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백합
타지마 토시유키 지음, 김미령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10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1952년 여름, 14살의 스스무는 아버지의 오랜 친구 아사기의 롯코 산 별장에서 방학을 보내게 됩니다. 아사기의 아들인 동갑내기 가즈히코와 산 곳곳을 누비던 스스무는 대저택에 사는 동갑내기 소녀 카오루와 어울리게 되고 세 사람은 잊지 못할 여름방학을 만끽합니다. 한편, 소년소녀들의 풋풋한 첫사랑 이야기와 별개로 어른들의 비밀스런 과거사가 전개되는데, 하나는 1935년 두 소년의 아버지가 베를린 출장 때 만난 마치코라는 미지의 여성에 관한 것이고, 또 하나는 1941~1945년에 걸친 카오루의 고모 히토미의 사랑 이야기입니다. 소년소녀들은 우연히 혹은 호기심에 사로잡혀 서서히 어른들의 비극 한복판으로 다가갑니다. 그리고 방학이 끝나갈 무렵 롯코 산엔 두 발의 총성이 울려 퍼집니다.

 

278페이지에 불과한 분량에 독이 서린 어른들의 비밀이라는 미스터리를 담고 있긴 해도 ‘14살 소년소녀들의 풋사랑이 혼재된 이야기라 가벼운 마음으로 읽기 시작한 작품입니다. “순수문학과 추리문학이 절묘하게 만난 작품이라는 홍보카피 좀 별난 간식 정도로 이 작품을 대하게 만들었는데, 고백하자면 마지막 장을 덮고 서평을 쓰기까지 대혼란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곱씹어볼수록 머릿속이 어질어질해지면서 앞서 읽은 문장과 단어들이 만화경 속 색종이 조각들처럼 이리저리 휘날리는 듯한 야릇한 불쾌감마저 느꼈는데, 가장 큰 이유는 막판에 밝혀진 트릭과 반전의 충격 때문입니다. 쉽고 가벼운 문장들이라 안이하고 빠르게 읽어버린 것도, 초반부터 그릴까 말까 고민했던 인물관계도를 그리지 않은 일도 후회됐습니다. 그랬다면 막판에 밝혀진 사실들이 조금은 선명하게 머릿속에서 정리됐을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소년소녀들의 풋풋한 첫사랑은 롯코 산의 아름다운 풍광 속에서 그 또래다운 순수함을 발산하며 그려집니다. 중간중간 끼어드는 어른들의 챕터 역시 팽팽한 긴장감보다는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라는 호기심을 자아내는 정도에 그칩니다. 물론 1945년 패전을 앞두고 일어난 살인사건이 미스터리를 증폭시키긴 하지만 그 사건이 1952년의 소년소녀들과 어떻게 연결될지 감조차 잡을 수 없어 그다지 큰 미끼로 여겨지진 않았습니다.

첫사랑에 달떠있던 소년소녀들은 방학이 끝나갈 무렵 어른들에게서 하나둘 이상한 점들을 발견하기 시작합니다. 대놓고 불륜을 저지르거나 도덕적으로 용인되지 않는 밀회를 즐기는 자들, 문신투성이 야쿠자들과 은밀한 만남을 갖는 어른, 누군가를 닮은 오래된 앨범 속 사진의 인물, ‘여왕이라 불리며 찻집을 운영하는 비밀투성이 여자 등 소년소녀들에게는 하나같이 두려움과 호기심을 자아내는 인물들입니다.

 

작가는 독자로 하여금 소년소녀들의 눈을 통해 어른들의 비밀을 들여다보게 만들기도 하지만, 때론 그들은 알아챌 수 없는 비밀을 독자에게만 알려주기도 합니다. 특히 막판에 한 소년이 목격한 사소한 사고 장면은 독자만이 눈치 챌 수 있는, 1935년부터 시작된 비극의 전모와 두 개의 살인사건의 진실을 알려주는 결정적 단서이자 반전의 핵심입니다.

