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해버린 이번 생을 애도하며 - SF와 로맨스, 그리고 사회파 미스터리의 종합소설 케이 미스터리 k_mystery
정지혜 지음 / 몽실북스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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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고 싶진 않은데 살고 싶지도 않은 순간이 찾아오면 잠시 삶을 멈추고 싶어집니다.”

 

작가는 이런 상황이라면 누구든 냉동인간이라는 제안에 혹할 수도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동안 영화나 소설 등 여러 매체에서 SF라는 장르를 통해 묘사된 냉동인간 뚜렷한 목표 혹은 주어진 임무를 위해 주인공이 비장한 표정으로 냉동실에 들어가는 것과는 사뭇 다른, 무척이나 현실적이고 공감이 되는 상황임에 분명합니다.

시기를 짐작하기 어려운 먼 미래가 배경이지만 인간의 냉동과 해동이 기술적으로 가능해졌다는 점을 제외하면 작품 속 세상은 지금의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여전히 불치병으로 사람들이 죽고, 프로포즈를 위해 꽃다발을 건네며, 사춘기 자녀와 부모는 변치 않는 갈등을 벌입니다. 하지만 짧게는 몇 년, 길게는 몇 십 년간 냉동됐다가 해동된 인간들을 구성원으로 지닌 사회는 구석구석에서 심상치 않은 균열을 보입니다. 그 균열은 개인적인 차원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때론 모두에게 충격을 안길만한 심각한 이슈로 발전되기도 합니다.

 

264페이지의 분량에 비해 꽤 많은 인물이 등장합니다. 적잖은 비중과 이름을 가진 인물만 10여 명에 달해서 벽돌 책을 보면서도 어지간해선 그리지 않던 인물관계도까지 그리며 책장을 넘겨야만 했는데, 뒤로 갈수록 미리 그려놓은 인물관계도가 꽤 도움이 됐던 게 사실입니다. 그들은 냉동인간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이리저리 복잡하게 얽힌 인연과 악연을 주고받습니다.

그중에서도 중심에 서있는 인물은 냉동인간 기업의 유능한 팀장 차규선과 그의 약혼녀 이가은, 그리고 꿈속에서 만난 여인과의 재회를 위해 50년간 냉동됐던 김기한입니다. 규선은 냉동기업에 근무하지만 정작 냉동인간에 대한 혐오와 편견을 갖고 있습니다. 애초 냉동을 선택한 의도 자체가 의심스러웠고, 해동된 인간은 제대로 된 인간으로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의 약혼녀 가은은 차마 털어놓지 못한 자신의 과거 때문에 결혼을 앞두고 전전긍긍합니다. 더구나 그 과거를 까발릴 존재가 자기 앞에 나타나자 공포에 사로잡힙니다. 한편 서류상으론 한 여인과의 운명적인 만남을 위해서라고 돼있지만 실상은 비열한 이유로 냉동인간을 선택했던 기한은 예상치 못한 상황과 마주치자 예의 그 비열함을 드러내며 위기를 일으킵니다.

 

세 사람의 이야기가 기둥 역할을 하지만, 그들과 인연과 악연으로 얽힌 그 외의 인물들의 이야기가 분량이나 비중 면에서 더 독자의 눈길을 끕니다. 만산(晩産) 이후 자식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 냉동을 택한 엄마의 비극, 냉동인간 기업의 만행을 보도하기 위해 분투하지만 선과 악의 경계에서 혼란을 겪는 기자, 20여 년 전 악연으로 만났던 여자가 그때 그 모습 그대로 나타나자 충격에 빠지는 남자 등 냉동인간이라는 소재가 탄생시킬 수 있는 다채로운 인물들이 짧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임팩트 있는 이야기들을 풀어놓습니다.

 

‘SF와 로맨스, 그리고 사회파 미스터리의 종합소설이라는 부제가 붙었지만, 개인적으론 냉동인간에 관한 암울한 디스토피아 소설이 더 어울려 보입니다. 작가가 정말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SF도 로맨스도 미스터리도 아닌, 냉동인간 그 자체 혹은 그것을 자유롭게 만들어놓은 시스템이 낳은 비극으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냉동인간은 은밀하거나 비겁하거나 비열하거나(가령, “감출 게 많고 가진 것은 많은 사람들의 도피처”) 아니면 망해버린 이번 생의 종장을 어떻게든 유보해보려고 벼랑 끝 선택을 한 경우들(가령, “미래에는 지금보다는 취업이 잘 되지 않을까요?”)입니다. 때론 본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가족에 의해 냉동되는 경우도 등장합니다. 비밀리에 태어난 아이돌의 아기, 위기를 감지한 부모에 의해 강제로 냉동된 자식 등이 그런 경우입니다.

