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이클롭스 이즈미 로안 시리즈
야마시로 아사코 지음, 김선영 옮김 / 엘릭시르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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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사이클롭스엠브리오 기담’(엘릭시르, 2014)에 이은 이즈미 로안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입니다. 오츠이치가 야마시로 아사코라는 필명으로 발표한 에도 시대 배경의 기담집인데, 그의 다른 작품들(‘GOTH’, ‘ZOO’, ‘암흑동화)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공포 기담을 다루고 있어서 개인적으로 무척 좋아하는 시리즈입니다.

이야기의 큰 뼈대는 여행안내서를 집필하는 작가 이즈미 로안과 그의 짐꾼이자 친구인 미미히코가 유명한 온천과 신사를 여행하며 겪은 기담 혹은 괴담으로 구성돼있습니다. 두 사람의 여정을 담은 엠브리오 기담과 달리 나의 사이클롭스에는 로안에게 여행안내서 집필을 의뢰한 서점의 직원인 린이라는 소녀까지 세 명이 등장합니다. 린은 전작인 엠브리오 기담에도 등장했던 인물로, 한 노파에게 신비한 파란 돌을 선물 받은 뒤 거듭된 삶을 살게 된 기구한 운명의 소유자입니다. 그래선지 이름도 윤회를 뜻하는 린()인데, 이번에는 야무지고 톡톡 쏘는 캐릭터로 등장해서 눈길을 끌기도 했습니다.

 

도중여경이라는 여행안내서를 집필하는 작가 이즈미 로안은 무척 특이한 인물입니다. 긴 말총머리 때문에 여자로 착각하게 만드는 용모를 지닌 그는 비쩍 마른데다 기운도 없어 보이지만 거칠고 험한 여행길을 그 누구보다 기운차게 걷고, 믿기 힘든 이야기라도 독자의 관심을 끌 수 있다면 그 진위에 관계없이 흥미를 보이며 여행안내서에 수록하곤 합니다.

무엇보다 그의 길치 캐릭터가 가장 돋보이는데, 가령 외길에서조차 길을 잃어버리고, 같은 자리에서 며칠이고 계속 맴돌거나 바다를 건넌 적도 없는데 어느 새 섬에 갇힌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길치 캐릭터는 실은 로안의 신비한 능력입니다. 그것은 (본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공간을 뛰어넘는 능력인데, ‘엠브리오 기담에서 로안의 프리퀄을 그린 수록작에 따르면 그는 어릴 적부터 그런 능력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또 보통사람 눈엔 보이지 않는 존재와의 대화도 가능한, 그래서 불가해한 기담과 괴담을 자연스레 받아들이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이런 로안의 캐릭터 덕분에 동행한 미미히코와 린의 여행은 꽤나 고생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툭하면 일행을 놓쳐 홀로 난감한 지경에 처하거나 수시로 기괴하거나 섬뜩한 상황과 맞닥뜨리곤 하는데, 특히 이번 작품에서는 짐꾼인 미미히코가 여러 차례 죽음의 위기에 빠질 정도로 곤혹스러운 여정을 겪습니다. 술과 도박을 좋아하고 나태하기 짝이 없는 인물이라 동생뻘인 린에게 수도 없이 비난과 비아냥을 사는 인물인데, 그런 성격 탓에 화를 자초하기도 하지만 바로 그가 겪은 무수한 들이 나의 사이클롭스의 주된 소재이기도 합니다.

 

모두 9편의 단편이 실려 있는데, 표제작인 나의 사이클롭스만 린이 겪은 이야기이고, 나머지는 모두 미미히코가 1인칭 화자로 등장합니다. 외눈박이 거인 사이클롭스의 비극(나의 사이클롭스), 기형아로 태어났거나 네모난 두개골을 지닌 어린 아이들의 안타까운 사연(네모난 두개골과 아이들), 마주치는 모든 걸 모른 척 해야만 무사히 넘을 수 있는 눈가림산의 진실(죽음의 산), 수상한 세 가족과 피비린내 진동하는 저택을 둘러싼 엽기 공포물(폭소의 밤), 오로지 오르막길밖에 없는 산에 갇혀버린 사람들의 이야기(별과 곰의 비극) 등 전작인 엠브리오 기담못잖은 매력적이고 오싹한 기담과 괴담들이 실려 있습니다.