하지만 이때부터 독자의 혼란이 시작됩니다. 허겁지겁 책의 앞머리로 돌아가 무심코 읽어 넘겼던 문장들과 평범하게만 보였던 단어들을 다시 들여다봐야 합니다. 그래야만 그 문장과 단어들이 실은 복선으로 가득 찬 트릭 덩어리임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인터넷서점과 미스터리 카페를 뒤져보니 역시 이 작품의 막판 반전은 많은 독자들의 논란거리였습니다. “뭐가 반전이란 거냐?”, “내가 생각하는 게 맞긴 맞는 거냐?”, “이 사람이 살인범이라고? ~!!!” 등 의문, 분노, 배신감, 감탄 등 다양한 반응들을 목격할 수 있었는데, 그건 아마도 작가가 놀랍기 그지없는 반전을 마치 별일 아닌 것처럼 태연하게, 잠시 멍 때리다간 눈치 채지도 못할 만큼 조용히 독자 앞에 풀어놓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마치 맑은 물에 떨어진 먹물 한 방울처럼 서서히 독자의 머릿속에 그 충격이 퍼지도록 설계라도 한 듯 말입니다. 두 번은 읽어야 제 맛을 느낄 수 있는 미스터리를 숱하게 만났지만 실제로 두 번을 읽은 적은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흑백합은 두 번, 그것도 연달아 읽어야만 작가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이런 전개와 구성은 다소 극단적이라고 할 만큼 다양한 호불호를 일으켰는데, 제 경우엔 어질어질한 가운데에도 별 5개 이상을 주고 싶을 만큼 매력적인 작품으로 보였습니다. 이야기 속의 미스터리도 흥미로웠지만 소설 자체가 미스터리!”라는 어느 독자의 평처럼 단어 하나하나까지 해부해보고 싶을 만큼 호기심을 자극했기 때문입니다. 아마 이 작품을 놓고 독서모임을 갖는다면 다 읽고도 미처 눈치 못 챘던 사실들을 새롭게 알게 될 수도 있습니다. 소년소녀들의 풋사랑과 쉽고 간결한 문장들이 얼마나 대단한 위장막 역할을 했는지도 함께 말입니다.

서평을 마치는 대로 첫 페이지부터 찬찬히 다시 읽을 생각인데,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된다면 이 서평 자체를 다시 써야 할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이 작품의 진짜 매력은 이야기 자체보다도 두 번 읽지 않곤 못 배기게 만든 작가의 대단한 설계에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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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아이
로미 하우스만 지음, 송경은 옮김 / 밝은세상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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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출판사 소개글 범위를 벗어나진 않았지만 약간 상세한 줄거리가 포함된 서평입니다.)

 

14년 전에 실종된 딸 레나로 추정되는 여자가 교통사고로 입원했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간 마티아스는 이내 레나가 아니라 야스민이라는 여자임을 확인하곤 절망에 빠집니다. 그런데 병원 복도에서 레나의 어린 시절과 꼭 닮은 소녀 한나를 발견하곤 충격에 빠집니다. 조사 결과 실제로 한나는 레나의 딸로 밝혀집니다. 그런데 한나는 교통사고로 입원한 야스민을 엄마라고 불러 모두를 놀라게 합니다. 야스민은 괴한에게 납치당한 뒤 4개월간 납치범의 아내이자 한나의 엄마 레나로 살아오다가 가까스로 탈출했다고 털어놓습니다. 퇴원 후 야스민은 심리적으로 불안정한 상태에서도 납치범의 정체와 그가 레나와 자신을 납치한 이유, 그리고 외부와 완벽히 차단된 숲속 오두막에서 아이들을 키워온 이유를 알아내고자 애씁니다.

 

이야기의 뼈대는 한 사이코패스에 의한 잔혹하고 일그러진 납치극정도로 심플해 보이지만 사랑하는 아이는 평범한 소재라도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특별한 서사와 개성을 지닐 수 있음을 잘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14년 전 실종된 레나, 4개월 전 납치된 뒤 폭력과 공포 속에 레나로 살아야만 했던 야스민, 레나의 딸이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야스민을 자연스레 엄마라고 부르는 소녀 한나, 그리고 딸을 잃은 상심을 손녀 한나를 통해 보상받고 싶은 것은 물론 야스민에게서 레나에 관한 단서 하나라도 알아내고 싶은 절박한 심정의 마티아스 등 다양한 화자들이 들려주는 기이한 납치극의 진상은 상투적이고 예측 가능한 이야기를 뛰어넘어 읽는 내내 팽팽한 긴장감을 맛볼 수 있게 해줍니다.

