던 형사와 프로파일러, 그리고 10년 전 살해된 피해자의 가족들을 만나면서 희영은 평범한 일반인으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새롭게 알게 된 사실과 사건 관련자들의 사연에 놀라기도 하고, 분노하기도 하고, 절망하기도 합니다. 학교폭력, 왕따, 가정폭력, 충동조절장애, 시기와 질투, 누명과 복수와 용서 등 예상치도 못한 코드들이 희영의 진실 찾기를 더욱 고통스럽게 만듭니다. 애월의 오름과 바다는 희영에게 두 개의 살인사건은 물론 거기에서 파생된 비극까지 떠안긴 것입니다.

 

마지막에 두 살인사건의 진실이 드러나긴 하지만, 독자는 누가 범인?”보다는 희영을 비롯한 여러 인물들의 몸과 마음에 새로 새겨진 상처들, 그리고 그 상처들이 앞으로 그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에 더 관심을 둘 수밖에 없습니다. 어느 누구도 해피엔딩을 맞이하지 못한 종장은 그래서 더 길고 짙은 여운을 독자의 기억 속에 남겨놓습니다.

 

사실, 김재희의 작품은 저와는 코드가 잘 안 맞는 편입니다. 서평을 남긴 건 프로파일러 김성호 시리즈의 초기작인 , 짓하다이웃이 같은 사람들뿐이고, 대표작인 경성 시리즈는 첫 편 초반까지밖에 못 읽었기 때문입니다. ‘봄날의 바다곳곳에서도 저와 잘 안 맞는 신호들이 발견됐는데, 의도와 다르게 역효과가 난 인용들(영화나 책이나 제주의 전설), 희영의 비극을 강조하기 위해 동원됐지만 작위적으로 보인 조연들의 사연들(게스트하우스 사람들, 희영의 절친 등), 상식적이지 않았던 몇몇 장면(특히 프로파일러 관련) 등이 그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제와 캐릭터, 이야기의 묵직함이 잘 어우러진 덕분에 이번에도 안 맞으면 더는 읽지 않겠다.”던 저의 오만한 예단은 일단은 꼬리를 내려야만 했습니다. 특히 독자의 기대를 배신한(?) 막판의 진실과 엔딩이 가장 마음에 와 닿았는데, 이야기에 걸맞지 않지만 오히려 그래서 비극성을 도드라지게 만든 봄날의 바다라는 제목과 함께 이 작품을 인상 깊게 만든 1등 공신이라는 생각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언더독스
나가우라 교 지음, 문지원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2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996년 농림수산성 관료 고바 게이타는 상부의 지시로 불법적인 비자금 조성에 가담했다가 억울한 희생양이 되어 모든 걸 잃고 증권맨으로 새 인생을 사는 중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이탈리아 대부호 마시모 조르지아니로부터 상상을 초월하는 의뢰를 받습니다. 홍콩의 한 은행금고에 보관돼있는 플로피 디스켓과 서류들을 탈취해달라는 것입니다. 홍콩이 중국으로 반환되면서 다른 곳으로의 이동을 위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 자료가 금고 밖으로 나오는 기회를 노리라는 것입니다. 평범한 증권맨 고바 게이타에겐 터무니없는 제안이지만 그는 수락 아니면 죽음이라는 거부할 수 없는 카드를 내밉니다. 그리고 홍콩에 도착한 고바 게이타는 자신과 닮은 다국적 패배자들과 함께 한 팀이 되어 무모한 미션을 벌이기 시작합니다.

 

작가는 이 작품의 제목이자 주인공들인 언더독스를 이렇게 묘사합니다. “홀로는 이길 수 없었던 패배자들이 모인 오합지졸”, “성공한 놈이나 자신감이 넘치는 놈은 한 명도 없다. 스스로의 실패와 능력 부족으로 궁지에 몰린, 글자 그대로 패배자 팀.”