죽어서도 몸에 지닌 열로 마을을 전멸시키는 존재, 생명이 끊어졌지만 여전히 뛰고 있는 심장, 살해당한 사람의 잘린 손가락을 씹거나 핥는 것을 좋아하는 소년, 사람을 바다로 끌어당기는 비취반지 등 기괴하면서도 도발적인 상상력이 돋보이는 설정들은 미야베 미유키의 괴담 시리즈만큼 흥미진진하면서도 야마시로 아사코만의 독특한 개성을 담뿍 담고 있습니다.

 

실은 가장 기대했던 이야기는 이즈미 로안의 과거사 또는 길치 캐릭터의 진실이었습니다. ‘엠브리오 기담에서 소개된 그의 프리퀄의 뒷이야기를 기대하기도 했고, 그가 툭하면 길을 잃어버리는 것이 실은 어떤 계기나 의지에 의한 공간 이동임을 밝혀주는 에피소드를 기대하기도 했는데, 아쉽게도 그런 이야기는 없었습니다. 다만, 마지막 수록작인 별과 곰의 비극에서 그가 자신의 과거, 특히 부모와 관계된 진실을 찾아내겠다고 다짐한 장면은 이어질 후속작에서 어떤 식으로든 연결될 것 같긴 합니다.

또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사건을 일으키거나 사건에 휘말리는 1인칭 화자 역할을 대부분 미미히코가 맡고 있어서 이즈미 로안이 거의 방관자처럼 사건과 거리를 두고 있다는 점입니다. 물론 결정적인 순간마다 해법을 제공하거나 사건을 종결하기도 하지만 그만의 이야기가 눈에 띄지 않은 건 무척 아쉬웠습니다.

 

일본 출간기준으로 엠브리오 기담2012, ‘나의 사이클롭스2016년에 출간됐습니다. 6년이나 지났으니 후속작이 나올 때가 된 것 같은데, 이즈미 로안의 과거와 비밀이 궁금한 독자로서 하루라도 빨리 후속작 소식이 들려오길 바랄 뿐입니다. 기다리는 동안 현대를 배경으로 삼은 야마시로 아사코의 호러물 내 머리가 정상이라면’(작가정신, 2019)부터 찾아 읽어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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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피아가 여자들
파스칼 디에트리슈 지음, 윤진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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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남동부 그르노블을 무대로 마피아 집안의 세 모녀의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대부 레오네의 아내이자 명예 마피아인 어머니 미셸, 아버지와 마피아에 대한 반감으로 인도주의 단체에서 일하는 장녀 디나, 현대적인 방식으로 가업을 이어가려는 차세대 보스 후보 차녀 알레시아. 어느 날, 알츠하이머를 앓던 남편 레오네가 갑자기 혼수상태에 빠지지만 미셸은 그 사실보다도 남편이 사전에 써놓은 편지 때문에 더 큰 충격에 빠집니다. 그 편지엔 레오네가 자신을 배신한 아내 미셸을 죽이기 위해 킬러를 고용했으며, 조만간 그가 미셸의 숨통을 끊기 위해 방문할 거라고 적혀있었기 때문입니다. 미셸은 두 딸과 함께 킬러의 정체를 밝히고 살해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분투합니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마피아를 소재로 삼은 작품들은 매체를 불문하고 예외 없이 남성 중심의 서사를 펼치기 마련입니다. 비장미 넘치는 영웅도, 차기 보스를 노리는 야심가도, 심지어 사업에서든 권력투쟁에서든 덜 떨어진 모습을 보이는 조연이나 그저 총알 세례 장면을 위해 동원된 단역들조차 모조리 남자들의 몫입니다. 여자들은 무기력하거나 순종적이거나 성적 대상이거나 잘 해야 알코올이나 마약에 중독된 채 무의미한 저항을 하는 게 전부였습니다.

그런 점에서 제목에서부터 도발적인 기운을 감추지 않은 마피아가 여자들은 기존의 마피아 물과는 정반대의 성 역할을 기대하게 만든 작품이었습니다. 실제로 이야기를 끌고 가는 건 혼수상태에 빠진 마피아 대부의 아내와 두 딸인데, 그녀들은 마피아 세계에서 여자들이 스스로 선택하거나 억지로 강요당할 수 있는 몇몇 삶의 방식을 사실감 있게 대변하고 있습니다.