 

출판사의 소개글만 보고도 쉽게 유추할 수 있는 건 야스민은 레나라는 여자의 대타로 납치됐고, 무슨 이유에선지 레나로 살아갈 것을 강요당했다는 점입니다. 이 설정까지만 해도 남다를 것 없어 보이지만, 초반부터 독자의 눈길을 끄는 점은 레나가 낳은 것이 분명한 한나가 아빠에 의해 납치된 야스민을 태연스레 엄마라고 부르는 점입니다. 또 야스민이 지독한 폭행을 당하는 걸 목격하고도 두려워하거나 동정하기는커녕 엄마가 실수해서 벌을 받는 거야.”라며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장면도 그저 기이해보일 뿐입니다.

이 미스터리의 열쇠는 그들이 사는 숲속 오두막에 있습니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국경지대의 숲속에 자리한 오두막은 모든 창문이 틀어 막혀 햇빛 한 톨 들어올 틈도 없는 완벽한 감옥입니다. 이 기이한 공간이 한나에게 어떤 식으로 영향을 미쳤는가를 지켜보는 건 사건 자체만큼이나 흥미로운 일입니다.

 

이 작품이 단지 탈출에 성공한 야스민이 진범의 정체를 밝히고 실종된 레나의 진실을 알아내는 이야기에 그쳤다면 비슷한 소재를 다룬 작품들과 대동소이했겠지만, 세상과 단절된 채 오로지 두꺼운 책을 통해 지식을 쌓아온 한나라는 캐릭터 덕분에 전혀 결이 다른 이야기로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한나는 납치범인 아빠와 공범이라도 되는 듯 야스민을 위기에 몰아넣기도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구원의 손길을 내밀기도 하면서 이야기를 더욱 요동치게 만듭니다. 또 자신을 실종된 딸이 남긴 소중한 손녀로 여기는 마티아스를 대하는 장면에선 마치 어린 소시오패스마냥 천진난만함과 서늘함을 동시에 발산하는데, 그래선지 과연 한나가 이 이야기의 마지막에 어떤 모습으로 독자와 마주하게 될지 사뭇 궁금해지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사건 자체를 이끌어 가는 건 어떻게든 범인의 정체를 알아내 자신과 레나를 납치한 이유를 확인하려는 야스민과 그녀를 통해 실종된 딸 레나의 진실을 밝히려 애쓰는 마티아스입니다. 두 사람 모두 돌이킬 수 없는 상처와 트라우마에 시달리는데다 극성스런 언론의 표적이 된 신세지만 레나의 진실이라는 같은 목표를 향해 전력 질주합니다. 평범한 일반인이다 보니 슈퍼히어로 같은 활약을 기대할 순 없는데, 이 부분은 마티아스의 친구인 게르트 브륄링 경감의 적절한 지원을 통해 해결됩니다.

 

완벽하게 통제된 숲속 오두막의 주인인 납치범, 14년 전 납치되어 아이까지 낳은 레나, 그녀의 대타로 납치된 야스민, 14년 동안 실종된 딸의 진실을 알아내기 위해 분투하는 마티아스, 그리고 세상 밖으로 나가본 적 없는 소녀 한나가 펼치는 독특한 납치 스릴러 사랑하는 아이는 흥미진진함은 물론 여러 가족에게 닥친 끔찍한 비극의 여운까지 전해주는 인상적인 작품입니다. 딱히 납치극에 관심 없는 독자라도 순식간에 마지막 장까지 달릴 수 있는 작품이니 충분히 기대해도 좋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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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고 싶다 케이스릴러
노효두 지음 / 고즈넉이엔티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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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고생이던 딸 진경이 실종된 건 16년 전인 2003. 정상훈은 2년 전까지만 해도 전국을 돌며 전단지를 돌렸지만 아내마저 세상을 뜨자 자포자기하듯 살아왔습니다. 그런 그에게 고탐정이라는 수상한 인물이 찾아옵니다. 6개월에 6천만 원을 요구하며 자신이 납치살인범을 잡아 딸의 시신을 찾아낼 수 있다고 장담합니다. 같은 처지였던 실종아동협회원으로부터 고탐정 덕분에 아들을 찾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정상훈은 마지막 도박이란 심정으로 고탐정과 계약을 맺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용의자를 잡았다는 연락에 흥분과 분노에 사로잡힙니다. 그런데 그런 정상훈 앞에 부산경찰청 미제사건수사팀장 박진희가 나타나 고탐정은 실종자 가족을 이용하는 사기꾼이거나 가공할 살인범이라며 그에 관한 모든 것을 털어놓으라고 압박합니다.