냉동인간의 비극은 별 대책도 없이 해동되는 경우 더 극명해집니다. 물려받은 집이나 재산도 없는 상태에서 두 개의 나이(주민증의 나이와 냉동 당시의 나이)를 가진 그들은 다시 얻은 삶을 막막해 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민증의 나이 때문에 취업도 쉽지 않으며 너무 많이 달라진 사회에 적응도 못합니다. 그러다 보니 범죄의 60%가 냉동인간들에 의해 저질러지는 참사가 빚어집니다. 심지어 보호자가 먼저 죽었거나 사라진 경우 은밀한 절차에 의해 삶을 마감하는 비극을 맞이하게 됩니다.

 

표지에 새겨진 너 잠깐 냉동되지 않을래? 나중에 꼭 깨워줄게!”라는 카피만 보면 자칫 코믹한 톤의 SF물로 오해할 수 있는데, 실은 이 작품은 최근에 읽은 그 어떤 디스토피아 콘텐츠보다도 암울하고 우울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깔끔하고 개운한 결말도, 충격적인 반전도 없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사실적이고 현실감 높은 SF물로 읽힐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실제로 아직까지 그 사례가 없는 해동 기술이 언젠가 발명된다면 이 작품에서 묘사된 끔찍하고 고통스러운 비극들은 그 즉시 현실에서 쉽사리 목격하게 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SF물에 큰 관심도 없었고 냉동인간이라는 소재 자체도 구미가 당기진 않았지만, 냉동인간으로 인해 빚어질 수 있는 다양한 비극들과 그에 어울리는 캐릭터들을 정교하고 빈틈없는 설계로 그려낸 작가의 필력 덕분에 기대 이상의 인상과 여운을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어떤 이야기를 후속작으로 들고 나올지 모르겠지만 앞으로 주목해야 할 작가임엔 분명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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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 강의 이름 모를 여인
기욤 뮈소 지음, 양영란 옮김 / 밝은세상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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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원 하나 없는 한직인 BANC(특이 사건국)로 좌천된 록산 몽크레스티앙 경감은 부임과 동시에 기이한 사건에 휘말립니다. 센 강에서 알몸으로 발견된 여성이 이송 도중 탈출했는데, 그녀가 남긴 머리카락을 조사해보니 이미 1년 전에 사망한 유명 피아니스트 밀레나의 DNA와 일치했기 때문입니다. 도망친 여성의 시계와 문신을 통해 추적을 이어가던 록산은 밀레나의 연인으로 알려진 작가 라파엘과 만나는데, 문제는 라파엘이 밀레나에 관해 조금도 입을 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라파엘 주위에서 끊임없이 사건이 벌어지는 가운데 록산은 집요한 조사 끝에 도망친 여성과 밀레나, 그리고 라파엘의 관계를 파악하곤 큰 충격에 빠집니다. 더불어, 술의 신으로 알려져 있지만 동시에 전복과 일탈의 신, 분노와 광기의 신이기도 한 그리스신화 속 디오니소스를 숭배하는 그룹이 사건과 관련 있다는 사실에 어찌할 바를 모릅니다.

 

남들은 다 좋다는데, 혹은 늘 베스트셀러로 꼽히는데 유독 나와는 인연이 없는 작가는?”이란 질문을 받으면 누구나 한두 명쯤은 떠올릴 수 있을 것입니다. 제 경우엔 그런 작가가 꽤 많은 편이고 그중 한 명이 바로 기욤 뮈소입니다. 선물로 받은 전집 세트마저 하염없이 방치할 정도로 관심 밖이던 기욤 뮈소와 처음 만난 건 통속성 강한 미스터리 아가씨와 밤이었는데 기대를 안 한 덕분인지 생각보다 재미있게 읽었고, 그 여세(?)를 몰아 시간여행을 다룬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까지 읽게 됐습니다. 그리고 처음으로 큰맘 먹고 센 강의 이름 모를 여인을 장바구니에 담기에 이르렀습니다.