 

대부의 아내인 미셸은 마피아의 여자로서의 소극적인 역할을 수긍한 채 살아온 인물입니다. 낭만적이지만 갑자기 폭력적으로 돌변하는 남편에게 평생 순종해왔고, 마피아가 제공한 부유한 삶도 별 거부감 없이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마피아 아내들이 뜻을 모으면 얼마든지 남편들을 구워삶을 수 있다는 것도 경험적으로 깨달은 인물입니다.

장녀 디나는 어려서부터 아버지와 마피아에 대한 반감에 사로잡혔고, 그로 인해 보란 듯이 인도주의 단체에서 활동하지만, 실은 마피아와 인도주의 단체가 이복형제란 사실을 깨닫곤 좌절감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아내를 죽이기 위해 킬러를 고용한 아버지를 혐오하지만, 똑같은 폭력적인 방식으로 대응하려는 동생 알레시아 역시 불편하게만 여겨질 뿐입니다.

약국을 운영하며 몰래 마약을 판매하고 돈 세탁을 일삼는 차녀 알레시아는 차세대 그르노블 마피아 보스 자리를 넘보는 야심찬 여성입니다. 기존의 마피아 서사에서는 보기 힘들었던 적극적이고 주체적인 캐릭터로, 마지막까지 멍청한 남자들 대신 새롭고 현대적인 방식으로 마피아를 이끌고 갈 여자들의 역할을 모색하는 인물입니다.

 

띠지에 인쇄된 낡은 전통과 침묵의 규율을 깨부수는 짜릿하고 통쾌한 코믹-여성-누아르!”라는 카피는 절반쯤은 맞고 절반쯤은 과장됐다는 게 개인적인 의견인데, 짜릿함과 통쾌함에 대해선 기대치를 너무 높게 가져선 안 되고, 코믹은 그다지 찾아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판타지 같은 남성 중심의 마피아 서사와 달리 차분하면서도 사실감 넘치는 여성 마피아 스릴러라는 카피가 더 어울려 보입니다. 미셸을 살해하기 위해 고용된 청부살인업자의 정체가 밝혀지는 대목이나 알레시아가 경쟁자들을 제거하고 차세대 보스 자리를 노리는 과정은 딱히 놀라운 반전이나 흥분을 일으키는 화려한 액션과는 거리가 멉니다. 하지만 총격전 외엔 별로 기억에 남는 것이 없는 남성 마피아 서사에 비하면 훨씬 더 리얼하고 그럴듯하게 다가왔고, 이후의 이야기를 궁금하게 만드는 매력도 지니고 있습니다.

 

마피아가 여자들을 포함하여 파리의 대마초 여인’, ‘포커 플레이어 그녀등 최근 들어 프랑스 미스터리 스릴러를 무척 재미있게 읽었는데, 쓸데없이 어렵게 이야기를 풀거나 과장되게 폼만 잡는다고 여겼던 프랑스 작품들에 대한 선입견을 시원하게 날려줄 만큼 매력적이어서 앞으로도 계속 관심을 가져보려고 합니다. 저와 그다지 코드가 잘 안 맞는다고 생각한 기욤 뮈소의 신작 센 강의 이름 모를 여인을 곧 읽을 예정인데, 과연 기욤 뮈소마저도 기대 이상의 만족감을 전해줄지 사뭇 궁금해질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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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을 먹다 - 제13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김진규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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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을 먹다200713회 문학동네 소설상수상작입니다. 출간 즈음에 읽었으니 대략 14년 만에 다시 만난 셈인데, 최근 오랫동안 책장에 방치돼있던 책들을 골라내다가 유독 달을 먹다에 시선이 머문 건 당시 꽤 파격적이란 느낌과 함께 깊은 여운을 만끽했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서평을 쓰지 않던 시절이라 부분적인 기억만 남은 것도 호기심을 자극한 이유 중 하나인데, 결론부터 말하면 달을 먹다는 캐릭터, 이야기, 시대적 배경, 그리고 간결하고 단정한 문장 속에 깃든 서늘함과 애틋함에 이르기까지 반드시 주목받았어야 할 작품이란 생각입니다.