 

살아있든 죽어있든 직접 눈으로 확인하기 전까지는 그 고통이 영원히 끝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가족의 실종은 살인이나 사고보다 더 끔찍한 상처를 남기는 일입니다. 그것이 자발적인 가출이나 잠적이 아니라 명백한 범죄에 의한 것이라면 더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그런데 누군가 납치범을 잡을 수 있다고 자신한다면, 그래서 이미 죽었더라도 납치당한 자의 시신이라도 찾아낼 수 있다고 장담한다면 결국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매달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고탐정의 본명은 고남준. 20대 중반인 그는 특별한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한 번 본 얼굴은 절대 잊지 않는 이른바 슈퍼 리코그나이저(Super Recogniser)인 그는 사진으로든 방송으로든 한 번 본 용의자의 얼굴을 머릿속에 저장해놓았다가 실제로 그와 마주치는 순간 바로 알아볼 수 있는 초인식자입니다. 후천적인 계기로 그 능력을 갖게 된 남준이 가장 먼저 시도한 건 유년기에 갑자기 사라진 어머니를 찾는 일이었습니다. 아버지와 할머니의 학대에 시달리던 어머니가 실종됐지만 경찰은 불륜+가출이라는 결론만 내리며 등을 돌렸고, 이후 남준은 경찰에 대한 지독한 불신과 증오심을 지니게 됩니다. 그런 그가 자신의 능력을 실종자 가족을 위해 쓰기로 결심한 건 바로 그런 지워지지 않는 트라우마 때문입니다.

 

남준의 또 하나의 캐릭터는 사적 복수를 조금도 주저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범인을 찾는 것뿐 아니라 남준이 실종자 가족에게 제공하는 서비스엔 이런 것도 포함됩니다. “아버님이 생각하시는 거 도와드릴게요. 그놈을 그냥 살려둘 순 없죠.”

말하자면 남준은 괴물과 싸우기 위해 기꺼이 스스로 괴물이 된 인간입니다. 자백을 받아내기 위해 고문을 마다하지 않으며, 필요한 정보를 얻어낸 뒤에는 흔적도 없이 처리합니다. 거기엔 일말의 고민도 주저함도 없습니다. 하지만 비슷한 일들이 반복되면서 결국 부산경찰청 미제사건수사팀장 박진희에게 꼬리를 잡히고 맙니다.

 

세컨드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박진희는 어린 시절의 상처 때문에 강한 사람이 되기 위해 경찰에 투신했고, 남성중심의 조직에서 노력한 만큼의 대가를 얻어낸 인물입니다. 하지만 박진희는 좀더 큰 야망을 품고 있었고, 그런 그녀에게 고탐정은 승진과 명예를 한꺼번에 안겨줄 더없이 좋은 먹잇감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애초 고탐정을 실종자 가족에게 돈이나 뜯어내는 사기꾼 혹은 제멋대로 점찍은 용의자를 살해하는 살인범으로 치부하던 박진희는 수사를 진행할수록 혼란에 빠집니다. 그의 진지한 태도와 능력을 직접 목격한데다 박진희 스스로 간절히 해결하고 싶어 하는 사건의 범인까지 이미 알고 있다는 말에 흔들리고 만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탐정을 손아귀에 넣기로 한 박진희는 어떤 결말을 맞이하게 될까요?

 