 

제목부터 관심을 자극한 센 강의 이름 모를 여인은 한겨울에 알몸으로 강에서 발견된 뒤 자취를 감춘 여성이 알고 보니 1년 전에 이미 죽은 여성으로 밝혀지면서 꽤 흥미로운 출발을 보입니다. 거기다가 미스터리를 추적하는 주인공 록산은 합리적이고 유능하지만 주체할 수 없는 반골 기질 탓에 부당한 처우를 당하고 마는다소 상투적인 여형사 캐릭터임에도 불구하고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는 매력을 발산하고 있어서 초반부터 기대감을 갖게 만들었습니다.

죽은 여성 피아니스트의 연인이자 가해자인지 피해자인지 모호한 작가 라파엘, 라파엘의 아버지이자 공교롭게도 록산의 전임자인 바타유 국장이 추적하던 정체불명의 그룹, 사방이 유리인 라파엘의 집에 출몰하는 미지의 인물들, 그리고 한직으로 밀려난 상태라 공식적인 수사를 포기한 채 오롯이 혼자 힘으로 뛰어다녀야 하는 록산과 그녀의 파트너인 박사논문 준비생 발랑틴 등 매력적이고 호기심을 자극하는 인물들이 빠른 템포로 이야기를 이끌어나갑니다.

특히 별개로 보였던 각각의 사건들이 실은 복잡미묘하게 하나의 끈으로 연결돼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이야기는 점점 긴장감을 고조시킵니다.

 

하지만 페이지를 넘길수록 초반의 기대감과 매력은 점차 힘을 잃기 시작했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다 읽은 뒤에도 머릿속으로 큰 얼개를 정리하기 어려울 정도로 이야기가 복잡하고 배배 꼬여있다는 점입니다. (이 작품의 장점이자 단점일 수도 있지만) 따라가기 힘든 장르의 믹스역시 난감할 뿐이었는데, 도플갱어 스토리인가 싶으면 갑자기 꿈과 환각과 정신의학이 등장하고, 기괴한 형태로 시신과 현장을 꾸미는 연쇄살인범을 쫓는 스릴러인가 싶으면 느닷없이 그리스신화, 연극, 디오니소스 숭배, 제물과 제의(祭儀)가 튀어나옵니다.

말하자면, 미스터리인 줄 알고 따라가다가 난데없이 호러 혹은 신화 판타지와 맞닥뜨리고, 잠시 후엔 또 다시 미스터리로 급선회하는 혼란이 읽는 내내 이어진다는 뜻입니다. 결국 도대체 이 작품의 장르는 무엇인가?”라는 의문이 수시로 들 수밖에 없었고, 중반을 조금 넘은 지점부터는 애초 주인공과 사건에 품었던 기대감과 매력은 더 이상 이어가기 어려워졌습니다. 잔뜩 연쇄살인을 설정해놓곤 막판에 가서 불가해한 영역으로 독자를 이끌어 납득하기 힘든 결론을 강요하는 일부 북유럽 스릴러의 닮은꼴이라고 할까요?

 

물론 취향이 맞는 독자라면 마지막 페이지까지 무척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는 작품입니다. 특히 깔끔하거나 선명하진 않지만 그래서 더 눈길을 끄는 이야기, 그리스신화를 차용한 신비주의에 가까운 서사, 숭배 혹은 제의(祭儀)를 통한 악의의 발산 등에 관심 있는 독자에겐 센 강의 이름 모를 여인은 기대 이상의 만족을 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기욤 뮈소와 친하지 않다고 해도 별 3개라는 야박한 평점을 준 건 순전히 개인적인 취향이니 이 작품이 궁금하다면 다른 독자들의 서평도 꼭 참고할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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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의 인연 1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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끔찍한 살인사건으로 부모를 잃은 양식당 아리아케3남매. 아동보호시설에서 서로를 의지하며 성장했지만 세상은 그들에게 더 큰 시련을 안깁니다. 번번이 누군가에게 속아 금전적 손실은 물론 마음의 상처까지 입은 그들은 더 이상 속는 쪽이 아니라 속이는 쪽이 되기 위해 지능적인 사기 계획을 꾸미기로 결심합니다. 막내 여동생 시즈나의 미모를 무기 삼아 성공적인 사기 행각을 이어가던 어느 날, 남매는 우연히 14년 전 부모를 살해한 범인과 꼭 닮은 남자를 목격합니다. 더구나 그가 운영하는 유명 양식당의 대표 메뉴의 맛은 살해된 아버지가 각고의 노력 끝에 개발했던 비밀 레시피의 맛과 너무도 흡사합니다. 남매는 그가 부모를 살해한 범인이라고 확신하고 복수를 계획합니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책장에 꽂아놓고 한참을 방치한 유일한 이유는 순전히 제목과 표지 때문입니다. 책읽기의 대부분을 미스터리와 스릴러 위주로 삼는데다 간식처럼 읽는 순문학조차 조금은 별난(?) 이야기에 치중하다 보니 제목도 표지도 애절한 로맨스의 향기를 폴폴 풍기는 유성의 인연은 자꾸만 뒤로 밀려온 것입니다. 더구나 읽기 전에 그 어떤 정보도 접하지 않는 습관을 갖고 있었던 탓에 이야기가 시작되자마자 끔찍한 살인사건이 벌어지는 대목에서 적잖이 놀란 게 사실입니다.