 

정조와 순조의 시대를 배경으로 삼고 있으니 역사소설인 건 분명하지만, 실은 이 작품에서 역사는 치명적인 사랑 이야기의 순도와 위기감을 고조시킬 뿐 그 자체로서는 별 의미가 없습니다. 네 가문의 3대에 걸친 욕망과 사랑에 관한 이야기는 무대를 현대로 바꿔도 무방할 만큼 보편적인 인물과 감정을 그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역사소설이라는 외피는 독자로 하여금 똑같은 금지된 사랑이라 하더라도 엄격한 법도와 완강한 신분질서가 작동하던 그 시절이라서 더욱 불온하고 위험하고 절실하게 느껴지도록 설치된 일종의 보조장치라고 할까요?

 

이야기는 크게 두 갈래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무능하거나 비겁하거나 가부장적인 권위만 앞세우는 남자들의 권세와 허영 속에서 맥없이 시들거나 분노만 삼킬 뿐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거나 굳은 심지로 자신의 입지를 지키는 여러 여성들의 삶의 모습입니다. 호색한에 난봉꾼이던 아버지를 증오한 나머지 시집간 뒤에도 반골 기질을 숨기지 못하는 묘연, 서녀로 태어났음에도 양반처럼 애지중지 키워졌지만 결국 중인의 첩으로 들어가 비극적인 삶을 살아야 했던 하연, 첫 아이를 유산한 뒤 피폐한 삶을 살다가 가까스로 딸을 낳았지만 아무런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한 채 점차 나락으로 떨어지는 후인, 어머니가 외간남자와 눈이 맞아 집을 나간 뒤 무책임한 부성의 굴레에 갇혀 살다가 끝내 파국을 맞이하고 마는 향이 등이 그녀들입니다.

 

또 하나는 지독히도 비극적인 여러 커플의 사랑 이야기입니다. 다리를 저는 12살 소녀에게 반했지만 어머니의 반대로 다른 여자와 결혼한 뒤 폐인에 이르고 만 여문, 학대에 가까운 남편의 태도에 지쳐 모든 것을 놓고 싶어 하는 15살 연상의 여자를 흠모한 나머지 그녀를 훔쳐 달아나는 후평, 그리고 이 작품에서 가장 두꺼운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신분이 다른 이종사촌 간의 금지된 사랑이 그것입니다. 이른바 막장에 가까운 설정이지만 작가 특유의 담담하고 서정성 높은 문장과 역사소설이라는 외피 덕분에 오히려 애틋함과 안쓰러움이 돋보인 이야기입니다.

 

사실 달을 먹다는 독자에게 결코 친절한 작품이 아닙니다. 간결하고 단정하지만 서늘함과 애틋함이 깃든 문장들은 베껴 쓰고 싶을 정도로 매력적이지만, 화자는 10명 가까이나 되고, 또 그들이 특별한 경계(줄바꿈이나 챕터 바꾸기)도 없이 시공간을 수시로 바꿔가며 이야기를 풀어놓는 구성은 꽤 혼란스럽기 때문입니다. 심사평 중에 가문의 가계도를 그려놓고 줄을 그어가며 읽어야라든가 “3대에 걸친 욕망과 사랑의 퍼즐 맞추기같은 표현이 등장하는 건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그래서 페이지는 느리게 넘어갈 수밖에 없고, 지금 읽고 있는 대목이 앞의 어느 부분과 연결된 이야기인지를 세세히 살피며 읽어야만 합니다. 독서 스타일이 안 맞는 독자라면 다소 짜증이 날 수밖에 없는 구성이지만, 반대로 이 작품만의 독특함이자 매력인 것 역시 사실입니다.

 