전직 관료이자 평범한 증권맨 고바 게이타를 비롯하여 정부기관 소속 홍콩인, 실직한 영국 은행원, 핀란드 출신 전직 IT 전문가 등 언더독스의 멤버들은 하나같이 지독한 실패와 패배를 맛본 뒤 세상의 궁지에 몰린 인물들입니다. 누가 봐도 은행금고 속 기밀자료를 빼내는 미션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니 애초 그들을 한 팀으로 묶은 이탈리아 대부호 마시모 조르지아니의 의도 자체가 의심스럽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고바 게이타를 더욱 곤혹스럽게 만든 건 홍콩에 도착하자마자 벌어진 끔찍한 살인사건입니다. 작전 자체가 무산될 위기에 처한 것도 두려운 일인데 마치 기다렸다는 듯 러시아, 영국, 미국의 정부기관들이 압박과 협박을 가해오기 시작하고, 예기치 못한 습격을 받아 팀원 중 일부가 살해당하는 일까지 벌어지자 고바 게이타는 패닉 상태에 빠집니다. 그야말로 총 한 번 쏴본 적 없는 언더독스에겐 지옥과도 같은 악몽이 쉴 새 없이 닥쳐오는 형국입니다.

외부의 압박과 협박만큼이나 고바 게이타를 초긴장상태로 몰아넣은 건 언더독스 멤버들조차 절대 믿어선 안 된다는 의심이 피어오른 점입니다. 은행금고 속 기밀자료를 독점하려는 각국의 정부기관은 언더독스 내에 스파이를 심기에 이르렀고 실제로 배신행위가 드러나면서 고바 게이타로서는 외국 정부기관 및 내부의 배신자와의 싸움에도 온 신경을 집중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미션에 실패해도 죽음, 미션을 포기해도 죽음이라는 막다른 골목에서 고바 게이타는 살아남기 위해선 상대방을 요령껏 이용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실패와 패배로 인해 궁지에 몰렸거나 복수심에 사로잡혔다고 해도 첩보나 액션과는 거리가 먼 평범한 언더독스가 탐 크루즈 급미션에 투입된다는 설정은 요약된 줄거리만 보면 다소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작가는 약한 자이기에 오히려 죽기 살기로 지혜를 짜내고 때로는 엄청난 힘을 보여주지.” 등 여러 번에 걸쳐 조르지아니의 입을 빌려 이 기이한 미션을 설득력 있게 포장합니다. 또 홍콩 도착과 함께 연일 죽음의 위기를 넘기면서 미션 자체보다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 분투하는 고바 게이타의 고난은 어느 순간부터인가 독자의 눈에 전직 관료이자 평범한 증권맨의 이미지 대신 조금씩 단련되는 강철로 보이기 시작하는데, 이 역시 초반의 위화감을 금세 잊게 만든 작가의 뛰어난 필력 덕분이란 생각입니다.

 

중국으로의 반환을 코앞에 둔 홍콩을 무대로 피와 살이 난무하고 끝없는 배신이 이어지는 리얼한 첩보액션은 엔터테인먼트 스릴러의 미덕을 골고루 발휘하고 있습니다. 500여 페이지의 분량이 부담스럽지 않을 정도로 흥미진진한 전개와 다국적 캐릭터들의 카리스마도 무척 매력적입니다. 다만, 몇몇 대목에서 역시나 어쩔 수 없는 아마추어의 위화감을 완전히 지워내진 못한 점이 아쉬웠고, 일부 인물이 작위적으로 배신을 위한 배신에 이용된 점이나 주인공 고바 게이타가 막판에 보인 다소 이해하기 힘든 행동 역시 무리수로 보인 게 사실입니다. 만점도 충분한 작품이지만 고민 끝에 별 0.5개를 뺀 건 이런 이유들 때문입니다.