 

매번 자신들을 속이고 상처만 남긴 세상을 향해 사기라는 방법으로 복수를 시작한 아리아케 3남매 고이치, 다이스케, 시즈나 14년 만에 우연히 부모 살해범을 목격하지만, 희미한 목격담 외엔 달리 그를 경찰에 넘길 단서나 증거가 없는데다 공소시효 만료까지 1년도 채 남지 않은 상황이란 걸 깨닫곤 결국 경찰이 그 범인을 쫓게 만들기 위해 고도의 덫을 마련한다는 것이 이야기의 큰 줄기입니다.

다소 신파의 냄새가 나는 설정인데다 직접적인 복수보다 덫을 놓아 경찰이 범인을 쫓게끔 만든다는 전략때문에 히가시노 게이고의 여타 살인 미스터리에 비해 긴장감이 덜한 게 사실입니다. 2020년 개정판 기준으로 (1,2권 합쳐) 624페이지에 달하는 적잖은 분량이지만, 이야기의 얼개만 보면 그만한 분량이 필요해 보이진 않아서 왠지 장기 연재물 같은 느낌도 받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이야기꾼인 작가는 크고 작은 설정들을 통해 잠시도 지루하거나 느슨함을 느끼지 못하게끔 촘촘한 서사를 구축했습니다.

 

맏이인 고이치가 사기극을 설계하고 의태(擬態)의 천재인 둘째 다이스케와 매력적인 막내 시즈나가 실행에 옮기는 사기극도 흥미진진하고, 범인을 발견한 뒤 경찰의 시선을 끌기 위해 정교한 덫을 설치하는 대목도 몇 수 앞을 내다보는 장기판 고수의 전략처럼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특히 범인을 옭아매기 위해 최전방에 투입된 막내 시즈나가 감정적으로 흔들리며 작전을 위태롭게 만드는 대목에선 히가시노 게이고 특유의 미스터리에 깃든 애틋함과 휴머니즘을 만끽할 수 있어서 그의 팬들에겐 익숙하면서도 반가운 장면들입니다.

 

막판 반전이 확실해 보인 탓에 독자는 3남매가 지목한 범인 외에 또 다른 누군가를 염두에 두고 책장을 넘기게 됩니다. 하지만 진범 후보로 여길 만한 인물이 별로 없어서 오히려 더 긴장하게 되고 단어 하나 문장 한 줄에도 집중하게 됩니다. 이러다가 애초 지목된 자가 진짜 범인이 아닐까, 싶기도 할 정도로 말입니다. 개인적으로 진범으로 점찍은 인물이 있었는데, 예상대로 틀리긴 했지만 그 인물이 범인이었다고 해도 반전의 맛은 여전했을 거란 생각입니다. 말하자면 누가 범인?’보다는 사연자체가 더 중요한 미스터리라고 할까요?