달을 먹다에 홀딱 반한 나머지 김진규의 다음 작품인 남촌 공생원 마나님의 280’(2009)까지 내쳐 읽었다가 (재미있긴 했지만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인지) 조금은 실망했던 기억이 남아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 달을 먹다의 서평을 쓰기 위해 인터넷서점을 방문했다가 알게 된 더 안타까운 사실은 그 이후 출간된 저승차사 화율의 마지막 선택’(2010)을 끝으로 김진규의 작품이 더는 나오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감정을 후벼 파면서도 절대 오버하지 않는 문장들, 영국식 블랙유머를 연상시키는 촌철살인 같은 독설, 침향과 꽃차와 자수(刺繡) 등 온갖 시각적인 즐거움을 안겨주는 매력적인 묘사에 이르기까지 개인적인 취향을 넘어 장점과 미덕이 많은 작가로 여겼기에 10년 넘게 무소식인 김진규의 새 이야기가 더 안타까울 뿐입니다. 절필이 아니라면 언젠가는 새 작품으로 독자들과 꼭 다시 만나기를 기대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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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하는 소녀와 축제의 밤
아키타케 사라다 지음, 김은모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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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교교사 사카구치, 2학년생 이토카와, 1학년생 아사이. 이들은 하나같이 현실에서는 일어날 리 없는 괴이한 현상을 목격하거나 그로 인해 죽음의 위기에까지 몰린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평범해 보이지만 어딘가 남다른 분위기를 지닌 2학년생 마쓰리비 사야의 도움으로 각자의 위기에서 벗어난 바 있습니다. 남들 눈에는 보이지 않는 새와 대화를 나누며 각종 기담과 괴담을 전해들은 오빠 덕분에 사야는 어린 시절부터 보통사람은 알 수 없는 괴이한 현상들에 대해 익숙했고, 그 지식을 활용하여 위기에 처한 세 사람을 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사야가 어느 날 세 사람에게 도움을 청합니다. 마을 축제날 밤에 모습을 드러낸다는 전설의 마물로부터 오빠를 구해달라는 것입니다. 마물에게 잡아먹히기로 돼있는오빠를 구하려면 누군가 미끼가 되어 밤새 마물을 유인해야 한다는 말과 함께 말입니다.

 

호러 마니아는 아니지만 그래도 늘 관심을 두고 흥미로운 설정이나 캐릭터가 눈에 띄면 찾아 읽는 편입니다. ‘후회하는 소녀와 축제의 밤은 공포 그 자체보다는 그것을 기반으로 애틋함 가득한 서사를 일궈낸 독특한 작품입니다. 호러지만 따뜻한 여운을 남긴다고 할까요? 괴이한 현상에 시달리다가 마쓰리비 사야의 도움 덕분에 위기에서 벗어나는 세 사람의 사연이 앞의 세 챕터를 통해 소개되고, 이어 마지막 챕터인 축제날 밤에는 사야의 오빠를 구하기 위해 마물과 맞서는 사야와 세 사람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세 사람이 맞닥뜨린 괴이한 현상은 특별하거나 새롭다고 할 순 없지만 꽤 흥미롭게 설정돼있습니다. 길쭉한 팔과 노랗게 빛나는 눈을 지닌 채 수상한 소리를 내며 낡은 학교건물의 마루판을 뒤집는 그것’, 막힌 공간에서도 자유자재로 출몰하는 어른 팔뚝만한 지네 니지리무시’, 그리고 인간이 원하는 것을 제공하곤 10년 후 그 대가로 그()의 몸을 회수해가는 기괴한 남자 시게토라등 미야베 미유키와 미쓰다 신조의 괴담을 떠올리게 하는 매력적인 이물(異物)들이 등장합니다. 심하게는 죽음의 위기까지 실감한 적 있는 세 사람은 때마침 도움의 손길을 내민 사야 덕분에 평온한 일상을 되찾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경험들 때문에 누구도 믿지 않을 기담과 괴담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됐고, 보통사람이라면 코웃음 쳤을 사야의 간절한 부탁 축제날 밤에 나타나 오빠를 잡아먹을 마물을 유인하는 미끼가 되어 달라는 - 을 흔쾌히 수락하게 됩니다.

 

중반부쯤 시작되는 사야와 세 사람의 마물 유인작전까지는 일반적인 호러물의 공식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이후로는 뜻밖의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앞서 언급한대로 애틋함 가득한 서사가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기 시작합니다. 특히 사야가 작전 자체에 관해, 또 마물에게 잡아먹힐 예정인 오빠에 대해 솔직히 털어놓지 않은 점을 간파한 사카구치는 수학교사답게 논리적인 추리를 벌여 사야가 감춘 충격적인 비밀을 알아냅니다. 그리고 그 지점부터 마물을 유인하는 작전은 전혀 다른 양상을 띠기 시작합니다.