 

나가우라 교는 2021머더스를 통해 처음 만났는데, 더 이상 신선하지 않은 사적 복수를 소재로 삼았음에도 불구하고 독특한 캐릭터와 설정 때문에 눈길을 끌었던 작가입니다. 아이디어, 자료조사, 리얼한 첩보액션 서사가 잘 조합된 언더독스는 그에 대한 관심을 더욱 높여준 작품인데, 앞으로 그의 신간 소식을 좀더 자주 들을 수 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쁜 토끼 하무라 아키라 시리즈
와카타케 나나미 지음, 문승준 옮김 / 내친구의서재 / 2022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거처가 확인된 가출소녀 미치루를 집으로 데리고 와달라는 간단한 의뢰를 받고 현장으로 간 프리랜서 탐정 하무라 아키라는 예기치 못한 사태에 휘말려 옆구리에 칼을 맞고 발등뼈가 골절되는 중상을 입습니다. 가까스로 부상에서 회복될 무렵, 이번에는 미치루의 친구 미와의 아버지로부터 열흘 넘게 실종된 딸을 찾아달라는 의뢰를 받습니다. 미와의 행적을 쫓던 하무라는 미치루의 친구 중 또 한 명의 소녀가 사라진 사실을 알게 되는데, 그 와중에 그녀들과 친구이던 한 소녀가 살해당하는 사건까지 벌어지자 초긴장 상태가 됩니다. 경찰은 살인과 실종사건을 별개라고 결론짓지만 하무라의 촉은 두 사건이 어떤 식으로든 연결돼있다고 확신합니다. 하무라는 피해자 소녀들의 주변을 샅샅이 조사하지만 매번 막다른 벽에 부딪히곤 합니다.

 

와카타케 나나미의 하무라 아키라 시리즈는 좀 독특한 이력을 갖고 있습니다. (일본 기준으로) 1996년 첫 편 네 탓이야’, 2000의뢰인은 죽었다’, 2001나쁜 토끼가 차례로 출간됐는데, 이후 13년이 지난 2014년에야 후속작인 이별의 수법이 출간됐기 때문입니다. 그래선지 번역가 문승준은 앞의 세 작품을 시즌1, ‘이별의 수법부터를 시즌2라고 명명한 바 있습니다. (2014년에 나온 단편집 어두운 범람중 두 편에도 하무라가 등장하긴 합니다.)

개인적으론 이별의 수법으로 40대의 하무라 아키라를 처음 만났는데, ‘사십견과 노안에 시달리는 아줌마하무라가 넓디넓은 오지랖과 거침없는 폭주를 앞세워 맹활약하는 이야기에 홀딱 반해 단번에 그녀의 팬이 됐습니다. 그래서 시리즈 가운데 유일하게 한국에 소개되지 않았던 나쁜 토끼의 출간 소식은 무엇보다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이별의 수법보다 13년 전인 31살의 하무라는 어떤 모습일까 궁금했는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역시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는 진리를 재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여전히 오지랖도 넓고 폭주에 폭주를 거듭하며 세상에서 가장 불운한 탐정이라는 별명답게 몸과 마음에 상처가 가실 날이 없습니다. 그런 그녀가 맞닥뜨린 사상 최악의 9일간의 이야기를 담은 나쁜 토끼10대 소녀들의 실종과 피살이라는 엽기적인 사건을 다루고 있는데, 막판에 드러난 사건의 진상은 엽기를 넘어 소시오패스의 끝판왕처럼 보일 정도로 끔찍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소녀들의 사건 외에도 하무라를 고달프게 만드는 일은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폭행과 강간을 일삼다가 하무라에게 뜨거운 맛을 본 탐정회사 직원과 그를 손자로 둔 악귀와도 같은 할머니의 공공연한 복수 선언은 하무라로 하여금 24시간 경계태세를 풀지 못하게 만듭니다. 또 절친인 미노리를 가슴을 설레게 만든 남자에게서 수상쩍은 기운을 느끼고 조심하란 조언을 건네지만 오히려 미노리에게 온갖 비난과 분노를 산 하무라는 그저 황망할 따름입니다. 하무라에게 늘 한 발 이상 뒤처지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압박을 가하곤 하는 무사시히가시 경찰서의 형사들 역시 스트레스만 겹겹이 쌓아놓는 존재들입니다.