 

막판에 드러난 진실을 놓고 독자에 따라 쉽고 밍밍한 미스터리로 폄하할 수도 있지만, 히가시노 게이고는 가가 형사 시리즈에서 맛볼 수 있었던 애틋하고 서글픈 서사를 곁들임으로써 조금은 아쉬워보였던 미스터리를 모자라지 않게 보완해줍니다. 또 쉽고 평이한 문장들 때문에 다소 가볍게 읽히는 게 히가시노 게이고의 특징 중 하나지만,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유성의 인연역시 죄다 뜯어놓고 분석해보면 소품 하나, 단어 하나, 감정 하나까지 무척 정교하고 치밀하게 배치된, 그래서 그의 저력이 여실히 배어있는 작품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부모가 살해당하고 세상에 내동댕이쳐진 3남매의 비극이 그려진 초반만 해도 왠지 백야행을 닮은 작품이 아닐까, 기대했던 게 사실인데, 그 기대가 충족되지 않은 건 무척 아쉬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성의 인연딱 히가시노 게이고답다!”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매력적인 작품이라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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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아몬드가 아니면 죽음을 스토리콜렉터 99
제프 린지 지음, 고유경 옮김 / 북로드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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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존하는 최고의 도둑을 자처하는 라일리 울프는 천재적인 절도범이자 화려한 곡예로 빌딩 숲을 활주하는 파쿠르(Parkour) 실력자이면서 필요할 땐 살인도 서슴지 않는 냉혹한 킬러다. ‘21세기의 뤼팽이라 할 그의 목표는 상류층이다. 부도덕한 부자들로부터 그들이 목숨처럼 귀중하게 여기는 무언가를 빼앗는 행위 자체가 라일리에게는 쾌감의 원천이다. 그런 라일리 울프의 눈에 이란 황실의 보물, ‘빛의 바다라는 별명을 가진 세계 최대의 핑크 다이아몬드 다리야에누르가 들어온다. 미국과 이란의 관계 개선을 위한 국보 상호교환 전시로 다리야에누르가 미국에 온다는 정보를 입수한 그는 직접 테헤란까지 날아가 다이아몬드를 보고 완전히 매료되어 그것을 훔치기로 결심한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헌신적이고 친절하고 달콤한 킬러덱스터 모건을 앞세운 덱스터 시리즈로 잘 알려진 제프 린지(Jeff Lindsay, 한국에 출간된 덱스터 시리즈에는 제프 린제이로 표기됨)가 이번에는 천재적인 대도(大盜) 라일리 울프라는 캐릭터를 창조했습니다. 백주대낮에 12.5톤에 달하는 동상을 태연히 훔칠 정도로 대담한 라일리는 언뜻 덱스터와 닮은꼴로 보입니다.

끔찍한 흉악범들을 가차 없이 처단하긴 하지만 그 동기가 정의감과는 전혀 무관한, 즉 대상이 흉악범일 뿐 실은 세상에 둘도 없는 잔혹한 소시오패스가 덱스터라면, 라일리는 부도덕한 부유층을 노리긴 하지만 부의 공평한 분배나 사회적 정의와는 거리가 먼, 어찌 보면 개인적인 복수 같기도, 달리 보면 돈 그 자체를 위한 게임 같기도 한 이중적 태도를 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필요하다면 살인도 마다하지 않는 대목에선 덱스터 못잖은 소시오패스 기질까지 엿보입니다. 요약하자면 천재적인 도둑 재능까지 갖추게 된 덱스터라고 할까요?

 

라일리의 가장 큰 고민은 모든 일이 너무 쉽다는 점입니다. 그러니 수많은 사람 앞에서 초대형 동상을 훔치고도 보람도 자부심도 못 느꼈던 건데, 그런 그에게 도전욕구를 불지른 것이 바로 이란 황실의 보물 다리야에누르입니다. 150억 달러라는 천문학적 가치뿐 아니라 보석으로서의 최고의 아름다움까지 지닌 다리야에누르는 가히 라일리가 탐낼 만한 명품이었습니다.

하지만 보석 자체보다 라일리를 들끓게 만든 건 철벽과도 같은 보안시스템입니다. 최첨단 장비에 전직 특수부대원으로 구성된 용병과 이란 혁명수비대까지 가세한 탓에 성공 가능성은 0.0001%도 채 되지 않아 보입니다. 흥분지수가 최고조로 올랐던 라일리가 절망에 사로잡힌 건 이 때문입니다. 결국 그가 선택한 건 한 편의 복잡한 플롯의 영화 시나리오와도 같은, 그래서 자신의 재능을 몇 배 이상 발휘해야 하고 그만큼의 행운까지 따라줘야만 하는 고난이도의 전략입니다. ‘누구도 예상할 수 없는 치명적인 침입 작전이라고 할까요?