노효두는 2021년에 출간된 면식범을 통해 먼저 알게 됐습니다. 역시 납치라는 소재를 다루고 있지만 좀더 복잡한 미스터리와 페이스오프 액션 스릴러를 겸비하여 개인적으로 꼽은 ‘2021년 미스터리&스릴러 베스트11’에도 포함시킨 작품인데, 덕분에 1년 먼저 출간된 찾고 싶다를 찾아 읽게 된 것입니다. ‘면식범때문에 기대치가 굉장히 높았던 탓에 살짝 싱겁게 느껴진 건 사실이지만, 캐릭터를 창조하고 이야기를 끌고 가는 힘만큼은 앞으로 나올 노효두의 작품에 큰 기대를 걸어도 괜찮다는 생각을 더욱 확실하게 만들어줬습니다. 납치나 실종도 좋고 그 어떤 소재라도 좋으니 연말쯤 노효두의 신작 소식이 들려오기를 바라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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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페어
하타 타케히코 지음, 김경인 옮김 / 북스토리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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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2004년에 출간된 이 작품의 원제는 추리소설입니다. 두 가지 의미를 지닌 제목인데, 하나는 연쇄살인범이 자신이 저지른 살인과 앞으로 저지를 살인을 소재로 집필한 소설 속 소설의 제목이라는 점이고, 또 하나는 역설적이게도 기존 추리소설의 덕목에 대한 반기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지어진 제목이란 점입니다.

 

피해자들 사이에 아무런 공통점도 없는, 마치 무차별 살인처럼 보이는 연쇄살인이 벌어집니다. 유일한 단서라곤 불공정한 것은, 누구인가?”라는 선문답 같은 문장이 적힌 책갈피가 전부라 경찰은 우왕좌왕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던 중 추리소설 이라는 제목의 원고와 함께 그 원고를 3,000만 엔 이상의 가격에 낙찰시키지 않으면 또 다시 살인을 저지르겠다는 범인의 예고장이 날아듭니다. 터무니없는 요구에 대해 범인에게 절대 굴복할 수 없다는 의견과 살인을 막기 위해 거래를 해야 한다는 조심스러운 의견이 충돌하지만 그 누구도 목소리를 높이진 못합니다. 수사에 나선 경시청의 유키히라 나츠미는 대담하거나 냉정하거나 기상천외한 의견을 내놓으며 자신만의 감으로 수사를 진행합니다.

 

정리된 줄거리만 보면 언뜻 혼다 데쓰야의 히메카와 레이코 시리즈와 닮은꼴로 보이는 게 사실입니다. 실제로 읽기 전에 주인공 유키히라 나츠미의 캐릭터 소개글을 보곤 단번에 히메카와 레이코가 떠올라 남다른 기대를 하기도 했는데, 실은 언페어는 일반적인 미스터리 서사와는 거리가 아주 먼 독특한 작품입니다. 물론 연쇄살인사건이 벌어지고 범인을 쫓는 주인공 형사가 등장하므로 형식적으로는 미스터리, 즉 제목대로 추리소설로 보는 게 맞습니다. 하지만 미스터리에서 중요한 것은 리얼리티와 페어플레이라고 하는, 판에 박힌 평어(評語) 자체의 어눌함에 들이대는 풍자의 칼날”(p317)이라는 해설처럼 이 작품은 추리소설을 이용하여 기존의 추리소설의 모든 것을 전복시키는이야기에 더 가깝습니다.

가령, “사건은 반드시 해결된다.”, “범인은 반드시 밝혀진다.”, “초반에 등장하는 수상한 인물은 항상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위한 기호거나 제2, 3의 피살자로 이미 정해져 있다.” 등 미스터리의 기본 공식이나 다름없는 것들을 노골적으로 비난합니다. 독자들은 보수적이라 항상 공정할 것을 요구한다. 공정하게 웃겨라. 공정하게 놀라게 하라.”, “대반전은 리얼리티를 가지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고 독자는 말한다.”라며 불공정하거나 리얼리티가 부족하다는 이유만으로 손가락질하는 독자들을 우회적으로 비판합니다.

 

물론 이런 주장은 모두 범인의 것입니다. 일반적인 소시오패스가 광기와 사념에 사로잡혀있다면 이 작품의 범인은 리얼리티불공정에 집착하는 소시오패스라고 할까요? 동기, 범행, 협박, 살인예고 등 모든 과정에서 기존 미스터리 속 범인들과는 전혀 다른 행보를 보이는 범인은 그런 범행이야말로 진짜 리얼리티이며 독창적이고 공정한 것!”이라고 믿습니다. 정해진 공식대로, 독자가 원하는 대로 전개될 뿐인 미스터리는 전부 개나 주라는 듯이 말입니다.