 

이 작품의 원제는 祭火小夜後悔’, 마쓰리비 사야의 후회입니다. 오빠를 마물로부터 지켜내려는 사야의 회한 가득한 감정도 후회이고, 그녀가 감춘 비밀을 알아낸 사카구치가 자신만의 또 다른 작전을 감행하기로 결심한 감정도 후회입니다. 위기일발의 마물 유인작전이 애틋함 가득한 서사, 또는 역자 후기의 부제대로 공포소설에 서정성을 더한 색다른 시도로 읽힐 수밖에 없는 건 바로 이런 설정 때문입니다. 이질적인 두 개의 서사가 뒤섞였지만, 그 덕분에 특별하고 묘한 여운을 만끽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제대로 무서운 호러를 기대한 독자에겐 다소 심심하게 읽힐 수도 있지만, 애틋함과 서정성이 깃든 호러에 관심이 발동한 독자라면 무척 흥미롭게 다가올 수 있는 작품입니다. 일본에서는 후속작인 祭火小夜再会’(마쓰리비 사야의 재회, 2020)가 출간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고 하는데, 한국에서도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을지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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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에 빠진 소녀들
로레스 앤 화이트 지음, 김민성 옮김 / 서울문화사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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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혹하게 살해된 소녀들의 시신이 공동묘지와 해안 협곡에서 연이어 발견됩니다. 동일범의 소행으로 보이는 성폭행과 시신 훼손 흔적은 너무나도 끔찍했고, 이 사건에 투입된 캐나다 빅토리아 시경 성범죄 수사반의 앤지 팔로리노는 더 큰 충격에 빠집니다. 과거 자신이 맡았지만 결국 미제로 남고 만 성폭행 사건과 너무나도 닮은꼴이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 유일하게 자신을 이해해주던 파트너를 사건현장에서 잃었던 앤지는 여전히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지만 어떻게든 이 가공할 살인자를 붙잡기 위해 전력을 다합니다. 하지만 새로 파트너가 된 제임스 매덕스 때문에 그녀의 머리는 복잡할 따름입니다. 전날 밤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절대 잊지 못할 첫 인사를 나눴던 탓입니다. 눈앞의 사건도 중요하지만 두 사람은 서로에게 촉각을 곤두세우며 과연 자신의 등을 맡길 수 있는 파트너인지 신중하게 관찰합니다.

 

여러 가지 이유로 눈길을 끈 작품입니다. 19금 판정을 받았고, 낯선 작가인데다 배경은 캐나다 서부 빅토리아이며 무려 776페이지의 벽돌책이기 때문입니다. 두께의 부담감 때문에 읽을까 말까 고민되기도 했지만, 첫 장을 펼쳐보니 조금만 빡빡하게 편집됐더라면 100페이지 정도는 줄어들고도 남을 만큼 꽤 여유있는 여백이 눈에 띄어서 마음의 부담을 덜 수 있었습니다.

분량에 비해 큰 얼개는 단순합니다. 극단적인 성격을 지닌 남녀 파트너 형사가 우여곡절 끝에 희대의 연쇄 강간살인마를 추격하는 이야기가 메인이고, 앤지의 개인적인 비극 유전으로 물려받은 환각과 환청과 섬망, 그리고 어린 시절에 당한 교통사고의 기억 과 함께 파트너 매덕스와의 복잡미묘한 감정 주고받기가 그 아래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 작품 속 연쇄살인마는 그야말로 전대미문의 악마입니다. 그는 나쁜 아이들을 구원한다.”는 집착에 사로잡혀 피해자들을 폭력적으로 성폭행한 뒤 세례와 정화를 위해 물에 빠뜨려 익사시키곤 오로지 성적 쾌감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신체 기관을 칼로 훼손하고 이마에 십자가 표식을 새겨놓습니다. 이상성욕에 사로잡힌 사탄이라고 할까요?

앤지가 이 범인에게 더욱 집착하는 이유는 과거에 같은 방식으로 소녀들을 성폭행했던 범인과 동일범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당시엔 살인이나 신체훼손까지 이르진 않았지만 범행방식만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 범인을 체포하지 못한 탓에 사악한 연쇄살인마로 진화하게 만들었다는 죄책감은 앤지로 하여금 더욱 폭주하게 만드는 가장 큰 원동력입니다.