 

하루가 48시간이라도 모자랄 정도로 하무라의 행보는 쉴 틈 없이 이어집니다. 실종 혹은 살해된 소녀들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한 집요한 탐문 외엔 딱히 단서를 얻을 길이 없기 때문인데, 그런 탓에 이야기는 다소 느리고 디테일하게 전개됩니다. 물론 칼에 찔리고, 뼈가 부러지고, 등짝이 온통 멍으로 도배되는 등 하무라의 악전고투는 안쓰러움과 함께 흥미진진하게 읽히지만, 상대적으로 탐문과 추리가 제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맴맴 도는 형국이다 보니 하무라의 찐팬이 아니라면 중반부쯤 지칠 수도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그래도 서브 사건들이 중간중간 의외의 상황들을 통해 지루함을 덜어주고 있고, 노골적으로 묘사되진 않아도 연애와는 담을 쌓은 하무라가 살짝 로맨스의 기운을 내보이는 대목도 막간극과 같은 재미를 주고 있어서 500여 페이지의 분량을 금세 독파할 수 있게 만듭니다.

 

아직 못 읽은 하무라 아키라 시리즈가 더 많아서 어떤 작품이 가장 재미있다, 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개인적으론 이별의 수법을 통해 40대의 하무라를 먼저 만났던 게 더 괜찮았다는 생각입니다. 31살의 하무라가 맹활약한 나쁜 토끼도 재미있긴 했지만, 캐릭터의 매력과 카리스마는 이별의 수법이 훨씬 더 강렬했기 때문입니다.

고백하자면, 와카타케 나나미의 미스터리 서사가 개인적인 취향에 아주 잘 맞는 편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쁜 토끼를 허겁지겁 찾아 읽은 건 순전히 주인공 하무라에 대한 애정과 기대감 때문입니다. 간혹 작가와는 잘 안 맞아도 주인공 때문에 작품을 선택할 때가 있는데, ‘하무라 아키라 시리즈는 그 대표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쁜 토끼보다 먼저 출간된 네 탓이야의뢰인은 죽었다는 잘 벼려진 칼날 같은 20대의 하무라가 등장합니다. ‘나쁜 토끼보다 더 초기작이라 이야기는 기대에 못 미칠지 몰라도 좀더 날것 같은 하무라를 만날 수 있다는 점만으로도 충분히 기대감이 드는 작품들입니다. 모두 절판된 상태지만 중고로라도 구해서 하무라의 매력을 한껏 맛볼 생각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총리의 남편 이판사판
하라다 마하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22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실존인물을 다룬 다큐멘터리 스타일이 아니라면 정치를 소재로 한 모든 콘텐츠는 사실상 판타지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백악관 내 권력투쟁을 다룬 여러 편의 미드도, 기무라 타쿠야를 최연소 총리 주인공으로 등장시켰던 일드 체인지도 실은 우리에게도 저런 정치인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판타지를 구현시켜준 작품들입니다. ‘총리의 남편에선 사상 최초 여성총리이자 최연소 타이틀을 거머쥔 40대 소마 린코가 바로 그 판타지의 주인공입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의 1인칭 화자는 린코가 아니라 그녀의 남편인 히요리입니다. 출판사 홍보카피에 따르면 그는 조류애호 눈물과다 초식남인데, 조류학자로서 늘 새를 관찰하며 일기를 써오던 그는 아내 린코가 총리가 된 날부터 특별한 관찰일기를 쓰기 시작합니다. 먼 미래에 누군가 읽어주기를 바라며 아내이자 총리인 린코에 관한 모든 것을 기록하기로 마음먹은 것입니다. 거기엔 그들의 첫 만남이나 평범한 일상부터 총리와 총리의 남편으로서 겪은 희로애락이 디테일하게 담겨있습니다.