 

이야기의 또 다른 축은 라일리를 쫓는 FBI요원 프랭크 델가도의 추격전입니다. 라일리의 본명도 얼굴도 모르지만 오직 그를 체포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는 델가도의 집착은 그가 유능한 요원이 아니었다면 진작 FBI에서 쫓겨나고도 남을 만큼 강박에 가깝습니다. 이란 황실의 보물이 라일리의 다음 타깃이라고 확신하지만 끝내 상부를 설득하지 못한 델가도는 휴가를 내고 개인적으로 라일리에 대해 조사하기로 결심합니다. 그리고 미약한 단서들을 쫓아 라일리의 유년기부터 파헤치기 시작합니다. 말하자면 독자는 델가도의 행보를 통해 라일리의 개인사와 가족사, 특히 그를 대도이자 소시오패스로 성장하게 만든 비극들을 접하게 됩니다.

 

요약하면 보물 하나 훔치는 이야기지만 역시 덱스터 시리즈의 창조자답게 작가는 흥미진진한 케이퍼 스릴러를 완성시켰습니다. 다만 이야기는 그리 복잡하지 않고, 희대의 도둑질 자체도 (준비과정은 엄청 치밀하고 정교했지만) 뒤통수를 치는 맛이 강렬하지 못합니다. 가장 아쉬웠던 건 주인공 라일리의 캐릭터인데, 필요에 따라 살인을 저지르긴 해도 결국엔 도둑이다 보니 주특기(?)가 살인인 덱스터에 비해 말랑말랑해 보인 탓도 있지만, 그보다는 근본적인 의문 도둑질의 동기 혹은 목적은 무엇인가? - 이 제대로 해소되지 않아서 그의 화려한 행적에도 불구하고 깊이 이입할 수 없었던 게 더 큰 이유입니다. FBI요원 델가도에 의해 밝혀진 그의 과거, 즉 평범한 소년이 괴물이 된 과정 역시 그리 매력적이지 않았고, 덱스터와 마찬가지로 라일리도 아버지에게 큰 영향을 받은 걸로 설정돼있지만 무게감이나 충격의 강도는 훨씬 약해 보였습니다. 더불어, ‘정의로운 도둑이 선사하는 쾌감이라곤 전혀 맛볼 수 없는 라일리의 캐릭터는 독자에 따라 비호감으로 여겨질 여지도 많은 게 사실입니다.

 

라일리 울프 시리즈가 계속 이어질지는 잘 모르겠지만, 경찰(탐정)이나 살인자가 주인공인 경우와 달리 도둑의 이야기는, 그것도 라일리 같은 캐릭터의 도둑이라면 다양한 이야기를 펼치기에는 뚜렷한 한계가 있어 보인다는 생각입니다. 또 데뷔작에서처럼 라일리의 캐릭터가 다소 모호하게, 그리고 비호감에 가깝게 그려진다면 계속 지켜보기는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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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팔 세트 - 전2권 왼팔
방진호 지음 / 새파란상상(파란미디어)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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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서점의 소개글에 따르면 방진호는 하드보일드 누아르 소설 분야에서 전설적 마니아층을 거느린 작가입니다. 그의 작품을 처음 접한 건 2018년이었는데, 엄청난 살상력을 지니고 있지만 동시에 소심한 공처가이기도 한 살인청부업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방의강 시리즈의 네 번째 작품 죽어도 되는 아이를 통해서입니다. 이후 앞서 발표된 세 작품을 연이어 읽었고, 그 뒤론 신작 소식을 궁금해 하며 기다리게 될 정도로 홀딱 빠져들었습니다.

그러다가 뒤늦게 왼팔을 비롯하여 적잖은 작품이 있는 걸 알게 됐고, 이미 절판되어 중고서점에서밖에 구할 수 없는 (그를 전설적 마니아층을 거느린 작가로 만든) ‘왼팔을 읽게 됐습니다. 더 놀랐던 건 처음 접했을 때 생소한 이름이라 대략 데뷔 5년 안팎의 신인과 중견 사이라고 여겼던 방진호가 왼팔을 처음 출간한 게 2001년이란 점입니다. ‘한국이라는 무대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독특하고 개성 넘치는 액션 스릴러와 피와 뼈가 난무하는 하드보일드 누아르를 구축해온 방진호의 저력을 새삼 깨닫게 됐다고 할까요?