 

하지만 잔혹한 범행 자체보다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는 건 여주인공 앤지의 캐릭터입니다. 10여 년의 커리어 중 6년을 성범죄 수사반에서 보낸 앤지는 주위에서 남성혐오자”, “미친년소리를 밥 먹듯 듣는 인물입니다. 수시로 분노조절장애 수준의 감정을 표출하면서 자기 주위에 철벽을 쳐놓은 탓에 그녀에겐 아군이 거의 없습니다. 유일한 아군이었던 파트너를 얼마 전 사건현장에서 잃은 뒤 더욱 더 심연 속으로 가라앉은 그녀가 선택한 극단적인 치유법은 익명의 섹스입니다. 변두리 클럽에서 마음에 드는 남자를 사냥한 뒤 모텔로 데려가 거친 방법으로 원나잇 스탠드를 즐기는 것입니다. 성범죄 수사를 하며 자연스럽게 몸에 밴 남성들에 대한 반감을 자신이 주도하는 거칠고 폭력적인 섹스를 통해 보상받으려는 것입니다. 낮에는 강력반 승진을 꿈꾸며 악랄한 성범죄자들을 쫓는 유능한 여형사지만, 밤만 되면 그런 식으로밖에 스스로를 달래지 못하는 앤지의 모습은 오히려 안쓰러움과 애틋함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런 앤지에게 전혀 낯선 감정을 자아내는 게 새로 파트너가 된 제임스 매덕스입니다. 경력으로 보나 실적으로 보나 관리직급에 어울리는 그는 오로지 딸과 가까운 곳에 있고 싶어 변방이나 다름없는 빅토리아 시경으로의 전출을 요구했고, 낙하산이라는 비아냥을 감수하고 오로지 연쇄살인마 체포에 전력을 다합니다. 예기치 못한 방식으로 앤지와 처음 만났던 매덕스는 누구도 가까이 하고 싶어 하지 않는 그녀에게서 복잡미묘한 감정을 느낍니다. 그리고 앤지의 고통스러운 비밀과 과거사를 공유한 뒤로는 어떻게든 그녀를 돕고자 애를 씁니다.

 

분량에 비해 사건 자체가 단순하기도 하지만, 그 해법 역시 딱히 뛰어난 추리나 충격적인 반전을 보여주진 않습니다. 집요한 탐문이 대부분이고 결정적 단서도 딱히 어렵지 않게 주인공들 앞에 나타납니다. 또 사건의 외양을 키우기 위해 꽤 많은 인물들을 등장시켰지만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채 변죽만 울리다 만 느낌이 강했는데, 특히 악의 배후처럼 활약할 것 같았던 몇몇 인물은 그저 병풍노릇만 하다가 별 역할도 없이 퇴장해버리곤 해서 무척 실망스러웠습니다. 아마 두 주인공 앤지와 매덕스의 매력이 아니었다면 700페이지가 훌쩍 넘는 다소 단순하고 뻔한 미스터리를 절반도 채 견뎌내진 못했을 것입니다.

 

이력만 보면 로레스 앤 화이트는 로맨틱 서스펜스 혹은 로맨틱 스릴러에 특화된 작가로 보입니다. 앤지와 매덕스의 복잡한 감정을 다룬 장면들이 매력적으로 읽힌 건 아마도 작가의 이런 전문성 때문으로 보이는데, 분량에 어울리는 미스터리가 동반됐더라면 별 5개도 모자란 작품이 됐을 거란 생각입니다. 마지막에 앤지와 매덕스가 후속작에서 맞닥뜨릴 사건의 예고편이 제시됐는데, 한국에 소개될지는 아직 미지수지만 두 사람의 캐릭터 때문에라도 일단 찾아 읽을 것 같긴 합니다. 다만 이번 작품처럼 미스터리가 허술하고 단순하다면 그 뒤는 기약하기 어려울 것 같지만 말입니다.

 

사족으로, 이 작가가 ‘J’로 시작하는 이름을 무척 좋아하는 듯한데, 엇비슷한 이름들 때문에 읽는 내내 꽤나 혼란스러웠습니다. 잭 킬리언, 잭 버지악, 잭 오(반려견), 재크스, 재크 래디슨, 제이든 등이 그들인데 왜 굳이 이런 식으로 이름을 지었는지 정말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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