범인의 행적이 이러하니 경시청 검거율 1위 유키히라 나츠미도 도무지 실마리를 잡지 못한 채 헤맬 수밖에 없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범인은 기존 미스터리와 반대로 공정한 게임을 위해 의도적으로 단서를 흘려놓습니다. 물론 그 누구도 쉽게 눈치 챌 수 없는 고난이도의 단서였고, 유키히라 나츠미는 마지막 살인극을 앞두고 가까스로 범인의 정체를 파악하게 됩니다.

 

이 작품은 읽기가 무척 불편합니다. 수시로 화자가 바뀌고, 시간적 배경도 아무 설명 없이 툭툭 뒤바뀝니다. 시나리오 지문 같은 단편적인 문장이 자주 등장하고, 앞뒤 상황을 알 수 없는 모호한 장면들도 수시로 눈에 띕니다. 그나마 필요한 대목에서 글씨체라도 바꿔준 건 최소한의 친절이라고 할까요? 그런데 어쩌면 이런 불편함은 범인 친화적인(?) 이야기를 위한 의도적인 설정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기존의 추리소설 공식에 대입할 수도, 그 공식으로는 조금도 이해할 수 없는 범인의 기이한 행동과 사고를 은연중에 강조하기 위한 작가의 설계라는 것 외엔 달리 설명할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 작품을 읽기 전에 가장 기대한 건 주인공 유키히라 나츠미의 캐릭터였습니다. ‘쓸데없이 미인이란 별명에다 경시청 검거율 1위라는 타이틀을 거머쥐고 있지만 동시에 가정에서나 직장에서나 아픈 과거를 지니고 있는 30대 후반의 여형사. 그런데 워커홀릭에 냉정한 독설가에다, 틈만 나면 술을 마시고, 취하기만 하면 알몸으로 잠든 채 전화마저 받지 않아 후배 남자형사에게 곤혹스러운 인간 알람을 떠맡기곤 하는 괴짜 캐릭터이기도 합니다. 아마 기존의 전형적인 추리소설이었다면 무척이나 눈길을 끌었을 인물인데 하필 범인이 워낙 튀는 캐릭터라 오히려 소외당한 주인공이 된 느낌입니다.

다행히도 이 작품의 후속작인 여형사 유키히라의 살인 보고서’(북스토리, 2010)가 출간돼있어서 기회가 되면 찾아보려고 하는데, 부디 유키히라의 매력적인 면모가 부각된, 아주 일반적이고 뻔한추리소설이기를 바랄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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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든스
알렉스 마이클리디스 지음, 남명성 옮김 / 해냄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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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전 남편 서배스천을 불의의 사고로 떠나보낸 30대 심리상담가 마리아나는 여전히 상실감과 암울함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상태입니다. 아버지의 급작스러운 죽음과 언니 부부의 사고사에 이어 남편까지 잃은 마리아나에게 남은 유일한 핏줄은 서배스천과 함께 키워온 조카 조이뿐입니다. 케임브리지에서 대학생활을 하던 조이는 어느 날 패닉 상태에 빠진 채 다급한 연락을 해옵니다. 유일한 친구인 타라가 끔찍하게 살해됐다는 것입니다. 초조해진 마리아나는 즉시 케임브리지로 달려가고, 충격에 빠진 조이를 보호하는 한편 타라 살인범을 찾기로 결심합니다. 유일하게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상실감을 누구보다 잘 아는 마리아나는 속히 범인을 잡아야만 조이를 안정시킬 수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평범한 심리상담가일 뿐인 마리아나가 갈피를 못 잡는 사이 동일범의 소행으로 보이는 살인사건이 연이어 터집니다.

 

그리스 신화와 비극, 연쇄 살인이 교묘하게 결합된 심리학 스릴러!”라는 홍보카피 때문에 읽을지 말지 꽤 고민했던 작품입니다. 최근 심리스릴러 혹은 심리학스릴러(둘은 분명히 다르지만 조금 넓게 보면 결국 같은 이란 생각입니다)에 여러 번 질린 데다 그리스 신화역시 미스터리나 스릴러에 끼어들 때마다 좋은 기억을 남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유일한 기대감의 근거는 기록적인 판매고를 올렸다는 작가의 데뷔작 사일런트 페이션트였는데 아직 읽지 못한 상태라 일단 100페이지까지만 읽어보자, 라는 심정으로 첫 페이지를 펼쳤습니다.