 

왼팔은 독자에 따라 ‘SF 액션 스릴러로 규정할 수도 있는 작품입니다. 1960년대부터 비밀리에 존재해온 국방부 산하의 기관은 각종 실험체를 통해 가공할 인간 살상병기를 만들어왔고, 거기엔 인간과 맹수의 유전자를 조합한 괴수, 좀비처럼 피를 필요로 하며 극강의 재생력까지 지닌 존재, 그리고 흥분이 임계점을 넘으면 온몸이 금속으로 변이하는 괴물에 이르기까지 상상을 뛰어넘는 피조물들이 포함돼있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슬로터라 불리는 그들은 중무장 시 1개 대대와 맞먹을 정도의 살상력을 지니고 있는데, ‘왼팔의 주인공 장도검은 그 슬로터 중에서도 최강의 능력을 지녔던 남자로, 터미네이터는 명함도 못 내밀 정도로 각종 무기가 장착된 기계 팔과 기계 눈을 가진 인물입니다.

 

기관과 그 산하의 연구소가 첨예하게 갈등을 벌이던 10년 전, 장도검은 목숨을 걸고 기관과 대결을 벌인 뒤 그곳을 뛰쳐나왔고, 지금은 연구소출신 주장서가 운영하는 레드아이라는 피자집에 머물고 있습니다. 거구의 몸집에 (기계 눈을 가리기 위해) 늘 선글라스를 끼고 다니는데다 성대가 망가진 탓인지 스피커 소리와도 같은 음성을 내뱉는 등 겉으론 꽤나 위협적인 외모를 지니고 있지만, 실제 그의 직업은 절반쯤은 피자집 종업원이고, 절반쯤은 심부름센터 수준의 의뢰를 받는 소소한 청부업자일 뿐입니다. 하지만 장도검 주위에선 끊임없이 대형 사건들이 터집니다. ‘기관이 파견한 슬로터가 장도검을 제거하기 위해 달려들기도 하고, 봉인해둔 실험체가 탈출하여 끔찍한 사건들을 일으킨 탓에 장도검이 나서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만들어지곤 합니다. 그때마다 방진호 특유의 잔혹한 액션 스릴러와 하드보일드 누아르가 펼쳐지고, 독자는 피와 살이 난무하는 장면들이 내뿜는 쾌감을 만끽하게 됩니다.

 

이런 살벌한 서사를 중화시켜주는 건 피자집 레드아이에서 벌어지는 막간극 같은 코미디입니다. 개인적으론 방의강 시리즈에서 맛봤던 영국식 블랙유머 혹은 촌철살인 같은 독설만큼 짜릿하진 않았지만, ‘기관과 얽힌 쓰라린 과거를 지녔거나 큰 사건에 휘말려 상처를 입었던 인물들이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일상을 살아가며 소박한 코미디를 펼치는 장면들은 딱딱하게 굳을 정도로 힘이 들어갔던 두 어깨를 잠시나마 쉬게 해주는 맛깔난 양념입니다.

또 사방팔방에서 사람이 죽어나가는 사건이 벌어지다 보니 경찰이 등장하지 않을 수 없는데, 서울 중앙서 강력범죄수사팀의 막내형사 이명희(남자형사입니다)는 신경질적인 팀장 주인환과 슬랩스틱 코미디를 연출하면서도 날카로운 관찰력과 행동력을 갖춘데다 장도검 및 레드아이멤버들과 특별한 인연을 맺는 인물이라 등장할 때마다 독자의 흥미를 이끌어냅니다.

 

1~2권 합쳐 9개의 챕터로 구성돼있고, 각 챕터마다 사건이 설정돼있어서 연작단편의 형식이긴 하지만 실은 하나의 이야기로 이어진 장편이나 다름없습니다. 두 권을 합치면 748페이지의 적잖은 분량이지만 워낙 페이지 넘기는 속도가 빨라서 하루 안에 충분히 읽을 수 있습니다. “한국에서 저런 설정이 가능하다고?”라고 반문할 독자도 있겠지만, 그런 반감만 지워낸다면 무척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오락성 강한 액션 스릴러+하드보일드 누아르라서 그쪽으로 관심 있는 독자라면 강력하게 추천하고 싶은 작품입니다.

강렬한 여운과 함께 뒷이야기를 위한 대형 떡밥만 남긴 채 막을 내린 건 무척 아쉬웠지만, 찾아보니 3부작으로 출간된 적경왼팔의 후속작인 것 같아 오늘부터 부지런히 중고서점을 다시 뒤져봐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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