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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사이클롭스 ㅣ 이즈미 로안 시리즈
야마시로 아사코 지음, 김선영 옮김 / 엘릭시르 / 2022년 1월
평점 :
‘나의 사이클롭스’는 ‘엠브리오 기담’(엘릭시르, 2014)에 이은 ‘이즈미 로안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입니다. 오츠이치가 야마시로 아사코라는 필명으로 발표한 에도 시대 배경의 기담집인데, 그의 다른 작품들(‘GOTH’, ‘ZOO’, ‘암흑동화’ 등)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공포 기담을 다루고 있어서 개인적으로 무척 좋아하는 시리즈입니다.
이야기의 큰 뼈대는 여행안내서를 집필하는 작가 이즈미 로안과 그의 짐꾼이자 친구인 미미히코가 유명한 온천과 신사를 여행하며 겪은 기담 혹은 괴담으로 구성돼있습니다. 두 사람의 여정을 담은 ‘엠브리오 기담’과 달리 ‘나의 사이클롭스’에는 로안에게 여행안내서 집필을 의뢰한 서점의 직원인 린이라는 소녀까지 세 명이 등장합니다. 린은 전작인 ‘엠브리오 기담’에도 등장했던 인물로, 한 노파에게 신비한 파란 돌을 선물 받은 뒤 거듭된 삶을 살게 된 기구한 운명의 소유자입니다. 그래선지 이름도 윤회를 뜻하는 린(輪)인데, 이번에는 야무지고 톡톡 쏘는 캐릭터로 등장해서 눈길을 끌기도 했습니다.
‘도중여경’이라는 여행안내서를 집필하는 작가 이즈미 로안은 무척 특이한 인물입니다. 긴 말총머리 때문에 여자로 착각하게 만드는 용모를 지닌 그는 비쩍 마른데다 기운도 없어 보이지만 거칠고 험한 여행길을 그 누구보다 기운차게 걷고, 믿기 힘든 이야기라도 독자의 관심을 끌 수 있다면 그 진위에 관계없이 흥미를 보이며 여행안내서에 수록하곤 합니다.
무엇보다 그의 길치 캐릭터가 가장 돋보이는데, 가령 외길에서조차 길을 잃어버리고, 같은 자리에서 며칠이고 계속 맴돌거나 바다를 건넌 적도 없는데 어느 새 섬에 갇힌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길치 캐릭터는 실은 로안의 신비한 능력입니다. 그것은 (본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공간을 뛰어넘는 능력인데, ‘엠브리오 기담’에서 로안의 프리퀄을 그린 수록작에 따르면 그는 어릴 적부터 그런 능력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또 보통사람 눈엔 보이지 않는 ‘존재’와의 대화도 가능한, 그래서 불가해한 기담과 괴담을 자연스레 받아들이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이런 로안의 캐릭터 덕분에 동행한 미미히코와 린의 여행은 꽤나 고생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툭하면 일행을 놓쳐 홀로 난감한 지경에 처하거나 수시로 기괴하거나 섬뜩한 상황과 맞닥뜨리곤 하는데, 특히 이번 작품에서는 짐꾼인 미미히코가 여러 차례 죽음의 위기에 빠질 정도로 곤혹스러운 여정을 겪습니다. 술과 도박을 좋아하고 나태하기 짝이 없는 인물이라 동생뻘인 린에게 수도 없이 비난과 비아냥을 사는 인물인데, 그런 성격 탓에 화를 자초하기도 하지만 바로 그가 겪은 무수한 ‘화’들이 ‘나의 사이클롭스’의 주된 소재이기도 합니다.
모두 9편의 단편이 실려 있는데, 표제작인 ‘나의 사이클롭스’만 린이 겪은 이야기이고, 나머지는 모두 미미히코가 1인칭 화자로 등장합니다. 외눈박이 거인 사이클롭스의 비극(나의 사이클롭스), 기형아로 태어났거나 네모난 두개골을 지닌 어린 아이들의 안타까운 사연(네모난 두개골과 아이들), 마주치는 모든 걸 모른 척 해야만 무사히 넘을 수 있는 눈가림산의 진실(죽음의 산), 수상한 세 가족과 피비린내 진동하는 저택을 둘러싼 엽기 공포물(폭소의 밤), 오로지 오르막길밖에 없는 산에 갇혀버린 사람들의 이야기(별과 곰의 비극) 등 전작인 ‘엠브리오 기담’ 못잖은 매력적이고 오싹한 기담과 괴담들이 실려 있습니다.
죽어서도 몸에 지닌 열로 마을을 전멸시키는 존재, 생명이 끊어졌지만 여전히 뛰고 있는 심장, 살해당한 사람의 잘린 손가락을 씹거나 핥는 것을 좋아하는 소년, 사람을 바다로 끌어당기는 비취반지 등 기괴하면서도 도발적인 상상력이 돋보이는 설정들은 미야베 미유키의 괴담 시리즈만큼 흥미진진하면서도 야마시로 아사코만의 독특한 개성을 담뿍 담고 있습니다.
실은 가장 기대했던 이야기는 이즈미 로안의 과거사 또는 길치 캐릭터의 진실이었습니다. ‘엠브리오 기담’에서 소개된 그의 프리퀄의 뒷이야기를 기대하기도 했고, 그가 툭하면 길을 잃어버리는 것이 실은 어떤 계기나 의지에 의한 공간 이동임을 밝혀주는 에피소드를 기대하기도 했는데, 아쉽게도 그런 이야기는 없었습니다. 다만, 마지막 수록작인 ‘별과 곰의 비극’에서 그가 자신의 과거, 특히 부모와 관계된 진실을 찾아내겠다고 다짐한 장면은 이어질 후속작에서 어떤 식으로든 연결될 것 같긴 합니다.
또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사건을 일으키거나 사건에 휘말리는 1인칭 화자 역할을 대부분 미미히코가 맡고 있어서 이즈미 로안이 거의 방관자처럼 사건과 거리를 두고 있다는 점입니다. 물론 결정적인 순간마다 해법을 제공하거나 사건을 종결하기도 하지만 그만의 이야기가 눈에 띄지 않은 건 무척 아쉬웠습니다.
일본 출간기준으로 ‘엠브리오 기담’은 2012년, ‘나의 사이클롭스’는 2016년에 출간됐습니다. 6년이나 지났으니 후속작이 나올 때가 된 것 같은데, 이즈미 로안의 과거와 비밀이 궁금한 독자로서 하루라도 빨리 후속작 소식이 들려오길 바랄 뿐입니다. 기다리는 동안 현대를 배경으로 삼은 야마시로 아사코의 호러물 ‘내 머리가 정상이라면’(작가정신, 2019)부터 찾아 읽어보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