이야기는 린코가 총리로서 맞이한 첫날부터 시작되어 숱한 우여곡절과 치명적인 위기를 넘기며 국민들에게 신임 받는 유능한 총리로 자리 잡기까지의 시간들을 그립니다. 린코가 권모술수에 능한 정치인의 공격이라든가 당장 국민들로부터 지지받기 어려운, 하지만 미래를 위해 꼭 필요한 정책을 밀어붙이는 과정에서 위기를 겪는다면, 히요리는 예의 허당에 가까운 성격 때문에 이른바 권력자 가족의 스캔들을 자초하거나 린코에게 큰 힘이 돼주지 못하는 자신의 무능함 때문에 고뇌에 빠지곤 합니다.

 

사실, 린코와 히요리에게 닥치는 위기는 딱히 새롭다거나 특별하진 않습니다. 위기 자체나 그것을 극복하는 방식도 충분히 예측 가능합니다. 하지만 이런 스타일의 이야기가 여전히 독자에게 불쑥불쑥 카타르시스를 일으키는 건 예나 지금이나 달라지지 않은 저급하고 탐욕스런 정치인들의 행태 때문일 것입니다. 국적을 불문하고, 시대를 불문하고 사리사욕에 눈 먼 권력자들을 응징하는 선한 리더의 이야기는 늘 통쾌한 대리만족과 감동을 주기 마련입니다. 린코는 그런 서사에 잘 어울리는 주인공이고, 히요리는 눈물과다 초식남이긴 해도 늘 린코에게 역시 나는 히요리 씨의 이런 점이 좋다니까.”라는 칭찬을 듣는 훌륭한 화자이자 조연입니다.

 

린코의 첫 번째 캐릭터는 물론 여성총리지만, 실은 이 작품에서 여성성은 그리 강조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당장에는 욕을 먹고 표를 잃고 정치적인 위기를 자초할 게 뻔한 정책이더라도 미래를 위해 진심으로 호소하고 제대로 밀어붙이는 바람직한 정치인캐릭터가 훨씬 더 비중 있게 그려집니다. 겉으론 사람 좋은 아저씨 같아도 실은 속내를 알 수 없는 노회한 정치인이라든가 어려운 시절부터 오랫동안 함께 동고동락해온 충직한 비서진들, 여성총리에 관한 대중적 관심을 이용하는 프리랜서 저널리스트 등 이 작품의 중요한 조연들 역시 린코의 여성성보다는 바람직한 정치인캐릭터를 강조하기 위한 장치들입니다.

 

재미있는 건 이 작품이 린코의 1인칭 시점도, 3인칭 시점도 아닌 허당 남편이자 조류학자 히요리의 관점에서 전개된 덕분에 딱딱한 정치 서사와는 거리가 먼 흥미진진한 총리 관찰기로 읽힌다는 점입니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에피소드들로 채워지긴 했어도 독특한 개성을 지닐 수 있었던 건 바로 타이틀 롤을 맡은 총리의 남편히요리 덕분이란 생각입니다. 야심가나 빈틈없는 조력자가 아니라 오로지 새에만 관심이 있을 뿐인 눈물 많은 남자를 화자이자 총리의 남편으로 설정한 것이야말로 이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이자 미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작품이 일본에서 출간된 건 2013년인데, 공교롭게도 린코가 내건 공약들은 2022년 대한민국 대선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것들입니다. 문제는 공약 따위야 누구나 내걸 수 있는 것이지만 그걸 제대로 실천하는 자를 찾아보기 힘들다는 점입니다. 바로 그 때문에 린코의 행보는 한국이든 일본이든 많은 독자에게 우리에게도 저런 정치인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판타지로 다가올 수밖에 없는데, 대선을 1주일 앞두고 있어서 그런지 그 판타지는 훨씬 더 강렬하고 절실하게 느껴졌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