 

첫 페이지의 프롤로그부터 마리아나가 범인으로 의심하는 자의 이름이 공개됩니다. 그는 케임브리지대학에서 엄청난 인기를 끌고 있는 고전문학 교수 에드워드 포스카입니다. 그는 특권층 출신에 뛰어난 미모를 지닌 몇몇 여학생에게 수상쩍은 개인지도를 하는 것은 물론 정체불명의 파티를 열거나 은밀한 비밀의식을 치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포스카 교수를 숭배하는 그 여학생들은 일명 메이든스’(처녀들)라 불리며 유명세와 경계심을 동시에 얻었는데, 마리아나는 그 사실에 주목하며 포스카 교수에 대한 의심을 증폭시킵니다.

 

사실, 평범한 심리상담가가 조카의 친구의 죽음을 조사한다는 설정은 그리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진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상실감을 잘 알기에 수양딸처럼 키워온 조이를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겠다는 마리아나의 의지는 이해가 되지만, 단서나 증거를 찾기보다 포스카 교수와 메이든스를 심리상담가의 관점에서 관찰하며 진상을 밝혀내겠다는 태도는 다소 작위적으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선지 작가는 마리아나의 행보를 납득시키기 위해 그녀가 지금도 겪고 있는 남편을 잃은 심연과도 같은 상실감을 여러 차례 반복해서 묘사합니다.

 

마리아나를 가장 혼란스럽게 만든 건 살해수법과 범인의 메시지입니다. 참혹하게 훼손된 시신들은 마치 의식에 바쳐진 제물 같은 인상을 남겼는데, 마리아나에겐 그런 살해수법이 수사진들의 눈을 멀게 하여 중요한 것을 못 보게 하려는 다분히 고의적인 행동으로 여겨졌습니다. 또 마리아나는 경찰이 놓친 현장 단서를 손에 넣는데 그것은 고대 그리스어로 쓰인 엽서들입니다. 거기에 적힌 것은 고귀한 처녀를 데메테르의 딸에게 바쳐야 한다.”라든가 이제 곧 너의 목은 칼을 맞고 피가 솟구쳐 흐를 것이다.” 같은 그리스 비극의 끔찍한 인용문들입니다. 이 모든 것들은 포스카 교수를 향한 마리아나의 의심을 더욱 공고하게 만들지만, 정작 경찰은 마리아나의 정신 상태를 의심하며 케임브리지대학에서 떠날 것을 강하게 요구할 뿐입니다.

 

기대 이상으로 흥미진진한 전개가 이어져서 애초 100페이지 정도만 읽겠다던 결심이 무색해지고 말았는데, 이 작품의 진짜 백미는 누구도 쉽게 예상할 수 없는 막판 반전에 있습니다. 범인의 정체가 밝혀지고 그 동기가 폭로되는 순간, 그저 어설픈 독자일 뿐인 저는 눈을 의심할 정도로 깜짝 놀랐는데, 개인적으론 최고의 반전 목록에 넣어도 괜찮을 만큼 충격적이고 매력적이었습니다. 인간의 심리라는 게 이런 식으로도 작동하겠구나, 라는 감탄과 함께 소소해 보일 수도 있는 모티브를 그리스 신화와 비극, 연쇄 살인이 교묘하게 결합된 심리학 스릴러로 확장시킨 작가의 필력에도 적잖이 놀란 게 사실입니다.

물론 약간은 사족처럼 느껴진 내용들 19세기 시인까지 동원한 마리아나의 상실감에 대한 거듭된 묘사, 사이코패스의 전형적인 유년기에 대한 심리학적 설명, 살짝 과잉처럼 보인 그리스 신화와 비극의 소개 등 이 있긴 했지만 큰 틀에서 보면 작가의 개성으로 인정할 만 했고, 약간 허술하거나 빈틈이 있는 미스터리와 의도가 빤히 보이는 캐릭터 설정 역시 무시해도 괜찮은 수준의 사소한 아쉬움에 불과합니다.

 

메이든스는 알렉스 마이클리디스의 두 번째 작품입니다. 앞서 출간된 성공적인 데뷔작 사일런트 페이션트를 뒤늦게라도 빨리 찾아 읽어야하는 건 말할 것도 없고, 앞으로 출간될 그의 작품도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0.5개를 뺀 만큼의 아쉬움이 있었던 것 맞지만 이만한 이야기꾼을 발견한 건 나름 큰 수확임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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